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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목이 (re)

2003.08.25 14:0008.25

-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딸들을 위해 -





- 목아, 우리 목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깍깍깍---
저놈의 까마귄지 까친지는 밤낮도 없이 울어대는 녀석들이다. 아침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 어찌나 시끄럽게 재재거리던지 귀청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목이는 새벽녘 꿈자리가 뒤숭숭해 잠을 설쳤던 불평을 까치들에게 쏘아붙였다.

"시끄러어엇---! 저 시커먼 새들은 하필 저기다가 집을 지어서 맨날 시끄럽게 해대?!"
"가시나야! 깨워주노니 고맙다카지는 몬하고 와 목청 키우노! 가시나 소리가 아침부터 담을 넘으면 재수없다카이!"

창문 너머로 쥐어박듯이 쫓아온 것은 할머니의 칼칼한 음성이었다. 까치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에 깔고 있어도 내용을 듣는데 하나 지장 없을 만큼 할머니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울렸다.

"할머니는 여자 아냐? 맨날 가시나가 어쩌고, 지지배가 어쩌고!"
"하이고∼ 조 문디 가시나 주디 나불대는 것 좀 보래요. 쪼매난게 입만 살아가지고 할매한테 몬 하는 소리가 없데이!"
"쳇!"

이쯤 되면 시원한 모시 이불 속에 더는 머물 수 없다.
목이는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입안에서 주워 삼키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잠옷 윗도리를 벗으며 발로는 이불을 대충 말아버린다.
욕실로 나선 목이는 오래되어 희뿌연 얼룩이 지그재그로 얽혀 있는 낡은 거울 앞에 서서 얼굴부터 확인했다. 아침부터 싸움을 두 건이나 해댔으니 기분은 최악이다. 자연 입은 삐죽 나오고 뺨은 퉁퉁 불어있다. 막 자고 일어나 팅팅 부은 눈까지 합치면 볼만한 얼굴이었다.
찌그러진 양철 대야에 찬 물을 가득 부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숨을 크게 들이킨 목이는 대야에 얼굴을 담그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다 ‘푸우--!’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걸 두 세 번 반복한 뒤 얼굴을 살살 닦고는, 이번엔 거울에 올 풀린 주황색 빨랫줄로 줄로 붙들어 매 놓은 이빠진 빗을 들어 꼼꼼하게 머리를 빗었다.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칼이 찰랑찰랑한 느낌이 날 때까지.

'머리는 항상 엄마가 빗어줬는데….'

어쩔 수 없다. 곁에 없는 것에 미련을 두어봤자 마음만 상한다는 것을 목이는 안다. 그래도 서운한 건 여전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쳇--. 꿈, 생각나버렸네.'

엄마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아빠 생각이 따라온다. 또렷한 연관을 알 수 없지만 어떤 과정으로든 이어져버린 기억들은 머리 속에 줄줄이 엮여 하나를 끄집어내면 고스란히 따라 나오는 것이다.
새벽녘 잠을 설치게 만든 꿈. 그건 아빠에 관한 꿈이었다.
아빠는 꿈속에서 이렇게 묻고 있었다.


- 우리 목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뭐라고 대답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 그때 까치가 울어댔기 때문은 아니다. 꿈꾸었던 일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다. 목이는 그 일이 다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그때 무슨 대답을 했던 건지. 어떤 생각을 했던 건지. 그리고 뭘 하다가 그런 질문을 들었던 건지.

"가시나야! 밥 퍼뜩 묵고 핵교나 가그라! 할매 일 도와줄 것도 아님서 뭘 그리 꾸무대쌌노! 설거지는 해 놓고 가거래이!"
"알았어, 할머니! 그만 좀 불러대!"
"가시나가요!"

'가시나'로부터 시작해서 할머니의 잔소리는 또 줄줄이 사탕이다. 하지만 날마다 듣는 소리.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 목이는 마루에 앉아 밥을 먹었다.
문간을 나선 목이는 잠시 우두커니를 했다. 목이는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큰길로 빠져야 하는 등굣길이 내키질 않았다. 날이 가물면 퍽퍽해서 먼지 날리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질척거린다. 비록 10여분간의 짧은 길이라 해도 그 때문에 옷이며 신발이 지저분해지는 것이 목이는 무척 못마땅했다.
하기사, 그 무엇인들 마음에 차겠는가. 1년 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서울에서 쫓기듯 전학 온 이래 주변 환경부터 자신의 처지까지,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것을. 가장 큰 문제는 항상 자신을 챙겨주던 엄마도, 지금은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아빠도, 모두 곁에 없다는 것이다.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흐른다. 하지만 아빠 생각을 하면 미간부터 일그러진다.
목이가 아빠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그 중 한가지는 '목이가 뭐가 되고 싶어하는지'를 물어봤다는 것.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아빠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손은 컸는지, 목소리가 컬컬했는지 아닌지 역시도. 아빠와 살뜰하게 지냈던 기억 따위는 전혀 생각나질 않았다. 그저 혼자 떨어져 할머니 댁에 맡겨지기 직전, 정신 없었던 때의 기억만이 생생하다. 그때 엄마는 많이 울었고, 아빠는 언제나 굳은 얼굴로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도 엄마 따라 많이 울었었다.
대문 앞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섰던 목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흙 길 위로 첫 발을 떼었다.





  들목날목 자라목∼
  어디어디 숨었나∼
  바위틈에 숨었나∼
  연못밑에 숨었나∼
  
  목 목 무슨 목∼
  손목이냐 발목이냐∼
  까딱까딱 내목이지∼
  달랑달랑 네목이지∼
  

"야이 머스마들아! 고만 몬하나! 느그들 샘한테 다 일러뿐다!"
"일러바라, 일러바라!"
"와 몬 이르는데? 샘 불러와바라∼!"
"느그들! 내 손에 잡히면 죽는다카이!"
"함 잡아 바라!"

- 와당탕탕탕~
△△국민학교, 점심시간.
교실 안이건 복도건 찧고 까부는 소리들이 왁짜하게 울려 퍼졌다. 목이네 반인 6학년 1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짓궂은 사내애들이 여학생 놀리는 장난이 없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더불어 의협심 펄펄 넘치는 여자 애의 새된 목소리도.
실갱이 끝에 복도와 교실을 오가는 드잡이질이 벌어지지만 정작 놀림을 받은 당사자는 "흥, 유치해."라며 한소리 내뱉은 후 샐쭉한 얼굴로 책상만 지키고 있다.
사내애들 쫓아다니느라 힘겨워서 그런 것인지, 걔들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인지, 쫓아다니던 여자애들은 씩씩대며 자리에 돌아왔다. 그곳엔 인심 좋게 웃고 있는 순옥이와 놀림받던 목이가 나란히 앉아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아, 니는 화도 안 나나?"

선두에 서서 뛰어다니던 연실이가 불퉁한 소리를 내뱉는다.

"뭐가."
"쟈들이 니 놀리는 거 아이가."
"……."
"와 말이 읎……."

옆에 있던 지영이가 연실이의 팔을 잡아당긴다. ‘와?’하고 물으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던 연실이는 지영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목이의 빨개진 눈을 보고서야 입을 다문다.
순옥이의 손이 아까부터 목이의 손위에 가만히 얹혀 있다. 연실이도 둘이 잡고 있는 손위에 슬몃 제 손을 얹는다. 목이는 쑥스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결국 손을 빼버렸다.

"벼, 별로 아무 것도 아니야. 저딴 애들은 신경도 안 써. 내 이름은 아주 좋은 뜻이니까. '목'은 아주 중요한 장소나 때를 말하는 거랬어. 그래서 '소중하다'는 뜻으로 우리……, 우리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니까. 난 신경 안 쓴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머리 속에 퍼뜩 떠오른 제 이름 뜻. 그걸 친구들에게 설명하려다보니 그게 아빠가 해 준 말이라는 것이 생각나다니. 목이는 친구들이 '그러냐', '좋겠다'고 주억거리면서 등을 두들겨 주는 동안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의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지만.





