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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먹는 사람

2004.12.13 20:0112.13

[ 먹는 사람 ]



혼자 백화점에 가서 식품매장을 돌아 보았다.
주말이라 사람이 넘쳐, 얌전히 서 있으면 인파에 떠밀려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일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놀이기구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수십 명이 길게 줄을 섰다. 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 한 발 두 발 종종 걸음을 치자니 어쩐지 꼴이 우스울 것 같다. 나는 이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식품매장을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실 굳이 사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없고 사람에 치이면서 뭘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배가 좀 빈 데다 음식 냄새를 한참 맡다 보니 무엇이든 먹고 싶어 져서 뭐든 먹는 게 어떨까 싶어 매장을 돌았다.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는 뭐하고 간단한 걸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쪽이 좋다. 버터를 바른 프레첼, 진한 녹색에 타피오카를 잔뜩 넣은 키위 버블티, 손을 대면 바삭바삭 소리를 낼 것처럼 투명한 튀김옷을 입은 새우튀김, 꼬치에 꿰어 구운 닭고기에 주먹만한 크림슈까지. 둘러 앉아 초밥 접시를 고르는 사람들을 지나 햄버그 스테이크며 칠리 새우 같은 걸 둘러 보는 사람들과 등을 스쳤다. 도넛을 파는 매장을 지날 때 카운터에 섰던 머리 긴 아르바이트생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도넛을 사라고 소리쳤다. 다섯개들이 박스에 삼천 원. 고구마 빵을 파는 매장에서 머뭇거리니까, 밤을 넣어서 맛있다고 점원이 권했다. 계피 가루를 겉에 뿌렸고 속엔 초콜릿이 든 것도 있다면서 새로 나온 건 아이들 먹기 좋게 자그만 크기로 돼 있다고. 전을 부쳐 파는 매장에서도 걸음이 멎고 화과자를 파는 매장, 초콜릿을 파는 매장이며 케이크를 진열해 놓은 매장을 지났다. 빙글빙글 여러 바퀴 주위를 맴돌다가 나는 크레페 매장에 멈춰 섰다.

“햄치즈 크레페 하나 주세요.”

어느 쪽이냐 하면, 나는 꽤 귀여운 편이다.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굉장히 우습다는 건 잘 알기 때문에 남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분명히 나는 미인이다. 아쉽게도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기르거나 하지 못하지만 나는 얼굴도 희고 이목구비도 제법 뚜렷하고 팔다리도 가느다랗다. 새로운 학교에 진학했을 적이면 여자아이들이 곁에 앉으려고 하고 이름을 묻고 자기 그룹에 끼워 주려고 한다. 새로운 반에 진학하면, ‘넌 눈에 띄어서 기억하고 있어’ 라면서 접근해 오기도 한다. 나는 예쁘니까 분명 살아가는 데 이득을 볼 거라는 말도 칭찬 삼아 몇 번이나 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애가 관심을 보인 적도 몇 번 있고 어릴 때부터 선생님도 어른들도 나를 좋아 했다.

“고등학생? 예쁘게 생겼네?”
“감사합니다.”

예쁘다는 건 사는 데 꽤 좋은 일이다. 예쁘기 때문에 시선을 모으고 예쁘기 때문에 이득을 본다.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굳이 관심을 받는다든지 부정하게 득을 본다든지 미모를 이용한다든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만 ‘존재한다’는 자기 존중감 측면에서도 예쁜 건 분명 도움이 된다.

“천오백 원입니다.”
“여기.”

이천 원을 올려 놓고 오백 원 거슬러 받는다. 점원은 영업용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는다.

“거스름돈 오백 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종이에 만 크레페를 손에 쥐고 엘리베이터 근처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다. 나는 앉아서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크레페를 한 입 입에 문다.

[아, 신주희! 너도 이 학교네? 나 옆에 앉아도 돼?]
[응? 어…… 그래.]

고교 배정을 먼 데로 받아서 같은 중학교 친구가 별로 없었다. 반에 들어가서 두리번거려 보니까 모르는 얼굴뿐이었다. 어디 앉을까 하다가 마침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애가 있어서 다가갔다. 확실히 주희라는 이름이었지, 하는 건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그 애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흔한 여고생. 외모에 관해 말하자면 평균 이하다. 성적이 조금 좋다는 거 같았지만 전교에서 몇 등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매사에 어두워 보이고 여드름도 많고 안경을 썼다. 가련할 정도로 안경이 얼굴에 어울리지 않아서 한 마디 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로서도 아는 애가 없으니까 잠깐 곁에 앉는다는 정도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 애도 그랬을 것이다.

