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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청새치

2015.05.12 23:3305.12

바람이 꽃잎처럼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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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은 말을 끊었다. 바위 밑에서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켰다. 밀려갔다가 돌아오고, 밀려갔다가 돌아오고. 늘 첫 행을 읊을 때면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미친 사람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탁한 청록색이 흔들거렸다. 바다를 보노라면 학교의 커튼이 생각나곤 했다. 얼추 비슷한 두 가지의 청자 빛깔. 대신 바닷물과 같은 깊이가 커튼에게는 없었다.

 

 

해질녘도 지나고

어린 밤만 손바닥으로 저문 산을 쓸어낼 때면

오늘의 밤은 묵직한 온기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다.

어느 산에는 알싸한 생강 꽃이 피고

꽃처럼 어린 소년과 소녀와

집집마다 들어앉은 봄들이 있다는데.”

 

 

슬은 고등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는 늦게까지 학교 건물의 가장 어두운 귀퉁이에 처박혀 있다가 나오곤 했다. 누군가는 서늘하다 하겠지만 혼자 걸어가는 빈 복도는 나름 매력적이었다.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일탈적인 그 느낌.

 

꼭 방과 후에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딱 해가 지고 난 직후가 최고긴 했지만. 저녁때는 고개만 돌리면 교실들의 속살이 하얗게 눈에 들어왔다. 학생이 없는 반, 어지럽게 쌓인 책들과 인쇄용지처럼 번쩍이는 형광등. 잘은 몰라도 정말로 흰 종이와 대어 놓고 보면 복사지처럼 약간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을 것 같았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번지고

창에선 부르듯이, 부르는 듯이

먼 바다와 골짜기의 냄새

서글픈 듯이 차가운 달

외따로 흔들리던 벚나무와

그만큼 흐드러지던 비구름의 이야기를

알지는 못하지만.”

 

깊은 물속에서 시꺼먼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슬은 눅진하니 짠 공기를 들이켰다.

 

다시금 바람은 흙냄새와 함께 돌아온다.”

 

그림자가 무지갯빛을 띠기 시작했다. 위는 사람의 머리, 아래는 물고기의 꼬리. 슬은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줍은 동백 동백꽃에

취하고 싶을 만큼 취하게 하려는지.”

 

 

물이 튀면서 바다 속에서 여자가 고개를 들고 올라왔다. 앞머리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낭송만 더 제대로 해 주면 좋겠어.”

꼭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해?”

 

슬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그새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숨어서 녹음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자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쥐어짰다.

 

 

충분히 오랫동안 부르지 않으면 안 들려.”

그래도.” 

싫으면 안 올게."

아냐, 계속 하면 되지.”

 

여자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슬이 손을 잡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여자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를 확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 위로 떨어지면서 슬은 여자의 머리 위에 있는 작은 꽃봉오리를 보았다.

 

여자의 이름은 해화였다. 바다 해, 꽃 화. 실은 정말 그런 한자 의미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슬이 어설프게 대충 붙여 본 설명이었다. 해화 본인은 자기 이름이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인간에게 알려진 최초의 인어는 바닷가에서 한 번 그물에 걸렸던 여자였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 하는 행동이 사람과 같아 어부들이 더불어 웃고 즐기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인어에 대한 언급이 서양 동화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있다는 걸 슬은 뒤늦게 알았다. 관련 내용이 있는 한국의 고서적은 어우야담이라고 했던가 했다. 물론 일본의 인어는 머리만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인어와는 다른 편이었다. 인어 고기를 먹으면 불로불사한다, 인어 기름이 따듯하다, 추가적인 말이 많고도 많았지만 슬은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우야담 얘기에 따르면 눈동자는 노랗고, 등에는 옅은 문양이 있고, 눈물은 희다고 했다. 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눈물이 과연 흰지는 몰라도 다른 건 맞는 얘기였다. 바다에 떠다니던 흰 티셔츠를 입고 다녀서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본인 스스로 등에 무슨 무늬가 있기는 있다고도 했고. 다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머리 위에 있는 기묘한 꽃봉오리였다.

