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커스터머

2016.02.10 05:4002.10

커스터머

-아, 드미트리. 난 행복하지만 두려워요. 부디 이 꿈이 계속되길.

-진심이오?

-물론이죠. 고민했지만... 당신과 여기까지 오니 더욱 분명해졌어요. 지금 돌아갈 순 없다는 것...

그럼 이제 굳히기로.

-그럼 이제 가슴이 시키는 대로. (Then we follow our hearts.)

-드미트리.


이 여자는 너무 많이 읽은, 말하자면 보바리형이다. 사실은 읽은 양보다는 취향이 더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어쨌건 맞춰주면 된다. 프록코트를 떨쳐내듯 가볍게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함께 올라있던 말에 박차를 가했다. 지주의 막내딸과 프로방스로 도주한다. 파리 시가지를 벗어나려면 적어도 앞으로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근사한 이야기로 시간을 때울 것인가. 지금은 가을이라기엔 좀 이른 9월의 온화한 밤. 두툼한 양모코트가 마상馬上의 그녀를 잠으로 덮어버리길 바라며 나는 한 손으로 조끼 주머니 안의 담뱃대를 만지작거렸다.


* * *


이 시대 여행자의 미덕은 간단하다. 부지런히 갈 것. 일정을 늦게 잡아 야간 마차라도 타게 된다면 해진 뒤 노상강도를 만나기 전에 더욱 부지런히 갈 것. 그리고 위험수당을 요구하는 마부를 위해 충분한 요금을 준비할 것. 허나 털리게 된다면 무용지물이니 여행자수표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미리 신용을 갖출 것. 다만 급할 때는 그저 목적지까지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바라야 한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었다면, 그 분노가 두려워서라도 이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여자와 필마匹馬에 올라 야반도주를 기도할 수 없었으리라. 여기서 결정적 죄목은 나는 그녀가 믿고 있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내 직업인 것이다.


나는 그들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무의식적인 욕망을 끄집어내주는 역할을 한다. 현실 속에서 욕망은 꿈으로, 환상의 형태로 잠복해있다. 나는 부녀자들의 필사적인 연인으로서, 때론 악마 같은 정부情夫로서, 자금사정이 좋을 땐 지금처럼 이국의 야심가이자 부호인 드미트리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로서의 연출로, 그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물이 어떤 세기의 그림을 채워넣을 수 있을 때까지, 야반도주로, 반역과 작당의 밀실로, 사다리가 드리워진 창가로 그들을 계속 끌어주는 것이다. 세기의 그림. 따라서 분장, 가명, 조작된 편지, 거짓 친분, 비밀스런 음모 등은 공작에 필수적이다. 옛날로 치자면 극작가의 용역과 비슷할 것이다. 다만 이 작업에는 상황에 맞춰 즉흥적으로 각본을 계속 바꿔 나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간밤에 꽤 잃으셨다고요.

-액땜한 겁니다. 우리 여정을 위해.

-‘액땜’이라니요?

-일전에 열기구 비행을 다녀왔다고 말씀드렸지요. 구름 위에서 사내들과 한 판 벌리고 있는데, 그 때 동승한 동방상인에게 어젯밤의 딱 절반, 100 루이를 잃었습니다. 싱글벙글하면서 기구가 영국해협까지 잘 닿도록 미리 ‘액땜’했다 생각하라더군요. 액운을 땜질한 것이라나... 독특한 표현이죠? 

-신앙이 없는 원숭이 같은 자들이군요.


그러나 이 여식 역시 끝내 환상이 깨지면 자신의 불경함에 경악하며 모두 내려놓고는... 어딘가의 수도원을 찾게 될 것이다. 사실 절제는 거기에서 다시 천천히 배워도 늦지 않다. 그때까진 얼마든지 세헤라자데가 되어주지. 직업병인지도? 가끔은 역할 놀음에 너무 빠진 나머지, 내 진짜 자신이 눈을 감아버릴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소기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가 원했던 바대로, 프로방스까지 데려가야 한다.


이제 이 포장된 대로 경계 너머 숲이 시작되면, 파리 시가지를 벗어난다. 잠들었는지 그녀는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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