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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나가 둘이다

2009.07.28 23:5807.28



 나는 하나다. 그게 문제다. 아빠는 결혼도 전부터 자식 이름을 정해놓았다. 하나 두나 세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들 몫까지. 그래서 남자치고는 흔치 않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하나. 판다 초등학교 4학년 6반. 그게 나다. 내가 하나라서 싫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가 좋다. 뭐든 첫째가 세다. 일등도 하나다. 로보트도 일호기가 가장 멋있다. 파워레인저에서도 대장인 레드는 언제나 일호기를 탄다. 그러니 문제는 하나가 아니다. 문제는 그거다. 하나가 둘이다. 너무 많다.


 아빠가 재혼을 했다. 다행이다. 나도 이젠 엄마가 생긴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새엄마, 아니 내 엄마가 된 분은 내 기대를 넘어 천사같은 사람이라기보단 사람같은 천사였다. 언제나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새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교과서에 나온 철수 엄마 영희 엄마 모두 다 쨉도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조금 털털한 아빠에겐 이런 푸근한 분이 어울린다. 둘이 참 천생연분이시다.

"네가 하나니?"

 새엄마와의 첫만남은 결혼식을 치루기 석달 전 호텔 짜장면 집에서다. 그날 아빠는 이게 진짜 상견례지, 하면서 가슴을 졸이셨다. 난 자식도 낳기 전에 상견례에 참가한 셈이다. 그리고 그 첫 상견례날 나는 '첫'이라는 글자가 붙는 것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첫 호텔구경. 첫 7000원짜리 짜장면집. 첫 넥타이. 첫 구두. 물론 처음 먹어보는 깐풍기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들에는 정신이 돌아가질 않았지만.

"참 재미나다. 우리 딸도 하나야. 둘째 이름은 두리구."

 그제야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장하면서도 신경이 바짝 곤두 서 있는 것 같은 계집애랑 엄마나 누나를 닮아 귀엽게 생긴 아기랑. 그렇구나. 얘들도 내 가족이구나. 새로 생길 엄마 때문에 마냥 즐거웠는데 동생이 둘이나 생길 줄이야. 근데 재미나다니, 뭐가? 딸이 하나인 게 왜? 둘째가...아. 딸이 하나기도 하지만 이름도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맞은편에 앉아 뭐가 재밌냐는 듯 깐풍기 처음 먹어보냐는 듯 매섭게 날 야리고 있는 저 계집애, 하나. 나도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렇다. 이게 문제다. 하나가 문제다. 새엄마네 첫째는 하나. 둘째는 두리. 그리고 두 분의 재혼으로 이제 우리 집은 하나가 둘이 된 것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 동갑내기인. 우물쭈물 재혼 얘기를 꺼내던 아빠한테, 난 아빠 편이라고. 동화 속 계모를 믿을 나이는 지났다고. 재혼 백프로 찬성이었던 나는 살짝 후회했다. 엄마의 작명센스도 아빠처럼 볼만했다. 둘이 참 천생연분이시다.


"남자가 하나가 뭐냐? 내가 하나야. 난 이름 못 바꿔."

 다만. 나랑 하나는 천생원수였다. 결혼식 후 하나와 두리, 엄마는 우리 집으로 이사 왔다.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변기 커버를 내려놓는 것만이 새가족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노력이었다. 또 나는 아빠보다는 훨씬 더 변기 커버를 잘 내려놓았다. 다른 변화라면 두리랑 나는 같은 방을 쓰게 된 것 정도. 두리는 금방 나를 따랐다. 네 살인 두리가 보기에 내 컴퓨터 게임 실력이 너무 멋져 보였던 것이다. 반에서 보면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두리는 형 형 하며 게임 보여 달라 졸졸 따라다녔다. 좋았다. 두리는 내 동생이다. 하지만 하나는 아니다. 까칠하다. 한 집에 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누가 하나로 남느냐를 두고 다투었다.

"내 생일이 너보다 더 빠르잖아. 당연히 내가 하나지."
"고작 삼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유세는. 그리고 그렇게 치면 두리도 이름 바꿔야겠네!"

