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헝겊인형-4(완결)

2005.11.17 06:4011.17



  학교가 개강을 했다. 개강을 하고 다음 날 현태로부터 사과 문자가 왔다. 자기가 그때 너무 술에 취해서 그랬다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현태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은 그저 현태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실 현태는 잘못한 게 없다. 그냥 자기를 버린 여자를 욕한 것뿐이다.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한다. 난 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의 감정들을-죄책감, 미안함, 당황스러움-감당하지 못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혔다. 미진이가 그랬고 현태도 그랬다. 나와 현태는 아마 다시는 예전처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개강 첫 날 미진이가 보이지 않았다. 미진이와 같이 다니는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에게도 연락 없이 학교가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아파서 그럴 수도 있고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와의 일이 이유일 것 같다.
개강을 하고 난 혼자 밥을 먹었다. 달리 나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학기 때에는 같이 먹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자기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다. 어차피 거의 내 유일한 친구인 미진이가 사라졌다. 밥 친구 몇 명 잃는다고 특별히 맘 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미진이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형, 미진이 누나한테 무슨 일 있는지 알아요?”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민재가 나를 잡고 묻는다. 나는 물론 모른다고 대답한다.

“흠....... 휴학은 못 했을 텐데 계속 수업에 안 나오네요. 연락 없었어요?”

“없었는데.”

“그래요........ 아, 형 밥 먹을 사람 없으면 같이 먹을래요?”

“흠, 그래.”

민재의 갑작스런 제안에 난 의아함을 느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민재는 나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사실 민재와 나는 친하다고 하면 친한 사이다. 1학기 때 많이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술도 많이 먹었다. 물론 그 이상의 관계는 되지도 될 수도 없었지만 우리의 관계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재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날 혼란스럽게 했고 오늘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는 민재의 말은 한층 더 혼란을 가중시켰다.
어쨌든 나는 민재를 따라 밥을 먹으러 간다. 그리고 항상 민재와 붙어 다니는 재희와 재용이도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우리가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평범한 식당이다. 가격이 싸다는 장점 이외에는 다른 장점을 찾기 힘든, 그저 그런 대학교 근처 식당이다.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만 우리 네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다. 다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거릴 것 같다.
재희가 웃으며 말한다.

“오빠, 오랜 만이에요.”

“오랜만은 무슨. 어제도 봤잖아.”

“밥 먹는 건 오랜만이죠.”

“그런가.”

재용이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으며 말한다.

“형은 방학 동안 뭐 했어요?”

“나? 뭐, 알바하고 놀았지.”

“여자친구는 안 사귀었어요?”

“안 사귄 거냐. 못 사귄 거지.”

그러자 재용이와 재희가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을 짓는다. 마치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이다.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던 민재가 나에게 말한다.

“형, 오늘 개강 파티 하는데 올 수 있어요?”

“글쎄. 특별한 약속은 없는데, 아직.”

재용이가 끼어들며 말한다.

“에이, 형이 안 오면 무슨 재미로 놀아요. 꼭 와야 되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곧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반 발자국 정도 물러난다. 민재나 재용이가 공통된 화제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쪽에서 거부한다. 곧 그들도 포기하고 자신들끼리 대화를 한다. 메뉴 고를 때도 그냥 세 사람이 정한다. 그들이 의견을 물을 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꽤 시간이 지나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와 세 사람은 말없이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와 세 사람은 헤어진다. 재용이가 다시 한 번 술자리에 올 것을 다짐한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꼭 간다고 한다. 세 사람과 헤어지고 달리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조용한 강의실에 ‘웅웅’하는 진동 소리가 울린다. 교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잠깐 강의를 멈췄을 뿐 자신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강의를 계속한다. 하지만 지루한 교양 강좌이기에 절반은 자고 절반은 멍한 표정으로 교수의 입만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일순 동요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소리를 출처를 알아내려 한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웃음을 짓던 나는 문득 많은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제야 내 가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식간에 확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난 황급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것을 열었다고 재빨리 닫는다. 하지만 ‘탁!’하는 커다란 소리가 진동 대신에 강의실에 울린다. 조용한 강의실이기에 그 소리마저 크게 느껴진다.
교수가 강의를 중단한다. 그리고 잠깐 나를 쳐다 보고나서 시계를 쳐다보더니 말한다.

