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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되살아나는 섬

2012.03.31 07:2003.31




되살아나는 섬




  “좀 걷지 않을래?”
   동호회 후배가 “네”라고 들릴락 말락 하게 답했기 때문에 공대생은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나온 술집에서 화장실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소변을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공대생과 여자 후배는 장식 없이 수수한 서강대 정문을 지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고, 오르막길을 걷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뽑았다. 메리홀을 지날 때 여자아이가 “오빠, 뭐 할 얘기가 있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기대감보다는 ‘저 오늘 집에 일찍 가야 해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해 공대생은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돼.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셈이야?
   성 이냐시오관의 가파른 계단에서 그는 용기를 내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계단을 다 오르자 여자 후배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남자아이는 양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 옆에 자리를 잡고 재킷을 벗어 후배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고마워요.” 얼굴이 새침하게 예쁜 그 아이가 다시 들릴락 말락 하게 말했다. 동문회관 뒤로 마포구 남쪽의 아파트단지들이 들쭉날쭉 복잡한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공대생은 여자 후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자아이의 마음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사귀지 않을래? 라고.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터지거나 끝없는 번민의 굴레에 빠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 우린, 우린 그냥……. 우린 안 돼요.”
  “왜 안 되는지 물어봐도 되니?”
  “우린 그냥……, 안 돼요.”
   더 지분거리지 않고 “그래, 알았어”라며 후배를 웃으며 보낼 수 있어서, 그 정도 자존심은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실은 방광이 터질 것 같아 그쯤에서 성 이냐시오관의 화장실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든라거 맥주 캔을 하나 사 마셨다. 룸메이트가 틀어놓은 케이블 TV에서는 ≪레지던트 이블≫ 3편이 방영 중이었다. 밀라 요요비치가 벌이는 얼토당토않은 활극을 보다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세 캔 사서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무작정 남쪽을 향했다. 신촌로타리 주변은 그 시각까지도 너무 번잡할 것이었다.


* * *


   남자 굿이 있고 여자 굿이 있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된 밤섬도당굿은 남자 굿이다. 이 마을굿은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교식 제례와 섞였고, 1980년대 이후에는 ‘전통 문화’의 틀에 갇혀 기이하게 화석화되는 중이었다. 현수동 밤섬부군당에서 당굿이 열리면 으레 콘텐츠학과 대학생들이 8밀리 캠코더를 들고 참여했다.
   반면 당주 혼자 필요한 노래를 순서 없이 부르는 게 전부인 여자 굿은 수백 년 동안 본질적인 변화 없이, 마을과 섬의 안녕을 지키는 역할을 비밀리에 이어 오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어쩌면 수천 년 동안. 1968년 밤섬이 폭파될 때에도, 폭파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굿의 현 당주는 이름이 여러 개였다. 미용실에서의 호칭은 마리아 선생님이었다. 태어났을 때에는 남동생을 보자는 의미에서 사내 남(男)자를 쓴 남희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술집에 다닐 때에는 ‘나미’라는 애칭을 썼다. 전 당주에게 무녀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긴몰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 당주의 이름은 새홀리기였다. 대학 교목처에서 일할 때에는 신자도 아니면서 아녜스라는 세례명을 썼다. 새를 홀려 잡아먹는다고 하는 맹금류의 이름이나 미모와 정결의 상징인 가톨릭 성녀의 이름 모두 전 당주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녀는 성녀 같기도, 육식 조류 같기도 한 위대한 무녀였고,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밤섬을 다시 살려내 물 위로 끌어내고, 이 섬에 수천 마리의 철새를 불러온 게 새홀리기였다.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닌 당주가 왜 밤섬이 폭파되는 것을 그대로 놔뒀는지는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어쨌든 새홀리기 당주는 옛 밤섬이 있던 자리에 순전히 노래의 힘으로 새 밤섬을 쌓아올렸다. 새홀리기 당주가 토사와 갈풀, 버드나무로 만드는 섬은 매년 1300평씩 면적이 늘어나 나중에는 폭파되기 전보다 더 커졌다.
   사람들은 그걸 위대한 자연의 힘이라거나, 밤섬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선율의 힘을 두려워 해 노래를 상속인들에게 몰래 전수했던 북미 인디언들의 전통이나 호주 원주민들이 노래로 구체적인 지형이나 여정을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 음계는 평균율로 다듬어지면서 수비학(數秘學)의 마력을 잃어버렸고, 현대인들은 평균율에 너무 익숙해져 그 12음계가 자연스럽다는 착각마저 한다.
   서강대교는 노래의 힘이 약한 마리아에게 새홀리기 당주가 자리를 물려주면서 선물한 일종의 신력 강화장치였다. 새홀리기는 강변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밤섬에 쌓이는 흙의 양이나 위치, 나무가 자라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강 건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까지 힘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섬에서 멀리 떨어지면 급격히 힘을 잃었다.
   공사 중인 서강대교를 보며 새홀리기 당주는 마리아에게 “저 다리가 다 지어지면 섬 바로 위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저 다리 때문에 사람들이 섬으로 갈 수 있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그것도 이미 다 조치해뒀단다.”
   1999년, 서강대교가 완전 개통된 해. 서울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시 내 철새도래지인 밤섬을 서울 최초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새홀리기는 그해 죽었다.


