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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포토시스 포 세이스

2013.08.15 19:4308.15

아포토시스 포 세이스

인류가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로 도피한 이래 반세기만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감염된 인간은 신체가 변이 되고 지성 없이 본능만으로 움직였다. 원인불명의 전염병은 3층계로 나누어진 주거공간 중 최초의 은신처, 쉘터를 제외한 모든 층계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인류는 끈질긴 방역작업을 계속 하면서 전염병과 싸워야 했다. 그 일선에는 소수의 보균자들로 구성된 외인부대가 존재했다. 캐리언. 모두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1.

레일 라인이 바뀌면서 전력이 초기화 됐다. 새 라인에서 전력을 공급 받는 동안 레일카는 관성과 중력에 의존해 달린다. 플래시 사이트가 점멸 되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 레일을 긁는 마찰 소리와 암흑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고립감만 남는다. 언제나처럼 눈을 붙이려다 오늘은 말동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마스크 렌즈를 조작한다. 적외선 시야로 안전고리를 부여잡고 벌벌 떠는 귀여운 남자가 들어왔다. 이한이라는 이름의 보조원이었다. 어둠 속으로 목소리를 던진다.
"요새 쉘터는 어때요?"
"속이 안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쉘터 시민은 일생에 한 번도 쉘터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고 들었다.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지하 1마일 밑에서 살아가는 인류라고 자각하는 첫 순간인 것이다. 매스껍고 침울한 기분이 들겠지만 내 지루함을 달래줄 사람은 이 보조원 샌님 밖에 없다. 임무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입도 뻥끗 않는 파트너 바트나 4인 일행의 핵심이신 능력자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멀쩡해 보이는데."
"아, 알았으니 물러나 주세요."
이한은 내 마스크 필터가 거슬리는지 기침 하며 손사래 쳤다. 오랜만에 만난 쉘터인이라 그들이 합성가스를 싫어한다는걸 잊고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나서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론화 된 부분만 말씀드리죠. 방역층에는 지원이 계속될 예정입니다. 변이억제는 포기한 시국이라 발병 자체를 막는 방향으로 신약을 개발중이고 인력도 투입될 거예요. 감염층은 계속 지켜보자는게 중론 입니다. 물론 확정 되지는 않았고…"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높으신 분들 결정을 내가 알아서 뭐해요. 유행하는 강화복 스타일이라던가. 새로 나온 무기라던가."
"…글쎄요. 전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요. 보편적인 화제거리는 전뇌자율화 정도일까요."
"그거 아직도 종결 안 났어요? 아니 뭐가 문제야, 팔다리 의체화는 되면서 뇌만 안 된다니."
"뇌는 마음이란 것과도 연결 되는 윤리적인 문제니까요."
어둠 속이라 내 썩은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역시 평균 수명 45세 쉘터 시민들이라 고상하셔. 실전 배치 되고 5년만 지나도 노장 소리 듣는 우리랑은 달라."
"뭐… 저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대화 도중 레일카가 덜컹거렸다. 차체가 뜬 모양이었다. 죽을 위기도 아닌데 이한은 옆자리 능력자를 끌어안았다. 능력자고 뭐고, 지보다 곱절은 어려보이는 꼬마애한테 매달리는 한심한 꼴 하고는. 말섞을 기분이 사라져서 렌즈를 끄고 눈을 붙였다.
"결국 고전적인 방법으로 합의됐군. 그렇다 치고, 인도자겸 숙주가 필요하네. 감염층 생리에 정통하면 좋겠군."
샌님인가? 목소리가 다른데.
"극작술에는 몰입을 위한 희생양이 필수적이야. 실제로 절박한 배경을 가진 샘플을 골라서 내 준비해보지. 쉘터인이 좋겠군."
목소리가 둘로 늘어났다.
"조커도 넣어야 해. 적절한 시기에 알아채고 아슬아슬 발버둥 치는 모델도 있어야지. 더 극적일테니까."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시끄러워!"
일어나 소리쳤다.

"예?"
이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느새 전기가 쌓여서 빛이 돌아와 있었다. 바트는 마스크 렌즈를 손질 중이고 어린 능력자는 퀭한 눈으로 나를 건너본다. 나 혼자 서서 소리친 꼴이 돼 버렸다. 이런 기묘한 꿈을 꾼 적이 있었나. 뻘쭘해져서 좌석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몸이 붕 뜨면서 차체가 기울어졌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안전고리에 왼팔을 집어넣고 팔을 뻗어서 능력자를 잡아끌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몸을 둥글게 하려는데 이한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레일카는 선로를 완전히 이탈해서 지면으로 곤두박질 치기 직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체만 굽힌 자세로 충격에 대비해야했다. 엄청난 충돌음과 동시에 한쪽 다리가 끊어지는 통증이 올라왔다. 안간힘을 써서 버텨내려 했지만 의식이 멀어져가는걸 막지 못했다.
포, 포. 나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마스크 렌즈 너머로 낯익은 눈이 보였다. 언제 어느 때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파트너. 바트의 믿음직한 눈.
"상황은?"
"섹터8 중간지역에서 레일카가 전복됐다. 3명은 경미한 타박상. 너는 오른쪽 무릎 골절이다. 응급처치부터 하도록."
그러고는 레일카쪽으로 돌아갔다. 구급함에서 밴드를 꺼내 다리에 붙였다. 밴드에 장착된 철심이 살을 뚫고 들어가 어긋난 뼈를 고정 시킬 때까지 고통을 견디면서 주변을 살핀다. 바닥에 설치된 접착 플래시가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일카는 앞열 바퀴가 박살나서 무용지물이 돼 있었다. 바트도 그걸 알고 거기서 무기와 식료품을 끄집어내는 중이었다. 그 뒤에서 이한이 능력자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병기로 취급 되는 능력자를 저런식으로 만지는 보조원은 처음이었다. 그 나이 또래 소녀 대하듯 조심스럽다 못해 서툴어 보이는 손길이다. 이런데 차출될 정도면 보조원 중에서도 뛰어난 인원일텐데. 그는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고 능력자와 같이 내쪽으로 다가왔다. 내 다리가 이꼴이 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걸 알긴 아는지 눈치를 살폈다.
"됐으니까 팔이나 잡아줘요."
"우릴 구하러 와주겠죠?"
레일카 전복 사고라는 일생일대의 재앙을 겪고도 제정신을 유지 하느라 필사적인 자신을 알아달라는 호소 깊은 목소리였다. 귀엽게 보였던 첫 인상도 무색해진다.
"글쎄. 능력자라는 비싼 몸이 계시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문제는 여기가 감염층이라는 거예요. 방역층처럼 대기중인 구조대가 없거든."
이한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요. 돌아가야지."
"거, 걸어서 돌아가자구요? 변종을 만나면 어쩌려고…" 진짜 말많은 강아지였다. 옆에서 의젓하게 기다리는 꼬마라도 보고 배우라고.
"돌아가지 않는다." 그말에 답한 건 바트였다.
"이대로 임무를 속행한다. 능력자 및 보조원을 호위, 섹터9 본부까지 도보로 이동. 그 외 변동사항은 없다."
여기가 중간지점이라 치면 섹터9까지는 레일 거리로 90마일도 넘는다. 바트가 그걸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바트. 일단 돌아가서 재정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산소 잔량도 부족할테고 저 둘이 입을 강화복도 없는데."
"섹터8까지 되돌아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강화복과 산소라면 여분이 준비 돼 있다."
출발 한 시간 전 내가 확인 했을 때는 정확히 레일카 소요시간에 맞춘 4시간 분량의 산소였다. 그런데 바트는 강화복, 그것도 이동편의성에 맞춘 수트형 강화복 4벌과 대용량 산소통도 따로 준비했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는 바트가 9년 연속 0% 확률의 레일카 사고를 우려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바트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다. 감염층 생존경력 17년이라는 특수 경력자는 캐리언 중에서도 바트가 유일했다. 운좋게 바트의 파트너로 배치된 덕분에 5년간 목숨을 건진 날이 얼마나 많았었나. 생각해둔 계획이 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2.