“아무래도 저 친구가 급한 약속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럼 오늘은 좀 일찍 끝냅시다.”

어느새 잠에서 깬 절반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내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교수에게 찍힐 것 같다. 교수에게 사과를 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교수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듯 황급히 나가버리는 바람에 난 불안을 안고 교실을 나선다.  
교실 복도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민재가 전화를 했다. 통화버튼을 눌러 민재에게 전화한다. 방금 전화했으면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컬러링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났다가 다시 시작될 때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아, 형. 지금 ‘헤이’에 있어요. 거기로 와요.”

“그래. 근데 수업 시간에 전화를 하면 어쩌니?”

“아, 수업이었어요? 형 수업은 좀 늦게 끝나네요. 미안해요, 형.”

“됐어. 금방 갈게.”

“네, 빨리 와요.”

많이 선선해진 밤공기를 맞으며 술집으로 향한다. 술집에 도착해서 문을 여니 아르바이트생들이 인사를 하며 일행이 있냐고 묻는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을 찾는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찾는다. 허나 그곳으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와 있다.

“아, 형. 이쪽이에요.”

미진이다. 미진이가 날 보고 있다. 날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 응시한다. 내가 먼저 미진이를 피하고 만다. 난 다른 아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술자리는 즐겁다. 다들 방학 때 있었던 일들을 선물 보따리를 끌러낸 산타 할아버지처럼 쏟아낸다. 선물을 받은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고 진지하게 경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의 기억, 추억을 공유하는 그 시간동안 미진이와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어쩌면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던 우리 둘의 시간은 이제 그렇지 않다. 그 시간은 깊이 감추어야 하는 19세 딱지 비디오처럼 되어버렸다.

“형, 오늘따라 유독 조용하네요.”

얼굴이 벌겋게 된 재용이가 말한다. 나는 그냥 씩 웃는다.

“형도 방학 때 무슨 일 있었을 것 아니에요. 말 좀 해요.”

“맞아요, 말 좀 해요.”

“우린 이렇게 다 망가졌는데 형 혼자 고상한 척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아이들이 죄다 아우성친다. 나랑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아이들도 저마다 나에게 장난스런 야유를 보낸다. 그때 미진이가 일어난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 말에 갑자기 아이들이 조용해진다. 마치 미진이가 ‘좀 닥쳐줄래?’라고 말 한 듯 싸한 분위기다. 하지만 좀 차갑게 말했을 뿐 미진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재용이가 술잔을 들며 말한다.

“야, 야,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래. 술 마셔, 술.”

다시 술자리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된다.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 다녀와요.”

난 화장실 대신에 술집 밖으로 나온다. 알코올과 담배 냄새에 해방된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쾌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술을 마셔서 감각이 예민해진 걸까. 도시의 냄새가 되어버린 매연 냄새, 오래된 페인트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올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앉을 곳을 찾는다. 그러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본다. 미진이다. 미진이가 담배를 피웠었나, 하고 생각해봤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난 나도 모르게 미진이에게 다가간다. 술기운인지 아니면 용기인지 구분할 수도 없지만 나는 미진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미진이는 누군가 다가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게 나라는 걸 알자 흠칫 놀라며 담배를 뒤로 숨긴다. 난 웃으며 미진이 옆에 앉는다.

“이왕 피우는 거 보였으니까 그냥 피워. 아직 많이 남았던데.”

“됐어.”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게 나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미진이는 나를 보고 담배를 끈 자신의 모습에 화를 내는 것 같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난 잠시 할 말을 고른다.

“오랜만이야. 담배는 언제부터 핀 거냐?”

“.......”

“그 날은 미안했어. 혼자 보내서.”

“.......”

“계속 말 안 할 거냐?”

대답대신 그녀는 담배를 빼 문다. 그리고 한 번 담배 연기를 빨고는 말한다.

“난 그 날 너한테 고백했어. 사랑한다고.”

“.......”

“그러니까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만들지 마. 알잖아.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거.”

“알지만 노력해 볼 수는 있잖아.”

