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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걸 깜박했네

2013.04.27 12:0304.27

그걸 깜박했네


“등이 네 수업 때만 나간다고? 그것 참 희안하네.”

준지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우뚱했다. 미수는 긴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빼고 오른쪽 이마를 준지 어깨에 기댔다. 하고 보니 사나흘 전부터 바라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요 며칠 교실 전등에 희롱당한 마음의 틈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모처럼 커플 소파(카페 2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게끔 설치된)에 앉은 보람이 있다고 미수는 생각했다. 준지에게서 비롯한 안전하고 포근한 기분의 파장이 이마에서 팔꿈치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 안 할래.” 

미수는 눈을 감았다. 쏴아아― 쏴아아― 거리를 물들이는 빗소리... 달큰한 바닐라 라떼 향기... 준지의 조금 까슬한 옷자락... 거기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유연제 냄새... 체취? 그런 것들이 하나둘 미간 안쪽으로 스며들어 뇌를 감쌌다. 밤바다 모래톱에서 모닥불을 쬐는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준지와는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 미수는 오늘 같은 날은 이 상태로 쭉~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준지는 말을 이어 걸었다. 

“있잖아. 혹시 학생 중에 전파를 발산하는 체질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1단계, 뜬금없는 말에 눈이 절로 떠진다.

“전자파가 나와 전등을 고장 내는 거야. 왜, 어떤 사람은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기계가 망가진다잖아.”

“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 아니, 그보다 그런 학생이 있어도 내 수업만 듣는 건 아닐 텐데?”

아뿔싸, 한순간 솔깃해서 진지하게 반문한 미수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길어질 만한 단서를 스스로 내놓고 말았다. 아오~! 아니나 다를까 준지는 미수의 말을 쉬이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았다. (어쩌면 진지한 척) 

“그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

2단계, 자기도 모르게 미어캣처럼 몸을 일으킨다. 

아마 이건 짜증일 거야, 미수는 훗 웃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준지의 가설에 의하면 전파 학생의 능력은 평소에 잠재되어 있다가 ‘장미수’라는 고유 파장에만 반응해 문제의 사고(?)를 일으킨다는 것 같았다. 매번 미수의 수업이 15분 정도 남은 시점에서 전등이 깜박이다 나가는 것은 그즈음 학생들의 초조함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곁들여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파 학생을 찾아낼 것인가? 일단 십수 명의 학생들을 가와 나 집단으로 나눈다. 물론 무작위다. 이 단계에서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다음 가와 나 집단에 차례로 수업을 진행한다. 만약 가 집단 수업에서 전등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연스럽게 나 집단은 제외된다. 반대로 나 집단 수업에서 전등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연스럽게 가 집단은 제외된다. 문제 집단을 추출해 냈다면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무러하든지 그들을 한 사람씩 무선 공유기 앞에 세워 본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상단 바를 유심히 보아 와이파이 수신 감도에 변동이 생기는 학생을 찾아낸다. 이제부터 그는 명실상부 괴인이다!  

...이쯤 되면 3단계, 짜증이 거룩한 분노로 승화한다. 

이미 그러하였다. 


“뭐야, 정말?”

미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분심을 터뜨렸다. 구두고 우산이고 블라우스고 가방이고 몸에 걸친 것들은 모두 다 던져 버렸다. 씨! 씨!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색색거렸다. 힐링캠프가 될 줄 알았던 연인과의 만남은 킬링캠프가 될 뻔했다.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데 준지는 헛소리만 지껄였다. 게다가 준지는 미수가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 일을 괴사건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여자친구의 불안보다 그런 게 더 재밌다고 여기는 걸까? 

“크아악! 그게 장난이야? 진담이야? 실수야?”

기분대로 팔다리를 동동거리던 미수는 문득 손에 닿은 가방을 밀어 치고 말았다. 가방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닿을 때 덜컹 하는 둔탁한 소음을 냈다. 미수는 소리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아차! 시계!”

미수는 3초 룰을 믿는 영국 사람처럼 재빨리 움직여 가방에 주워 올렸다. 그러고 가방 안에 손을 넣어 탁상시계 하나를 끄집어냈다. 안녕 고양이 모양을 한 분홍빛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둘이 카페에 막 자리를 잡았을 때 준지가 준 것이었다. 

