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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845 곰돌이

2011.06.15 17:0906.15

2845 곰돌이

  로봇이 있습니다.

  가족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아이 없는 부부들에게, 형제 없는 아이에게, 자식 내보낸 노부부에게, 애인 없는 젊은이에게 큰 도움이 되는 로봇이죠. 말동무가 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고, 집안일을 시킬 수도 있어요. 손쉬운 관리를 위해 자가 보수 기능까지 달려 있으니, 잔고장이 나더라도 스스로 치료할 수 있어요. 쉽게 말해 보죠.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한다는 점만 빼놓고요.

  말하자면,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마 이런 형태이지 않았을까요. 퇴근해 저녁밥을 짓는 시간, 꼼꼼한 포장으로 특별 배송된 소중한 택배물이 초인종을 울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거실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포장재, 그 불연성 스티로폼 더미 한구석에 두 발을 딛고 선, 매끈하게 라인 잘 빠진 로봇이 있었겠지요. 아가씨는 뛰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전원 버튼을 쿡 누를 테고, 이윽고 발랄한 시동음이 흘러나오고, 로봇이 깨어났을 거예요.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겠지요. 조바심과 설렘, 어색함과 반가움이 썩 멋지게 어우러지는, 그런 만남이요.

  로봇의 OS는 이것이 로봇의 첫 구동임을 대번에 감지해 내고는, 곧바로 사용자 인식 알고리즘을 실행합니다. 갓 부화한 새끼오리가 제 어미를 알아보는 걸 참고한 방식이라고 해요. 사람의 눈보다 열 배나 강력한 CCD카메라가 아가씨의 얼굴을 영상화하고, 로봇의 연산 장치는 그녀의 얼굴 윤곽을 수치화하여 분석했을 겁니다. 로봇의 두뇌, 가장 깊은 곳의 기억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데이터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곳에 소중히 보관해 두려는 거예요. 그녀는 가득한 미소로 로봇에게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안녕, 곰돌아! 난 유경이야!"

  그래서 한유경 씨의 로봇에게는 곰돌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F프라임' 시리즈 중 2845번입니다. 21세기 들어 눈부시게 발전한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결정체였죠. 그간 설왕설래 이야기만 많았던 '가족로봇'이라는 컨셉이 정말로 상용화되어 등장한, 기념비적인 역작이었으니까요. 이 혁명적인 위업을 달성한 개발사는 어느샌가 모 대기업에 인수되었고, 이 굴지의 대기업은 전세계를 주름잡는 유통망 및 마케팅 파워를 동원하여 또 한번의 성공신화를 썼지요. 사실 이 모델의 일화는 향후 몇 년간 각종 광고업계 자료에서 한 번씩은 짚고 넘어가는 단골 모범사례가 되기도 했어요. 소비자의 감성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휴먼마케팅이 주효했다나요.

  사실 초도 물량은 제품으로서 완벽한 완성도는 아니어서, 백 단위 품번에선 시스템 안정성이 떨어진다느니, 1천대 품번에선 전원부 마감 상태가 불량하다느니 좋지 않은 소문이 많긴 했어요. 물론 과장된 감이 있는 괴담이죠. 경쟁사의 음해와 중상모략,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악용한 교묘한 여론 형성에 의한 바가 컸겠죠. 허나 그렇다고 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것도 아니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로봇은 그 중에서도 2845번, 2천번대 번호를 달았거든요. 그런 사소한 공정 라인상의 실수는 모두 해결되었죠. 대기업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한 소비자 만족도 설문에서 압도적 최고점을 받은 시리즈예요. 명품, 개중에서도 뽑기 운까지 따른 당대 전자제품 시장 최고의 기린아였다는 거지요.

  일단 장점만 꼽아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단점이요?

  그야 왜, 전자제품 좀 안다는 사람들이 늘 말하거든요. 죽기 직전에 사는 게 제일이라고요. 눈 붙였다 떼기 무섭게 신제품이 나오는 세상이니까요. F프라임이 시장에 전격 공개된 지 육 개월 후에, 이를 갈던 경쟁사측에서도 야심작을 내놓았습니다. 한층 개선된 성능도 성능이지만, 이마를 딱 칠 만큼 절묘하면서도 무자비한 비교 광고가 전세를 대역전시켰습니다. 덕분에 이듬해에는 F프라임의 대항마 '큐비클 듀오'가 가족로봇 시장에 군림하게 되었죠.

