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명궁 예가 활로 아홉 태양을 쏘아 떨어트린 이래, 세상은 봄의 것이었다고들 한다. 하늘에 태양은 오직 하나뿐. 어딜가든 초목은 푸르렀고 먹을 것이 자랐다. 들판에선 가지와 느고버섯, 토란이며 맥이, 조들이 자랐고,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맛보는 포도며 산딸기 역시 어딜가나 무성했다. 그리하여 그때 소들은 늘 배불렀으며 여자들은 날마다 바구니가 가득이었고, 남자들은 모두 뭉쳐 멧돼지들을 쏘아잡으며 즐거웠던 것이다. 이야기꾼 영감의 말 그대로, 정말로 좋았던 때였다. 남쪽 사람들조차도 그때는 우리를 부러워해서는, 고기를 얻고자 베틀이나 누에 등을 가지고 산을 올라오곤 했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건 너무나 옛날 이야기. 어쩌면 예는 너무 태양을 다그친 모양이었다. 태양은 힘을 잃어갔다. 날은 계속 추워지고, 처음 보는 식물들이 자랐다. 그 식물들을 시험하다가 무당 둘이 죽었고 아이들은 설사를 심하게 앓았다. 굶는 일이 자주 생겼고, 때문인지 부모들은 사소한 말다툼도 그냥 넘기질 않았다. 대모나 족장이 보는 앞에서도 서로를 헐뜯고 머리를 붙잡기 일쑤였다.

 짐승들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많아졌으므로 무리를 옮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으나 그건 오히려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늘어난 사슴무리들로 남자들이 기뻐하던 것은 잠시, 곧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처음 나타난 것은 범이다. 이 년 전, 열여섯짜리 젊은 녀석의 창에 한쪽 눈이 찔린 뒤로 왼쪽눈이라 불리게 된 붉은 놈이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었다. 늙고 이빨이 약해진 대신 꾀가 늘어버린 놈은, 낮에는 기척도 하지 않다가는 밤이면 마을에 슬며시 나타난다. 오줌을 싸러 집 바깥으로 나선 아이를 노려 부모들의 애간장을 타게 하는 것이다.

 늘어난 맹수는 그 놈만이 아니었다. 곰이며 오소리들, 심지어는 멧돼지들도 예전과는 달리 덩치가 크고 성정이 난폭해져서, 식물 뿌리를 캐어 밭을 못쓰게 만들 뿐더러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는 본디 농사를 짓지는 않았으므로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그건 산 아래 부족들에게는 큰 문제였고, 산 아래 부족들이 가난해지면 그들에게 모포며 고기를 팔아야하는 우리 역시 큰 손해를 보게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멧돼지 따위 같은 것보다 훨씬 끔찍한 것들이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들, 가장 무서운 것들.

 괴물들, 그것들은 북쪽에서, 겨울과 함께 왔다.

 마치 이야기꾼의 상상속에서나 나올법한 생김새를 한 것들이다. 나이를 무려 육십이나 먹은 대모도, 젊어서 이곳저곳을 다닌 도여리 영감조차도 정체를 짐작조차 못했다. 각각 털의 색깔이 달랐는데.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악령처럼 시커먼 털색을 한 놈부터, 눈 귀신처럼 새하얀 놈까지 아주 다양하다. 범과 곰에 비하면 덩치가 아주 작아, 심지어는 멧돼지와 같거나 작았지만 우습게 볼 수 없다. 그 흉폭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뿐더러 이빨과 발톱이 날카롭고 꾀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놈들은 무리를 짓는다.

 그렇다. 우리처럼 그들도 무리를 짓는다. 우리들처럼 그들도 전략을 사용하고. 우리들처럼 사슴이나 멧돼지를 쫓는다. 그리고 놈들의 그 흉흉한 눈동자는 기묘하게도 소름돋도록 우리와 같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다.

 무당이 말하길, 그 괴물들은 우리 조상들이 눈에 오염되어, 맹수의 형상을 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악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약초나 짐승에 관해서는 오래 공부했지만 귀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무당의 말이 옳은 지 아닌 지는 몰랐으나 한 가지만은 안다. 그것들은 살과 피로 된 존재이며, 화살과 창으로 찢어죽일 수가 있다. 그리고 놈들이 우리의 사냥감을 빼앗고 우리를 죽인 것처럼, 우리도 놈들의 사냥감을 빼앗고 놈들을 죽여야 한다.

 놈이 내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나도 놈의 암컷과 새끼들을 죽일 것이다.

 다짐을 되새기자 몸이 불타는 것만 같다. 일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선한,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일이 생각난다. 오랜 사냥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나를 보고 피하던 것. 대모가 전에 본 적이 없던 표정으로 나를 마주하던 것.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도 담담한 목소리를 내던 것 "자네가 나간 사이에 일이 있었네."로 시작된 이야기.

 일이 있었다고?

 아무리 대모라고 해도, 감히. 그따위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악령을 말하듯 내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했기에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일부 뿐이었다. 내가 사냥을 나선 사이 괴물들이 마을에 왔다는 것. 모두 자기 가족들을 지키느라 급급한 사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아내와 아직 젖먹이인 아이들이 놈들에게 물려죽었다는 것. 빌어먹도록 단조로운 이야기였다.

 이야기꾼 영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잊어버리라고. 시체를 건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시체를 나는 보지도 못했다. 돌아왔을 때 내게 남은 건 작은 흙무덤이었을 뿐이니까. 그러니 영감의 이야기는 내 화를 돋구었을 뿐이다.

 단 한 가지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영감은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해친 것은 괴물 중에서도 우두머리라고 했다. 흰 털을 하고 주둥이에 상처가 있는 놈이라고.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놈의 암컷과 놈의 새끼들을 놈이 보는 앞에서 죽이고, 놈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놈에게 내 고통을, 이 찢어지는 기분의 만 분의 일이라도 받게 하리라.

 그렇게 다짐하였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늙은이들과 여자들은 겨울을, 사냥꾼들은 괴물에 겁을 내었다. 놈들을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 평화는 없다는 내 말은 무시당했다. 늘 내게 현명하다고, 올바른 말을 한다며 아부나 뱉던 것들의 태도는 바뀌었다. 내가 조급하다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대모는, 말은 염려하는 척 하였으나 결국 잊어버리고 새로 혼인을 하라는 소리 뿐이었고 애들이나 속이는 사기꾼같은 무당은 내게 악령이 깃들었다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점괘라는 나무 쪼가리에 의존해 괴물들과 싸우는 것이 길하지 않다며 헛소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놈의 목을 분질러버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야만 했다.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늙은이들마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릴 때까지. 괴물들의 수가 한계에 다다른 지금에 와서야 기회가 찾아왔다. 놈들은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다른 부족의 아이들과 소들까지 건드렸고, 또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이제 놈들을 토벌하는 것은 이제 우리 부족만이 아닌, 바예 산을 중심으로 한 세 부족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세 부족 남자들은 모두 모여 놈들의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 부족들 모두가 모인 회의. 예전이라면 긴장할 법도 했지만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확신을 가지고, 나는 강하게 말했다.

 "쓸어버려야 합니다."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놈들은 조직적이며, 영리하다. 범이나 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다. 우리와 공존이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단 하나. 전쟁뿐이다. 놈들이 힘을 합치는 것처럼 우리도 힘을 합쳐야 한다. 한 부족 뿐이라면 피해가 크겠지만. 수가 많을 수록 피해는 작아지는 법이다. 세 부족의 남자들을 모두 모아 놈들의 굴을 소탕한다면 더 큰 해가 되기 전에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곰 부족 농부들은 겁을 먹었으나  사냥꾼들이며 목동들은 모두 공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괴물들이 방자하게 행동한 결과 모두 피해를 보았기에,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탓이다. 그러나 상황을 판단 못하는 무당 하나는 반론을 했다. 그 괴물들은 우리 조상의 환생이며 그렇기에 해친다면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고. 예전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차분히, 수십 번이나 되새겼던 목소리로 말했다.

 "조상님이 자기 자손을 먹어치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로 전쟁은 결정되었다. 남자들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맹세를 했다. 수십 년 만에 세 부족이 모두 연합할 것이다. 놈들의 굴을 불태울 것이다. 놈들의 새끼들을 죽이고, 놈들의 가죽을 벗겨 간을 씹으리라. 놈들을 이 바예 산으로부터, 기얀 강이 끝나는 저 먼 세계의 끝까지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놈들과 함께 온 것처럼, 놈들과 함께 겨울을 몰아낼 것이다.

 "겨울을 몰아내리라."

 모두가 소리내어 그렇게 다짐하는 것은 마음이 지친 내게는 적잖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별들 아래, 밤의 모닥불에 모두 모여앉은 것이 흥을 돋구기도 했던 탓일 터. 그 흥에 몸을 맡겼기에 나는 순간 원한을 조금이나마 잊었다. 괴물들에 대한 원한이며, 어느덧 내 의견을 무시하기만 한 부족 사람들에 대한 원한을 모두 잊은 채 마음이 떨렸던 것이다. 머리로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자기 이득 떄문에, 자기의 복수 떄문에 그렇게 맹세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마치 모두가 내 복수를 대신 해주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느꼈다.

 그건 일종의 소속감, 형제애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감정. 거기에 들떠서 술을 오랜만에 너무 많이 맛본 탓일까.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이미 취해있었다.

 "왜 이리 많이 마셨어?"

