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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승진과학 혁명

2009.10.22 14:2710.22

자,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고, 한 잔 받아. 주량이 어떻게 되나? 아, 그래. 영업부서에 있으면 그 정도는 마셔야지. 술이란 게 말이야, 직장생활에서는 윤활유 역할을 하거든. 잘 칠하면 업무협조도 매끄럽게 돌아가고, 감사실의 그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지.

일단 우리 동아리의 역사를 설명해줄게. 우리 「승진연구회」는 발족한지 이십년이 넘었어. 올해로 17주년을 맞은 탁구동아리나 18주년이 된 등산모임보다도 오래된 것이지. 그런데도 회원은 겨우 열네 명에 불과하고 동아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전 세계에서 80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중장(中將)그룹에서 조용히 사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역대 회원들이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했고 신규 회원 영입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승진연구회가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네가 승진연구회에 들어온 것은 큰 행운이야. 신입사원이 임원이 될 확률이 1만분의 일인데 말이야, 우리 연구회는 지금까지 두 명의 임원을 배출했다고. 둘 다 1년도 못 채운 단명이긴 했지만 말이야. 부장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되고, 작년 정기 인사 때도 세 명의 승진자를 냈어. 뭐 자랑은 아니고, 그 정도로 우리 동아리의 연구가 실용적이라는 이야기지. 승진연구회는 삼년 연속 승진인사에서 미끄러진 입사 동기 두 명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었어. 두 분은 이미 퇴사했지만 이름만 들으면 다 알만한 인물들이야.

이미 당신을 소개한 오 대리에게 들었겠지만, 우리 연구회는 승진과학, 더 정확히 말하면 승진역학(昇進力學)의 이론과 응용을 연구하는 모임이야. 중장그룹은 해마다 수만 명을 해고하고 수천 명의 억대 연봉자를 탄생시키고 있어. 극소수의 오너 가족을 제외하고는 전 직원이 80만 명의 잠재적 경쟁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지. 이런 상황에서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은 뭘 의미하겠나? 직장생활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거야. 너는 이미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반쯤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 동아리에는 소규모지만 오랜 세월 동안 꽤 많은 직원들이 거쳐 갔어. 만년 과장을 하다가 명예퇴직을 당한 구제불능도 적지 않지만, 정말 뛰어난 통찰력으로 빛나는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분들이 있지. 물론 학문적으로 성공했다고 다 고속승진을 하신 건 아니었지만, 그분들의 이론은 동아리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 덕분에 우리 동아리는 다른 동아리에 비해 월등한 승진비율을 자랑하고 있지.

자, 한 잔 더 받아. 술 잘 하는구먼. 누가 가장 뛰어난 승진과학자였던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말이야, 내 생각에는 오늘의 승진연구회를 만든 위대한 다섯 명이 있었어. 이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했고 각기 다른 학파를 형성했지. 이 다섯 명의 천재들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이 중장전자 기획본부장을 지낸 김규돈 선배야.

규돈 선배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입사 후에 회계팀으로 발령이 났어. 규돈 선배가 성실한 사람이긴 했지만, 사실 회계업무라는 게 지원업무의 성격이 강하지 않은가. 삼사년 지나고 보니 동기들은 대리니 계장이니 승진하는데 자신은 말단 사원에 계속 머물렀던 거지. 우연한 계기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게 된 규돈 선배는 중장그룹의 승진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 명확하게 알고 싶어 했어.

너도 회계부서 사람들을 상대해봐서 알겠지만, 그 쪽 사람들이란 세상 모든 일을 숫자로 표현하고 싶어 하잖아. 규돈 선배도 중장그룹 승진인사의 수학적 원리를 밝혀내고 싶었던 거야. 규돈 선배가 어느 날 회계팀 사무실에 남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기인사에서 승진한 같은 팀 과장이 옆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지.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 출출해진 규돈 선배가 야식이라도 먹으러가자며 과장을 불렀는데, 그 순간 과장의 코에서 붉은 피가 뚝- 하고 떨어진 거야. 야근한 선배의 코에서 떨어지는 코피를 본 순간 규돈 선배는 세상의 진리를 단숨에 깨우쳤어.

