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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내게도 소녀가 필요해!

2004.11.16 17:4511.16

도로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자면, 여고생 둘, 회사원 하나, 남중생 둘, 아주머니 1.5명 (분명히 그 뱃살은 정수(整數)라 할 수 없다.), 기타등등. 모두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이 녀석이 언제쯤이면 시체가 되어 나자빠질까. 이 녀석이 언제쯤이면 천사가 되어 승천을 할까. 둘 중에 하나. 아니라면 통계 수치 밖의 일을 기대하는 녀석들이겠지.

언제나 통계 수치 밖에서는 조물주가 힘을 행사하신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그런 걸 기적이라 부른다.

[여자 친구 급구! 내 뺨을 때려 줘!]

소년은 그런 황당한 문구가 적힌 하드보드지(紙)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채, 푹 숙여서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코 옆에 큰 점이 하나 있어, 곧 흑색종에 걸려 죽을 운명이라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부류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갑자기 억대를 요구하는 천재 의사가 들이닥쳐, 당신 3일 후에 죽겠어, 하는 행운(?)이 찾아 올 운명이라도 그렇게 숙여서야 어디.......

곧 여기저기서 나름대로의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저런 게 재밌나? 요즘 애들은 이상하게 노네."

"까였나봐. 그러니까 저런 또라이 짓을 하지."

"학생. 학교 안 가나? 친구들이 괴롭히면 선생님한테 말을 해."

확실히 정신병자가 활보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광인은 언제나 천둥번개가 치고 음울한 안개가 골목길을 메울 때, 기괴한 웃음소리와 포스트 모던한 옷차림으로 무장을 한다. 행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죽음의 고통, 그리고 경찰서 전화 번호를 상기하게 만든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여기 브래지어를 한 씨름 선......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할 일이 좀 많은가. 학교에도 가야 하고, 회사에도 출근해야 하고, 집에 가면 애새끼들이 왜  김치찌개로 3일을 버티냐며 투정을 하고, 게다가 소년은 울고 있었다. 보도 블럭에 비라도 뿌린 듯, 얼굴 아래에 눈물 방울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와서 뺨 대신에 코라도 후려친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비록 우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어도, 몇 달만 있으면 댐이라도 건설해야 할 지경이었다.

거리는 차와 사람과 무관심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여자 친구가 사달라고 한 구찌 핸드백이나, 내일 접대할 때 마실 발렌타인 30년을 어떻게 하면 짜가와 바꿀까나, 그걸 눈치챌까 못챌까, 세금 떼먹는 업소로 가야지, 오늘 저녁에는 금메달을 따야 할 텐데 같은 것을 생각했다. 사실 소년은 스포츠라면 질색을 했다.

소년이 관심있는 건 오직 하나. 그것은 소녀였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음양의 이치로 둘은 정합(整合)하나니. 소년은 소녀를 몰랐다. 오직 브라운관과 모니터와 환상 속에서만 보았다. 그러니 깔끔함이나 단정함 같은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환상은 환상을 낳고, 공상(空想)과 낳은 자식은 민법상 호적에 등재할 수 없다며 청원 중이었다.(실제로 후처 자식이라도 본처 소생으로 호적에 등재는 가능하다.) 소년은 여자라고는 여동생과 엄마말고는 구경도 못해 본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하교길에 우연히 만나는 정도였다. 그러다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스토커와 순애보 사이를 위태롭게 오고 간 셈이다. 그러다 결국 어느날 소녀가 말했다.

"너 변태야?"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나 좋아해?"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울고 있었다. 소년은 잘 울었다. 모래를 쥐면 순식간에 새어나가듯이. 소녀는 황송하게도 친히 눈물을 닦아 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증명해 봐."

소녀의 설명을 다 들은 소년은 차라리 죽여달라 말하고 싶었다. 소년은 겁쟁이였다. 외출을 할 때도 가스 밸브를 5번 점검하고, 문이 잠겼는지 6번 확인한 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가스 밸브를 점검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 악인이라도 사람을 구할 때가 있고, 겁쟁이라도 허허 웃으며 목을 내놓을 때가 있다. 그 때가 도래했던 것이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밤의 여왕이 떠올라 희미하게 죽어갈 때, 소년은 그제야 하드보드지를 내렸다. 눈물이 마른 눈가를 문지르니 눈처럼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그 속에는 희망과 절망이 5:5 비율로 섞여 있었다. 제대로 된 요리사라면 한 번 구워내는 것만으로도 미각을 승화시킬만큼 오묘한 조합이었다.

