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라즈블리토(上)

2009.09.01 09:2109.01

2010년 3월 아직 바람은 겨울의 아쉬움을 전하듯 차갑지만
햇빛은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안아주는 날씨다.
태양은 큰 콘크리트 건물 위 석조 동상끝에 걸쳐있다.
삼거리의 오가는 차들은 서로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쌩쌩 달릴 뿐이고
커다란 버스들만이 서로 사람들을 태우려 애를 쓴다. 그리곤 태우기를 무섭게 내달려버린다. 학생들이 큰 전공책을 팔에 걸친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수다를 떤다.
큰 책가방을 메고 모자를 쓴 공대생들은 서둘러 발을 움직여 지하도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 보고 싶던 광경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저 싱글거리며 수다를 떠는 학생들 사이에 나도 껴있었지만 이제는 서둘러 지하도로 들어가는 학생들 사이에 껴야한다.
 
내 이름은 송지형. 올해로 23. 우유부단한 성격에 키와 얼굴도 길을 가다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 여자친구 없음. 잘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나지도 않았다. 학교 정문건너편 고시원에 살고있고 KH대 생명과학대학 한방재료가공학과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번에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한다.
 
지난 2년 동안 눈이 좋지 않아 군대를 가볍게 회피한 뒤 공익으로 근무했다. 지루하기만한 2년이란 시간동안 자연스레 학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더욱 반가운 학교이다.
 
"형 뭘 그렇게 기웃거려요, 형이 새내기라도 되는 줄 아세요?"
 
어깨를 툭 치며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동그란 눈에 빨간 안경테. 여자보다 더 하얀 피부를 가진 눈과 입이 살짝 웃고있는 남자. 전역한지 한달밖에 안된 예비역이다. 남들은 군대에서 새까맣게 타서 오는데 이 녀석은 오히려 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다.
이 친구의 이름은 김종준. 동아리 후배다. 썩 유쾌한 녀석인대 곱상한 외모답게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것 같은 녀석이다.
 
"여~ 종준이! 내가 마음만은 새내기다 임마"
 
"수강신청은 잘 하셨어요? 전 컴퓨터가 맛이 가는 바람에 피씨방에서 했는데 팝업 차단해놔서 망했어요. 아휴"
 
"야 수강신청 한두번 해보냐 아마추어도 아니고, 형은 이미 계획대로 모든 수강신청을 끝내놓은 상태지!"
 
"형 그럼 이따가 저 좀 도와줘요 제가 저녁쏠께요"
 
저녁이란 말에 눈이 절로 돌아간다.
 
"뭐부터 하면 되냐?"
 
"헤헤 저 아침 강의 있어서 이따가 동방에서 봐요 저 먼저 수업 들으러 가볼께요"
 
종준이가 손을 흔들며 공대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뒤 캠퍼스 안으로 천천히 걷는다. 오랜만에 맞는 아침햇살이라 그런지 부드러운 느낌이 사뭇 좋다.
살짝 눈을 감고 걸으니 기분이 더 살아난다. 귓속으로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응? 노래? 난 이어폰도 낀적없고 교내방송도 점심때만 해주는대?
왜 노래가 들리지?'
 
의문을 품은 채 눈을 떴다.
그 앞에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띈채 내 귀에 이어폰을 갖다 대고 있는 여자애가 보였다.
 
"학교에 오니 그렇게 좋아? 복학생은 어쩔 수 없다니까 눈까지 감고 걸어 다니네 이 누나가 학교 구경이라도 시켜줄까? 대신 점심에 맛있는거 사줘"
 
하며 귀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아담한 키에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는 머리가 인상적이고 안경을 써서 그런지 약간 차가워 보이긴 하지만 조그만 눈덕분에 전체적으로 귀여운 이미지가 나는 이친구의 이름은 연신혜.
학교 내에서는 연여사란 별칭을 가질 정도로 털털하며 짖굳은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대학교를 온 뒤 제일 처음으로 사귄 절친이다. 서로 안지는 3년 정도 됐는데 왠지 10년 이상 된 것 같은 막역한 사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마디 해줘야지
 
"꺼져"
 
기분 좋았는데 그 얼굴을 디미니 고운 소리가 나올 수 없다.
 
"썅 뒤질래?"
 
뭐 이정도 막역한 사이다.
 
"야 음료수나 사줄게 먹고 떨어져"
 
"음료수?? 야 짠돌이가 웬일이냐 사랑원가자!"
 
음료수를 사준단 말에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학교 기숙사인 사랑원으로 향한다.
 
이 사랑원은 학교가 직접 운영하는 기숙사가 아니라 사기업에서 운영을 하는지라 시설이 엄청나게 좋은 편이다. 1층에 카페, 문구점, 식당, 미용실, 세탁소, 당구장, 안경점, 치과 등등 정말 없는것 빼곤 없는게 없는 곳이다. 그 대신 기숙사비가 타 학교의 배가 넘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멀쩡한 기숙사를 내버려두고 겨우 사람 한명 누울 수 있는 공간뿐인 고시원에 틀어박혀있는 이유이다.
 
캔 음료수 2개를 뽑고 신혜에게 하나를 건넨 뒤 휴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뒤따라온 신혜도 반대편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는다.
 