 집에서 들려온 소녀의 말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짧게 끄덕인 뒤 소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 목에 걸린 조개 껍데기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는 볼 수 없는 조개에 삼으로 매듭을 진 것이 특이하다. 아내가 결혼할 때 자기 부족에서 들고 온 목걸이와 같은 형식이다. 해안가까지 갈 수 있는 사람들, 오로지 산 아래 곰 부족에서만 그런 목걸이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녀도 아내처럼 곰 부족에서 왔다. 내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물론 내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모의 얕은 꾀였다. 우리는 근래 맹수들과의 전쟁으로 남자가 적었다. 거기에 나는 경험많은 사냥꾼이었으므로 대모는 내가 아내를 잊고 새로 결혼하기를 바랐다. 혼인을 해서 새 자식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부족 내부에서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가 아니므로 대모는 곰 부족에서 신부를 구하기로 했다. 대모도 원래는 곰 부족 출신이었으니 이야기가 빠르게 통했다. 그리하여 아내가 왔던 것처럼 그녀가 내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남녀가 한 지붕에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렇듯 대모나 이야기꾼 영감은 내가 아내는 잊고 그녀에게 마음을 두길 바라는 요량이었으나 나는 결코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싫었다던가 다른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 환심을 사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예뻤고 내가 남쪽 부족들처럼 재혼을 금하는 미신 따위를 믿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녀를 멀리한 것은, 단지 내 안이 잔혹한 살의와 아내의 복수로 가득차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날마다 아내를 죽인 괴물놈의 흔적을 찾아 바깥을 헤메는 삶을 살면서, 괴물의 아가리를 찢고 창으로 놈의 창자를 꿰어내는 것을 꿈꾸면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는 법.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어렸더라면 몰랐을 터. 그러나 나는 아직 젊어도 마냥 어리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고, 마음은 이미 너무 딱딱해진 채였다. 그리하여 같은 지붕 아래서 잔지 벌써 여러 밤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다른 이불을 썼으며 서로 말은 적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라곤 단순한 것 뿐이었다.

 "저녁은?"

 "먹었어."

 "술자리에서?"

 "그래."

 "뭐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몰라."

 "물고기? 아, 곰 부족에서 가져온 거구나. 그렇지?"

 그녀는 눈을 빛낸다. 자기 부족 사람들이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모양이다. 나는 거기에는 대답하진 않고 품에서 나뭇잎으로 싼 물고기 조금을 내놓는다. 가져올 때완 달리 차갑다. 오는 동안 밤이슬에 차가워진 탓이다.

 그러나 그녀는 별 불평없이 그걸 받는다. 우물거리며 맛나게 고기를 문다. 나는 그렇게 큰 맛을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꽤나 맛이 있는 모양이다. 나름 고향 음식인 셈이니까 그런걸까. 입이 심심하지 말라고 마찬가지로 나뭇잎에 싼 벌꿀 조금을 주었는데, 받으려고 다가와서는 내 술 냄새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얼마나 마신 거야? 술 그렇게 많이 마시지 마. 응?"

 나이가 손윗 사람인 내게 그렇게 참견하고 반말을 해대는 것은 우리 부족식으로 하자면 예의가 맞지 않았다. 이야기꾼 영감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영감은 그저 낄낄거렸는데. 영감 말로는 곰 부족이 계집애들을 버릇없이 키우는 탓이라고 했다. 내 경험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아무튼 그런걸 신경쓰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난 그저 고개를 흔든다.

 "잘 안 마시는 거 알잖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마신 거야."

 "그러고보니 모임에 곰 부족 남자들도 왔지?"

 "응."

 "도에도 왔어?"

 "모르는 이름이야."

 "그럼 예바는?"

 "그것도 몰라. 곰 부족 사람들을 내가 어찌 아나."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퉁명스러워진다.

 "잠이나 자자."

 "벌써? 늘 늦게 자더니."

 "특별한 날이니까. 조금 피곤하군."

 내 스스로 말해놓고도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 드디어 내일 복수가 이루어진다. 놈들의 소굴로 향하는 것이다. 문득 창을 쥐어 그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어떻게 찔러내고 어떻게 던질 지를 머리 속에 그린다. 놈들을 어떻게 해치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들떴다.

 그런 내 행동은 그녀를 조금 겁먹게 한 모양이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어온다.

 "특별한 날이라니. 그럼 결정된 거야?"

 "그래. 놈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어."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큰 사냥이니까. 혹시나 내가 못 돌아올지도 몰라. 혹시 그렇게 되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라구?"

 "그래."

 신경써서 한 말이지만 오히려 그 말은 하지 않으니만 못했다. 그녀는 훽 몸을 돌리더니 한숨을 쉰다.

 "매일 그런 소리지."

 무어라 대답하려는 내 입을, 뒤따르는 그녀의 말이 막는다.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창을 내려놓았다. 곧 방 안에 마련된 깃털과 지푸라기 위에 누워 몸을 편히 했다. 졸려서 눈이 감겨왔으므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생각치않고 되는대로 입을 연다.

 "말했잖아. 사냥은 위험하다고."

 "다른 남자들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네가 마음에 둔 남자들이 있을 거잖아?. 아까 물어본 남자들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도예랑 에보던가."

 "도에랑 예바."

 "그래 걔들."

 "걔들은 내 동생들이야."

 그렇게 말하자 대답할 말이 없다. 왠지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 하더니 곧 조용히 자기 자리에 누워 속삭인다.

 "……바보."

 속삭임치고는 소리가 컸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숨을 쉬고는 곧 새근 잠이 든다. 그러나 먼저 자리에 누운 나는 오히려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아내와 내 젖먹이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괴물놈을 상상하며 머리에 그렸다.

  놈은 거대하고 빠르다. 주둥이에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았으므로 분명 꾀도 많을 터. 인간을 경계하는 놈일 것이다. 그런 놈을 상대하자면 어떻게 해야할까. 날카로운 순록뼈와 나무 말뚝을 꼽아 함정을 파야지. 그 후엔 불과 연기로 피워 놈을 토끼를 몰아넣듯 몰아넣는 것이다. 함부로 창을 던지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할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던지기보다는 휘두르거나 찔러내는 것이 나으리라. 왼발에 힘을 싣어 온 몸을 던지듯 찔러내야겠지.

 그렇게 놈과의 싸움을 그리다가 나는 문득 잠에, 그리고 꿈에 들었다.

 평소 나는 꿈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보곤 한다. 그러나 그 날 꿈에서 본 것은 아내가 아닌 괴물이었다. 뱀처럼 긴 혀와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한 괴물. 그것은 꿈의 그림자 속에서 나를 노려본다. 나는 분노에 이글거리며 내 창을 찾는다. 그러나 창은 보이지 않고, 창을 찾는 내 팔은 어둠을 더듬으며 흐느적거릴 뿐이다. 그때, 놈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행동한다. 차디찬 송곳니를 드러내며 내게 도약한다.

 나는 놈에게 어깨를 물린다. 다급히 소리를 지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놈의 목을 조르려고 한다. 하지만 무력하게 허우적거리는 내 손은 괴물에게 닿지 못한다. 수면 위의 달처럼 일렁이는 괴물은 마치 악령들처럼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괴물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낸다.

 너를 죽일 거다.

 나는 다시 다짐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리라고. 그러나 여전히 내 팔은 놈의 그림자만 더듬을 뿐. 점점 커져가는 놈의 일그러진 모습 속에서 나는 그림자를 붙잡으며 허우적거린다. 꿈에 잠긴채, 흐느끼는 팔을 겨누어 놈의 심장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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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에서 깨니 아침이었다. 수탉이 우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그녀는 아직 잠에 빠진 채. 몸을 뒤척이기만 하고 일어나지 못한다. 괜히 깨우거나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나는 살며시 집을 나서기로 한다. 잘 다듬은 자갈과 비상식량을 매단 뒤 나머지 끈을 둘둘 말아 허리에 묶는다. 그리고 잘 다듬은 창 두 자루를 집어 하나는 오른손에 들고 하나는 등에 매었다.

 주변 냇물로 얼굴을 씻은 뒤 집회로 향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잠을 설친 탓에 적게 잠을 잤는데도 몸은 피로하지 않았고 정신은 오히려 명료했다. 어떤 식으로 함정을 이용할지. 어떤 식으로 놈들을 죽여야하는지가 머리 속에 계속 떠올랐다. 물론 생각할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족의 사냥꾼들은 내가 이끌기로 하였으므로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도 생각을 해봐야했다. 전처럼 이야기꾼 영감이 대장을 했더라면 좋았었겠지만, 영감은 벌써 오십으로 나이가 너무 들었고 또 이번 사냥은 내가 강력히 주장한 것이니까.

 생각을 하다보니 집회장에 금방 도착한다. 바로 일어나 집회에 향한 것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채다. 대부분 다른 부족에서 온 남자들이었는데. 어젯밤 다른 부족에서 온 남자들을 그대로 집회장에서 재운 탓이다. 그런 탓도 있고 마을에 사람이 너무 많은 탓도 있어서 집회가 시작될 때까지는 시끄럽고 매우 어수선하다. 그러나 우리 부족 사냥꾼들이 모두 모이고 나이많은 이들이 모이자 슬슬 분위기는 진지하게 가라앉는다.

 "그럼 오늘 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마자 나는 바로 본론을 말한다. 지휘와 전령은 여기 지리나 사냥, 함정에 익숙한 우리 부족이 맡을 것이라는 것과 각 부족 별로 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모아 세 무리의 몰이꾼을 만들 것.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부족을 가리지 않고 모아 기존의 함정을 다시 짜거나 새로 함정을 만들 것 등. 그리고 실제로 어디서 어디로 괴물들을 몰아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하면서 혹 반발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과 같은 반발은 없다. 애시당초 이건 우리 부족의 일이기도 했거니와 사냥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부족이 제일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 부족들이 모인 것은 꽤나 오랜만이므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실제로 남자들을 소집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만다. 실제로 준비가 갖춰진 것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떴을 때다. 이때 우리는 곰 부족에서 가져온 찐 곡식을 먹고 각자 비상 식량을 챙겨 출발한다.