[저기, 너 이쪽 중학교 안 나왔지? 어디서 왔어? 거연 중학교?]

과연 아이들 몇 명이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예쁘다. 위화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예쁘고 얼른 보기에 성격도 밝아 보인다.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것 같기도 하고 화사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주위를 둘러 보면서 누구랑 친구를 할까, 누구한테 말을 걸어 볼까, 하는 여자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들 수밖에 없다.

[으응. 좀 먼 데서 왔어, 남화.]
[와, 남화에서 여기 배정 받는 거 가끔 있다더니 정말이네? 친구들하고 다 헤어져서 싫겠다, 그치?]
[응. 친구들은 다 여기 안 와서.]
[그래두 올핸 남화 애 몇 명 더 있대. 삼반인가 사반인가 그 쪽에 한 명 있다던데?]

자연스럽게, 여자아이들은 떠든다. 불쌍하게도 주희한테 말 거는 애는 한 명도 없다. 내가 미안할 것도 없겠지만 미안해 하는 얼굴로 나는 살짝 주희에게 말한다.

[나, 저쪽 자리로 갈게. 미안.]
[응…… 아냐.]

괜찮다고 말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거다. 남들이 먼저 말을 걸고 싶을 만한 메리트가 없으면 자기 쪽에서 찾아 나서면서 여기저기 들러 붙기라도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예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고 내세울 건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있으니까,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한 반에 몇 명씩은 그런 아이가 생긴다. 그 누구로부터 경멸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 아무도 따돌리지 않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 그건 사실 공부를 잘 한다든지 집이 잘 산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신주희’ 라고 하면, ‘아 그 애. 그 애 말야, 수학 성적은 꽤 좋지 않았어? 수학 시간 언젠가 선생님이 칭찬 했잖아.’ 라든지 ‘걔 안경 좀 안 어울렸어. 그치?’ 라는 식으로 분명 인식하고 기억도 하고들 있다. 다들 그런 애가 있다는 것도 그 애가 대충 어떤 애라는 것도 알고는 있는데, 그러나 아무도 그 애가 체육시간에 나오지 않아도 모르는 것이다. 숫자를 세 보고 자기 앞 뒤를 살피고 나서야 ‘아, 그 애 없어! 주희 말야.’ 하고 손뼉을 치게 된다. 꼭 그런 애가 있다. 아무도 따돌리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데 결국 ‘도태’ 되는 애. 누군가는 그 애와 이야기도 한다. 그 애와 밥도 먹고, 가끔은 등을 두드리며 장난도 친다. 그렇다, 아무도 그 애를 따돌리고 있지 않다. 아무도 그 애를 미워하고 있지 않다. 그 애에 관해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애 생일 같은 걸 알기도 한다. 그 애에게 교과서를 빌리기도 하고 그 애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수업 시간에는 쪽지도 건네 주고 필통을 빌려 구경도 한다. 책장에 해 놓은 낙서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 일도 있다. 다른 반 애지만, 그 애랑 가는 길이 비슷해서 같이 하교를 하는 애도 있다.
하지만 그 애는 도태 되고 말았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반드시 한 반에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인 일이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혹시 나는 아웃사이더가 아닐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모두와 사이 좋게’ 같은 건 거짓말이라는 거, 유치원에 다니는 사촌 동생도 알고 있다. ‘모두와 사이 좋게’ 라니 도대체 어떻게? 사람 머리에는 한 순간에 한두 사람의 자리 밖에는 나지 않는 법이다. 남자친구가 있는 애는 부모보다도 남자친구를 우선하기도 한다. 그거 아니라도 여자애들이란 유치원에만 들어가도 그렇다. 남자애들은 관찰해 볼 일이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여자애들은 분명히 그렇다. ‘비에프’ 라는 건 괜히 있는 게 아닌 거다.