 

 

인어는 식물이야?”

무슨 소리야?" 

머리 위에 있는 꽃 때문에 궁금해서." 

, 이거.”

 

 

일전에 한 번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해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으로 정수리를 덮었다. 붉은 봉오리가 가려졌다.

 

 

인어가 죽으면 머리 위에서 꽃이 피어. 죽은 인어는 바닥으로 가라앉고 꽃은 인어 전체를 삼켜 버리지.”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꽃은 아직 바다에서 발견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모든 바다에 다 가 본 건 아니잖아?”

 

 

그러면서 해화는 웃었다. 그 날 그들은 인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어들이 죽으러 가는 특정한 장소가 있다고 해화는 설명했다. 사람을 거기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도 했다. 물고기들조차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인어들만의 비밀 장소니까.

 

꽃망울은 평소엔 머리카락에 숨겨져 있다가 가끔씩만 언뜻 언뜻 모습을 비췄다. 붉은 벚꽃 같은 모양새였다. 터지기 딱 직전인.

 

슬은 물에 얼굴부터 떨어졌다. 아팠다. 물거품이 일면서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손이 그의 입에 닿았다. 해화의 목소리가 났다.

 

 

빨리 삼켜.”

 

 

슬은 들어오는 작은 알약 같은 것을 그대로 삼켰다. 목구멍이 아팠다. 거품이 사라지자 그는 물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해화가 눈앞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슬은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일부 별주부전의 변형 판에는 자라가 토끼에게 준 알약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해화는 그에게 늘 주는 동그란 것이 바로 그 알약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아무리 들어도 언제나 물에서 숨을 쉰다는 건 낯설게 느껴졌다.

 

슬의 눈앞에서는 해화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풀처럼. 슬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로 갈래?”

 

 

해화가 물었다.

 

 

아무 데나.”

 

 

해화는 슬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꼬리가 물장구를 쳤다.

 

 

진짜로 아무 데나 간다, 이의 제기 없기!”

 

 

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해화를 처음으로 본 건 반 년 전이었다. 뭍에서 슬은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의 성은 이 씨였고, 그 탓에 초등학교 때는 이름 자체로 놀림을 받는 일이 일상이었다. 대부분 그를 여자 취급하는 놀림이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초등학교 삼학년쯤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오학년생들이 그를 여자 화장실에 밀어 넣고 나오지 못하게 한 일. 당황한 그는 그냥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아예 문을 잠그고 있었고 그가 나오지 않자 밖에 있던 아이들은 선생님을 불렀다. 끌려 나오는 중에 거의 전교생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건 물론이었다.

 

그 날부터였을 것이었다. 대체 무슨 돈으로 구해 오는 건지 가끔 아이들은 그의 옷을 빼앗고 성인 여자 옷을 대신 입혔다. 혼자서는 도저히 대여섯 명씩 되는 상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구경꾼들은 옷을 입히는 과정, 더하여 달걀이나 밀가루를 끼얹는 것까지 휴대폰으로 찍었고 반죽이 된 그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아이들의 세계에는 애초에 브레이크라는 게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입장에서 극한 방향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았다. 슬이 겪은 모든 일이 어른들에게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들 걸리면 문제가 되리란 걸 알았던 것은 물론이요 슬 본인도 남들에게 말할 엄두를 내지 않아서였다. 주된 이유는 수치심이었다. 남들에게 자기가 그런 꼴을 당한다는 걸 정말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놀이가 끝나고 나면 그를 낡은 동네의 수돗가로 끌고 가, 슬이 손으로 물을 받아 씻고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을 일일이 감시했다. 제대로 증거 인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보내 주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에 저들이 물을 바가지 째 끼얹는 경우도 있었다.

 

 

무슨 생각 해?”

, 그냥. 바다가 예쁘구나 하는 거?”