그녀는 몇 번 더 담배를 빨고는 바닥에 담배를 버린다. 그리고 추위를 느끼는 듯 몸을 조금 움츠린다. 바닥에서 아직 발갛게 피어오르는 담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더 작게 만든다. 상처 입은 작은 동물의 모습처럼. 그녀가 말한다.

“애들이 다 알아. 너하고 나의 일.”

“어떻게.”

“그냥, 싸이에 적었거든.”

“내 이름 적은 거야?”

“아니, 그냥 눈치 빠른 애는 알 수 있게 해 놨어.”

그래서 그런 거였나. 아이들이 갑자기 나를 멀리한 게.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 가지고 나를 멀리할 이유는 없다. 난 의아해서 묻는다.

“개강하고서 아이들이 날 피하더라. 난 왜 그런가, 했어. 알았구나, 애들이. 그런데 도대체 뭐라고 적었어?”

미진이는 내 말에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민재가 내가 쓴 글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내가 그때는 감정이 좀 격했었나 봐. 민재가 애들 분위기를 주도해서 소문이 이상하게 났었어. 정말 미안해. 내 멋대로 이렇게 만들어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한다. 현태가 나에게 그런 것도 뭔가를 ‘봤기’ 때문일까. 난 현태가 싸이를 하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내 생각을 비집고 미진이의 떨리는 음성이 들린다.

“난....... 난 그냥 숨기고 싶지 않았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알아, 이해해. 기분 나쁘지 않아.”

“나 짜증나.”

“.......”

“네가 나를 그렇게 대했는데, 그렇게 못 되게 굴었는데 난 지금 너를 미워하지 못하겠어. 밉지가 않아. 어떡하지? 나 어떡해야 돼?”

도로 위로 차가 많이 지나다닌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반면에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은 느리게 걷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밤공기가 기분 좋다는 듯 편안한 발걸음으로 걷는다. 하지만 미소 비슷한 걸 짓는 사람은 없다. 무표정하다. 그 무표정이 때로는 참기 힘들지만 지금은 왠지 편한 느낌을 준다.

“말 좀 해. 제발, 아무 말이나 좀 해줘.”

“너와 나는 안 돼.”

난 그녀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도대체 왜 안 되는 거야? 혹시 현태한테 무슨 말 들은 거야? 내가 나쁜 여자라고? 바람둥이 같은 여자애라고? 그것도 아니면 현태 때문인 거야?”

“다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너를 위해서야.”

“날 위해서라고?”

“그래.”

“그게 어떻게 날 위해서야?”

난 아까처럼 말을 고른다. 이번에는 오래 걸린다. 눈을 감고, 내 거대한 공동을 파헤치며 난 필사적으로 말을 찾는다. 그것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들을 찾는다. 미진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다. 이건 날 위한 말이니까.

“내 주위에는 온통 그 사람뿐이었어. 숨을 들이쉬면 그 사람이 들어왔지. 내 폐를 채우고 심장을 채우고 눈을 채우고 머리를 채웠어. 그리고 숨을 내쉬면 그 사람이 숨결에 묻어나와. 그럼 다시 내 주위는 온통 그 사람으로 채워지는 거야.”

점점 말을 찾기가 힘들어 진다.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이 흐린 탓이다. 그래서 내 말투는 느려지고 불분명해진다.

“그런데 그녀는 날, 아니, 아니. 내가, 내가 그녀를 버렸어. 그래, 내가 그녀를 버린 거야. 그렇게 사랑했는데 난 그녀를 버렸어.”

그녀는 앞만 보며 묻는다.  

“차인 게 아니고?”

“아니야. 내가 버렸어. 그건 기억해.”

“.......”

“난 그녀를 버렸어. 그것도 나 때문에. 무슨 일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난 분명히 내가 잘못될까봐 그녀를 버린 거야. 난....... 난 분명 누군가를 다시 버릴 거야. 아니, 내가 그녀를 버린 이유를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그럴 거야.”

“인현아, 날 봐.”

난 그녀를 본다. 절박함을 눈 안에 가득 담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녀의 눈은 슬프다.