하교 길, 목이는 항상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어 아랫말 사는 순옥이와 함께 길을 빙 둘러가곤 했다. 산허리를 둘러 가는 중간, 아랫말과 윗말이 나뉘는 그곳에는 두 마을이 공유하는 신령한 장소가 있었다.
산이래 봐야 언덕이나 구릉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높이. 듬성듬성 심어진 소나무 사이로 서걱서걱 걸으며 언덕을 내려서다 보면 척 보기에도 수 백년은 묵었음직한 굵은 고목에 알록달록 색색의 천이 늘어져 있었다. 마을 서낭나무였다.
순옥이는 이 앞을 지날 때면 잠시 멈추어 서서 중간에 집어 온 반반한 돌 한 개를 나무 앞에 쌓인 돌탑 위에 올려놓고 눈감고 중얼거리다 일어선다. 그걸 처음 보았을 때 목이는 '미신'이라며 흉봤지만 무던한 성격의 순옥이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더랬다.
순옥이가 그런 버릇을 지니게 된 것엔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순옥이네는 아버지 병 때문에 가산이 기울었다고 했다. 헌데 순옥이가 3년을 하루같이 이곳에서 빌고 난 뒤 아버지 병세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것……이라는 목이의 합리적 생각은 이럴 경우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순옥이가 왜 저러는 지 알지만, 그래도 목이에겐 이런 것들이 여전히 '미신'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건 그저 커다란 나무가 아닌가. 물론 어른 셋이 팔을 힘껏 벌려도 다 못 두를 만큼 굵은 몸통을 지닌 오래된 나무이긴 하지만 어째서 가지에 알록달록 색깔 띠를 매달고, 무슨 날마다 와서는 동리제를 지낸답시고 난리를 피우고, 그 앞에 돌탑을 몇 개고 쌓아 놓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는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사정을 알고부터 입밖에 내어 탓하지는 않지만, 목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섰다. 그걸 본 순옥이는 멋쩍은 듯 히죽-- 웃어 보인다. 그것이 또 길가에 서 있는 돌부처 미소 같다. 목이는 제발 저린 마음에 그걸 가지고 엉뚱한 타박을 한다.

"아유, 넌 웃는 게 그게 뭐니? 그러니까 원식이가 놀리는 거 아냐! 묘지 앞 석상이라고!"

순옥이의 투박한 사투리에 비하면 목이의 것은 서울 깍쟁이 말투 그대로였다.
날 때부터 서울살이를 했다지만 외지에 와 어느 정도 지내다보면 아이들이란 것이 옆 사람 말뽄새나 억양을 금시도 좇아하련만, 목이는 일부러 더 서울 말씨를 고집했다. 그 때문에 사내애들에게 유독 더 놀림 받으면서도 만 일년이 지나도록 목이의 말투엔 사투리의 흔적이 없었다.

"너희 아빠 많이 나으신 거 같더라? 일전에 보니까."

괜시리 타박하고 나니 미안한 마음에 안부인사가 절로 나온다. 순옥이는 여전한 미소를 지은 채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데, 엊그제 시내 큰 병원에 또 다녀오셨다 아이가. 메칠 전에 고뿔이 심하게 걸리서 온 식구가 다 혼쭐이났다."
"그랬구나."
"근데, 느그 어무이는 안즉 소식 읎드나?"
"……."
"미안테이."

순옥이가 사과를 하지만 목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 아빠 때문이었다.
목이가 엄마랑 함께 못 사는 것도, 엄마로부터 계속 소식이 없는 것도.
'내가 어리다고 모르는 줄 알아?' 목이는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일전에 무슨 드라마를 보니 '보증'이라는 게 잘못 되어서 집안에 있는 전자제품들하고 가구에 빨간딱지 붙고 하는 것이 나왔다. 그건 목이도 겪었던 일이었다.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무서운 얼굴로 돌아다니며 목이의 책상이며 침대에 뭐라고 적힌 딱지를 붙였던 걸 봤기 때문에 안다. 그땐 잘 몰랐던 의미를, 그사이 머리 조금 컸다고 이젠 이해한다. 그리고 얼마 후 목이를 시골 할머니 댁에 부탁한 뒤 엄마와 아빠는 종내 소식이 없는 것이다. 목청 큰 할머니 옆에 목이 혼자 떨구어 놓고 말이다.

"순옥이 너, 차압이 뭔지 알아?"
"츠압? 그게 뭐꼬?"
"아냐. 됐어."

어느새 갈림길이었다.
순옥이는 윗말로 가는 길을 들어서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총총히 걸어가는 목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외쳤다.

"목아아아∼ 낼 보자아! 잘 가그래이∼!"

종종걸음으로 내닫던 목이가 제자리에 오똑 섰다. 돌아보니 갈림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순옥이는 아랫말로 향하는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간 듯, 보이질 않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목이는 오던 길을 되짚어 갔다.
서낭나무 앞까지 다가선 목이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멀리 비닐하우스 근처 채마밭에 오락가락하는 그림자를 제하면 근처엔 사람이 없었다. 목이의 손이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조심조심 빠져나온 손안엔 커다란 돌이 잡혀 있다. 검고 납작하고 반질반질한 돌은 정성 들여 닦은 듯 윤이 흘렀다.
제 키 만한 돌탑. 조금 전 순옥이가 쌓아 놓은 돌 위에 목이의 검은 돌이 올라갔다. 목이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숙인 채 뭐라고 중얼중얼 했다. 감았던 눈이 금세 번쩍 뜨이고 약간 상기된 뺨을 한 목이는 이내 길 위를 총총히 내달았다. 목이의 등뒤로 서낭나무 가지에 걸쳐진 오색 천들이 인사를 하듯 하늘하늘 흔들렸다.





6학년 1반은 아침부터 왁자하니 들뜬 분위기였다. 다른 날이라고 해서 조용하다는 얘긴 아니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교무실에 물 떠놓으러 갔던 철구가 날 듯이 교실로 돌아와서는 새로 전학 온 애를 봤다고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날렵한 안경을 쓰고 세련된 차림을 한 그 애 엄마와 자기네 반 담임 선생님이 뭔가 얘기 나누는 것을 봤으니 틀림없다는 거였다.

"그럼, 가는 우리 반에 오는 기가?"
"암만. 가 어무이가 울 샘하고 이바구 하던데 더 말해 뭣하겄노."
"머스마가 가시나가!"
"퍼뜩 좀 말해 보그라!"
"숨 좀 돌리고 말하자이. 큼--, 목이 칼칼한데, 누구 물 좀 떠 온나."

오늘 주번이 자신이라는 건 철구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철구는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얼마간의 시간 동안 얻게 된 시한부 권력을 한껏 누려보려는 거였다. 그 의도가 빤히 보여 아니꼬왔던 연실이가 뒤에서 한마디 쏘아붙였지만, 말 듣는 것이 급했던 다른 친구는 냉큼 물 한 컵을 부어와 철구에게 얌전히 내민다. 안 그래도 주름잡혔던 연실의 눈썹사이가 더 좁아졌지만 철구는 아랑곳없이 느긋하게 물을 마셨다.

"카-- 션타! 금 이자 다시 말해 볼까이. 니, 아까 뭐라캤노?"
"가시나재?"
"아이다, 머스마일끼다. 맞재, 철구야!"
"어찌 생겼노."
"키는 크드나!"
"설 아니까 안갱잽이일끼다, 내 말이 맞을끼다."

아이들 사이에서 두서 없는 단정과 다른 질문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조금 후면 눈으로 확인할 사실을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목이는 자신이 전학 올 때에도 저랬을까 싶어 묘한 기분이었다.
지금은 친한 아이들도 생겨 학교 생활에 나름대로 재미를 붙였지만 목이는 전학 온 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외톨이였었다. 지난 생각이 나자 오늘 전학 온다는 친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살아봤던 자신이 서울서 왔다는 아이의 처지를 잘 이해할 것이었기에.

"샘 오신다!"

드디어 복도로부터 철구의 짧은 권력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함에 몸이 달아 교무실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몇몇 아이들이 마치 양반 행차를 알리는 수행원인양 소리소리 질러대며 달려왔던 것이다.
반 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이 모두 복도 쪽 창가와 문간에 수박통처럼 매어 달렸다. 까만 유리알 같은 눈엔 호기심을 반짝반짝 달고 있는 수박통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게도 선생님이 아니라 그 옆에서 자박자박 걸어오는 전학생이었다.





오늘은 어째 그런 날인가보다. 학교에서도 새 사람 탓에 시작부터 들뜬 분위기더니, 집 역시 다른 날과는 달랐다. 항상 밭일 나가 있는 할머니가 오늘은 부엌에서 분주했다. 작은 반상을 들고 돌아서던 할머니는 목이를 보곤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쎄빠지게 오랬구만, 지 애비 온다는데 이년, 인자 슬금슬금 기들어오나?”
"엄마 왔어?”

현관에 놓인 신발이 세 쌍.
목이는 부리나케 마루 위로 올라섰다.

'오늘은 니 애비 올지도 모르니까 일찍일찍 오니라.’

그건 할머니가 날마다 입에 달고 있는 말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이 말을 철썩 같이 믿었더랬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횅한 집안. 실망은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할머니한테 '거짓부렁'했다고 타박해도 소용없어 차츰 귓등으로 흘려듣게 된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오늘만은' 일찍 온단 말인가. 그런데 계속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오늘은 현실이 되었다.
목이는 목청껏 엄마를 부르며 안방 문을 열었다.

"엄마!"
"쉿--! 목아, 아빠 주무시니까 조용."
"엄마아아~!"
"우리 목이 왜 이러지? 아빠 주무신다니까. 나가 있으렴."
"……."

