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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열 손가락의 연주자

2006.01.27 18:2601.27


written by D.yohan
to my love
gr



열 손가락의 연주자



0.

잊고 있었던 오래된 친구의 편지를 받게 되었을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그가 보낸 편지는 초대장이었고, 그 초대장은 한 음악회에 관련된 것이었다. 철학과를 졸업한 나에게 있어 음악은 거리가 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관계라는 것도 그다지 폭넓지 못해서 그 친구 역시 같은 과를 전공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음악회라니. 희고 두꺼운 종이에는 음악회 일정이 적혀있었고,크게 그의 이름이 씌여있었다.

<퀘른 독주회>

분명히 그의 이름이었다. 퀘른. 음악회의 초대장에는 악기에 관한건 씌여있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지는 알수 없었지만, 분명 그의 독주회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수학할 당시 그가 악기에 수예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뒤에 악기를 배웠다는 것도 좀 말이 안되었다. 비록 20년의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악기라는 것은 20년만에 실력이 급격히 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잘 모르는 내가 알기에도 악기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훈련을 통해서 익혀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철학과를 전공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음악회라니? 도무지 어떻게 된 것일까?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래도 20년만의 재회이다. 나는 반드시 그의 독주회에 참석하리라 마음먹었다.


1.

"비트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퀘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철학과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지상과제같은 것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절대명제앞에 철학은 필사적인 투사같이 이해하려 덤벼든다. 하지만 언제나 철학의 패배. 어리숙한 인간의 사고로는 신의 명제인 죽음에 다가갈수 없었다. 그래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그래서 난 웃고 만것이다.

"퀘른. 뭐 좋은 사유라도 떠올린거야?"

"글쎄.....특별한 것은 아니야. 단지 우리가 죽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삶의 실감은 더 짜릿해진다는 것을 떠올렸어."

"멸망에의 애증."

나는 이론을 덧붙였다.

"그래. 멸망에의 애증. 그런것 같아. 우리는 멸망이라는 이름에서 애틋하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거야."

"하지만 늙어죽어가는 경우는 좀 다르잖아."

"그래. 그게 문제였지. 늙어죽어가는 경우도 그렇게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일까. 하고......난 잘모르겠어 단지 우리에겐 어떤 가능성만이 존재하고 그 가능성을 불태우는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늙어죽어가는 것은 그 가능성을 천천히 태우는 것이고.-"

"-급격한 멸망은 빠르게 태우는것이다. 그럴듯한데? 그런데 그 가능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건데?"

"그게 문제야. 인간의 한계라는 것에 나는 아직 도달해보지 못했으니까. 만약에 내 가능성을 극한으로 시험해 볼수만 있다면....."

퀘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퀘른의 눈에서 활활타오르는 열정을 볼수 있었다. 언제든 행동으로 옮기고 말겠다는 지고한 열망이 숨쉬고 있는 그 눈빛. 나는 부끄러운 것을 본 사람마냥 헛기침을 하다 사견을 덧붙였다.

"철학자는 사유로서 극한을 시험하지....."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끝은 분명 존재할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곤 생각에 잠겼다. 소침해진 나는 철학과 과제를 다시 펼쳐들고 명제들사이에서 고민했다. 내가 명제의 소용돌이속에서 뒤집어지고 표류하고 헤매고 있을때 퀘른의 속삭임은 내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도달하고......"

왜 갑자기 그런 기억이 떠올랐던 것일까? 퀘른의 초청장을 받고 그날이 될때가지 나는 그 기억의 파편들을 주어든채 하나 하나 짜맞춰 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철학과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그에 대한 생각은 점점 바뀌어가고 있었다. 기억이 하나하나 떠올려지고 짜맞춰 질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철학에서 경시-또는 금기시-되는 것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철학자였지만 그 이전에 그것을 갇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도 가지지 못한 그것. 행동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그는 실행하고 싶어하는 레지스탕트였다. 또는 극한을 넘고 싶어하는 모험가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가 20년뒤에 음악가로 변해있다는 사실이 내심 불안했다. 왜 하필 음악일까? 그가 산악인이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을것이다. 하다못해 음악가라니? 음악으로 무슨 실행과 탐험을 하다는 것일까? 궁금증속에서 점점 그를 만날것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부풀어가고 있었다.