강화복을 벗자 50도 열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머리 위로 물을 뿌려서 몸을 적시고 경량형 수트로 팔다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흡착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한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 여성분이신지 몰랐거든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가 할 말이었다. 경량형 수트는 보호복이나 갑주형과 달리 몸매와 얼굴이 드러나는 흡착 소재였다. 처음에 남자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저 부실한 몸 때문에 착각할 뻔했다. "잘빠진 여자면 보균자도 상관 없어요?" 그는 변종이라도 만난 듯 허둥대며 물러났다. 나는 이죽 거리다가 버튼을 눌렀다. 무기를 고를 차례였다. 위력으로는 대구경 저격소총이 으뜸이지만 장식용이니까 제쳐두고 칼날이 늘어나는 확장형 나이프와 연발석궁으로 골랐다.
"폭탄이나 소총 같은 거 없어요?"
"당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네. 감염층 경력 보조원 맞아요?"
혹시나 전투 벌어지면 무슨 멍청한 짓을 할지 모르니 지금 말해두는게 좋겠다.
"감염층 먹이사슬에서 인간은 맨 밑에 있어요. 예전에 무식하게 총력전 벌이다가 박살난 이후로, 변종들에게는 그렇게 인식 됐거든요. 총을 쏘는 순간 인간이라고 알아듣고 달려오니까 총은 금지예요."
"그, 그럼 변종들이 나타나면 어쩔 생각입니까."
"아니 뭐가 걱정이래. 능력자가 알아서 처치 해주겠지. 그쪽은 보조나 신경쓰세요."
능력자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트와 같이 능력자 호위 전송을 맡은지 2달 째, 이제껏 스쳐지나간 능력자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병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아이는 보면 볼수록 다른 느낌이 든다. 병약해보이는 하얀 머리카락이나 10살 남짓 연령 때문만은 아니다. 외형으로는 더 어린 능력자도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탓이라기에는 느낌이 선명했다. 똑같은 인간처럼 느껴지는 동질감이.
"준비가 끝났으면 출발 한다." 바트가 앞장 섰다. 등 뒤에 매인 저격소총을 보고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레일 옆으로 벗어났다. 거기에는 동굴길이 있었다. 바트는 벽면에 접착형 플래시를 붙이면서 동굴 속으로 나아갔다. 사고지점과 맞물린 장소에 이런 동굴이 기다리는 게 수상했지만 바트의 독보적인 경험을 믿고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한명씩 지나야 하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바트가 전방에 서고 그 뒤에 능력자 소녀, 보조원 이한, 후방은 내가 맡았다. 나아갈수록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만약 소리의 진원지가 반대편 동굴 입구와 이어지는 공간이고 그곳에 산소탱크가 있다면… 최악의 가정부터 시작하는 나쁜 버릇이 나왔다. 감염층의 전체 환경 제어장치는 총력전 이후로 무작위 작동 중이다. 현재 제어장치가 인식하는 감염층 인구는 유전적으로 인간과 흡사한 변종들까지 포함해 시스템에 할당된 인구 10만을 뛰어넘는 숫자기 때문에 산소관리에도 오작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연히 감염층의 모든 산소탱크는 먹이사슬에서 우위에 선 포식자들이 점령했다. 극미량의 산소로도 생존 가능한 변종들이 대량의 산소를 흡입하면서 군체를 이루는 지옥도였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이한이 멈춰서서 벽을 문질렀다. "어으, 이거 좀 봐요." 자세히 보니 끈적 거리는 점액이 붙어 있었다. 주변으로 플래시를 비추면 언제부터인가 벽면 전체가 점액질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이걸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바트, 이게 뭐더라. 바트?" 그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올렸다. 뭔가를 발견 했다는 손동작이었다. 재빠르게 석궁을 견착 하고 이한과 능력자를 등 뒤로 밀착 시켰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한참을 경계 해보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그러나 렌즈 기능이 제한 되는 경량형이라 보이는 것만 보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바트의 손이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나도 긴장을 풀려고 할 때였다. 맨 뒤에 붙은 플래시 배터리가 다 되면서 빛이 약해지는 찰나에 뭔가가 움직였다. 나는 그 즉시 왼손을 올렸다. 검지와 중지를 교차 시켰다 눕혀서 변종 조우 및 후퇴를 신호했다. 이정도 광도를 꺼릴만큼 극단적으로 빛에 약한 변종이라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따돌리자는 의도였다. 바트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손바닥, 그 다음 주먹. 전달 착오가 있었나? 나는 재확인을 요청했고 바트의 신호는 같았다. 자리를 지키고 응전 하라는 신호였다. 내가 답신 않고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바트는 둘을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다리 부상 때문에 내가 짐이 될거라 판단할걸까. 그동안 내 목숨을 구해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파트너니까, 같은 캐리언이니까 어제까지 눈감아준걸까. 가늘고 단단한 것들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음표로 가득하던 머리속을 몸에 베인 생존본능으로 대체 시킨다. 남은 플래시 하나, 거리는 20미터. 마비를 일으키는 독성화살과 제대로만 찌르면 2차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확장형 나이프.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플래시가 꺼지기 직전 석궁으로 선제공격 후 근접전을 시도해야한다. 부상을 입힐 수만 있다면 운좋게 놈이 달아나거나, 재공격 여지를 생긴다. 예상 상황을 반복해 각인 시키면서 플래시가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빛의 깜빡임에 맞춰 앞으로 달리면서 사격을 개시했다. 어둠 속으로 나이프를 찔러들어갔다.