 나무들이 울창한 바예 산 초입,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몰이꾼 중 선두가 뿔퉁소를 크게 불었고 나머지 남자들은 고함을 지른다. 신이 나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 남자라기보다는 아직 소년에 가깝다. 하지만 그러한 소리도 뭉치면 거대한 고함이 된다. 소리를 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슴과 토끼가 놀라 뛰쳐나오며 무리에 쫓긴다. 오늘의 목적은 그게 아니라 놈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온 녀석들을 놓칠 수는 없는 법. 성질급한 사람 몇몇이 던진 창에 맞아 사슴 두어 마리가 쓰러진다. 그 뒤처리는 아직 어린애들에게 맡긴 뒤 계속 전진한다.

 본디 사냥은 은밀히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은 하고자 하는 것은 사냥이 아니라 전쟁이다. 부족의 남자들을 한데 모았기에 그 위세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위세 앞에서는 심지어 범이나 곰일지라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놈들 역시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몰이꾼들이 그렇게 산을 빙돌며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두는 한편 우리는 무리를 나누어 흩어진다. 놈들이 도망쳐올 장소에 도착해 미리 함정을 만드는 것이다. 뼈와 그물을 엮어 발목을 꼼짝 못하게하고 날카로운 말뚝을 진흙에 박아 진로를 막는다. 몰이꾼들은 산을 빙 돌며 오는 것이므로 산을 가로질러온 우리보다는 훨씬 늦을 터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우리는 다시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바위 뒤에 숨은 채 챙겨온 육포를 뜯어 허기를 달랜다.

 저녁 때가 다 되어서 우리는 몰이꾼들과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한다. 작전은 그럭저럭 성공한 모양으로 몰이꾼들은 벌써 사냥감을 많이 챙겼다고들 했다. 놈들은 어찌 되었냐며 내가 궁금해하자 곰 부족 소년 하나가 놈들을 벌써 두 마리나 잡았다는 소식을 알려온다. 의심스러워하는 내게 한 마리의 시체를 보여준다. 축 늘어진 그 모습은 퍽 우스꽝스럽다. 그토록 영리하고 사나운 놈들의 최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금방 놈들을 다 쓸어버리겠는데요."

 "아직이야. 겨우 두 놈을 잡았을 뿐이잖나."

 나는 흥분한 소년을 제지시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계속 축 늘어진 놈의 시체를 쫓아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결코 방심할 수는 없다. 밤은 놈들의 시간이다. 우리의 수가 이전까지와는 달리 엄청나다고는 하나 그 힘은 어디까지나 낮의 것. 어두운 밤에는 그 고작 몇마리인 놈들조차도 우리를 습격하고 찢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 밤에는 놈들의 위협은 없었다. 습격을 경계해 횃불을 여러 개 켜고 불침번을 열다섯씩이나 세웠던 것이 먹혀들어간 탓일지도 모른다. 놈들은 확실히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부터 몰이를 계속해보았지만 놈들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것이 문제였다. 함정을 만들러 따로 떨어졌던 무리가 어미곰을 맞닥뜨린 것이다. 여섯이나 크게 다치고 둘은 바로 죽었는데,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곰 부족 남자들은 크게 흔들리는 듯 했다.

 "놈들의 굴은 분명 바예산에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철이다. 세상이 온통 겨울로 변했다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 법이며, 놈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간교하던지간에 놈들 역시 여름철에는 새끼를 길러야 한다. 새끼들을 데리고는 도망칠 수 없는 법.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던지 우리는 놈들의 무리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놈들과 우리의 조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리 찾아왔다.

 불침번이 적은 밤. 몰이를 시작한지 닷새가 되는 날에 놈들이 우리를 습격했다. 불침번이 너무 많다는 붉은머리 부족의 불만사항을 들어준 것이 실수였다. 놈들은 우리 불침번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놈들은 그걸 노릴 정도로 영악했으며 태양빛이 아닌 달빛 아래에서 더욱 빠르고 강했다.

 놈들은 마치 범이 그러하듯 바람을 거꾸로 타 냄새를 숨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불침번들은 놈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빛을 받아 초록빛으로 빛나는 놈들의 눈을 보고나서야 깨달았고 그런 뒤에도 놀라서 한참동안이나 지체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불침번이 낸 것은 고함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놈들의 이빨에 팔이 궤뚫리고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나는 바로 그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깼다. 비명과 고함 소리로 숲이 울렸다. 사방이 아비규환이고 모두 맞서싸울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모두 바닥을 기며 도망치기 바빴으므로 낮과는 달리 형세가 역전되었다. 놈들은 사냥꾼이었으며 우리는 사냥감일 뿐. 평생 사냥을 해온 이야기꾼 영감마저도 겁을 집어먹을법한 상황이다. 내 사냥경험이 자랑할 정도로 많은 것은 아니고 또 나는 평소 오히려 겁이 많은 편이었으므로 겁이 들어야 마땅할 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겁이 나지 않는다. 대신 수치심과 분노로 온 몸이 달아오른다. 겨울을 몰아내겠다며 굳게 맹세했던 사냥꾼들이 사슴이나 토끼가 된 듯 벌벌 떠는 모습이며 놈들이 그런 우리를 쫓아 벌레들처럼 드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혈관이 펄떡거린다. 심장이 마치 뜯겨져나갈 것처럼 뛴다.

 비명같은 고함을 지르며 창을 잡는다. 바로 앞 남자를 노리던 놈의 아가리에 창을 꽂아넣는다. 역겨운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놈의 대가리를 짓밟아 창을 뺀 뒤 다른 놈을 찾아 주위를 둘러본다. 돌무더기 위에 한 놈이 더 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사람의 목을 물려던 참이다. 창을 던져 목을 꿰어버린 뒤 돌팔매를 휘두르며 달려간다. 돌을 추처럼 휘둘러 놈의 눈알을 짓이긴다. 피가 얼굴에 가득 튀지만 나는 그것을 신경쓰지도 못한다. 흥분감에 온 몸의 털이 솟구친다.

 "죽여!"

 누군가의 고함으로 피가 달아오른다. 뜨거운 피를 숨결에 담아 몇 마디 욕설을 더 던진다.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다시금 사냥감을 찾는다. 이번에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벌써 반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나 경험많은 우리 사냥꾼들이 놈들을 해치우는 것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곰 부족이나 붉은머리 부족 남자들 역시 허둥지둥 무기를 잡은 채다. 욕설을 내뱉고 고함을 지르며 놈들을 상대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놈들을 찔러나간다. 말은 필요 없다. 어둠 속에서 필요한 것은 힘과 잘 정련된 창. 증오를 담아 들끓는 피뿐. 이제 다만 이를 드러내며 놈들을 찢고 또 궤뚫을 뿐이다. 창과 놈들의 이빨이 부딫히고 고함과 비명, 신음이 부딫히며 서로의 힘을 겨룬다. 놈들은 빠르고 힘이 세며 교활하고 심지어 밤눈조차 밝다. 그러나 우리는 수가 더욱 많고 우리의 창은 놈들의 이빨보다 길다. 그리고 우리 역시 교활하기로는 놈들 만만치 않은 것이다.

 놈들이 먼저 기습하였고 밤은 놈들의 편이었으므로 우리 희생자는 유례없이 크다. 사방에 시체가 즐비하고 피와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래도 이기는 것은 우리다. 우리 무리가 더 많고 기세가 강했다. 오늘밤 우리는 사냥꾼이었고, 놈들은 사냥감이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 우리는 환호성을 질러댄다.

 추격에는 쉴 틈이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말고 놈들을 궤멸해야한다. 그런 다급함과 원수를 찾아야한다는 강박감에 나는 달려 숲속 깊숙히 놈들을 쫓는다. 그렇게 놈들을 쫓다가 문득,  가린 구름을 벗어난 달빛 아래 나는 놈을 발견한다. 바위 위에서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는 놈. 흰 털을 한 놈이다. 주둥이에는 코까지 올라오는 긴 상처, 사람이 창으로 낸 듯한 상처가 있다. 놈을 보자마자 나는 깨닫는다.

 바로 그놈이다.

 아내와 아이를 해친 놈. 가죽을 벗기고 뼈를 부숴버려야할 놈.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온 몸이 떨려온다. 복수가 눈앞에 있다. 바로 저기에. 창을 꽂아넣으면 꽂힐 위치에. 온 몸이 기쁨으로 가득 차 환호성이라도 지를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창을 던지지 않는다. '놈을 놓친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의문과 긴장이 섞여 부끄럽게도 손이 덜덜 떨려온다.

 손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창을 든다. 달리던 발을 진정시키며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놈을 겨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놈. 나 역시 놈처럼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다. 기세를 맞받아치며 고함과 함께 창을 던져낸다.

 창은 이제껏 내가 던져본 것 중에 가장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놈이 있는 바위로 날아간다. 하지만 아쉽게도 놈의 움직임이 더욱 빠르다. 창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놈이 아닌 바위를 타격한다. 놈은 바위로부터 벗어나 이쪽을 바라보고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재빨리 등에 맨 다른 창을 꺼내지 않았더면 바로 덤벼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창을 꺼내 놈을 겨누었고 그렇기에 놈은 덤벼들지 못한다. 긴장하는 듯 털을 세우며 나를 경계한다. 그런 놈을 마주하며 나는 다시 창을 앞으로 내세운다. 이번엔 다시 창을 던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조심스레 놈을 겨누며 거리를 좁혀간다. 이순간 나는 다른 사냥꾼들이며 괴물놈들 생각은 까맣게 잊는다. 다만 놈의 이빨을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창을 찔러낼지를 머리 속에 그리며, 날카로운 창으로 놈의 목을 찢는 것을 상상할 뿐이다.