  이후 가족로봇 시장의 판세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건 좀 힘듭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난립하며 각자 근거 기반을 다지는 춘추전국시대가 확립됐거든요. 속임수, 으름장, 갖은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무자비한 전쟁이 이어졌지요. 이에 희생자도 적지 않게 나왔습니다. 과로로 쓰러진 엔지니어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물론 소비자들도 소비자 나름대로 타격이 컸어요. 시장의 경쟁이 과열된다고 소비자들이 이득 보는 속 편한 시대는 애저녁에 지나가 있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거예요.

  초기버전 모델 F프라임의 펌웨어 업데이트가 단 1년 반 만에 중단되었다는 정도요.  

덕분에 전 세계의 뭇 얼리어답터들이 이를 갈았다고 해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측의 횡포였으니까요. 더군다나 그게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닌데 말이에요. F프라임은 무지무지 비쌌거든요.

  가족로봇이라는 건 본디 가족을 대신하라고 만든 물건입니다. 사용연한으로 최소 10년을, 최대 50년을 잡은 제품이죠. 그에 발맞추어 묵직한 가격표를 달고 나왔고요. 약정할부 기간마저도 그에 걸맞게 굉장히 길었다는 건 물론이죠.

  즉 무한할 것만 같은 구매력을 가진 얼리어답터들로서도, 사실은, 나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하는 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펌웨어 업데이트 중단이라는 게 얼마나 못된 정책인지.

  불쌍한 F프라임, 그리고 그 구매자 분들. 역사적 명기를 소유했다는 자부심을 바랐던 거라면 그건 이미 물 건너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F프라임은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받기 시작했어요. 대기업은 F프라임의 광고를 중단해 버렸죠. 각종 매체에서도 더 이상 언급되지 못했고요. 완전 찬밥 신세가 됐어요. F프라임이라는 이름은 천천히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대로 조용히 묻혀, 이렇다 할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F프라임들의 운명은 뻔해 보였습니다. 이렇다 할 전환점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말이에요.

* * *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선 곰돌이와 한유경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F프라임의 여러 결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그렇다면 그런 결함 탓에, 유경 씨가 곰돌이에게 실망해 내다놓은 로봇 취급이라도 했다는 것인지? 아뇨, 아니에요. 사실은 정반대였죠. 유경 씨는 곰돌이를, 그녀가 여태 가져본 적 없는 애인처럼 여겼는걸요. 퇴근 후 집에 돌아올 때면 "사랑해!" 꼭 끌어안았고, 손을 잡고 잤어요. 주말이면 꼭꼭 데이트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가족로봇이니까요. 연인이니까요.

  그래서 그 날도 유경 씨는 곰돌이와 멋진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금요일 밤이었거든요. 밤의 한강수변공원은, 나들이 나온 가족 단위 행락객들과 조깅하는 아주머니들이 적잖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고즈넉했습니다. 분위기가 꽤 괜찮았고, 유경 씨는 곰돌이의 품속으로 안겨들며 몸을 기댔어요. 곰돌이가 든든하게 그녀를 받쳐 올리기를 기대한 거였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곰돌이는 유경 씨를 받쳐 들기는커녕, 유경 씨와 함께 나동그라졌어요.

  "곰돌아? 곰돌아!"

  유경 씨는 피가 줄줄 흐르는 본인의 무릎도 잊은 채 그렇게 외쳤지요. 곰돌이는 대답이 없었어요.

  "여기요, 제발, 도와주세요! 곰돌이가, 우리 곰돌이가 이상해요!"

  덕분에 한강수변공원을 거닐던 서울 시민 수백 명은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쓰러진 가족로봇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아가씨의 모습을요.

  유사한 일이 전 세계의 F프라임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AS센터들마다 작동불능이 된 F프라임이 수십 대씩 밀려들어왔죠. 수십 대라니 말이 쉽지만, 그거 하나하나가 대략 회사원 석 달치 월급에 해당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휴. 정말 답이 없네요. 어휴.

