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관절이 뻐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어쩐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쑤시는 전신을 달래고자 노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전신 마사지 기계에 누워 몸을 맡기는 한편 날씨를 확인하고자 일기 예보를 틀었다.
그러자 화창한 낮의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이 뒤덮이는 영상으로 바뀌더니 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28˚/35˚ 강수량 140mm. 한 마디로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었다.
"에구. 오늘 약속 있는디 말여. 비 내린다니..."
일기 예보를 알려주는 화면에서는 뾰족한 삼각형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우산을 챙기라'는 알림이었다. 날씨가 더운 만큼 도시 내에서 방출되는 열을 식히기 위해 비가 내리는 오늘은 천장 막을 제거할 모양인 듯했다.
도시에 천장 막을 설치한 이후 개인이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종종 비가 내릴 때는 천장 막을 걷어 자연적으로 내리는 빗물에 열기를 식히는 방식을 취하고는 했다.
노인은 오늘로 잡은 약속이 참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 * *

 

외출 준비를 단단히 마친 늙은 수리공은 절뚝거리면서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도로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요즘 시대에는 비가 내리는 정도로는 도로가 미끄러워 넘어질 일은 없었지만, 그는 약을 먹었음에도 비가 오니 뼛속으로 파고드는 통증으로 자칫 쓰러질 뻔했다. 물론 그럴 일이 없도록 미리 몸을 부축할 기능이 심어진 지팡이를 가져왔지만.
'조용허구나...'
비가 퍼붓는 날씨였던 탓에 도로는 자신의 집처럼 한적한 상태였다.
그는 주변을 쓸쓸이 둘러보면서 오늘 약속을 취소할 것을 그랬나 생각하며 아쉬워하던 중 길에서 작게 반짝거리는 불빛을 발견했다.
'저게 무엇인고?'
빛의 정체가 궁금해진 그가 절뚝거리며 다가가자 산산이 부서진 물건이 보였고, 그중에서 물에 잠긴 램프에서 약해지는 빛이 깜빡이다가 꺼져버렸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 도로 위에서 부서져 있는 그 물건의 정체는 아주 예전에 유행했지만, 이제는 흔한 장난감이 된 강아지 형태의 로봇이었다. 노인은 그것을 잠시 지그시 바라보다가 슬쩍 우산으로 비를 가려 주면서,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주워 가방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에고, 에고. 뭔 일로 아가 니가 여기 있느냐."
보통 어린이 장난감으로 많이 구매하게 되어 폐기되는 것으로 이렇게 비를 맞으면서 밖에 산산조각이 난 형체로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지만 오늘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산산히 부서져서 모델이 무엇인지, 어떤 생김새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 주인에겐 유년 시절의 소중한 친구였을 것이다.
'그렀지만 니두 '옛 것'이 되었다며 이렇게 처참히 버려졌겄지.'
올해로 180살을 맞이한 노인에게는 잊혀져 가는 옛날에 대한 것에 묘하게 공감이자 마음이 쓰이곤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약속시간을 어겨서는 파편을 줍고 있는 것이었다.