"복학한 기분이 어때?"
 
"음……. 아직 별로 실감이 안나. 파릇파릇한 새내기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실감이 날것도 같은데 내 앞에는 쭈글한 예비역누님이 앉아있어서 말이지"
 
"죽어! 내가 어딜 봐서 쭈글해!"
 
"농담이지 왜 흥분까지 하고 그래"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금방 10시가 됐다.
 
"야 나 수업 들어가야 돼 먼저 간다~."
 
인사를 한 뒤 버스정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는 금방 와서 사람들을 꾸역꾸역 태우고 한정거장을 지난 뒤 또 꾸역꾸역 내뱉는다.
 
우리학교의 좋은 점이 바로 교내에 버스가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캠퍼스가 워낙에 넓은 탓에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서야 그 큰 전공서적을 들고 걸어 다니긴 힘들다.
 
생명과학대 건물 안으로 들어와 계단식 강의장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는걸로 봐선 나같이 혼자 온 복학생들도 좀 있는 것 같다.
 
조금 지나자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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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20분의 긴 강의가 끝나고……. 난 침을 닦았다.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교수님의 강의는 살아있는 수면제다.
 
저 교수님의 강의시간에 눈만 뜨고 있어도 A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숙면을 취한 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직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제 뭘한다……. 동아리 방이나 가볼까?'
 
난 '늘사랑'이란 예쁜 이름의 중앙동아리 하나를 들고 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왔으니 1학년 때의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그곳에 먼저 가보고 싶었다.
 
학생회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보니 벌써 1시.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동아리 방문을 여니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대구 청년 찬수가 날 반겼다.
 
"요~ 지형이~ 어서 온나 오랜마이네"
 
"찬수! 오랜마이네, 종준인 아직 안왔나?"
 
"응 안왔다"
 
찬수는 나와 동기로 대구남자치곤 쑥쓰럼을 많이 타지만 재치도 있고 잘생겼다. 또 아까 아침에 만났던 신혜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이 커플도 애기하자면 길다.
 
신혜는 1학년 때는 인기쟁이였다. 남자선배들과 남자동기들이 꽤나 좋아했었던 듯 하다. (이건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최대의 미스터리다.) 그중에 한명이 바로 찬수였다. 하지만 찬수가 마음을 고백했을 땐 이미 그녀는 동아리 남자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난 그걸 듣고 함께 좌절하며 찬수에게 포기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3년을 버텼다. 3년이 흐른 후 신혜는 그 선배와 결국 헤어진 후 너무 힘들어했고 그런 그녀를 찬수가 옆에서 잘 지켜주었다. 신혜는 그런 찬수의 진심을 알았고 둘은 결국 작년부터 사귀게 된 것이다. 정말 남자라 할 수 있는 찬수다. 이점이 제일 존경스런 놈이기도 하다.
 
"오 형 일찍 왔네요"
 
때마침 종준이가 들어왔다.

난 종준이 수강신청을 도와주었다.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평소엔 켜진지 꺼진지 확인도 안 되던 핸드폰이 오랜만에 소리를 질러본다. 난 무심히 문자를 확인한다.
 
'전화해라 오바'
 
연여사다. 냅다 찬수 머리에 핸드폰을 던졌다.
 
"억! 뭐야! 아 이런 개새 피나는거 아냐"
 
"니 여친이다 임마 전화해봐"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던 녀석이 여친이라는 말 한마디에 히죽거리며 핸드폰을 연다. 그런대 왜 내 핸드폰을 여는거냐……. 지 핸드폰으로 할 것이지……. 전화비 아깝게시리
 
"응 알았어 응응~이따봐~"
 
콧소리가 정말 밥맛이다. 옆에서 착한 종준이도 살짝 째려본다.
찬수가 핸드폰을 나한테 던지며 말한다.
 
"지형아 종준아 신혜가 이따가 저녁묵잰다."
 
난 잽싸게 물었다.
 
"신혜가 쏘는거냐?"
 
"개새끼"
 
"야 니가 쏘는것도 아닌데 왜 니가 흥분하고 그래?"
 
"신혜와 난 일심동체란 거 모르나? 즉 신혜가 돈이 나가면 내 돈이 나가는거나 마찬가지란 말씀! 억!!"
 
비명과 함께 또 한번 찬수인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나자빠진다. 옆에는 내 핸드폰이 나뒹군다.
 
"나이스샷"
 
종준이가 응원을 더해준다.

시계를 보니 아직 3시. 저녁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찬수야 나 학교구경좀 하다 올께"
 
"오야 이따가 시간 맞춰 오그라"
 
난 2년이란 시간동안 학교가 얼마나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학교에 오면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어 혼자 밖으로 나왔다.
 
'오! 예술디자인과 건물이 새로 생겼네.'
 
새로 생긴 건물에 감탄하며 난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로 천문대다. 그곳은 학교 내 꽤나 구석진 곳에 있어 인적이 뜸한 곳이지만 나에겐 옛 추억이 어린 소중한 장소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천문대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천문대는 여전히 변함없이 서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휑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엔 소나무 밑동들만 남아있다.
 