  미리 작동시간이 지정된 바이러스가 침투해 모든 시스템을 한 번에 공격했다는 설, 혹은 한때 밀레니엄 버그가 그랬듯이 시스템 내부 시간 변수를 어설프게 선언한 덕에 구동시간이 늘어나자 에러가 났다는 설 등이 지지를 얻었습니다. 대기업으로서는 차라리 그런 쪽이기를 바랐을 거예요. 비교적 간단히 고칠 수 있는 에러니까요. 그러나 신은 대기업의 편을 들지 않아요. 일주일쯤 밤을 샌 엔지니어들이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 해답은 그런 게 아니었지요. 그런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원초적인 문제였어요.

  F프라임에 내장된 메모리 용량이 가득 차 버렸던 거예요. 가족로봇으로 기능하려면 일상생황 매일 매일의 일들을 다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죠. F프라임은 이 정보들을 모두 저장 장치, 그러니까 20세기에 처음 구상된, 트랜지스터 기반 구형 메모리 칩에 저장해 왔거든요. 그런데 그게 가득 차 버렸으니 그만, 펑, 하고 시스템이 주저앉아 버린 거죠. 어이없는 사건입니다. 사용연한 50년을 가정하고 만든 가족로봇의 기억용량이 단 3년만에 가득 차버리다니요.

  전 세계의 네트워크가 100억 누리꾼들의 비웃음과 실소로 가득 찼어요. 사실 초기모델이 지고 가야 할 짐이기도 해요. F프라임 이후의 모델들은 모두 새롭게 상용화된 신경망모사체계 기반 기억장치를 이용하고 있었거든요. 인간의 뇌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정보량이 과다하다 해도 정보를 잊어버리면 잊어버렸지 절대 시스템이 펑크 나지는 않아요. 아무튼 그건 다른 모델 이야기고.

  아무튼 이래서 얼리어답터들이 곧 범지구적 봉이라는 거지요. 어쩌겠어요. 터져버린 일은 터진 거고, 다음으로는 전자제품 시장에서 내로라하는 지위를 갖춘 굴지의 대기업에서 어떤 보상책을 내놓을 것인가가 주목받게 되었어요.




* * *




“우선 첫 번째로 선택하실 수 있는 거는... 고객님께서 구매하신 F프라임 제품에 불량이 발생하신 경우에, 전액 보상판매를 하실 수가 있으세요. 그러면서 동시에.... 저희 회사 최상위 모델인 판타지아가 마찬가지, 무상으루, 제공되실 수가 있으시고요.”

  유경 씨는 물론이고 F프라임과 판타지아마저도 깍듯이 존대하는 겸손한 상담원이었지만, 그 말투는 유경 씨를 설득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저기요, 지금 장난하세요? 야 이년아, 우리 곰돌이 망가뜨린 걸로 부족해서, 뭐? 아예 가져가겠다고? 새 걸로 갈아치우라고? 넌 남자친구도 시시때때로 갈아치우겠다? 아주 늬 애미애비도 갈아 봐, 응?”

  그래요. 여기에 문제가 있었죠. F프라임은 가족로봇이었거든요. 충실한 F프라임들은 주인에게 가족을 대신하는 역할을 참 잘 해내 주었어요. 그런 가족로봇을 교체한다는 건 가족을 내다버린다는 것과 같아요. 제품의 기획의도를 완벽하게 달성했으니 평소대로라면 잘된 일이라고 하겠지만, 대기업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겠네요. 전량 리콜 및 신제품 지급이라는 전가의 보도조차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역효과만 불러오는 판이었으니까요.

  물론 F프라임 2845번, 곰돌이의 소유주 유경 씨도 분노한 고객 중 하나로서, 애꿎은 상담원을 상대로 씹느니 뱉느니 삼키느니, 아주 못살게 닦아세웠지요. 놀라운 건 그녀가 독기어린 축에 들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F프라임 구매자가 상담원에게 언어적, 심리적, 정신적 위해를 가한다는 이슈 자체가 메인 뉴스 한 자락을 당당히 차지했다면 믿으실 수 있겠어요?

