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리무버

2011.09.22 20:4109.22

읽으시기 전에 : 본 소설의 내용은 모두 허구입니다. 현실의 이름이 비슷한 인물, 단체, 사건, 지명과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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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에 접속하자 오늘도 광고화면이 떴다. 평소처럼 광고창을 닫으려고 하는데 광고 내용이 좀 특이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 출시>>

인생 메모리 리무버라. 특이한 광고에 낚여 광고를 클릭하고 말았다. 느려터진 인터넷 회선 탓에 광고에서 상품 페이지로 이동하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시간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으니 스피커에서 뿅뿅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컴퓨터를 확인하니, 광고 페이지에 플래쉬가 자동재생되고 있었다. 핸드폰을 한쪽에 던져두고 마우스를 잡았다.

<<축하드립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 무료 사용권에 당첨되셨습니다>>

브라우저 안에 제대로 된 글자는 그 그림파일 하나 뿐이었다. 무언가 상품 설명이라거나 그런 게 있었을 테지만 인코딩 문제 때문인지 글자는 모두 깨져 있었다. 브라우저에서 자동으로 파일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다운로드 창의 종료 버튼은 비활성화 돼 있는데다가 Alt+F4도 먹지 않았고, Ctrl+Alt+Del을 눌러도 작업 관리자도 뜨지 않아서 마음대로 끌 수도 없었다. 강제 다운로드인데도 웹 백신의 경고도 울리지 않았다. 당황해서 인터넷 선을 뽑아버렸지만 이미 다운로드가 끝나고, 황당하게도 <인생 메모리 리무버>가 강제로 실행된 뒤였다.

"아오, 이게 뭐야...."

<<사용자 확인을 위해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이름이랑 주민등록번호는 왜 치라는 건지 모르겠다. 개인정보 유출 프로그램 같은 건가? 그거 치고는 제법 유쾌하긴 하다만 상당히 허접하다. 한번 피식 웃고 웹서핑을 하려고 브라우저를 열었다. 인터넷 화면이 뜨질 않았다. 잠시 당황하다가 방금 전에 인터넷 선을 뽑아버렸던 게 생각났다. 인터넷 선을 꽂으려다가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인터넷도 연결 안 돼 있는데 신상정보가 유출될 걱정은 없지 않나? 다시 인생 메모리 리무버 창을 띄우고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 베타버전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는 항목 제거만 가능한 인생 메모리 에디터입니다>>

그런 안내화면 비슷한 것이 뜨고 나서 잠시 뒤 메인화면으로 넘어갔다. 신장, 체중, 예금잔고는 물론이고 학점, 토익점수에 중고등학교 내신, 모의고사 성적, 수능 성적 같은 수치 말고도 별 신기한 항목이 다 있었다. 인터넷 중독, 자신감이 없음, 늦잠, 손이 고움, 낮은 목소리, 만성위염,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쓸모없는 데 집착 등등. 내가 이렇다고 하면 화가 날 항목들이 많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써놓을 만도 하겠다 싶기도 했다. 혹시 그런 건가? 뭐라고 그러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심리테스트, 점, 혈액형 성격 같은 데서 누구에게나 해당될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정말로 그런 줄로 알고 혹해버리는 현상 말이다. 쭉 읽어내려가다 보니 정강이에 흉터, 사타구니에 점이나 탈모 초기증세 같은 내 특징까지 있었다. 허 참.... 이게 정말로 내 얘긴가?

개인정보 유출이나 그런 건 어느새 안중에도 없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에 적힌 항목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 내 성격이 이렇다고? 보고 있자니 화가 났지만 찬찬히 읽어보니 맞는 것 같았다. 나 진짜 못났구나. 단점 중 하나, '여자친구와 헤어짐'을 클릭하고 Del 키를 눌렀다. 단점 하나가 지워졌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에는 옛날에 헤어진 여자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정현아. 뭐해?"

내가 기억하는 전 여자친구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당황해서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렸다. 곧바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어, 응, 연우야."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천진했다.

"뭐야. 왜 갑자기 끊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나를 휙하니 차 버린 여자가 이렇게 천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고 있다니.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녀와 사귀고 있을 때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미안, 연우야. 나 지금 하던 게 있어서. 끊을게."

내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자꾸 화가 났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의 항목들 중 저 밑에 새로운 항목이 표시돼 있었다. 여자친구 있음, 연우를 사랑함, 슬픔. 짜증이 났다. 세 항목 모두를 지워버렸다. 그 항목들을 지우자 방금 전 느꼈던 감정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침착해졌다. 핸드폰 메모리를 확인해 보니 연우의 전화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진짜로 작동하는 거였구나.

