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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버추얼 월드(Virtual world)

2006.09.05 16:1109.05

버추얼 월드(Virtual world)

M은 슬슬 지루해하고 있었다.

버추얼 월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한지 불과 1년 만에 M은 구현된 장소라면 안 가본 데가 없었다. 그는 지루함을 타파할 거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임회사에서 제공하는 이벤트 몬스터들을 사냥해도 반복적인 기본 공격 동작만 되는 데에 지루해졌고,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사귀고 교류하는데 흥미를 잃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요즘 기운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을 걸어와도 지나가는 투로 괜찮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상당한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비단 현실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운동, 요리, 사교댄스, 승마 등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보았지만 무기력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아보았지만 어디서든 “별 이상 없는 건강한 육체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마치 짜고 입이나 맞춘 듯이 “생활에 변화를 주어보십시오.”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소심한 M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알겠습니다.”라고 던지듯이 말하고 병원을 빠져나온다.

M은 평범한 30대 초반 공기업 직원으로서 연봉은 3,200만원이고 기복이 심하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를 소유한 성실한 미혼 남성이다.
당일에 부여된 업무는 저녁때까지 반드시 끝내놓고, 추가급여가 지불되어도 절대로 야근 같은 건 하지 않으며 칼 출근과 칼 퇴근을 지킨다.
점심은 반드시 직장 근처에 있는 샐러드 바에서 채소와 과일로 듬뿍 먹는다.

시간관념이 철저해서 여자와 데이트 약속을 해도 꼭 정시에 맞춰서 나간다.

5평 남짓한 원룸에서 살고 있고 낡은 책상과 노트북, 작은 CD플레이어, 차곡차곡 쌓여있는 2단 CD케이스, 방 한쪽에 정연하게 개어진 독신자 이불 세트와 매트리스, 화장실과 부엌이 전부인 소박한 방의 주인인 M은 돈에는 짜고 소심하게 비춰질 정도로 자린고비이지만 가끔 후하게 쓸 때도 있다. 대인관계는 무난한 편이고 깔끔을 떠는 면이 있어서 이틀에 한 번 쓸고 닦으며 가끔씩 청소도 해서 혼자 사는 남자 집답지 않게 깨끗한 편이다.

요리는 찌개류와 볶음밥, 카레를 제일 자신 있어 한다. 차를 즐기는 편이고, 매일 저녁 운동을 하며 술은 가끔 마시지만 취할 기운이 있으면 연말 망년회 자리라도 주량 이상은 절대로 마시지 않으며, 담배는 절대로 피우지 않는 참살이 청년이었다.

M이 게임하는데 필요한 버추얼 헬멧과 본체, 리얼함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주변기기들은 매트리스 머리맡에 놓여있다.

구입비는 풀세트로 백만 원이 넘지만 M은 사는 걸 결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시민이자 직장인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쏟는 열정은 누구 못지않다. 그는 주로 한가한 저녁 시간 이후에 게임에 접속한다.

어느 날, M은 퇴근해서 일찌감치 식사와 운동을 마치고 친구와 몇 분 간 통화를 하고 잠들면 부탁한다는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M은 가상현실게임에 접속했다. 다음날은 공휴일이라서 종일 접속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헬멧을 쓰고 보름 전에 특별 행사하는 매장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추가 센서가 달린 새 장갑을 끼고 패드와 접촉하면 오감에서 실제와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단, 아픔이나 맛 같은 건 센서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느끼지 못한다.

접속에 필요한 아이디와 패스워드는 음성입력 방식이다. 입력하고 나면 푸른 소용돌이가 치는 로딩 메시지가 뜨고 나서 잠시 후에 M은 버추얼 월드에 접속하게 되었다.

버추얼 월드의 필드에 서 있는 M의 아바타는 현실의 M과 비슷한 모습이다. 복장은 평범한 면 티셔츠와 청바지차림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

버추얼 월드는 현실세계를 그대로 가상공간에 구현해 놓았다. 사람들은 가상의 재산을 불리는 방법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땅을 산다. 그들은 주식 시세나 땅값, 집값 변동에 민감하다. 큰 도시마다 있어서 실시간으로 가격을 표시해주는 대형 게시판 앞은 언제나 만원이다.