“모든 승진의 이면에는 야근하며 흘린 코피가 있다.”

그 유명한 ‘만승유혈(萬昇有血)의 법칙’이 탄생한 순간이야. 물론 여기서 말하는 코피는 노동투입량에 대한 은유일 뿐이지. 규돈 선배는 자신이 깨달은 평범한 진리,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사실을 수학적 원리로 표현하고 싶었어. 그래서 중장그룹 인사데이터 1만5천 개를 모아서 통계분석을 했는데, 놀랍게도 단순한 선형함수를 도출했지.

승진속도 = 승진상수 × 일평균초과근무시간

이 공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뭐 뻔한 거 아니겠어?

“칼 퇴근하는 사람은 항상 그 직급에 머물러 있다.”

여섯시에 칼 퇴근을 하게 되면 초과근무시간이 0이 되어 버리니까, 승진속도 역시 0이 되어버리는 거야. 기업의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법정근로시간을 지켜가며 일하는 것 보다는 알아서 야근이며 휴일근무를 해주는 게 단위임금당 생산성이 올라가거든. 6시에 칼 같이 퇴근하는 직원을 승진시키기보다는 하루에 세 시간씩 더 일 해주는 직원을 승진시키고 임금을 조금 올려주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인 거야.

규돈의 승진역학법칙에서 조금 까다로운 것이 ‘승진상수’라는 것인데, 이 상수는 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져. 업무효율이 좋은 사람은 수치가 올라가고, 업무효율이 나쁜 사람은 내려가지. 승진상수를 구하는 과정은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하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나면 설명해줄게.

규돈 선배가 대단하다고? 대단하지. 어떤 사람의 승진상수를 알고 있으면 언제 승진할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근데 더 중요한 건 규돈 역학의 실용성이야. 함수를 조금 변형해보면 승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답이 나오거든.

일평균초과근무시간 = 승진속도 / 승진상수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승진하고 싶으면 목표로 하는 승진속도를 승진상수로 나누면 돼. 그럼 하루에 몇 시간 야근해야 하는지 딱 답이 나오는 거지. 어때, 인생의 비밀이 이렇게 간단하고 명쾌하다는 것이 의심이 들 정도지?

규돈 선배의 승진이론은 너무나 논리정연하고 수학적으로 완전했기 때문에 한동안 후배들에게 각광을 받았어. 승진연구회 회원들은 하나같이 야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각기 소속 부서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았지. 본인도 하루에 네 시간씩 야근한 덕분에 이론을 발표한 다음 해에 승진을 했고, 그 이후에도 순조롭게 본부장까지 올라갔어. 뭐? 너도 내일부터 당장 야근하겠다고? 야, 이따가 동아리 회장이 폭탄주 돌릴 건데 내일 제 시간에 출근이나 할 수 있겠냐? 그리고 규돈 선배 이론은 말이야, 이런 말해서 선배한테 미안하지만, 구닥다리야. 한물갔다고.

규돈 선배의 아름다운 승진 함수가 맛이 가기 시작한 건 외환위기 때부터야.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중장그룹이 전 계열사에서 무차별 해고를 하는데, 규돈 선배의 승진 함수가 전혀 안 맞더라는 거지. 야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승진은커녕 똑같이 해고를 당하는데 만승유혈의 법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때 우리 승진연구회 회원들도 절반이나 잘렸다지.

규돈 선배의 이론이 후배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급속한 회복국면에 접어들 때였어. 중장그룹은 호황에 대비해서 엄청나게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사상 최대의 승진인사가 이루어졌지. 문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승진케이스가 많았다는 거야. 야근은 고사하고 조퇴를 밥 먹듯 하는 인간은 떡 하니 승진을 했는데, 코피 터져가며 야근했던 직원들은 한직으로 전보가 된 경우가 많았다는 거야. 하지만 워낙 승진자 숫자가 많다보니 전체적인 승진속도는 상승해버렸지. 초과근무시간과 상관없이 말이야. 결국 규돈 선배의 승진 함수로는 더 이상 승진에 대한 선형적 예측이 불가능해져버렸고, 후배들은 새로운 이론을 갈구하고 있었어.