프로그램을 붙잡고 한참동안 씨름하며 단점들을 지웠다. 만성위염, 충치, 난시, 자신감이 없음, 인터넷 중독, 알코올 중독, 쓸모없는 데 집착, 늦잠, 흉터, 점, 탈모, 똥배, 저질체력, 패션센스 없음, 참을성 없음, 화를 잘 냄, 유머감각 없음, 개드립 본능, 여자에게 인기없음, 그리고 핸드폰 할부금 50만원 등등. 단점을 지우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단점을 다 지우고 나니 항목들은 몇 개 남지 않았다. 헛웃음만 나왔다. 와, 나 진짜 병신이었구나.

단점들을 다 지우긴 했는데, 어째 생각보다 스펙 상승이 된 건 아닌 것 같았다. 남은 항목들을 클릭해 보다가 그중 예금잔고 항목을 더블클릭했다. 순전히 실수였다. 대화창이 하나 떴다. <<제거할 금액을 결정해 주십시오.>> 취소 버튼이나 나가기 버튼 따위는 없었다. 숫자를 써 넣을 텍스트 창과 <<제거>>라는 글자가 박힌 버튼만이 있었다. 당황해서 Alt+Tab을 눌렀지만 다른 창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별 방법이 없다. -1이라고 적고 제거 버튼을 눌렀다. 창이 닫히고 <<-1원이 제거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실수를 후회했지만 별 수 있나. 나는 다른 항목들을 클릭 클릭했다.

"어?"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까의 예금잔고는 분명히 13만원, 딱 떨어지는 13만원이었다. 거기서 1원이 줄면 12만 9천 999원이 돼야 했는데, 항목의 숫자는 13만 1원이었다. 나는 예금잔고 항목을 다시 더블클릭했다. 제거할 금액을 결정해 주십시오. 어차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용돈이 들어온다. 대담한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50,000을 입력하고 제거 버튼을 클릭했다. -5만원이 제거되었습니다. 예금잔고 항목의 숫자는 18만 1원이 되어 있었다. 예금잔고까지 실제로 늘어났을까? 은행에 가 보지 않고서도 확인할 방법은 있다.

예금잔고, 아이큐, 학점은 물론이고 키, 체중까지도 조작했다. 예금잔고 18만 1원, 아이큐 110, 학점 3.0, 키 169cm, 체중 65kg은 예금잔고 10억 18만 1원, 아이큐 190, 학점 4.3, 키 190cm, 체중 80kg이 됐다. 시력도 0.5-0.8이 3.0-3.0이 됐고... 좋아. 확실히 키가 확 커졌다. 전공 책을 펴들고 휘리릭 넘겼다. 너무나 쉽게 이해됐다. 만세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법으로 말도 안 되는 스펙 상승이 일어났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내 몸을 내려다 봤다. 키가 커지기는 했는데 비율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숏다리에 대두였다. 다시 의자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조작했다. 어딘가엔 더 자세한 수치가 나와있지 않을까? 도구-옵션에 들어가니 고급 보기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걸 체크하고 다시 메인 화면으로 돌아오니 각 항목 옆에 상세 수치가 표시됐다. 그러니까, 신체 항목에 신장, 체중에 앉은키, 가슴둘레, 허리둘레, 엉덩이둘레, 머리둘레, 머리길이, 허벅지둘레 같은 수치에다가,  눈코입의 위치와 가로세로 크기, 심지어는 손가락, 발가락의 길이와 둘레에 귓볼 크기, 성기 사이즈까지 표시돼 있었다. 거울을 가져다가 내 모습을 비춰보면서 수치를 조절했다.

한 시간 뒤, 거울을 들여다 보자 거울 안에는 훤칠한 미남이 있었다. 뿌듯한 마음에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쫙 펴고 한껏 기지개를 폈다. 조작하지 않은 수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수치 모두를 정하느라 몇 시간이나 거울을 보고 수정하고, 다시 수정하고 하는 일은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답답했다. 아, 거울을 보고 조작하지 않은 수치가 하나 있기는 했다. 나는 이제 10인치다.

이쯤 되고 나니까 다른 욕심이 생겼다. 권력욕 비슷한 것이다.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일지도 몰랐다. XX대학교 XX과. 인생 메모리 리무버 화면의 한쪽에 있는 내가 다니는 학교와 과가 눈에 띄었다. 나쁜 학교나 나쁜 과는 아니었지만,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키 190cm에 미남인데다가 아이큐까지 190이나 되는 말 그대로 사기적인 스펙이다. 좀 더 좋은 학벌을 쌓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학교와 전공 항목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하지만 이건 숫자로 돼 있는 항목들과는 달리 통째로 삭제할 수만 있는 것 같았다. 미련없이 XX대학교 XX과를 내 인생 메모리에서 삭제했다. 아이큐가 190인데, 서울대 정외과 따위는 우습게 들어갈 수 있다.