2

그에 대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멀어진지 20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찾기 어려울 줄 알았던 그의 대한 자료는 예상외로 많았다. 그의 초청장을 검색어로 지정해두고 인터넷을 뒤지자 금새 그에 관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굉장히 유명한 음악가였다. 소규모의 음악회라고 생각했던 독주회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였다. 사회 저명인사들과 여러 재계 정계 인물들.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는 총리까지 오는 그런 음악회였다. 비록 내가 어느정도 관록을 쌓은 철학교수이기는 하나 내가 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순간 그가 도대체 어떤 음악을 연주하기에 이런 인물들이 그 음악회에 오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면서 여러번 등장하는 낱말들을 보았다. 마인드 코프. 아홉손가락의 연주자. 그리고 극한에 도전한다는 말이 군데 군데에서 보였다. 나는 극한에 도전한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극한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일테고 그가 그것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에서 극한이라는 말이 나올만한 것이 있는것인가? 나는 다른 것들도 주루룩 읽어 보았다. 여러개의 웹페이지를 뒤적이면서 나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21세기 희대의 악기인 마인드 코프와 세계 유일의 아홉손가락 연주자 퀘른에 대해서.


3

21세기의 중반쯤 되었을때 한 과학자가 반응을 감지하는 센서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센서와 달랐다. 표현한다고 할까? 창조한다고 할까. 반응을 통해서 센서는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 냈다. 조악하게 말하자면 작용과 반작용의 예를 따온 것이고, 심오하게 말하자면 생각을 읽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미묘한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손짓등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고, 센서는 그 표현을 감지해서 반응했다. 그것을 개발한 과학자는 처음에는 대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열기는 금새 시들었는데, 이유는 내면의 반응까지 감지해버리는 센서는 인류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표현마저도 모조리 반응해버리는 센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기술은 금새 사장되었다.

그 기술을 다시금 꺼낸 것은 한 작곡가였다. 그 작곡가는 대위법과 화성법의 감옥속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모더니스트였고, 그런 그에게는 자신의 창조성을 실험할 작곡기계가 필요했다. 그러다 어떤 우연같은 기회로 그는 그 기술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기술을 작곡 프로그램과 연결시켰다. 그 접합은 놀라웠다. 표현이라는 부분에서는 모조리 감지해내는 센서는 음악이라는 창조적 수단을 통해 표현했다. 단점이었던 즉흥성과 단편성은 최고의 장점이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을 읽는 악기라는 이름으로 마인드코프라고 불렀다. 그게 마인드코프의 시작이었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금새 새로운 음악장르를 일으켰다. 그가 상상하는 모든 음악은 그의 표현을 통해 금새 최고의 음악으로 탄생했다. 극단적인 재즈의 한 길을 열어내었다. 그가 만들어낸 음악에 대한 한 평론가의 말이었다. 그랬다. 그는 그걸로 대히트를 치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인드코프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컴퓨터의 입력기구의 발달로 입체적인 디스플레이가 가능해졌고, 공간에 입력하는 형식의 키보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개발자가 마인드코프를 새로운 형식으로 개조했다. 이때부터는 마인드코프는 작곡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공간에 연주하고 공간에 음악하는 최고의 악기였다. 공간으로 뿜어지는 디스플레이는 센서의 즉흥성을 만나 휘황한 색체로 변해간다. 그뿐인가. 몸의 표현으로 연주하는 음악은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랬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마인드 코프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장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잘못된 표현은 잘못된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마인드코프는 섬세함과 정교함을 강조하면서 손가락의 반응만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연주한다 라고 하는 극단적인 수단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교함은 필요악을 만들어냈다. 음악이 단조로워진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 마다 새로운 음악을 싣는 새로운 연주법이 탄생했다. 보통 사람은 2가지 연주도 벅찬 그런 방법이었다.

자. 이제 퀘른의 본격적인 명성의 이유가 등장한다. 퀘른은 인간의 한계라고 불리는 8손가락을 넘어서고 당당히 9번째 손가락까지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세계유일의 아홉손가락의 연주자였다.


4


연주회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벌어졌다. 유명인사들이 참석하긴 했지만, 언론취재도 없었고, 떠들썩한 분위기도 없었다. 단지 서로 고개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나는  매체에서만 보던 인물들을 한자리에서 보느라 눈이 돌아갈것 같았지만, 간신히 위엄을 유지할수 있었다. 철학교수라는 것은 나름대로 편리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구경하는 것은 전혀 품위있지 못했다.
혹시 연주회전에 퀘른을 만나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저면 당연한 것이다. 이런 연주회에서 연주자가 마음의 준비도 않은채 시작하는 것은 말도 안되니까.