 긴장감 속에서 나와 놈은 서로를 노려본다.. 놈에게로 계속 접근하지만 놈은 쉽게 거리를 내주지 않는다. 이쪽을 바라보면서도 계속 뒤로 물러나며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킨다. 그러다가 문득 놈은 놈이 몸을 훽 돌려 나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당황한다. 네 발로 달리는 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법. 다급히 활을 쏘라고 외쳐보지만 대답이 없다. 그제서야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내가 놈을 쫓아 깊숙한 숲 속까지 혼자 들어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퍼뜩 놀란다. 놈의 꾀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긴장감이 들어 발을 멈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다시 깨닫는다. 나는 놈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놈 역시 마찬가지. 놈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은 것이다. 내가 놈을 경계하는 것처럼 놈 역시 나를 경계한다. 내가 이곳 지리를 모르는 것처럼 놈 역시 이곳을 모른다.

 내가 놈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놈 역시 나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창을 다시 힘껏 붙잡는다. 한발한발 내디며 다시 사냥꾼으로 돌아간다. 놈의 으르렁거림이 심장을 서늘하게 하고 놈의 이빨은 여전히 달빛 아래 빛난다. 그래도 나는 떨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 차근차근 놈을 조여가며 창의 궤적을 살핀다.

 내 기세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는지 놈은 바로 내빼기 시작한다. 놈이 기세에서 밀린 것이다. 이대로면 놈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문득 든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재빨리 도망치는 놈을 쫓을 수는 없다. 먼저 바위 아래에 던진 창을 주운 다음 끈을 쥐고 다시 어깨에 맨다. 차분히 증오를 억누르며 놈의 흔적을 쫓아 걷는다.

 추적이다.

 보통 이러한 추적이란 지루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조금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나는 이미 평소 사냥터로부터 떨어져 깊숙한 곳까지 온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 놈같은 괴물이나 다른 맹수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혼자 놈을 추적한다는 불안감과 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바쁜 것은 머리만이 아니다. 머리가 불안감과 긴장에 가득차있는 동안 내 심장 역시 크게 뛴다. 놈의 심장을 맛볼 것이라는 희열과 기쁨으로 마치 가슴이 불타는 것만 같다.

 "항상 차분해라."

 아버지가 늘 말하곤 했던 말을 중얼거린다. 항상 차분해라. 조상님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사냥꾼이며, 사냥꾼의 으뜸가는 덕목은 빠름과 강함이 아닌 교활함과 인내력이다. 증오에 온 몸이 타오르는 지금에서도, 아니, 오히려 지금에야말로 나는 완전한 사냥꾼이며 그 어느때보다도 교활하다. 나는 마치 매의 눈을 가진 양 놈을 본다. 놈의 생각을 읽고, 놈의 행동을 예측한다. 놈은 배고프고 두려우며 지쳤다. 동료, 혹은 부하들과는 이미 떨어진 상태다. 바깥에는 자신을 노리는 적. 그러니까 나같은 사냥꾼들이 우글거린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놈은 자신의 거처로 도망칠 것이다. 여름철이므로 놈에겐 새끼가 있을 테고 새끼를 지키는 것은 놈같이 무리를 짓는 동물의 본능. 놈은 자기 새끼만큼은 지키고자 할 터다. 새끼만큼은 절대로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겠지.

 "그래."

 나는 미친 것처럼 중얼거린다.

 "도망쳐라. 새끼들에게로 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히죽거리며 나는 놈을 생각한다. 자랑스러운 흰 털은 흙탕물에 더럽혀진 채. 새끼들이나 제 짝이 있는 제 굴을 향해 뛰어가겠지. 그리고 새끼들을 보는 순간 놈은 안심하며 긴장을 풀 것이다. 바로 그때. 내 창이 복수를 하리라. 돌로 놈의 두개골을 찍어버리고 창으로 놈의 사지를 찢을 것이다. 버둥거리는 놈의 앞에서 그 새끼들의 가죽을 벗기리라. 그 짝의 두개골을 부숴버리고, 그 대퇴뼈로 놈의 심장을 찍어 끝장내리라. 그리하여, 나는 자유로워지리라.

 그 생각을 할 수록 상황은 명확해지고 추적에는 열이 붙는다. 그리하여 나는 놈의 흔적을 곧 발견한다. 놈은 개울을 따라 암석 무더기가 가득한 산맥의 중추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우리가 보통 뼈골이라고 부르는 곳. 감으로 보아 동이 터오르기 직전 쯤이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놈이 나보다 훨씬 빠르기에 서둘러야만 했으나 조급히 뛰어서는 안된다. 차분히, 걸어서 놈을 따라잡는다. 놈이 제아무리 빠르다 한들 맹수들의 지구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맹수들은 빠르고 강한만큼 많이 먹고 많이 쉬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놈이 다급한 상황이라 한들 그런 자연의 이치는 벗어날 수 없다.

 추적 도중 강렬한 허기가 느껴졌기에 주머니에서 육포를 조금 꺼내 씹는다. 반드시 놈을 잡아먹을 작정으로, 또 날카로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허기를 달랠 정도만 먹으면 충분하다. 고기 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주머니를 단단히 조이고 히제바 나뭇잎에 손을 비벼 씻은 후 다시 창을 잡고 추적에 나선다. 그리고 다시 걷기를 한참, 하늘이 점차 파래오는 동이 트기 직전, 놈을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던 차에 나는 놈의 굴을 발견한다.

 뼈골 중턱에 자리잡은 동굴. 곰이나 살법한 거대한 동굴이다. 그 굴의 위치를 보았을 때 나는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 한다. 멍청한 것들. 놈들은 결국 우리보다 어리석었다. 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예전 우리 사냥터가 있던 곳을 집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터다. 놈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냥꾼들이었으므로 우리와 마찬가지인 환경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라.

 굴은 따뜻하고 안전했으며 근처에 개울이 있고, 주변에는 사냥감이 많다. 마을이 점점 남쪽으로 떨어진 탓에 요즘은 거의 버려진 셈이지만 내가 어릴적까지만 해도 이곳은 거의 우리 마을이나 다름 없었다. 나 역시 걸음마를 겨우 뗐을 때의 일이지만, 이곳에서 아버지를 따라 숨겨둔 함정이며 주변 사냥감, 약초와 독초 등을 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숨겨둔 함정들은 대부분 단순한 것이었으므로 지금에도 분명 쓸모가 있을 터다.

 기쁜 마음을 다시금 가라앉히면서 나는 먼저 굴 주변에 몸을 숨긴다. 놈은 경계심이 많으므로 조심해야만 했다. 먼저 놈이 굴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출구가 없는 굴 안이라면 내빼지 못할 터. 혹 놈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굴 안에 들어간 상태라고는 해도 문제될 건 없다. 새끼를 문 채로는 멀리 나가지 못할 테니 그때 기습한다면 놈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장소를 찾는다. 산의 뼈골로 불릴만큼 바위가 많고, 또한 나로서는 어릴 적 늘 숨바꼭질을 했던 곳이다. 숨을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완벽한 장소를 고르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동이 터오고 있었으므로 햇빛 아래에서도 몸이 은폐될 수 있고 동시에 굴을 감시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던 탓이다.

 허나 아무래도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수풀 사이에 숨어 내가 바위들을 살피는 동안, 다른 수풀 사이에서 놈이 나타난다. 흰 털에 주둥이에 상처를 한 놈. 놈은 조금도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는 절뚝거리며 굴 안으로 달려간다. 내 예상대로였다. 놈에겐 새끼가 있었고, 새끼를 찾으러 온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해본다. 굴 안에 어른 몇 놈인가가 더 있을 터다.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몇몇을 남겨두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지금 상황이 상황인만큼 그리 많은 수는 없을 터. 기껏해야 두 셋 정도일 터다. 거기다가 방금 들어간 놈은 질질 다리를 끌고 있었다. 오는 도중 함정에 걸렸거나. 나 말고 우리 사냥꾼 무리를 만나 다쳤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기습을 하는 셈이니, 지금 들어간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는 셈이다.

 "차분해야 한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본다. 승산이 있다고는 해도 나 혼자 달려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모한 것이다. 우리 수가 많으니 우리 사냥꾼들을 부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목에 걸린 고둥피리를 크게 불어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놈들은 금세 눈치채고 말 것이다. 새끼들을 데리고 금세 도망쳐버리고, 어쩌면 나는 영원히 놈들을 놓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놈들은 다른 곳에서 새로운 굴을 파겠지.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계속 생각이 머리 속에 밀려온다. 새로운 보금자리. 사냥감이 풍족한 그곳에서 원수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꼴이며, 새끼들의 몸을 핥는 얼빠진 모습을 하는 것.

 순간. 나는 모든 인내력이 달아나고 만다.

 침을 손가락에 조금 찍어 바람의 방향을 읽는다. 상황은 좋다. 바람은 반대 방향이라 냄새가 들통나지 않을 것이다. 몸을 숙이고, 괴물의 굴로 차근차근 접근한다. 입구 근처의 함정을 생각하고 어떻게 놈들을 해칠지를 머리속에 그린다. 그리고 입구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창을 잡은 채 조금의 떨림도, 두려움도 없이 고둥피리를 입에 가져다 댄다. 내가 만약 실패하더라도, 우리 사냥꾼들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함이며 또한 놈들을 깜짝 놀라게 할 의도에서다.

 깊고 중후한 고둥소리.

 온 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몸을 훽 틀어 입구 안으로 돌진한다. 안에 있는 놈들은 겨우 둘. 한 놈은 못보던 놈이었고, 한 놈은 익히 알던 원수, 흰 놈이었다. 새끼들은 조금 더 깊은 안에 있는 모양이다. 고둥을 불며 굴 안으로 들어갔기에 고둥소리는 안의 공명을 받아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놈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거대한 소리. 당황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창을 찌른다. 원수를 먼저 찢을 생각이었지만 다른 놈이 조금 더 앞에 있었기에 먼저 궤뚫린 것은 그놈의 목이다.