나이도 수정했다. 아이큐 190이라지만 지금 내 나이가 스물하나니 이대로 수능을 친다면 삼수생이다. 나이를 이 년 줄여서 열아홉 살이 됐다. 아! 내가 십대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대로라면 나는 지금 고3이 된 건가? 고3 생활을 다시 해야 하나 하는 절망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항목들을 다시 살펴봤다. 상황은 그것보다 좀 더 심각했다. 고등학교 항목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 최종학력은 중졸이다. 실수였다. 검정고시를 쳐야 한다고? 막장 테크인데? 입술을 깨물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이를 다시 두 살을 줄였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다. 그리고 최종학력은 중졸. 올해 안에 고졸 검정고시와 수능을 쳐서, 열일곱 살의 나이로 서울대 정외과에 들어가 3년만에 조기졸업을 해버린 뒤 행정고시를 한방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이 나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위대한 정치가가 되리라.

열일곱 살이 되고 보니 키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확인해 보자. 175cm라. 앞으로 4년만에 15cm가 더 크는 건가? 거울 안의 얼굴은... 꽃미남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젖살이라니. 신체 항목을 조작해서 젖살을 뺐다. 좋아. 완벽한 꽃미남이다. 그런데 이상한 항목 하나가 보였다.

<<신체검사 등급 2등급>>

아니, 아니. 안 되지.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신체검사? 가벼운 손놀림과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항목을 삭제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뭔가가 휘리릭 하고 빨려들어갔다. 가슴 언저리에서 답답한 느낌이 났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벽지의 색깔이 변했다? 흰색에 단조로운 무늬이던 벽지가 분홍색 벽지로 변했다. 당황해서 방 안을 둘러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곰인형이었다. 하지만 곰인형이보다는 그 곰인형과 함께 여성용 핸드백이 놓인,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시트의 침대가 더 충격적이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냐면, 옷걸이에 걸려있던 청바지나 티셔츠나 반바지 따위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로 바뀌어 있는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은 내가 내 몸을 내려다보고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티셔츠를 벗었다. 70 c의 브라가 내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걸 왜 알고 있는데?! 당황한 나는 신체 항목을 확인했다. 170cm, 50kg, 34, 23, 35, 앉은키 80cm.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당황한 채로 <<성별 : 여성>>이라고 표시된 항목에 커서를 가져가 선택하고 딜리트 키를 눌렀다. 대화창이 떴다. <<성별 항목을 제거하면 반대의 성별로 바뀝니다. 성별 : 여성 항목을 제거하시겠습니까? 확인, 취소>> 당연히 제거다!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또다른 대화창이 떴다.

<<고객님의 베타버전 사용 중 제거한 항목 수가 255개를 넘었습니다. 더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이상의 제거는 인생 메모리 리무버의 정식버전이 출시된 이후에 사용 가능합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 베타버전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창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종료하겠습니다"라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프로그램이 종료됐다.

"말도 안 돼!"

나는 다시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실행시켰다.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라니? 아까도 신나게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만. 여자가 됐다. 그럼 주민등록번호도 바뀐 건가?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숫자를 1에서 2로 바꾸고 다시 입력했다. 이번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란다. 그래, 나이도 바꿨지. 원래 생년에서 4를 더하고 번호를 다시 쳤다. 역시 안 됐다. 생년이 바뀌고 성별이 바뀌었는데 다른 숫자가 그대로일 리가 없지. 게다가 이름까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려면 신분증 같은 게 필요했다.

침대 위의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주민등록증이... 있을 리가 없다. 열일곱 살인걸. 학생증도... 있을 리가 없다. 중학교 학생증은 졸업하면서 버렸고, 고등학교엔 입학 자체를 하지 않았다. ...난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한 21살의 남자라고. 왜 이딴 걸 알고 있는 거지? 의료보험증은 어떨까? 안방으로 들어가서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런 거 없다. 망했다. 어쩌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딸내미, 왜?"

대단하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 아예 세계의 역사를 바꿔 버린다는 건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엄마, 나 주민등록번호 좀 알려줘."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핑계는 이미 생각해 뒀다.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가입하려고 그러는데 주민등록번호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런 거다. 엄마가 내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고 나서 나를 구박했다.