한참만에 만난 엄마는 목이를 본 것이 반갑지도 않은가. 아빠 걱정에만 여념이 없다. 엄마는 젖은 수건을 짜서 아빠 이마에 송글송글 솟아난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목이가 자꾸만 옆에 붙으며 보채오자 엄마는 정색을 하고 돌아보더니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방을 나오던 목이는 할머니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지나치는 것을 불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속상한 마음에 마당에 내려선 목이. 입술은 삐죽삐죽,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서글프고 화가 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속으론 '아빠 미워! 할머니 미워!'하는 말만 번갈아 되뇌였다. 돌멩이를 힘껏 차보지만 그 정도로는 분이 안 풀린다.
문득 뒤에서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엄마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목이와 눈이 마주치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리는 엄마. 목이는 조금 전 서운한 것도 다 잊고 엄마 품에 뛰어들었다.

"아유, 우리 목이. 안 보는 새 이렇게나 컸네. 이젠 정말 처녀가 다 됐구나."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보고 싶었단 말이야. 아앙∼! 엄마는 목이 안 보고 싶었어? 목이가 엄마를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알아? 엄마 보게 해달라고 날마다 빌었단 말이야. 그런데 엄마는 소식도 없고, 할머니는 맨날 잔소리만 하고. 엄마아아∼!"
"그래, 그래…."

두서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 모처럼 아이가 되어 부려보는 응석.
엄마는 다 안다는 듯 목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이제 오늘부터는 엄마와 같이 사는 거다. 예전처럼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고, 엄마가 머리 빗겨 주고, 엄마와 손잡고 시장 보러 다니고, 엄마와, 엄마와…….
그런 생각으로 행복한 마음이 목이의 가슴속에 넘쳐 올랐다.





서울 전학생 김동호의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몰렸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눈동자를 한 아이들. 쭈뼛한 모습으로 궁금한 것을 묻는 아이들에게 전학생은 어찌 들으면 간지럽기까지 한 서울 말씨로 걱실걱실 대꾸도 잘했다. 사내아이의 매끄러운 표준말이 귀에 낯설어 어색하게 몸비듬 하던 아이들도 조금 후엔 이것저것 말시키는 재미에 빠져 말투는 상관하지 않았다.
동호는 도시 애치고는 성격이 무던한 편이었다. 아이들이 같은 말 또 물어도 상관하지 않고 대답해주었고 신기해 보인다고 제 물건을 만지작거리면 망설이지 않고 빌려주었다. 그래서 목이네 반 아이들 대부분은 동호를 좋아했다. 다른 반에서 보러온 아이들 역시 그런 이유로 대개는 동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속으로야 어떤 궁리인지는 몰라도 끝내 동호 주변을 둘러싼 무리에 끼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목이도 그 중에 하나였다.

"목아."
"왜?"

순옥이가 그 특유의 웃음기 어린 얼굴로 옆에 앉은 목이를 부른다. 샐쭉해있던 목이는 좀 날카로운 말투로 대꾸하지만 순옥이는 상관치 않고 말했다.

"니는 전학 온 아 하고 말 안 하나?"
"말……, 할 때 되면 하겠지. 그건 왜?"
"그기……. 자 맨치로 니도 서울서 왔으니까 말이 통할 끼라 생각했든거 뿐이다."
"궁금한 거 있으면 순옥이 너도 저기 가서 얘기하렴."
"아이다. 내는 별로 궁금한 거 읎다. 여기 앉아 있어도 아들 하는 말 다 들리는데 뭐."

그렇게 말하고 히죽 웃어 보이는 순옥이의 얼굴은 해맑았다. 말이나 행동이나 항상 순박하고 진실된 순옥이. 목이는 괜시리 예민해져서 쏘아댄 자신이 부끄러웠다.
뺨이 벌개진 것을 감추기 위해 고개 숙이면서 목이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책상위로 돌아온 손안엔 사탕 하나가 들어있다. 목이는 그걸 순옥의 책상에 슬그머니 올려두고는 시침 뚝이다. 그러고는 괜시리 죄도 없는 교실 창문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목이는 우루루 모여있는 아이들 틈에 끼어 들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보이는 것들에 이상한 기분일 뿐이었다.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인지는 잘 몰랐다. 전학생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되어주려던 호의가 어느새 은근한 심술로 바뀌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여럿 앞에서 대놓고 심술 부릴만한 염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입술이나 비죽히 내밀고 있을 뿐이다.
상식이는 더했다. 반에서 제일 장난꾸러기인 상식이는 목이보다 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교실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예전엔 교실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곳을 쳐다보면 그곳엔 여지없이 상식이가 있었고, 언제든 그 상식이와 목에 핏대 올리며 대거리하는 애는 틀림없이 연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교실의 중심엔 동호가 있었고 연실이 역시 그곳에 있다. 그것도 상식이와 아웅다웅할 때 박박거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동호 앞에 쫓아가 시비를 걸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상식이는 지금 제자리에 앉아 연필을 틀어쥔 채 애꿎은 책상만 찍어대고 있다. 연필심은 이미 흔적도 없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수업 중에 연필 끝으로 책상만 들고판다고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식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부어 있을 뿐이었다. 그 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임마, 최상식!"
"와 그라노?"

방과후 아이들이 청소를 위해 책상을 뒤로 죄 몰아붙일 때였다. 가열이가 교실 한쪽 구석에서 대걸래 자루를 붙들고 있는 상식이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한다. 어딘지 시비조라 상식이의 기분은 더 나쁘다.

"니, 쫄았재?"
"뭐라꼬?"

상식이의 눈이 금세 세모꼴이 되어 치솟는다. 하지만 가열이는 입술에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계속 시비다.

"서울서 전학 온 아가 태권도 3단이라카는 거 듣고 니 쫄아부린거 아이가. 맞재?"
"아이다!"
"아이긴 뭐가 아이고. 얼굴 보니까 그기 맞구만!"
"아이라니까!"
"그래? 그럼 증명해바라!"
"뭐, 뭘 말이고!?"
"안 쫄았다는 거 증명해 보란 말이다."

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교실에서 반 아이들이 청소하다 말고 다들 돌아보았다.
그러자 남자아이들 다툼에 절대 빠지지 않는 연실이들이 한 참견한다.

"뭐꼬? 진짜 유치하다 아이가. 쟈들은 또 와 저러노?"
"그래 말이다. 하루라도 말썽 안 부리면 쎄에 까시가 돋는가부다."

상식이는 이미 가열이한테 몰릴 대로 몰린 상태였다. 가열이의 부추김, 반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는 것까지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기어코 연실이가 던진 한마디에 상식이의 두 손이 불끈 쥐어진다.
마침 양동이에 물 받으러 나갔던 전학생이 옆에 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교실 문으로 들어선다. 상식이는 대뜸,

"야, 서울 전학생! 니 내 쫌 보자!"

하고 외쳤다. 전학생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았지만 정작 상식이 앞으로 다가간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최-상-식! 샘이 아까 뭐라카드노? 새로 전학 온 친구, 괴롭히지 말고 사이좋게 놀그라∼캤재? 캤나 안캤나! 글카고! 서울 전학생이 뭐꼬, 서울 전학생이! 친구 이름을 불러야재! 쟈 이름은 김동호다! 따라해바라, 김-동-호! 그새 까묵읐으면 지금 단디 외 두그라!"

서울 전학생과 줄줄이 쫓아오는 아이들 뒤에 선생님이 따라오는 줄을 어떻게 알았으리. 상식이는 가열이와 전학생에게 흰눈을 뜨다가 선생님께 또 야단을 맞았다. 결국 상식이는 그 날 선생님 손에 귓바퀴를 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가 손바닥 열대 맞고 반성문까지 써야했다.





'집에 있기 싫다.'

일요일. 학교마저 안 나가는 날. 목이는 새벽 댓바람부터 무슨 볼일인지 분주하게 집을 나서는 엄마와 밭 일 나가시는 할머니의 뒤통수에 대고 퉁퉁거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할머니의 잔소리 뿐. 결국 목이는 아빠와 둘이 남았다.
목이는 마당을 향해 난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아빠의 기침 소리. 점심 후 아빠 머리맡에 새로 자리끼를 놔두었던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물 정도는 혼자 마실 수 있을 텐데. 목이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외면했다. 조금 후 안방 쪽에서 컵에 물 따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등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던 목이는 그 소리에 어깨에서 힘을 빼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병치레중이니 시끄러울까봐 친구들을 데려올 수도 없었다. 그나마 심심함을 달래줄 TV는 화면도 지글거리고 잡음만 요란해서 알아들을 수도 없다. 대사를 듣기 위해 볼륨을 올리는 건 꿈도 못 꾼다. 그것 때문에 이미 할머니한테 여러 차례 혼났기 때문이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나 싶었던 할머니가 TV 전원 코드 끝에 끼우는 검정색 뾰족이를 빼갔기 때문에 어차피 볼 수도 없다.

'할머니 미워! 미워! 미워!'