야, 너 벌써 졸고 있냐? 똑바로 들어, 이제부터 중요한 부분이란 말이야. 자식이 선배도 아직 말짱하게 살아 있는데 폭탄주 두 잔 마셨다고 먼저 눈 풀리면 어떡해? 자, 냉수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려. 술 못 마시면 그만 해. 강요 안 할 테니까. 이 오리엔테이션을 잘 받아야 승진이론의 개념이 잡힌다구. 아까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규돈 선배의 이론이 거센 도전을 받았다 이거야.

그 때 우리 동아리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홍보팀의 괴짜 천재 손태인 선배였어. 태인 선배는 입사할 때부터 기인(奇人)으로 통했는데,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성실한 타입도 아니었지만 승진과학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온 사람이었지. 태인 선배는 동아리에 들어와서 규돈 선배의 이론을 일주일 동안 공부한 뒤에 이렇게 말했어.

“김규돈의 승진역학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그의 이론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경우에만 들어맞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태인 선배의 지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었어. 규돈 선배가 활동하던 시기는 회사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규돈 선배는 회계라는 틀에 박힌 업무를 맡고 있었어. 성실하고 꼼꼼하기만 하면 규돈 선배의 선형 함수를 따라서 승진할 수 있는 경우였지. 하지만 국가경제가 IMF 사태를 맞으면서 회사도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맞았고, 초과근무시간이라는 독립변수를 가지고 선형적 승진을 할 수 없게 됐어. 그리고 규돈 선배가 했던 일이라면 몰라도, 연구개발이나 마케팅은 무작정 근무시간을 늘린다고 업무성과가 나오지 않아.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지. 그래서 태인 선배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거야.

“근무시간이 같아도 노동의 가치가 같지 않다. 여섯 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야근을 다섯 시간 하는 사람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다.”

뭐? 이제부터 칼 퇴근해서 자기개발을 하겠다고? 야, 승진과학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니까. 끝까지 들어봐. 어디까지 말했더라? 어 그래, 노동가치의 상대성을 설파해서 학계를, 학계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하군, 동아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태인 선배는 한 달 만에 다시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았지. 바로 근속기간이 승진속도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거야.

“승진속도가 빨라지면 근속기간은 줄어든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었지. 승진 못하고 빌빌대면 감원 대상 1순위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면 초고속 명퇴를 당한다는 걸 태인 선배는 알고 있었던 거야.

“승진속도는 회사의 성장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승진속도가 느릴 때는 근속기간이 변하는 걸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승진속도가 회사의 성장속도에 가까워지면, 근속기간은 짧아진다.”

태인 선배는 회사의 성장속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 직장인은 결국 회사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이야기야. 회사가 커나가지 못하면 승진을 해도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게 되어 빨리 퇴직을 할 수 밖에 없어. 젊고 임금이 저렴한 후배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야. 태인 선배는 동아리 말년에 유명한 에너지-능력 등가 공식을 남겼어.

승진에너지 = 능력 × 기업성장속도^2

‘근무시간’이라는 변수가 사라졌지? 그렇다고 이 공식을 보고 칼 퇴근해도 좋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요즘은 ‘야근은 기본’이라는 게 정설이야. 초과근무를 오래 한다고 승진하는 건 아니지만 매일 칼 퇴근 하다보면 잘릴 수도 있다는 거지. 좌변에 승진에너지가 있지? 태인 선배는 승진의 불연속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어. 그래서 승진속도 대신 생각해낸 것이 ‘승진 에너지’라는 것이야. 어떤 승진대상자가 적정 능력을 갖추고 있고 회사가 일정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면, 승진대상자의 승진에너지는 계속 축적돼. 그러다가 축적된 에너지가 임계점에 달하면 어떤 계기에 의해 승진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지.