* * *


   2012년, 공대생이 동호회 후배에게 퇴짜를 맞은 해. 3월 말이라지만 밤에는 쌀쌀했다. 공대생은 발걸음 닿는 대로, 대체로 남쪽으로 걸었다. 두 캔째 맥주를 마실 때부터 흥얼흥얼 노래가 나왔다. 브로콜리 너마저, 언니네 이발관, 10cm, 박정현, LYN, 커피소년과 전자양의 노래를 가사가 기억나는 데까지 불렀다.
   노랫말이 가슴에 사무쳐 흐느적거리다, 이게 다 철이 덜 든 자의 자아도취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광흥창역을 지나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자 서강대교 보행로로 통하는 층계가 나타났다. 서강대교의 아치형 구조물에 이르러서야 다리 건너편이 여의도이며, 교량 중간에 생태계 보전지역인 밤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연과 알코올과 자기연민에 취한 남학생은 목청을 높여 인디밴드의 노래들을 불렀다. 그러다 멀리 다리 가운데에서 자기 말고도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목소리를 확 줄였다.
   다리 난간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오페라 가수라도 되는 양 두 팔을 벌리고 연극적으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리아를 독창 중인 거라면, 자세로 보아 객석은 한참 아래 검은 강물 어딘가에 있었다.
   여자가 부르는 노래는……, 음정과 선율, 박자가 모두 설명할 수 없이 기이했다.
   한순간 공대생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정신이상자거나 만취한 취객이고, 저러다 갑자기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싶어 긴장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대와 왈츠를 추는 것처럼 동작이 기묘하긴 했어도 어쩐지 행동에는 품위가 있어 보였고, 목소리도 광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게 차분했다.
   여자는 공대생이 있는 방향을 빤히 보는 듯하더니 다시 의식을 계속했다.
   D와 E플랫 사이에 있는 음이 미묘한 폭으로 떨리다 굵어지고, 두 음이 섞이듯 불협화를 유지하다 갑자기 풍부한 음색의 한 음으로 뭉쳐지더니, 멜로디가 조를 경쾌하게 바꾸며 되풀이되고, 행진곡풍의 박자에 당김음이 많아져서는 어느 순간 호소력 있는 춤곡으로-.
   이게 뭐람.
   공대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호회 모임 뒤풀이에서부터 오늘 한 일은 전부 잘못이다. 왜 뒤풀이에서 술을 그리 많이 마셨지? 왜 후배를 학교로 데리고 가서 어처구니없는 고백을 했지? 새벽 2시에 한강 다리에서 우수에 빠지는 건 또 무슨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람?
   남자아이는 어깨를 부르르 떨고 몸을 돌려 강북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는 가요를 계속 흥얼거렸다. 의식은 이성을 되찾았지만, 머리 속 어딘가가 다리 위의 여자가 부르는 기이한 멜로디 때문에 야릇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 * *


