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헝겊인형-2

2005.11.15 07:4911.15



  잠에서 깨니 아침 8시가 넘었다. 핸드폰이 ‘웅웅’하고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졸린 눈으로 핸드폰을 보니 미진이에게 문자가 와 있다.

‘어제 나 무슨 실수 안 했어? ㅠ.ㅠ 어떠케... 기억이 안나 ㅠ.ㅠ’

난 그녀에게 별 일 없었다고 문자를 보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거실로 나가니 역시 어머니가 TV를 보고 계신다. 어머니는 일어난 날 보시더니 미소 지으시며 물으신다.

“우리 아들, 지금 일어나셨어? 학교 안 늦었니?”

“네, 아직 여유 있어요.”

“몇 시에 시작인데?”

“11시에 시작이에요.”

“그래, 그럼 씻고 밥 먹고 가.”

“네.”

씻고 나서 화장실을 나오니 무국과 밥과 밑반찬들이 차려져 있다. 난 별 말 없이 먹기 시작한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직 9시도 넘지 않았다. 학교까지 대충 1시간이 좀 안 되게 걸리니까 시간은 충분하다. 난 천천히 TV를 보며 밥을 먹는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는데 보이지 않는다.

“현태야, 네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 와 있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다가오며 핸드폰을 내민다. 내 방 청소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난 핸드폰을 받아들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졍말? 구럼 다행이구 ^^;; 뭐 해? 학교 안 가?’

어머니가 묻는다.

“미진이가 누구니?”

“과 친구에요.”

어머니가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여자 친구야?”

난 웃으며 말한다.

“그런 거 아니에요.”

“너 여자 조심해서 사귀어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여자야, 여자.”

“어머니도 여자면서.......”

“여자랑 어머니는 다른 거야. 알았지? 명심해.”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미진이에게 학교에 곧 갈 거라고 문자를 보낸다. 다시 밥을 먹다가 TV를 보면서 두 번째 웃었을 때 미진이에게 다시 문자가 온다.

‘아라따. 이따 봐요~~’

난 휴대폰을 덮고는 다시 TV를 보며 키득거린다.



늑장을 부리다 수업 시간에 조금 늦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상의 순간을 꼽는다면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조용한 교실에, 열릴 때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는 것. 난 잠시 금속으로 만들어져 곳곳에 녹이 슨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 번 크게 한숨을 쉰 다음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다시는 지각하지 말아야지.

“끼익!”

오늘따라 유달리 문 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일순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결코 호의적이거나 예의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미소 혹은 웃음들이 번진다. 교수님은 그저 나를 한 번 힐끔 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빈자리를 빠르게 찾는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걸음을 딛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땀이 배어나온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공부할 책을 편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민호가 나에게 웬 쪽지를 준다. 난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그냥 잠자코 받아든다. 쪽지는 미진이가 보낸 것이다.

‘있다가 영화 보러 가자. -미진.’

난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좋다고 문자를 보낸다. 잠시 후 답문이 온다.

‘구럼 이따 교양까지 끝나고 정문에서 보세나~^^.’

문자를 확인한 후에 나는 수업에 집중한다.



정문에 나가니 미진이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나를 보자 환하게 웃는다. 내가 묻는다.

“일찍 끝났네.”

“응, 교수가 원래 일찍 끝내줘.”

나와 미진이는 함께 정문을 나선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정문을 나선다. 난 가끔 저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인생이 있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럼 세상에는 얼마나 무수한 사건과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미진이는 미진이대로 그렇게 우린 조용히 걷는다. 서로 말은 하지 않는다.

“사실 좀 걱정했는데.”

미진이가 말을 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조금은 건성으로 묻는다.

“뭐가?”

“네가 거절할까봐.”

난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 난 여자와의 데이트를 거절할 정도로 대담하지 못하거든.”

“어쨌든 그래. 난 두려워 그런 게. 그래서 먼저 청하는 걸 잘 못하는 걸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건넸는데 그 사람이 내 손을 쳐버리는 거야. 끔직한 일이지.”

“다른 사람들도 나하고 비슷해. 너 같은 미인하고 같이 다니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야. 남자든 여자든.”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넌 잘 모르겠지만 넌 꽤 특별해. 뭐라고 해야 할까. 음....... 그러니까 열게 해 줘. 나 자신을 말이야. ‘저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저 사람은 진실하게 내 말을 받아줄 거야. 내 말을 무시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이야. 물론 그건 연애 감정 따위가 아니야. 남성과 여성을 벗어난 거라고. 만약에 내가 널 좋아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먼저 데이트 신청은 안 했을 테니까. 혹시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전혀. 난 그냥 말주변이 없어서 대신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줄 뿐이야.”