 아빠랑 엄마는 난처하다는 듯 우리 둘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셨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하나한테 미안해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 없는데. 하나도 화 낼 필요도 없으면서 심술이다. 오늘도 호적 문제를 이야기하려는데 저 난리다. 유씨에서 이씨로 바꾸면서 나와 하나 이름이 겹치게 되었지 않나. 하나만 이름을 바꾸면 되는데 버럭버럭 대든다. 애꿎은 두리는 어쩔 줄 몰라하고. 그 와중 아빠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럼 하나가 한나로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 더 여성스러운 이름이잖니."
"싫어요. 저는 하나예요." 
"얘가 왜 한나야. 얘는 두나지. 하나 동생이 왜 한나야."

 하나는 또 다시 나를 야렸다. 아빠는 더 못 참겠는지 하지도 않던 훈계를 했다. 자식 낳기도 전에 하나 두나 세나 이름을 지어놓았던 것은 누가 봐도 한 가족인 걸 알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이제 한 평생 같이 살아갈 한 가족인데 왜 이러냐고. 한 가족인 걸 자랑하려고 정한 이름인데 그 이름으로 가족끼리 싸우면 어쩌냐고. 그냥 둘 다 하나랑 관련 없는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나는 그만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지만 하나는 달랐다.

"저는 새아빠 딸이지만 친아빠 딸이기도 해요. 그리고 친아빠한테 저는 하나고요."

 뻔뻔한 년. 하나는 주사바늘같다. 작지만 단단하고 날카롭다. 안에는 예쁜 색깔의 약이 담겨있지만 쓰다. 짜증을 낼 때면 마치 주사바늘이 엉덩이에 꽂힌 것처럼 따끔하다. 나는 주사가 싫다. 하나는 주사보다 더 싫다. 이 하나 말고 저 하나. 하나가 배 째자는 식으로 나오자 나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도 안 바꾸는데 왜 내가 바꾸냐고. 아빠는 익숙지 않던 훈계에 날 선 대꾸가 들어오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 집은 하나가 둘이 되었다.


"형, 자?"

 두리가 또 잠을 설친 모양이다. 이사 온 집이 낯선 탓이다. 아까 하나랑 내가 다투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빠 엄마가 재혼하기 전 까지 두리는 엄마랑 같이 잤다고 들었다. 그 때 두리네 아빠랑 엄마랑은 각방을 쓴 것 같다. 어쩌면 아빠와 엄마가 만나기 시작한 것은 내 생각보다 더 오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두리를 안아줬다. 두리의 땀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난다. 달착지근하면서도 힘찬 냄새. 나도 이랬던 날이 있었을까. 두리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 두리도 나를 꼭 껴안는다. 두리는 하나다. 하나는 둘인데. 아무래도 우습다. 차라리 두리가 둘이라면 모를까. 하나가 둘이라니. 단내를 맡으며 잠들었다.


 토스트 빵. 계란 후라이. 베이컨. 주스. 방울 토마토. 감격의 나날이다. 물론 아빠가 이걸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빠의 기상시간과 아빠의 출근시간은 큰 차이가 없었다. 더욱이 빵을 지지고 계란을 태우고 주스를 흘릴 만큼 그 간격이 길었던 날은 많지 않았다. 방울 토마토나 베이컨 같은 게 우리 집에 있었던 적은 아예 없었고. 거기에, 놀랍게도, 설거지는 엄마가 했다. 나는 아빠의 재혼을 아빠보다 더 즐겼다. 하나만 빼고.

 하나는 빵이 짜니 베이컨을 태웠니 성질을 부렸다. 눈꼬리는 위. 입꼬리는 아래. 우리 집 안에 있는 화장실, TV, 음식, 사람 모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나보다 생일도 늦는 것이 같은 학년이라고 오빠는커녕 야라고 부르질 않나 이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지 않나 나도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반반한 것 믿고 까불긴. 이른 아침부터 진력난다.

"너 먼저 가."
"뭐?"
"너 먼저 가라고. 같이 가기 짜증나."

 하나의 눈꺼풀이 닫힐 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 왔다. 다행히 반은 같지 않다. 나는 6반. 하나는 9반. 집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한데 학교에서마저 얼굴을 맞대면 미쳐버릴 거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학교생활에 하나가 더해지면 분명. 아직 하나는 이씨가 아니다. 유하나다. 그래도 우리 아빠의 재혼이나 우리 집에 하나가 둘이란 것쯤 알 사람은 다 안다. 초등학교에서 소문은 공문이랑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하나는 유난이다. 학교에서는 눈도 맞춰본 적 없다.