연주회장은 전체적으로 연회장 분위기를 풍겼다. 테이블이 놓여져있고, 곳곳에 이름표가 놓아진 좌석이 있었다. 그리고 마인드코프라는 이름답게 전방위에서 감상하도록 연주석은 연주회장 가운데에 높은 단상에 있었다. 만약 그 위에 올라간다면 청중들을 굽어 보게 될것이다. 마치 신처럼.

이리저리-그러니 품위를 잃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어떤 사람을 목격했다. 음악가모양으로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는 그 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의 표정이 역력했다. 게다가 무슨 땀을 그리 흘리는지 죽으러 나온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의아한 것은 그 사람이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매체에서 보았나 떠올려봤지만, 매체에서 볼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난 저런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좌석에 앉아서도 불안으로 주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름표를 볼수 있을까했지만 멀어서 보이진 않았다. 그러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명백히 비호감적인 표정이었다. 질려있다고 해야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엔 비웃음같은게 실려있다. 저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는 약간 화가 나서 그에게 다가가려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쏘아보았다. 그가 서있었기에 그것은 나를 내리깔아 보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불쾌하군요. 누구시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뭐?"

그는 할말이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비트륀?"

역시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내 기억속에는 저런 인상의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과거에 친분이 있던 사람이라면 나 역시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약간 물러서서 물었다.

"누구십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기억을 못하겠군요."

"하긴......네가 날 제대로 기억할리가 없지. 흥. 너도 퀘른의 음악회에 초대받은거냐?"

"그렇습니다만."

"잘봐둬. 예전의 퀘른이 아냐."

그렇게 말한 그의 눈빛엔 불안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더니 나직히 말을 이었다.

"그가 열손가락으로 연주하게 두어서는 안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길은 연주자가 올라갈 단상에 고정되어있었다. 마치 그곳에 올라갈 연주자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곧 시작할꺼야. 끝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하지."

그렇게 말하곤 그는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갑작스레 그가 몸을 돌려 가버렸기에 당황했지만, 묻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에게 물어볼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말이 울려퍼졌다.



5

연주회장이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걸어왔다. 나는 그가 그동안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20년전과 별반 달라진게 없었다. 세월이 그에게만 빗겨간듯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필사적으로 늙어만 간 것 같았다. 젊은 모습의 그는 천천히 단상위로 올라갔다. 그가 단상위로 올라가자 단상에서 조그만 빛하나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두운 곳에서 비춰진 작은 빛이라 마치 어둠속에서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청중의 작은 박수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금새 잦아들었다.

그리고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전체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그제서야 나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인드코프가 기계일 필요는 없었다. 그 단상자체가 마인드코프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빛이 솟아오르는 단상에서 그는 신처럼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밀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인의 손을 맞잡는 조심스러운 손길마냥.
순식간에 녹아버린 눈송이를 만지는 마냥.


내밀어진 손길에서 순간 길게 음악이 퍼져나왔다.

-ㅍ---------------------


청중의 침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속에서 단 하나의 음만이 울렸다. 나 역시 침묵한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빛으로 감싸여 영광스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움직임과 함께.

폭풍같은 음악이 터져나왔다.


6


연주회가 마치자 마자 나는 달뜬 마음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갔다. 스텝들에게 물어 물어 연주회장 뒤쪽으로 통하는 길에 그의 대기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간에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헤매긴 했지만 금새 그가 있는 대기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예상외로 대기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는 기대감에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열수 없었다. 문 저편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퀘른! 끝가지 이럴꺼야? 더이상은 안돼. 너도 알고 있잖아 마인드코프가 평범한 악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나 문 저편의 퀘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퀘른이 무언가 대답한 모양이었다. 다시 거친 외침이 들렸다.

"자네가 아직 젊은 모습이라는 것만 해도 모르겠나? 넌 생명을 도둑질하고 있는거야!"

생명을 도둑질한다? 저것이 무슨 말인것일까? 의외의 말에 나는 고민에 빠져버렸다. 철학을 공부했기때문인지 순간적으로 생명에 대한 몇가지 철학구절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금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번째 손가락만은 안돼. 절대로!"

그리고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나온 사람은 연주자 같은 목장에 뒤뚱거리는 걸음의 그. 아까 나에게 불쾌한 아는 척을 했던 그였다. 그는 문앞에 내가 있다는 것에 놀란듯 잠시 머뭇거렸다, 금새 빈정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문앞에서 엿듣고 있다는 것을 들킨탓에 대응할 틈이 없었다.