 놈은 끄륵거리는 피내음을 풍기며 고꾸라진다. 절명한 것이 분명하다. 놈을 찌른 창을 놓고 등에 맨 창을 끌르려한다. 쉽지 않다. 흰 놈이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로 달려든다. 내 목을 노렸으나 내 몸에 딱 붙은 제 동료의 몸이 방해된다. 나는 그 죽은 몸의 거죽으로 상체를 감싼다. 그걸로 몸을 방어하며 가까스로 등 뒤의 다른 창을 꺼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때 왼쪽 다리로부터 끔찍한 고통이 올라온다. 흰 놈이 종아리를 문 것이다.

 이빨에 짖이겨 쓰러지며 나는 팔꿈치로 놈의 머리를 친다. 놈의 움직임은 더욱 잽싸다. 내가 죽은 놈을 방패로 이용하는 것처럼 놈 역시 죽은 놈을 방패로 쓴다. 죽은 놈의 거죽 아래 놈의 눈이 희번득 빛난다. 놈은 내 종아리를 문 채 이를 비틀어 살점을 찢어내려 한다. 막아보려 주먹을 급히 휘두르지만 급하게 휘둘린 팔은 죽은 시체에 가로막힌다. 종아리에서 퍼져나오는 화끈한 고통. 불에 덴 듯한 그 고통과 당황 속에서 나는 고함을 지른다. 시체의 목에 찔린 창대를 지레처럼 내려 놈을 때린다. 그건 제대로 먹혔고 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잠시 물러선다. 하지만 곧 놈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다시 달려든다.

 죽은 놈을 휘둘러 놈의 이빨을 밀어내려 해보지만 놈의 힘이 너무 강하다. 놈은 나를 깔고 뭉갠 뒤 어긋난 창대와 죽은 놈의 시체 사이로 주둥이를 들이민다. 내 목을 노리며 허공을 깨물고 컹컹거리며 짖어댄다. 창대를 놈의 아가리로 밀어넣어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 놈이 달려드는 힘에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고 창대가 휜다. 놈의 붉은 아가리가 바로 목전에서 들이밀어졌으며, 놈의 침이 내 얼굴에 튄다. 당장에라도 창대가 부러지고 놈의 이빨이 내 목을 궤뚫을 것만 같다. 그 순간, 창대가 부러지기 직전에 나는 문득 바닥에 나뒹구는 내 또다른 창을 본다. 순간 내 머리 속이 번뜩이는 것만 같다. 죽은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고함을 지른다. 들끓는 내 모든 힘을 담아 몸을 돌려, 역으로 놈을 뒤집는다. 회전하는 힘을 담아 서로 버둥킨 채. 오른손으로는 놈의 목을 조르며 왼손으로 짧게 쥔 창을 놈의 옆구리에 꽂아넣는다.

 끔찍한 비명과 피.

 놈은 최후의 힘을 담아 내 몸을 버둥켜안는다. 발톱에 내 온 몸이 할퀴고 피가 흐른다. 놈을 밀어내려하다가 발을 헛디딘다. 비틀거리며 놈과 함께 뒤엉킨다. 운이 좋지 않다. 등이 동굴 안쪽 귀퉁이에 닿는다. 동굴물이 흐르는 쪽, 옛 사냥꾼들이 만든 함정이 남은 곳이다. 약한 지반은 우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선반처럼 치솟은 암석이 부수어지고, 튼튼해보이던 동굴 귀퉁이는 낭떠러지가 된다. 낭떠러지의 끝. 그곳을 향해 떨어져내린다. 놈과 함께, 동굴의 안, 깊은 어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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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나는 꿈꾼다. 낮의 꿈이다.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했으며 어둠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공기에는 조금의 차가움도 없고 기분좋은 따뜻함과 햇살 속에 오직 아내와 아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포대에 쌓인 젖먹이들과  젖먹이들을 함께 안은 아내. 아이들을 얼러 조곤조곤 잠재우고는 나를 바라본다. 맑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햇빛 속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그만 입을 벌리고야 만다. 넋빠진 소리를 내고 잠깐 멍하니 있다가는, 곧 허겁지겁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달려간다. 손을 뻗는다. 아내에게 닿기를. 그리하여 차갑게 떨리는 내 손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손은 아내에게 닿지 않고 내 멍한 걸음으로는 아내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지친 숨을 몰아쉬며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기를 소망할 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애원하듯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지껄여댄다. 돌아오라고. 떠나지 말라고. 나는 마침내 너를 위해 해내었노라고. 원수를 잡았다고. 그러나 아내에게는 닿을 수 없고, 꿈은 거기서 끝난다.

 그리하여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모양으로 등은 뻐근하였으며 찢기고 멍든 다리는 끔찍히 아팠다. 몸을 움직이려 해보지만 할 수가 없다. 온 몸을 돌무더기가 짓누르고 있는 듯 했고 만져보니 실제로 그러했다. 아마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같이 떨어진 돌들이 나를 덮친 모양이다. 다행히 손과 상반신을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뿐으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위를 더듬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해본다. 얼마나 잔것일까. 사방이 어두워 시간을 분간할 수가 없다. 주위를 허우적거려도 손에 잡히는 거라곤 몸을 짓누르는 돌무더기 뿐이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은 단 하나. 놈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직까지도 손의 감각이 생생하다. 놈의 옆구리에 바로 이 손으로 창을 꽂아넣었다. 창자를 헤집었으므로 범이나 곰이라고 할 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상태다. 거기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놈이 아무리 괴물이라고는 해도 그런 상처를 입은 다음에야 별 수 없을 터.

 하지만 나는 곧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 먼 위에서 달빛이 조금 새어들어오고, 동굴 안의 윤곽이 드러나는 그 순간 나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또다른 빛을 본다. 발광하는, 짐승 특유의 눈빛. 가늘고 희미한 달빛 아래서도 그것은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며 이쪽을 향한다.

 놈이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그 상처를 입고서도 결국 놈은 살아있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남았으므로 그 허기는 더욱 강렬할 것이며 나에 대한 증오는 더욱 각별할 터. 증오라면 나 역시 지지않을 자신이 있지만 상황이 좋지않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돌무더기들에 발이 엉켜 빠져나올 재간이 없을 뿐더러 허리와 발목에서 이는 극심한 통증에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놈이 내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무력하고, 시간은 없다. 놈의 빛나는 눈빛을 마주 노려본 채로 나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더듬는다. 허리를 최대한 빼내어 더듬더듬 내민 손에 창날이 닿는다. 급히 들어올리느라 손이 베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참이 아니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나는 창을 들어 놈에게로 향한다.

 앉은 상태로 창에 힘을 줄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창날이 충분히 예리하기를,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기를 바랄 수밖에. 그러나 그렇게 절망적인 셈이 되자 오히려 나는 악이 박쳐오른다.

 "와라."

 침착하게 놈을 주시하며 나는 다시 소리지른다.

 "오라고!"

 소리는 동굴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러나 놈은 다만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낼 뿐이다. 내 도발에도 아주 침착히,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는 양 자리를 유지한다.

 으르렁거리며 입을 벌린 그 모습은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이 웃는 것만 같다. 복수를 했다고 생각한 나를 비웃고, 너 따위는 해칠 필요도 없다고 하는 듯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분노하고 더욱 놈을 증오한다. 머리 속을 핑핑도는 증오가 허리와 다리의 고통을 잊게하고, 내 날카로움을 돌려놓는다. 상반신을 일으킨 채 나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덤벼!"

 목 가득 악바치는, 뜻모를 함성을 질러대며. 나는 놈을 도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공격해오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 눈치를 살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이다.

 정적. 고함. 그리고 다시 정적. 침묵 속에서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한다. 놈이 가만히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무언가 축축한 것이 내 발치에 닿았을 때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린다. 놈은 나를 공격해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격해오지 못한 것이다.

 처음에는 빗물이나 지하수가 아닌가 했으나 사실은 달랐다. 고통에 찌든 감각으로도 그 끈적한 느낌은 물과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자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액체는 붉고, 또 검다. 피다. 내 것이 아니고 놈의 것이다. 놈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발치에까지 닿았다. 그렇다면 놈은 분명 어마어마하게 피를 흘렸을 터. 결국 낭떠러지와 상처 앞에서는 놈도 무력했던 것이며, 놈은 나 이상의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피를 그렇게 흘리고도 놈이 살아있다는 데에 먼저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내 두려움은 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놈의 조심스럽고 힘빠진 으르렁거림과 움츠러든 태도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공포의 냄새. 놈은 두려워한다. 제 동료를 죽인 나를, 만신창이가 된 채로도 창을 제게 들이미는 나를 두려워한다. 당연한 것이다. 놈은 약해져있다. 일어서 한발짝만 앞으로 나선다면, 심지어 맨손으로도 놈을 능히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복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놈을 죽이련만.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 없고, 놈 역시 움직일 수 없다. 그리하여 놈과 내 싸움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사이에는 기묘한 대치가 이어진다.

 "조금만 기다려라."

 하고 나는 놈에게 말을 건다.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희열과 증오를 가득 담아 놈을 조롱한다.

 "내가 살아남고, 넌 죽을 테니까."

 반은 내 사기를 돋구기 위한 허세였지만 반은 사실이었다. 놈은 심각한 상처에 피를 많이 흘린 반면 내 상처는 목숨에 지장을 주진 않을 것이다. 쫓기고 도망치느라 허기진 놈과 달리 나는 사냥을 하기 전 이미 밥을 든든히 먹은 뒤였고 허리에는 아직 물과 육포 주머니가 달려있다. 놈은 죽어가지만 내 다리에는 곧 힘이 돌아올테고, 그렇게되면 이 돌무더기를 치워버리고, 놈을 죽여버릴 수 있으리라.