 

 

슬은 대충 둘러댔다. 해화에게 자기 과거 얘기를 구구절절 풀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그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었다. 해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하고 비슷하잖아.”

매일 봐도 그래.”

역시 시인은 다른가?”

 

 

슬은 그냥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해화는 때때로 바다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퍽이나 아름다운 곡조였다.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 얘기를 했을 때 해화는 그냥 시나 하나 답례로 지어 달라고 했다. 슬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서러움을 꽃으로 틔워 낼 시간이다.

아침이 오고 새가 울면 밤은

새벽녘 홀씨가 되어 가슴에 내려앉고.”

 

혜화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슬은 계속 말했다.

 

가지가 하나가 되는 두 그루의

다른 나무에 대해 나는 들었다.

오솔길에 숨은 나뭇가지들을 집어든다.

부옇게 햇빛이 내리쬔다.

부딪혔을 때 남는 것은

탁 소리 하나.

꽃을 틔울 시간이다.

흘러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고

쌀쌀한 볕은 사람을 슬프게 하지만

지금은 바람 없는 창가에 앉아

바람구멍에 묻은 씨앗이

자라나기를 기다릴 때.”

 

슬이 도로 입을 다물었을 때 해화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었다.

 

네가 시를 짓는 한 나는 네가 날 버리지 않을 거란 걸 알아.”

 

슬은 눈을 깜박였다. 바다는 황량했다. 근해 바다가 대개 그렇다고 했다. 좀 더 멀리 가야 물고기가 떼 지어 이동하는 것과 바닥에 가득한 말미잘이니 해초니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물살을 가르고 앞서 가던 해화가 수면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슬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수면의 햇빛은 깨진 그릇 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해화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건 순전히 우연 덕이었다. 슬은 그 날을, 어째서인지 유난히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일요일로 기억했다. 바다로 걸어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우울했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남아 있는 기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확실한 건 그가, 자신이 짠물 속에서도 눈을 똑바로 뜰 수 있다는 걸 알기 전의 일이라는 거였다. 일반인보다 수압을 더 잘 견딜 수 있다는 것도, 저체온증에 쉽게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는 것도 그가 몰랐던 정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뭍으로 나왔다가 다시 바다를 선택한 고래. 생활에서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기에 고래는 바다로 돌아갔을까. 사람도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슬이 돌고래의 노래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물은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가슴 위로 순식간에 차올랐다. 바다는 검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목을 쳤다. 일렁이는 물결에 팔다리는 뿌리를 잃은 해초들처럼 흔들거렸다.

 

한 발만 더 가면 물에 정수리까지 잠길 것 같았다. 슬은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무언가 물컹한 것이 밟혔다. 슬이 발을 채 치우기도 전에 물속에서 머리카락 뭉텅이가 올라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앞에는 여자의 머리가 나타나 있었다. 여자의 노란 눈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발목을 휘감는 느낌이 나더니 사람 머리가 도로 물속으로 사라졌다. 슬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모래톱으로 직진했다. 수영이라도 했다가 밑에서 끌어내릴까 봐 할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수중 달리기를 해 가면서.

 

밖으로 나온 뒤에 바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해 보려고 했다. 사람 머리. 시체는 아닐 거였다. 최소한 뉴스에 나온 게 없었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물귀신이 아니고서야.

 

등줄기를 따라 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슬은 그 날 이후로 한동안 바다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에서 떨어져 지낸다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좀 더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슬은 결국 바다를 다시 찾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머리가 물가로 굴러 나오는 꼴까지 보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하고 위안을 삼으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다. 자기가 미친 게 아니라는 걸, 혹은 자기가 정말로 헛것을 봤다는 걸. 뭐가 뭔지도 모르고 기억 속의 귀신에게 시달리면서는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방파제를 찾아갔다. 파도는 희게 부서졌다가 밀려 나가며 또다시 덤벼들 준비를 했다. 몇 번이고. 보았던 여자 머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슬은 용기를 내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나타나는 게 없었다. 그는 기다리다가 앉아서 제가 만들어 본 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낯이 노랗게 뜬 달이 떴다.