 집에 있는 하나와 학교에 있는 하나는 완전히 다르다. 유하나나 이하나나. 유하나는 학교에서 인기인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예쁜 편이고. 내숭이고. 몇 반이나 떨어져 있는 우리 반에서도 하나를 안다. 전학 온 지 몇 주 되지도 않았건만. 남자애들은 하나가 가슴이 그렇게 크다면서 쑥덕거린다. 내가 하나와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들은 내 주변에 둘러서서 야한 질문을 계속 해댔다. 옷 갈아입는 것 봤냐 속옷은 봤냐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면서.

 반대로 나는 학교에서 평범한 편이다. 우리 반에서 날 모르는 애도 있다. 요즘엔 우리 반에서 잘 나가는 아이들이 성가시게 군다. 남자애들의 세계는 알기 쉽다. 뭐 하나 빼어난 게 있으면 된다. 싸움이든 게임이든 공부든, 어디 가서 무시는 당하지 않는다. 동훈이는 이 세 가지 모두 다 반에서 일등이다. 공부는 여자애들 몇몇이 더 점수가 높지만 남자 중에서는 동훈이가 일등이다. 아이들이 싫어할 수가 없다. 나도 나랑 잘 놀아주지는 않지만 뭐든지 잘하는 동훈이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이들한테 무시당하기 싫어서 요즘 게임 수련 중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싸움은 나쁜 일이니 하면 안 되고 공부는 재미가 없다. 그러니 게임뿐이다. 지금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동훈이보다 게임을 더 잘 하게 되면 매일 다른 애들한테 놀림 받지는 않을 텐데.


 아빠는 내가 반에서 무시당하는 걸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안다. 나는 집에서 하나가 가족들한테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말할까봐 걱정했지만 하나는 나 말고도 다른 모든 가족에게 신경질 부리느라 바빠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나는 집에서는 당당한 내가 학교에서 놀림이나 받으니 나를 얕본다. 지나쳐 갈 때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나가 학교에서 나를 보는 경우는 단 하나다. 아이들이 나한테 장난을 칠 때. 오늘도 그랬다.

"이하나, 쪽팔리게 파워레인저 책받침이나 들고 다니냐?"
"내 동생도 유치해서 안 보는 걸 봐. 이하나 존나 찌질해."

 쉬는 시간, 동훈이랑 아이들은 내 책받침을 부메랑처럼 던지고 받았다. 자기들도 집에서는 파워레인저 볼 거면서. 난 아이들 사이를 개처럼 뛰어다니면서 책받침을 잡으려고 애썼다. 동훈이는 질렸다는 듯 책받침을 복도쪽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씩씩 거리면서 복도로 달려 나갔다. 반 아이들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복도에는 하나가 친구들과 지나가고 있었다. 반에서 나는 웃음소리와 창문에서 날아온 책받침. 주워가려는 나. 하나와 하나 친구들은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하나의 친구들은 하나가 나랑 가족인 걸 알기에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더 장난치려고 따라 나온 동훈이 패거리들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들 하나 눈치만 신경 쓰고 있었다. 하나는 그걸 즐기고 있었고.

 하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내 책받침을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버리듯 말없이 창밖으로 책받침을 던져버렸다. 휘리릭, 파워레인저 로봇이 그려진 책받침이 건물 밖 멀리 날아갔다. 2초 정도.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하나가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순간 반전을 던진 것이다. 뭐 하나 이상할 것 없다는 듯이 하나는 가던 길 쭉 갔고,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아이들은 교실 안팎에서 미친 듯 웃어댔다. 나는 책받침을 찾기 위해서였는지 반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는지 건물 밖으로 달려갔다. 쉬는 시간 다 끝나가는데 어딜 가냐고 선생님한테 혼났다.


"잠깐 나 좀 볼 수 있어?"

 하나다. 오늘 한 버르장머리 없는 일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교문에 서서 내가 나오길 기다린 것 같다. 하나를 만나고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것도 나한테 건넸다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가늘고 부드러운 소리여서, 자판기 보듯 쓱 훑고 지나가려는데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이야기 좀 하자면서. 그 주사바늘같던 애가 이렇게 차분할 수도 있다니 깜짝 놀랐다. 우리 학교 애들은 다 이 모습만 봤다 이거지. 나만 빼고. 얼굴이 빨개졌다. 화가 나서.

"아깐 미안했어."
"됐어. 따라오지 마."
"어차피 같은 집이잖아."