체육 시간에 쫑알쫑알 떠들면서 ‘야, 나가기 되게 싫지? 그치? 오늘 그냥 쉬고 싶어.’ 같은 말 해주는 애. 음악실 갈 때 단소나 리코더 같은 걸로 서로 장난 치면서 같이 가주는 애. 배가 아파서 책상에 퍼져 있으면 쟤 아픈가 보다 하고 말해 줄 애. 화장실 갈 때 따라와 주는 애. 선생님 심부름으로 다른 반 갈 때 같이 갈 애. 청소할 때 심심하니까 다른 애랑 조 바꿔서 같이 청소해 줄 애. 수업 시간에 둘씩 짝 지으라고 하면 머뭇거리지 않고 꼭 나랑 짝 해 주는 애. 그런 애가 없으면 학교 다니는 것이 백 배는 더 고통스러워 진다.

말하자면 ‘비에프’라는 건 서로 챙겨주는 존재다. 그래서 여자애들은 친한 애 셋이서 한 반에 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일이 생기고 만다. 현미경 놓고 둘씩 짝 하라고 하면 셋이서, 과연 누구누구가 둘이 되고 하나가 남겨질 것인가 하고 일 초 만에 최소 천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거다. 웃긴 게 그럴 때 남겨진 애는 결국 셋 사이의 우선 순위에서 영영 밀리게 된다. 이건 나머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는 잘 바뀌지 않는 순위가 되는데 그 다음 해 같은 때 둘이 다른 반이 되면 또 상황이 달라지는 거다. 애들 사이엔 ‘비에프’ 뿐 아니라 ‘무리’가 있다. 대여섯 명 무리들은 서로서로 비에프라서 반이 갈리면 자기 무리 중에서 같은 반인 애들이 교실 생활의 짝이 된다. 학교에서의 여자애란, 말하자면 파트너 없이는 끈 떨어진 연 같다.

주희의 문제는 그 ‘비에프’가 없다는 데 있었다. 왕따 같은 거랑은 다르다. 그건 애들이 그 애를 피해 버리는 거지만 주희를 굳이 피할 필요도, 그러는 애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체육 시간에 그 애보고 얼른 체육복 갈아 입고 같이 나가자고 하지 않았고 음악실 갈 때 손을 잡고 끌고 가듯이 데리고 가지 않았고 조 짜라고 할 때 제일 먼저 찾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거다. 새 학기 초에 그걸 정하지 못하면 그 다음엔 서로 자기 짝 챙기느라 다른 애 굳이 신경 나눠 줄 여유가 없으니까. ‘무리’까지 생겨 버린 후라면 상황은 좀 더 나빠진다. 그 다음엔 학년이 갈리고 반이 바뀌어도 무리 안의 애들끼리 짝을 짓기 때문에 끼어 들기 힘들어 지는 거다.

[한 명 모자라.]
[누구 없는 거야? 야, 자기 자리에 서! 야, 선경이하고 미주하고 또 둘이 노닥거리고 있지? 좀 바로 서! 자기 자리에 가서 서라니깐, 진짜……. 늬들도 떠들지 말고 좀 제대로 서!]
[야, 쌤 나와서 지랄하기 전에 좀 찾자. 어떤 지지배가 말 없이 안 나왔어?]

애들이 투덜거리면서 제 비에프의 손을 놓고 정해진 줄에 선다. 반장은 애들 숫자를 다시 세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말 하나 모자라네? 누구지?]
[자기 줄 앞에 뒤에 좀 확인해 봐! 야, 종 치겠다.]
[운동장도 돌아야 되는데……. 누구야? 없는 거?]
[누구야?]

애들이 떠들어 대는데 앞쪽 줄에서 누가 짝, 손뼉을 치고 소리쳤다.

[아! 주희! 신주희 없어. 걔가 내 앞이거든?]
[정말? 주희 오늘 아픈가?]
[그런 말 안 하던데?]

선생님이 나왔을 때 한 명 없는 걸 들켜서 엄청나게 야단 맞았다. 애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고 선생님은 반장을 때렸다. 가서 얼른 데리고 오라고 소리 쳐서 반장은 맞은 게 분해서 반쯤 울먹이며 교실로 뛰어 갔다. 갔던 반장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자기 반 학생을 챙겨야지’ 라니 정말 바보 같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고루 나누어줄 수 있단 말인가. 선생인 당신들조차 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사실은.