 

새하얀 별은 밤하늘에 박혀 있다.

흑백의 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조각달은

차라리 삵의 눈

가지에 잘린 모양새가

눈길을 돌리게 한다.

구석진 곳에서 그림자가 분다.

먹이를 찾아 종종거리던 까투리를

생각한다, 어느 아침에

가을처럼 짙은 볕을 받으며

헤메이던 산꿩들을

바람에 쓸려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든다.

달은 지고 있다.

밤도 같이 기울어진다.”

 

슬이, 누군가 물에 하반신을 담근 채 팔을 포개고는 자신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그 때였다.

 

그거 괜찮은데? 더 있어?”

 

그게 해화였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노란 눈의, 다소 이국적인 느낌의 여자.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 머리의 정체가 해화였음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땐 왜 그랬어?”

 

슬이 문득 물었다. 그들은 바다 위에 나란히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귀까지 물이 들어차도 은근히 목소리가 들리긴 한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해화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언제?”

처음 봤을 때 갑자기 튀어나왔잖아.”

 

해화가 코웃음을 쳤다.

 

웬 사람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기에 멈춰 보겠다고 그랬지, .”

이젠 오히려 물속에 오는 걸 도와주고 있으면서.”

지금은 내가 보호자인 셈이니까.”

그런가.”

 

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시야 가득 보이는 하늘이 새파랬다. 거품기로 구름과 하늘을 섞어 버린 듯이 살짝 희기는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중에 몸은 끊임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귀에서 잘그락거리는 바닷물 소리가 잔잔했다. 뜨듯한 햇빛이 닿은 이마에 바닷물이 부딪힐 때마다 슬은 눈가를 움찔했다. 거의 여름이었다. 바람이 이따금씩 불다가 그쳤다.

 

 

그러면 다른 질문 더 해도 돼?”

해 봐.”

내 시가 왜 좋은 거야?”

 

풍덩 소리가 났다. 슬은 자세를 바꿔 물 위에 머리만 내밀었다. 해화는 이미 배영을 그만둔 채 그를 향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네 시가 어때서? 내 취향 무시해?”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망망대해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을 잘못 건드린다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슬은 단어 선택에 집중했다.

 

그런 뜻이 아냐, 그 전까지 내 시 갖고 그런 얘기 해 준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지.”

그냥 내 취향이야.”

 

해화는 그러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슬은 대답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물거품이 일더니 곧 시야가 트였다. 멀리, 흐릿하게, 무리지어 이동하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보였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해화의 비늘은 물속에서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느리고 크게 움직이는 꼬리지느러미는 열대어보다는 돌고래의 것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해화는 과연 그가 바다에 대해 품은 동경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슬은 그런 걸 바라는 건 무리일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해화는 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애초에 관계라는 건 퍼즐 조각 같은 거였다. 닮은, 하지만 다른. 아귀가 맞는 사람이 꼭 자신과 똑같은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서로를 이해해 줄 수만 있다면 되는 거였다.

 

슬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새삼스레 두려웠다.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바다에 있을 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인어로 정말 변하게 된다고 해도 또다시 그는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든 불행해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슬의 슬 자는 한자어였지만, 실제로는 구슬이라는 단어에서 따 온 글자였다. 그의 태몽은 바닷가에서 크고 파란 옥구슬을 줍는 거였다고 했다. 여의주 같은 것을 상상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모든 사람의 태몽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차라리 일찍 알았더라면 나았을까.

 

해화는 주택과 가까운 해변에 그를 두고 떠났다. 슬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슬은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가족들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에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뉴스에서는 며칠 후면 장마가 시작될 거라고 했다.

 

.”

?”

인어의 기원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아?”