“그런 게 중요한 거야. 다른 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거기에서부터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거지.”

난 조금 놀라며 묻는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 듣는 거야?”

“물론이야. 그들은 말을 듣고 이해하려고 들지 않아. 그저 그 말을 자신의 귀로 듣고 그걸 마음으로 가져가서 자기 편한 대로 바꿔 버리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늘 싸우는 거야. 그렇게 해서 서로의 오해를 풀지. 내가 보기에는 정말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야.”

“난 네가 이렇게 생각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내 말에 쾌활하게 웃는다.

“뭐야! 그럼 내가 생각 없이 사는 앤 줄 알았단 거야?”

“물론.”

“흥. 내가 오늘 영화 쏘려고 했는데 재고 해봐야겠다.”

“그래? 그럼 나도 오늘 저녁 사려는 거 재고해 봐야겠다.”

“어쭈, 까분다?”

나와 미진이는 한참을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한다. 그런 장난이 잠잠해지고 미진이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너는 근데 뭐 미니 홈피 같은 거 안 해?”

“그 싸이월드니 그런 거?”

“응, 그런 거.”

“글쎄........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뭐, 그냥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거지.”

“지금도 대화는 하잖아.”

“달라. 뭐랄까. 얼굴 맞대고 하지 못하는 말들을 거기다 써 놓는 거야. 꽤 재밌어. 무엇보다 가장 재밌는 건 찾고 싶은 사람, 잊혀졌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직접 만나지 않고 말이야.”

“거기다가 컨셉도 잡고?”

“컨셉?”

“원래 20살이 넘으면 컨셉 잡잖아. ‘이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이런 거. 어떤 사람은 시니컬하게 꾸미고 어떤 사람은 터프하게 꾸미고 어떤 사람은 쿨하게 꾸미고.”

“음....... 그런가? 그럼 네 컨셉은 뭔데?”

“나? 흠....... 굳이 말하자면 쿨 가이?”

“야, 안 어울려.”

나와 미진이는 지하철을 탄다. 저번과는 달리 미진이는 내 어깨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내 눈을 보며 즐겁게 이야기 한다. 마음을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좋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다지 무겁지 않으니까 말이다.
미진이가 예약했다는 극장이 있는 역에 도착한다. 계단을 몇 갠가 올라가서 출구로 나온다. 탁한 도시의 공기지만 그래도 지하에 있는 공기보다는 좋은 것 같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게들도 많다. 노래방, 술집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성냥갑 속에 가득 들어있는 성냥들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는 갑갑함도 느낀다.
이런 거리에 있을 때마다 나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난 2년 간 내가 있던 시간은 끔찍한 외로움과 소외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모든 것을 털어버린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그 시간은 나에게 외로움의 익숙함이라는 흉터를 남겼다. 아마 이 흉터는 계속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흉터니까.

“가자.”

난 미진이에게 이 거리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영화관도 사람 많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느낌이 틀리니까.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저기.......”

미진이의 입이 열리고 손이 들린다. 난 그 곳을 바라보고 나 역시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가 서 있다. 나와 헤어졌던.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그녀가. 그녀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있다. 분명히 그녀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 밖에 없다. 곧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녀의 모습만이 남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과거의 모습만이 남는다. 내가 눈을 돌리고 처음 보았던 바로 조금 전의 그녀의 모습.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춰 버린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하고 분명하기에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고약한 거짓말과 잔인한 기만으로 이루어진 환상이다.
그 지독한 환상을 향해 난 걸어간다. 걸어간다. 걸어간다. 걸어간다.

“인현이....... 인현이 맞지?”

환상은 깨지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 그녀와 내가 서 있다. 이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달콤한 향수 냄새와 매캐한 매연 냄새가 함께 느껴지는 현실 말이다. 겨우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대학은?”

“갔어. 요 근처에 있는 XX대학 알지? 거기야. 그러고 보니까 넌 지금 2학년이겠다.”

“응....... 같이 온 여자는 누구야?”

“기억 안 나? 만난 적 있을 텐데. 현태 여자친구.”

“아, 기억난다. 이름이 희진.......이었나?”

“미진.”

“아, 맞아. 미진이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 끄덕거림이 잦아들면서 우리는 침묵한다. 잠시 그런 침묵이 계속되다 문득 생각난 듯 그녀가 옆에 있는 여자를 소개한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소개도 안 했네. 이쪽은 혜미야. 김혜미. 그리고 이쪽은 서인현.”

“반갑습니다.”

“아, 네. 반가워요.”

혜미라는 여자는 뒤로 조금 물러서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 다리를 다친 작은 새를 연상시킨다. 그녀가 말한다.