태인 선배는 승진을 제때 했냐고? 그는 자신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어. 승진속도가 빨라지면 근속기간이 줄어든다고 했지? 태인 선배는 초고속으로 명퇴당한 규돈 선배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어.

“직장인이 마땅히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승진속도의 상승이 아니라, 근속기간의 연장이다.”

태인 선배는 아직도 부장을 못 달고 있지만, 삼십 년 직장생활에 불만은 없다고 해. 몇 년 뒤면 정년퇴직이거든. 자식들도 다 키워놓았고, 규돈 선배처럼 워커홀릭이라고 부인이 도망가지도 않았으니까 뭐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지. 안 그래? 너도 일에만 빠져 살지 말라고. 가끔은 태인 선배처럼 적당히 속도조절을 할 필요가 있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들을 상사가 귀여워할 이유가 없잖아?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고, 회사에 부담을 주지 않는 거라고.

뭐? 이제 승진의 원리를 알 것 같다고? 웃기시네! 건방진 놈. 승진이란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태인 선배의 상대성 이론은 궁극의 승진이론이라고 추앙을 받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여기서 승진과학계에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등장해. 바로 허의돈 선배야. 성실하고 독창적이었지만 승진경쟁에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 허의돈 선배의 이야기 좀 들어봐.

의돈 선배는 생산현장에서 근무했는데, 승진이론을 연구하기에 그다지 적합한 부서는 아니었지. 아무래도 본사에서 행정업무를 하는 게 조직의 생리를 아는 데는 더 유리하니까. 그래도 의돈 선배는 학구열이 대단해서, 선배들의 이론을 검증할만한 인사 데이터를 구하러 부지런히 본사에 들락거렸지. 그게 문제가 됐어. 의돈 선배가 승진이론을 연구하고 있다는 게 본사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거야. 결국 의돈 선배는 경쟁자들의 집중 견제를 받기 시작했어. 경쟁자들은 줄을 대서 허의돈 선배의 인사고과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감사실에 있는 경쟁자들은 작은 실수를 과장하여 중징계를 받게 만들었지. 결국 의돈 선배는 승진경쟁에서 영원히 뒤쳐지고 말았어. 의돈 선배는 낙담하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승진 가설을 수립했어.

“기존의 승진이론으로는 자기 자신이 언제 승진할지 알 수 없다. 승진현상을 관측하는 행위 자체가 승진에 영향을 미쳐 언제 승진할지 더욱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그 유명한 ‘허의돈의 불확정성의 원리’야. 하지만 지금은 의돈 선배의 주장이 소수의견이 됐어. 승진현상을 관측하는 행위가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의돈 선배가 ‘승진하고 싶다’고 너무 티를 내서 경쟁자들을 자극했다는 거지. 실제로 규돈 선배나 태인 선배는 조용히 연구를 했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의돈 선배의 이론은 이제 그냥 승진현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의돈 선배가 덴마크 지사에 출장 갔을 때 만들어냈다고 해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도 하지.

의돈 선배가 어떻게 됐냐고? 몇 년 전에 명예 퇴직할 때까지 승진도 못하고 계속 한직으로만 돌았지. 그 대신 시간은 남아돌았는지 자신의 이론을 더욱 심화시켜서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했어. 의돈 선배의 이론은 난해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예를 들면 ‘정확한 승진여부나 승진시점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확률로만 알 수 있다’는 식이지. 나도 승진현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곤 해.

자, 이제 술 좀 깨는가? 냉수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려. 지금부터 승진과학의 총아인 이종수 선배의 이야기를 할 테니까. 이종수 선배는 자네처럼, 그리고 나처럼 영업부서 출신이었어. 규돈 선배나 태인 선배, 의돈 선배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두뇌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종수선배는 술 잘 마시고 사람 사귀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영업직이었지. 너도 알다시피 영업직에서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지 않아? 그래서 종수 선배도 성공한 영업 선배들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었지. 종수 선배는 입사 이후 한 번도 월 판매실적 1위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 그가 승승장구 했던 이유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성공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바로 <사람>이지.