  “제 눈에는 그 유명하다는 여배우보다 아녜스 자매가 더 아름다웠습니다.”
   1973년, 종합대학 개교 3주년 자선바자회가 열린 해. 캠퍼스를 걸으며 알빌 수사가 새홀리기 당주에게 말했다. 새홀리기 당주는 프랑스인 수사에게 “그야 수사님은 저를 좋아하시니까요”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백인 수사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바자회에는 외빈으로 영화배우 윤정희 씨가 참석했다. 물방울무늬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윤정희를 보겠다며 학생과 교직원, 심지어 교수들조차 행사장에 몰려들었다.
   19년 뒤 성 이냐시오관이 들어설 노고산 기슭 잔디밭에 알빌 수사가 재킷을 벗어 새홀리기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고마워요.” 수사는 종이봉투에서 사과를 두 알 꺼내 소매에 쓱쓱 문질러 닦고는 한 알을 새홀리기에게 권했다.
   서강대 남쪽으로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잡초 무성한 낮은 언덕이 많았고, 한강은 채 1.5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강변이 정비되지 않아 폭이 넓은 큰 강이 석양을 반사하면서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녜스 자매가 살던 섬이 혹시 저기입니까?”
   갈수기여서 폭파되고 남은 섬의 잔해가 수면 위에 점점이 드러나 있었다. 새홀리기 당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골재가 없다고 사는 사람을 쫓아내고 섬을 파괴하다니, 잔인하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젊은 신학자들이 한창 해방신학에 심취해 있던 시대였다. 알빌은 한국인에 대해, 또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항상 묵직한 죄책감을 느꼈다.
  “죄스러워하실 것 없어요. 섬 주민들은 그리 반대하지 않았는걸요. 여름마다 수재가 심하게 나는 지역이라 살기 어려웠어요.”
  ‘정말이지 이 여자는 독심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아’라고 수사는 생각했다. 새홀리기 당주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곧 충분히 부유해질 거예요. 그러니 이곳 사람들에 대해 수사님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15년쯤 뒤에 여기서 올림픽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제가 말씀드리면 수사님은 안 믿으시겠죠?”
   이것은 전망일까, 예언일까? 분명한 것은 아녜스의 이런 무지막지한 낙관주의가 매사에 지나치게 종교적인 젊은 수사에게 지난 수년 간 커다란 위안이 되어왔다는 점이었다.
  “아녜스 자매가 한 말인데, 그렇게 되겠죠.”
   파리에서 공학을 전공하던 알빌은 자살 미수 사건을 한번 겪고 전공을 신학으로 돌렸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프랑스 예수회에서 수련을 마쳤으며, 예수회가 새로 설립한 대학을 도우라며 관구장이 한국행을 명했을 때 주저 없이 그에 따랐다.
   타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는 동안에는 그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오던 허무를 느낄 수 없어 차라리 좋았다. 파견 첫 2년 간 알빌의 당면 과제는 한국어 배우기였다. 외국인에게는 절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듯한 이곳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서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어는 너무나 어려웠고, 프랑스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좋은 교재나 교사는 전무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가벼운 절망감을 맛봤다.
   그랬기에 교목처의 말단 여직원이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천부적인 어학 강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핍박 받으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속에 놀라운 지혜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엘리트 수사가 갖고 있던 나이브한 제3세계 민중상에도 동화처럼 들어맞았다. 처음에는 한국어 교습을 위해, 그 다음에는 동정과 연민으로, 이후에는 존중과 존경심으로, 알빌은 아녜스 자매와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이제 그 감정은 우정 이상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알빌이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는 동안 새홀리기 당주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올림픽이 열릴 것이다. 민주화가 되고,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평화적으로 여야가 바뀌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국가적 사건들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신력으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거기에도 흥미가 없었다.
   새홀리기의 관심사는 섬과 그 주변, 그리고 섬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여의도는 부유한 땅이 될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러나 한강의 진짜 고상하고 아름다운 기운은 모두 현수동으로, 그 중에서도 옛 밤섬 주민들의 집으로 향할 것이었다.
  “학교 상징물들이 결정됐다는 얘기 제가 전에 했던가요? 이런 건 보직교수들보다는 예수회 의견이 더 중요하니까, 이사회에도 그대로 올라갈 겁니다.”
   학교를 상징하는 동물은 앨버트로스로 정해졌다는 설명이 새홀리기의 관심을 끌었다.
  “앨버트로스가 어떤 동물인가요?”
  “몸길이가 1m쯤 되는 새인데 거위처럼 생겼고……. 몸은 흰색인데 날개 끝은 검어요. 아주 멀리 납니다. 학교 주변에 이런 새가 어디 있느냐며 저는 반대했는데, 다른 수사님들이 마음에 들어 하셔서.”
   새홀리기 당주는 알빌 수사가 내민 그림을 보다가 “이 새는 이 근처에 옵니다, 보기 쉬운 새는 아니지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요? 한국 이름은 뭔가요?”
   새홀리기 당주는 가만히 생각하다 “나그네새”라고 대답했다.
   새홀리기가 잡을 수 없는 아주 큰 새. 그녀가 만날 수 없는 다다음 당주의 이름.


* * *


   오늘부터 다시 태어나자, 거듭나자! 이런 결심은 하도 자주 해서 이제 감흥조차 없다. 지금처럼 사는 건 싫고 앞으로 확 달라지고는 싶은데, 그게 혹시 불가능한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
   동호회 모임에 나가 여자 후배를 다시 만나는 게 창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임에 불참하는 건 더 우스꽝스러울 것이기에 공대생은 후드티를 입고 하숙집을 나섰다. 이름은 ‘기업연구동호회’였지만 실체는 취업준비 스터디인 모임이었다.
   그날의 연구 대상 기업은 삼성엔지니어링과 SK커뮤니케이션즈였다. 자기소개서를 돌려 읽은 뒤 서로 첨삭을 해주고 잠시 휴식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공대생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멜로디를 허밍으로 읊조렸다. 며칠 전 서강대교에서 들었던 이상한 노래의 한 파편이었다. 그가 이상한 선율을 읊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리에 앉은 어느 누구도, 심지어 공대생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그가 노래 한 소절을 그렇게 부르고 난 뒤 시작한 모의면접 시간에는 갑자기 모임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대생이 서강대교에서 새벽 2시에 느꼈던 열패감이 스터디 멤버들 사이에 스멀스멀 퍼졌다. ‘모의면접이라는 거 참 한심하고 웃기지 않아? 우리가 정말 이런 걸 해야 해?’
   기어이 누군가가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해?”라는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원서에는 희망 분야가 기획인데 답하는 내용은 마케팅이니까 그렇죠. 면접관이 이 정도도 못 물어보나요?”
   얼굴을 붉혔던 당사자 두 사람이 서로 외면하는 것으로 술렁임이 잠시 가라앉았지만 3분도 못 가 “면접관이 이렇게 답하는 걸 좋아할지 그렇게 답하는 걸 좋아할지 형이 어떻게 알아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분위기 왜 이래요?”
   끝내 멤버 한 명이 “저녁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라며 프린트물과 노트를 챙겨 자리를 떴다.