  이 모든 건 굴지 대기업의 이미지 손상으로 직결된다는 것이 그룹 총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신속히 처리하라, 라는 총수님의 방침이 해당 계열사로 하달되었습니다. 곧이어 신속히 처리하되 비용은 최소화하라, 라는 지령이 사장님으로부터 하달되었고요. 남은 건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의 시간이지요.

  일단 고전적 메모리 기반으로 디자인된 시스템이니만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광학 메모리를 넣건 하드디스크를 넣건 그쪽 기술로 처리해야 한다는 건 분명했어요. 이제 와서 모든 F프라임을 신경망모사체계 기반으로 바꾸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그러면 저장 용량을 더 커다란 놈으로 바꿔넣고, 데이터 전부 복사해 붙여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이 안은 간편하다는 면에서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들의 갈채를 받았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상부의 결재는 받지 못했어요. 보나마나 몇 년이 지나면 또 용량이 꽉 차지 않겠어요?

  남은 건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의 시간이었고요.





* * *






  “고객님의 F프라임 이천, 팔백, 사십, 오번 모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업그레이드가 진행되실 거세요. 하일리텔리, 아니, 하일리 인텔리전트 디시전 메이킹 메모리 오거나이져 Highly Intelligent Decision-making Memory Organizer, 라는 모듈이 설치가 되실 예정인데요. 줄여서 히드모라고 부르고요.”

  “아주 애 잡아다 놓고 생쑈를 한다. 그래서 그게 뭐하는 건데요?”

  “네 고객님, 쉽게 설명드리자면, 고객님의 F프라임 2,8,4,5 모델께서 스스로오, 네,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으시게 된다는 말씀이시구요. 모델이 판단하시기에 삭제해도 무방할 데이터를 스스로 삭제하시게 되거든요. 그래서 결국 저장 공간이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시는.”

상담원의 말투는 본인의 말씀마저 존대할 만큼 확신에 차 있었고, 천우신조로 그 확신은 유경 씨를 만족시켰어요. 모종의 수리가 끝나고 집으로 배달된 곰돌이를, 유경 씨는 격하게 껴안았고요.

  “곰돌아아…… 흐으, 내가, 흐으, 흐, 내가 얼마나 너 보구 싶었는데. 많이 아팠지, 이제 다 나았으니깐 됐어…….”

  그게 곰돌이 아니, F프라임에 적용된 최후의 펌웨어 업데이트였습니다. 이후로도 F프라임은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키긴 했어요. 그게 초기모델의 숙명이죠. 하지만 용량부족 사태만한 중대한 이슈를 만들 만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자잘한 문제는 기업 이미지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총수님의 지령이 없었고, 그래서 펌웨어도 없었죠. 다행히 유경 씨의 곰돌이는 그런 소소한 버그들을 피해간 운 좋은 모델이었어요. 말씀드렸죠, 2천 번 대는 뽑기 운이 좋은 명품이라고요.

  이 펌웨어의 예는 사실 잡지에 올랐습니다. AI분야 학술 잡지에요. 좋지 못한 예로 올랐죠. 고전적인 구형 메모리 디바이스를 기반으로 구축한 AI시스템의 말로라나요. 저자는 대기업이 내놓은 HIDMO의 성능을 불신하고 있었어요. 기억장치의 패러다임이 이미 변했음에도 그걸 소프트웨어로 벌충해 보려는 시도인데, 그야말로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거지요.

  요약해 말하면 이런 말이죠. “그게 잘 작동하겠어?”




* * *




  결론부터 말해 볼까요. 어떤 면에선 잘 작동한 셈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잘 작동했다는 건 이런 뜻이지요. 그 이후로 F프라임의 용량부족 문제가 드러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는 건 이런 뜻이에요. 용량부족 문제만 빼놓고 뭐든 일어났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곰돌이와 재회한 당일 밤 유경 씨에게 일어난 일을 봅시다. 유경 씨는 희희낙락하며 일요일 밤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지요. 오른손에는 곰돌이의 푸근한 손을 꼭 잡고요. 곰돌이는 유머를 잘 아는 로봇이에요. 요새 잘 나가는 코너를 맛깔나게 따라하는 개인기도 가지고 있거든요.

  아무튼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유경 씨의 눈에는 곰돌이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남자친구로 보였어요. 그래서 달콤한 목소리로 곰돌이에게 속삭였지요.