"주민등록번호는 기억해 두고 다녀라. 어떻게 그걸 기억을 못 해?"

"어, 응. 그럴게. 끊어!"

다시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실행시키고 이름과... 이름은 안 바뀌었을까? 여튼 이름과 바뀐 주민등록번호를 쳤다. 제대로 실행이 됐다. 이름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한참동안 갖고 놀아 익숙해진 메인 화면이 뜨자마자 대화창이 떴다. <<고객님은 베타버전에 제공된 255회의 제거 기능을 사용하셨으므로 인생 메모리 리무버의 기능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십시오.>> 대화창 아랫부분에는 홈페이지 주소가 링크되어 있었다. 링크를 클릭하자 브라우저가 실행됐지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메시지만 떴다. 인터넷 선 연결을 잊다니. 케이블 잭을 컴퓨터에 끼웠다. 그러자 경보음이 울렸다.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위험합니다. 자동으로 치료합니다.>>

최근의 대규모 해킹사태의 우회툴로 쓰인 바 있는 제품군의 웹 백신이 실행되며 trojan.m.8991011. 이라는 파일을 자동으로 '치료'했다. 그래, 너는 치료해라. 난 할 일이 있단다.

브라우저에는 제조사의 고객센터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상담 내용을 입력했다. 딱 한가지 부분만 수정해 주면 안되냐고. 실수로 항목을 잘못 건드려서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190의 아이큐가 생각해 낸 최대한 애절한 문장으로 설명한 뒤 질문글을 올렸다. 신기하게도, 상담글을 올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답변이 올라왔다. 고객님의 실수로 인한 프로그램 이용상의 착오는 보상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경우에 한한 특별 조치로 고객님의 계정에 1회의 수정 기능을 추가해 드렸습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실행시키고 접속하신 뒤, 실수하신 항목을 다시 수정하시면 됩니다. 만족할 만한 답변이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다운받은 폴더로 들어가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그런데... 실행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실행시켜 봤지만 먹통이었다. 왜 이러지?

아이큐 110이던 예전 같았으면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겠지만 금방 의심가는 곳을 한 군데 발견했다.

올약.

올약 창으로 넘어가 자세한 '치료' 내역을 확인해 봤다. 내가 몇 시간 전에 다운받은 <<인생 메모리 리무버>>였다. 올약이 내 마지막 희망을 고자로 만들어 버렸다. 아, 안돼! 이 빌어먹을 EXT소프트 같으니라고! 강제 다운로드 될 때는 놔두더니, 정작 작동해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나는 다시 상담글을 올렸다. 백신이 프로그램을 치료한답시고 엉망으로 만들어 놨는데 다시 다운받을 수는 없냐고. 이번에도 답변은 순식간에 올라왔다. 답변을 읽고 나니 기운이 쏙 빠졌다. 이 빌어먹을 EXT소프트! 올약이 제멋대로 작동해서 인생 메모리 리무버를 거세해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고객센터의 답변 내용은 이랬다.

<<고객님의 안타까운 사정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객지원팀에서는 고객님의 불운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인생 메모리 리무버는 베타버전 사용자 한 명 당 한 번의 다운로드 기회만을 드립니다. 고객님의 실수로 인한 항목 수정에 대한 보상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다운로드 기회까지 다시 한 번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십사 사과드립니다. 저희 인생 메모리 리무버의 베타버전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밑에는 추가로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고객님께서 인생 메모리 리무버 베타버전을 사용하신 내역을 확인한 결과, 고객님께서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여성이 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인생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 좌절하지 마십시오. 즐거운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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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본격 EXT소프트 까는 소설

이 아니라, 처음에도 말했지만 이 소설의 내용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하는 인물, 단체, 사건, 지명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슴
gozaus
댓글 4
  • No Profile
    사란비 11.10.01 19:20 댓글 수정 삭제
    여러 가지로 웃음을 짓게 하지만 마냥 웃을수만은 없는 ㅠ
    잘 봤습니다! 정말 인상깊었어요
  • No Profile
    Aro 11.10.03 22:18 댓글 수정 삭제
    재밌습니다.
    왠지 스티븐 킹의 신들의 워드 프로세서 느낌이 나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해피인지 새드인지 모를 엔딩이 인상적이네요
  • No Profile
    Melissa 11.10.21 16:49 댓글 수정 삭제
    흥미로운 소재네요. 인생 메모리 리무버라니. 실제로 저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어떨까요? 콤플렉스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려나요.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얼터미트 11.10.27 11:48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엔 어의가 없었지만....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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