"키엑!" 타격감이 느껴졌다. 곧바로 칼날을 늘리려는데 놈이 엄청난 힘으로 나이프를 잡아 당겼다. 나는 끌려가기 전에 손을 놓고 뒤로 굴렀다. 그리고 떨궈둔 석궁을 줍자마자 몸을 돌렸지만, 기회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미 내 등 뒤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놈은 미약한 불빛을 다리로 가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족히 3미터에 달하는 거구였다. 내가 찌른 나이프는 어깨에 박혀 있었다. 별 타격도 아니었는 듯 더듬이로 내 숨동작 하나까지 살피는데 열중이었다. 먹잇감을 찾아내 군침이 도는 양 소름 끼치도록 다리를 움직였다. 인간의 몸체를 기초로 어깨, 허리와 골반 밑까지 총 16개 다리를 가진 절지형 변종, 그리마였다. 변종 중에서는 최하급에 속하는 청소부 따위가 어떻게 이정도로 성장했는지 알길이 없었다. 저항할 의지 따윈 없었다. 턱 밑으로 석궁을 갖다댄다. 고통 없이 죽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훨씬 더 강력한 발사음이 동굴에 울려퍼졌다. 그리마의 견갑이 꿰뚫리는걸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뒤돌아 달렸다. "몸을 낮춰서 뛰어요!" 이한의 목소리였다. 정면에서 지원사격이 이어지는데도 놈은 몇 발을 맞아도 다시 일어나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얼마 달리지 않아 체력이 고갈 되고 부상 당한 다리 통증이 심해졌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나한테 플래시를 던져. 빨리!" 푸른 빛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나는 그걸 잡아서 등 뒤로 던졌다. 빛이 몸에 닿자 놈은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 쳤다. 그 틈을 노려서 놈의 어깨에 박힌 나이프를 잡고 온 힘을 다해 그었다. 목이 잘린 그리마는 갈 곳을 잃고 허우적 댔다. 나는 나이프를 고쳐 쥐고 놈의 심장을 찔렀다.

3.

동굴을 빠져나와 휴식 하는 동안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는 능력자가 말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잘라낸 그리마의 머리를 품에 안고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는 답했다. "나보고 안아달랬어." 머리는 아이가 잠들었을 때 빼내서 처리했지만 능력자와의 대화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괴상한 행동도 여느 또래 아이들 같았다.
다른 하나는 내 파트너에 관해서다. 총을 쓰면서까지 나를 구한 건 그의 판단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능력자, 내 무릎에 잠든 이 아이 때문이었다. 바트가 말하기를 아이가 돌연 동굴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능력자가 말을 시작한 원인이 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료끼리도 희생을 요구 하는 와중에 능력자가 계기가 되어 구해지다니. 일찍이 나를 버리려 했던 바트가 선택을 번복한 이유도 의문이었다. 감정의 동요? 그럴리가 없다. 그는 지금도 나를 의식치 않고 소총을 정비 중이다. 나는 나직이 말했다.
"난 너한테 짐이었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짐작 하면서도 묻고 싶었다.
"우리는 상대를 알아야 했다. 너라도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니, 바트. 그러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한정된 플래시 수량을 아끼려면 암흑 속을 걸어야했다. 최대 가시거리로 플래시를 던져서 그 빛을 따라 손에 손을 잡고 이동했다. 몇 차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바트는 버벅임 없이 길을 인도했다. 실시간으로 생태계가 뒤바뀌는 감염층에서 지도 없이 길을 외운다는 게 이상했지만 대안이 없었다. 어제 이후로 그를 대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어둠에 익숙치 못한 이한이 다리를 떨었다. 아이가 동요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총을 사용한 이후로 어디서 뭐가 꼬여도 이상 할 것 없는 상황에서 무서워 하지 않는게 대견했다. 나는 아이가 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손을 잡아보려고 앞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못가 뭔가에 막혀 몸이 제지 당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차례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포. 플래시를 켜라."
빛이 제일 먼저 비춘 것은 벽에 파묻힌 인간의 얼굴이었다. "히익!" 이한이 기겁 하며 뒤로 넘어졌다. 빛이 강해질수록 벽의 제질이 동굴에서 보았던 점액질이며 그속에 파묻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 하위 변종들이 드러났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일부가 우리를 발견하고 울부짖었다. 동굴에서 들었던 소리의 진원은 이들의 신음소리였나. 50미터 정도 높이 정상에는 어딘가로 연결 되는 통로가 보였는데 10여 미터 정도만 더 연결하면 닿을 거리였다. 이 시체탑을 쌓아올린 놈들의 목적지처럼 보였다. 이런 짓이 가능한 무리 변종이 존재한다면 방역층은 물론이고 쉘터까지 공격 받는 것도 시간문제일텐데…