  “곰돌아, 아휴, 사랑해.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지? 그날 쇼콜라 케이크를 큰 맘 먹고 하나 샀잖겠니, 마카롱두 물론이구…….”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곰돌이의 표정 - 아, 물론 디스플레이된 거지요 - 이 심상치 않은 겁니다.

  “누나, 저기, 미안한데요…….”

  “응? 왜 그래?”

  “아니, 기억이 잘 안 나서요. 그런 일이 있었나?”

  유경 씨가 얼마나 상심했을지 짐작이 되시나요. 프러포즈 때 뭐라고 했는지를 까먹은 새신랑쯤 되면 비슷한 분노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편으로, 곰돌이의 당황은 짐작이 되시나요.

  “누나, 미안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됐어, 다 끝났어. 내가 널 얼마나, 내가 얼마나, 널, 흐, 이 못된 놈아, 으흐흐…….”

  불쌍한 곰돌이. 그건 곰돌이 잘못이 아니었어요. 굳이 잘못을 찾으라면 디버깅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급조로 임베드된 기억제어 프로그램 HIDMO를 탓해야겠지요.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는 이런 거였어요.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오래 기억한다. 오래 전의 사실은 쉽게 잊는다. 중요한 사실은 오래 기억한다. 덜 중요한 사실은 쉽게 잊는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는 한데, 프로그램 코드를 짜는 과정에서 논리적 오류가 있었나 봐요. 예를 들어서 곰돌이 구동 첫날밤의 일은,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중요한 일이니까,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사소한 모종의 오류가 코드에 섞여 들어갔고, 그것이 HIDMO의 ‘디시전 메이킹’ 상의 우선순위를 흐트러뜨렸던 것이에요. 결과적으로 유경 씨와의 첫날밤에 대한 곰돌이의 기억은 싹 날아갔어요. 이미 다른 데이터로 덮어써 버리기까지 했기 때문에, 어떻게 애써 본다 해도 복구할 가망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비슷한 문제가 또다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죠. 몇몇 소유주들은 이번에도 상담원을 붙잡고 죽이네 살리네 법석을 떨었던가 봐요.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죠. 상담원에게도 대응할 무기가 든든히 갖춰져 있었거든요.

  “고객님,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해당 모델의 기억 데이터에서 삭제되는 기억은요, 바로 그 모델이 스스로오, 네, 스스로 결정한 대로 삭제가 되시게 되는 거거든요. 물론 지난번에 서비스를 해드렸을 때 고객님께서 충분히 양해가 되셨던 바로 그 내용 그대로구요, 고객님.”

  그렇게 나오면 힘없는 고객님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말이 고객님이지, 돌아서면 봉이라니까요.

  결국 애꿎은 덤터기가 어디에 씌워졌을지 짐작하실 겁니다. 네, 곰돌이가 그랬듯이, 바로 F프라임 기체들이 책임을 져야만 했어요. 첫 만남은 주인과의 가장 소중한 기억인데, 그들은 그걸 제일 먼저 까먹었으니까요.

  참 이상한 일이죠. 엄밀히 말해서 사라진 건 그 작디작은 첫 기억 한 토막뿐이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F프라임이 어마어마하게 변해 버렸다고 느꼈어요. 어제까지는 분명 가족이었는데, 더 이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대신 너무도 생경한, 그리고 조금은 섬뜩한 기계 덩어리 같기만 했죠. 다들 깨달아 버린 거예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어요…….
지금이야 웃어넘기는 얘기지만, 당시엔 정말 꽤 심각했었나 봐요. HIDMO 프로그램의 오류는 기밀에 부쳐져 있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가십을 쫓는 황색 언론들 사이에선 F프라임의 배신이 바로 로봇3원칙 무용론의 첫 번째 예가 아닌가 하는 무책임한 추측들을 마구 쏟아냈거든요. 이러다가는 로봇들이 인간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킬 거야,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유경 씨는 곰돌이를 버렸어요. 아니, 버렸다는 말은 부적절하네요. 유경 씨는 곰돌이를 차버렸어요. 길가를 헤매는 유기 F프라임들이 폭증했습니다. F프라임들은 여전히 주인님을 사랑했고, 그들을 찾아 헤맸어요. 처음에만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HIDMO의 신통방통함이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영어 속담에 그런 거 있잖아요. 자주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HIDMO의 연산 시스템 안에서, 주인님에 대한 기억 데이터는 중요도 축에서도, 시간 축에서도 가중치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한번 유기된 F프라임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자신의 주인을 잊어 갔습니다.

