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초상화

2019.09.27 13:5709.27

내가 왜 여기 있지? 우리가 왜 여기 있지? 오늘이 그날인가?

 

“소행성 충돌 주의! 비버 자네 말이야!”

 

작업반장 벤의 목소리가 들린다. 비버는 서둘러 손에 쥔 손잡이를 조종해 작업선을 뒤로 뺐다. 행성 주위를 떠다니는 건포도 같은 크고 작은 운석들이 그의 조종석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비버! 정신 차려! 저것들을 맞았다간 눈탱이 밤탱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 않나?”

 

벤의 말이 맞았다. 우주에서 죽는 방법이란 적어도 사람이 아는 모든 죽는 방법에 천 가지 정도의 가지 수를 그것도 자동차 사고나 비행기 사고보다 적어도 곱절은 당황스럽고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나간 운석 뒤로 전에 알고 지냈던 이의 사체도 없는 뭉개진 반죽처럼 생긴 작업선(이었던)이 지나갔다. 영원에 가깝게 떠다닐 비석. 비버는 정신을 차렸다.

 

“그쪽만 정리하면 끝이야! 이지가 그쪽으로 이동해서 도와줄 거야! 이지!”

 

벤이 이지를 불렀다.

 

“젠장! 안 되겠군.”

 

벤이 화가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선 먼저 하고 있어! 필립이나 준을 불러올 테니까!”

 

비버는 마저 하던 일에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 행성은 여러 가스나 그 속에 암석과 간혹 보이는 번개로 이루어진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리고 행성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철 구조물은 작업선의 작은 움직임에 그 궤도를 바꾸고 주삿바늘을 행성 깊숙이 찔러넣을 수 있었다.

 

 

암석은 자갈과 모래로 바뀌고 번개는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가스는 그대로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포름알데히드가 든 유리병 속의 멈춰버린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곧 하나의 별은 꼭 밤하늘에 별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처럼 바뀌어 버릴 것이다. 실제로 별은 움직이지만 이제는 아니다. 꼭 캔버스에 그린 점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 순간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비버, 필립과 준도 연락이 두절됐어.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모르겠군.”

 

“먼지가 좀 낀 거 아닌가?”

 

“그럴지도, 하지만 이리 늦은 적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이라니. 아무튼 나도 그쪽으로 가지 일을 끝내는 게 우선이니까.”

 

 

얼마 안 되어 벤의 작업선이 비버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사실상 마지막 조정 작업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작업선을 조정해 행성에 매달린 철 구조물을 조작하고 정확한 위치에 행성을 다 옮겼을 때쯤이었다.

 

“벤! 벤! 내 말 들리나!”

 

“준!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이지와 필립이 당했어!”

 

“뭐?”

 

벤이 할 말을 비버가 대신했다.

 

“갑자기 엄청난 먼지와 가스가 우리를 덮쳤어! 지금!...”

 

준의 목소리는 더이상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목이 막힌 무전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벤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평소의 화가 난 것같은 작업적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별을 잘못 건드려서 수소가 빠진 모양이야. 저게 보이나 비버?”

 

비버는 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버가 바라본 곳에는 푸른 용암으로 이루어진 비눗방울이 터지는 모양으로 주위 모든 것을 해일처럼 덮어버리는 하얀 점에서 시작된 고리 모양의 파도가 보였다. 어두운 우주마저 밝게 비출 정도의 하얗고 푸른 빛의 점과 고리였다.

 

“백색왜성. 빌어먹을. 오늘만 끝나면 우주에서 유일하게 암덩이를 파는 지구로 돌아가는데 말이야. 내 가랑이 사이의 닻을 다시 땅에 박을 예정이었다고.”

 

비버의 손이 떨렸다. 그 파도는 한 번의 출렁임으로 모든 주위 것들을 흔한 모래처럼 쓸고 지나가 버렸다. 중간중간 터져버린 행성과 구조물이 다시 잔해가 되어 기마대가 창을 치켜세운 것처럼 다시 바깥을 향해 돌진했다. 멀리서 보아도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졌다. 소리를 내었다면 아마도 기절했을 것이었다.

 

“비버, 우린 끝이야. 저 세이렌이 우리 귀를 간질이는 순간 바로 한몸이 되는 거라고.”

 

“젠장… 마지막인데 하나 물어도 되겠나.”

 

“그래, 내가 혹시나 비버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도 지금은 진심일 거야.”

 

“암덩이 파는 곳이 정말 우주에 지구밖에 없나?”

 

“암, 사람 몸에 그렇게 안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두 사람은 크게 웃고는 점점 밝아지는 손전등을 눈앞에 비친 사람들처럼 앞의 사물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둘은 떠올렸다. 비가 오기 전에 회색 정장을 입고 하얀 모자를 걸친 구름과 자동차가 지나가면 웅덩이가 솟아올라 물보라가 치는 모습을 산책로의 녹색빛과 금색 갑주를 두른 나무 그리고 태양을.

 

“우리가 벌을 받는 건가?”

 

비버가 물었다.

 

“무슨?”

 

“우주를 박제하려고 했으니 말이야.”

 

“보통 이럴 때는 우리가 벌을 받는다고도 하지. 대신 말이야.”