엄마 아빠가 할머니 집에 온 지 닷새나 지났지만, 목이는 엄마 얼굴 보는 것도 힘들었다. 엄마는 종일 아빠 뒷바라지를 하지 않으면 뭔가 볼 일이 있다고 한참동안 밖에 나갔다가 어두워지면 돌아오곤 했다. 엄마와 같이 잔 것도 첫날 뿐. 다음 날부터 엄마는 안방을 차지한 아빠와 자고 목이는 할머니와 자야했다.
목이는 엄마를 붙들고 엉엉 울었던 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 아빠가 아픈 건 아픈 것이고 목이는 엄마와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목이 차지가 되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게다가 할머니가 밭일 나가고 나면 아빠 간병은 목이 차지. 별로 반갑지도 않은 아빠의 초췌한 얼굴만 종일 대하는 것에 목이는 짜증이 났다.

"목아, 목아?"

아빠의 목소리가 목이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자, 목이는 눈살부터 찌푸린다. 마지못해 '네!'하고 일어서서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빠는 오른손으로 이불 옆에 놓인 단장(短杖)을 잡고 앉아 있었다.

"아빠 화장실 가는 것 좀 도와주렴."

평소보다 아랫입술이 더 튀어나와 있는 목이의 얼굴을 보며, 아빠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신다. 하지만 목이 눈엔 아빠 얼굴에 땀이 많이 난 것도, 얼굴이 예전에 비해 참 많이 야위고 창백해진 것도, 아빠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목이는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아빠의 왼편으로 다가섰다. 아빠의 큰손이 목이 어깨 위로 올라오자 목이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곧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야! 아프잖아!"

아빠의 손이 목이의 어깨를 너무 꽉 잡았던가. 목이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팩 돌리는데 "미안하다. 다음엔 살살 짚을게."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목이의 눈은 제 어깨 위에 올려진 아빠의 손을 보고 있었다. 아빠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자 곧 앞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가면서도 자꾸만 아빠의 손, 정확히 말하면 왼손 새끼손가락이 눈 끝에 걸렸다.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만 보이는 뭉툭한 손끝. 손톱이 없는 그 공간이 이상하게 눈에 걸린다. 아빠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할 때 잘렸다는 손가락. 예전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목이는 뭔진 몰라도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에도, 다시 나와서 안방까지 돌아갈 때에도, 아빠가 이불 위에 눕도록 도우면서도 목이는 종내 그 일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빠는 고맙다고 하시면서 목이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었다.
목이는 이불 옆으로 비죽 나온 아빠의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아빠의 이불을 다른 때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덮어드리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마당 댓돌 위에 오도카니 섰던 목이의 발이 꼬물꼬물하다가 신을 꿰어 신는다. 자박자박 걸어가는 발길은 어느새 대문간을 지나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걸어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목이는 아랫말로 가는 길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더 나아가다가 뚝 멈춰 섰다.

300백년동안 마을을 지켜왔다는, 아름드리 굵은 몸에 색색의 띠를 두르고 선 마을 수호목. 옆에는 이미 예전에 꼭대기까지 차버린 뾰족 돌탑과 막 생겨나기 시작한 낮은 돌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목이는 나무 뒤편으로 돌아 땅속으로 굵게 뻗어 내린 뿌리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거긴 저쪽 갈림길에서도, 이 편 숲길 쪽에서도 잘 안 보이는 위치였다.

목이는 오는 길에 주워 온 길죽한 돌로 뿌리 사이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딱딱하고 네모난 상자가 하나 나왔다. 나무의 속살로 서걱서걱 잘라 만든, 어디 전통 음식 포장용 도시락처럼 생긴 작고 납작하고 조금은 허술한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목이는 빈 상자 안을 한참 말없이 들여다보다 뚜껑을 닫고는 있던 자리에 다시 파묻었다.
목이는 엄마 아빠가 돌아왔던 다음날, 그때에도 이곳에 와서 뿌리 사이의 흙을 파냈었다. 엄마가 돌아오면 이곳에 자신의 보물을 넣어 묻으리라, 목이는 아무도 모르게 서낭나무에 그렇게 빌어 왔었다. 상자는 그때 보답으로 묻어 놓은 것이었다.

보물은 어디로 갔을까. 재작년, 엄마 아빠와 바닷가에 갔다가 만들었던 조개껍질 목걸이는 정성이 가득 들어간, 목이의 첫째가는 보물이었다. 서낭나무가 상자 속에서 목이의 보물을 꺼내간 걸까. 누군가 우연히 들쑤셔보다가 상자 안에 있는 것을 꺼내갔을까. 하지만 누가 꺼내간 거라면 상자 채로 꺼내갔지, 빈 상자를 다시 묻어두진 않았을 거야.

목이는 낮게 솟아오르기 시작한 돌탑 위에 새로운 돌을 하나 조심스레 얹어 놓았다. 그리곤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인 채 입 속으로 새로운 소원을 종알종알했다.





학교 끝나고, 나서는 길에 운동장 한켠이 시끌시끌했다. 목이가 보기에 남자아이들은 죄 거기 몰려 있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시비가 붙은 듯 보이는데 중앙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에건 발빠른 연실이가 잽싸게 앞장을 선다. 그 뒤를 순옥이가 따라가고, 뒤쳐져 있던 목이는 연실이를 부르며 따라가려다가 옆에 있던 아이들 서넛이 모여 떠드는 말을 듣고는 멈춰 섰다.

"오늘 동호랑 상식이랑 붙는다 안 카드나."
"누가 그러드노."
"가열이가 그래샀드라. 아까 수업시간에 상식이랑 동호 사이에 종이 쪼가리가 왔다갔다 했다카드라."
"하믄, 저 가운데 서 있는기 동호랑 상식이드나?"
"가 보문 알 일이재, 와 묻노."
"그라몬 안 될낀데. 어카노! 큰일이데이!"
"뭐가?"
"동호 말이다. 우리 할매가 글카는디, 동호는 아픈 아라 카드라."
"무신 소리고? 동호 자는 태권도도 삼단이고 유도, 검도, 그리고, 좌우간 '도'자 들어간 거는 다 했다카던데."
"택도 읎다. 아프믄 서울에 존 병원 많쿠만 와 이런 촌에 오노? 말도 안된다이."
"그거는 내 알 바 아이고. 좌우간 우리 할매가 동호네 할매랑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동호 자는 아파서 여기 와 있는기라 카든데. 상식이 주먹 실틴디, 가 맞고 앓아누우믄 우야노!"
"참말이가?"
"내, 은제 실없는 소리 하드나."
"글카몬, 얼른 샘한테 말해야 안카긌나."
"안된다이. 정정당당하게 결투신청한 싸나이들 대결에 일러바치는기 어딨노? 글카니까 지집아들은 치사하다는 소릴 듣는기다."
"하이고, 치아라. 쪼매난 것들이 무신 사나이라꼬. 글카고, 내가 지집아지 그럼 머스마가? 벨 멍충이 같은 소리 다 듣는다이."
"얼라? 쟈들 어데 가노?"

한참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릴 모르는 척 듣고 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운동장 쪽을 가리키며 놀란 얼굴이다. 목이가 운동장 쪽을 쳐다보니 아까 아이들이 우글거리던 곳은 이제 텅 비어 있고 교문 밖을 나서는 한 무리의 꼬리가 보일 듯 말 듯이다.

"그냥 가나?"
"용식이 니, 잘못 듣고 온 거 아이가?"
"아이다. 분명히 가열이가 그랬다. 동호랑 상식이랑 오늘 한판 붙는다꼬."
"그런데, 아들이 와 그냥 가노?"
"내도 모르제."

어느새 텅 빈 운동장. 옆에서 한창 떠들어대던 아이들도 교문으로 죄 달려가고, 조금 못 미쳐 천천히 걷던 목이만 덩그라니 남았다.
돌아올지도 모를 연실이랑 순옥이를 기다려야할까. 목이의 걸음이 늦은 것은 그런 생각 탓이었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목이는 너른 공간에 저 혼자 남은 것이 어쩐지 무서워 어깨를 움찔했다.
생각해보면 연실이들은 목이가 뒤쳐진 걸 잊고 그냥 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목이는 어디선지 들려온 큰 소리에 놀라 후닥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치는 목이를 지켜보고 선 것은 학교 소사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목에 둘렀던 수건으로 코를 풀다말고 끼약--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섰던 소사 아저씨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옆에 내려놓았던 연장통을 챙겨들었다.





목이는 퉁퉁 부은 얼굴로 마당 한구석에 놓인 절구통만 노려보았다. 할머니는 그런 목이를 못마땅하다는 듯 새우눈을 하고 쳐다보신다. 학교 파하자마자 바로 왔는데, 아직 어깨에서 가방도 내리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목이가 대문 들어서는 순간부터 잔소리를 해대셨다.
할머니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낮 동안 땀에 절은 옷도 갈아입고 아빠 점심상도 챙기실 겸 들어오셨다가 또 목이가 늦는 듯 싶어 걱정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제나저제나 마루에서 목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찾아 나서야 하려나 싶어 일어설 때에야 대문 열고 들어서는 손녀. 왜 늦었냐고 불쑥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으니 손녀는 걱실걱실 대답은 않고 눈살부터 찌푸린다. 그게 또 못마땅해, 할머니는 손녀를 대 놓고 나무랐다.