“지금 난 네가 말하는 걸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 자랑은 아니지만 나 남자 많이 만났어. 난 결코 네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나 지금 자존심 다 버리고 얘기하는 거야. 너도 알고 있지? 너한테 그렇게 비참하게 차여놓고 다시 애걸하고 있어. 날 똑바로 봐. 옛날 여자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변할 수 있어. 내가 변하게 해줄게. 내가 그 여자를 지워줄게.”

‘지워줄게.’ 라는 말이 갑자기 커다랗게 울린다. 시작이다. 다시 나와 세상이 격리된다. 난 내 공동으로 침잠한다. 저 속으로, 저 아래로. 감각이 둔해지고 상념들은 부피를, 형태를 가지고 나를 에워싼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난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상념들 속에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야, 너 그 버릇 아직 안 고쳤냐?”

“무슨 버릇?”

난 새끼손가락을 세워서 보여준다. 현태가 배시시 웃는다.

“버릇이 뭐 그렇게 쉽게 없어지냐. 당연히 고치려고 해 봤지. 어렸을 때는 되게 싫어했어. 친구들이 얼마나 놀렸는데. 기집애 같다고. 그래도 버릇이라는 게 무서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안 고쳐지는 걸 보니까.”



떠오른다.




  나도 따라 웃는다. 그러다 아직 잔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미진이의 손을 본다.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있다.  

“미진아.”

“응?”

“너 원래 새끼손가락 세우는 버릇 있었니?”

“에? 내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그녀는 놀란 듯 자기 손을 본다. 그리고 정말 자기 손가락이 세워진 것을 보더니 호들갑을 떤다.

“어, 정말이네? 난 왜 몰랐지.”

“몰랐어?”

“응. 아무도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흠....... 이상하다. 갑자기 생긴 건가?”

“버릇도 갑자기 생길 수 있나?”




그녀는 변한 거다. 세우지 않던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보지 않던 멜로 영화를 본다. 미진이는 변한 거다. 아니, 없어진 건가? 새끼손가락을 세우지 않고 액션 영화를 보던 미진이는 어디 간 거지? 그 부분은 다시 찾을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내 껍질이 사라지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속은 비어있다. 껍질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내 의식은 천천히 떨어진다. 저 깊은 어딘가로.

“인현아, 어디 가!”

미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내 발은 멈추지 않는다.





의식이 돌아온다. 그리고 내 방 천장이 보인다. 순간 또 지난번처럼 정신없이 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다. 휴대폰을 본다. 날짜가 바뀌어있다. 당연하다. 12시가 넘었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쉰다. 병원에 또 가는 건 싫으니까.
몸을 일으킨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난 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걸 안다. 집에는 어떻게 온 모양이다. 주위는 어둡다. 물론 새벽이니까 어둡겠지만 내가 느끼는 어둠은 평소의 어둠과는 다르다. 부피가 있고 형태가 있고 무게가 있는 어둠이다. 그런 어둠 속에 억눌려 있는 것이다.
순간 내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얼굴을 가져간다. 그리고 거칠게 문지른다. 난 지금 여기 앉아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다. 헝겊인형이다. 갑자기 헝겊인형이 떠오른다. 속이 빈, 헝겊인형 말이다. 헝겊인형에서 실을 뽑으면 어떻게 됐었지. 흩어진다. 그렇다. 흩어진다. 그러면 나는? 나는, 나는, 나는........ 흩어지지 않는다. 나는 흩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실을 뽑으려는 그녀를 버렸으니까.
생각이 난다.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려지는 두레박처럼, 그것은 삐걱거리며 느리지만 분명히 떠오른다.
그녀가 날 보며 말한다.

“어제 혜진이 생일이었대.”

“그래?”

“응, 선물 살까 말까 고민 돼.”

“사야지 뭘 고민해.”

“까먹었다는 거 티내는 거잖아.”

난 웃고 만다. 그녀가 이런 귀여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한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입 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웃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오늘은 웃기 위해 나오지 않았으니까.

“인현아, 너 뭐 먹을래? 난 카푸.......”

“지희야.”

“응?”