'천문대는 그대론데……. 주위가 왜 이렇지? 예전엔 소나무 향기가 좋았는데 다 잘라버려서 휑하기만 하네…….'
 
난 의아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이 어린 곳이기에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대 계단끝 부분에 웬 신발이 서있다. 신발이 서있다?? 웬 신발이지? 난 호기심반 두려운 반으로 조심조심 마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수록 다리가 나오고 몸이 나오고 얼굴이 나왔다.
 
'뭐지?'

앞서 말했다시피 아직 3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차디찬 바닥에 웬 여자가 누워있다. 설마 죽은 건가? 아니 미약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걸 보니 다행히 살아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기절을 했다던지 아니면 잠을 자고 있단 것 인대 저 편안한 표정을 보니 기절한 것 같지는 않다. 난 안심하며 그녀를 살폈다.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큰 눈,  짙고 긴 눈썹, 이목구비가 뚜렷해 강해보이는 인상이다. 볼과 코가 약간 상기되 있는게 조금 추워보였다. 원래 보통사람 같으면 흔들어서 깨우겠지만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난 그 옆에 철푸덕 앉아서 그 여자를 빤히 바라봤다. 가만히 보니 그렇게 예쁘진 않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특히 단발보다 약간 짧지만 남자 같이 보이쉬한 느낌이 나는 머리카락이 매력적이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새 학기라 학교에 사람은 많지만 역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는 왜 여기서 자고 있는걸까?'
 
'우리학교 학생이니까 여기서 자고있겠지?'
 
'몇학번일까?'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갑자기 그 큰 눈을 번쩍 뜨더니 얼굴을 찡그린 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젠장"
 
첫마디부터 가관이다.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넌 뭐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녀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말했다.
 
"밥사줘"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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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와 나는 함께 사랑원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찌된 일이냐고? 간략히 설명하자면 밥을 사달라던 그녀의 말에 난 황당해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신혜와의 저녁약속에 데리고 가는 중이다. 그녀도 군말없이 따라온다. 정말 이상한 여자인것 같다.
내려오다가 왜 그런 곳에서 자고 있었는지 물었더니 귀찮아서 그런건지 사실이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냥' 이라는 아주 짧은 답을 했다. 이것이 그녀를 더 이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사랑원 앞에 도착하니 종준이와 찬수도 방금 온 듯 신혜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누나 안녕하셨어요?"
 
종준이가 먼저 신혜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종준이 넌 어떻게 더 하얘졌냐! 나보다 더 하야잖아! 군대 다녀온 거 맞아? 집에서 2년 동안 박혀있다 온 거 아냐?"
 
"설마요 그런대 옆에 있는 분은 누구?"
 
신혜 옆에는 한 여성이 서있었다.
신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번에 기숙사 방 같이쓰게된 친구야 인사해!"
 
그 친구의 이름은 강아름.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언뜻 봐도 꽤 귀엽게 생긴 외모에 남자들의 로망인 길고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지고 있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는데 언뜻언뜻 비치는 밝은 갈색의 브로치가 잘 어울렸다.
 
둘이 인사를 하는 동안 신혜가 우릴 발견했는지 소리쳤다.
 
"왔어? 어? 미소도 같이 왔네?"
 
신혜가 내 옆에 있는 이상한 그녀를 가리켰다.
난 의아함에 물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같은 방 룸메이트야. 나랑 아름이랑 미소까지. 우리 3인실쓰자나"
 
미소라 참 예쁜 이름이다. 그런대 어쩐지 성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신혜도 그녀들의 성격은 잘 모르는 듯 했다. 아직 학기 초라 얼마 전에 방을 새로 배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역시 새내기란다.
신혜가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희 둘은? 아는 사이야?"
 
"아니 전혀."
 
내가 간단히 대답했다.
 
"근대 어떻게 같이와?"
 
"음 말하자면 길다. 그냥 간단히 밥 먹으러 온거야. 그냥 그렇게 알아"
 
"으흠~그래? 그렇구나."
 
신혜이가 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별로 기분이 좋진 않지만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사랑원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 자리를 잡았다.
 
물주인 신혜이가 먼저 말했다.
 
"우선 밥부터 시키자! 찬수야 우리 뭐먹을까?"
 
"아! 난 참치비빔밥 묵을끼다. 하하 느그들은?"
 
찬수가 물었지만 다들 대답들이 없다. 종준인 새로 만난 두 여성 때문에 낯을 가리느라 그렇고……. 그 두 여성도 낯을 좀 가리나 보다. 나또한 그 어색한 분위기에 나서기 싫어 조용히 입다물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찬수만 뻘쭘할 뿐이다.
 
우리는 대충 참치비빔밥으로 통일하고 밥을 가져왔다. 참치비빔밥은 우리 학교 내의 유명한 음식중 하나이다. 23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맛또한 일품으로 KH대에 와서 참치비빔밥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KH의 K자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내가 지어낸 말이니 굳이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는 덜길 바란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신혜와 찬수는 그런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웃을 뿐이다. 그 분위기는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 너네한테 우리 동아리 남자들 소개를 안 해줬구나?"
 
신혜는 그제야 생각난 듯 우리 남자 셋을 룸메이트들에게 소개 시켜줬다.
 