"가시나가, 지 애비 아프다는데 옆에 단디 붙어 있을 양이지 오데 그리 만날천날 짤짤거리고 싸돌아댕기노! 오늘부텀은 내 수시로 들이다 볼틴께, 대문 밖에 발 낼 생각도 하지 말그라. 알았나 몰랐나?"

오늘은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목이 속도 모르고 윽박지르고만 있으니 목인 또 목이대로 속이 상했다. 목이가 노는데 정신팔려 집을 비운 것은 몇 번 안 된다. 다른 날은 딴 이유가 있었고, 또 집을 비운 시간도 얼마 안 된다.

"할머닌 바보야! 목이 오늘 수업 늦게 끝나는 날이라서 그렇단 말이야!"

억울한 마음을 변명하려고 꽥-- 하는데 고개 푹 숙이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할머니는 휭하니 나가고 안 계신다. 자연, 아무도 없는 마당에 듣는 사람 없는 말이 빙 돌다가 맥없이 흩어져버린다.
둘러보니 정말로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한 집 안. 눈가에서 흘러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눈물을 소맷부리로 슥 훑어낸 목이는 성큼 마루로 올라서 제일먼저 안방부터 기웃해본다. 아빠는 깊이 잠이 들었나보다. 쉭쉭 숨소리만 났다.
제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목이는 마루에 나와 숙제장을 펼쳐들었다. 시원한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교과서를 넘기는데, 실은 글자 같은 건 눈에 안 들어온다. 아닌 척 했지만 동호랑 상식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고 서낭나무 밑에 묻어두었던 상자속도 궁금했다.
동호랑 상식이는 정말 싸우러 갔을까? 그럼 누가 이길까. 동호가 아프다는 말은 참말일까. 그냥 볼 때엔 튼튼해 보이던데. 그리고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보물은 정말 어떻게 된 걸까.
서낭나무 밑둥, 깊게 옹이져 골이 생긴 굵은 뿌리 사이는 목이정도의 어린애가 웅크리고 앉으면 길 쪽에선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한 낮, 뙤약볕이 쨍쨍할 때에도 나무 사이의 골은 항상 그늘져 있었다. 게다가 서낭나무라고 해서 아이들도 함부로 나무를 타고 놀거나 하진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 파묻었는데.

'정말은 누굴까?'

이것저것 생각하던 목이는 부엌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학교 다녀온 지 벌써 한시간 반이 넘었다. 목이는 손안에 들고 있던 연필과 지우개를 바닥에 굴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애들이 구경꾼을 달고 싸우러 갔다면 저수지 옆 공터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쯤이라면 싸움은 벌써 끝났을 터이고, 아쉬운 대로 서낭나무에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오늘은 연실이랑 순옥이도 없었으니 지름길로 오느라 서낭나무 앞을 지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할머니를 떠올린 목이는 아까 풀지 못한 억울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런 속 얘기를 나중에라도 시시콜콜 할머니에게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 건 미리 말하면 효험이 떨어진다고 누군가 한 말을, 목이가 굳게 믿고 있었던 탓이었다.





서낭나무에 도착하자마자 목이는 주위를 한번 살피는 것과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둔 돌 꺼내는 일을 했다. 언제나처럼. 나무 옆에 새로 올라가고 있는 돌탑 위에 돌 올리는 소리가 작게 '또각' 울렸다. 여느 때처럼 두 손을 모으고 한참 중얼거린 목이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서낭나무 주위를 빙 돌았다. 목이가 툭 튀어나와 있는 굵은 뿌리를 타고 넘어 제 비밀 장소로 들어서는데, 발 밑에 뭔가 뭉클하고 밟히는 것이 아닌가.

"으악!"
"아야!"

막 소리를 지른 두 사람은 둘 다 제 손으로 제 입을 막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상대방을 알아본 순간 더 놀라 눈은 더 커졌다. 말없이 마주 보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낮추고 나무 둥치로 숨어들었다.

"너, 넌……?"
"……어떻게."

둘 다 동시에 말을 꺼내려다 주춤한다. 곧 목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넌 전학생이지? 김……동호."

목이는 마치 너 같은 애 잘은 모른다는 듯, 굳이 확인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동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넌 목이지?"
"어, 어떻게 알아?"
"같은 반이잖아."
"그래도……."
"애들한테 들었어. 너도 서울서 전학 왔다고."
"……."

목이는 왠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었다. 목이가 아무 소리 않자 동호도 가만있다. 그 침묵이 어색해서 목이가 나도 너에 대해 뭔가 안다는 식의 얘길 했다.

"넌, 엄마 아빠랑 살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산다며?"
"그래."
"……."
"……."

또 말이 끊겼다. 어쩐 일인지 동호는 교실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말이 없는 편인 듯 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말을 시키는 건 반 아이들 쪽이었다. 동호는 대답을 잘해주는 것뿐이었고.
목이는 그제서야 진작 물었어야 했을 것을 물었다.

"넌 왜 여기 있니?"
"그게……."

낮고 어둡게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도 분명히 보일 정도로 동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겸연쩍은 듯 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어대던 동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해 진 다음에 집에 들어가려고."
"왜?"
"저기……, 조금 전에 상식이랑 저수지 옆 공터에서 싸웠거든. 그래서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걱정시켜드릴까 봐. 해가 지면…… 할머니 할아버지 눈이 침침하시니까 잘 못 보실 것 아니야."

목이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동호 팔 다리 여기저기에 생긴 상처와 멍이 보인다. 목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옆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있기에 무심코 집어 들었다.
나뭇가지를 뱅뱅 돌려가며 흙바닥을 들쑤시고 있으려니 딱히 누구에겐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는 맨날 할머니하고 싸우기만 하는데 동호는 할머니 걱정하실까 봐 저러고 있단다. 동호는 지금 으스대느라 의젓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얘기해보니 동호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목이는 이곳에 살게 된 후 한참이나 지나서 발견한 자리였는데. 동호는 잘도 알아냈구나 싶었다.

"으응. 여긴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곳이라는 걸 들었거든."
"뭐?"
"실은 여기…… 나온대."
"뭐, 뭐가? 너……, 여기가 서낭나무라고 귀신 얘기 같은 걸로 나 겁주려고 그러는 거야?"
"아니, 귀신이 아니고, 뱀 말이야."
"으……!"

그동안 몇 번이나 왔어도 뱀 같은 건 못 봤는데. 어쩌면 물릴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목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다음부터는 작대기라도 들고 다녀야 하려나.
소스라치던 목이는 이상하다 생각이 들어 동호를 흘겨보았다. 혹시 이 자리를 자기가 혼자 차지하려고 저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막 솟아나기 시작할 무렵 동호가 또 얘길 시작했다.

"예전부터 여긴 뱀들이 자주 나왔대. 뱀이 지나다니는 길이라나. 그래서 여기 마을 이름도 뱀골이잖아. 뭐 땅꾼들이라면 뱀 잡으러 올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야……."
"땅꾼?"
"뱀 잡는 사람들을 땅꾼이라고 한대."
"그, 그런데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난 뱀을 좋아하거든."
"이상한 애구나, 너?"
"응, 그런 소리 자주 들어."
"……."

둘은 그러고는 조금 더 얘기를 했다. 목이는 동호네 엄마가 동물을, 그 중에서도 뱀을 연구하는 박사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이 뱀이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걸 알려준 것은 동호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뱀은 보통 뱀이 아니라 구렁이처럼 큰 뱀이란다. 동호 할아버지 말로는 큰 뱀은 영험해서 함부로 사람을 상하게는 않는다나.
동호는 어릴 때 엄마의 연구를 따라다니느라 뱀에게도 몇 번 물려봤고, 그래서 뱀을 잘 안다고도 했다. 그렇게 항상 함께였던 엄마가 지금 교환교수라나 뭘로 외국에 나갔다는 것도 동호는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할아버지 댁에 와 있는 거란다.

"엄마, 보고 싶지 않아?"

동호의 말이 끊긴 사이 목이가 불쑥 물어본다.

"난, 엄마랑 떨어져 있는 동안 엄마가 되게 보고싶었거든."

순옥이한테도 연실이한테도 쑥스러워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말이 동호에게는 술술 나왔다. 앵돌아져 있던 마음이 풀려서인지 특별한 장소에 둘만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동호는 무슨 말이든 나눌 수 있는 아이인 것만 같아 좋았다.

"응. 그야 보고 싶지. 하지만……. 난 아빠가 더 보고 싶은걸."
"아빠가? 너네 아빤 어디 계시는데?"
"우리 아빤……, 저어기……."

그러고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호. 목이는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

"미안."
"뭘. 그게 네 탓도 아닌데."
"아빠, 많이 보고 싶니?"
"으응. 실은, 난 아빠에 대해서 잘 기억도 못 해.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 내가 기억하는 건 아빠가 하얀 방에서 길다랗고 휘어지는 빨대 같은 걸 잔뜩 꽂은 손으로 내 머리를 만져주시던 것 뿐이야. 난 그때 무서워서 울었어. 그래서 기억이 나. 나중에 사진으로 아빠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어서, 그래서 가끔씩은 아빠를 진짜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구나."