네가 어떤 조직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거고, 널 승진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사람이지. 소문난 마당발이었던 종수 선배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인맥을 통해 처리했고, 혼자서 아등바등 일하는 경쟁자들을 항상 저만치 앞서 갔어. 특히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면 승진인사 시기 말이야, 이런 때는 회사 내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는 핵심인물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부단히 노력 했어. 결국 어떻게 됐니? 그래, 중장그룹 역대 최연소 이사가 탄생한 거야. 지금은 뭐하고 있냐고? 퇴직해서 다단계 판매를 하는데, 한 해 수입이 어마어마하다지. 아마 중장전자 사장보다도 수입이 많을 거야.

종수 선배의 승진에 대한 철학은 확고했어. 종수 선배가 보기에 초과근무시간이나 능력, 회사의 성장속도 같은 건 승진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어. 그가 승진에 관해 항상 하던 말이 있지.

“승진을 하려면 줄을 잘 잡아야 한다.”

그래서 종수 선배의 이론을 줄이론, 혹은 끈이론(string theory)이라고 부르는 거야. 종수 선배가 보기에 이 세상은 다양한 끈들로 이루어져 있어. 학연, 지연, 혈연, 군대 등 끈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 각각의 끈은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고, 내가 잡고 있는 끈의 진동수에 따라 승진을 하느냐 못 하느냐, 성공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결정돼지.

“높은 진동수의 끈을 잡으면 성공하고, 낮은 진동수의 끈을 잡으면 실패한다.”

종수 선배는 지방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대학 동문의 끈은 포기했어. 대신 명인고라는 높은 진동수의 끈을 잡았지. 마침 중장그룹에는 명인고 동문들이 막강한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어. 하지만 명인고라는 끈에도 개인적인 친소관계에 따라 강전무의 끈과 유상무의 끈으로 나눠져 있었고, 종수 선배는 두 진영의 역학관계를 면밀히 따져서 높은 진동수를 가진 강전무의 끈을 잡았지. 나중에 종수 선배는 전자상거래 사업부를 성공시켜서 중장전자 후계자인 이용재 전무의 눈에 들게 됐는데, 그 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서 서른아홉에 이사를 달았어. 종수 선배 자체가 끈이론의 결정체였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이사로 승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

“엄청난 줄을 잡으면 엄청나게 성공할 수 있다.”

그 후로 종수 선배의 이론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고 불리게 됐지. 종수 선배의 이론은 무척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후배들의 공감을 얻었고, 순식간에 승진과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지. 규돈 선배의 선형승진이론이나 태인 선배의 상대성 이론, 의돈 선배의 불확정성 이론의 명맥이 거의 끊어진 것도 종수 선배가 강력하고 실용적인 초끈이론을 내놓았기 때문이야.

초끈이론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분파를 형성해갔는데, 연구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었지. 어차피 초끈이론은 높은 진동수를 잡을 수 있는 소수의 행운아들을 위한 이론이었기 때문에, 낮은 진동수의 끈을 잡았던 이들에게는 매우 우울한 이론이었지. 따라서 승진에서 소외된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아주 염세적인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우리는 이들을 ‘홀로그램 학파’라고 불러. 홀로그램 이론을 처음 정립한 사람은 총무팀에서 만년 과장을 하다가 권고사직을 당한 마후안 선배야. 후안 선배는 항상 멍한 표정을 짓고 다니는 몽상가였는데, 직장 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지.

