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탁, 에이단은 마지막 서류철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일을 시작한지 두 시간 만이었다. 케이가 나름대로 정리를 해 두어서 상당히 빨리 내일 분의 일까지 정리할 수 있었다.
보관할 것은 보관하고 아래로 다시 전달할 것들을 모으면서 에이단은 책상 위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 윤상, 결재 시안은 끝났어, 가져다가 전달하도록 하고- 그리고 공주님에게 가야 하니까 케이를 불러 줘. "
- 알겠습니다 마스터.

사실은 케이는 그녀에게 가는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라고 에이단은 인터폰을 끊고 나서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러 갈 때는 케이 외에 다른 동행을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란 것이, 아직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는 것인 데다가 무엇보다 그녀는 사람을 무서워했다. 특히 다수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패닉을 일으켜버리곤 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자신과... 해승, 그 남자정도일까.  
알 수 없는 남자. 해승에 대해 에이단이 평가하는 것은 그 말 한 마디였다.
표정 적은 얼굴과 그녀 외의 일들에 대한 무심함. 수상하다면 충분히 수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이지만, 어쩐지 그녀는 그 외에게는 의지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자신에게 책임지워졌을 때부터.
노크소리가 난 것은 손 안에 든 볼펜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기 시작한 때였다. 에이단은 볼펜을 내려놓으면서 손바닥이 케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 보관해 놓았던 것도 가져 왔습니다. "
" 고마워 "  

바스락거리는 비닐 가방의 느낌. 그리고 서늘하게 뿜어져 나오는 냉기. 붉게 변한 손바닥에 느껴지는, 아이스크림의 냉기에 에이단은 빙긋 미소지었다.

" 갈까. "
" 네. "

그녀의 방으로 가는 통로는, 에이단의 사무실 안에 있는 직통 엘리베이터 하나였다. 지하 주차장과도 연결된 이 엘리베이터는 마이너 알카나 이상 클래스의 IP패스 카드가 아니면 작동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솔브 엔터테이먼트 내에서는 에이단 외에는 작동시킬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공공연한 비밀인 만큼, 보안과 보호의 목적 둘 다로써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만큼 에이단이 더 그녀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 함께 가는 것, 사실은 싫겠지 "
"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 나라면.. "

에이단은 케이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기 힘든 적색에 가까운 자주빛의 시선.

" 그녀에게 미움받는 건 싫으니까 말야. "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교육받은 세큐리터의 무감정한 표정을 하고 살짝, 자신을 바라보는 그 자줏빛에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칭
어느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해 있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전자 차임이 울리면서 문이 열렸다.

" 에이- "

카펫에 엎드려 있던 소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에이단을 발견하자마자 햇살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곧, 하늘빛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달려와서 에이단의 품 속에 자신의 조그만 몸을 던졌다. 에이단은 자신에게 안겨오는 소녀의 몸을 너무 세지 않게 보듬어 안으면서 그 푸른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 에이- 에이- 에이- "

소녀는 마치 잃어버렸던 혈육이라도 만난 것처럼 에이단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자신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보들보들한 뺨을 연해 에이단의 옷 앞자락에 비벼대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너머로, 해승의 무감정한 눈이 에이단을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그리고 카일도, 그와 소리 없이 시선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좋던 싫던, 하나의- 무척이나 사랑스런 존재의- 이해관계로 엮어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것이 혹자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이고 혹자는 세피라를 위해서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자아, 얘기하던 아이스크림 "
" 와아- 에이가 최고! "

에이단은 소녀에게 비닐 봉투를 들어 보여주고, 해승에게 건네주었다. 해승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을 받아들고 안쪽에 마련된 주방으로 사라졌다. 에이단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저릴 정도로 아름다운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가움과 호감을 가득 담은 사랑스러운 연둣빛의 눈동자. 가슴 어딘가를 움켜쥐는 것과도 같은 과도하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시선. 이 소녀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그래서 두려운 존재. 보는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러나 사랑해서는 안되는 존재.
순간, 소녀의 눈동자에 공포와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보호를 구하듯이 에이단의 품에 파고들면서 옷자락을 꼭 잡았다. 소녀를 보듬어 안으며 시선을 돌린 곳에는, 예상대로 케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케이는 쓴웃음을 보일 듯 말 듯 입술에 올리며 해승이 간 주방 쪽으로 사라졌고, 에이단은 품에 안겨드는 소녀를 안아올렸다. 얇은 천 너머로 따듯한 피부의 느낌이 팔 위로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소녀는, 마치 인형을 안아 든 것처럼 가벼웠다. 따듯하고 보들보들하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탄력이 있었다. 소녀가 에이단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오자 꽃 향기 같은, 아니 그것보다 더 달콤한 향기가 물큰 풍겨왔다.    

" 에이 "
" 응? "
" 나 계속 두근두근해. "
" ... 내일모레 일 때문에? "
" 응! "
" 그렇구나... 무섭지 않니? "
" 무섭지만- 그래도 기다려지는 걸 "

가장 근본적인 공포일지도 몰랐다. 이 소녀에게 있어서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타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공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기대는 그 공포를 억누를 만큼 컸다.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마스터는 노래하지 않으십니까?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나는. 에이단은 소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케이가 물었던 것이 새삼스럽게 다시 기억나는 것은, 그때에 자신이 한 대답이, 공포로부터 도망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지금 안고 있는 소녀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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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님은? "
" 주무십니다. 오늘 하루종일 꽤 흥분하셔서.. 피곤하셨을 겁니다. "
" 그렇군 "

사실 피곤한 건 나인데- 라고 에이단은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자네는 알고 있나? "
" 무엇 말씀이십니까, 컵 오브 킹. 미스터 에타나. "

연극의 대사 같은 말을, 해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을 띄운 냉커피를 마시기 위해 잔들 들었던 에이단은 한동안 그것을 마시는 것을 잊은 채, 손에 들고 해승을 응시했지만, 해승의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 왜 공주님이 날 경계하지 않는지 말이지. "

해승은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흑갈색의 커피가 황갈색이 되어 컵 아래에 조금 남았을 때, 다시 해승은 입을 열았다.

" 아마도 당신이... "
" ? "
" 은발에 자줏빛 눈을..하고 계셔서일겁니다. "
" ... 뭐? "

에이단은 다시 한번 해승을 바라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되지 않은 표정 없는 옆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정면을 바라보다가 에이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드물게, 그의 입가가 웃고 있었다.

" 농담은 아닙니다. "
" ...아, 그래. "

자신이 뭔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닳고 에이단은 얼른 표정을 추슬렀다. 그러나 워낙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덕에 표정근육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에 드물게 보는 해승의 웃는 표정이 신경쓰여서 아무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태연한 얼굴을 만들기가 힘들었다.

" 레이디의 신은- "

한참동안 그런 에이단을 바라보고 있다가, 해승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 빛살같은 은빛 머리칼에 루비처럼 붉은 눈을 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
" ...신..? "
" 그렇습니다. "
" ... 세피라.. 가 말인가? "
" 세피라는 아닙니다. "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해승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복잡한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에이단이 알아챌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 저 역시, 레이디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 뿐입니다. 자세한 것은 레이디만이 알고 계시겠지만.. "
" ..확실히 더 듣는다는 건 무리겠지. "
" 그렇습니다. "

자신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것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에이단은 조금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것이 해소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더 묻는 것을 포기했다.
단지 지금은- 그녀가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윗사람들이 기대한 만큼 잘 해줄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세상에 살고 있던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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