* * *


   마리아 당주는 춘분날 아침에 미니벨로를 타고 서강대교를 다시 찾았다가 충격에 빠졌다. 새벽에 부른 노래의 효과가 왜곡되어, 갈풀이나 버드나무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싹을 틔우고, 섬 주위 물길이 흩뜨려져 있었다.
   마리아는 주니어 디자이너들에게 오늘은 미용실에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자전거 옆에서 서둘러 잘못된 굿의 부작용을 보정하는 노래를 불렀다. 섬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과보다는 사건의 원인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난 밤, 서강대교에 검은 봉지를 들고 마리아 당주 근처까지 왔었던 청년이 있었다. 애매한 인상의 청년은 ‘무시하고 지나가라’는 주문이 담긴 박자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알아봤고, 겁주고 경고하는 멜로디에도 한참이나 버텼다. 마리아는 노래가 잘 먹히지 않은 게, 그 젊은이가 취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그 남학생도 뭔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섞여 들어가면서 여자 굿의 곡조 몇몇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새홀리기 당주 이후로 마리아는 자신 외에 신통력이 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다.
   미용실에 돌아와서도 골똘히 청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느라 펌 시술 중 타이머가 울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해 손님 머리를 상하게 할 뻔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밤섬 여자 굿의 당주로 선택된 것이 과분한 은총임을 알았다. 새홀리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까? 지방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일찍 시들고, 지금쯤이면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자력으로 그 어둠을 헤쳐 나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미용실에서 스태프를 시다라고 부르고 주니어 디자이너를 시야기라고 부르던 시절, 새홀리기는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마리아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기술이나 수완이 빼어나다고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용사로 성공한 것은 새홀리기의 도움을 음양으로 받은 덕분이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새홀리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신통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래서 주어진 사명에 더 최선을 다하려 했다. 말레이시아 주재원이 된 남편에게 “나는 현수동에 남겠다”고 단호히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새홀리기가 워낙 기틀을 잘 다져놨고, 후계자가 해야 할 일을 친절하고 확실하게 잘 일러두고 떠났기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았다. 그러나 섬이 꿈꾸고 되고자 하는 바가 뭔지는, 마리아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리아는 진짜 당주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당주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후계자에 대해 새홀리기는 “때가 되면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만 했을 뿐,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때’가 왔고, 강력한 후계자 후보를 새벽에 한강 다리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술에 취해 가요를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정식 무녀의 노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잠재력이 큰 젊은이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청년에게 좌절감을 주어 쫓아버렸으며, 청년이 누구인지,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 * *


  “아녜스 자매, 언젠가 자매께서 나중에는 이 일대로 철새들이 많이 다니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앨버트로스도 그때 오는 겁니까?”
  “네. 수사님께서 또 예지력이라고 놀리시면 할 말 없지만요.”
   1974년, 영화배우 윤정희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한 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한 생각을 했어요.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고 파리나 런던만큼 복잡한 도시가 되는데 거기에 철새도래지까지 있다면 그거야말로 현대 문명이 가야 할 방향이구나, 참 살기 좋은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별로 그렇진 않아요.”
   알빌 수사는 그날따라 쫓기듯 수다스러웠다. 새홀리기는 알빌이 왜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의문이나 갈등을 마음에 담아두고 숨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외면할 수 없어 종교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새홀리기는 이 선량한 프랑스인이 지금 마음속에 어떤 의문을 품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번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황홀하기까지 했고, 그 달콤 씁쓸한 감각을 즐기느라 이 남자의 번민을 미리 막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노래를 불러 남자의 고민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잊혀지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이 강직한 남자는 그런 걸 원하지 않으리라.
   사제 수업을 받으러 파리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서 수사는 조급해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오늘이 아니면 안 돼.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셈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서강대 정문에 이르러 마침내 “좀 걷지 않을래요?”라고 청할 것이고, 성 이냐시오관이 생길 산기슭에서 어정쩡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좀 걷지 않을래요?”
   알빌 수사가 교문 앞에서 거의 비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새홀리기는 “아니오, 그냥 가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수사님이 저에게 어떤 질문을 하실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제가 할 질문을 안다는 건, 저와 함께 프랑스로 가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죠? 그리고 그 대답이 ‘농’이라는 거고요?”
  “예.”
  “왜 그런지 여쭤 봐도 될까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결심만으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수사님은 서품을 받건 받지 않건 사제로서 사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영혼을 사로잡는 듯한 열정이 진실해 보인다 해도, 결국 자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틀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기존의 자신을 이루던 믿음을 다 부수어버리고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홀리기는 섬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섬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의도 개발을 추진했고, 공사에 필요한 골재를 얻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이 밤섬을 폭파시키도록 했다.
   이는 새홀리기에게도 적용되는 명제였다. 그녀는 무녀로 태어났고 당주로 살아왔다. 알빌을 따라 프랑스로 간다 해도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결국엔 섬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새홀리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알빌은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저를 사랑하세요? 라고.