잠깐만. 갑자기 역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솜털 같은 홀씨가 한바탕 흩날리고 난 뒤였다. 날이 미치도록 더웠다. 슬은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바다에 서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의 해화를 보고 있었다. 옷자락을 스치는 파도가 찼다.

 

비가 오게 되면 이제 이런 이야기도 못 하게 될 걸.”

장마 끝나고 오면 되지.”

그 때 과연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말문이 막혔다. 해화는 가만히 있는 슬에게 헤엄쳐 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그렇게만 보면 사람인 것 같았다. 해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를 하나 말해 줘. 더 깊은 곳으로 데려다 줄게.”

준비한 게 없어.”

 

그리고. 슬은 속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갈 건데?”

겨울이 되면 떠날 거야.”

어디로?”

 

해화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슬은 물속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예 더 이상 바다 속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어디로?”

우리도 이제 떠날 때가 됐어.”

 

해화가 중얼거렸다. 슬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가자, 가서 말해 줄게. 시는 없어도 좋아.”

그러면서 해화는 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슬은 그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과연 가도 될까. 가는 게 맞는 걸까. 망망대해로 나가면 결국 해화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슬에겐 거부권이 없게 될 거였다. 바다는 인어의 세상이니까. 그 인어들이 사람보다 우위에 있게 되니까. 물론 해화가 그런 식으로 그를 곯려 줄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손이 물속으로 내려가려 했다. 슬은 재빨리 해화를 잡았다.

 

갈게.”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물이 유난히 탁했다. 해화는 멀리 가지 않아 수면으로 나왔다. 여전히 바닷가의 모습이 보이는 곳이었다. 슬은 귀에서 물을 빼면서 해화의 말을 들었다.

 

인어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하는 얘기가 있어. 사람의 아기가 죽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대. 다시 인어로 태어나서 지내다가 돌아오든가, 아니면 바로 천국에 들어가든가. 그리고 이 세상을 좀 더 구경하고 싶은 아이들은 인어가 된다는 거야.”

나도 지금 죽으면 인어로 태어날 수 있는 건가?”

너는 이미 아기가 아니잖아?”

 

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떠나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이어진다는 건지. 그렇게 잡으려고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이것이 마지막 만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의 머리를 스쳤다. 덜컥 겁이 났다.

 

해화야.”

인어의 유래가 별로 재미없었어?”

겨울에 간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해화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최대한 오래 있을게.”

 

슬은 망설였다. 말해도 될까, 말아야 할까. 그러나 그는 이미 묻고 있었다.

 

안 가면 어떻게 되는데?”

 

해화는 그를 가만히 보았다.

 

꽃이 되겠지.”

 

왜 그런 식이어야만 하는 걸까. 왜 모든 게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모 아니면 도로 결정이 나는 걸까. 괜스레 화가 났다. 슬은 바닷가를 노려봤다. 인어가 될 수 있었다면, 최소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면 따라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주 깊은 바다로. 거기서도 눈이 올 거야. 일종의 미생물 잔해 같은 거긴 하지만 모습은 비슷하니까. , 겨울에 땅이 얼어 있는 동안 바다 위에도 첫눈은 내리겠지? 그걸 보면서 날 생각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미안해.”

 

슬은 그러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직 왜 네가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쨌거나 우리는 너희한테는 귀신이나 마찬가지잖아. 사실 여기 머무르면 안 돼.”

나는 네가 뭐가 돼도 괜찮아.”

우리를 잡으려 드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슬은 입을 다물었다. 혜화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우린 따듯한 곳에 가지 않는 이상 얼어 죽을지도 모르고.”

해화는 충분히 얕은 물에서 그를 놓았다. 슬은 밖으로 나오다가 멈춰 섰다. 돌아봤을 때 해화는 다소 먼 거리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너는 그 때 왜 그렇게 해변에 가까이 있었어?”