"포와 내가 올라간다. 능력자와 보조원은 밑에서 기다리도록."
다른 길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바트의 뒤를 따라야했다. 비스듬히 경사진데다 끈적한 점액질이 지지대 역할을 해줘서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었다. 따라오기 편하도록 나이프로 삐져나온 팔다리나 머리등을 쳐내면서 위로 올랐다. 바트가 꼭대기에 도착해서 사출식 로프로 통로로 들어가 안전을 확인한 뒤 이상없다고 신호했다. 아래로 올라오라고 고함 치려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봐 내가 내려가기로 했다. 내리막길에서는 점액질이 방해가 되서 중간까지만 내려가 팔을 흔들었다.
"빗소리가 들려요!"
이한이 소리쳤다. 망할 인간이 눈치도 없이.
"빗소리 몰라요? 고전 영화에 나오는 지상 자연현상인데."
"헛소리 말고 올라오기나 해요."
"로프나 그런 거로 올려주는 거 아니었어요? 그보다 들어보세요. 진짜 들려요."
툭툭 하고 뭐가 들리긴 했다. 다수의 개체가 지면을 치고 구르는 듯한. 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 졌다. 나는 뒤늦게 직감했다.
"저건 변종들이야. 빨리 올라와!"
이렇게 큰 구조물이 있으면 당연히 그걸 만든 놈들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들어볼 필요도 없는 걸 한심하게도 시간을 낭비해버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이한은 태연한 척 말했다. "7호, 놈들을 해치워버려." 확실히 능력자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다수였다. 피하는 게 상책인데도 이한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싫어. 죽이는 거 안 해."
아이는 웅크리고 앉아서 고개를 파묻었다. 겁에 질렸다기 보다는 거부반응에 가까웠다. 보조해야할 이한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었다. 그 사이 변종들이 내는 기괴한 발소리가 진동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이 압박감이 느껴졌다.
"포. 뭘 그리 안달 하지? 저 소녀는 능력자다. 위험을 느끼면 능력을 개방할 것이다."
바트는 위에서 관망하고만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게 정론이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저 능력자는 힘없는 어린 소녀였다. 변종들이 눈 앞에 들이닥쳐도 그들을 죽이지 못한다는, 내버려두면 도리어 죽고 말 거라는 예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발 밑의 점액질을 베어내고 수직으로 달렸다. 벽에서 떨어지는 동시에 몸을 말아서 다리부터 착지했다. 그리고 백팩에 든 플래시를 전부 꺼내서 암흑 속으로 내던졌다. 온 사방에 불빛이 점화 되면서 그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리마였다. 급성장한 체구에 더해 무리를 이루도록 진화한 것이다. 수백마리의 그리마들이 플래시 바깥에 모여서 더듬이를 떨었다. 소름 끼치는 빗소리는 더듬이가 내는 소리였다.

접근 자체는 막은 셈이었다. 다리 한 쪽이 나간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다른 발로 멍청하게 서있는 이한을 찼다.
"아이 데리고 날 붙잡아."
"어, 어쩌시게요?"
"닥치고 시키는데로 해. 저쪽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최대한 높이 로프를 쏴서 다같이 올라가면 바트가 내려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 손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로프를 발사했다. 그러나 사출 되어야할 로프 발사기가 반응이 없었다. 백팩과 장비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다리부터 착지한건데 모르는 사이 마찰이라도 있었나.
"저, 저기 좀 보세요."
"정신 사나우니까 입 다물어."
이리저리 조작해서 고치려는 게 자꾸만 어긋났다.
"저기 보라구요."
놈들은 서로를 희생 시켜서 몸으로 불빛을 덮고 있었다. 빛이 사라진 틈새로 득달같이 다른 놈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침착해야했다. 문제는 하나다. 사출만 되면, 그것만 되면.
"와요, 이제 온다구요!"
트리거가 결합 되면서 로프줄이 위로 솟아올랐다. 벽 정상지점에 안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로프는 더 이상 없었다. 통로까지 가려면 도움이 필요했다. 밑에서는 그리마들이 벽 전체를 뒤덮고 서로를 발판 삼아 맹렬한 기세로 쫓아오고 있었다.
"바트!"
머지않아 사출 소리가 들렸다. 바트는 양팔로 이한과 아이를 잡고서 저격소총을 남기고 통로로 되돌아갔다. 올라오는 그리마들에게 탄알을 쏟아붓는 동안 동굴에서 혼자 남겨졌던 때가 떠올랐다. 왜 홀가분한 기분이 들까. 어느샌가 나도 그를 닮아 무감각해진 걸까.
"뭐하고 있나."
뒤에서 바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탄창이 빈 줄 줄도 모르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바트가 손을 내밀면서 미소를 지었다. 바트에게 목숨을 구원 받는 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프에 몸을 싣고 올라가면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시체로 만든 탑은 그리마 군체에 먹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4.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데. 어떤 실험에도 응하지 않고 자폐상태를 유지하던 7호가 소통의지를 보이고 있어. 이대로라면 능력개방까지도 바라볼 수 있겠군."
"돌연변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는 건 떨쳐낼 수 없는 본능이지."
"내 생각은 다르네. 이건 가상실험에 불과해. 실제로도 통할지 어떨지는 모르지 않나."
그들 중 한 명이 지시하자 화면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한 소녀가 실험대에 결박 당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중간 세대라. 저걸 개발한다고 해서 인간성이라는 속성이 남으리란 보장이 있는 건가? 뭐가 남을지는 미지수이지 않나."
"그걸 위한 25년 계획이네. 인간성은 그동안 키우면 되는 거지. 마침 캐리언 중에서 적임자도 찾았고."
"캐리언이면 그 보균자 병대인가 보군. 믿을만한 자인가?"
"썩은 고기가 더 질긴 법."
화면 속 실험실이 어두워지고 소녀는 울음을 터트린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4호."
목소리는 사라지고 비명만이 남는다.