“헤어질까? 우리.”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농담하지 말라는 표정과 그딴 소리는 하지 말라는 표정이 동시에 나타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헤어지자.”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진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그냥 ‘농담이었어.’라고 말하며 웃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이유가 뭐야? 다른 여자 생긴 거야? 그런 거야?”

“아니야. 그냥....... 힘들어.”

“뭐가 힘들어, 인현아. 내가 너 뭐 힘들게 했니?”

“널 놓치면 후회 많이 할 거야. 하지만 지금 널 놓지 않으면....... 난 두려워. 지금 우리는 고3이고 우리는 같은 대학을 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냥 그래. 난 군대도 가잖아. 계속 만날 수 없을 거야. 분명히 헤어질 거야, 우리......... 그러니까 헤어지자.”

개소리다. 난 흩어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날 점점 바꿔간다. 내가 아닌 다른 걸로. 내 안은 텅 비었는데 자꾸 내 껍질을 벗긴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완전히 발가벗겨지고 싶지 않다. 난 그렇게 되기 싫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 인현아, 너 장난치는 거지? 인현아, 그렇지?”

“나 먼저 갈게.”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지나친다. 그녀는 무언가 홀린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다. 마치 아직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이. 난 생각한다. 이제 난 흩어지지 않을 거라고. 난 이제 더 이상은 흩어지지 않는다. 난 확신한다.
기억은 여기까지다. 이제 끝났다. 기억났다. 난 어느새 침대가 축축하게 젖었음을 깨닫는다. 이건 내 21살에 흘릴 마지막 눈물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눈물은 다시는 흘리지 못할 것이다.  



미진이는 다시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미진이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외롭다. 분명 내 몸과 마음은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는 않다. 미진이는 그런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내가 기대길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나에게 기댈 것이다. 안 된다. 그녀는 사랑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꾼다. 아니, 바꿔간다. 조금씩. 그리고 그 모습들은 이별할 후에도 계속된다. 그녀는 정말 한미진일까? 이 여자를 한미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밥 먹자, 인현아.”

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주위를 스쳐가는 아이들은 우리를 보며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보인다. 난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오늘은 뭐 먹을까?”

“밥.”

“이상한 농담 하지 말고. 별로 재미도 없어. 뭐 먹을래.”

“그냥 아무 식당이나 가자.”

“하여튼 싱겁기는.”

그녀는 내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식당으로 간다. 다른 연인처럼 친근하게 잡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내 팔을 잡는다. 연인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나는 이미 연인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대신 내 옆에서 내 팔을 살짝 잡은 채 걷는 그녀를 본다.
단정하게 빗은 긴 생머리. 마론 인형처럼 섬세하게 올려진 속눈썹,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상심한 일이라도 있는 듯 살짝 튀어나온 입술, 그리고 예쁜 귀. 난 새삼스럽게 그녀의 귀가 예쁘다고 느낀다. 여러 번 그녀의 귀를 봤지만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그렇게 느껴진다.

“왜?”

“응?”

“날 왜 그렇게 쳐다 봐?”

난 그제야 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난 부끄러움에 황급히 앞을 바라본다.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한다.

“사실대로 말해. 너 나한테 반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굴도 새빨개졌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내 얼굴은 굳는다. 내 얼굴을 본 그녀는 얼굴에 담고 있던 짓궂은 웃음을 쏟아내고 대신 미소를 담는다.

“알았어, 알았어. 이러다 삐지겠네. 여하튼 너한테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히히, 기억해 둬야겠다.”

그녀는 다시 내 옆으로 와서 내 팔을 잡는다. 난 역시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다. 나와 그녀는 공명한다. 같은 공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명은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떠 올리게 한다. 그것은 그리움도, 슬픔도, 증오도 아닌 내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일 뿐이다. 난 그녀와 식당으로 향한다.



밥을 먹고 올라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문자가 왔다. 문자는 윤성이 형이 보낸 것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묻는다. 난 만나자고 답문을 보낸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미진이가 묻는다.

“누구야?”

“아는 형.”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재수 학원 때 만난 형이야.”

“으응.”

“그럼 나 과제가 있어서 도서관 갈게.”

미진이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의아함에 묻는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야. 알았어. 뭐, 이 정도야 각오했었으니까 보내줄게.”