* * *


   새로 태어나는 기분만이라도 느껴보자, 싶어서 머리를 자르러 갔다. 그런데 캠퍼스 안에 있는 이발소는 마침 전기 공사로 휴무였고, 두어 번 가봤던 블루클럽 서강점은 그새 폐업한 상태였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광흥창역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소박하지만 은근히 실력 있는’ 미용실이 있다고 해서 그리 갔다.
   학교 남쪽 방향을 택한 것은, 신촌이나 이대의 프랜차이즈 미용실에서는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오로지 목욕탕 이발소에서만 머리를 깎았던 지라, 좋은 냄새가 나는 여성 미용사들이 “오빠 너무 훈남이시다” 따위 말을 붙이면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아줌마들이 다니는 후줄근한 개인 미용실에서 “단정하게 잘라주세요”라고 말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처분을 기다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런데…… 이 미용실은 그렇게 촌스럽지도 않으면서 참 편안하네. 걸그룹 노래들 대신 재즈가 흘러나와서 그런가? 여성 스태프가 머리를 감겨주는 걸 즐기며 공대생은 자기도 모르게 오디오에서 흐르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공대생이 따라 부른 곡조는 ‘아이 러브 유 포 센티멘털 리즌’이 아니라, 그 아래 녹음된 마리아 당주의 노래 일부였다. 손님들의 마음을 가볍게 풀어주고, 자신감을 북돋우고, 세상과 화해하게 하는 곡이었다.
   미용실 ‘마리아 루나헤어’가 대성공을 거둔 비결은 그런 마법의 노래들이 계속 흘러나오는 데 있었다. 손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져. 주인이 착해서 그런가봐. 스태프들 군기를 잡는 것 같지 않는데도 다들 성실한 게 보기 좋아.” 자존감이 높아지는 음악 덕분에 고객들은 패션모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당히 감상할 수 있었다. 몇몇 손님들은 마리아 루나헤어의 거울이 ‘요술 거울’ 아니냐며 웃었다. “이 집 거울로 보면 내가 너무 예뻐 보이는데, 우리 집에만 가면 피부도 자글자글하고 눈도 형편없이 쳐진 거 있지.”
   커트가 마음에 든 공대생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미용실 문을 나선지 10분 뒤, 마리아 당주가 자기 가게에 도착했다. 독감에 걸린 아이를 달래는 노래를 부르다 평상시보다 두 시간 늦게 출근한 날이었다.