"비트륀. 그 녀석이 널 초대한 걸 보면 단단히 벼르고 있나 보군. 조심해. 그 녀석은......뭐 너도 금새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를 스쳐지나갔다.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그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 모습을 넉놓고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가 문 저편에 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저편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까는 빛에 힙싸여 있기에 신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살풋 웃었다. 나는 그의 인상이 꽤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퀘른. 연락없던 20년동안 도대체 어떻게 변한것일까.

"어서오게. 비트륀"

그가 말했다.


7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떠올려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20년만의 해후는 여고생의 수다처럼 소란스러웠지만, 그것은 나에 한정된 것이었고, 그는 내내 조용했다. 나는 그의 연주자로의 변신을 축복하고 경탄하고 칭송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두시간쯤 그렇게 떠들었을까. 겨우 진정한 나는 아까 그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아? 비트륀. 그는 언제나 우리곁에 있었어."

나는 그가 암시하는 바를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드리트리. 아. 지금은 드림터라고 불리더군. "

드리트리. 드미트리. 이름을 들었음에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떠올릴 수가 있었다. 퀘른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철학과 동기 드미트리에 대해서. 결국에는 퀘른과 친했던 나에 대한 시비로 까지 이어졌던 그.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그가?"

"그도 음악가가 되었어. 마인드코프의 연주자. 그리 실력있는 음악가는 못되지만......"

"그러면 그가 그렇게 신경질 적으로 반응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나....."

"......너 들었어?"

"......."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못들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침묵은 그것대로 대답이었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젊어보이는 얼굴에 가는 턱선이 미묘하게 경계에 선 느김이 들었다.

"들었구나. 그는 내가 사람들의 생명을 뺏고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젊은 것도 내가 성공하는 것도 그것때문이라더군. 하긴 마인드코프가 특별한 악기이긴 해."

마인드코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대답은 할수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극한에 도전하는 것은 성공한거 같군."

"글쎄.....아직 진정한 한계는 아니지. 사람의 손가락은 10개니까."

"아홉손가락도 네가 유일하다고 하던데?"

"음. 뭐랄까. 마인드코프라는 악기자체는 음악을 몰라도 상관없는 악기야. 말그대로 생각을 읽지. 그래서 우리같은 철학도들이 오히려 더 잘 연주할수 있는 악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고의 장르를 찾아낸거야. 내 극한을 실험해볼......"

"그럼 날 부른 것은?"

"그래. 네가 꼭 봐줬으면 해. 다음 연주회때 나는 열번째 손가락에 도전하려고 해."

나는 그의 도전에 대해 행운을 빈다는 식의 이야기를 건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편한 마음이 불쑥 자라고 있었다. 마치 어떤 불안감이 천천히 자라나다 결국 현실이 되어버릴 것처럼. 독처럼 번져가는 그 불안감을 나는 애써무시했다. 나는 퀘른이 하늘을 걸으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8


며칠뒤 대대적인 뉴스가 터졌다. 사회를 흘러가게 하는 쪽과 휩쓸리는 쪽 둘다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도 그 소식은 들려왔다. 유명한 저명인사 세명의 자살은 떠들썩한 소식이었고, 그 소식은 일종의 괴담을 낳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다음 희생자 라는 식의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었다. 세명의 저명인사는 대부분 부유층에 사회적으로 고위적인 게다가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고 하던가. 사회적인 지휘만한 도덕적 명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충격은 더 했다. 그들이 자살할 이유같은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위치에 벼락이 두번이상 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들의 자살은 무성한 소문만을 낳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사건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뒤 찾아온 드미트리의 말을 전혀 이해할수가 없었다.

"난 전혀 이해못하겠군요. 정확히 무슨 말이지요?"

"몇번을 말해야 이해할거지. 그 녀석은 생명을 뺏고 있어. 사람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건 바로 그녀석이야."

"연주라는 방식으로 말입니까?"

난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퀘른의 마인드코프 연주는 훌륭했고, 그 음악에서 어떤 위험요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위험하다면 완벽한 음악정도라고 할까. 그 정도는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고 가능한 범주이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 연주라는 방식으로. 그녀석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려는 것은 알겠지? 그 댓가로 그녀석은 청자의 생명을 뺏고 있어. 완벽한 음악을 들려주고 생명을 뺏지. 바로 죽음의 음악이라는 거야."