 긴장이 조금 풀리자 고통이 돌아온다. 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에 참으려고 해보았으나 신음소리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상처가 얼마나 심한 것일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더듬어서 그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왼손으로는 계속 창을 단단히 잡고 오른손은 최대한 뻗어 무릎 아래를 만진다. 손이 닿자마자 느껴지는 고통에 나는 다시 신음을 흘리고 만다. 놈에게 물린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듯 했다. 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잠깐 존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다리를 움직이려고 하자 뼈가 마치 뒤틀리는 것만 같다. 혹시나 부러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허나 조급해선 안된다.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냥꾼의 제일가는 덕목은 교활함과 끈기. 늘 되새겼던 말이 아닌가.

 등을 기대어 몸을 조금 편히 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얼마나 떨어진 것일까. 희미한 빛 사이로 가늠해본다. 저 먼 위에 낭떠러지가 있고, 그 밑을 미끄러운 돌들이 계단처럼 받치고 있다. 높이는 아마 내 키의 일고여덟배 정도. 놈과 나는 아마 그 계단을 통해 굴러 떨어졌을 터였다. 그렇게 입구에서 바로 동굴의 지하 가장 안쪽으로 들어온 셈이 된 것이다.

 주변이 눈에 익음과 동시에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익숙한 장소다. 이곳은 어찌보자면 내 요람인 셈이다. 아주 어렸기에 기억나는 것은 몇 없다. 하지만 적어도 따뜻한 감각과 웃음 소리로 귀가 간지러웠던 것. 아이들끼리 뭉쳐지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아마 바로 이곳일테지. 말이 되는 일이다. 동굴의 가장 안쪽은 동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며, 그렇기에 아이들이 머무는 장소니까.

 "그래서 너도 여길 골랐겠지."

 주위를 살피던 놈은 다시 이쪽을 노려본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기라도 한 것인지. 낮게 으르렁거리며 허세를 떨어본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전까지와는 매우 다르다. 놈은 힘이 빠져 그저 숨소리만 낼 뿐. 예전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다. 으르렁거림이라기보다는 신음소리에 가까운 그 소리를 듣고 겁에 질릴 사냥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곧 힘이 빠져 그런 허세조차도 못 부리게 되겠지.

 내 생각대로 놈은 곧 잠잠해진다. 정말로 힘이 빠져버린 듯, 혹은 가만히 힘을 비축하기라도 하는 듯 몸을 숙이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렇게 되자 곧 동굴 안은 잠잠해진다. 들리는 거라곤 종유석에 맺힌 이슬소리 뿐. 오직 그 소리만이 주기적으로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요함, 그리고 다시 고요함.

 오로지 물소리와 정적. 그 정적 가운데 놈의 동태를 계속 살피는 일이란 의외로 피로한 일이다. 반나절은 지난것만 같은데도 놈은 죽지 않는다.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은 채다. 정말로 잠이라도 자는 듯 하여 그걸 바라보는 나 역시 계속 눈이 감겨온다. 어쩌면 장기전을 택한 것은 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짐승의 생명력은 때론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는 법. 놈이 나보다 심한 상처를 입었다한들, 나보다 먼저 낫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처음 눈을 뜨지마자 놈을 끝장내버려야 했을 터다. 다리의 고통이 심하다 한들 그건 내 목숨과 복수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도 움직여 놈을 죽여야만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다시 차오르는 고통을, 그리고 내가 잠을 자야만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잠을 자둬야 한다. 그래야만 찌든 이 다리에 힘이 붙고, 돌무더기를 치운 후 놈의 목에 창을 꽂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원수의 목전에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잠을 자는 사이 놈이 슬며시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죽는 것은 놈이 아니라 내가 될 터.

 "빨리 뒈져버려라."

 그렇게 외치면서 나는 머리를 흔든다. 내 걱정이 너무 큰 것이다. 놈의 상처는 분명 깊고, 그 상처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다. 제아무리 놈이 괴물이라한들 창에 내장이 궤뚫린 채, 이슬을 받아먹으며 회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 놈이 멧돼지만 되었어도 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놈은 전례가 없던 괴물이다. 그렇다면 내 상식 이상의 생명력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적에 가까운 생명력이라도. 놈에게는 그렇게까지는 어렵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을 터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남는 것은 피로함과 걱정 뿐이다. 뜨거워진 이마를 짚어 식히고 한참 멍해지고서야 당연한 사실이 겨우 떠오른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내 눈이 감겨온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때는 이미 늦었고, 나는 잠에 빠진다.

 계속 생각을 했던 탓일까.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나는 놈을 경계하고, 놈을 생각한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경계에서 놈은 슬며시 일어난다. 상황을 살피면서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입힌 상처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이. 나는 언제라도 너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듯이.

 "건방진 새끼."

 말한대로, 그렇게 생각한다. 진작에 일어날 수 있었지 않는가. 일어날 수 있다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는 것은 대체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나를 노리기 때문일테지.

 "악독한 놈."

 그에 맞받는 듯한 놈의 으르렁거림. 놈은 마치 항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나에 대한 비웃음에 불과할 터. 그렇지 않은가. 놈은 내 동포를 죽이고, 내 아내를 죽였다. 그런 놈이 악독하지 않다면 대체 어떤 것이 악독하다는 것인가.

 너다.

 그렇게 말하는 듯 놈은 악령처럼 살며시 일어나 이쪽을 향한다. 너 역시 내 동포를 죽이고, 짝을 죽였다. 그렇게 으르렁거린다. 그 으르렁거림에는 마치 한기가 묻어있는 듯 하다. 그 한기가 기억 속에 묻힌 무당의 말을 다시금 꺼낸다. '놈들은 겨울과 같이 왔다.' 그렇다. 놈들은 겨울과 같이 왔다. 선조들의 악령이라고 불렸다. 선조들의 것인 것은 모르겠으나 악령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놈이 그렇게 쏘아붙이며 오자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몽롱한 한기뿐. 그 한기에 온 몸이 마치 얼어붙은 것만 같다. 놈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놈은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놈의 동포를 죽이고, 놈의 짝을 죽였다고. 그러니 나 역시 죽는 것이 옳다고. 그러나 놈이 가족을 운운한 순간, 나는 가슴이 불타는 것을 느낀다.

 "너는 내 아이들을 죽였어."

 감긴 내 눈은 그 순간 크게 떠진다. 달빛 아래 놈의 모습이 동공에 비춘다. 놈은 조심스레 이쪽을 향한 채. 내가 마치 사냥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리를 재다가는 최후의 힘을 다해 내게 도약해온다.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바로 왼손으로 쥔 창을 들고 머리 속을 비집는 한기를 떨친다. 오로지 놈의 움직임과 창의 궤적을 생각하고 이쪽을 향해 달려든 놈의 심장을 정확히 겨눈다. 놈이 달려드는 그 때에 맞춰 모든 힘을 쏟아넣는다. 아래에서 위로, 수천, 수만, 평생을 연습했던 동작을 해낸다.

 창은 궤적을 그리며 놈의 심장을 궤뚫고, 놈은 달려오던 그대로 멈춘다. 놈의 심장에서 흐른 피가 머리카락과 얼굴을 적시고 돌무더기 아래로 뚝뚝 흘러 내 다리까지 닿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는, 다리에 차가운 놈의 피가 닿고서야 깨닫는다.

 끝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 속에 나는 놈의 시체와 창을 던져버린다. 이를 악다물며 새어나가는 소리를 참는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돌무더기를 치우고 숨을 몰아쉰다. 잠시 쉬었다가는 발에 힘을 준다. 잠을 충분히 잔 탓일까. 고장난 다리는 이번에는 제대로 움직여주었고. 마침내 나는 저 악령같은 돌무더기에서 빠져나온다.

 고통을 참으며 나는 어질어질 균형을 잡아본다. 강력한 허기가 느껴지자 내 시선은 자연 놈의 시체를 향한다. 놈을 잡아먹겠다고 맹세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생고기를 씹을 체력도, 마음도 없다. 대신 나는 허물어져 바닥에 쓰러진다. 가까스레 허리의 육포를 꺼내어 씹은 다음, 한참이나 누웠다가 비틀비틀 일어난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리려 해본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갈 길을 찾는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동굴의 깊은 안쪽, 놈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숨겨진 틈을 알아차린다.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아주 작게 보였고 원래는 실제로도 작은 틈에 불과했을 터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물이 떨어져 암석을 깎았고, 작은 틈은 점차 크게되어 이제는 크고 부드럽게 틈을 벌리고 있다. 사람이면 몰라도 그 괴물의 크기 정도라면 딱 안성맞춤일 크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틈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다. 다가가다가는 바로 그 틈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는 것을 본다.

 놈의 동족이 남아있었던가. 퍼뜩 긴장이 다시 밀려온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고 서둘러 땅에 떨어진 창을 집는다. 떠오르는 의문들과 혼란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간다. 단번에 해치워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괴성을 지르며 틈 안으로 창을 들이민다. 하지만 꾸물거리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지르던 소리를 멈추고 깜짝 놀라고 만다.

 틈 안에서 터져나온 것은 마주한 괴성이 아니라 그저 작은 소리 뿐이다. 꾸물거리던 것은 새끼였다. 괴물의 새끼, 놈의 새끼일 터다..아직 완전히 튀어나오지 않아 짧막한 주둥이. 솜털처럼 난 털들.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것들이 서로 엉킨다. 아직 어렸음에도 털의 색깔이 확연하다. 모두 네 마리로, 두 마리는 검고. 한 마리는 누렇고, 또 한 마리는 희다. 그 모든 색깔이 회색빛에 한데 엉겨져 놈들의 부모를 연상케한다.