"미소야 아름아 이쪽은 내 남자친구 찬수야 잘생겼지! 너네 혹시라도 애한테 꼬리치면 잘 때 머리 확 밀어버릴줄 알아라! 후후 그리고 애는 종준이 07학번이고 너희랑 같은 화공과. 얼마 전에 전역한 아저씨니까 잘해드려. 그리고 마지막 재는 송지형. 좋은 놈은 아니니까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꺼야"
 
참 고마운 소개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찬수가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는 모두 잔을 들고 건배를 하려할 때였다.
 
"너! 나랑 내기할래?"
 
이상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나한테 너라고 한 건가? 새내기라면 10학번일 텐데 4학번이나 차이나는대 서슴없이 반말을 한다라……. 그러고 보니 천문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반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다.
 
"무슨 내기요?"
 
"뭐긴 술집에서 술내기밖에 더 있어?"
 
"뭘 걸건대요?"
 
"이기는 사람 소원하나 들어주기"
 
음……. 소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여자애가 설마 남자보다 술을 더 잘 마시겠는가? 내가 술을 일찍 배우진 않았지만 대학교서부터 한시도 술을 손에서 놓은적이 없으며 시험기간엔 술집에서 공부를 했고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도 회식자리에 나가 우리기관 최고위직에 계신 사무처장님과 서로 잔에 술을 채우며 특별휴가까지 얻어낸 나다. 절대로 질리는 없다.
 
"좋습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그런대 그쪽은 대체 몇살이길래 저한테 말을 놓는거죠? 새내기면 저랑 4학번차이나 나는대요?"
 
"응 나 오수했어"
 
말을 하며 그녀는 소주 10병을 주문했다…….(참고로 나는 빠른 년생이다. 즉 순수한 나이로 따지면 그녀가 나보다 2살 많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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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위엔 소주 열댓 병이 나뒹군다. 여기저기 안주가 흩어져있고 천장에 달린 어두운 조명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벌써 새벽 3시. 이미 같이 온 친구들은 언제 가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뭐야 벌써 취한거야? 남자가 이것밖에 못 마셔?"
 
그녀다. 둘이서 마신 소주가 벌써 10병이 넘어간다. 둘이 같은 속도로 마셨으니 최소한 서로 5병씩은 위장으로 넘어갔단 소리다. 그러나 그녀는 취하기는 커녕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는다.
 
'무슨 소원을 빌라나…….'
 
그 생각을 끝으로 필름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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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다. 창문에 걸쳐진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햇살이 서로 경쟁하듯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머리에 지진이라도 난 듯 지끈거린다. 죽어있는 텁텁한 공기가 내 폐로 들어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주위를 둘러보니 너저분한 이불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전공서적들 어디서 주워와서 이것저것 조립했는지 그 성능을 의심하게 되는 컴퓨터와 밤새 새빨갛게 자신을 덥혔을 전기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동아리방이다.

"흠냐"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너저분한 이불이 미묘하게 위아래로 들썩인다. 난 손가락 끝으로 이불을 집어 조심스럽게 들춰보았다. 그 순간 절망에 빠졌다.
예상했지만 내 옆에는 그녀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어제 어떻게 끝이 난건지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딱 한가지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내가 졌다'
 
그렇다 내가 졌다. 분명히 내 마지막 기억엔 그녀가 나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내가 진 것이다. 그녀는 깨어나 나에게 약속했었던 한 가지 소원을 말할 것이고 그 소원은 그녀의 행동을 볼 때 나에게 안드로메다행 열차티켓을 특등석으로 끊어다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야한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동방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 했다.
 
"띠디딩"
 
아뿔싸. 난 그때 일생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동방문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여는 잠금장치가 설치되어있다. 그런대 그 잠금장치가 사람이 빠져 나가고 자동으로 닫힐 때 소리를 낸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동작 그만!"
 
안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에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원상복귀"
 
나는 누가 리모컨으로 조정하는 로봇마냥 다시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긁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각오는 했어?"
 
이럴 땐 시치미를 떼는 게 가장 좋다.
 
"각오라뇨?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런대 제가 왜 여기 있죠? 전 분명히 어제 친구들과 즐겁게 술 한 잔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뭐야 기억 안나? 어제 술내기해서 이기는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네? 제가 그런 약속을 했나요? 제가 술을 많이 마셨나 보네요. 전혀 기억이 안나요. 그리고 내기라뇨? 우리가 내기했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말을 마치고 그녀를 보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내 앞에 들이댔다.
 
'저(지형)는 앞으로 미소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를 어길시 할복을 한다.
 
치밀하다……. 이미 소원까지 말했나 보다. 역시 술이 왠수다.
그나저나 어길시 할복이라니……. 지금 시대가 어떤시댄대 할복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일본 사무라이라도 된단 말인가? 저건 그녀가 쓴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쫄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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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한점없는 맑은 날씨다. 그런대 내 머릿속은 그 반대다. 충성을 다한다라……. 난 이제 죽었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오늘은 공강이다.
 
저녁때쯤 일어난 나는 물을 마시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만졌다.
난 언제나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을 갖고있는대 길을 걸을 때도 손에 쥐고 다니며 잠을 잘 때는 머리맡에 놓고 잠을 잤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됐는지 열어도 반응이 없었다.
 