“저기, 나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

“응, 그래. 잘 가.”

그녀가 멀어진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스커트와 긴 머리가 보인다. 그리고 곧 그녀는 내 시야에서 멀어진다. 어느새 옆에 선 미진이가 묻는다.

“맞지? 네 여자친구.”

“응.”

“.......무슨 말 했어?”

“그냥.”

난 영화관으로 향한다. 그게 좋을 것 같다. 미진이도 말없이 따라온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하며 내 귀에 들린다. 정말 사람이 많은 거리다.



그녀와의 만남은 방심할 때 정통으로 맞은 주먹 같은 것이었다. 그 주먹은 배에,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어지러움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진이와 본 영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미진이와 헤어진 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슨 병이 아닐까? 왜 나는 항상 기억을 잃는 것일까?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난 그녀에게 왜 다가선 것일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까? 없었다.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묻지도 못하고 그냥 그녀를 보낸 것일까?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했을까?

“큭큭큭.”

웃음이 난다. 아무래도 정신 분열증의 초기 증상으로 의심되는 웃음이다. 그러나 몇 시간이 가도 이상한 얼굴이 보인다거나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은 갖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난 언제나 그랬듯이 학교에 간다.
학교를 가도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말을 걸면 그냥 그렇게 대꾸할 뿐. 며칠을 그러고 다니니 혼자 밥을 먹기 일쑤다. 아이들이 나와 있는 걸 피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피해주는 건가? 아니다.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가 쉬는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선다. 핸드폰은 가져가지 않는다. 교통카드가 들어있는 지갑과 얼마간의 돈만 챙긴다. 밥은 먹어야 하니까.
허나 집을 나왔어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렇다.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걷기로 한다. 걸으면 무언가가 생각날 것이다. 내가 있을 곳이 내가 할 것이.
핸드폰 대신 차고 온 손목시계를 본다. 8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 아침 8시 30분이 조금 넘어서 우리 동네 골목을 걷는 건 나에게 아주 낯선 일이다. 고등학교, 재수학원 시절에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아예 늦게 집을 나선다.
난 지금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곳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도 현태와 미진이의 새끼손가락도 지금 나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뒤 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가볍게 아스팔트길을 밟는 운동화 소리도 난다. 전화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임마! 그거 다 내숭이야. 밀어붙여. 뭐? 이거 완전히 병신이네.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남자야?”

그 남자는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남자는 새하얀 흰색 셔츠에 베이지색의 면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옆으로 매는 스포츠 가방을 매고 있다. 힐끗 봤는데도 깔끔한 옷차림에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허나 남자의 말은 그다지 깔끔하지 못하다.
저런 남자의 껍데기를 한 꺼풀 벗기면 뭔가 있을까? 저 단정하고 깔끔한 껍데기를 벗기면 말이다. 거기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을 것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단단하고 깊은 공공 말이다. 그 안에 돌을 던지면 끝도 없이 떨어질 것이다. 무엇에도 부딪치지 못하고 끝도 없는 공동으로 떨어지면서 아무 울림도 없이 그저 떨어지기만 할 것이다.
큰 도로변이 보인다. 차가 내는 소음이 시끄럽다. 사실 시끄럽다고 생각해서 시끄럽다는 것뿐이지 사실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소음이다. 큰길가로 나왔지만 여전히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못한다. 결국 난 조금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 멈춘 어떤 버스를 탄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시간대는 붐빌 법도 한데 한산하다.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난 노약자 자리를 피해서 적당한 자리에 앉는다.  
버스는 조용하다. 다만 버스 기사는 거칠 게 버스를 몬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이마에는 수십 개의 과속방지 요철을 붙여놓은 듯 굵은 주름을 가진 운전기사가 세상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버스를 모는 것이다. 버스가 거칠게 흔들린다. 군데군데 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무시한 채 버스의 흔들림에 맞춰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도 버스에 흔들림에 따라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난 생각한다. 얼마 전에 떠올랐던 화두가 다시 떠오른다. 그녀와의 이별. 기억을 집중한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 올리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것은 잘 되지 않는다. 아르센 뤼팽을 쫓는 카니마르 탐정처럼 무언가가 집요하게 내 기억을 쫒고 있다. 그래서 기억은 그 무언가를 피해서 자꾸 내 의식으로부터 멀어진다.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사람이 많이 늘어나 있다. 대부분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다. 그녀들의 조금은 들뜬 듯한 목소리가 버스 안을 가득 채운다. 여학생들은 연신 웃어댄다. 그런 웃음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끊어지면 저쪽에서 이어지고 저쪽에서 끊어지면 이쪽에서 이어진다. 난 애써 그 목소리들을 무시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자꾸 멀어지는 기억의 한 줄기라도 잡으려고 애를 쓴다.
버스는 사람이 많이 탔어도 운전이 거칠기는 마찬가지다. 버스가 요동칠 때마다 서 있는 사람들은 크게 쏠린다. 몇몇 사람들은 욕설을 뱉기도 한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 창문에는 어렴풋이 내 얼굴이 비친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 그냥 어디서나.......