"포?"
아이가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꾸는 동안 머리를 흔들던 두통을 다리 통증이 대신했다.
"포. 많이 아파?"
"괜찮아."
우리는 오래된 초소에 머물고 있었다. 마모된 뼈나 그을린 살점등 수많은 변종들이 은신처로 삼았던 흔적들이 보였다. 가운데서 깜빡이는 플래시 잔량처럼 이한은 망연자실한 얼굴이었고 바트는 창밖을 주시하면서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내가 깨어난 걸 보고 상황을 전했다.
"너는 이동 중 기절했다. 그로 인해 이동이 정체됐다. 플래시 수량 6, 로프 수량 0, 무기는 근접용 무기 뿐이군. 필요 이상의 전투 상황이 너무 많았다."
"능력자 수량도 0이죠."
이한이 끼어들었다.
"하필 제가 맡은 능력자가 불량품이라니요. 다 끝났습니다. 저런 쓰레기인줄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도박 따위…"
험한 말을 듣고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내색 않는게 가엾게 느껴져서 속이 상했다.
"당신이 누굴 욕할 처지야?"
"전 보조원이지 전투원이 아닙니다. 보조할 능력자가 저 모양인데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하, 보조원은 무슨. 기생충이겠지. 뭘 한게 있다고."
"무식한 전투원들이 쉘터 시민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할리가요. 당신들도 저 불량품이랑 똑같아요."
"이 개자식이!"
멱살을 끌어다 한 방 치려는 걸 어떻게 알고 아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한. 여기 아파해."
기분이 식어버려서 주먹을 풀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예기치 못한 악재도 있었고 내 실책도 컸다. 처음 조우한 그리마를 총격 없이 해치웠다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 나로 인해 임무의 리더인 바트의 판단이 어긋났고 그때부터 모든 게 뒤틀렸다. 이 아이가 능력을 전개 시키지 못한 원인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그 동굴에서 나 혼자 죽었다면 최악의 결과는 없었겠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마주 하면 병기로 취급 되는 능력자 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거쳐간 능력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감정이 느껴졌다. 아이의 연갈색 눈동자와 분홍색 입술은 언제라도 예쁘게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한은 아이를 7호라고 불렀다. 내 이름도 태어난 병실 호수를 그대로 붙여서 지어졌다. 실험실이든 병실이든, 삭막한 7호는 이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7호 말고 세이스란 이름은 어때?"
"나. 세이스?"
"맘에 드니?"
"세이스. 예뻐. 헤헤."
아이는 내가 지어준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밝아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편해졌다. 힘을 내야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주저 앉아 있을 순 없다.
"바트.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 소녀가 능력자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임무를 속행 해야 한다."
예상대로 임무를 최우선시 하는 그다운 행동원리였다.
"섹터9까지 남은 거리는?"
"지도를 기준으로 30마일 정도."
남은 밴드를 꺼내서 통증이 몰리는 부위에 이어 붙였다. 세이스가 능력자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가 지켜주어야할 어린 소녀다.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5.