새 배터리로 갈아끼운뒤 핸드폰을 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요란을 떨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쫄따구 10초줄께 나와"
 
"어디...뚜..뚜.."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다. 나는 빛의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역시 그녀는 고시원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사는 고시원을 알아냈는지 신기할 뿐이다.
 
"3초 늦었어. 음료수사"
 
"아 그런게 어디 있어요. 어떻게 방에서 여기까지 10초만에 와요 13초만 해도 거의 기네스북감이라고요!"
 
"싫으면 할복을 하든가"
 
"어떤 음료수 좋아하세요?"
 
나는 내가 가끔 싫어질 때가 있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동방으로 올라갔다. 동방에는 종준이가 컴퓨터랑 놀고 있었다.
 
"어 형 어제 어떻게 됐어요? 누나 안녕하세요."
 
종준이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했나보다. 그녀는 종준이의 인사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다. 나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종준이를 째려보자 종준인 급히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며 말했다.
 
"아...하...하... 저 먼저 가볼께요. 약속이 있어서 하하"
 
"약속? 너 학교에 약속 잡을 사람도 있냐?"
 
"후후 없으면 만들면 되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종준이를 보니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에 군대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부끄러워하며 말조차 잘 하지 못하던 녀석이었다.
 
"그래 아름이랑 잘해봐라. 눈높이 에베레스트를 자랑하는 내가 봐도 예쁘더라."
 
"헉! 형 어떻게?"
 
네가 내 손바닥 안이다. 나는 대꾸할 필요성도 못 느끼며 철푸덕 주저앉았다. 종준이는 놀란 표정을 5분 이상 유지하는 비상한 재주를 보여주며 밖으로 나갔고 나와 그녀가 나란히 앉았다.
 
"왜 부른거에요? 저 오늘 피곤해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참 길고 가는 손가락이 예쁘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두꺼운 서적 네다섯 권과 실험노트가 보였다.
내가 이래 보여도 눈치가 백단이다.
 
"실험노트 써달라고요?"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맞고를 치기 시작한다.
이럴 땐 내 눈치가 야속하기도 하다.
 
"기본 10장 이상이다. 화학 말고 생물도 있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일 아니란 듯이 말한다.
실험노트를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실험노트는 한주에 2개씩 실험전과 실험후로 나누어서 실험 전에는
실험내용계획과 그 실험을 설명하기위해 필요한 용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공식이나 결과를 적는 것이고 실험 후에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와 느낀점 등을 쓰는 것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아무리 적게 써도 8장 이상은 나오니 굉장히 지루하고 팔 아픈 과제이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개이다. 지금 써달라는것이 실험전 노트이니 실험후에도 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나는 한주에 4개의 노트를 써야한다. 다행이라면 이 과제는 1학년때 만하고 2학년부터는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군복무를 하기 전에 전과를 한터라 1학년이 듣는 과목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 듣는 과목중 실험과목이 2개나 있다. 이로써 난 일주일에 8개의 실험노트를 써야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저기……."
 
"할복?"
 
그녀의 무표정한 협박에 난 당당히 말했다.
 
"모든 실험 A+의 신화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언제 시켰는지 우리 학교의 명물먹거리인 김박사 치킨을 뜯어먹으며 인터넷 맞고를 치고 있었다. 김박사 치킨은 순살로 만들어 뼈를 바르며 먹는 수고를 덜어주기때문에 시험기간이나 술안주가 필요할 때 모든 학생들의 간식거리로 유명하다. 예전에 김석사였는대 김박사로 학위를 땃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난 그녀가 주는 치킨을 조금씩 얻어먹으며 실험노트를 작성했다. 방안에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와 펜의 사각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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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달이 해에게 밀려 그 빛을 잃어 갈때쯤이 되었다.
 
'아 드디어 끝이다.'
 
생물 실험노트의 마지막 점까지 찍은 나는 드디어 끝났다는 환호를 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가만히 있으니 조용한 적막감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컴퓨터 쪽을 보니 그녀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하긴 지도 피곤했겠지'
 
생각하며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굉장히 평화로워 보인다. 혼자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기다려준 것을 보니 그래도 생각보다 배려심이 있는 것 같다.
 
풀잎의 싱그러운 향기가 그녀에게서 은은하게 베어나왔다.
사방은 조용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난 빤히 그녀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에게 점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어느새 그녀얼굴이 코앞.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헉 일났다.'
 
다행히 그녀는 깊은 잠에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미동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깨어났더라면 난 저세상행이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보니 나도 급격히 피곤해졌다. 원래 난 밤을 잘 새지 못하는 체질이다.
남들 3~4시간씩 자고 공부한다는 고3때도 난 항상 최소한 6시간은 잤다. 그런 놈이 새벽까지 깨있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다.
시계를 보니 지금은 5시. 오늘 수업은 9시니 아직 4시간정도 여유가 있다. 잠깐이라도 자두는 게 좋겠단 생각에 난 조용히 동방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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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금요일. 군복무를 할 때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역시 학교에 있으니 정말 쏜살같이 지나간다. 친구와 저녁을 먹은 후 방으로 들어온 난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며 노트북으로 웹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빨리 확인해주세요."
 