‘네 얼굴이 어디에나 있는 얼굴이라 좋은 거야.’

‘그게 뭐가 좋아.’

‘너무 잘 생기면 부담스럽잖아.’

‘부담스럽기는....... 연예인만 나오면 정신 못 차리는 주제에.’

‘에이~ 너 질투 하냐? 질투 해?’

‘너 까불래?’

‘꺄하하하, 질투 맞구만. 아저씨, 그런 사람들은 남자로 안 보여. 그냥 멋진 거지. 내 눈에 남자는 너만 보여.’

‘.......넌 참 그런 말은 천연덕스럽게 잘도 한다.’

‘그럼~ 모~~두 사실이니까.’

사소한 대화. 정말 나눴는지도 의심스러운 기억이다. 하지만 기억이 이어진다. 커다란 창문이 있어 나를 비췄던 카페.
난 카페에 앉아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던 카페. 하지만 그녀는 그 카페를 좋아했다. 나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비싸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좋아했다. 특히 유리로만 이루어진 벽을 통해서 내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바깥 풍경과 겹치는 모습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한 쪽 벽이 유리로 된 카페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그런 만족감을 준 곳은 그 곳 하나다. 함께 있다. 우리는 함께 있다, 라는 느낌을 준 곳. 아마 우리 둘이 둘 다 사랑하는 공간이어서일 것이다.
얘기는 거기서 했다. 헤어지자는 얘기를 거기서 했다. 왜 거기서 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이 함께했던 추억들을 이별로 덮어버리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자주 만나는 곳이 그 곳 이어서였을까?

“.......그러니까 헤어지자.”

기억은 다시 흐릿해진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지나친다. 그녀는 무언가 홀린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다. 마치 아직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이. 난 생각한다. 이제 난 흩어지지 않을 거라고. 난 이제 더 이상.......


정신이 든다. 잠이 든 것일까? 내 고개는 앞으로 꺾여져 있고 바닥으로 비치는 빛이 더 길어졌다. 시간은 꽤 많이 흘러간 듯 하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느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없다. 다시 내가 처음 탔을 때처럼 기묘한 침묵과 흔들림이 반복된다.
아까와는 달리 그 반복이 견디기 힘들다. 난 벨을 누르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한다. 흩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흔한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정처 없이 길을 걸으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없다.
흩어진다. 흩어진다, 라는 말을 기억해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헝겊인형이다. 옛날에 어머니는 나에게 헝겊인형을 선물해 주시곤 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다. 어머니는 헝겊 쪼가리들을 잇고 단추로 눈을 만든 다음 나에게 주시곤 했다. 솜 없이 속이 비어 있어서 납작한 인형 말이다. 그럼 난 그걸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헝겊인형은 못쓰게 된다. 얼기설기 이어져 있던 실은 뽑히고 인형은 다시 못쓰는 헝겊 쪼가리들로 변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걸 버리셨다. 어머니는 내가 위험한 장난감 대신 천을 가지고 노는 걸 원하셨던 거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고생을 많이 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나에게 끔찍하게도 예뻐 하셨다.
그 이상은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생각인 모양이다. 그녀를 생각하다 갑자기 헝겊인형이라니.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간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하니 집에 가야겠다.





“형 그날 무슨 일 있었어요?”

재용이가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나에게 다가오더니 묻는다.

“그날이라니? 무슨 날?”

“수업 없는 날 있잖아요.”

“아, 그 날. 그게 일이 좀 있었어.”

“에이, 그 날 남자들끼리 뭉쳤었는데. 전화도 안 받고. 데이트라도 했어요?”

“데이트는 무슨. 잘 놀았어?”

“잘 놀기야 했죠, 뭐. 밥 먹으러 갈 거죠?”

“아니. 별로 생각 없다.”

재용이의 표정이 조금 조심스러워 진다. 재용이가 근심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형 무슨 일 있어요?”

“일이라니?”

“그냥 요즘 좀 사람들을 피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 신경 쓸 일 아니야. 밥 맛있게 먹어라.”