이 세계에도 경쟁이 존재한다. 보통 재산이나 사냥 전적으로 계산하는데, 사람들은 거기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현실세계와 다른 점은 처음부터 효율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가거나 누굴 붙잡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M은 집값과는 상관없는 한적한 산속에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근처 호수에서 낚시질을 하거나 집 뒤에 있는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낚시꾼 겸 농부로서 유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도 게임 초반에는 욕심을 부려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고 재산이 모이는 대로 산속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 한적하게 사는 방법을 택했다. M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바가 가상세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버추얼 월드에서는 유저에 의한 범죄도 일어난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범죄를 가상세계에서도 실현 가능한데, 강도나 절도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M이 유유자적 호수에 낚싯대 담가놓고 채소밭을 돌보고 있는데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서 M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겠지? 순순히 응하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은 돈이 될만한 걸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M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집 뒤쪽을 가리키고는 작은 창고에 넣어두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들이 우르르 뒤 창고로 몰려가고 잠시 후에 철컥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평온한 일상을 깬 놈들은 죽어도 싸지.”

창고 문에 손을 댄 군인 유저들은 잔인한 함정에 걸려서 리셋 메뉴를 강제로 호출 당했을 것이다. M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계속해서 낚시를 하고 가끔 밭으로 가서 채소를 솎았다.

가상세계 안에서는 바람이 살갗에 와 닿는 느낌도 진짜 같고, 물을 만져보면 차갑다.

구워지고 있는 생선 위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온탕에 손을 넣은 것 같다. M은 수확한 싱싱한 채소를 입에 넣고 씹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씹는다는 행동은 가능하다. 그런데 순간 M은 멈칫했다. 현실세계에서의 채소 맛이 가상의 채소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시 다른 채소도 씹어보았다.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M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인터넷으로 게임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자유게시판을 둘러보았다.

몇몇 유저들이 언제 미각 센서가 업데이트 되었냐고 묻는 게시물들이 몇 개 있었다. 새로 고침 하는 동안에 관련 게시물이 몇 개씩 늘어나고 있었다. 업데이트 게시판을 조사해보았지만 다른 공지는 없었다.

이내 회사 측에서 긴급공지가 올라왔다. 읽어보니 미각센서의 개발은 오래전부터 이야기가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테스트 버전 프로그램을 사내(社內)의 누가 실수로 업로드 한 모양이니 사소하게 느껴지는 맛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게임을 즐겨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에는 예정된 이벤트를 성대하게 연다는 광고가 들어있었다.

거대 집단들은 내부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있을 때는 소속된 사람들이나 대중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관심을 끌만한 떡밥을 던져놓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오늘 열린다는 이벤트도 분명 그 물건일 것이다. 대중이라 할 수 있는 유저들이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당장에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를 원할 것이다. 미래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프로젝트라도 당장에 자신들에게 손해가 간다면 외면하는 이들이 무슨 관심을 보내겠는가. M은 이제 게임을 그만두고 현실로 복귀해야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문 밖으로 다시 나가려는 발걸음이 느려졌다가 잠시 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버에 가끔 있는 렉(Lack)이라는 네트워크 지연현상이라고 생각했지만 10초 정도 간격을 두고 5초 동안 세 번 지연 현상이 일어났다.

채팅창을 열면 또 렉이라며 유저들의 말이 많을 것이다. M은 신경 쓰지 말고 유유자적함을 즐기려고 밖으로 나가려는 데, 알고 있는 모임 회원으로부터 쪽지가 날아왔다.

열어보니, 갑작스런 대량의 버그 출몰로 게임회사가 홈페이지에 긴급공지를 보내서 버그를 잡기 위한 수색대를 파견했고, 유저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해달라는 내용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함께 벌레 잡으러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끝맺고 있었다.

M은 한참 생각하다가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자는 쪽지를 상대에게 보냈다.