목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호의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었다. 동호의 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엄마 아빠를 못 보고 있던 동안 엄마아빠와 찍은 사진은 목이에게 희망줄 같은 것이었다. 그걸 보고 예전 식구가 다 같이 모여 살 때의 기억이 생각나 서글프고 외롭기는 했지만 동호의 말처럼 '이상한 느낌'이라는 것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참. 목이 넌 얼마 전에 엄마 아빠가 돌아오셨다면서?"

반 아이들은 동호에게 별 걸 다 얘기한 모양이었다. 목이가 대답을 않고 입만 삐죽대고 있는데 동호는 감탄하듯 이렇게 말했다.

"아빠 엄마랑 함께라니. 식구가 다 모여서 좋겠구나."
"좋긴 뭐가. 엄마는 맨날 새벽같이 나가시고 할머니는 맨날 나만 갖고 뭐라 그러시고, 아빠는……, 아빠는 누워만 있는걸."
"아빠가 아프시니?"

목이의 고개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힘이 빠져버린 어깨 위로 단발머리가 무겁게 늘어뜨려진다. 바로 옆에서 동호의 한숨소리가 길게 들려와 어깨를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진 않았다. 동호는 한참인가 뭘 생각하는 듯 싶더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거운 느낌의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네 아빠가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둘 다 말이 없었다.
어느새 서편으로 기울어버린 해가 붉은 햇살을 길게 늘여 두 아이의 머리 위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요 가시나가요! 니 또 우데갔다 오노!"

목이의 귓전엔 벌써부터 할머니의 화통 삶아먹은 목청이 찡하니 울려왔다. 해가 꼴깍 넘어간 서편 산자락 위로 펼쳐진 하늘엔, 붉게 물든 구름이 빗살처럼 길고 곧게 뻗쳐올라 목이의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로 곧장 가. 곧장! 빨리 가란 말이야. 너희 할머니 화 많이 나셨어!
하늘 위로 달려가는 구름이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해 넘어간 것을 살피느라 늦추어졌던 발걸음이 순간 빠릿해졌다.
애초 생각으로는 오고가고 종종걸음으로 사오십분이면 넉넉한 길이었다. 뜻밖에 동호를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해지는 줄 몰랐던 것이 탈이었다. 어느새 하늘 꼭대기가 짙푸른 쪽빛으로 내려앉은 걸 깨닫고 목이가 화닥 뛰어 오르니 동호 역시 이제쯤이면 돌아가도 되겠거니 했다. 그래 각자 제 집으로 들어가마 인사하고 돌아선 후 목이는 뛰고 또 뛰었다.
할머니의 호통을 향해 달려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
주먹 꼭 쥐고 논두렁길을 바지런히 뛰어 마침내 대문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였다. 어쩐 일인지 집 앞이 어수선했다. 이웃집 어른들이 대문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지 않은가. 어른들 중 눈 밝은 한 분이 목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목이, 저 있구마!"
"목아, 야야! 우데갔다오노! 니 아부지가 말이다……."

동네 어른 몇몇이 목이를 향해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목이는 자신이 갑자기 주목받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 오똑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라!"

우루루 몰려있던 어른들 사이를 거칠게 헤치고 나서는 것은 하얀 머리수건을 눌러 쓴 할머니였다. 어리둥절해하던 목이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할머니를 보고 무언가 설명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목이는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무슨 일……."

목이의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목이는 짝--!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제 몸이 확 밀려나는 느낌에 의아해했을 뿐이었다.

"이년! 내가 뭐라카드노! 항상 니 애비 옆에 단디 붙어있으라 안 카드나! 불효막심한 년! 만날천날 노니라 싸돌아다닐 줄이나 알지. 지 애비는 아프거나말거나, 엎어져 놀기 바쁜게 딸이가! 니 같은 거는 맞아야 한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카이!"

얼얼하게 부어 오른 뺨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채, 목이는 마구 휘둘러대는 할머니의 손찌검을 하릴없이 맞고만 있었다. 처음엔 아픈 걸 못 느껴서 그랬고, 다음엔 왜 맞아야 하는 지를 몰라서 그랬다. 그러다가 목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파아! 아프단 말이야! 왜 때려!"
"할매요, 고마 하소. 아 잡겄소."
"꺄악! 할머닌 나만 미워해! 나 같은 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몇 대나 맞는 동안 옆에 있던 동네 어른들이 목이를 감싸 안아주고, 할머니를 붙들어 말렸다. 할머니는 무슨 일인지는 가르쳐주지도 않고 끝내 목이를 때리고만 싶어 안달이었다.

"안즉 아이다. 저 가시나는 한참 더 맞아야칸다!"
"인자 됐소! 고마 하시소."
"한참 멀었다 카이! 핼미 말도 우습게 듣고, 지 애비도 몰라보는 조놈의 가시나는 비 오는 날 먼지날만큼 뚜디리패야 정신을 차릴끼다. 네 언지 조놈의 가시나가 일 낼 줄 알았다카이!"
"할매요, 참말로 고만 하소. 구급차 같이 타고 갔던 메느리가 괜찮을거라꼬 전화도 했는데 와 이러능교."

마을 어른과 할머니 사이의 실갱이가 한동안 이어졌다. 목이는 그동안 맞아서 아픈 뺨이며 어깨 등을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에 목이 메여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목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할 정도였다. 목에선 절로 꺽꺽 소리가 나왔다.

"무에 잘났다고 우노!"
"할머니 미워! 진짜로 미워! 알지도 못하면서 맨날 나 갖고만 그래! 그렇게 아빠가 걱정됐으면 할머니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 왜 나보고만 그래!"
"그래, 니 말 한번 지알했다. 니따운 한식구도 멋도 아니니까 멀리 나가 살그라! 친구가 그리 좋으믄 친구 집에 가 살지 와 돌아오노! 당장 나가그라!"
"알았어. 나갈꺼야! 내가 여기 오고싶어서 온 줄 알아?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도, 메주냄새 나는 구질구질한 집도 다 싫어! 내가 왜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살아야해? 여기 와서 할머니 잔소리만 듣고, 엄마도 못 보고, 그건 다 아빠 때문이야! 아빠 따위 꼴도 보기 싫어! 죽어버려!"

이렇게 외친 후 목이는 입을 가린 채 목을 움츠렸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거북이처럼 몸을 옹송그린 까닭은 할머니의 팔이 높이 치켜올려지는 것을 본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서워서였다. 할머니 속긁을 소리만 골라하려다 저도 모르게 외친 말에 스스로 겁을 집어먹어서였다.
눈물이 그렁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할머니를 올려다보는데, 마을 어른들에게 손이 잡힌 할머니의 도깨비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목이에게 뭐라고 외치신다. 하지만 목이에겐 그 말이 안 들렸다.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다가 뒷걸음질만 쳤다.
할머니 팔을 붙든 마을 어른을 제끼고 할머니가, 아니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깨비가 절 잡으러 올 것만 같았다. 잡아서는 한 입에 꿀꺽 삼킬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달아매 놓고 몽둥이질을 할지도 몰랐다. 그래 목이는 저도 모르게 뒤돌아 힘껏 내달렸다.
그런게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이 아니었는데. 목이는 아빠가 낫기를 바랬는데. 그래서 서낭나무에 열심히 빌었었는데. 아빠가 자는 사이 잠깐씩 빌고 오면 그만큼 아빠가 좋아진 것 같아 마음도 뿌듯했는데.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걸까. 왜 그런 소릴 해버린 걸까. 아빠가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목이 때문에 아빠가 정말로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달음박질쳐대는 목이의 마음 속에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잘못했어요. 정말로 잘못했어요. 아빠 죽지 마요.'하는 외침이 계속해서 솟아 나왔다. 조금 후엔 저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직 달도 다 솟지 않아 어둑한 하늘. 별빛에 의지해 걷는다 해도 도시 같지 않게 가로등이 잘 없는 시골길은 무척이나 캄캄했다. 그래서 목이는 할머니 집에 온 후로 해진 뒤에 나다니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목이에겐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길이 어둡건 밝건 상관없었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눈물에 앞길을 살필 새도 없었던 거였다. 그러니 이렇게 거침없이 뛰어가는 지금 논두렁에 처박혀도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목이는 제 발이 허방질 하는 순간을 기억했다. 발 밑을 단단히 받쳐주어야 할 땅이 발바닥에 느껴지지 않던 그 순간을. 항상 조심했었는데, 오늘은 기어코 논두렁에 빠지고야마는가 싶어 목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이상했다. 물에 빠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몸이 젖은 느낌도 없었다. 몸이 뒹굴 굴려지는 느낌에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목이의 몸은 삼거리 한복판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허방질 하던 느낌이 착각이었을까. 그럴 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린 목이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 달려온 것 같은데 겨우 이만큼이었다. 목이는 아까 집으로 가는 길에 걸었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달려온 것이었다.
목이가 주저앉은 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나무 숲의 검은 그림자를 배경으로 조금 더 높이 솟은 서낭나무의 머리꼭대기가 보였다.
서낭나무가 목일 부른 것일까. 그냥 목이 발길이 익숙한 길을 찾은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목이는 옷이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서서는 서낭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바스락바스락--
밤이라 그런지 가라앉은 대기 사이로 풀 밟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무심코 걷던 목이는 제 발소리에 놀라 멈춰 섰다.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섰는데 저만치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바람일까? 하지만 바람이었다면 저기 있는 풀들만 움직일 리가 없잖아. 잘못 본 걸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풀잎들. 들리지 않는 소리.
서낭나무 둥치, 목이의 비밀장소까지 불과 너덧 걸음.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목이와 서낭나무 사이로 밤바람이 쏴아아∼ 불어왔다.