 

슬의 발목에서 파도가 부서졌다. 해화가 입을 뭐라 벙긋거리는 건 보이는데 바닷바람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슬은 바지를 걷고 좀 더 들어갔다. 해화는 그를 보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봄이라 사람도 없고, 여름이면 더 이상 구경하러 올 수가 없었거든.”

해수욕장 개장하기 전엔 볼 거 별로 없지 않아?”

인어 중엔 홀로 지내는 애들이 있어. 나도 그 중 하나고. 평소엔 괜찮지만, 가끔 외로워지거든.”

 

 

해화는 그러면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홀로 지내는 인어. 어쩌면 인어는 사람보다는 늑대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고 슬은 잠깐 생각했다. 주로 무리지어 지내지만 가끔 홀로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밟히는. 바다는 넓은데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 외로워지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아?”

어차피 아무도 자기가 본 걸 믿지 않을걸.”

나처럼 믿는 사람이 있잖아.”

 

대답하는 중에 슬은 해화의 머리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진주와 조개와 산호가 엮인 머리 장식이었다. 예쁘다고 하려는데 해화가 말했다.

 

너는 달라.”

?”

 

지금까지 다르다고 하면 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른 거였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어떤 식으로 달랐다는 건지, 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로 날 본 다음엔 카메라를 들고 돌아와. 넌 아니었어.”

하지만 어쨌든 네 덕분에 지금 관계가 유지되는 건 사실이잖아?”

 

슬이 말했다. 해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잊었어? 처음 온 건 나였지만, 날 다시 찾으려 한 건 너였어.”

 

 

 

그 날 집에 돌아가서 슬은 헤밍웨이가 쓴 책을 읽었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는 소설이었다. 청새치는 굉장히 큰 물고기였고 노인은 굉장히 뛰어난 어부였다. 이야기의 끝에서 구경꾼들이 청새치의 뼈를 두고 영혼 없는 감상을 했다. 노인은 사자꿈을 꾸었다고 했지만 슬은 청새치 꿈을 꾸었다. 아주 어두운 바닷물 속에서 유유히 청새치 한 마리가 그에게 헤엄쳐 왔다. 청새치는 곧 해화로 변했다. 해화는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다가 수면으로 올라갔다. 슬은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멀리서 인어의 꼬리지느러미가 반짝거렸다. 그들 사이로 참치 떼가 빠르게 지나갔다. 눈을 감으려는데 돌아오는 해화의 모습이 보였다. 슬은 팔을 뻗었다. 발길질을 하면서. 해화도 그에게 팔을 뻗었다. 손이 닿는 순간 슬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침이었다.

 

저녁에 비가 온다고 했다. 슬은 오전에 바닷가로 나왔다. 해화는 이번엔 그를 바다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폭풍우가 치게 되면 여기로 올 수가 없어.”

위험하려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은 내심 해화가 자신을 데려가 줬으면 했다. 욕심이라는 건 알았다. 그는 괜히 모래밭을 발로 후벼 팠다. 해화의 어깨가 잠겨들었다.

 

나중에 비가 다 그친 다음에 와. 그리고 조심해, 네가 아닌 사람이 날 보게 되면 난 다시 여기 오지 못해.”

조심할게.”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게 우리 생존 방식이라 그런 거야. 괜찮지?”

.”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았다. 남들이 못 보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냥 오랫동안 해화를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슬을 괴롭혔다. 그는 괜히 자신의 태몽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왜 물 속에서 구슬을 보는 꿈이 아니라, 물가에서 구슬을 보는 꿈이었는지. 그럼 물에도, 뭍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건데.

 

그 다음날엔 아침부터 바람이 불더니 하루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슬은 방파제를 지나치다 바다를 보며 문득 멈춰 섰다. 해화는 보이지 않았다. 과연 비 오는 날에 불러도 나타날까. 파도가 방파제에 몸을 내던졌다. 빗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게 슬의 뺨에 튀었다. 슬은 고개를 돌렸다. 자칫 해화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기도 어째선지 불편했다. 그는 한동안 서 있었다.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는 다시 바다를 보았다. 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볼 수 있을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불안한지.