거짓말처럼 초소에서 섹터9 무인 플랫폼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변종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바트는 그리마종의 머릿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근방 변종들이 모두 멸종 됐을 거라 추측했다. 그들이 급속 진화한 원동력에 대해서는 의문에 붙인 채로 우리는 레일카에 몸을 실었다. 이대로 섹터9 연구시설에 도착하면 임무도 끝이난다. 긴장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후!"
저 바보 같은 외침도 한 몫 했다.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던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쓰레기네 불량품이네 떠들 때는 언제고 이한은 입이 닳도록 바트와 나를 칭찬했다. 이 동행을 구실로 뭘 얻길래 그토록 절실 했는지 내가 묻자 그는 내가 모르던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여동생이 방역층에 있어요. 변이가 중기까지 진행 되서 의체화도 불가능했죠. 손 쓸 방도가 없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담당의가 와서 제안하는 겁니다. 전뇌화 수술을 받아볼 의향이 있느냐고요. 우선 뇌부터 고치고 나면 변이된 몸도 부분적으로 의체화가 가능하다고요. 아시다시피 전뇌화는 아직 금지된 시술이었고… 저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한의 눈은 방역층을 지날 때면 흔히 보이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이들과 그 주변 사람들을 닮아 있었다. 무력감, 울분,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불온한 눈이었다. 나같은 캐리언들은 그 줄다리기를 포기한지 오래여서 섣부른 위로나 공감이 아닌 침묵을 택하는 게 나았다.
"그쪽은 왜 캐리언에서 일하시나요. 보균자라면 얼마든지 치료 가능성이 있잖아요. 능력도 있으시던데."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가벼운 말투였다. 그래서 나도 무감각하게 말했다.
"우린 다른 보균자들과 달라요. 치료가 불가능 하되 발병 시기가 무작위라서 캐리언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아…"
태도가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정상인 입장에서는 시한폭탄을 눈앞에 둔 기분이겠지.
"근데 능력이 있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아, 7호와 소통을 하시는 것 같아 보였거든요. 능력자와 소통하는 부류는 흔치 않으니까요."
내가 세이스와 친해진걸 비꼬는 의도인가. 보조원인 당신 역할을 대신 했을 뿐이라고 쏘아붙이려다 괜한 말싸움만 부를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이한과 세이스는 이내 잠들었고 나는 임무중이라는 형식은 지켜야했다. 이전 같으면 바트를 믿고 눈을 붙였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바트의 인도 하에 여기까지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상한 건 그 과정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거기서 살아나왔는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능력자가 능력을 쓰지 못하고 보조원은 무용지물에 나는 부상까지 입었다. 그는 이 모든 악조건을 알면서도 마치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아는 것처럼 방관했다. 나는 각본 위에서 춤을 춘 기분이 들었다. 각본, 각본… 느닷없이 그 단어에 기시감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꿈의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급박함의 연속이라 꿈 따위를 상기 시킬 여유가 없었다. 떠올려보면, 누군가의 기억 일부분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두 번에 걸친 꿈은 서로 연결 돼 있었고 그 안에서 목소리들은 역할을 나눠서 목적불명의 각본을 짜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실험대의 소녀. 그 아이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포. 곧 도착이다."
생각을 감춰두고 차창 밖으로 눈을 옮겼다. 레일카가 교차로를 지나 내부로 진입 하고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지하 경계선. 섹터9에 오신걸 환영 합니다.
오래된 안내음이었다. 거대한 굴착기 주변으로 대규모 주거시설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레일들이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한 때는 채굴도시라는 별명으로 번창 했었다는 섹터9도 전염병 이후로 모든 전기가 차단된 무인도시 풍경이었다. 그점에서는 여느 섹터들과 다를바 없었기에 내 시선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세이스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연구시설이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 챘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에서 자신에게 가해질 실험들이 무서운 거겠지. 세이스가 능력자고 내가 보균자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우리는 헤어져야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바트가 인식번호를 입력하자 연구시설 입구가 열렸다. 누군가 마중 나오길 바란 건 아니지만 어두컴컴한 내부가 기다릴 줄은 몰랐다. 우리가 우두커니 서있을 때 바트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계음이 울리면서 조명과 산소가 공급 됐다.
"후아, 이제 살 것 같네요."
이한은 아예 수트를 벗고 산소를 만끽했다. 세이스가 내 뒤에 숨었다. 들어가기 싫다는 눈치였다. 나는 만에 하나라도 이곳이 업무진행에 차질을 보인다면 세이스를 인계 하지 않을 작정으로 바트의 뒤를 따랐다.
안내도를 따라 D블럭까지 오는 동안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공급 되는 산소농도로 보나 F까지 할당된 블럭 규모로 보나 상당수의 인원이 거주 했던 게 분명한데도 바닥과 벽은 녹이 슬었고 천장 환풍기에서는 먼지가 쏟아졌다. 식당 냉동고에 보관된 식량들이나 정돈된 개인실과는 대조적이었다. 기이했다. 감염자 증가나 연구원들의 자살, 건강악화등으로 연구시설이 폐쇄 됐다 후에 다시 개방 되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다. 하지만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섹터9가 폐쇄 됐다는 정보는 없었다. 게다가 이 시설은 폐쇄된 모양새가 아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단체로 사라져서 제어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게 아니라면.
바트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보면 사전통지 없이 폐쇄 시킨 게 분명해."
"포, 서두르지마라. 통제실인 F블럭에 가면 관리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한이 그새를 못 참고 불평론자로 되돌아왔다.
"뭡니까. 예? 도착지인 섹터9가 왜 유령도시가 돼 있는 거냐구요."
"참는 척이라도 해봐요. 언제는 절이라도 할 기세더니."
우리가 툴툴 대는 사이 바트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때가 됐군."
"그래. 이쯤에서 하나 죽이고 시작하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팔을 밀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뭐하세요? 무기까지 빼드시고."
둘 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방금 그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요?"
분명히 들었다. 설마 나한테만 들렸나?
"포, 7호는 어디 있지?"
바트가 내게 묻고 나서야 나는 세이스가 없어졌다는걸 깨달았다.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내 손을 잡고 따라오는 줄만 알았는데. 왔던 길을 되돌아 뛰면서 미친 듯이 세이스를 불렀다. 그 목소리, 그들이 했던 말이 이 상황과 맞물린 것만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이스!"
광장 한 복판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다. 세이스는 발가벗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려하자 뒷걸음질 치면서 나를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말을 내뱉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변이 백색 배경 실험실로 바뀌고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7호. 외롭지 않나?"
천장에서 카메라가 내려와 무표정한 세이스의 얼굴을 주시한다. 수없이 렌즈를 돌린 끝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울상을 짓는 세이스의 얼굴을 포착했다.
"이제 20퍼센트 남았다. 5년만 더 참아라."
실험실 바깥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와 백색을 몰아냈다. 나는 전력으로 달려서 어둠이 오기 전에 세이스를 품에 안았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내 가슴으로 세이스의 체온이 전해졌다. 눈을 뜨면 실험실도 목소리도 없어지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는 세이스와 마주 쳤다. 나체가 아닌 수트 차림이었다. 바트와 이한이 한 발 늦게 따라와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아무래도 여긴 뭔가 이상해. 돌아가자."
"포, 이상한 건 너다. 조금 전부터 행동이 불안정하군. 다리 부상이 심해진 건 아닌가?"
때마침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과도한 밴드 부착으로 혈액순환이 더뎌진 탓이었다. 하지만 빈혈 때문이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위험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 안 좋아. 시설에 사람 하나 없잖아."
"실험구역에서 단체 일정을 소화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F블럭까지는 가봐야 알 수 있다."
"어쩔 건지 확실히들 정하세요.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들 계실 겁니까. 저는 한시가 급하단 말입니다!"
누적된 피로, 다리 통증, 환각들이 뒤엉켜서 의식을 어지럽혔다. 제정신이 남아있을 때 이곳을 떠나려고 세이스의 손을 잡아서 두 사람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런데 흐릿한 시야로 둥그런 물체가 들어왔다. 머리를 흔들어서 시야를 정리 하자 커다란 공 같은 살색 구체가 보였다. 이한과 바트도 그걸 발견하고 언쟁을 멈췄다. 그것은 바닥을 끌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충분히 가까워진 뒤에야 그 구체를 등에 이고 바닥을 기는 인간을 발견했다. 구체는 그 인간의 등이 기형적으로 부풀어오른 것이었다.
"당신들 전투원이잖아. 가서 저게 뭔지 가서 좀 보라구요."
나와 바트가 가까이 다가갔다. 이곳은 시설 내부이기도 하고 변종처럼 위협적인 형태가 아니라서 실험체 중 하나가 탈출한 것이라 보는 게 현실적인 해석이었다. 나는 안에 뭐가 들었나 궁금해서 나이프로 구체를 도려내려 했다. 그런데 겉보기와 다르게 막이 탄탄해서 날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안에서 뭐가 움직이는 것 같은 반동감이 있었다.

"으아악!"
이한이 비명을 질렀다. 광장과 이어지는 모든 통로에서 등 부풀은 인간들이 떼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라 여기고 전력으로 구체를 찔렀다. 묽은 체액이 치솟으면서 안에서 뭔가가 뚫고 나왔다. 바트가 나이프를 늘려서 그것이 도망치기 전에 제압했다. 칼날에 꿰뚫린 채 버둥 거리는 그것은 어제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던 그리마의 새끼였다.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시설 외부, 섹터9 주변 어디서도 변종이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주거지라 생각했던 그 시체탑과도 수십 마일이나 떨어진 여기서 새끼 그리마가 보이다니. 이래서는 여기가, 이곳이 놈들의 둥지 같잖아.
"이제 어떡할겁니까!"
하나둘 다른 알에서도 새끼들이 부화할 조짐이 보였다. 나는 세이스를 안아 들고 말했다.
"입구로 간다."
"F블럭으로 간다."
동시에 바트가 말했다.
"F블럭이 더 가깝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입구로 향하는 건 자살행위다."
그는 지체없이 달렸고 이한도 그의 판단을 지지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야 했다. 이런 몸 상태로 혼자서 세이스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달리는 사이 등 뒤로 부화를 끝낸 새끼들의 더듬이 소리가 들렸다. 한 발로만 달리는 탓에 금새 숨이 차올랐다. 정면에 갈림길이 나오고 바트가 오른쪽을 택할 때 그 길이 맞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세이스가 등을 두드리는걸 놓칠 뻔 했다.
"잠깐 기다려. 왼쪽이야. 왼쪽 길이 맞아."
"달리다말고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안내도에는 오른쪽으로 나와 있다."
눈으로 보기에 두 길 모두 같은 방향이었고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능력자인 세이스의 눈에는 다른 점이 보였을 것이다.
"세이스가 말했으니까 확실할 거야. 왼쪽으로 가야해."
이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보세요. 병기에 불과한 7호가 어떻게 말을 한다는 겁니까. 처음엔 그래도 캐리언이니까 무슨 능력이라도 가졌으려니 했건만, 이름까지 붙이고 혼잣말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로 남의 앞길까지 막다니 이거 완전 미친 여자였네."
"뭐? 무슨 소리야 그게. 바트, 너도 들었잖아."
"아니, 듣지 못했다."
그는 확고한 어조로 답했다. 머리속이 하얘져서 세이스를 내려놓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한을 가게 두면 안 돼."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세이스는 소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나에게 생각을 전했다.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알아서들 해요. 난 반드시 살아남을테니까."
말릴 새도 없이 이한은 오른쪽 길로 달렸다. 통로 가운데까지 들어갔을 때 천장을 뚫고 성충 그리마들이 나타나 그를 덮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한에게 달려가는 세이스를 막는 것 뿐이었다. 수십개의 날카로운 다리가 자신의 몸을 짖이기는 중간에도 이한은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면서 발버둥 쳤다.
"오빠가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왔…"
바트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이틈을 타 도망가자는 신호였다. 나는 울면서 바둥대는 세이스를 안아 들고 바트를 따라 왼쪽 길로 향했다.