“혼자 사니까 일어나기 힘들지? 알람 하나 더 보태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솔직히 감동받았다. 이 인간이 마음 써 주는 부분도 있긴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살짝 짠했다고 할까. 둘 다 일이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마음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등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사실, 전등 일이 아니라도 미수의 생활은 요즘 엉망진창이었다. 지난달 겨우 가격이 맞는 원룸을 구해 혼자 살게 됐을 때만 해도 좋았는데 이후로 좋은 일이 없었다. 인디펜던스 데이에 꿈꾸었던 화려한 싱글 라이프는 자취 초반 실패한 요리와 함께 음식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미수는 저것을 열어 보느니 지구가 멸망하는 꼴을 보리라 생각하며 애써 그 존재를 잊으려 했다. 최소한의 청결을 위해 소형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행위도 미수에게는 곤욕이었다. 다시 엄마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지만 나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하다는 사실은 상당한 장벽으로 작용했다. 적어도 반년... 아니, 석 달 만이라도... 가능할 거다. 어차피 한 달에 이틀 빼고는 잠만 자니까.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학원에서 훨씬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왔는데 지각하는 날은 더 많아졌다. 출근하라고 등 떠미는 사람이 없으니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면 시간이 시간 단위로 휙휙 지나가 버렸다. 빨리 개학해서 오전 수업 따위 안 했으면 좋으련만, 어릴 때는 짧기만 했던 방학이 이제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학생들은 금세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학부모에게 전화가 왔고, 원장에게 경고도 받았다. 지난 몇 년간 쌓은 강사로서 평판이 이런 식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하아...”

미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신경 써 주는 건 준지 같은 거나 준지 따위밖에 없네. 미수는 킥킥댔다. 때마침 준지에게 전화가 오자 웃음은 더욱 크게 터져 나왔다. 

“왜 웃어? 옷 벗고 있어?”

“윽... 대체 그 상관관계는 뭐냐? 다 벗었으면 어쩔래?”

“잘 도착했구나. 근데 야, 나 대체 언제쯤 네 방에 갈 수 있는 거야? 바래다주지도 못하게 하고. 모텔비 아낄 수 있을 거 같아서 기대했는데 설마 절대 금남 구역이라도 선포했어?”

“어머, 여기 여자 기숙산데 몰랐어?”

너 오면 청소해야 되잖아. 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소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하하, 이 자식이 감은 좋아 가지고. 미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사이 준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내가 오면서 더 검색해 봤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미수는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어어, 잘 도착했어? 어머님은 잘 계셔? 쏘리(강아지)는?”

소용없었다.

“폴터가이스트라는 현상이 있더라고. 이유 없이 물체가 막 움직이고 터지고 그런 거라는데 귀신이나 요정이 일으킨다는 설도 있고. 송전탑 근처에서 전자파나 자기장 영향으로 발생한다는 설도 있더라고. 전자제품이 막 저절로 작동하고 터지기도 한대. 참 폴터가이스트란 게 독일어로 시끄러운...”

뾱! 미수의 손가락에 닿은 통화 종료 버튼이 반응했다. 안녕, 잘 자라. 미수는 전화기에 대고 뒤늦은 취침 인사를 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미수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쩐지 주위가 소란스럽다 했더니 튤립들이 깔깔 웃으며 휘날리고 있었다. 네덜란드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공중에 풍차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돈키호테가 올라타 풍차를 채찍질했다. 스페인인가? 으음, 가우디스러운 건축물들이 하나둘 언덕 위에 들어섰다. 문득 바닥을 보니 미수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침대가 아니라 거대한 무당벌레 등이었다. 이, 이럴 수가! 

“꿈이네.”

미수는 시큰둥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자각몽은 숙면의 적이니까. 그렇다고 나 안 할래 하면서 맘대로 깰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깨달은 시점에 이미 피로감 가득이었다. 정신 차리니 삼진 아웃이랄까? 사춘기 무렵부터 겪은 일이라 나름 대처법은 있긴 한데 썩 쓸 만한 것은 못 되었다. 누워서 죽은 척하기. 그래도 그러고 있으면 자신이 꿈의 주인이란 것을 어느 순간 잊게 되고 결국 잠 자체에 빠져드는 때가 왕왕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꾸 미수를 톡톡 건드렸다. 참다못해 고개를 드니 거대한 키티가 미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헬로.”

미수는 분홍 고양이의 인사를 무시하고 다시 죽은 척했다. 그러자 키티는 미수를 흔들어 깨웠다. 

“이 사람이! 인사를 하면 받아야지!”

“아우, 나 좀 가만 내버려 둬. 캐릭터 디자인 주제에!”

미수는 제발 좀 사라지라고 의식을 집중했다. 보통 이 정도면 꺼지는데 말이지. 키티는 꿈쩍도 안 했다. 

“난 네 꿈속 존재가 아니지롱.”

“그럼 키티시계에 깃든 요정이냐?”

“꺅, 어떻게 알았지?”

“꺼져.”

미수는 돌아누웠다. 내 정신세계지만 정말 유치해 죽겠다니까. 반면 존재 가치가 헌신짝이 된 키티는 극도로 흥분했다. 