난 그냥 웃으며 이야기 한다. 재용이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 몇 번 나를 더 봤지만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어울리는 아이들과 가 버린다. 미진이는 보이지 않는다. 수업할 때는 있었는데 안 보이는 걸 보니 어딘가 서둘러 간 모양이다.
강의실을 나오고 다시 건물을 나오고 밖으로 나와 교정을 걷는다. 그러면서 무심히 하늘을 바라본다. 늦봄의 하늘은 맑았지만 그냥 ‘푸른 하늘’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하늘 속에 순수를 거부하는 무언가가 녹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먼지든 황사든 간에 늦봄의 하늘은 그로인해 흐릿하고, 메마르고, 고요하며 슬프다. 하지만 그런 하늘 아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즐거워 보인다. 깨끗하게 차려입고 두세 명씩 짝지어 다니는 여학생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 짓고 저 멀리서 운동하는 남학생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 부조화 속에서 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래서 외로움을 느낀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하지만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머리 속에 있는 거대한 공동이 텅 빈 위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 머릿속은 지금 비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껍질 안 쪽이 압도적인 공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비워진 것과 공동이 채워진 것은 분명 다르다. 그 둘은 다른 것이다. 난 원래 이랬던 걸까? 그렇다면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왜 이런 것을 느끼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이 공허함은 그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런 끔찍한 생각들의 무게 때문에 내가 전화벨 소리를 들은 건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전화가 울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액정 화면을 보니 윤성이 형이다.

“야, 죽을래? 전화 빨리 빨리 못 받냐?”

“아, 미안해요, 형. 무슨 생각 좀 하느라고.”

“생각은 무슨. 됐고, 오늘 시간 있냐?”

“오늘요? 뭐 별다른 약속은 없는데.”

“그럼 됐다. 6시까지 XX역으로 와라. 어떻게 된 놈이 대학 붙었다고 전화 한 번을 안 하냐.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알았어요.”

“그래, 있다가 보자.”

형과 약속을 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난다. 형과의 전화로 조금 전의 무거운 짐들은 다행히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점심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온다. 언제나 형과 만나는 장소는 같다. XX역 5번 출구. 형이 그 지하철로 오라고 하면 난 5번 출구로 나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형을 기다린다. 그럼 형은 차를 타고 와서 나를 태워가는 것이다. 여러 번 형과 같은 장소에 만나지만 그때마다 5번 출구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어져 있다. 역시 이번에도 난 벤치에 앉는다.
오늘 5번 출구의 풍경도 지난번과는 다르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저녁의 햇살이 아직 싱그럽다고 불리기에는 부담스러워 할 잎사귀들 사이로 흩어진다. 내 옆에 있는 벤치에는 젊은 연인이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앞만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연신 문자를 보낸다. 어떤 이유로 권태기에 빠져 있는 듯하다. 도로 위에서 조금씩 막히기 시작하는 차들은 빵빵대고 있고 그만큼 매연도 짙어진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냄새 중에 불쾌한 냄새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사이로 3미터를 넘게 빼서 세운 줄자조차도 쓰러뜨리지 못할 바람이 분다. 무겁고, 짙고, 그만큼 우울한 풍경이다.
난 이곳에 오면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내가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풍경들은 항상 그 변화들이 미미하다. 가끔 눈이 오거나 장마가 오거나 하면 그제야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시간이 분명히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은 가고 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시간은 가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윤성이 형의 차가 다가온다. 형은 내 앞으로 차를 대고는 창문을 열고 손짓을 한다.

“야, 빨리 타.”

난 벤치에서 일어나 운전석 옆에 탄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맨다. 잠시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형이 차를 출발시키자 곧 소리는 잠잠해진다.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어디 보자, 우리 인현이. 많이 컸나?”

난 형의 농담에 웃으며 대답한다.

“그럼요, 많이 컸죠.”

“큭큭, 아직도 크면 어떡하니. 연락 좀 하지. 그 동안 잘 지냈냐?”

“학기 시작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요. 학교 잘 다니고 있습니다. 형은 어때요? 학교는 재밌어요?”

“뭐, 그냥 그렇지. 사실 와 보니까 별로 재미는 없더라. 차라리 재수학원 시절이 더 재밌었던 것 같아.”

“에이, 설마요. 그렇게 고생해서 제일 좋은 대학 들어갔는데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하하, 무슨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즐겁냐. 요즘 따라 가끔 생각한다. 뭘 위해서 그렇게 3년을 보냈는지 잘 모르겠어.”

“다들 그렇죠, 뭐. 아마 학교를 계속 다니다 보면 생길 거예요.”

“그럴까?”

“아마도 그럴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형이 말을 건다.

“어디로 갈까?”

“음....... 글쎄요. 그냥 형이 정해요.”

“우리 집 어때?”

“형 집이요? 부모님 계시지 않아요?”

“일주일 전에 이사했어. 이제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

“와, 정말요? 형, 소원 풀었네요?”