  F프라임은, 비록 초기 가족로봇으로서 구시대의 유물이긴 하지만, 꽤 똑똑해요. 자기 앞가림은 다 할 줄 알아요. 그래서 버려진 F프라임의 잔해가 굴다리 아래에서 분해된 채 발견된다거나, 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살아갔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프고 아픈 실연의 상처도 이미 기억 메모리 속에서 삭제한 채로, 살아갔어요.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났어요. 유경 씨는 착한 남편, 프러포즈한 날도 결혼기념일도 절대 잊지 않는 참 착한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

  그리고 F프라임의 출시일로부터 50년이 지나는 때가 왔습니다. 가족로봇의 기준사용연한이에요. 중소기업들이 납품해 온 F프라임의 예비부품 생산이 중단되었고, 더 이상 아무런 AS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됐지요. F프라임으로서는 별 상관은 없었어요. 이미 말했듯, F프라임에겐 자가수리 기능이 있으니까요. 한때 F프라임보다 잘나가던 후속기종들은요, 아아, 그들은 신경망모사체계로 되어 있잖아요. 그들은 너무도 인간을 닮았기에, 마지막까지 주인을 사랑했고, 주인에게 사랑받았어요. 그들은 주인이 죽으면 너나할 것 없이 곧이어 폐기장으로 뒤따랐어요. 법적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었고, 로봇들도 스스럼없이 그렇게 했어요. 하지만 F프라임은 살아남았어요. 이미 주인을 잊은 지 오래였으니까요.

  F프라임보다 오래 버티지 못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F프라임을 생산했던 굴지의 대기업 말이에요. F프라임 출시로부터 쉰여섯째 해가 되던 어느 날, 중국발 경제파동이 터졌었다나 봐요. 몰아치는 외채의 해일에 기업이 하나둘 쓰러졌는데, 그 중에는 그 대기업도 포함되어 있었죠. 재정건전성은 미리미리 확보해 둬야 뒤탈이 없는 법이에요.

  생산기업의 부도가 F프라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이런 거예요. F프라임이 실종되었다든가, 중대한 에러로 오작동한다든가 하는 경우에 대비한 장치가 있었거든요. F프라임의 움직임을 비상시에 제어할 수 있는 회선 주파수가 비밀리에 할당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기업이 도산했고, 소유한 주파수의 권리는 모두 백지화되었고, 그러니 F프라임을 구속할 족쇄는 스스로 분쇄되어 사라진 거예요.

  지나간 햇수의 단위가 세 자리수가 되면서, F프라임의 존재는 학술적으로도 꽤 이슈가 됐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이 있었는데, 구시대적 메모리 모듈에도 장점이 있었다는 거예요. 튼튼하다는 거죠. 심지어 총탄이며 레이저빔을 맞아도 CPU와 메모리만 멀쩡하면 결국 자가복구해 낸다고 하니, 거의 좀비나 다름없군요. 반면 사람의 뇌를 모사한 만큼, 바로 그 뇌만큼이나 불안정한 신경망모사 로봇들은 거친 야외 환경에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건데요, 사람 백 명 중 하나가 사고로 죽는 단위시간 동안 보통 로봇들은 천 대중 하나가 파괴된다나요. 그런데 같은 시간 동안 F프라임의 파괴율은 십만 대 중 한 대라고 해요. 정말로 놀라운 수치죠.