홀로그램 이론은 너무나 체념적이고 허무하기 때문에 갓 입사한 신입들에게는 되도록 알려주지 않는 게 우리 동아리 전통이야. 홀로그램이 뭔지는 알고 있지? 실물과 똑같이 보이는 삼차원 허상(虛像) 말이야. 홀로그램 학파의 연구자들은 우리의 직장생활이 홀로그램과도 같은 허상이라고 주장하지. 회사가 우리들에게 주입하는 성공, 비전, 성취감, 꿈과 가치들이 사실은 오너 가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거야. 홀로그램 학파에 따르면 승진이라는 현상도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성공에 불과해. 중장그룹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본질은 한 줌도 안 되는 오너 가족들의 재산이고, 오너 가족에 속하지 않는 피고용인들의 성공은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오너 가족들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일 뿐이지.

너무 충격적으로 들렸나? 홀로그램 이론은 승진과학의 주류가 아니니까 너무 우울해할 것 없어. 홀로그램 이론은 승진에 실패한 연구자들이 자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장난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결국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되니까.

난 오늘 너한테 승진과학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다섯 가지 이론을 들려주었어. 너는 어떤 이론이 마음에 들었지? 아, 대답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 순간의 선택이 남은 직장생활을 좌우 할 테니까 말이야. 개인적으로 나는 초끈이론을 지지하고 있어. 내가 잡은 끈은 아주 높은 진동수를 갖고 있지. 어때, 내 끈을 한 번 잡아 보겠어?

김몽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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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소리 09.10.22 16:44 댓글 수정 삭제
    물리학 이론들을 승진이라는 것과 연결시킨 아이디어 기가막힙니다. 정말 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도 매끄러운 편이었구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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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10.22 19:58 댓글 수정 삭제
    와, 멋져요. 호흡하며 비유하며 즐겁게 읽히는 소설이네요. '시마 과장'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런데 결말에서는 '결국 끈이다'로 끝나는 건가요? 한번쯤 더 반전이 있길 기대했는데 아쉬워요. 그래도 정말 매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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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몽 09.10.23 00:24 댓글 수정 삭제
    초끈이론의 결정체인 M-이론까지 생각했습니다만.....승진과학의 문외한인 저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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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c 09.10.23 15:33 댓글 수정 삭제
    오랜만에 sf를 봤다, 라는 느낌입니다.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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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09.10.25 17:23 댓글 수정 삭제
    뭔가 굉장한게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디어의 승리? 게다가 문장의 호흡도 괜찮고 무엇보다 물흐르듯 필력이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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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elui 09.10.27 08:48 댓글 수정 삭제
    재미 있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헌데, '그래서 규돈 선배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거야.' 이 부분은 태인 선배로 적혀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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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몽 09.10.27 09:36 댓글 수정 삭제
    아하하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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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희 09.10.27 12:37 댓글 수정 삭제
    ^^; 지금까지 해왔던 직장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데요. 뭐랄까요. 직장내의 힘과 그에 따른 움직임을 공식으로 풀어내다니 감탄했습니다. 이거, 사회과학소설이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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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희 09.10.28 09:04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얼마전엔 국내작가들이 쓴 SF단편선을 왕창선물받아 한동안 읽었었는데요. 거기서 김몽님의 이름도 봤던거 같은데요. 이글을 쓴분이 그분인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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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몽 09.10.28 16:31 댓글 수정 삭제
    크로스로드 단편선에 <차이니스 와이너리>가 실렸습니다. 크로스로드에 투고하기 전에 거울 독자 단편란에 투고했다가 가작 먹은 글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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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냠냠 09.10.28 22:39 댓글 수정 삭제
    어디 가져다 놔도 통할 글 같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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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로리 09.10.29 14:53 댓글 수정 삭제
    이건 정말 재미있네요. 다른 단편들과 확 차이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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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ofam 09.11.01 02:44 댓글 수정 삭제
    즐겁게 읽었습니다. "사회물리학" 내지 "조직물리학" SF는 거울의 발명품인가요? :)
    "tristar"도 센스있지만 사람 이름을 정말 잘 지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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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호 09.11.01 21:35 댓글 수정 삭제
    초끈이론이 그렇게 변할 줄 몰랐네요.^^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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