“무슨 소리야.”

“아니야, 내일 보자.”

그녀는 인사를 하고 가 버린다. 그녀가 떠나고 얼마가 지나서야 난 그녀의 말을 깨닫는다. 언제일까. 내가 그녀를 받아들이는 날은. 그리고 내가 미진이와 만난다면 나와 현태와 웃으며 만날 날이 올까. 난 머릿속에서 헝클어지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하며 도서관으로 간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 앞에서 형을 기다린다. 어느새 낮이 많이 짧아져서 6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어둑어둑 하다. 평소와는 달리 형은 일찍 나타난다. 형이 차 창문을 열고 나에게 손짓한다.

“야, 오늘은 그냥 우리 집 가자. 좋지?”

“그래요.”

뒤에 차들이 조금 밀려 있어서 내가 타자마자 형은 황급히 차를 출발시킨다.

“웬일이에요.”

“뭐가?”

“형이 이렇게 일찍 온 건 처음이에요.”

“그러냐?”

“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죠.”

“맞아,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야.”

“여자 만날 때도 늦게 나가요?”

“글쎄다. 뭐, 대충 그런 편이지. 결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 성격이 워낙 느긋하다보니 그럴 때가 많아. 나라는 인간이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

“보통 남자들이 여자를 기다리는 게 매너 아닌가요?”

형은 운전대를 잡은 채 나를 살짝 곁눈질하고는 말한다.

“그런 건 이것저것 만들기 좋아하는 것들이 만들어낸 하찮은 거야. 그런 것들에는 본질이 빠져있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내 행위만 보고 판단해 버려. 그 남자가 너를 기다리게 하는 건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라고 말이야. 멋진 개소리지.”

“하지만 사람의 맘을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 하느냐 아닌가요?”

“아니야.”

“아니에요?”

“물론.”

윤성이 형은 그 어떤 것보다 명쾌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사람의 마음 정도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사람들은 그걸 무시해 버린단 말이야.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 같은 건 전혀 믿을만한 게 못 돼. 네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을 보지 말고 눈을 봐. 그게 가장 정확하고 정직한 방법이야.”

“제 눈은 어때요?”

“네 눈?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최악이었어.”

“최악이요?”

“그래,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네 눈은 정말 최악이었어. 텅 비어 있었지. 물론 누구나 그런 빈 공간은 가지고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텅 빈 곳을 다른 것으로 덮어놔. 하지만 넌 그렇지 않았어. 그래서 금방이라도 바스라 질 것 같았지. 전쟁터에 알몸으로 던져놔도 너처럼 불안해 보이진 않았을 거야.”

난 미소 짓는다. 그 당시의 내가 그 정도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그런 최악의 인간하고 왜 가까이 지낸 거예요?”

“눈이 최악이라고 했지, 네가 최악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긴, 사실 섬뜩했어. 너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에 의해서 옷이며 피부며 죄다 벗겨진 사람 같았거든.”

“무슨 말이에요?”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야. 완전한 무방비 상태. 넌 그 상태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오고 싶어 했어. 네 눈 안에 있는 그 텅 빈 공간에서 난 네가 얼마나 외로운지, 고통스러운지 조금은 알 수 있었어. 넌 그만큼 무언가에 절박했던 거야.”

“그래서 나하고 친해지려고 한 거에요?”

“그래, 난 이래봬도 꽤 착한 편이라고. 그런 불쌍한 아이들을 그냥 놔두지 못해. 아, 오해는 말아라. 지금도 널 만나는 건 동정이 아니야. 점점 알게 될 수록 너란 인간을 정말 좋아하게 됐거든.”

“미안해요.”

“뭐가?”

“제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형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형이 웃으며 나를 주먹으로 친다.

“너 죽을래? 이게 요즘 부쩍 까부네.”

나는 주먹을 피하며 쾌활하게 웃는다. 요즘 웃을 일이 별로 없었다. 별 거 아닌 장난이지만 난 정말 즐겁다.

“제 몸에 손대지 마요.”

“너 차에서 내리고 보자.”

장난스런 주먹질이 끝나고 형과 나는 말없이 도로를 달린다. 군데군데 차가 막히기는 했지만 꽤 빨리 형의 아파트에 도착한다.