* * *


   섬이 꾸는 꿈은 너무나 아름답고 동시에 비인간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게 인간적인 것이라고 오해한다.
   섬은 밀려오는 강물과, 자신을 둘러싼 지형과, 자신이 품은 동식물을 재료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했다. 강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히 쉼 없이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섬은 궁극의 악기가 되고자 했다. 음을 최대한 공명시키기 위해 바이올린처럼 가운데가 오목한 형태를 갖추고, 풍부한 음색을 내기 위해 몸을 물풀과 억새로 뒤덮고, 그 선율에 여운을 주기 위해 주변을 민물고기 산란장으로 둘러싸고 싶어 했다. 섬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멀리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철새들을 가능하면 많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 오케스트라에 인간도 필요할 터였다. 인간은 반응이 다채로운 멋진 관객이고, 과거를 기록하는 유일한 동물이니까. 기록과 재생이 가능하다면 강물이 마르고 섬이 사라진 다음에도 음악은 영원할 수 있다.
   폭파되어 사라진 뒤 다시 부활한다는 해법을 새홀리기 당주가 제시했을 때 섬은 반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주민들은 잠시 떠나보내야 할 테지만, 그들이 섬에 머무르는 한 더 나은 음악은 영영 시도할 수 없을 것이었다. 1967년 겨울, 모래사장에 선 새홀리기 당주와 밤섬은 칼바람 속에서 감미롭고 무시무시한 이중창을 함께 불렀다. 가냘프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마음을 휘젓는 애처로운 선율에 악마 같은 가사를 실은 새홀리기의 유혹에, 섬은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비장한 각오가 담긴 무조음악으로 응답했다. 양측이 서로 목청을 높이자 한강에는 거센 풍랑이 일고 강 위를 떠다니는 얼음판들이 서로 부딪쳐 깨졌으며, 수면 곳곳에 소용돌이가 패였다.
   발파 공사를 하던 날, 20년 뒤 섬이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홀리기 당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서리를 쳤다. 섬이 사라진 뒤 젊은 무녀는 깊은 슬픔과 우울함 속에 활기를 잃고 말수가 적어졌다.
   밤섬과 그 일대 행정동 하나 정도 넓이의 땅이 세상의 중심이고 만사의 기준인 새홀리기에게 가톨릭의 세계종교라는 개념은 흥미로웠다.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에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괴로워하는 예수회 수사들은 감탄스럽기도 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알빌 수사가 사제 수업을 받으러 프랑스로 떠난 뒤 새홀리기는 더 말수가 없어졌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족도 없이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그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스무 살 무렵에 자신만만하게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던 밤섬의 재탄생과 주민들의 이주 계획에 대해 회의가 들어 괴로웠다. 그녀는 현수동이 도시화되고 주민들도 그 흐름에 휩쓸릴 거라는 사실은 내다봤으나, 그게 어떤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몰랐던 것은 도시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한가였다. 올림픽이 열릴 때쯤, 현수동으로 이주한 주민 절반가량은 더 나은 일자리나 혼처를 찾아 섬과 당주의 영향권 밖으로 떠난 상태였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앞에 촘촘히 들어선 술집촌에서 새끼 마담으로 일하던 마리아를 발견한 건 그 즈음이었다. 그녀에게 긴몰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노래를 가르치면서 새홀리기는 ‘밤섬 여자굿 당주가 지녀야 할 자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무녀로서 마리아의 재능은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섬에 새홀리기처럼 괴물 같은 힘을 지닌 무녀가 필요했던 걸까? 여자 굿의 당주가 할 일은 섬사람들의 기분을 북돋우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몰래 통증을 덜어주며, 섬이 남자 굿 당주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을 가만가만 들어주는 것 아니었던가. 당주의 직권과 무녀의 힘을 남용한 나, 새홀리기가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었을까.
   반면 마리아는 술집 새끼 마담에 불과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넓은 땅의 수호자가 된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당주라는 역할을 황송하게 받아들였다. 젊은 수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마리아도 자신의 사명을 사랑했다. 그녀는 아내와 당주라는 두 가지 역할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하면 주저 없이 당주를 택할 것이었다. 새홀리기 당주는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알빌 수사가 한국에 되돌아와서, 한번만 더 같은 질문을 해준다면 내가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있을까?
   고독한 권력자인 새홀리기는 마리아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으나, 너무 오랜 시간을 외로움과 내적인 갈등에 시달려 온 터라 그 마음을 밖으로 잘 표현하지 못했다. 그녀는 마리아가 자신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오해를 풀기 어려웠고, 나중에는 그 관계에 대해 얼마간 체념하게 됐다.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해 오래 전에 기대를 접었듯이.
   그녀는 지난 수백 년을 통틀어 가장 강한 힘을 부린 당주였으나, 언젠가부터 노래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가 없게 됐다. 새홀리기는 자신의 수명이 다해 감을, 1999년 어느 날 그녀가 죽을 것임을 알았다.
   시니어 디자이너에까지 오른 마리아에게 새홀리기는 자기 돈으로 가게를 내주었다. 새홀리기는 마리아 루나헤어라는 이름을 직접 짓고, 경쟁자 없이 장사가 잘 될만한 곳으로 가게 위치도 정해주었다.
   가게 문을 열던 날, 마리아는 새홀리기에게 흰색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마그네틱선도, IC칩도 없는 카드 앞면에는 ‘마리아 루나헤어 평생무료이용권’이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각종 커트, 펌, 염색, 볼륨매직, 두피 클리닉, 기타 모든 시술 일체 무료: 사용기간은 영원히, 이용권은 대여 및 양도 가능합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카드를 받은 새홀리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 * *