창밖에서는  타닥거리며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 결국 폭우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간지도 한참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폭우같은 비가 내리다니. 드미트리도 빗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피식웃었다.

"분위기까지 끝내주는군."

"......"

나는 그때까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선뜻 말할수가 없었다. 20년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있어 퀘른은 친근한 이질감이었다. 분명 근처에 있고 익숙하다고 생각되지만, 생각의 방법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달라 어느순간 나를 당황하게 했다. 드미트리의 악담과 같은 말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퀘른은 달랐다. 일반사람과는 20년전 그와 멀어지게 된것도 그런 이질감이 이유였으니까.

".....뭘로 증명하지?"

목소리가 탁하게 튀어나왔다. 자칫하다간 심장까지 토해버릴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미트리는 나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가 죽인 사람만 해도 벌써 30명이 넘어가. 이번 경우야 저명인사니까 부각된거지. 그전에 그가 유명해 지기까지 수백명의 사람이 음악을 들었고, 그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어. 정 믿지 못하겠다면 그 노래를 떠올려봐. ' 글루미선데이'"

그가 말한 글루미선데이는 자살음악으로 꽤 유명했다. 일정한 파장으로 흘러나오는 그 노래는 심약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불꽃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바싹. 작은 촛불처럼. 하지만 퀘른의 연주는 달랐다. 그는 여러곡을 연주했고, 분명 연주할때마다 다른 곡일 것이다.

"숫자가 적은것 같지만 이걸 알아야해. 그 숫자는 그 녀석이 8번째 손가락을 연주하면서 부터 생겨난 숫자야. 왜 인간의 한계일까. 그 이상은 안되기 때문이야. 하지만 저녀석은 그것을 해내고 있어. 어떤 대가가 있을거란 생각. 하지 않아?"

"넌 어떻게 알게 된거지?"

그 물음에 드미트리는 쓰게 웃었다

"애증이지. 어쩌다 보니 나 역시 마인드코프를 연주하게 되었거든. 그 악기자체는 생각이 많은 우리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악기니까. 생각을 그대로 음악으로 나타내주거든. 그녀석의 음악은 말그대로 죽음을 나타내는 거야. 죽음의 음악이지."

"그도 알고 있어?"

대답을 원하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드미트리의 고개는 아래로 움직여졌다.
어김없이. 나는 그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9


두명이 더 자살했다. 그 사실은 사회의 큰 가쉽을 이끌고 왔다. 세명까지는 우연으로 치부할수 있었지만-억지스런 이유를 끌어가면서까지 여길려고 하면-다섯명은 무리였다. 다섯명이나 되는 저명인사가 죽었다는 것은 꽤 심각한 일로 사람들의 입을 떠돌았다. 모 프로에서는 그것에 관련된 다큐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했다. 하지만 모든 가쉽들이 그러하듯이 여러가지 이유를 끌어옴에도 결국 한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수가 없다. 하지만 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명더. 가해자와 그 가해자를 질투하는 자. 질투하는 자는 막으려고 하지만, 필사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이라는 것을 그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투다. 하지만 나는? 나는 퇴임한 철학교수이고 그의 친우이다. 나에겐 그를 막아야할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의 친우가 살인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살인일까? 철학적으로 보면 살인일수도 있다. 그러려면 사회전체를 살인자라는 범주에 넣어야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나는 어떠한 방향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고 하나의 편지가 날아왔다.

익숙한 느낌의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격조있는 글씨로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퀘른 독주회'

결국 그가 시작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10번째의 손가락을. 인간의 한계를 넘어 비상하려 하는 것이다.


10


마인드코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전무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마인드코프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이 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정도밖에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인드코프라는 악기가 불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젊음. 그의 연주.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등등의 조합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연주하려 한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연주속에서 상실했다. 무언지 알수 없는 것들을 잃었다. 희망. 꿈. 생명.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릴수 있는 그 어떤 무언가. 하지만 나는 퇴임한 철학교수이고, 실망하지 않는것에 익숙한 이였다. 아마도 나에게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그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씁쓸하게 생각했다. 생각의 어귀에서 방황하던 나는 어느새 연주회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값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전과는 다른 연주회장밖의 모습에 당황해야 했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있었고, 저명인사들을 향한 인터뷰요구가 있었다. 아마도 최근에 자살로 죽어간 사람들탓에 유명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일테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실 이 연주회자체가 살인자의 향연이라는 것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며 씁쓸한 마음이 사라지고, 겸허한 마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라고 외치는 듯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쏟아져나왔다. 나는 나의 부족함에 점점 겸허해지며 신의 음악을 듣기 위해 올랐다. 아마도 그의 음악에 매료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 역시도 그가 10번째 손가락을 연주함으로써 인간의한계를 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과연 오늘 그는 연주해 낼수 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그렇게 나는 연주회장에 입성했다.