“네 이년!”

키티는 두툼한 고양이 손바닥(발바닥?)으로 밥상 엎듯 무당벌레를 엎었다. 미수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아, 꿈에서나 맛볼 수 있는 무중력감. 미수는 김연아처럼 공중에서 우아하게 트리플 악셀을 하려 했지만, 중간에 우주인 김소연의 무중력 시범으로 사고가 흐르는 바람에 팔다리가 기묘하게 꼬였다.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따르릉 따르르릉 알람이 울렸다. 

“뭐지?”

옆 공중에서 팔(앞다리?)을 파닥거려 날개짓하던 키티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야, 나!”


다행히 그날 미수는 지각하지 않았다. 뒤숭숭한 꿈 때문에 몸도 마음도 뒤틀려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여튼 지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있게 출근해서 상쾌해 보인다는 말까지 들어 버렸다.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미수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키티시계 덕분인 것 같으니 이따 준지에게 고맙다는 문자나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적어도 또다시 교실 전등에 희롱당하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수업 종료 15분 정도를 남기고 교실 앞 전등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해가 밝은 날이라 문제집을 보는 시야에 불편은 없었지만 자꾸 깜박대니 학생들이 야유했다. 미수도 야유하고 싶었다.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 팟! 역시나 전등이 나갔다. 차라리 나았다. 

쫓기듯 수업을 마친 미수는 곧장 관리부장을 찾아갔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을 때 관리부장은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2교실, 전등 좀 교체해 달라니까요!”

“또?”

관리부장은 심드렁하게 반응하더니 옆자리 대리에게 턱짓했다. 대리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선생님! 글쎄, 내가 몇 번 같이 봤잖아요. 그거 멀쩡하다니까요. 다른 선생님들은 아무 얘기 없어요.”

“아니, 그럼 제가 일어나지도 않은 걸 얘기한다는 거예요? 분명 저 말고 학생들도 다 봤고요. 그냥 한 번 바꿔 달...”

그때 관리부장이 일어나서 미수의 한쪽 어깨를 툭 쳤다. 

“어허, 장 선생님도 참... 알겠습니다. 저희가 다시 한 번 알아볼 테니까 다음 수업 준비하셔야죠?”

아프다고 이 인간아. 미수는 홱 돌아서 나가 버렸다.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과학교과 담당이었다. 그는 교실을 한 번 바꿔 보자는 말에 피식 웃었다. 

“뭐하러요? 괜히 애들 헷갈리게 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옆에서 수학이 거들었다.

“원장 선생님이 허락하겠어요?”

결국 오늘도 수업 때마다 전등이 나갔다. 


밤, 자정이 넘어서 집에 돌아온 미수는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대로 파묻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콜록콜록 기침이 터졌다. 보나 마나 보이지도 않는 먼지들이 방 공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미수는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괜히 서러워졌다. 에어컨을 튼 상태였지만 밖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열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방으로 흘러들었다. 미수는 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토 준지 씨?” 

“무섭게 왜 그래? 사무실에 혼자 있단 말이야.”

크흐흐 미수는 음산하게 웃기 시작해서 결국 키득키득댔다. 

“왜 또 오늘도 뭔가 안 풀렸어?”

“반은 잘 풀리고 반은 안 풀렸어.”

“지각은 안 했는데 전등은 나갔구나?”

꺅,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냐? 미수는 오늘 일에 대해 시시콜콜 말해 주었다. 준지는 무언가 작업을 하는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미수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한마디 던졌다. 

“그 등 네가 갈아 버려.”

“뭐?”

“아무도 안 갈아 주잖아. 그냥 네가 해 버려.”

“야, 그게 쉽냐? 난 봐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

“대부분 남자애들도 처음에 등 갈 때 딱 그 상태야. 왠지 등 떠밀리는 기분에 해 보니까 되는 거지. 그러다 보니 익숙해지고. 대부분의 여자애들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을까?”

그 말을 끝으로 준지는 일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미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내일 해 보고 결과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머릿속이 더욱 멍해졌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미수는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젯밤과 같은 배경에서 거대 키티 녀석이 두둠실한 손을 흔들었다. 잘 보니 은근슬쩍 발톱을 세운 채였다. 어제 일로 기분이 상했나? 미수는 맥 빠진 손짓으로 답했다.

“오늘도 등장하셨군.”

“물론이다냥.”

“냥냥 해도 안 귀엽다니까.”

정곡을 찔린 키티는 크악 하며 털을 곤두세웠다. 

“일본 문화에 메마른 여자 같으니!”

“네가 과도한 애정 환상과 그로 인한 결핍의 상징이란 건 알지.”

“바로 그거올시다!”