 

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 각자 어떤 로망을 지니고 있었지. 나도 우주라는 물기 없는 바다를 항해해보고 싶기도 했고. 난들 아나? 어디 큰 고래라도 한 마리 있을지? 아무튼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이자 우리 고용주가 받을 것을 우린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거지. 보통 그런 사람들은 남의 목숨을 대가로 오래 살지 않나. 흔히 벌어지는 일이 우주에 나와서 벌어진들 신기할 것도 없는 사실이군. 우린 손으로 살고 그들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오로지 입으로 살지”

 

“그래도 가족들에게 심심치 않은 돈은 쥐여 주겠군.”

 

“아! 우리 마누라 가슴이 이정도 였으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악을 했을 텐데 말이야.”

 

눈앞을 채운 피부의 촘촘한 직물을 태우고 찢어버릴 열과 빛을 느낀 두 사람은 마지막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소리가. 이제는 소리가 들렸다. 모조리 부서지고 쓸려가는 소리가 우주의 한구석이 터져나가는 소리.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고정된 나사들이 풀리고 우주 속으로 뻗어 나가고 중력으로 잡아당기는 역동적인 우주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환영하는 축제. 떨림으로 시작된 음악은 다시 더 큰 굉음과 다음은 폭음이 집어삼키고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잔잔한 모래사장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숲이 둘러싼 작은 언덕에 태양의 언저리가 땅거미에 집어 삼켜지고 넉넉하고 풍요로운 밤이 찾아왔을 때였다.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천천히 그리고 우아함을 연출하며 엔진 소리를 냈다. 그에 겁을 먹은 귀뚜라미와 개구리가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녔다. 풀을 짓밟으며 가는 곳마다 깊은 자국을 남기는 통에 흙과 잔디가 하나가 되어 뒹굴었다. 잔디는 진한 초록빛의 신음을 내며 다시 양분으로 돌아갔다.

 

차는 언덕의 한가운데로 돌진해오고 나서야 그 소란스러운 엔진 소리를 멈출 수가 있었다. 운전석 쪽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무도복에 하얀 소매가 나온 옷을 입고 있었다. 깔끔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조수석 쪽으로 돌아 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여인이 옷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본인에게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품위를 지닌 몸짓으로 차에서 한 발 먼저 밖으로 나섰다. 두 중년의 부부가 나오자 언덕은 다시 오래된 침묵으로 돌아갔다.

 

“이쪽으로.”

 

남자가 말했다.

 

여인은 막연한 기대감과 더불어 걸어가긴 했지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남자가 위로하며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인은 남자가 말한 곳으로 도착해서 느긋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찾아보는 듯이 주변을 둘러 보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인은 순간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쪽이 아니에요.”

 

남자가 몸에 익은 상투적인 도덕적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저기요!”

 

남자는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상기된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여인은 푸른 밤하늘을 바라보자 이제껏 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귀금속이나 어떤 멋진 것들을 받기를 기대해서 그런가? 하지만 이런 속물근성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여인은 그저 최대한 모르는 체하는 것이 예의라고 자신에게 수긍시켰다. 여인의 표정이 등 뒤에 켜진 미약한 헤드라이트만큼. 딱 그만큼 밝아졌다. 하늘에 새겨진 얼룩을 모두 치우고 하얀빛들이 점선을 이루며 두 사람의 얼굴을 도화지에 판화처럼 새기고 있었는데 바로 부부의 얼굴이었다. 얼굴에 주름까지 표현한 것을 확인한 여인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역시 그 자리에 아직 머물러 있다. 색감은 감청색과 빛뿐이었지만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여 바라보는 듯한 그림이었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까지 은하수가 되어 나타났다. 하늘의 두 사람은 모두 웃고 있었다. 꼭 하루마다 웃을 일이 생겨나는 사람들처럼. 여인은 현실보다 약간은 과장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게 예의니까.

 

“정말 감동이에요.”

 

“결혼기념일 선물이에요.”

 

“뭘 이런 걸 다…”

 

여인은 쑥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인은 문득 고개를 들더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요?”

 

“저기 좀 봐요. 이건 미래를 그린 건가요?”

 

여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남자는 순간 울컥하고 본심을 드러낼 뻔했다. 여인이 가리킨 곳은 남자의 옆 모습 중에서 웃고 있는 입 부분이었는데 이빨 하나가 빠진 것처럼 별들이 숨어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솟아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냈다. 왜냐하면 여인이 기분이 상할 것이라 생각한 것보다 이 정도 일을 벌일 수 있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빨이 빠져도 날 사랑해 주겠어요?”

 

남자는 여유를 품은 호수 같은 표정으로 이런 순간을 재치있게 넘기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럼요.”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하나?’

 

남자는 생각했다. 내일 덤터기를 받을 비서를 생각하자 사악한 미소가 각인된 마음이 음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의 사업가적 지식이 대부분을 채운 회색빛 두뇌에서는 차디찬 시선으로 이는 좋은 기회라고까지 생각했다.

 

‘여기 든 돈이 얼마인데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안 되지, 암.’

 

그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이번 일에 든 비용처리를 얼마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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