10

연주가 시작되기 전 그를 만나볼 생각으로 저번의 그 대기실을 찾았다. 그리고 가던 중에 그를 만났다. 그 역시 나를 기
다리고 있었던 듯, 내가 다가가자 손을 슬쩍 들었다. 드미트리. 질투하는 자.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동행이었지만 어차피 목적지는 같았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그를 막아야 해."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퀘른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대꾸하지 않자 재차 말했다.

"이번에 막지 않으면 안돼. 점점 희생자가 늘고 있어. 게다가 미완성인 상태로. 만약 열번째  손가락으로 연주된다면. 오오. 난 두려워.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신경질 적이지만 그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투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퀘른을 끌어내리길 원하는 것일지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드미트리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왜 직접 하지 않지?"

"뭐가?"

"왜 직접 그를 멈추려고 하지 않느냐는 거야."

"무슨 소릴. 나는 그를 말리려고 했어. 몇번이나 몇번이나 찾아와서 말렸지. 그를 멈추려 했지만 그가 멈추지 않는 것은 어쩔수 없잖아"

"결국 너도 믿지 않는 것이지?"

나의 물음에 드미트리는 어설픈 웃음을 띄며 손을 들어 보였다. 드미트리 역시 음악으로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는 가정에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 음악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알았다. 퀘른이 연주하던 음악에 대해서. 마인드코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퀘른이 넘으려는 벽에 대해서 알고 있다. 어쩌면 진짜 세상이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눈빛으로 드미트리를 쏘아주고는 걸음을 다시 옮겼다. 금새 도착할수 있었다.


대기실 문저편에는 퀘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살금살금 열리며 저편에서 그의 모습이 차츰차츰 보여졌다. 퀘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금새 천천히 피어올랐다. 나를 향해 미소짓는 퀘른의 모습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퀘른의 모습은 며칠새에 늙어버린 듯한 초췌한 모습이었다.

"어서와. 비트륀. 그리고 드미트리도."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드미트리 역시 말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던 나의 입에서 나온것은 탄식같은 신음이었다.

"어째서......"

퀘른은 가냘픈 미소를 띄며 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는 혈기가 없었다.

"와줘서 고마워."

"어째서.......어떻게......"

나의 물음에 퀘른은 웃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드미트리가 대답해왔다.

"연습한것이군. 생명을 깎아먹은거야. 끈질기군. 포기하라고 그렇게 말했을텐데......"

"시끄러!"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고함을 질렀다. 나의 서슬에 놀랐는지 드미트리는 침묵했다. 퀘른은 나의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기분에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말햇다.

"정말 그런거야? 정말 생명을 깎아먹는거야? 인간의 한계를 넘기위해서.......왜......"

"아니야. 비트륀. 인간의 한계같은건......넘기위해서 있는거야. 나는 그것에 도전하고 있어. 난 네가 지켜봐줬으면 해."

"무슨 보상이 있는거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말했잖아. 한계는 넘기위해 있는거라고.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살기위해 있는거니까. 나는 그 가능성을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보겠다는 것뿐이야.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나는 참을수가 없었다. 퀘른의 가냘픈 손도 핏기없는 차가운 몸도. 인간의 한계라고 말하는 10번째 손가락도.

"그만둬! 제발. 여기서 멈춰. 더이상 높아질 필요는 없어. 떨어지고 말꺼야."

" 난 날게 될꺼야."

"제발.....너에겐 손가락밖에 없어. 더이상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마."

나의 말에 퀘른은 말없이 나의 손을 매만지며 웃었다. 오래전에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불치병을 앓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다. 죽음과 거래하고 타협하고 분노하고 결국 수용하는 때까지 이른 그 사람은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편하게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자듯 편하게요."

나는 그의 미소를 평생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퀘른의 웃음에서도 같은 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죽음을 수용하고 있는 듯한 태도.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있는 아니 수용하고 있는 모습. 그는 나직히 말했다.