키티는 갑자기 정색하고 합이 맞아떨어졌다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자각몽의 짜증에 사로잡힌 미수는 냉정했다. 

“너 말투 갑자기 바꾸니까 되게 이상해.”

키티는 멈칫하더니 뒤돌아 몇 발자국 걸어가서 웅크리고 있다가 돌아왔다. 그동안 미수는 어떻게 하면 저 고양이 손(앞발?)을 한 번 만져 볼 수 있을지 궁리했다. 

“흥, 내가 없으면 출근도 제때 못할 거면서!”

“겨우 한 번 깨워 줬으면서 생색이야?”

“흥, 그 한 번이 다른 인류에게는 작은 걸음에 불과하지만, 너 개인에게는 위대한 발걸음인 것을 모르는 것이야?”

흥분한 키티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워워, 진정하라고. 미수는 키티를 다독이면서 속으로는 대체 이 고양이 캐릭터 설정은 누가 한 거냐고 소리 높였다. 물론 자신이 꿈의 주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결국에는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미수는 생전 좋아한 적 없던 키티가 자각몽 속에 연속으로 나타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트레스 탓? 그래, 어쩌면 키티는 무의식이 의식 쪽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고용한 존재일지 모른다. 만약의 경우지만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미수가 그렇게 나오자 오히려 놀란 것은 키티였다. 어제처럼 무당벌레를 뒤엎으려 했는지 하얀 앞발은 무당벌레 배를 살짝 움켜쥔 상태였다. 미수가 바라보자 키티는 두 손(두 앞발?)을 슬그머니 뒤로 뺐다. 

“정말이냐? 나와 대화하겠다고?”

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티의 눈이 글썽해졌다.

“난 또 개무시당하는 줄 알고...”

“설마, 넌 고양이잖아.”

미수는 아래로 축 처진 고양이 손으로 자기 손을 살며시 뻗었다. 조금만 더하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키티는 주먹을 쥐듯 앞발을 감아 가슴 앞에 모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키티는 왜인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너는 앞으로도 지각한다는 얘기야. 늘 누군가의 보살핌을 스팀팩처럼 달고 있던 당신! 이제 혼자가 됐군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원의 크기가 사실은 과대 착각이었다는 거,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됐습니다. 메롱이다냥!”

“뭐라고?”

미수는 멀어지는 키티를 붙잡고 싶은 듯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나 허공에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만 날아다녔다. 

“키키키키키키키!”


미수는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뒤숭숭한 정도가 아니라 극악한 꿈이었다.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머리 주변에서 키티시계를 찾았다. 찾으면 집어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득 ‘시계’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지금 몇 시지? 휴대전화가 손에 잡혔다. 미수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얼른 쳐다본 전화 화면에는 부재중 통화 9건, 문자 메시지 14건이 표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문자 메시지는 오늘만 아니라 앞으로도 출근하지 않을 생각이면 존중하겠다는 원장의 권유였다. 창밖을 보니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현기증을 느낀 미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몇 시간 뒤, 창밖에 어둠이 내릴 즈음에야 미수는 그나마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다행스럽게 신호음만 울리고 받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때 키티시계가 미수의 눈에 띄었다. 미수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 플라스틱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내부 어딘가 연결이 엉성한지 누르면 삐거덕 삐걱 소리를 냈다. 미수는 자각하고 있는 것보다 손에 힘을 많이 주고 있었다. 달칵, 하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오 마이 로즈워터. 그거 했어? 어때?”

“안 했어...”

“그럼 며칠만 참아. 지금 하는 일만 끝내면 내가 가서 해 줄게. 기사 아저씨처럼 슥 들어가서 슥 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됐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준지는 잠시 침묵했다.

“미수야, 무슨 일 있어?”

그때 틱 하고 키티시계 뒤쪽에 붙어 있던 플라스틱 판이 날아갔다. 건전지 커버인 듯했다. 무심코 만지작대는 미수의 손가락이 빈 공간에 쏙 들어갔다. 미수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새끼, 너 나한테 이딴 걸 주면 어떡해?” 

준지는 미수의 돌변에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데? 뭐가 문제야?”

“키티...”

미수는 속삭이듯 답했다.

“키티? 아아, 너 그거 별로야? 그래서 고민했구나. 나름 귀여운 거 찾은 건데 뭐 네 취향이 아니면 다른 걸로...”

“그게 아니라...”

순간, 미수의 몸은 굳어 버렸다. 어제 아침에 들은 알람이 꿈에서 들은 건지 현실에서 들은 건지 헷갈렸다. 키키키키키 하는 웃음소리는? 

“...건전지를 넣어 줬어야 할 거 아냐.”

준지는 탄식했다.

“아차, 그걸 깜박했네.”




그리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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