  “종교학과 학생이세요?”
  “아, 아닙니다. 저는 근로장학생입니다. 교목처에서 오늘 행사를 도와주면 그것도 일한 시간으로 쳐 주겠다고 해서 여기 와 있습니다.”
   공대생은 ‘진행’이라고 써진 이름표를 목에 걸고 성 이냐시오관 계단참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라는 포럼 제목이 적힌 현수막이 소강당 입구 위에 걸려 있었다. 마침 말을 걸어 온 할머니가 누구인지 정체를 궁금해 하던 참이었다.
   이 할머니는 만년의 오드리 헵번처럼 나이를 감추려 하지 않으면서도 빈틈없이 우아하고 꼿꼿했다. 뒤로 땋은 머리에 검은 숱이 한 오라기도 없고 피부가 너무 흰 데다, 불어를 썼기 때문에 처음에는 외국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한국어도 유창했다. 통역인가? 남학생은 나이 든 여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학생은 아까부터 무슨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고 있나요?”
  “네? 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나요? 아, 이것 참……. 죄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버릇인데 잘 고쳐지지가 않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게 즐거운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여서 말을 걸어봤어요. 부르던 노래가 무슨 곡인지 아시나요? 나도 찾아서 들어보고 싶은데.”
   내가 뭘 부르고 있었더라? 조금 전까지도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여인은 괜찮다고 했고, 멋쩍어진 대학생은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할머니는 기조 발제자인 네스칼 교수의 부인이고, 국제결혼을 해서 지금은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네스칼 여사는 공대생에게 강당에 들어가서 세미나를 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왠지 경계심이 풀어진 공대생은 늦게 오는 참석자들을 안내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아까 세미나 자료집을 읽었는데 내용은 흥미롭지만 막연히 좀 반발심이 생기더라고요. 종교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종교일까, 하고요.”
  “왜요? 종교인들이 너무 가식적이어서요?”
  “아니오. 그것보다는……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절대선이나 구원자 같은 게 있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보다는 체계는 없더라도 사람 사이의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게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흥미로운 지적이에요.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선한 마음과 보편타당한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거 아닐까. 그러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고민하지 말자, 가까이에 있는 우리 동네, 현수동 사람들을 위하며 살자. 저는 그렇게 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저처럼 산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인은 소강당으로 들어가는 대신 공대생과 여러 가지 주제로 한참 수다를 떨었고, 공대생도 그게 싫지 않았다. 네스칼 여사는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너무 오래 붙들고 말을 시켜서 미안하다, 이거라도 받으라”고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 공대생에게 내밀었다. 그 카드에는 ‘마리아 루나헤어 평생무료이용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 * *


   세계적 종교학자 네스칼 교수 방한…“기독교가 자본주의 부조리에 맞서야”
   기사입력 2012-04-02 11:24

  “기독교인들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넘어서야 한다.”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종교학자 알빌 네스칼 교수가 이 같이 주장했다. 네스칼 교수는 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오늘날 종교의 가장 큰 적은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 갈등과 인간 소외”라며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중략)
   리옹대 인문학장인 네스칼 교수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인물. 예수회 수사 시절 한국으로 파견 와 4년간 머물렀으며, 이때 한국어를 배워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 탄원 운동에 참여했다. 사제 수업 중 환속한 그는 53세이던 1999년 한국 여성과 결혼해 현재 프랑스 리옹에서 거주하고 있다.
   장휘영 기자 hwi0@


  “예전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요.”
  “아녜스 자매는 전과 다름없이 아름답습니다.”
   1999년, 새홀리기가 죽기로 예정돼 있었던 해. 섬은 강물 아래에서 모양을 바꾸었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을 다시 찾은 알빌은 과거의 강직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복잡하고 모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 건물 티가 가신 성 이냐시오관에서 알빌은 다시 물었다. “나와 함께 프랑스로 가지 않겠어요?”
  새홀리기는 “저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단 한 해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러시겠어요?”라고 되물었다. 알빌은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날 밤 새홀리기는 서강대교 아래를 오래 거닐며 섬이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가, 가, 네 뜻대로 해. 도시의 야경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물살이 그렇게 재잘댔다. 그대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몸이 바싹 마른 갈풀들이 어둠 속에서 바람에 몸을 떨며 합창했다. 가. 가. 네 뜻대로 해. 섬의 노래에 불협화음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감지한 새들이 몇 마리 푸드득 날아올라 자리를 피했다. 63빌딩과 트윈타워 앞에 검은 윤곽으로만 보이는 섬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었다. 섬의 노래 속에는 답이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섬의 노래를 듣는 동안 새홀리기는 외로워졌다. 자전거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둔치 도로를 달리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홀리기는 지독히 고독했다.
  새홀리기는 역시 이제 더 이상 오만한 젊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섬이 지워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마리아 당주의 남편이 인천공항으로 차를 모는 동안 새홀리기와 마리아는 뒷좌석에서 조용히 허밍으로 서로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하는 이중창을 불렀다. 새홀리기는 출국심사대에서 문득 ‘고마워 고마워’라고 섬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여인은 남편과 프랑스의 시골 마을 눈길을 산책하다 문득 자신 안의 새홀리기가 죽어 있음을 깨달았다.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이유를 몰라 당황했지만 조용히 상대를 안아 주며 자리를 지켰다.