 "그래서."

 나는 중얼거린다.

 "그래서 너도 여길 골랐겠지."

 내가 말해놓고도, 그렇게 말해놓고도 나는 그 진짜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틈은 동굴의 가장 안쪽이며 가장 부드러운 곳. 새끼를 놓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우리가, 내가 이곳을 집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녀석들도, 놈들도 이곳을 집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놈들은 이곳을 지키고 이곳에 새끼를 두었다. 그제서야 나는 놈이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는다. 놈이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놈은 나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놈은 나로부터 새끼를 지켰던 것이다.

 떨리는 손에 놈들의 부드러운 털이 와 닿았다. 새끼들은 내가 제 부모를 죽였다는 것도 모른다는 듯 소리를 내며 꿈틀거린다. 내게 엉겨붙고는 손가락을 핥는다. 그 축축한 느낌에 놀라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떤다. 칭얼거리는 녀석들에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느껴진다. 제 부모가 죽은 것도 모른채 원수의 손을 핥는 꼴이라니. 비참하지 않은가. 제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제 아무리 젖먹이라고 해도.

 젖먹이.

 내 아이들과 같다. 나는 그 사실에 퍼뜩 놀란다. 다급히 놈들의 모양을 확인한다. 비슷하게 생겨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검은 털을 한 두 놈의 모습이 같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모습이 같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두 놈은 쌍둥이였다.

 나는 틈으로부터 손을 뗀다. 머리를 짚은 채 비틀거리며 선다. 지나가는 생각들,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서 불현듯 무당이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쓸개에는 영혼이 깃드는 법이지.' 또한 이르기를 '곰의 쓸개를 잡아먹으면 곰의 영혼이 깃든단다.'

 그렇다면 내 아이들을 잡아먹었다는 놈에게는 내 아이들의 영혼이 깃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놈에게서 태어난 놈의 아이들에겐 내 아이들의 영혼이 깃들었을 터. 무당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아이들이 놈들의 형태로 환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헛소리."

 헛소리일뿐이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미신따위를 믿는 것은 어린애나 할 짓이고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 사냥꾼은 이런 곳에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나는 다시금 맹세를, 신성한 불 위의 맹세를 떠올려본다. 놈들을, 겨울을 몰아내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또한 놈을 죽이고, 놈의 짝과 새끼들을 죽이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마음먹고 나는 창을 높이 올린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설령 그 미신을 믿는다고는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쌍둥이인 것은 검은 놈들일 뿐이다. 적어도 흰 놈과 누런 놈은 상관도 없을 것이 아닌가. 일단 흰 놈과 누런 놈을 죽이고나면, 꺼림칙한 생각도 떨쳐져지고, 검은 놈들 역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을 내리기 직전에 나는 문득 꿈을, 놈과 내가 공유했던 그 기묘한 환상을 떠올린다. 복수를 부르짖는 내게 놈은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놈의 동포를 죽이고, 놈의 짝을 죽였다고. 그 소리에 묻혀 하마터면 난 죽을 뻔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는 꿈을 떨쳐버렸다. 어찌되었건 나는 놈과 달리 적어도, 최소한 아직까지는 놈의 새끼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놈의 새끼를 죽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어쩌면 나는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유, 내가 놈보다 나았던 이유를 없애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냐."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이긴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놈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내가 놈보다 교활했고, 내 인내력이, 내 체력과 정신력이 놈보다 강했다.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오직 그것뿐. 그 이외의 어떤 이유도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답 역시 간단할 터. 나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떨리는 창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맨손으로 끝장내리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손을 내민다.

 그러나 놈들은 다시 부드럽게 내 손을 핥았고, 놈들의 목을 조르려던 내 손은 그만 힘이 풀어지고야 만다.

 "아."

 나는 아이처럼 그렇게 소리를 낸다. 눈치 챌 사이도 없이 다시 한번, 그리고 또다시 한번. 어째서일까. 왜일까. 그 이유를 모른채. 나는 다만 번민하고 고민하며 녀석들을 바라본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는, 나도 모르게 손을 다시 뻗는다.

 조심스러운 손길. 이번에는 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녀석들을 품에 안고 여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다. 그러자 우스운 일이 일어난다. 해하려고 할 때는 엉키며 손가락을 핥던 녀석들은, 보금자리에서 벗어나게 되자 짖고 보채며 품안에서 날뛰기 시작한다.

 그렇다 한들 작은 녀석들을 놓칠 리 없다. 나는 창끈을 잡아 등에 매고는 절뚝거리며 바위를 오른다. 나갈 길을 찾아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짖고 보채며 품 안에서 날뛰다가는 곧 조용히 안겨오는 녀석들을 안은 채 나는 동굴 속을 나온다. 동굴의 밖. 밝은 빛 속으로.





-




 마을로 돌아왔을 때. 나는 두 가지 반응을 마주한다. 첫째로는 환영이다. 사람들과 떨어져 돌아오는 데까지 삼일이나 걸렸기에. 부족 사람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만 알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특히 사냥꾼들이 나를 환영했는데. 그건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희생은 결코 작지 않았지만, 우리는 결국 괴물들을 이곳에서 몰아낸 것이다  도중에 잡은 사냥감들도 풍성했기에 죽은 사람들 장례를 잠깐 마친 다음부터의 마을은 거의 잔치 분위기였다. 세 부족이 힘을 합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분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세 부족이 연합해야한다고 했던 나를 떠받들어주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러나 환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고. 내가 괴물의, 놈의 새끼들을 품고 데리고 온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다. 특히 무당들이 그러했는데. 그들 말에 의하자면 모범을 보여야할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내가 이곳에 몰아내려던 겨울을 몰고 왔다고 했다.

 무당들의 말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으나. 내가 데리고 온 새끼들은 비단 무당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탐탁치는 않게 보는 듯했다. 그리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온 나는 쉴 새도, 집에 돌아갈 새도 없이 상황을 설명하다가는 곧 이어진 밤의 부족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듣기로는 어젯밤 내내 잔치가 벌어졌다 했고, 또 다른 부족들이 돌아가는 통에 하루종일 마을이 어수선했으므로 회의 분위기가 엄숙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건 오산이었다. 나이 많은 이들이 내 행동을 경계했던 것이다.

 "태호(太昊)."

 대모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때는 늘 생경한 기분이 든다. 어릴적 무언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대모는 늘 그런 투로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예."

 "모두에게 그것을 보여라."

 나는 대모의 말대로 한다. 네 마리의 새끼를 차례로 들어 모두에게 보여준다. 웅성거림과 탄성. 모닥불 가까이에서 놈들의 모습은 아주 잘 보였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웅성거린다. 아이를 업은 여자,  호기심어린 남자 아이들. 함께 사냥했던 남자들, 수많은 시선이 나와 새끼들 사이에게로 쏠린다.

 그 시선들 사이로 나는 익숙한 시선을 발견한다.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 아내다. 기뻐하면서도, 또 걱정하는 그 표정. 그 표정은 곧 나를 지나 새끼들을 향한다. 그제서야 나는 새끼들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과 우유를 먹여 기운을 차린 뒤라곤 하나 녀석들은 아직 새끼였고. 그 수많은 시선에 어쩔줄 몰라하는 것이 당연할 터다. 나는 바로 새끼들을 털가죽으로 덮어 숨기고 이어지는 대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모두가 궁금해한다. 자네는 왜 놈의 새끼들을 데리고 온 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은 임기응변으로 나온 소리였다.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길러?"

 장로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기르다니? 소처럼 말인가?"

 "그렇습니다."

 웅성거림이 번진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압니다."

 "너는 소처럼 그걸 기르겠다고 했는데. 그럼 그걸 길러서 무슨 쓸모가 있단 거냐? 소처럼 밭을 갈게할 테냐. 아니면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냐."

 "사냥을 시킬 겁니다."

 "사냥을?"

 "이 녀석들의 동족은 타고난 사냥꾼이고. 녀석들의 코와 귀, 잽싸기는 우리로선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허긴 사냥꾼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이리는 타고난 사냥꾼이라고."

 "이리?"

 이야기꾼 영감이 끼어들었다.

 "서쪽에서는 놈들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야. 네가 없는 동안 우리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아무튼. 네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어.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면, 길들일 수 있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길들일 수 없다면 어쩔테요?"

 예의 장로가 그렇게 반론했다.

 "우호, 말해보시오. 놈들이 자라서 사람을 해치면 어쩌냔 말이오. 왜, 차라리 곰이나 범도 기르자고 하지 그러시오."

 "맞습니다."

 젊은 무당 중 하나가 그 말을 받아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것들을 악령이라고. 몰아내자고 한게 바로 태호가 아닙니까. 왜 지금와서야 다른 소리를 하는지요. 놈들은 싸그리 몰아내야만 합니다. 어떤 예외도 없이!"

 그 말에 이번엔 다른 무당에게서 소란이 인다. 처음과 같다. 누군가는 놈들을 선조의 영혼이라 하고, 누군가는 그저 짐승이라고, 누군가는 악령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점궤로 결정하자고 하며 나무조각을 두들겼는데. 그 때문에 회의장은 더욱 시끄러워져 간다.

 "그만!"

대모가 외치자 좌중은 조용해진다.

"아이들처럼 뭐하는 짓들이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지금 논의해야할 것은 지금 이 짐승을 태호에게 맡기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신령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대모님."

젊은 무당은 끈덕지게 말한다.

 "그게 신령인지 아닌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령이면 길할 것이요. 악령이면 흉할것입니다. 놈들이 한낱 짐승이라고 해도, 그 길흉에 따라 길흉화복이 결정날 것인데.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까?"