“하하, 뭐 그렇지. 어쨌든 대학도 붙고 했으니까 혼자 살아보라면서 허락하시더라. 뭐, 막상 혼자 사니까 불편한 점도 많은데....... 아직까지는 장점이 더 많아.”

“흠....... 여자랑 맘 편히 잘 수 있어서요?”

형은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그것도 포함 돼.”

전화 벨 소리가 울린다. 내 벨이 아닌 걸 보니 윤성이 형의 핸드폰이다. 윤성이 형은 계속 앞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어, 그래. 미영아. 지금? 아, 어쩌지. 지금 중요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뭐? 하하, 말도 안돼. 난 너 밖에 모르잖아. 남자야, 남자. 정말이라니까. 바꿔줘? 그래, 알았어. 내일은 꼭 만나자. 내가 데리러 갈게. 그래, 내일 봐.”

“애인이에요? 또 바꿨네요.”

“사람이 물건이니, 바꾸게. 뭐, 잠깐 만나는 애야.”

“이번에는 양다리 아니에요?”

“이 놈이........ 난 양다리 안 한다니까.”

난 짓궂게 웃으며 말한다.

“믿을만한 얘기를 해야죠.”

형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이 놈이 끝까지 까부네.”

“형 소문들도 대단했잖아요. 뭐, 한꺼번에 4명의 여자랑 잤다, 밤의 황제다, 에로 비디오에 출현했다, 또.”

“에로 비디오는 정말 황당했어.”

“맞아요. 그런데 그때는 그게 사실처럼 들렸다니까요.”

나와 형은 잠시 그때를 생각하며 웃는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많은 아이들이 꽤 진지했었다. 형을 잘 알고 나서 느꼈지만 소문이란 확실히 믿을 만한 게 안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까. 형의 웃음은 어느새 씁쓸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인현아, 난 말이야........”

형은 거기까지만 말한다. 짧은 순간 동안 난 내가 뭔가 말을 잘못 한 건 아닌 가 생각한다. 형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을 잇는다.

“아니다.”

형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던 나는 맥이 풀린다. 형은 예전에도 가끔씩 그런 태도를 보였다. 마치 트림을 하고 싶지만 쉬 나오지 않는 트림을 그냥 참는 것처럼 형은 말을 잇지 못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형은 오랜 시간 침묵에 잠겼다. 형의 그런 태도에 나도 그다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아파트 단지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이 사는 아파트는 그다지 크지도, 그다지 작지도 않아 보이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였다. 그 안 쪽의 풍경도 대부분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다르지 않다. 단지 내의 건물 곳곳에는 작은 균열들이 가 있고 본래 베이지 색이었을 벽면의 색은 때가 타서 커피색 비슷하게 변해있다. 아파트 건물 주위로는 시들시들한 정원수들이 해자처럼 빙 둘러있다. 그런 건물들의 빈 공간 사이로 강하지 않지만 거칠게 부는 바람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이스크림 비닐 따위를 날리는 것이다. 저녁 무렵의 아파트 풍경이란 이렇게 을씨년스럽고 삭막한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가 그나마 삭막한 풍경을 일부 지워준다.

“예상보다 훨씬 초라하네.”

내 중얼거림에 형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한다.

“뭘 바란 거야?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고급 맨션? 미안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라고. 망나니 삼수생 아들에게 고급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를 줄 정도로 말이야. 난 이정도로 감지덕지다.”

“그런가요? 그래도 부럽네요.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도 있고. 부자가 좋긴 좋은가 봐요.”

“흠....... 내가 부자라는 걸 부정하진 않지만....... 그런 식의 말투는 별로 안 좋아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둬.”

“네, 형님.”

난 배시시 웃는다. 형도 그런 날 힐끔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짓는다. 얼마 정도 단지 내를 운전하다 형이 말한다.

“야, 여기 키 줄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난 주차시켜 놓고 올라갈 게. 주차장 입구가 저쪽에 있거든.”

“그러죠, 뭐.”

“106동 304호다.”

형은 나를 106동 근처에 내려다 주고는 주차를 하러 간다. 나는 106동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11을 가리키고 있다. 그냥 뛰어올라갈까 생각을 하다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하고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다. 점심을 안 먹었더니 힘이 없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심심해진 난 콧노래를 부른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내 콧노래가 무겁게 울린다.
생각보다 엘리베이터는 빨리 내려온다.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사람은 내리지 않는다. 난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조금 올라간다 싶더니 금방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멈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304호를 찾기 위해 저녁 무렵의 힘없는 붉은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한다.
마침내 304호를 찾았다. 열쇠를 따고 들어가니 묘한 열기가 훅하고 다가온다. 그다지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는 형의 성격을 생각하면 집은 놀랍도록 깨끗했다. 단지 술병 몇 병이 거실에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J&B같은 싸구려 양주다. 거실 중앙에 놓여 있는 탁자에는 과일과 과자, 먹다 남은 통닭들이 있다. 통닭 냄새를 맡아 상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치킨을 집어 먹는다. 내가 집어든 통닭을 반 정도 먹었을 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난다.
여자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반라의 여자다. 위에 헐렁한 티셔츠 하나만 걸친 듯 기지개를 펴니 엉덩이가 보인다.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낸다.