* * *


  “괜찮습니다. 저도 즐거웠는데요, 뭘”이라며 사양했지만 할머니가 너무 완강해 카드를 받고 말았다. 네스칼 여사는 “파마를 하면 너무 귀엽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래요”라며 말했고, 실은 공대생도 펌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카드는 너무 가짜 티가 나서, 공대생은 카드를 며칠 동안 지갑 속에 묵혀 두다 어느 저녁 마리아 루나헤어로 전화를 걸었다.
  “제가 평생무료이용권이라는 카드를 어느 할머니한테 받았는데요, 이런 카드가 진짜 있나요? 카드 뒷면에는 대여나 양도도 가능하다고 나와 있는데요.”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카드가 실제로 있으며, 언제든 오셔도 괜찮다, 지금 예약을 하셔도 좋다는 대답에 공대생도 덩달아 놀랐다. “정말 뭘 하든 다 공짜란 말인가요?”
   공대생이 파마를 하기로 예약한 시각 몇 시간 전부터 마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려 가게를 다시 한 번 청소했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는 반차 휴가를 주었다. 그날 마리아 루나헤어에서 머리를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한 현수동 주민들은 미용실 근처까지 왔다가 숍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다른 할 일이 떠오르거나 지금 헤어스타일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다.
   공대생은 마리아 루나헤어 앞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한강으로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몸길이가 1m는 될 것 같은 흰 새였는데, 두루미나 학은 아니었다. 서울에 저런 새도 있단 말이야? 밤섬이 근처에 있어서인가?
   미용실 원장 선생님이라는 중년 여성은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원장이 어려운 외국어를 사용해서 컬의 모양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머리를 이렇게 ‘삐용삐용’ 위로 올라오게 하는 거 어떠세요?”라고 묻는 바람에 공대생은 갑자기 마음이 푹 놓였다.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새로 태어나길 원한다면, 자기파괴와 침잠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었다.
   마리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약제를 공대생의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200자 원고지 103매, tesomiom@gmail.com)



댓글 3
  • No Profile
    장강명 12.03.31 07:23 댓글 수정 삭제
    위 이야기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특정 단체나 지역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르거나 각색돼 있습니다. 실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밤섬과 서강대교 관련>
    -밤섬은 여의도와 마포구 사이에 있는 한강의 섬으로, 섬 중간을 서강대교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명종실록은 조선시대 밤섬에 대해 주민들이 양반과 상민을 따지지 않고, 사촌이나 오촌끼리도 혼인을 하며,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며 정답게 강을 건너는 걸 수치로 여기지 않는 등 교화가 덜된 곳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기에는 귀양지였다고 합니다.
    -1968년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골재 채취를 위해 폭파된 뒤 흔적만 남았으나 한강종합개발이 끝난 뒤 급속도로 퇴적물이 쌓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면적은 5만여 평이었으나 퇴적토가 쌓인 뒤에는 폭파 전보다 오히려 더 커져서 2005년에는 약 8만 평이 됩니다. 폭파 전에는 서쪽 아랫밤섬이 대부분이었으나 퇴적토가 쌓인 뒤에는 동쪽 윗밤섬이 아랫밤섬보다 더 커졌습니다.
    -폭파 당시 밤섬에는 62가구 44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했으며, 함께 옮겨 온 부군당에서 매해 밤섬부군당도당굿(서울시 무형문화재 35호)을 열고 있습니다. 밤섬 안에 있었던 부군당의 기원은 약 4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고 퇴적토 위에 잡초와 잡목이 싹을 틔우면서 철새들이 몰려 와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심 내 철새도래지가 됐습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를 포함해 조류 70여 종이 서식하며 해마다 겨울 철새 1만여 마리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현재 람사르 협약 습지 지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서강대교는 1980년 착공해 1999년 완전 개통됐으며, 이 해 서울시는 밤섬을 서울 시내 최초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서강대교 개통 초기에는 밤섬 생태계가 서강대교를 지나는 차량의 소음과 매연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서강대 관련>
    -서강대는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예수회가 한국에 설립한 대학입니다. 1960년 개교했으며, 1970년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예수회원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길로런 신부, 데슬렙스 수사 등이 설립의 주역입니다.
    -서강대 정문에서 밤섬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47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노고산 기슭에 세워진 성 이냐시오관은 1992년 완공됐습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은 1959년에 문을 열었으며, 서강대 교수인 베르나르 스네칼 신부 등이 이곳에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서강대의 상징 동물은 앨버트로스입니다. 앨버트로스는 신천옹이라고 주로 번역하지만, ‘나그네새’ ‘바보새’로도 불립니다. 북한에서는 ‘큰꽉새’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앨버트로스는 한국에도 찾아오는 철새이기는 하나 실제로 보기는 매우 어려우며, 현재는 국제보호조로 지정된 상태입니다. 나그네새는 한 종이 아닌 철새 전반을 일컫는 말로도 쓰이며, 바보새는 멸종된 새인 도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 No Profile
    이니 군 12.04.01 12:32 댓글 수정 삭제
    요즘 섬을 동경해서 무심코 클릭하여 읽었는데 홀린듯이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뭐랄까, 섬과 무녀라는 이미지 떄문에 언뜻 무녀도의 배명훈 버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현실과 초현실을 적당히 이어주는 소설 같았습니다. 재밌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 No Profile
    장강명 12.04.02 08:06 댓글 수정 삭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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