 

머리보다 마음이 멍청한 듯 했다.

 

그는 시장으로 갔다. 사람이 많았다. 지붕이 생긴 이래로는 비가 오는 날에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중간에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보고 멈춰 섰다. 칼이 고기의 배를 갈랐다. 날을 따라 피가 붉게 솟았다.

 

인어를 봤대.”

 

목소리. 슬은 섬뜩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본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데 안 믿을 수가 있어?”

 

사람들 사이에 묻혀 누가 말하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힐 뻔 했다. 사과하는 와중에도 아득하게 대화가 들렸다.

 

자기보다 좀 더 큰 남자애를 끌고 바다로 가는 걸 봤다고 하던데? 쫓아가려고 하니까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거야.”

 

어느 구석에서 하고 있는 대화 같았다. 성인 남자 둘이었다. 슬은 간신히 사람들을 헤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슬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그도 잘 알았다. 설령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거였다. 직접 인어와 소년을 본 사람들이 아니니까, 두 사람 다 슬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고. 슬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편히 있을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다음 날엔 비가 오히려 더 심하게 쏟아졌다. 그는 고기잡이배들이 매여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배들이 출렁이며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는 속이 보이지 않는 바닷물을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오후에 잠깐 비가 그친다고 했다. 아주 짧게. 어쩌면 그 다음 날에도 잠시 비가 안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슬은 집으로 가는 길에 큰 버드나무 가에서 멈췄다. 다른 애들과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한 차였다. 돌아가면 다시 나올 핑계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더 있었더라면. 사람과 좀 더 친했더라면 뭔가 짜고 방법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부질없었다. 바라서도 안 되는 내용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슬은 자신이 정말 사람과 더 친했다면 해화와 그렇게 친해지지 못했으리란 걸 알았다.

차라리 헛소리였으리라고 생각하고 무시해야 좋을까. 그러나 해화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그리 쉽게 물러나올 수 없었다. 슬은 하늘을 보았다. 비는 영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해화를 처음 보았던 바닷가로 갔다. 물이 평소보다 더 들어와 있었다. 슬은 물가로 다가갔다. 밀려온 파도에 신발이 젖었다. 파도가 높았다.

 

두려웠다. 바다가 아니라, 해화를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적당하게만 들어간다면 괜찮을 거였다. 애초에 야외 수영장에서는 비 오는 날에도 많이 놀아 봤고. 그는 신발을 벗어 길가에 두고 바다에 발을 들였다. 물이 찼다. 그는 참고 들어갔다. 물은 순식간에 허리까지 올라왔다. 슬은 전에 지었던 시를 기억해 내려고 했다. 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린왕자의 별에서 태어나, 해당화야.”

 

그는 기억나는 대로 읊기 시작했다. 파도가 몰아쳤다. 그는 바닷물을 완전히 뒤집어썼다.

 

가시가 있어 더 아름다운 꽃…….”

 

중얼거림이 멎었다. 어쩌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에 수면으로 나오는 건 해화에게도 위험하긴 위험한 일일 거였다. 슬은 물러섰다. 바다가 그를 밀었다. 슬은 돌아서서 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그는 비켜 가며 나아갔다. 무언가가 또 발을 찔렀다. 슬은 주변을 살폈다. 해변이 지나치게 멀었고 근처에 바위 절벽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 근처가 물이 빠지면 암초 밭이 된다는 걸 기억해 냈다.

물은 빠르게 차올랐다. 슬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파도가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바위가 팔다리를 사정없이 긁었다. 슬은 바닥을 짚고서라도 일어나려고 했다. 바닷물이 그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바다가 그를 쓸어냈다. 슬은 상어를 생각했다. 아주 멀리서도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상어 떼. 사방이 어두웠다. 무언가가 깜박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환각 속에서 해화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슬은 대답하지 못했다. 빛이 멀어져 갔다. 그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해화의 머리 위에 있는 꽃송이를 생각했다. 비가 오면 꽃은 쉽게 떨어졌다. 그랬다, 무너지는 것이 무엇인지 슬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비 온 뒤의 낙화 같은 거였다.