오랜만의 여행이어서 짐을 꾸리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버추얼 월드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미들 에이지 월드(Middle age world)와 현대를 배경으로 한 프레센트 에이지 월드(Present age world)로 나뉘는데 쪽지를 보낸 사람은 미들 에이지 월드에 있었다. M은 두 곳 다 아바타를 두고 있어서 서버만 옮기면 됐다.

약속 장소인 미들 에이지 월드의 마을에서 만난 중세 기사 차림을 한 옛 동료와 함께 M은 벌레잡이에 나섰다.

둘은 월드맵 방방곡곡을 누볐지만 벌레는 잘 잡히지 않았다. 버추얼 월드에서 버그 헌터로 이름나 있는 동료도 10시간째 벌레 더듬이도 보이지 않자 짜증을 내며 땅을 툭툭 찼다.

“어떤 벌레도 내 눈으로 2시간이면 찾을 수 있는데, 이 5배의 시간은 대체 뭐지?”

그가 주변을 돌아다니는 벌레 한 마리를 화풀이로 한 대 쳤다.

그러자 벌레의 몸이 빨갛게 변하면서 성을 내듯이 더듬이를 꼿꼿이 세웠다. 화를 내는 벌레 주위의 땅이 기이하게도 0과 1의 숫자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이 놈. 바이러스에요! 보아하니 타입은 분해형!”

벌레는 그대로 공격해 올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어디론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M과 동료는 벌레의 뒤를 쫓았다.

한참 쫓다가 M이 돌부리에 발이 채였다. M은 아픔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요. 갑자기?”

M은 채인 발의 아픔을 호소했다. 동료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픔이라니. 이 버추얼 월드에 아픔이라는 감각은 없잖아요.”

사실 M은 깊이 생각도 할 줄 아는 성격이기도 했다. 부딪친 아픔이 조금 가시자 이 버추얼 월드 내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게 생각났다.

M은 동료의 양해를 구하고 그의 얼굴을 꼬집어 비틀었다. 그도 아프다며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은 벌레 쫓는 걸 잠시 중단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아픔에 대해 물었다.

이내 답신들이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게임회사 게시판이 폭주를 하고 있고 신형 장비로 교체한 유저들에게만 나타나는 증세라며 장비를 벗고 구형 장비로 교체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둘은 교체를 위해 로그아웃 메뉴를 열고 ‘나가기’를 클릭했다. 메뉴는 손가락 모양의 커서가 눌려질 때마다 단지 빛만 발할 뿐이었고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않았다.

채팅창을 열어보니 많은 신형 장비 유저들이 로그아웃이 안 된다는 불만이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전투 시에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이 안전지역을 찾아 모여든다는 모양이었다.

“일단 우리도 마을로 가자고요.”

동료는 그렇게 말했지만 M은 추구하는 바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좀 전의 벌레를 뒤쫓기로 한 것이다.

M은 동쪽의 나무가 패어진 광경을 봤다. 버추얼 월드는 리얼함을 강조하는 까닭에 주변의 오브젝트를 치면 파괴되거나 움푹 들어간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복구되지만 시간이 꽤 된 나무는 복구되지 않았다. 그 흔적이 멀리 계속되고 있었다. M과 동료는 그 흔적을 따라서 벌레를 추적했다.

벌레는 의외의 장소로 인도했다. M의 기억에는 분명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움푹 들어간 벽 부근에 숨겨진 새로운 장소로 갈 수 있을 듯한 통로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당사자와 바로 옆에 있는 친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삑삑 소리가 들렸다. 동료에게 온 긴급 쪽지였다.

‘게임 도중 보스 몬스터에게 패한 유저 김 모 씨가 쇼크사 했다는 군!’

시스템 에러 따위가 생겨서 고통을 느끼게 되었으니 성인 전용의 고어(Gore) 모드를 켜놓았다면 괴물 발톱에 베이거나 이빨에 씹혀서 분수처럼 솟는 피와 함께 느껴지는 아픔과 함께 쇼크사한 것일 게다. M은 통로에 접근한 순간 온 긴급 쪽지가 마치 안에 들어가면 죽는 걸 경고한 게 맞는다면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M은 오랜만에 희열과 의욕을 느꼈다.