"난 날게 될꺼야. 가능성을 불태워서라도......삶의 가치를 알고 싶으니까.......그러니까. 나는 하겠어. 언제까지나 하늘을 바라만 볼수는 없잖아. 나는 날고 싶은걸......."

나는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11

어두운 연주회장은 고요했다. 분명 많은 청자들이 이곳저곳에 있을 테지만, 그 중에 소리를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모두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테다. 그러나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캐논처럼 뒤엉켜 내 심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고요함 때문인지 두근거림은 음악처럼 가슴을 때리고, 생각은 점점 잠겨들었다.
퀘른이 넘으려는 선에 대해서. 퀘른이 넘으려는 한계에 대해서.....

드미트리는 근처에 앉아서 연주하는 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퀘른처럼 연주하고 싶다는 욕망인가. 아니면 파멸의 도구로서 마인드코프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옛날에 읽었던 당나귀 일화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귀뚜마리가 되기 위해 이슬만 먹은 당나귀. 결국 당나귀는 죽고 말았지만, 만약 살아있었다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죽음의 댓가로 단 한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가시나무새처럼? 나는 퀘른을 그토록 강요하는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퀘른은 어째서 죽을듯이 한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중앙의 단에 흰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저편 어둠에서 뚜벅 뚜벅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단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이었다. 퀘른. 단으로 올라서는 그의 걸음이 무거웠다. 난 어쩐지 어린시절 보았던 달세계로의 첫걸음이 떠올랐다. 같은 한계에 닿기 때문일지도...... 그렇게 단위에 올라선 퀘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가운 빛은 퀘른의 얼굴을 어둠속에서 둥실떠오르게 만들었다. 달뜬 퀘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나 부담감같은 것은 찾아 볼수 없었다. 짙은 피로감. 그랬다. 나는 퀘른이 피로하다고 느꼈다. 아마 퀘른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찰칵.

단을 둘러싼 조명이 하늘로 쏘아졌다. 올곧은 차가운 조명이 비쳐지자 퀘른이 입고 있는 옷이 두드러졌다. 퀘른이 입고 있는 것은 연미복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날개를 형상화한 느낌의 수가 놓여진 옷이었다.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미지로.
퀘른의 손가락들이 공간에 벼려졌다. 깃털마냥 뿌려진 손가락들 사이로.


찰칵.

다시 빛이 뿜어진다. 아까와는 다르게 묘하게 지성을 띈 빛이었다. 그 빛 사이로 퀘른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마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유리구슬을 굴리는 듯한 움직임. 그리고 곧 잔뜩 움츠린 음악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ㅍ----------------------------------


빛으로 둘러싸인 긴 물결이 단에서 올라와 천천히 위로 올랐다. 그 물결은 상승하는 용마냥, 천천히 올라가다 마침내 닿았다. 그리고 손가락이 요동치며 움직이고. 빛으로 둘러싸인 수만가지 색깔이 뿜어져나오며. 바닥에서 부터 하늘로 찬란한 빛을 뿌리며. 음악이 터져나왔다.


ㅍ-  ㅍ- ㅍ-------------------------!


죽음을 각오한 이의 목숨을 건.

극의의 음악이었다.


12


자.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그 음악이 사람들을 죽였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음악에서는 진한 향이 있었다. 퀘른과 말했던 멸망에의 애증이라는. 사람은 왜 멸망이라는 말에서 평범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단지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상의 느낌을 받게 된다. 어떤 사과나무처럼.

내가 정확히 알수 있는 것은 퀘른의 실망감과 좌절감이었다.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때 그는 분명 9번째 손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도. 그가 어떤 벽에 막혀 계속 몸을 부딪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벽이 부서질때까지 계속. 계속,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의 연주가 끝났을때 그의 얼굴에 슬그머니 떠오른 지친 피로감과 자괴감은 나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만들었으며, 두려워 하게 만들었다. 절벽에서 자발적으로 뛰어내릴수 있는 사람이 두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도전하는 자는 젊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의 젊음의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생각에 맡기겠다. 그러면 마지막날 보였던 그의 그 지친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추측해본다. 이미 10손가락을 연주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그것은 절망적인 상상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밖에 없다.

그의 연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최초로 열손가락의 연주자에 대한 칭호를 받게 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를 만나려 했지만 그는 그날로 잠적해버린 채 나타나지 않았다. 자살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그의 연주는 녹음되어서 꽤 많이 팔렸고, 그의 음악을 들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택했다. 결국엔 그것이 이슈화되어서 '죽음의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지만, 글루미 선데이가 그렇듯이 더욱 많이 팔렸다. 사람들은 죽음에 집착한다. 죽음을 통해서 벽을 넘을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계에 가장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


그의 연주는 훌륭했건만...