로봇 강아지를 어떤 식으로 박살을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멀쩡한 부분이라곤 거의 남지 않았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노인은 쓸쓸이 로봇 개의 머리였을 파편을 쓰다듬어 주고는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을 무렵이었다.
"아! 할망구, 거기서 뭐 혀?"
한참 로봇 강아지의 파편을 줍고 있던 노인은 '할망구'라며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발견했다.
그는 우산을 쓰는 것보다, 머리 위로 설치해서 쓰는 워터 프로텍트를 쓰고서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 보고만 있냐? 이눔아."
"뭐여. 안 오기에 왔더니만 왜 성질이여, 성질."
가까이 다가온 일행은 노인에 못지 않게 나이가 많이 든 할아버지로 특이한 생김새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마치 돌릴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나사 같은 테두리의 안경. 그것을 쓴 노인은 투덜거리면서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줍고 있는 친구의 젖은 손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찼다.
"이 할망구 또 병이 도졌네, 도졌어. 중고 그만 줍고 다니랬지!"
"마, 내 취미께 신경 끄고잉. 니두 도와라잉."
"허. 참 나."
로봇 강아지의 파편을 줍고 있는 노파의 짜증에 노인은 황당해 하면서도 곁에 쭈그려 앉아 투덜거리면서 같이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야. 니는 왜 이러구 사노. 돈도 많음시롬."
"내 취미랑게."
"그눔의 취미. 이 할망구 차암... 취미 하나 이상해갔고."
투덜거리면서도 정작 손으로는 빠르게 파편들을 주워낸 노인은 물기까지 탁탁 털어서는 노파에게 주워든 파편을 건넸다. 노파는 그것을 받아 가방에 넣다가, 제일 먼저 물기를 털어서 가방에 넣은 메모리 박스를 꺼내선 특이한 안경을 쓴 노인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니놈은 이거 전문 아이가. 이놈 누군지 좀 알아보라카이."
"아따. 맨입으로?"
"뭐 해주까."
"비 온다 아이가. 오늘 탁주 한잔 하자잉."
그렇게 말하면서 안경을 쓴 노인은 나사 같은 안경테를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경 알이 앞으로 툭 튀어 나와서는 묘한 빛을 내며 로봇 강아지의 메모리 박스를 훑고는 사라졌다.
"인기 있었던 놈이구만."
"누고."
"LD-F 211이라고 나오네. 이거 엄청 잘 팔렸다 아이가."
그렇게 로봇 강아지의 메모리 카드로 기종을 알아낸 노인은 안경을 눌러 전원을 끈 다음에 길쭉한 반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쪽 빨아들였다. 그런 다음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그걸 본 노파는 얼굴을 팍 찡그리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영감이! 내 있을 땐 그거 피지 말라 했나, 안 했나!"
소형 전자 담배를 눈앞에서 피우는 친구의 꼬락서니에 노인이 짜증을 내자 그는 가래가 섞인 웃음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에 파편을 줍느라고 구부렸던 무릎을 톡톡 주먹으로 치며 '비 와서 쑤시는데 이 짓 한다고 더 아프니 그만 가자'며 화를 내는 친구를 끌고 장소를 옮겼다.

 

시대가 흘러서도 변함이 없는 것은 있으니 그중에서도 인간이 즐기는 음주 문화. 물론 그 역시 변한 것이 더 많기야 하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 역시 존재하여 과거와 미래가 혼재하고 있었다.
까마득이 먼 과거에 만들어졌다는 술 막걸리, 그것을 옛날 말로 '탁주'라고 부르는 것을 즐기는 친구와 함께 노인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바깥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크흐! 니 그거... 고칠 거가, 또?"
술을 가득 채운 한 잔을 쭉 들이마신 안경을 쓴 노인은 비 내리는 밖을 보면서 한 잔을 나눠 홀짝이며 마시는 친구를 부르며 물었다. 방금 주웠던 고철이 된 로봇 강아지를 고칠 것이냐고.
"암. 그래야지."
"니 진짜 그놈의 방정... 하아."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깊은 한숨을 퍽 내쉬더니 차분히 가라앉은 이름으로 친구를 불렀다.
"혜영아. 니 옛날 일 가지고 여전히 그러는 거, 나쁜 거다잉."
"... 시끄럽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보면서 노파는 얼굴을 찡그리며 술 안주가 펼쳐진 탁자 위로 가방을 턱 올려놓고는 속에서 부품들을 주섬 주섬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현이 니는 이거 전문이다 아이가. 이거 보고 뭐가 부조칸지 알쟤?"
"마 언제적 일이고. 그게."
현이라고 불려진 노인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쓰바... '공장 전체 기계화' 땜시 빨리 은퇴한 퇴물이다 아이가. 내가 이제 모 이런 기 전문이라꼬..."
"그라쟤, 그랬쟤. 그래도 니 한때 잘 나가던 놈 아니었나. 이기서 보고 필요한 기 말해보소."
그렇지만 노파는 로봇 강아지를 포기하지 않았고,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처럼' 옛날의 기술, 기계라면서 버려진 처지의 물건을 어떻게든 살려내어서 '버려질 처지'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에.
"햐... 진짜. 니 같이 귀찮은 인간이랑 왜 친구 해가꼬."
그렇게 말하면서도 막상 현이란 노인은 낡은 고철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는 노파, 오래된 기계들을 수리하는 것을 취미로 둔 노파가 된 혜영이와 지금의 관계를 즐기고 있었다.
심심할 때 부르는 술 친구이자, 같이 옛날의 추억을 나누는 기계 기술 협회의 동료. 그리고, 인간보다 정확한 기계의 실력에 의해 일찍이 퇴물이 되어 잊혀져 버린 기술자...
그들이 만든 기술 덕분에 '기계화'의 시대가 더 빨라졌건만, 정작 기업에서 비싼 가격으로 기술의 저작권과 일체의 사용권들을 거금으로 사들여 갔기에 그들의 이름은 영영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니네 미칬나! 그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디! 우리가 왜 잊혀져야 하는 기고!'