 "그럼 묻겠네. 우투, 자네는 그 길흉을 안다고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놈들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악령이고,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불러옵니다. 늘 말하지 않았습니까. 태호는 악령에 씌이고 만 겁니다."

 "그건 자네 신령님이 이야기해준 것이 틀림없겠지?"

 "그렇습니다."

 "자네 말고도 무당은 여기 다섯이 있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가? 이야기가 갈리는 것으로 보이네만."

 나이 든 무당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대모님.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대체로 모두 우투의 말에 동의하는 셈이니까요."

 "그렇소?"

 "놈들이 짐승인지 악령인지는 대모님 말대로 상의해볼 문제지요. 하지만 놈들이 짐승이던 악령이던, 어찌되었건간에, 신령님 말씀으로는 놈들을 기르는 것은 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럼 나머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신령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네 무당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오로지 야두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금 놈들이 선조의 영혼이며, 신령하다고 했다. 놈들에게 복수하고자 했을 때는 내 적이었으나 지금은 내 편이 된 셈이었는데. 그렇게 강력한 힘은 되지 못했다. 야두가 원체 말솜씨가 없었기도 했거니와 아무래도 지금은 우리와 놈들간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직후인지라 놈들에 대한 신비감이 떨어지기도 한 탓도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야두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세는 놈들을 기르지 않는 것으로 되어갔고 마침내 내게는 선택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여러 이야기 잘 들었소. 그러면……"

 "잠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고나서야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을 조금 후회한다. 대모가 말하는 것을 끊다니. 현명한 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고, 돌이킬 수는 없다.

 "대모님.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해보게."

 "제가 녀석들을 기르려는 이유는 녀석들이 단순히 유용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그러니 신령이니 악령이니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인가?"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는 대답하기 힘든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녀석들이 제 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웅성거림. 무당들은 동요하고, 아이들은 호기심에 눈을 빛낸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또한 나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대모는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역시 놀란 기색이었다. 웅성거림을 진정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내게 물어온다.

 "원수의 아이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겠지. 왜 그렇다는 거냐."

 "녀석들에게 제 아이의 혼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무당들을 자극하는 이야기였고, 실제로 젊은 무당이 발끈하며 일어선다.

 "말도 안돼. 왜 그렇다는 거야? 네가 무당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무당은 아니지만. 네게만 신령이 있는 건 아니지. 우투."

 젊은 무당, 우투는 흠칫하고, 나는 확신한다. 가만히 생각을 가다듬는다.

 난 늘 명철하게 생각하고자 노력했다. 이야기꾼 영감처럼,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무당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일 때도 이야기를 분별해서 들었으며, 늘 진실과 미신을 구분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이치를 따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이 그른지 알 수 없었으며 오직 무엇을 해야하는 지만이 명확했다.

 "'놈을 죽인 동굴에서 신령이 알려주었습니다. 놈에게 내 아이들의 혼이 깃들었다고. 그렇기에 놈의 새끼들로 환생한 것이라고. 그 말대로였습니다. 내 아이들은 쌍둥이였고, 이 녀석들도 쌍둥이였습니다. "

 "헛소리!"

 헛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람들을 웅성거리게 한다. 그렇다면 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해 먹고사는 이들에게는 제법 위협적인 것이며, 무당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한낱 짐승이 무슨 환생을 한다는 거고, 무당도 아닌 태호가 무슨 접신을 한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한낱 짐승이라고? 너는 이것들, 이리들이 악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너도 이리들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소리지."

 나는 똑바로 선다. 당황하는 우투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잇는다.

 "이리들을 몰아내고자 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놈들과 싸운 건 너와 무당들이 아니라 우리였고, 놈들을 몰아낸 것 역시 우리다. 놈들과 마주한 것도 우리다. 놈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란 말이다."

 사냥꾼들의 거친 호응. 사람들의 목소리와 시선. 그 가운데 나는 가벼운 흥분감과 동시에 불안을 느낀다. 사냥꾼으로 모자라 무당이 되려하는가? 이야기꾼 영감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답은 정해져 있다. 필요하다면. 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태호. 자네의 말은 일리가 있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야."

 "무엇이 아닙니까?"

 "자네 아이들 이름을 뭘로 지었었지?"

 "마고, 그리고 반고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렇게 말하는 대모의 눈빛. 예전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자란 탓일까. 나는 알 수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그 뜻은 명확하다. 대모는 시험하고자 한다. 나와 무당의 가치를 저울질하려 한다.

 "자네 아이는 둘이지만. 여기 새끼들은 전부 넷이네. 그리고 모두가 쌍둥이는 아닌 걸로 보이네만."

 대모가 뜻하는 바는 이제 분명하다. 무당의 영역을 넘보려면 무당의 거짓말을, 무당의 말을 알아아먄 하는 것이다. 대모는 그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무당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쌍둥이의 이름은 자네 아이들 이름과 같겠군. 마고랑 반고. 그러면 다른 두 녀석의 이름은 뭔가?"

 대모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그 뜻은 깊다. 새끼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내는 것은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질문은 아니다. 대모는 상징을 원한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만한 상징. 그것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다만 효과적이기만을 바랄뿐. 하지만 그런 것을 어떻게 준비하란 것인가.

 생각을 하느라 너무 지체하고, 곤경에 빠진 나를 구한 것은 사람들 속에서 들려온 대답이다.

 "가히랑 가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 시선 가운데로 그녀가 걸어나온다. 목에는 조개 껍데기 목걸이를 건 채 어깨까지 늘어트린 머리를 한 그녀. 아내다.

 "거짓말!"

 우투는 아내를 손가락질한다.

 "그게 놈들의 이름이라고? 놈들을 방금 본 주제에 그 이름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거야 방금 그렇게 녀석들 이름을 지었으니까요."

 "누가?"

 "제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 우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맥이 풀리고, 그 근엄한 대모마저도 잠깐은 웃음을 띈다.

 "여와(女媧)야."

 "네 대모님."

 "그러면 네가 말해보겠느냐? 검은 녀석 둘이 태호의 쌍둥이라고 하면, 남은 저 둘은 무엇이지?"

 아내의 대답은 빠르고 간결했다.

 "말씀드렸다시피, 가히랑 가이에요."

 웃음소리가 커져가고, 우투가 다시 날뛰는 것을 보며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정답이다.

 아내의 말대로다. 녀석들은 그저 그뿐이지 않은가. 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자, 가히야, 가이야."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조심스레 손을 뻗고 녀석들의 이름을 부른다.

 "마고야, 반고야."

 이름을 알아들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와 아내의 손짓에 반응한 것일까. 녀석들은 아내에게로 간다. 걸음마를 하듯 비틀거리며 조심스레, 그러나 차근차근 다가가 마침내 아내의 품에 안긴다. 털복숭이 몸을 비비고 혀를 내밀어 아내의 얼굴을 핥는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말보다 강한 상징이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보이고 아내에게로 다가간다. 서로 이야기하며 녀석들의 얼굴을 새긴다. 그리고 그 소란 속에서는 무당의 겁주는 말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게되는 것이다.

 "태호."

 "예."

 "모두가 저렇게 좋아해서야. 내가 어찌 감히 자네를 거역할 수 있겠나?"

 말에는 가시가 아직 남았고 무당들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으나 대모는 피식 웃고 말았고.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사람들이 조금 가라앉고 다시 회의가 엄숙해질 때쯤. 나는 다시 한번 녀석들에 대해 확실히 말했다. 검은 쌍둥이 둘은 내 죽은 쌍둥이의 환생이며, 남은 둘은 내 쌍둥이의 형제이기에 마찬가지로 기를 것이라고.

 무당들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상황이 이래서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내 신령을 인정하고, 대모가 보는 앞에서 나를 축복했다.

 "너는 세 부족을 연합시켰으며, 오랫동안 사냥꾼들을 이끈 공로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는 새로이 신령을 모셔 신령하게 되었으니, 네게 새 이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대모는 회의를 그 말로 끝마쳤다.

 "복희(伏羲). 네 새로운 이름이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다. 피로와 긴장으로 지친 몸을 이부자리 위에 뉘인채. 아내와, 아내에게 재롱을 피우는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가지 떠오르는 의문을 말해본다.

 "그러고보니 가히랑 가이는 대체 무슨 뜻인 거야?"

 "왜? 이상해?"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건…… 글쎄.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그냥 지은 거야. 그렇게 부르면 좋을 거 같아서."

 나는 왜인지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녀는 골이 나서 내게 다가온다.

 "왜 웃어!"

 왜 웃느냐고. 웃는 게 아니라고. 유치한 다툼을 하며 엎치락뒤치락하다 어느새 우리는 부둥켜안은 셈이 된다. 서로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부끄러워 눈을 돌린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나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함을. 사랑하기에 잊을 수밖에 없음을.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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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ㅁ' 13.02.25 15:04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섵불리’나 ‘금새’ 같은 오타가 있었고요. 아쉬운 점은 태호, 복희 같은 이름을 넣는데 집중했는지 이야기 자체는 진부한 전개가 아닌가 싶네요. 게다가 소설이 온통 설명이라 읽으면서 지치는 듯합니다. 설명을 좀 줄이고 대화와 장면만으로 썼으면 150매 분량 안으로 해서 거울 심사도 받을 수 있었을 듯하고, 이야기도 속도감 있고 간결해졌을 듯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부터 심리까지도 다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듯해서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정보가 있는 대화나 장면에서 세계관이나 상황을 유추해내서 같이 작품을 완성하는 재미가 있는 법인데, 이 작품은 과잉 친절로 도배된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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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warf 13.03.09 14:09 댓글 수정 삭제

  • No Profile
    Howarf 13.03.09 14:11 댓글 수정 삭제

    분량이 되지 않은데도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언 고맙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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