“아.......”

그녀가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본다. 그녀의 얼굴은 숙취와 늦게까지 잔 잠으로 엉망이다. 얼굴은 잔뜩 부어있고 입가에는 침이 말라붙은 하얀 자국이 있고 눈은 잘 떠지지 않는지 거의 감고 있다. 그나마 긴 머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머리모양은 나쁘지 않다.

“누구세요?”

“아....... 윤성이 형 따라 왔는데.”

다행히 짧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기에 더듬지 않는다.

“윤성이는요?”

젠장.

“저기. 아, 그게 지금 차가 주차를, 아니, 아니, 차 주차 시키러 갔어요.”

난 분명 얼간이처럼 보일 것이다. 말을 더듬는 것도 모자라서 머리를 마구 흔들며 얘기를 했으니. 허나 그녀는 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난 소파에 털썩 앉는다. 갑작스럽게 반라의 여자를 보는 것은 분명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일이다. 놀라움과 성적 흥분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난 잠시 두 가지 격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형이 온 듯하다. 철문 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린다. 형은 날 보더니 의아한 듯 묻는다.

“어?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얼굴은 또 왜 그렇게 빨개?”

나는 화장실을 가리키며 소리는 내지 않고 ‘여자’ 라고 말한다. 허나 형은 알아듣지 못한다.

“뭐? 말을 해.”

난 다시 입 모양을 강조하며 말한다. 물론 소리 없이.  

“화장실? 화장실에 뭐가 있는데.”

형은 화장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제야 놀란 듯 소리친다.

“야, 너 아직도 안 가고 있었냐?!”

“음....... 왔어? 네 아는 동생이라고 누구 왔더라.”

“내가 데려왔지. 너 이러고 나온 거야?”

그러고도 한참 동안 화장실 안에서는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 묘한 상황 속에서 난 TV를 켠다. 어쨌든 이럴 때는 주위를 분산시킬 만한 게 필요한 법이다.
화장실 문이 열린다. 여자의 모습은 아까보다 나아 보인다. 둘은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TV를 보는 척한지 10분이 넘었을 무렵 잘 차려입은 여자와 형이 나온다. 형이 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말한다.

“아, 미안. 조금만 있어라. 금방 올게.”

“아, 네. 천천히 오세요.”

“야, 자꾸 밀지 마.”

“좀 조용히 좀 해. 기집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하하, 금방 갔다 올게. 냉장고에 마실 거 있으니까 먹고 있어.”

두 명이 나가고 난 혼자 남겨진다. 형 말대로 냉장고를 뒤적인다. 어머니가 해다 주신 듯 밑반찬들이 꽤 많다. 물도 있고 음료수도 있지만 난 캔 맥주를 꺼내든다. 오늘은 어른 흉내가 내고 싶다. 차갑게 식은 통닭과 기분 좋게 서늘한 맥주를 들이키며 아까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한다.
아까 형이 전화한 미영이라는 여자는 아닌 것 같다. 분명히 아닐 것이다. 숙취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방금 그 여자는. 역시 양다리인가?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형이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으며 말한다.

“야, 미안. 이거 큰 실례를 했네.”

“괜찮아요. 오히려 재밌는데요. 역시 형이랑 만나면 재밌는 일이 생겨요.”

“난 별로 재밌지 않다. 젠장, 간 줄 알았는데. 설마 저녁까지 자고 있을 줄 누가 알았냐.”

“형이 어제 밤새도록 괴롭혔나 보죠.”

“시끄러 임마. 근데 너 이런 프로도 보냐?”

“예? 뭐요?”

“교회 안 다니잖아.”

난 그제야 TV에서 기독교 방송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안다. 되는 대로 틀었는데 TV에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더니 무슨 채널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하, 뭐 틀어보니까 이 채널이 나오던데요. 형이야 말로 이런 채널 보는 거예요?”

“어제 어머니가 왔다 가셨거든.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셔.”

“아, 그래서 냉장고에 그렇게 밑반찬들이 많았구나.”

“그런데 그 닭 맛있냐? 다 식은 걸 먹고 있어. 하나 시켜줄게.”

“시켜주면 고맙죠.”