주변은 암흑과 정적이 싸우는 소리로 너무나 시끄러웠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아무런 빛도 볼 수 없었다. 시청 직원에 따르면 예산을 따내지 못해 가로등 정비는 내후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아마 어떤 바보같은 녀석이 물섞은 발렌타인 30년으로 접대를 했겠지.

소년은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집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소녀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었지만, 이젠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용기는 이미 절판(絶版)된 상태였다. 출판사에 문의해 봐도 다시 찍어낼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힘든 하루가 선사한 통증이 전신을 흘렀다. 100만 볼트짜리, 직렬 50만개 건전지에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팠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개근상 못 타겠다.

시체처럼 죽어있던 소년은 불현듯 몸을 뒤척였다. 경련을 일으키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뒤졌다. 간신히 목걸이 하나를 건져냈다. 손 하나만으로 목걸이를 여는 데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빛이 바랜 장식물 안에서 작은 사진이 빛을 발했다. 소녀와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꼭 붙어 있었다. 소년은 사진을 자신의 심장이라도 되는 양, 쓰다듬고 보듬으며 잠에 들었다.

소년은 결석을 하지 않고 다음날 학교로 향했다. 아마도 개근상만큼은 타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깨가 무릎보다 더 처져있던 소년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교무실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부려먹는 선생이었다.

"네가 ......이 어머니가 전학 수속 하실 때 도와드렸지?"

"예."

"어제 밤에 급하게 전화가 왔는데, 중요한 목걸이를 그저께 잃어버린 것 같다고 하시네. 딸하고 찍은 사진이 있어서 꼭 찾아야 한다는데. 혹시 네가 봤나 해서."

"못봤는데요."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잘 찾아보렴."

소년은 선생이 말하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떠나간 지금, 이것마저 없다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 버릴 것 같았다. 소년은 주머니에 들어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사진 하나에 불과한 것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옛 종족의 유물같았다.

급식을 먹고 나자, 어제 일은 선사시대에 일어난 불의 발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어제 소년을 본 양아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소년을 흉내내며 너무나 즐거워했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소년은 웃었다. 양아치들은 침을 몇 번 뱉고는 알아서 물러갔다.

집에 혼자 돌아가며 소년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빌어먹을 짓이며, 개 같은 규칙에 따르고 있다고. 이런 지랄맞은 세상 따위는 없어져야 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말 걸 그랬다고. 거지 같은 인생, 다 죽어버려. 개 같은 인생에 개 같은 새끼들. 다 개 같아서 빌어먹을 거야. 그리고 소년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소년은 온 몸이 굳어 그대로 기름을 치지 않은 아이언 골렘이 되었다. 소년의 몸에서 발열하는 것은 오직 하나, 소녀의 모습이 담긴 목걸이 뿐이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마음을 잇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자면, 남고생 둘, 택배 알바 하나, 초등학생 둘, 아저씨 1.5명 (분명히 그 허벅지는 정수(整數)라 할 수 없다.), 기타등등. 모두 놀라움이 빠져나올 눈초리였다. 이 녀석이 언제쯤이면 좀비가 되어 돌아다닐까. 이 녀석이 언제쯤이면 후광을 뿜으며 승천을 할까. 둘 중에 하나. 아니라면 통계 수치 밖의 일을 기대하는 녀석들이겠지.

언제나 통계 수치 밖에서는 조물주가 힘을 행사하신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그런 걸 기적이라 부른다.

[남자 친구 급구! 내 뺨을 때려 줘!]

소녀는 그런 황당한 문구가 적힌 하드보드지(紙)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있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은 웃음꽃으로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너무 당당해서 도통 비웃을 수가 없었다. 당장 대륙간 탄도탄이 떨어진다 해도 그녀를 울릴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부류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땅콩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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