해화가 그를 끌어안았다. 슬은 해화의 꽃잎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모든 것이 뿌옇게 변했다.

 

슬은 파도 소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잔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시에서는 죽은 사람의 나라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는데. 천천히 머리가 아파 왔다. 앞은 캄캄했다. 슬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닷물이 밀려와 옷을 적셨다. 슬이 눈을 떴다.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간 모래가 까슬까슬했다. 그는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조개, 진주, 산호. 해화의 머리 장식이었다.

 

돌아가서 보니 손발이 피투성이였다. 슬은 바닷가에서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쳤다. 사실 아주 새빨간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관련해서 큰 탈은 없었다.

그 날 슬은 감기에 걸렸다. 밤새도록 창 밖에서는 천둥이 우르릉거렸다. 가끔씩 바다에 꽂히는 번개가 방 벽을 밝혔다. 비는 끊임없이 창을 때렸다. 창이 덜컹거릴 때 바람은 울었고 흘러내리는 빗물 위로 또 다른 빗방울은 떨어졌다. 슬은 열에 시달리며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가 그친 뒤에도 해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어에 대한 이야기가 한동안 떠돌았다. 바다에 뜬 연꽃 얘기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비가 심하게 내릴 때 누가 바다에 뜬 꽃을 봤다더라, 그런데 다시 보니 꽃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더라, 인어일 것이다, 기타 등등. 몇몇 어부들은 인어를 잡아 보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인어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슬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학교에 나왔다가 결국 전학을 갔다. 가족 중 하나가 새 직장을 구했다고 했다. 슬은 이사 당일이 될 때까지 바다를 찾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저녁, 짐을 다 정리하고 나가려는 차에 그가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부르는 사람도,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슬이 멈춰 선 곳은 다시, 해화를 처음 보았던 해변이었다. 그는 신발을 벗고 모래를 밟았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올라왔다. 슬은 몇 걸음 가다가 멈춰 섰다. 근처에 한 무더기 핀 꽃들이 붉은 꽃잎을 떨어뜨렸다.

 

슬은 인어의 무덤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 전에 그가 밟고 서 있는 곳은 바다였다고 했다. 간척 사업을 했다고 했나, 아니면 천천히 물이 빠졌다고 했나,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바다로 좀 더 다가갔다. 손에 힘을 주자 머리 장식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는 불현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엔 어린 왕자가 있는 별에서 태어나, 해당화야.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고

네 꽃잎에 내리는 비가 없는

어린왕자의 별에서 장미로 태어나, 해당화야.

죽어서라도 네가 있는 별로 왕자는 돌아오겠지

바다가 울던 날 내가 네가 바친 것은

시큰거리는 눈에서 꺾은 열꽃뿐이었어."

 

사방이 꽃밭이었다. 사계절 내내 그가 서 있는 해변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들이 피고는 했다. 바다에서 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인어의 무덤이 정말 있다면 그건 당장 그가 서 있는 모래 해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인어들은, 육지를 그리워하는 걸까. 그는 해화가 외로워진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말로 다시 찾아오는 일이 없을까.

 

"별에서 태어나, 해당화야.

가시가 있어 더 아름다운 꽃,

네 가시에 뜯겨나간 솔기에서

모래알 같은 금가루는 쏟아졌지."

 

슬은 기다렸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해화의 머리 장식을 힘껏 바다로 던졌다. 빠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슬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그가 사라졌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갈 데가 있었으면 빨리 다녀왔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책망만 한 번 튀어나왔다. 슬은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만나서 말을 했었어야 했을 것 같았다. 간다고.

그러나 그는 그의 청새치를 이미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dyeonbaek@naver.com

수정 방향이 맞나 궁금하기도 해서 한 번 더 시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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