동료는 일단 돌아가서 탐색조를 편성해서 오자고 했지만 M은 새로운 장소를 탐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막무가내였다. 앞서서 뛰어 내려가 버렸다.

가장 밑까지 도착한 그곳은 마치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반은 기름진 땅에 꽃과 나무가 자라고, 순한 짐승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 아래에 위치한 반은 메마른 땅과 불타는 절벽 아래에 용암이 고여 있었고, 원한을 품은 망령들이 들리지 않는 괴성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 사이를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어서 서로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쪽지가 왔다. 뉴스 속보 내용이 발췌되어 들어있었다.

‘테러리스트 집단과 해커들이 손을 잡고 세계적인 게임인 버추얼 월드에 해킹 시도! 감염되면 실제처럼 고통이 느껴지는 P-바이러스가 서버에 침투! 신형 장비 사용자들은 주의요망.’

버추얼 월드의 신형 장비는 국내에서 3만 개, 세계에서 5만 개 정도가 팔려나갔다는 기사를 근래에 접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바이러스 감염대상은 잠재적 대상도 포함하여 일일접속자까지 고려해 보면 못해도 몇 천, 최대 8만 명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절벽 아래서 벌레가 기어왔다. 크기가 송아지처럼 커져있었다. 놀랍게도 벌레가 말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보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리는 음성이었다.

“경애하는 각국의 유저들이여. 우리는 신의 영광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성스러운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 우리는 A국과 R국, 그 동맹국들에게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염려마라. 만일 잘 풀리면 바이러스를 고쳐줄 백신을 투여할 것이다.”

누군가가 협상이 되지 않을 때를 물은 모양이다.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용된 해커들이 다량의 괴물들을 여러분 앞에 풀어놓을 것이다.”

섬뜩한 말이었다. 동료에게 해결책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쪽지를 보내기로 했다. 몰래 내용을 써서 보내려는데 갑자기 블록 되면서 전송이 취소되었다.

“감염대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우리에게 감시되고 있다.”

모든 쪽지 전송도, 채팅도 멈췄다. 단지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람과는 대화가 가능했다.

M은 대화가 가능한 동료에게 속삭였다.

“어딘가 돌파구가 있을지도 몰라. 이 맵 주위를 조사해보자.”

그렇지만 이 넓은 맵을 단 둘이서 뒤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 상황에서는 외부의 협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다고요.”
“어쩔 수 없나. 보험은 들어두긴 했는데.”


M의 친구는 M의 집에 와 있었다. 문은 열려있었고, M이 죽은 듯이 누워서 게임에 접속한 채로 있었다.

방금 뉴스에서 버추얼 월드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하고 오는 길이었다. 얼마 전에 신형장비를 샀다며 좋아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버스 정거장 두 개 거리를 단박에 뛰어왔다.

M의 몸을 흔들어보았는데 깨지 않았다. 친구는 M의 방에 있는 노트북에 몰래 깔아둔 해킹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부팅되기를 기다리면서 친구를 돌아보았는데, 아직은 평온한 숨을 쉬고 있었지만 언제 파랗게 변하거나 괴롭게 몸을 뒤틀고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단순 흥미 차원에서 버추얼 월드에 걸어진 락(Lock)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무료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보안 담당자는 불법적으로 월드에 드나드는 자가 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신고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용자 차단도 하지 않았다.

제 집 드나들 듯이 한 장소를 다시 들어오는 건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월드를 제 몸처럼 조종하고 있는 해커가 다른 침입자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염병할. 트랩을 지랄 맞게 많이도 깔아놨군.”

경보가 삐- 삐- 하고 울렸다.

―시스템 내부에 인가되지 않은 사용자가 침입했습니다. 퇴치를 시작합니다.

무슨 일인지 보안 시스템이 제대로 기동을 시작했다. 컴퓨터 전자음이 들린 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보안 시스템이 높은 벽처럼 밀려와서 침입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쪽만 아니라 저쪽도 느리게 밀어내고 있었다.