핸드폰이 떠든다. 난 이 소리가 별로 듣기 싫어 거의 매너모드로 하고 지내는데 어쩐지 오늘은 매너모드가 풀려있었나보다.
 
'쫄따구! 내일 아침 9시에 보자'
 
그녀다.
 
평소 하늘이 무너져도 주말에는 편히 쉬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나여서 예전 같았으면 바로 거절했겠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그냥 나와'
 
지은 죄가 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다…….
 
'안돼, 나 내일 약속 있어'
 
'ㅎㅂ?'
 
제길……. 이젠 ㅎ자만 봐도 겁부터 난다. 저번 강의 때 교수님이 새의 활강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고 계셨는데 난 역시 졸고 있었고 교수님의 '그러니까 새의 활!...' 이라는 말에 할복이라는 줄 알고 식겁하며 일어났던 적이 있다.
 
'내일 아침을 내가 살 수 있는 권리를 줘서 고마워'
 
아 역시 반항은 안좋은것 같다. 그래도 일주일동안 나아진 것이 있다면 내가 그녀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다. 나보다 2살이나 많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4학번이나 선배이고 원래 내 친구들도 나보다 1살씩은 더 많다. 그리고 내가 계속 존댓말을 쓰니 정말 쫄따구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어 한번 큰맘 먹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야! 아..아니 미소님... 제가 미소님께 말 놓으면 안될까요? 나이는 미소님이 2살 많지만 그래도 제가 4학번이나 선배고...또..제가..."
 
"마음대로 해"
 
그녀는 별걸 다가지고 그런다란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시원스런 그녀의 대답에 난 감동을 느꼈다.
 
"그대신 아이스크림사줘"
 
등가교환의 원칙.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잠시나마 감동을 한 내가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사이 금요일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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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전 9시 10분. 뾰족한 구두가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10분이나 늦은 게 아니냐고? 내가 미쳤나? 그녀와 한 약속을 잊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전혀 늦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7시에 일어나서 샤워도 하고 왁스도 바르며 한껏 멋을 냈다.
여자가 주말 아침 9시에 만나자고 했으면 그날 하루는 데이트를 하자는 것 아닌가? 참 오랜만인 데이트 생각에 난 들떠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평소엔 잘 입지도 않는 마이까지 걸쳐가며 소란을 떨었다.
 
'역시 마이엔 구두지!'
 
하며 뾰족구두까지 신은 나는 시간에 맞춰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역시 그녀는 부지런한 성격인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대 그녀가 나를 보더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웃는지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그녀 복장이 조금 특이했다. 평소에는 청바지에 스니커즈같이 편한 옷차림을 입고 다니던 그녀가 오늘은 그런 복장이 아닌 어디선가 많이 봤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저건 분명 어머니가 등산을 가실 때 입고 다니시던 복장이다. 그런말은 즉 오늘의 목적은 등산!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과 신발을 바꾸기 위해 황급히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바탕 소동아닌 소동을 일으킨 후 우리는 수원역으로 향했다.
 
"넌 도대체 무슨생각을 한거야?"
 
그녀가 물었다.
난 얼굴을 붉힌 채 큰소리로 말했다.
 
"야! 등산을 갈꺼면 미리 등산갈꺼라고 말을 해줘야 될꺼아냐! 아침부터 쪽팔리게……."
 
"후후 우리 쫄따구가 누나랑 데이트 할 생각에 쫙 빼입었구나? 그렇구나?"
 
하며 옆구리를 툭툭 찌른다.
 
난 괜히 창피해 무시를 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역시 구름한점없이 맑은 날씨다. 등산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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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에서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뒤 정상에서 먹을 샌드위치를 싸들고 S대 입구로 향했다. 지하철에는 우리처럼 등산을 하기위해 큰 배낭을 메고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커플이 보였는데 우리처럼 등산을 하러 온듯하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송승헌도 울고갈법한 짙은 눈썹,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겉보기에도 건장한 근육들을 자랑하는게 스포츠를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었고 여자는 현대기술의 힘을 빌린 티가 팍팍 나는 인위적인 미모의 얼굴이었다. 그냥 대충 봐도 부모님이 강남에 빌딩 2~3개는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졸부의 귀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내가 그 커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말을 건넸다.
 
"저기 입에 밥풀 뭍으셨는대요."
 
이런 젠장……. 아까 김밥을 먹을 때 눈치없는 밥알 하나가 볼에서 암벽등반하고있었나보다. 난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알려주지 않은 그녀를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자 그녀는 킥킥대며 웃었다. 분명 알면서도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것이다.
 
"아 아까 김밥을 먹을 때 묻었나 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매너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나에게 들리라는 듯 작지 않은 목소리로 남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요즘 저렇게 칠칠치 못한 사람도 있나? 거울도 안보고 다니나봐
안그래 오빠?"
 
순간 이마에 힘줄 두개가 솟았다. 하지만 나 같은 대인배가 그런 사소한 문제로 화를 내선 안된다.
 