[저, 선생님. 주희 교실에 없는데요? 양호실 가 봤는데 거기두 없구요.]
[이 년들이……? 야, 자기 반 애가 어디 갔는지도 몰라? 너네들, 걔 왕따 시키고 막 그러는 거 아냐? 엉?]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닌데? 분명히 체육 나오기 전에 시간엔 봤거든요?]

선생님의 일장 연설과 더불어 정말 짜증나게 욕을 먹고 재수 없게 단체 기합을 받았다. 삭신이 쑤시도록 우릴 괴롭히면서 쾌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저 변태. 애들은 선생님이 안 들을 때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죽도록 죽도록 욕하면서 반성은커녕 백만 번도 더 생각해 줬다. ‘모두 다 사이 좋게’ 라니 될 리가 없잖아. ‘언제나 모두와 함께’ 라니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런 게 애당초 가능하기나 한 거였어? 그런 게 되는 반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 없다. 단체사진 속에서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방긋방긋 웃고 있다고 해도 자기 방에 돌아가 문을 닫은 후의 일 같은 건 아무도 모르는 거다. 마음만 먹으면 제 아무리 비에프가 하루 종일 손 잡고 있다고 해도 틈 같은 건 만들 수 있는 건데. 그런데도 ‘언제나’ 라니 될 리가 없잖아.

“하나 주세요.”
“하나만요?”
“네.”
“천삼백 원입니다.”

크레페를 다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슈크림 파는 매장엘 갔다. 주먹만한 걸 하나 달라고 했더니 능숙한 솜씨로 빈 슈에 속을 채우고 흰 가루 같은 걸 톡톡 표면에 뿌려서 휴지에 말아 내 준다. 이번에도 점원은 웃어 보인다.

“참 예쁘네요. 중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그래요? 자, 맛있게 드세요.”

손이 끈적끈적하다. 도대체 길에서 간편하게 먹으라면서 왜 뭐든 손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걸까. 꼬치를 먹을 땐 몇 개 빼 먹고 나면 그 다음 걸 먹기 위해 막대를 자르거나 아니면 아래 것부터 이로 볼썽사납게 밀어 올리거나 해야 하고. 크레페니 햄버거니 샌드위치 같은 걸 먹다 보면 꼭 옆으로 위로 속에 넣은 게 빠져 나오고 새어 나오고 해서 온통 엉망이 되고 말이다. 좋아하는 남자애랑 데이트 하게 됐다고 잔뜩 빼입고 긴장하고 나갔더니 뭘 먹으려고 해도 예쁘게 먹을 자신이 안 생기더라는 푸념은 지겨울 정도다. 무식하게 고춧가루 들어가는 걸 첫 데이트부터 먹자고 하는 남자애가 있어서 장렬하게 차 주고 왔다는 애도 있었고. 좋아하니까 고추장 삼겹살이나 쭈꾸미 볶음을 먹자고 해도 차마 싫다는 말 못하고 따라 갔는데 먹는 내내 신경 쓰이고 이에 고춧가루 끼었을까 싶어 웃지도 못했다는 애도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 간단한 거 먹어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크레페도 먹다 보면 당근이나 양상추 같은 게 치마에 떨어지기도 하고 소매에 묻기도 한다. 과자를 먹어도 손에 기름이 묻어 미끈거리고. 난 도대체 과자를 먹으면서 책을 볼 수 있는 재주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책장에 기름이 묻는 것처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는데.

[육교시 시작할 때 사반 애가 교과서 빌려서 뛰어 오다가 봤대.]
[종이 막 울리는 중이라서 죽었구나 싶어 뛰는데 우리 반에서 걔가 뛰어 나가더래.]
[체육복 바지만 입구, 치마도 안 벗구. 갈아 입다 만 것처럼 해서 뛰어 가더래.]

애들은 떠들었다. 선생님들도 그 애가 조용하고 착해서 그럴 애가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가출이라도 한 거냐고 말이 많았다. 애꿎은 반 애들은 담임한테 일장 훈시를 듣고, 가끔 집에 같이 갔던 다른 반 애는 교무실까지 불려가서 그 애 요즘 이상한 소리 안 하더냐는 둥 갖은 질문에 시달렸다. 반장 말로는 담임이 담배를 반쯤 태우다 재떨이에 구겨 끄더니 주희 집에 전화 해 보라고 하길래, ‘걔네 집 전화번호 모르는 데요?’ 했더니 버럭 화를 내더란다.