형은 일어나서 통닭집에 전화를 한다. 난 맥주를 홀짝이며 형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린다.

“형 근데 아까는 양다리 안 한다면서요.”

형이 전화를 끊고 냉장고 문을 열며 반문한다.

“근데?”

“방금 그 여자는 뭐예요.”

“전 여자친구. 영어로는 Ex-girl friend.”

“에엑? 전 여자친구랑 잤단 말이에요?”

형은 냉장고에서 꺼낸 캔 맥주를 홀짝이며 대답한다.

“왜? 이상해?”

“글쎄요. 일반적인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오, 나도 영어 쓴다고 너도 영어 쓰는 거냐? 많이 늘었는데. 너 외국어 영역 몇 점 받았냐?”

“말 돌리지 말구요.”

“흠....... 뭐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지. 하지만 굳이 네가 대답을 원한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정도가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을 거야.”

“명답이네요.”

형은 내 옆에 앉는다.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우리 둘은 맥주를 홀짝인다. 잠시 후 깊은 침묵의 용액에 대화라는 앙금을 만든 사람은 역시 형이다.

“그 여자는?”

“.......”

“아직 이냐?”

“모르겠어요. 근데 그거 물어 보려고 부른 거예요?”

“아니, 그냥 대화를 하고 싶었어.”

“말 안 하고 살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깊은 대화라는 거지. 자기 속에 있는 말들,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공유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잖아. 그런 것들을 좀 꺼내 놓고 싶은 거지.”

“얘기 들어주는 건 자신 있어요.”

형이 날 보며 웃는다. 나도 형을 따라 웃는다.

“넌 참 희한해.”

“뭐가요?”

“널 보면 말이야. ‘아, 이 아이는 내 말을 이해해줄 거야. 오해하지 않을 거야.’란 확신이 든단 말이지.”

“좋은 거죠?”

“물론. 누군가에게 힘이 되거든.”

“누군가에게만?”

“그래,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를 피하겠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들이 밝혀질까 봐. 그것도 자기 입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때로는 네가 필요할 거야. 그런 사람들은 조금씩 마모되기 마련이거든. 세찬 바람이 자신을 깎지 못하게 가면을 두르고 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안에서부터 부서져 가는 꼴이니까. 그때 누군가가 필요하지. 너 같은 사람이 말이야.”

“글쎄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는 몰랐는데요.”

“그런데.”

“네?”

“너 같은 사람은 자기 얘기를 안 해.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거나 거기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할 뿐이야.”

“.......”

“왜 그럴까? 왜 그러는 거니? 네 속에는 도대체 뭐가 있어?”

맥주를 다 마셨다. 난 한 손으로 캔을 찌그러뜨리려다가 안 되자 두 손으로 찌그러뜨린다. 캔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던 형이 말한다.

“미안. 어쩌다 이런 얘기가 나왔지. 기분 나빴냐?”

“아니요.”

“저기....... 나는 가끔 나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 방금 너한테 이상한 소리를 해댄 것도 그 때문이야. 네가 부럽거든. 자신을 추스르고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워.”

“저도 가끔은 저 자신을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있어요.”

“넌 가끔이지만 난 항상 그래. 많은 여자들과 만나는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그렇게 여자들과 자고 나서 미치도록 허무한 적이 정말 많아. 나도 남자니까 섹스가 싫지는 않아. 아니, 굉장히 좋아한다고 해야 하겠지. 그런데 그 섹스가 끝나고 나면은 지독한 죄책감이 내 안을 가득 채우는 거야. 그리고 그 감정들을 상대에게 풀어버려. 내가 한 여자를 오래 사귀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내 귀에 걸리는 단어가 있다. 죄책감 이라고?

“저기, 형.”

“응?”

“방금 죄책감이 든다고 했는데.”

“근데?”

“그렇게 섹스를 하면 죄책감이 드나요?”

“무슨 말이냐?”

“아니, 뭐 형이 신부님도 아닌데 꼭 그런 거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나 해서 그래요. 아, 물론 비난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가?”

형은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마시더니 침묵에 잠긴다. 다시 시작이다. 그 깊은 침묵. 침묵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만큼 길어졌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시킨 통닭이 온 모양이다. 형은 지갑을 가지고 나간다. 값을 치루고 형은 통닭은 가지고 온다.

“여기 통닭이 맛있어. 양도 많고.”

“잘 먹을게요.”

확실히 아까 식은 통닭보다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형의 방금 전 침묵이 신경 쓰여 통닭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잠시 후 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의 말은 별 의미 없는 농담이었다. 나도 형도 암묵적으로 아까 전의 대화를 무시했다. 우린 그렇게 술을 마시고 통닭을 먹으며 밤을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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