6.

세이스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한에게는 여동생이 전부였다고, 죽는 순간까지도 여동생 걱정만 했다고 내게 전했다. 솔직히 나에게는 그 감정이 와닿지 않았다. 이한의 죽음은 내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를 움직이는 건 언제 어디서 변종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세이스를 지킨다는 의지만이 전부였다. F블럭에도 생존자는 없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처음부터 임무를 인계 받을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바트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메인 시스템을 조작 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 중 하나일 것임이 분명했지만 나는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몸 상태가 만신창이라서 제어실 구석에 주저앉아 세이스를 안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시스템 조작 다음 행동으로 그가 무슨 짓을 할지가 관건이었다.
시스템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제한시간 30분을 알렸다.
"뭘 한거야."
"7호는 내게 맡기고 잠시 쉬는 게 좋겠군."
그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려 했다.
"넌 알고 있었어. 여기가 변종들의 둥지라는걸 알면서 우리를 데려온 거야.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어. 그 사고, 동굴."
"피로가 쌓인 모양이군. 포. 현재로서는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다."
나는 세이스를 등 뒤에 숨기고 나이프를 내밀었다. 바트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군."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확장 버튼을 눌렀다. 칼날이 직선으로 뻗어나가 바트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바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아냈다. 칼날이 손바닥을 꿰뚫었는데도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옆에 답을 두고도 왜 나를 의심 하나." 그의 눈길을 따라가면 몸을 움츠린 세이스가 보였다. 몸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무언가를 억지로 막고 있는 듯한 고통스러운 몸짓이었다. 시선이 돌아간 틈을 놓치지 않고 바트가 달려왔다. 나는 대처할 수가 없었다. "아악!" 그의 발이 내 무릎을 내리찍었다. 바트는 허물어진 내 몸을 밟고 힘을 가했다. 내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세이스에게 뭔가를 요구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의도대로 비명을 내뱉어야 했다. 턱 밑까지 올라온 바트의 발이 목뼈를 짓누를 즈음에는 호흡도 시야도 멀어졌다. 어느 순간 바트가 충격을 받고 날아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를 구해준 건 세이스였다. 작기만 하던 팔이 내 몸 보다도 더 크게 팽창해 있었다. 역시 넌 능력자였구나… 안타까움이 앞섰다. 몸을 끌어서 세이스에게 다가갔다. 능력을 쓴 탓인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오히려 공격을 받은 쪽이 먼저 일어났다. 인간의 몸으로 그런 괴력을 견뎌낸 이유가 바트의 몸에 드러나 있었다. 벗겨진 살갗 안으로 기계로 된 몸체, 전신의체가 보였다.
"30여년에 걸친 노고가 결실을 맺는 역사적인 현장이로군."
목소리였다. 지금껏 나를 괴롭히던 원인 모를 환각 속 목소리가 바트의 입에서 나왔다.
"너, 너는…"
"그렇게 많은 힌트를 심어뒀는데, 설마 그게 다 꿈이라고 생각했나? 아직도 능력이 완전 개방 되지 않았다니. 역시 중간세대는 불완전하군.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야."
무슨 의미인지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 그가 이 임무를 계획 했다는 것 말고는. 바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기절한 세이스와 시스템 타이머를 번갈아 확인했다.
"이미 실험은 성공 했으니 남은 시간동안 네 반응정보나 수집 해야겠군. 우리는 쉘터에서 구원자라고 불리는 과학자들이다. 본래 세 명의 인격을 하나의 전뇌로 합쳐서 이 바트라는 캐리언의 뇌를 대체했지. 이 실험에 필요한 정보만을 탑재한 복사본이지만."
"실험? 이게 다 실험이라고?"
"아직도 모르겠나. 왜 보균자인 네가 25살이 되도록 발병이 오지 않았을까. 왜 특급 캐리언인 바트가 너같은 햇병아리의 파트너로 배속 되었을까. 왜 너를 자기 분신처럼 지켜왔을까. 7이란 숫자와 같은 세이스라는 동의어를 7호의 이름으로 붙인 까닭은? 그것은 4호, 네가 만들어진 실험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를 실험에 적합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키워냈다."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가치들이 의문으로 돌아섰다.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해도,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뭘 위해서?"
그는 미소 지었다. 시체탑 위에서 내게 보였던 바트의 표정과 똑같았다.
"희생을 위해서다."
"희생?"
"모든 세포는 분열한다. 진화를 위해, 보다 나은 종을 탄생 시키기 위해 끝없이 분열하고 뛰어난 개체를 위해 세포자살을 택한다. 7호는 전 인류 중 가장 진보한 세포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들을 희생 시켜서 만들어낸 최고의 돌연변이다. 저 작은 아이의 몸 안에는 방금 전 공격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가공할 능력이 감춰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돌연변이가 가진 의외성이었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변이 시키는 물리능력 말고도 종을 초월해서 상대의 사고를 읽는 초감각이란 방패를 뚫을 수가 없었지.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어떤 실험도 모조리 간파 당하고 거부 당했다. 우리는 고심해야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사용 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었으니까."
내가 보고 들었던 파편들이 조금씩 본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처럼, 또는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비의도적으로 7호의 심층자아를 자극 한다면 7호 자신의 의지로 증오와 분노를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그 감정의 화살을 변종에게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이 고전적인 연극을 위해서 우리는 7호에 준하는 공감능력자가 필요했다. 7호를 이해 하고, 보호 하고, 희생 하면서 스스로 먹이가 되어줄 자살세포가 필요했지. 감성적으로 우월한 여성, 사회성에 굶주릴만한 고독한 환경, 그리고 유전적으로 7호와 감응 할 수 있는 유사세포. 그 연결책으로 고른 것이 이 바트라는 이름의 숙주인 셈이다. 너희들의 초감각에서 자유로운 전자두뇌여야만 했다.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준비기간과 비효율적인 예산이 소요됐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무너져 내린다. 꿈이나 환각 같은 게 아니었다. 매일 밤 실험실에서 울부 짖었던 과거들은 온전한 내 모습이었다.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캐리언으로 살아왔던 나날도 다르지 않았다.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면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해왔다. 그것은 죽은 삶이었다. 애초부터 나에게 자유의지는 없었다.  
"얼이 나간 표정이군. 한 가지 위안거리를 주자면 너는 유전적으로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어졌다. 우리가 심어둔 행동강령에 의거해 살아가는 건 쉘터의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전염병을 피해 자신의 신체를 철과 트렌지스터로 바꿀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순간적으로 증오가 치솟았지만 그만큼의 절망감이 내리눌렀다. 나는 무력 했다.
"시간이 됐군."
구원자는 나와 세이스를 들쳐 매고 제어실을 나섰다. 제한시간은 시설의 모든 전기를 차단하는 명령이었다. 그는 눈에서 불빛을 발해 시야를 밝히면서 어딘가로 향했다. 이동하는 도중에는 이한의 시체도 보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한은 무슨 이유로 고른 거지.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죽음에 무감각한 4호 너라면 그렇게 받아들일만 하지만 7호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자아에게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이었다."
"……"