  하여, F프라임은 오래도록 구동했고, 살아갔습니다. HIDMO는 쉴새없이 기억을 메모리에 쓰고, 또 지웠고요. 전 지구상을 방랑하는 F프라임들을 용케도 찾아내어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F프라임의 기억 전체의 50%가 대체되는 데는 86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이 숫자에는 히드모-반감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러고도 또다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히드모 반감기를 주창한 과학자가 죽고, 그가 소속되었던 대학이 쓰러지고, 그가 살던 도시도 사라지는 때가 왔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렀습니다. 환경오염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어요. 대멸종이 찾아왔어요. 인류는 등 떠밀려 내몰리듯 우주로 진출했어요. 성간 항해가 시작됐어요. 초광속 통신이 실현됐어요. 하지만 F프라임은 살아갔어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살아갔어요. 팔천 년간의 우주시대 기록 중에도 F프라임의 존재가 수없이 제보됐는데, 그 중 똑같은 인격과 성격을 가진 F프라임은 하나도 없었다고 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과 성격을 탈바꿈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86년마다 기억의 50%가 대체된다고 했죠. 같은 페이스로 유지된다면 860년이면 99.9%가 대체되고 말아요. 원래의 F프라임과는 같은 점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는 거지요. 우주 방방곡곡을 누비는 F프라임들은, 그야말로 우주에 뜬 부목처럼 정처 없이 유랑하는 방랑자예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리고 그들의 기억마저도요.

헌데 왜 유독 2845번 ‘곰돌이’와 유경 씨의 사례를 강조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거야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우주를 떠도는 F프라임 중 가장 인상 깊은 사례로요. 우선 이 글을 쓰면서 참고했던, 곰돌이와 한유경 씨의 유별난 애정 관계에 대한 기록은 서기 2034년 웹진에 수록된 인터뷰에 잘 남아 있고요. 그보다 중요한 게 있죠.

  우주기록총연감에는 F프라임에 대한 기록이 38만 건 남아 있는데, 그 중 475 건의 기록에 신기한 공통점이 있거든요. F프라임이 자신의 이름이 곰돌이라고, 주인인 한유경 씨를 찾는 중이라고 밝혔다는 거예요. 가장 가까운 기록은 고작 15년 전의 것이에요. 계산기를 한번 두드려 볼까요. 히드모-반감기를 일반적으로 적용하면 단 0.0001%의 기억만이 팔천 년간의 소실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F프라임은 21세기 초반 지구에서 단 6개월간 5회 차에 걸쳐 천 대씩, 총 5천대가 생산되었습니다. 오늘날, 운만 좋다면 시리우스 항성계에서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시대의 유물이라기에도 겸연쩍은 구닥다리 기계지만, 의외로 사람보다 크게 멍청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F프라임을 만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하고 사진을 찍으세요. 사인도 받아 두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혹시라도 기분이 내키신다면, 안녕 곰돌아, 한유경 씨는 찾았니, 라고 넘겨짚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어쩌면 우리 귀여운 곰돌이를 만나 즐거운 담소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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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3. 초고를 완성,
DCinside 판타지 갤러리에서 주최한
제11차 판타지 갤러리 단편 대회에서 우승한 글입니다.
(자진납세합니다.)

2011.6.15 첫 번째 수정고를 마무리짓고 거울에 올립니다.
댓글 5
  • No Profile
    엄길윤 11.06.16 00:02 댓글 수정 삭제
    오오~!! 상황과 묘사와 이야기의 흐름이 좋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단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끝부분쯤에서 뭔가 감동의 물결이 몰아칠 듯 하다가 흐지부지 되는 것 같은 건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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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6.16 13:38 댓글 수정 삭제
    요즘 국내 SF 소설의 신선한 흐름을 잘 따라가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 합니다. 전반부의 요즘 휴대전화 회사들에 대한 풍자 부분은 조금은 덜 직접적이었더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위 엄길윤님 말씀처럼 후반에는 좀 더 격한 전환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지금 정도만 해도 무척 멋지고 재미난 이야기였다고 생각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 계속 들려 주시기를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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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유 11.06.16 15:41 댓글 수정 삭제
    저번 판단대에서 읽었지만 퇴고본을 다시 읽어도 역시 좋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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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옥 11.06.17 01:36 댓글 수정 삭제
    엄길윤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곽재식 // 감사드립니다. 더욱 고민하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샤유 // 늘 응원해 주시는 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힘이 됩니다.
  • No Profile
    11.06.17 02:50 댓글 수정 삭제
    위트있고 기발하고 은근히 인터넷 문화 코드들도 나열되어 있고 재밌어요. 좀 끝까지 밋밋하지만 전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걸요 잘ㅂㅘ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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