- 바스스스∼ 사아아∼
이번엔 분명히 들리고 보였다. 바람 부는 틈을 타서 목이의 비밀 장소에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가. 목이는 뒷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굼실굼실 움직이는 모양새가 불길한 상상을 불러왔다. 순간 오후에 동호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여기…… 나온대! 뱀 말이야. 구렁이처럼 큰 뱀이!'
'우우!'

저절로 비명이 솟을 것만 같아 목이는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도망쳐야 하는데. 돌아서야 하는데. 또아리를 튼 구렁이에게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혹시 벌을 받는 것일까. 아빠에게 몹쓸 소리를 하고, 할머니에게 대들었다고. 그래 서낭신이 벌을 주시는 것일까. 구렁이가 되어 나타나 목이를 꽉 물어버리려는 것일까. 목이는 맛없어요. 목이 잡아먹지 마세요. 목이는, 목이는…….

"으아아아앙∼! 잘못했어요. 목이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빌 테니까, 그러니까 잡아먹지 마세요!"

두려움이 안으로안으로 움츠러들다 마침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목이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은데. 아직 아빠한테 아무런 얘기도 못했는데. 새벽녘 잠결에 본 후로 엄마도 다시 못 봤는데. 할머니한테 미안하단 말도 못했는데…….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아앙 울고만 있던 목이는 제 얼굴 위로 가닥가닥 펄럭이는 오색 천이 스쳐 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 울음도 생각도 모두 뚝 그쳤다. 깜짝 놀라 눈만 휘둥그레 뜬 목이의 눈에 비친 것은 낯익은 모습이었다.

"동호?"

동호는 묘한 얼굴을 하고 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어. 발소리가 들리기에 누가 오나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네 울음소리가 들리잖아."

한시름 놓은 목이가 투덜거렸다.

"나야말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구렁이가 나온 줄 알았단 말야!"

동호는 목이의 팔을 잡아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두 아이는 오후에 앉았던 나무 둥치에 다시 자리잡았다.
그런데 동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에 그리 재밌는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목이가 어이없어 한참 쳐다볼 정도로.

"하하--. 목이 너 많이 놀랐구나. 근데 너 잘못한 게 되게 많은가 보다. 그렇게까지 싹싹 비는 걸 보면. 아하하하."
"놀리지 마!"

목이의 타박에 동호는 큰 소리로 웃던 것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어도 눈가엔 여전히 웃음이 매달려 있다. 목이가 아무리 노려봐도 싱글거리는 얼굴이 돌아다본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동호는 이런 말까지 한다.

"목이 너. 할머니한테 야단맞고 도망친 거지?"
"뭐?"
"내 말 맞지? 그치? 철딱서니 없는 소리해서 호되게 야단 맞은 거지?"
"동호, 너 왜 그러는 거야?"

이 애가 아까 그 애가 맞을까. 왜 이렇게 변한 걸까. 혹시 여기 혼자 웅크리고 앉았다가 뱀한테 물려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아까 놀랐던 것도 다 진정되지 않았는데 동호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목이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집으로 갔던 애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목이처럼 혼줄나서 도망왔다고 생각하려 해도 하는 짓이 수상했다.

그리고 얘 옷은 또 왜 이렇지? 하얀 바지저고리 위에 옛날 애기 도령처럼 알록달록한 까치두루마기를 받쳐입은 데다가 머리 위엔 복건을 쓰고 손엔 부채까지 들고 있다. 부채 끝에 길게 늘어진 줄에 무언가가 매달려 짜작거리는 소릴 내며 뱅뱅 도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얘가 조금 전에도 이런 차림이었나?
목이는 헷갈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잔뜩 인상을 썼다. 그 사이 동호는 손을 꼽아 가며 무언가를 헤아린다.

"어디 보자. 할머니 당부 안 듣고 날마다 집 밖으로 나돌지를 않나, 아빠 쓰러진 것도 모르고 친구랑 노느라 정신이 팔려 있지를 않나, 할머니한테 막 대들고, 쓰러져서 위험한 아빠한테 대고는 죽어버리라고 하고. 정말로 잘못한 게 엄청 많구나?"
"그,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뭐가 아냐. 니 얼굴에 다 써 있어!"
"넌 누구야! 넌 누군데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동호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건 비록 동호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동호는 아니었다.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리고 목이를 내려다보는 이 아이는 절대로 동호가 아니었다. 동호가 이런 소리를 할 리도 없었고, 이런 옷을 입을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 일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빠가 위험하다느니, 쓰러졌다느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그건 실수였어. 진짜로 한 말이 아니라고! 넌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뭐가 아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네가 여기 쌓아 놓은 돌들에 네 소원이 다 써 있다고. 니가 아빠 죽어버리라고 소원을 빌었으니 내가 데려가 주지. 자, 어서 나와라. 목이 소원을 확인했으니 너는 이제 나랑 같이 가야겠다."

동호, 아니 동호의 모습을 한 아이가 그렇게 외치자 소나무 숲 사이, 어둠 속으로부터 누군가가 절룩절룩 힘겹게 걸어나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어딘지 낯익은 모습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목이가 입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낮게 드리워진 어둠을 들어 올리고 목이의 앞에 와서 선 것은 단장을 짚고 있는 목이 아빠였다. 창백한 얼굴. 늘어진 어깨. 목이를 바라보는 서글픈 눈.

"아빠!"

목이가 비명처럼 외치며 땅을 차고 일어서는데, 애기 도령 옷을 입은 아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는 부채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목이는 몸서리를 치며 외쳐댔다.

"넌 왜 우리 아빨 여기 데려 온 거야? 우리 아빤 아프단 말이야! 아픈 아빠를 왜 이런 데 데려왔어! 우리 아빤 낼 모래 수술 할 거란 말야!"
"걱정 마. 내가 이제 니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난 성황신이니까 그정돈 들어줄 수 있어."
"무슨 소원?"
"니가 빌었던 소원 말야."
"그러니까 뭐?"

목이는 아이가 말하는 '니가 빌었던 소원'이라는 것이 수상쩍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말하는 소원이라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그건 실수였다니까!"
"뭐가. 아빠 죽어버리라고 한 것? 그게 왜 실수야. 넌 너희 아빠 싫어했잖아. 엄마랑 있고 싶은데 아빠가 그걸 죄다 망쳐놔서 밉다고 했잖아. 그게 네 진짜 소원이고, 그래서 내가 이제부터 그 소원을 들어줄 거라 이거야. 어때, 고맙지?"
"아냐! 내가 빈 소원은 그게 아니었어! 넌 엉터리야! 내가 날마다 손질해서 정성 들여 올려놨던 돌에 빈 소원은 그게 아냐! 난 우리 식구가 다시 모이길 빌었고, 아빠 병이 낫기를 빌었어. 그게 내 진짜 소원이라고! 난 아빠 싫어하지 않아. 좋아해. 사랑한단 말야!"
"거짓말쟁이."
"진짜야!"

목이와 아이 사이에 실갱이가 이어졌다. 그동안 목이 아빠는 짧은 지팡이에 기댄 몸이 힘겨워 비틀거렸다. 목이가 안타까워 한 발 내딛으려 하자 아이가 부채를 촥 펼치며 목이를 막아섰다.
목이는 아이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목이는 아이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이와 목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 같았다. 목이는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아이의 몸을 밀어내려 하다가 오히려 튕겨져서 서낭나무 둥치에 부딪혔다. 어찌나 힘껏 부딛혔던지 목이의 뒤통수엔 커다란 혹이 났다. 그래도 아픔을 참고 다시 일어는 목이를 보곤 여태 히죽거리며 웃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증명해봐."
"뭘?"
"네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해 보라고. 네가 네 아빠를 사랑한다는 걸 말야."
"어, 어떻게?"
"네가 아빠를 사랑했던 기억을 다섯 개만 들어봐. 네 말이 정말이라면 별로 힘들지 않을 거야. 어서."
"그러니까……."

뭐지. 뭐가 있더라. 아빠를 사랑했던 기억 다섯 개라니. 쉬운 건데. 목이는 아빠를 사랑하니까, 아빠도 목이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아빠와 사랑했던 기억을 찾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인데.