“제길! 내 친구를 가상세계에서 구해야한다고!”

M의 친구는 전화를 걸어서 믿을만한 해커 동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 사이에 몇 차례의 시도를 한 끝에 수 겹의 블록을 간신히 돌파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방어를 다시 걸어온다. M의 친구와 월드에 침입한 해커, 보안 시스템 구축자가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삼파전이야! 저쪽도 만만찮은 친구인 모양이군!”

M의 친구는 M마저 잠시 잊을 정도로 신들린 듯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지원을 받고, 모든 공격법을 조합해서 해커 쪽에 틈을 만든 친구는 그 사이로 M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로그아웃이 가능하게 했다.

M은 유일하게 버추얼 월드에서 벗어나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뉴스 속보가 업데이트 되었다. 머리말은 다음과 같았다.

‘버추얼 월드에 몬스터가 출몰, 50여명 사망! 부상자 속출!’

내용은 구역을 가리지 않는 몬스터들의 출현으로 신형장비를 사용하는 사람들 몇 명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희생자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끝에 쓰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뉴스가 들어왔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각국은 경찰병력과 사이버 수사대를 동원하여 해커들을 추적하고 있는 중! A국은 각 국에 협조공문을 보냈으나, C국은 거부해서 A국이 경고하고, R국은 권고하고 있는 중.’
“C국에 해커가 많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나.”
“그들 때문에 A국 첩보국이나 국방성도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하니까. 뉴스위크 잡지에까지 올라왔었지. 다른 나라야 말할 것도 없지.”

M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락과 방어가 심해서 한 사람 구출하는데도 애먹었다고 대답했다.

“수 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까지 구하는 건 무리야. 저쪽에서 바이러스를 거두고 인질들을 풀어주는 방법 외에는 없지.”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뉴스에 접속하니까, 이에 대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세계적인 가상현실게임 버추얼 월드에 대한 사이버 테러 사건에 대해서 해당국들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성명을 발표하고, 사이버 인질(Cyber hostage)들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부당한 위협으로부터 평화와 안녕을 확립하기 위해서 사이버 로봇 부대를 창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외부 조종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프로그램 내에 침투해서….”

M은 말했다.

“영화처럼 매트릭스가 현실화 되는 건 아닐까?”

M의 반 장난어린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뉴스들도 속보로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지금 신고로 집계된 사망자의 숫자만도 전 세계에 수 백 명에 육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용자가 많은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에 대한 사람들의 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음모론이니, 배후에 어떤 거물이 있느니, 별의별 사견(私見)들이 다 나오고 있는 걸 보고 M의 친구는 피식하고 비웃는다.

“해킹을 주도한 해커 놈들은 즐거워 보였어. 마치 재밌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해킹을 하고 있었어. 이건 과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동류 인간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초월적 감각이야.”

‘정말일까?’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깊이 생각해보니 해킹 경력만 10년이 넘은 베테랑의 말이니 믿음이 간다.

며칠 후의 뉴스에는 인근에 주둔하던 무장 경찰들이 급파되어 테러리스트들을 격멸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주범이라 할 수 있는 해커들은 현장에서 도망치고 없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고요한 암살자처럼 흔적 없이 들어왔다가 재미만 처녀 도둑 키스하듯 하고 흔적 없이 떠난 게로군.”

비스듬히 누워 뉴스를 시청하던 M의 친구가 말했다.

버추얼 월드 회사에서 사망자와 피해자에 대한 조의와 배상 발표를 하고, 서버 보안을 더욱 강화시키겠다는 사장과 보안 담당자의 발표가 있었다.

보안 담당자는 의외로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표정을 한 사내였다. 탁자 위에 놓인 손이 가늘고 약해보여서 저 손으로 어떻게 키보드를 두드릴까. 하는 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M은 친구의 말림도, 당분간 신형장비로 접속하지 말라는 회사 측의 공지도 듣지 않고 버추얼 월드에 접속했다.