그는 한계를 넘지 못한 모양이다. 드미트리는 퀘른이 사라지자 꽤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질투라는 짐을 벗어버린 탓인지, 그 역시 금새 8번째 손가락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으면 날수 있는것일까.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친우의 복귀를 그리워하며 이글을 작성하고 있다. 은퇴한 철학교수의 글을 읽어줄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사람만이라도 읽어주고 판단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난 사과나무를 심으러 가야겠으니.


-  끝-


께서명하신바인간은더이상
다가갈수없는이치고그누
구도코벗을수없는인의죄가
인을결닿을수없도록정하시
니인간도전하여신께가까워
지자란말을하는이에게신께
서조용히권고사신의자비함
을이루말로하랴엄한신의말
을무시하는자에겐라의고통
이널기다리니하지마절대로
  신께 결코 도전하지 마라

ps. 밑의 문자그램은 원래 소설속에 넣으려다 포기한것...

---------------------------------

딤비의 노블릿 칵테일용으로 제작한 글입니다.^^;;
댓글 10
  • No Profile
    bet 06.01.27 20:27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
  • No Profile
    요한 06.01.28 01:48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연화 06.01.30 21:58 댓글 수정 삭제
    최고이네요. 존경스럽습니다
  • No Profile
    요한 06.01.31 10:5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 No Profile
    리안 06.01.31 12:12 댓글 수정 삭제
    하하.
    난 사과나무를 심으러 가야겠으니.
    이 말, 정말 재밌네요. 이런 식으로 쓰일줄은 하하;;
  • No Profile
    요한 06.01.31 14:02 댓글 수정 삭제
    ;;; ^^;;; 에에.. 감사합니다;;
  • No Profile
    dmdma 06.02.02 19:5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독특하네요. 미래가 나오지만, SF라는 느낌보다는 멸망이라는 소재가 중심이 되었네요.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 자세히 살피면서 읽은 것은 아니지만, 보면서 오타들이 눈에 띄어서 같이 적습니다.

    그 이전에 그것을 갇고 있었다. -> 갖고
    인터넷을 뒤지자 금새 그에 관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 금세
    극한이라는 말이 나올만한 것이 있는것인가? ->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 열기는 금새 시들었는데 -> 금세
    금새 사장되었다. -> 금세
    그가 작곡한 음악은 금새 새로운 음악장르를 -> 금세
    그가 상상하는 모든 음악은 그의 표현을 통해 금새 -> 금세
    청중의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금새 -> 금세
    안돼 -> 안 돼
    헤매긴 했지만 금새 -> 금세
    하지만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 없었다.
    금새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금세
    금새 빈정거리는 듯한 -> 금세
    열번째 -> 열 번째
    뭐 너도 금새 알게 되겠지 -> 금세
    변한것일까. -> 변한 것일까.
    "어서오게. 비트륀" -> "어서오게. 비트륀."
    미묘하게 경계에 선 느김이 -> 느낌이
    그것때문이라더군. -> 그것 때문이라더군.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 지울 수가
    방송하기도했다. -> 방송하기도 했다.
    두명더 -> 두명 더
    살인일수도 -> 살인일 수도
    실망하지 않는것에 -> 실망하지 않는 것에
    그 이유때문이지 -> 그 이유 때문인지
    인터뷰요구 -> 인터뷰 요구 사람들탓에 -> 사람들 탓에
    인간의한계 -> 인간의 한계
    어쩔수 없잖아" -> 어쩔 수 없잖아."
    금새 도착할수 있었다 ->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연습한것이군 -> 연습한 것이군
    참으며 말햇다. -> 참으며 말했다.
    몇사람만이라도 -> 몇 사람만이라도
  • No Profile
    육합권 06.02.03 09:48 댓글 수정 삭제
    저기 dmdma님-ㅅ-; 금세는 한번만 지적하셔도 됐을 법 한데요.
  • No Profile
    unica 06.02.04 17:40 댓글 수정 삭제
    댓글도 댓글 나름의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타 지적이야, 저도 감지덕지 받아들입니다만, 이건 좀 뭐랄까나.
  • No Profile
    fool 06.02.06 14:39 댓글 수정 삭제
    '두명 더'는 '두 명 더'가 더 정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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