"자, 곧 닭이 홰치는 시간이 올 거야. 닭 울음소리가 세 번 울릴 때까지 기억해내지 못하면 난 네 아빠를 저승사자에게 데려가겠어."
"기억한다고! 꼭 기억해 낼 거라고!"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지팡이에 기대 있기 지친 아빠는 이제 아이의 뒤에서 주저앉아 있었다. 아빠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갔고, 아이의 얼굴엔 점점 기고만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런데 왜 생각이 안 나는 걸까. 왜 이렇게 머리 속이 새까맣게 지워진 걸까. 왜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왜 이렇게…….

목이는 그저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목이가 그래선 아빠를 빼앗겨 버린다. 아빠를 뺏기면 목이도 슬프지만 엄마도, 할머니도 슬프다. 그러니까 생각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목이가 안달을 하면 할수록 머리 속엔 아무 생각도 남질 않았다. 정말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비워진 머리 속은 이제 아빠 얼굴마저 떠오르질 않는다. 아이 뒤쪽에 주저앉은 아빠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새파란 얼굴을 한 아빠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아빠!'하고 외쳐보아도 꼼짝도 않는다.

아직 캄캄한 하늘.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날도 밝는 법. 멀리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끼요오오오옥---!

목이는 화들짝 놀랐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단 말인가. 아직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했는데. 아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목이를 재촉했다.

"자, 벌써 첫 번째 울음이다. 넌 아직도냐."

꼬끼요오오오오오옥---!

그리고 연이어 두 번째 울음. 어째서 저 닭은 잠도 안 자고 이 새벽에 우는 걸까. 누가 시끄럽다고 저 닭을 패대기치지는 않는 것일까.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는 게 어때? 이제 곧 헤어질텐데."

아이의 이죽거림. 목이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의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빠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이제 마지막 울음만 남았는데. 닭이 한 번만 더 울면 아빠를 빼앗기는데!

그때였다.
깍깍깍깍---!
어디서 주책 맞은 까치가 새벽부터 설치는지 시끄럽게 울어댔다. 제 둥지를 노리는 뱀이라도 본 것일까. 까치는 귀가 쟁쟁 울리도록 요란을 떨었다.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 본 목이의 머리 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 목아, 우리 목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아, 그래. 아빠가 그렇게 물었었지. 그래서 목이는 대답했어.


- 응, 아빠 목이는 말이야 간호원도 되고 싶고, 과학자도 되고 싶고, 공룡도 되고 싶고, 선생님도 되고 싶고, 물고기도 되고 싶고, 새도 되고 싶고, 엄마도 되고 싶고, 의사 선생님도 되고 싶고…….
- 우와∼ 우리 목이는 되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아?
- 그런데 있잖아. 목이가 제일 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아빠?
- 그게 뭘까?
- 헤헤, 목이는 있잖아. 이 다음에 커서 아빠 색시가 될 거야.
- 정말?
- 정말! 아빠도 좋지?
- 그럼, 아빠도 좋지.
- 그럼 우리 약속!
- 하늘 땅 별 땅!
- 하늘 땅 별 땅, 도장 콩!


하늘엔 고운 쪽빛 너울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밤도 지금처럼. 총총히 박힌 푸르고 노랗고 하얀 별들이 까르르 웃으며 빛가루를 쏟아내는, 별들이 손에 손잡고 모여들어 하얀 길을 만드는 밤. 아니, 저건 길이 아니라 강이었다. 저 맑고 깨끗한 하늘에 넓은 우윳빛 강이 굼실굼실 흘러가고 있었다. 꼭 이런 날, 이렇듯 별빛이 나려 포근한 느낌이면서도 바람이 들어 시원한 밤에 목이는 아빠와  함께 별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했었다. 품에 꼭 안아주던 커다란 어깨. 다정하게 감싸주던 커다란 손. 비비면 까끌까끌 느껴져 오던 따가운 얼굴. 그건 모두 목이가 지니고 있는 아빠의 기억이었다. 아빠를 사랑한, 아빠가 사랑했던.

그제서야 목이에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니었다. 그 기억들은 목이에게 저 밤하늘 별 만큼이나 먼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한숨 자는 동안 꿈속에서 보았던 듯도 느껴졌다. 목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목이의 깊은 어딘가에 꼭꼭 잠겨 있다가 둥실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들은 고구마줄기처럼 하나를 캐니 다른 것도 주렁주렁 달려나왔다.

아빠 무릎 위에 앉아 놀다가 아빠 손가락 아야했다며 호호 불어주고, 다 나았다하며 천진하게 웃던 자신의 모습. 밤늦도록 TV앞에 앉았다 잠이 들어버린 목이를 다정하게 안아들고 방으로 데려다주던 아빠의 체취. 안겨서 흔들거리는 그 느낌이 좋아서 잠이 깨어버렸는데도 모른 척 눈감고 있다가 아빠가 불 끄고 방을 나설 때 놀래켰던 기억. 하루종일 뛰놀다 들어와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면 가만가만 종아리를 주물러주던, 아빠의 커다랗고 따스한 손길.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이 떠오르고, 그리고 아이에게 다섯 가지를 다 얘기를 하기까지. 정말로, 믿기지 않게도, 그 모든 것이 닭의 세 번째 울음이 남긴 긴 꼬리가 허공 속으로 채 흩어지기 전에 이루어졌다.

"……야. 그게 내가 아빠를 사랑했던 기억 다섯 가지야. 아니 여섯 가지인가? 아무튼, 어때? 더 얘기해볼까?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아빠를 사랑한다는 걸."

목이는 더 얘기하라면 더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한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아까까지와는 달리 참으로 다정한 얼굴로 빙그레 웃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동호의 얼굴과 닮아 있던 아이의 얼굴은 이제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아빠였다. 다정하고 포근하게 웃어주는 그 모습은. 아빠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기분 좋게 미소짓더니 목이를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고맙다, 목아. 아빠를 그렇게나 사랑해 주어서."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어느새 하늘 끝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다정스레 웃음 짓던 아빠의 모습이 수증기처럼 햇살 속에 녹아들었다. 아빠는 목이의 귀에 이렇게 말하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나중에 보자. 아빠도 목이 사랑해……."





눈을 떠보니 동호의 얼굴이 보였다. 목이는 뭐가 뭔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동호가 자꾸만 옆에서 불러서 목이는 "응."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러자 동호는 후닥 일어서더니 '할머니!'를 외치며 뛰쳐나가 버린다. 동호의 뒤통수를 쫓던 시선이 낯익은 앉은뱅이 책상과 반닫이에 가 닫자 목이는 그제야 자신이 집에 돌아온 것을 알았다. 주변을 더 살피기가 귀찮아서 목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후 누군가 다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호가 데리고 들어 온 것은 목이 할머니였다. 동호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씩씩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목이의 이마를 짚어 보셨다. 그리곤 열이 없는 걸 확인 한 후 들고 들어온 죽사발의 뚜껑을 열어 놋쇠 수저로 휘휘 저었다. 미리 식혀 놓은 것인지 목이의 입에 부어지는 죽은 미지근했다. 한 수저, 두 수저. 말 없이 누워 죽 한 그릇을 다 받아먹은 목이는 죽사발을 챙겨 일어서는 할머니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할머니, 목이가 잘못했어요."

엉거주춤 일어나다만 자세로 잠시 굳어 있던 할머니는 끄응 소리 한 번 내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목이는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아 할머니가 못 들었나 싶어 이번엔 좀 더 힘을 내서 말했다.

"할머니,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
"낼 아침에,"
"……."
"기차 타고 설 갈끼다. 그때까지 잠이나 푹 자 두그라. 설 가믄 느그 아배 병원 수발 드니라 니 수발 들어줄 짬이 없니라. 니 몸, 니가 알아서 챙기야 한다. 알긋나."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는 방을 나섰다.
목이는 서낭나무 둥치에 기대 정신을 잃고 있던 자신을 찾아 준 것이 동호라는 것을 아직 몰랐다. 자신이 꼬박 만 이틀을 앓았다는 것도, 그 사이 서울 큰 병원으로 이송된 아빠의 수술이 잘 끝났다는 것도 역시. 다만 목이가 아는 것 한가지는 이제 곧 아빠를 만날 거라는 거였다. 그건 할머니가 말해주기도 전부터 알고 있는 얘기였다. 아빠가 말했으니까. 나중에 보자고…….

곤한 눈을 감고 잠이 드는 목이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새로이 꾸는 꿈속에선 까치 저고리를 입은 아기 도령이 부채 끝에 매단 조개껍질 목걸이를 짜작거리는 것이 무에 그리 재미난지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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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에는 처음 두드려보는 글이군요.
가끔 들러서 이곳에 있는 좋은 글들 구경 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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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금 수정했답니다.
헌데 미러는 불펌방지 태그가 있어서 수정하는데 무척 힘겹군요. ^^;;;
(2003-8-2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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