“지난번에 그 누나 없죠?”

“.......없어, 임마. 그리고 그런 일은 좀 잊어라.”

“어떻게 그런 일을 잊어요.”

“하긴.”

나와 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형의 집으로 올라간다. 집에 들어가니 지난번과는 다르게 깨끗이 치워져 있다. 식은 통닭도, 굴러다니는 술병도, 숙취에 엉망이 된 반라의 여자도 없다. 내가 집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자 형이 말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벌거벗은 여자는 없어. 그만 찾아.”

“아쉽네요.”

형은 얇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는 술을 진열해놓은 찬장으로 가서 이것저것 술을 고르기 시작한다. 난 소파에 앉아 TV를 켠다. 이것저것 돌리지만 별로 볼만한 건 없다. 마침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가 나와 그걸 틀어놓고는 형에게 묻는다.

“웬일로 형 집이 이렇게 깨끗해요?”

“아, 얼마 전부터 3일에 한 번씩 아줌마가 와서 치워주거든. 뭐, 누가 내 집에 들어오는 건 싫지만 워낙 치우기가 귀찮아서. 밥 안 먹었지? 중국집에서 탕수육이나 시킬까?”

“형 좋을 대로 하세요.”

형은 중국집에 전화를 해서 음식을 시킨다. 그리고 찬장에서 술 한 병을 들고 바닥에 앉는다.

“야, 너도 내려와라.”

난 TV를 끄고 내려와서 형 옆에 앉는다. 형은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한다.

“오늘 내가 큰 맘 먹고 이거 땄다. 시바스 리갈이야.”

“비싼 거예요?”

“뭐, 학생이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술은 아니지. 그렇게 비싼 술도 아니지만. 마셔 봐.”

난 형의 말대로 술을 마신다. 소주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화끈함이 목을 넘어간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어떠냐?”

“글쎄요. 전 술 맛 같은 건 잘 모르겠어요. 술 마신지 얼마 안 돼서요.”

“그러냐?”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술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그보다 맛있는 건 세상에 없다는 듯이 연거푸 2잔을 더 마신다.

“맛있어요?”

“글쎄, 이걸 맛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마시면 좋아.”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형이 술을 마시는 걸 본다. 형은 침착하게 한잔, 한잔 술을 따라서 주의 깊게 맛을 음미하며 마신다. 난 새삼스럽게 형이 정말 주당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냥 술을 잘 마시는 게 아니라 정말 술을 즐기는 사람 말이다.
술을 마시던 형이 문득 생각난 듯 말한다.

“네가 지난번에 집에 왔던 날.”

“네.”

“그 날 이후로 가끔씩 생각했어. 왜 너만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지 말이야.”

“그래요? 그래서 왜인지 알았어요?”

“그래. 대충은.”

난 잔에 술을 채운다. 형은 그런 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한다.

“우리는 다들 비어있어. 우리가 20년이 넘게 배운 건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영어문법과 인수분해 같은 거야.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어깨를 기댈 때는 그만큼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 받고 상처를 주며 그런 것들을 배워야 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아픈 걸 싫어해. 그래서 한 발짝 물러나지.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기대. 때로는 아예 맘을 닫아버리고.”

형은 나의 말을 기다리는 듯 말을 끊는다. 하지만 난 잠자코 따른 술을 마신다. 그런 나를 본 형은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너 같은 사람도 있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껍질마저 잃어버린 사람. 인수분해, 영문법, 올 가을에 유행할 패션 같은 걸 잃어버린 거야. 하지만........”

“흩어지죠.”

형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입을 움직인다.

“그렇게 껍질을 잃어버리면 흩어져버려요. 헝겊인형처럼. 하지만 전 흩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넌 흩어지지 않았어.”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중국집 배달원이 온 모양이다. 형은 일어나서 현관으로 간다. 나도 따라 일어난다. 형은 배달원에게 셈을 치르고 나는 음식을 거실로 가져간다. 탕수육만 시킨 게 아니라 자장면 하나도 시킨 모양이다.

“탕수육만 먹으면 배고플 것 같아서 짜장면도 시켰다. 빨리 먹어.”