"야! 너! 누굴보고 그런 소릴 나불대는거냐? 밥 먹으면 밥풀도 입에 뭍을 수도 있는거지! 넌 그래본적 한 번도 없냐? 얼굴도 다 뜯어고친 주제에"
 
큰소리로 소리치는 그녀다. 사람많은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대신 화를 내주는 그녀의 모습에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뭐.. 뭐요? 하 나 참"
 
그 여자는 그녀의 막말에 쫄은듯 헛웃음만 칠뿐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나에게 눈으로 미안하단 뜻을 전했다. 나도 괜찮단 눈빛을 보내주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지하철에서 그렇게 큰소리로 소리치면 다른 사람들한테 실례잖아"
 
그녀는 웬일로 내말을 듣고 분을 삭이며 참았다. 그 커플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녀와 강남녀는 그렇게 대치상태로 산 입구까지 갔다.
 
우리들은 조그만 물을 2개 사고 산악로로 접어들었다.
 
"이봐요 잠깐만요"
 
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까 그 강남녀다.
 
"뭐냐?"
 
그녀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우리 내기할래요? 이 산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10만원빵 어때요?"
 
"좋아"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내기를 수락했다. 갑작스레 내기가 시작되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으나 내 몸은 이미 그녀에게 잡혀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커플을 얼핏 보니 여자가 재수없는 미소를 흘리며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헉..헉.."
 
관악산은 그리 높진 않지만 코스가 꽤 긴 편이다. 그 산을 거의 뛰다시피 오른지 벌써 30분 째다. 그 커플은 더 빠른 길로 올라오는 건지 보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거의 끌려가다시피 올랐는데 일단 10만원이 걸린 내기라는 것을 자각하자 내가 먼저 앞장서기 시작했다. 10만원이 어느 동네 개이름인가? 땅을 파봐라 10만원이 나오는지. 동네 놀이터에서 꼬마 애들이 흘린 돈을 땅 파서 줍는다 해도 10만원은 안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가봤을 정도로 등산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나라도 산을 뛰어서 오른적은 없었다. 2/3정도 산을 오르자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그런대 그녀는 얼굴만 약간 붉어지고 땀만 조금 흐를 뿐 호흡도 처음이랑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왠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체력이다. 술을 그렇게 마실 수 있는 이유가 이런 괴물같은 체력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힘들단 이유로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하자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 10만원없다. 지면 니 지갑에서 10만원 나가는거야"
 
'이런 젠장'
 
만약에 지면 오히려 내 지갑에서 10만원이란 거금이 황천길로 떠나는 것이다. 내 다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아얏!"
 
뒤따라오던 그녀의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무척이나 아픈 표정으로 발목에 손을댄체 앉아 있다.
 
"왜그래? 다쳤어?"
 
"아! 제길 접찔린것 같아"
 
아직 녹지않은 눈에 발이 미끄러진 모양이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업어"
 
"응?"
 
"날 업으라고"
 
다짜고짜 업으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린가.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거기에 사람 하나를 업으라니…….그녀가 한마디 했다.
 
"너 돈 많냐?"
 
난 그녀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
드디어 정상!
 
그녀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그 커플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어보였다.
 
"힘들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냐? 왜 혼자 실실거리고 난리야?"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난 그녀의 접질린 발목이 걱정돼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발목을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심하게 접질리진 않았는지 약간 붇기가 있긴 했지만 괜찮았다. 붇기가 가라앉도록 수건에 물을 적셔 발목을 감싸준 뒤 다리를 편하게 놓을 수 있도록 발밑에 가방을 놔주었다.
 
"...고마워"
 
난 순간 얼었다.
 
'방금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고 말한 건가? 저 입에서 그런 고결한 말이 나올 수 있었나? '
 
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아니면 정상에 바람이 차서 그런지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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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여유롭게 거닐고 땅에선 개미만한 자동차들이 뭐가 그리 바쁜지 열심히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다.
 
난 문득 의문이 생겨 그녀에게 물었다.
 
"근대 오늘 왜 산에 온 거야?"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냥"
 
역시…….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상한 여자다.
 
우리는 그렇게 10만원이 생기면 뭘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가져온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강남녀 커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시간... 두시간이 지났다.
 
"아 왜 이렇게 안와!?"
 
그녀가 짜증을 냈다.
 
"그러게 이 산 천천히 걸어서 올라와도 세시간이면 충분히 올라오는데."
 
우리가 두시간 코스를 한시간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올라와 정상에서 두시간을 기다렸으니 세시간이 지난 것이다.
 
"오다가 다리라도 부러졌나?"
 
왠지 수상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한시간후……. 그제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당했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가 먼저 서둘러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산을 오르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 시간 동안 정상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쳇 공짜돈 생긴다고 좋아했더니. 어쩔 수 없지 이만 내려가자"
 
그 엄청난 승부욕은 어디로 간 건지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 그녀였다.
난 아까 질질 끌려가며 바라본 강남녀의 재수없는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던 거군…….'
 
하지만 굉장히 핸섬하고 괜찮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착각한 그 남자도 우리의 내기를 말리지 않았던 것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며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이 설욕을 갚아주기라 다짐하며 내려갈 준비를 하려 일어났다.
 
"아얏!"
 
"왜 그래?"
 
그녀의 조그만 비명에 난 깜짝 놀라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 물수건을 풀르자 아까보다 훨씬 심하게 부어있었다.
 