구원자의 목적지는 지하시설이었다. 어둠 속을 밝히자 주변 전체가 점액질로 도배 돼 있었다. 언제부터 섹터9 내부가 둥지화 된 것인지 가늠 할 수 없었다. 중심부에 다다르자 새끼 그리마와 성충들이 대규모로 군집해 있었다. 가장 안 쪽에는 작은 빛으로는 전부 밝힐 수 없는 크기의 거대종이 도사리고 있었다.
"보아라. 저것이 변종들이 일궈낸 진화의 결정체다. 종족 전체의 성장과 탄생, 교배를 관장 하는 경이로운 존재지. 저것을 없애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없다."
거대변종의 지배에 따라 그리마들이 우리를 포위 했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변종의 모습이 아닌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나는 플래시와 함께 변종들 한 가운데로 던져졌다. 구원자는 세이스를 흔들어 깨워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긴 여정 수고했다. 이제 마음 놓고 7호를 양산 할 수 있겠군. 하하하!"
이윽고 변종들에게 짓밟히는 쇳소리가 들렸다. 세이스가 눈을 뜨고 일어나자 모든 변종들이 그 아이를 의식했다. 보이지 않아도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선했다. 머릿속으로 세이스의 심리가 흘러 들어왔다.
포가 위험해! 쟤네들한테서 뺏어야 해. 쟤들은 안 나빠. 나랑 똑같아. 어쩌지, 어떡하지…
어째서인지 변종들은 세이스를 공격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배터리가 고갈돼 빛이 사라져가는 내 주위로 몰려 들었다. 빛에서 떨어진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가는게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삼켜도 세이스는 내 생각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느라 불안과 고뇌로 가득하던 세이스의 감정은 이내 울음으로, 울부짖음으로 변해갔다. 자신의 몸을 변이 시키고 있었다. 괴성과 비명, 터지고 잘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세이스는 자신에게 짓밟히고 부서지는 변종들에게 증오가 아닌 애처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이스는 알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는 변종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본능에는 결코 악의가 없음을.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되뇌이는 그 아이의 외로움이 사무치도록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저 아이를 멈춰야 한다. 이 지옥에서 구해내야 한다. 나를 지나쳐버리기 전에 희미한 빛으로 들어온 커다란 다리를 붙잡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진심을 전했다.
아팠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나쁘지 않아. 너를 알게 되고, 지키겠다는 마음을 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존재 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었지. 네가 누구고 무엇이든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 이제… 쉬어도 돼. 내 품에서 편히 쉬렴. 영원히.
고요했다. 눈을 뜨면 마지막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내 품에서 울고 있는 세이스와 우리에게 안식을 내려줄 동족들이 보였다. 나는 팔을 벌려 세이스를 감싸 안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내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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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슬 13.08.15 23:12 댓글 수정 삭제

    Apoptosis... 말문이 막힙니다...

  • No Profile
    sheila67 13.08.25 02:55 댓글 수정 삭제

    빈테르만님의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작품의 소재 발굴 및 활용에 아주 뛰어나신것 같습니다. 

    결국은 바트가 아닌 포가 자살세포의 역할인데, 그 부분의 당위성 내지는 

    실험실에서 포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지않나 싶습니다.(저의 개인 생각...)

    그래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 No Profile
    글쓴이 빈테르만 13.08.25 20:49 댓글

    티슬 // 주제 넘은 소재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sheila67 // 과분한 호평과 관심 정말 감사드립니다. 연출과 설명의 접점을 찾고 싶은데 매번 뜻대로 안 되서 결과물 마다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아요. 더 심도 깊은 고민과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 합니다.

  • No Profile
    티슬 13.08.26 16:18 댓글

    댓글은 찬탄의 의미였습니다. ^^

     

    생뚱스런 질문이지만 제목에 '포'는 for인가요, four인가요?

  • 티슬님께
    No Profile
    글쓴이 빈테르만 13.08.27 00:53 댓글

    중의적 의미로 피실험자의 for와 실험자의 four로 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망한 것 같습니다(...)

  • 빈테르만님께
    No Profile
    티슬 13.08.27 16:33 댓글 수정 삭제

    하하하... 저는 알아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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