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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나 늑대인간 맞아요

2003.08.12 14:3908.12


  권현수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았다. 그의 아내 이미현은 옥상에서 세탁물을 널고 있었다. 아마 평소보다 좀 더 오랜 시간을 들일 것이다. 그들은 다정하고 의좋은 부부였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지우가 있었다.  지우는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침울해 하고 있었다. 부부는 의논 끝에 아버지인 권현수가 상담을  해보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서 노크를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라는 것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기 위해 부인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지우는 거실의 창가 쇼파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권현수는  아들 옆에 다정하게 가서 앉았다. 서울의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 밤하늘에 흐릿하게나마 보름달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들아, 요새 말이 없구나."

  권현수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해야해, 라고 몇 번씩이나 되뇌이며 말을 붙였다. 아들은 여전히 손을 턱에 괴고 하늘만 보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침착, 침착해야해, 다그치는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권현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빠."

  아들이  시선은 하늘에 둔채 권현수를 불렀다.  아들의 목소리 역시 무심함을 가장하려 했으나 권현수의 연륜이 아들 역시 긴장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나도 저런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른 적이 있었지. 권현수는 아들이 자신에게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질문을 하려 하고, 자신이 그런 아들의 근사하고 멋진 조언자가 되었음이 기뻤다.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실수하지 않으리라, 멋진 대답을 들려주리라.

  "아빠."

  아들이 다시 불렀다.  그제야 권현수는 혼자 생각에 골몰해  아들의 말에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왜 그러느냐, 아들아."

  권현수는 자신의 음성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나는 너의 어떤 이야기 든지 다 들어줄 수 있으며 네가 원하는 길을 찾아줄 수 있단다, 라는 믿음을 아들에게 심어줄 수 있길 소망하며 말했다.

  "아빠, 나 늑대 인간 맞아?"

  권현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넌 분명한 늑대인간 이란다."
  "그런데 왜 난 늑대로 안 변해? 분명히 보름달이 떴잖아!"

  지우의 목소리는 이제 변성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굵직해지는 아들의 목소리가 그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지우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는 하늘을, 정확히 달을 쳐다보던 시선을 아버지에게로 돌리며 눈을 치켜뜨고 반항적인 태도로 물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때는 무슨 때? 아빠도 늑대로 안변하잖아! 엄마도 안변하잖아!"
  "얘야, 그건…."
  "어릴 때는 분명히 두 사람 다 늑대로 변했었어! 난 분명히 봤다고! 내가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나도 13살이 넘으면 늑대로 변할 거랬잖아! 벌써 16살인데 왜 난 늑대로 안변해? 아빠!  나 늑대 인간 맞아? 난 주워온 애인거야?"

  아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권현수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아들의 오해를 빨리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얘야, 그 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혹시 기억나니?"
  "무슨 날?"
  "엄마랑 아빠가 늑대가 되었을 때 말이다."

  아들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면 콧잔등에 주름이 생기는 건 그의 아내 이미현과 똑같았다.

  "그 날이 무슨 날이었는데?"
  "그 날은 추석이었단다."
  "……."
  "……."

그는 흥분하고 있는 아들을 앞에 두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지우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지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들아,  우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름달이 뜬다고 늑대로 변하는 게 아니란다."
  "그럼 언제 변해?"
  "강강술래를 해야 변한단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해주는 아버지!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하지만 아들은 이젠 화낼 기력도 없는 듯 멀거니 권현수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들은 뛰어 일어날 듯 화를 냈다.  그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했다.  자신은 단지 저 말로도 모든 것을 알았던 것 같은데…. 아니, 벌써 실망하기엔 이르다.  아들은 자신과는 다르니까. 자신이 어릴 때와 지금은 또 다르니까….  그는 자신이 혹시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을까 급히 얼굴에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강강술래를 하면  우린 그 기를 받아서  늑대로 변하는 거란다. 요즘 사람들은 강강술래를 별로 안하지. 추석 때나 되어야 그나마 텔레비전에서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니? 옛날엔 꼭 추석이 아니라도 종종 처녀들이 강강술래를 하며 놀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걸 봐야만 우린 늑대로 변한단다."

  그는 아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럼 난…."
  "넌 추석 때마다 친구들이랑 놀러나가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니.  그런 명절 프로그램은 시시하다고 말이다."
  "그럼 아빠랑 엄만?"

  아들이 설마하는 태도로 물었다. 권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강강술래를 봤단다."

  아들은 말이 없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저 하늘의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구나."
  "그건 이 상황이랑 너무 안맞잖아!"

  아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권현수는 여유있는 태도로 일어섰다. 이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때다. 이제는 혼자서 생각을 해봐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안방으로 돌아오자 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살그머니  들어와 있던 이미현이 다정하게 그를 품에 안았다. 이미현의 어깨에  기대자 그는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장성한 아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많이 긴장했었던가 보다.


  다음 해 추석이었다.

  "서둘러라, 양치질 잘하고, 이빨 잘 갈고."
  "에으!"

  화장실 안에서 지우의 불분명한 대답이 들렸다. 권현수는 아들을 기다리며 손톱을 공들여 다듬었다.

  "아빠, 엄마는?"

  아들이 팬티만 입고 나오며 물었다.

  "엄마는 네 방에서 네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다. 일단 넌 처음이니까 나랑 같이, 아니, 손톱을 안다듬었지 않니?"
  "아, 손톱손톱!"

  아들은 허둥지둥 손톱깎기를 찾아서 손톱을 깎았다.

  "아니아니, 짧게 깍지 말고 뾰족하게 다듬어야지!"

  권현수는 옷을 벗다가 손톱을 깎는 아들을 보고 나무랐다.

  "늑대로 변하면서 자동으로 길어지는 거 아냐?"
  "그래도 미리 다듬어두는 게 좋아. 양치질도 깨끗이 했지? 줄톱으로 이빨도 잘 갈았고?"
  "응응!"

  아들은 대답하며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어넘겼다.

  "머리는 중요하지 않다니까, 자, 팬티도 벗거라."
  "하, 하지만, 아빠, 꼭 다 벗어야해?"

  아들이 벗은 상체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지우는 이제 팔도 단단해지고 제법 근육도 생겨 있었다.

  "속옷 찢어지면 엄마가 가만 안둘거다."

  그는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아들에게 엄하게 말했다. 아들의 첫 변신을 지켜보는 아버지. 그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문도 열고. 나갈 때 살살 나가라, 창틀 나가면 돈 든다."
  "응!"

  아들은 창문을 열고  엉거주춤 속옷을 벗은 후 잽싸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더니 텔레비전을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부끄러워 하기는.  권현수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아직 시작 안했지?"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곧 할거다."

  텔레비전에는 추석이면 으례히 그렇듯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민속놀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미현은 마지막으로 물이 한 잔 마시고 싶어서 거실에 나왔다가 안방 문 밖에서 들린 부자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  그러고보니 우리 반에 시골에서 전학온 애가 있는데,  걔가 있던 마을에선 아직도 추석 땐 강강술래를 한대. 근데 그 때마다 꼭  닭이 한두마리씩 없어진다고 하더라."
  "헛헛- 역시, 시골 인심이 좋지-"

  이미현은 잘 다듬어져 날카로운 손톱을 내려다보고 소리없이 웃으며 아들의 방으로 갔다.



  1년에 한 번, 추석이면 그들은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텔레비전 앞에서 강강술래를 본다. 권현수는 자신이 늑대인간임에,  그래서 추석이면 가족이 함께 모인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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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를 제공해주신 맥향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진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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