"이런, 혹시 삔거 아냐?"
 
"신경쓸거없어 빨리가자"
 
"신경쓰지 말라니 발목 보니까 코끼리가 와서 친구하자고 할 판인 대, 빨리 업혀"
 
"미쳤냐? 아까는 이기려고 업힌 거야. 내가 아무한테나 쉽게 내 몸을 맡기는 줄 알아?"
 
"웬 몸을 맡겨. 혼자 오버하지말고 업혀"
 
"어라? 내말을 안듣네? 너 나한테 충성을 다하기로 했잖아. 할복할래?"
 
난 괜한 억지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았어 내려가서 니가 보는 앞에서 할복해줄테니까 빨리 업혀"
 
"이.. 이런"
 
결국 내가 이겼다. 난 그녀를 업고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까는 뛰느라 몰랐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향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이 내 심장과 함께 울렸고 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별로 힘들단 생각 없이 쉽게 하산할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가까운 정형외과에 들러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조금 심하게 접찔린것일뿐 삔 것은 아니란다. 난 보란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10만원 공짜돈 얻으려다가 진료비로 5만원 나갔다."
 
"대신 내가 할복하라고 했던거 봐줄게"
 
"야 그건 당연한거 아니냐? 아까 그냥 얼어죽게 내버려두고 올걸 그랬나?"
 
"남자가 째째하게. 알았어. 나중에 내가 술 한 잔 쏜다!"
 
"너랑은 술 마시기 싫은데……."
 
"닥치고 사줄 때 마셔라."
 
"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우리는 학교로 돌아와 헤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샤워도 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워 곯아 떨어졌다. 아까는 몰랐지만 그녀를 업고 오는것이 꽤 피곤했었나보다. 혹은 그녀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마음이 놓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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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종준이!"
 
"오~ 형~"
 
오늘은 목요일. 동아리 개강총회가 있는 날이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나는 과제나 할 겸 미리 동방으로 왔고 먼저 와있던 종준이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인대? 커피나 한잔 할까?"
 
"좋아요. 제가 살게요"
 
"암~ 그래야지. 아 저번에 저녁 쏘기로 한 거 나 아직 안 까먹었다."
 
"아 형 그런 건 좀 까먹어도 괜찮아요."
 
"에이~ 후배가 말한 걸 선배가 까먹으면 섭하지!"
 
농담을 건네며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든 우리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종준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곤 불을 붙인다.
 
"너 담배 배웠냐?"
 
"아 네 군대가서요. 잘 피진 않는대 가끔 스트레스 쌓일 때 하나씩 피곤 해요. 형도 하나 피실래요?"
 
"아직도 형 잘 모르냐? 형은 담배 안 핀다."
 
담배를 권한 손을 쑥쓰러운 듯 집어넣은 종준이는 담배를 깊게 피었다.
 
"아름이랑 잘 안되냐?"
 
"헉! 켁켁.. 형 어떻게 아셨어요?"
 
일전에 말했듯 종준이는 무척이나 순진한 녀석이다. 수원 토박이면서 꼭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 풋풋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런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쉽게 얼굴에 드러냈다.
 
"형은 전지전능하다. 형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형은 너를 구원해줄 수 있다. 형을 믿어라. 헌금은 한달에 10만원만 받는다."
 
그 소리에 종준인 실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툭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아름이한테 고백을 했는데요……."
 
또 한 번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숨을 마쉰 후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아름인 자기가 예전에 짝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지금 잊어가는 중이래요. 아직은 그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남아있대요.
그런 마음으로 저랑 사귀면 저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응?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말인데…….'
 
난 순간 낯설지 않은 종준이의 말에 깊은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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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876 단편 [탄생] 되살아나는 섬3 장강명 2012.03.31 0
2875 단편 먹는 사람2 미로냥 2004.12.13 0
2874 단편 신 협객전1 이니 군 2006.12.30 0
2873 단편 승진과학 혁명14 김몽 2009.10.22 0
2872 단편 목이 (re)1 azderica 2003.08.25 0
2871 장편 The Power - 1장 잘못된 시작(2) 최현진 2003.08.15 0
2870 단편 악몽 beily 2013.12.19 0
2869 단편 애완동물6 라퓨탄 2008.05.22 0
2868 단편 사이코패스를 대하는 요령9 니그라토 2008.06.29 0
2867 단편 불가사리 이야기3 먼지비 2010.08.15 0
2866 단편 마이클 잭슨 고마워요 사랑해요7 dcdc 2010.06.25 0
2865 단편 그걸 깜박했네 그리메 2013.04.27 0
2864 단편 내게도 소녀가 필요해!2 땅콩샌드 2004.11.16 0
2863 중편 [죽음 저편에는] 1. 非 (02) 비형 스라블 2003.10.29 0
2862 단편 불지 않을 때 바람은 어디에 있는가 먼지비 2013.03.15 0
2861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중편 라즈블리토(上) 아비 2009.09.01 0
2859 중편 당신이 사는 섬-2부 김영욱 2006.02.16 0
2858 단편 버추얼 월드(Virtual world) 나길글길 2006.09.05 0
2857 단편 다락방7 최인주 2005.07.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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