M은 마지막으로 로그아웃한 지점인 지하 동굴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밖으로 나와서 인근 도시로 가보니 전번 소동에도 불구하고 버추얼 월드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왕래하고 있었고, 온갖 형태의 거래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만일에 인류가 실제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도 이처럼 빠르게 복구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시청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한적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M은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축 늘어진 셔츠와 힙합바지를 입은 10여 세 가량의 어린애가 서있었다.

“아직도 신형장비로 돌아다니는 바보가 있었네.”

어린애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아서 중성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신형장비를 착용하면 회사 측에서 주는 메리트가 있긴 하지.”

M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네가 저번 해킹을 주도한 해커지? 내가 굳이 신형장비로 접속한 이유는 널 만나고 싶어서야.”

그리고 의외로 어린애 같다며 소감을 말하자 그는 키득키득하고 웃는다.

“이건 내 아들의 몸이야. 실제의 나는… 그렇지. 당신과 거의 차이나지 않을 걸.”

M은 빙그레 웃었다.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겠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

어린애가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국적도, 언어도, 사상도 너무 다르다. 시스템의 보조로 언어의 장벽은 사라졌지만 다른 건 달라. 너무나도 달라.”

M도 대꾸한다.

“그렇지 않다. 전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해.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배설하고,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고,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쉬고, 외로우면 친구를 찾고, 때가 되면 짝을 찾지.”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아집 따위가 그것을 방해한다.”

순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껏 인류는 사소한 것에 동질성을 가졌고, 화합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자기주장만 하는 질긴 고집과 이득을 더 얻으려는 욕망 때문에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는가.

해커는 우울한 표정을 짓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실제적인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가상세계야 말로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좋은 조건을 지녔다고 생각해서 필요한 사람만을 남기고 걸러내고자 했었지….”

해커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건 어렵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 그들은 악하면서도 약했지.”

해커는 몸을 돌렸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혹여나 마주칠 일이 없기를….”

그는 그 자리에서 로그아웃해 버렸다. M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이후로 M에게는 10살 내외의 아이와 함께 있는 젊은 남녀가 있으면 응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걸 보고 직장 동료들은 장난스럽게 어서 결혼하라고 조언하지만 M은 대답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 가족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그 해커를 다시 만나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스스로도 자신의 속내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버추얼 월드에 접속해보았으나 해커와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M은 버추얼 월드 게임을 끊었다. M은 기복이 심한 리듬의 상승과 저하를 겪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으로 돌아왔다.

간혹 가다 친구나 동료들과 가장 큰 맥주 컵을 부딪치지만 혀에 닿는 술은 항상 쓰고, 맥은 물에 풀어진 솜사탕처럼 되었다. 그러다가도 재밌는 것과 부딪치면 눈빛부터가 변하고 몸놀림이 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살다죽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금방 회의적으로 마음이 뒤바뀌고 해서 M은 염세주의자처럼 되어갔다.

몇 달 후에 M은 친구와 가상공간에서 동료였던 자의 권유와 청에 못 이겨서 딱 한 번 버추얼 월드에 접속했다.

청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데, 우연찮게 다시 해커와 만날 수 있었다. 여전히 10살짜리 어린아이의 몸을 쓰고 있었다.

“거 악연 한번 대단하군. 원치 않은 인간을 또 만나게 되다니.”

그는 놀랍게도 정상적인 유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아직 이상적인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M은 어째서 그렇게 이상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다. 해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썩은 쥐새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그리고 해커는 그 자리에서 로그아웃했다. 그 뒤로 해커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단지 버추얼 월드 어디에선가 독특한 닉네임을 쓰는 유저가 사람들을 규합해서 사이버 공화국을 건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할 뿐이었다.

M은 게임을 그만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홀린 듯이 버추얼 월드에 접속할 때가 있는데 언제나 산속에 마련된 한적한 집에서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고 연못에 낚싯대를 담그고, 채소를 가꾸는 일을 하며 꿀맛 같은 낮잠을 즐기며 유유자적함을 즐겼다.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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