“잘 먹을게요.”

나는 음식을 먹는다.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기에 한참을 말없이 먹기만 한다. 하지만 형은 그다지 먹지 않는다. 난 의아해서 묻는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 뭐 별로 생각이 없어서.”

자장면을 다 먹고 나니까 배가 부르다. 그래서 아직 많이 남은 탕수육은 자연스레 안주가 된다. 형과 나는 아까 한 말은 다 잊은 듯이 여자 얘기(거의 음담패설 수준이다.)나 학교 얘기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화가 끊긴다. 어떤 대화에나 있는 그런 끊김이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나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아까 한 대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난 그제야 내가 아까 했던 대화를 피하고 있음을 느낀다. 형은 그걸 눈치 채고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형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형은 별로 취한 기색이 없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화두를 꺼내기로 한다.

“형, 제가 아까 왜 편하다고 했죠?”

“응?”

“제가 편한 이유요.”

“아까 말 안 했나?”

“음식이 왔었잖아요.”

형은 한 번 웃더니 말한다.

“그랬나? 그래, 네가 편한 이유. 결국 넌 그 비어있는 거, 공동을 이해한 거야. 다른 아이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무시하고 있던 그걸 넌 인정한 거야. 그건 물론 괴로운 일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달라지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거야. 그래, 결여되고 모자란 인간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거기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는 거지. 한 마디로 어른이 된 거야.”

“그런가요?”

“그래, 그런 거다.”

형은 탕수육 하나를 집어 들어서 먹는다. 나는 형이 하는 얘기를 하나, 하나 천천히 곱씹어 본다.

“인현아.”

“예?”

“다시 사랑을 해라.”

“.......”

“네가 지난번에 왜 죄책감을 느끼냐고 했지?”

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중학교 때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정말 좋아했어. 그렇게 예쁜 건 아니지만 내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던 여자였지.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어.”

담담한 형의 말. 하지만 그 말은 거센 파도처럼 공간을 채우고 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조용한 거실에 술이 들어가서 오히려 한결 매끄러워진 형의 목소리가 울린다.

“물론 내 탓은 아니야. 사고였어. 하지만 난 그 여자가 죽으면서 나의 많은 것들을 가져갔다는 걸 깨달았지. 그녀가 죽으면서 내 그것들도 죽은 거야. 난 그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렸어. 그걸 다른 여자와 자면서 풀었으니까 죄책감이 들 수밖에.”

“형, 저기.”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어. 누군가를 사랑하면 서로 닮잖아. 그건 잃어버리는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느낀 건 미숙했기 때문이야. 그 사랑은 어느 날 잘못 배달되어 온 게 아닌가 싶은 비싼 선물이었던 거지. 너는 어느 날 그 대가를 치르게 될까봐 그 선물을 놓아버렸어.”

“.......”

“난 그 선물을 뺏겼어. 강제로. 다시 찾을 수도 없게 말이야. 넌 다시 그 선물을 찾아라. 아마 네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리 더러워지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형은 마치 자신이 한 말의 무게에 눌린 듯 말을 멈춘다. 형이 혹시 할 말을 까먹은 게 아닌가 싶을 때 형은 말을 잇는다.

“사랑을 찾아라, 인현아.”

난 말을 할 수가 없다. 무언가 풀렸다는, 무언가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속에서 형을 향해 나는 이 말 밖에 할 수 없다.

“형도요.”

형이 웃는다. 시원한 웃음이다. 그 웃음이 다시 한 번 나를 일깨운다.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한 사람으로 가득 찬다. 나를 보는, 나를 향해 웃는, 나와 나란히 걷는.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

난 복도로 나온다. 별은 없고, 달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차가 달리는 소음이 들린다. 황량한 풍경에 난 잠시 상실감을 느낀다. 난 이곳에 살아있는 걸까. 이 세상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진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너무 시원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바람이다. 전화를 들어서 미진이에게 전화를 건다.

“웬일이야?”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외치고 있다. 말하라고.

“사랑해.”

“.......”

“사랑해, 미진아.”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며 확신한다. 이제 더 이상 흩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더 이상 난 헝겊인형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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