[반장이라는 게 왜 전화번홀 몰라? 늬들 정말 왕따 시키고 그런 거 아냐?]
[아니라니까요.]

‘모두다 사이 좋게’ 같은 건 거짓말. 신주희, 너도 몰랐을 리 없잖아. 그걸 모른 채 살아온 건 아니었을 거잖아.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슈크림을 싼 종이는 기름에 젖어 투명해지고 반쯤 베어 먹은 슈는 여기저기로 크림이 비어져 나와 손을 어지럽힌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최대한 슈크림을 얌전히 먹기 위해 노력한다. 제 아무리 우아한 이미지를 가진 음식이라 해도, ‘먹는다’는 행위는 꽤나 추잡하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인간이라 해도, ‘먹는 모습’은 흉하다. 입을 부풀리고 씹고 입술로 이따금 침 범벅이 된 음식물이 튀어 나오기도 하고 빨대에 입술을 대고 빨아 들이면 양 볼이 홀쭉해 진다. 슈크림 하나를 먹기 위해 소매를 걷어 붙이고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달려들지 않으면 안 된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걸 먹으려면, 김으로 감싼 음식을 입에 넣으려면, 이 사이에 보기 싫은 것이 끼어 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떻게 뭘 먹으면서까지 완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뭘 먹으면서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햄버거를 먹을 때 양상치가 한 번도 새어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케챱을 떨궈 보지 않은 사람도 없고 비어져 나온 토마토를 흘리지 않기 위해 햄버거를 비틀고 고개를 추하게 기울여 본 적 없는 사람도, 그렇다,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고 먹는 모습은 흉하다. 온 힘을 다해 달려들어 온 힘을 다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여운 애도 예쁜 애도 추한 애도 모두 한결같이 볼을 부풀린다. 이를 움직이고 턱이 비틀리고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소리가 난다. 눈은 짝짝이가 되고 코를 벌름거리고 기껏 화장한 입술 곁으로 머스타드 소스나 간장 같은 게 묻는다. 잘 차려 입은 옷자락 위로 크림이 떨어지고 손에 쥔 샌드위치며 꼬치 따위를 제대로 먹기 위해 요상한 동작으로 꿈틀거리는 것이다.

왜 죽었을까.
왜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일까.
나는 주희에게 물을 수 없고 묻고 싶지도 않다. 육교시 체육 시간 종이 울리고도 교실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아이. 저도 모르게 잠든 걸 깨워서 ‘얼른 체육 나가자’ 하고 말해 줄 짝이 없었던 아이. 언제나 아름다울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언제나 도태되는 것이 나온다, 맹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골몰한 표정으로 슈를 마저 씹었다. 그래도 기어코 얼마간의 크림이 손에 묻고 만다. 손등을 흘러 떨어지는 것을 굳이 혀를 대어 핥았다. 달콤하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왜 혀 끝에서 쓴 맛이 날까. 나는 슈크림을 향해, 혹은 크레페를 향해 말했다. 나를 미워해라. 나를 용서하지 마라. 나는 그저 먹었을 뿐이니까. 아름다움마저 한 순간 저버리고 추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을 뿐이니까.

끈적끈적한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편다. 몸을 일으켜 엘리베이터 앞을 벗어나 인파를 헤치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모두 사이 좋게’ 같은 건 거짓말, 아무리 예쁜 아이도 항상 아름답지 못하다는 건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짐승의 시신을 씹고 식물의 유해를 삼키면서 누구나 제 얼굴 일그러지는 것을 안다. 제 동작 추하고도 치열한 것을 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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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숨을 돌리고 싶어 쓴 글입니다.
판타지는 아니죠, 어떻게 보아도.

크레페를 먹다가 쓰게 된 글입니다만 참고로 저는 안 예쁘고 여고생도 아닙니다(...)
미로냥
댓글 2
  • No Profile
    바람 04.12.14 01:01 댓글 수정 삭제
    크레페가 먹고 싶어집니다[...]
  • No Profile
    딥씨 05.04.12 02:54 댓글 수정 삭제
    하루키 스타일이 느껴진다고 하면 실례가 되나요? 아무튼 재미있고, 굉장히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정말 좋습니다. 이런 글은 좀 다듬어서 책으로 출판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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