 

기업들은 기술자들에게 상상 이상의 거금을 내놓으면서 사들이겠다고 했기에 돈에 궁핍했던 기술자들 모두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들을 기업에 비싼 값을 주고 넘겼다. 딱 한 사람, 여기에서 홀로 고독하게 싸우면서 자신의 기술 저작권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혜영만 빼고.
하지만 그렇게 반대하며 유일하게 팔지 않은 혜영의 기술을 기업이 아주 교묘하게 바꿔서 '다른 기술'이라고 이름을 바꿔 내놓았기에 막상 첫 번째였던 혜영은 쉽사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묻히고 말았다.
그것은 60년도 더 예전의 이야기로, 이제는 기억하고 있을 사람이 거의 없는 옛 추억이자 상처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녀가 과거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노인은 그런 노파의 집착이 가엾은 한편, 어리석다고도 생각하면서 조용히 필요한 부품들을 찾아내어 그의 단말기로 수리에 필요한 부품 리스트를 전송했다.
"니 이거 고치면... 또 만나줄 끼가."
"와 주책이고? 술 마셨더니 도랐나?"
리스트를 확인하던 노인이 인상을 쓰며 묻는 말에 그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런 쌀쌀맞은 태도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기에, 여전히 당찬 그녀다워서.

 

 

로봇 공학자였던 친구로부터 수리에 필요한 리스트를 받은 수리공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일단 자신의 집에서 필요한 부품들이 있는지를 찾았다.
"으데 보자... 없네. 아이고. 이거 마 어디서 구하노."
로봇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부품은 몇 가지는 구할 수 있었지만, 일부분은 확실히 '부족'했다. 이제는 생산이 끝이 난 옛날 것이 된 것이었다.
구할 수 없는 부품들을 본 노인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탁상을 톡톡 두드렸다.

[어디로 전화를 연결하시겠습니까.]

"밴댕이한테 전화해 봐라."

['밴댕이'님에게 전화를 연결합니다.] □□■◆▶

잠시 전화가 연결 중이라는 화면과 함께 연결음이 들렸다가 금세 끊어졌다.

[니 왜 전화하고 난리고.]
"야. 저번에 돈 줬다 아이가."
[내 시계 6개 뜯고, 겨우 1개 값 받는데 이년아. 안 삐질 거 같냐?]
이전에 오래된 시계를 고쳐 주겠답시고 친구의 박물관 시계들의 부품을 떼냈었다. 그때의 일엔 분명 '수리 부품비'를 넉넉히 자신이 챙겨 줬건만 여전히 속이 꽁하고 막혀있는 것이었다.
"왜 니가 삐져 있노."
[아! 그야! 당연하지! 내 시계, 역사적인 건데! 그걸 겨우 한 인간 시계 고친답시고 썼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그때의 서운함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야야. 그거 가족들이 다 물려 썼다고 내 말 안 했냐. 니 시계, 으차피 박물관에 관람용이다 아이가. 그럴 바에 진짜 진짜 아껴주고, 써주면서 소중히 간직해줄 인간에게 가서 '쓰여지는 것'이 더 안 좋겠냐 이기다."
[ ..... ]
"가스나야. 니가 만약에, 만약 니 새끼가 '니 기억 하겠다꼬' 니가 쓰던 돋보기를 맨날 품고 다니면서 쓰다가 깨졌다 카면 그땐 으얄래."
[ ..... ]
"가엾지 않냐. 우리 같은 '퇴물'이 쓰는 거, 원래라면 이미 진작에 뽀개서 태웠다 아이가. 이 세상에 없앤다 아이가. 근디 안 그러는 기야. 오래된 것도 '사랑받을 수 있는' 기야."
[ .... 망할 년.]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이면서 화를 삭히려는 수리공 노인의 말에 박물관의 주인이었던 이의 목소리가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리공은 슬쩍 전화를 건 본론을 꺼냈다.
"니 '기술 역사' 박물관 말이다. 그기에 로봇도 있쟤?"
[이, 있기야... 한데... 와?] 
"그기서 쪼오끔만 내 필요한 거 쓰면 안 되나."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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