 난 싸울 기력도 나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뒀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듯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걷다가 같은 집, 이라는 말이 걸렸다. 언제는 학교도 따로 가자더니.

"같은 집이라고 할 거면 이름 바꿔. 성도 이씨로 하든가."
"그 이야기가 왜 나와?"
"하나가 둘이니까 이상하잖아."
"너나 바꿔. 어차피 넌 학교에서 이름 불러주는 사람도 없잖아. 바꾸든 말든 알아채지도 못할 걸?"

 목소리가 다시 주사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학교도 바꾸고 동네도 바꿨어. 다니던 학원도 못가. 내 친구들 만나려면 한 시간 걸려 가야 돼. 그런데 이름까지 바꾸라고? 얘들이 내 미니홈피 찾을 때 내 이름 바뀐 것 모르면 어떻게 찾으라고? 친구들한테 아빠 엄마 이혼한 것 자랑하면서 내 이름마저 바뀌었다고 광고하라고? 핸드폰 전화번호부도 다 바꾸게 하고? 난 친구가 있지만 넌 없잖아, 니가 바꿔!"
"싫어! 내가 친구가 있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인데? 너야말로 전학 온 지 얼마 안됐으니 이름 바꿔도 상관없잖아!"
"나는 다 포기했는데 넌 몽땅 다 갖고 있겠다? 넌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
"그래, 몽땅 다 갖고 있을 거다! 하나도 안 줄 거다!"

 하나는 눈을 부라렸다. 등을 돌려 집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꺼내 누구한테 문자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뒤에서 하나가 지껄였다.

"후회할 거야."


 하나의 경고는 다음 날에야 이해가 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내 책상에 쓰레기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반 아이들은 모르는 척 했다. 가끔 장난만 치던 아이들이 작정하고 날 따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4학년이다. 그러니까 얼만큼 놀리고 어떻게 괴롭혀야 선생님한테 걸리지 않는지 알만큼 알 나이였다. 내가 오자마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지만, 아이들은 처음부터 내 책상 근처에서 노느라 그랬을 뿐이라는 듯 쓰레기를 치웠다. 선생님은 알만큼 알 나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레기 정도로 따돌림이 끝나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는 나한테 고무줄이나 볼펜으로 만든 바람총으로 종이 쪼가리를 날렸다. 체육 시간에 피구할 때 우리 팀은 나한테 공을 주지도 않았고 적 팀은 나한테만 공을 던졌다. 금방 죽어서 외야에 가야했기 때문에 한판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동훈이는 나한테 지우개를 빌려가서 지우개에 싸인펜으로 한 가득 똥이나 못생긴 얼굴을 낙서한 다음 돌려줬다. 동훈이가 날 놀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심하게 괴롭힌 것은 처음이었다. 울 것 같았다.

 아이들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 반 짱인 동훈이는 9반 짱인 성도랑 절친이다. 그리고 성도는 얼마 전 새 여친이 생겼다. 얼굴이 예쁘고 가슴이 크다는 걸로 소문이 자자한 여자애 하나가 바로 성도의 새 여친이다. 어제 하나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는 동훈이를 말릴 수 있었으니까. 어제 하나가 나한테 후회할 거라고 경고한 것도 마찬가지다. 동훈이한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킬 수가 있었으니까. 점심시간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척 할 때 들은 이야기로는 그렇다.

 선생님한테 말했지만 동훈이를 불러다 놓고 한 반 친구끼리 사이 좋게 지내라. 동훈이가 반 아이들이랑 많이 친하니까 잘 이끌어주어라. 이렇게 충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동훈이는 교무실을 나가면서 내 엉덩이를 찼다. 나는 고자질쟁이고 내가 놀림 받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이나 되어서 파워레인저나 보는 찌질한 애라서 그렇다고. 다 내 잘못이라고. 성도나 하나도 상관없고 그냥 내 잘못이라고. 그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동훈이는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하나가 밉다. 우리 반도 아닌 애 하나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게 싫다. 하나가 오기 전까지 나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좀 놀림 받기는 했지만 대놓고 당한 적은 없었다. 동훈이는 미술 조별 시간 때 준비물을 까먹은 나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하나 때문에 한 반 친구끼리 사이가 틀어졌다. 동훈이가 나한테 화를 냈다. 다 하나 때문이다. 울 것 같았지만 바닥을 보면서 참는다. 교실에 들어가니 내 책상에 쓰레기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나 파워레인저 볼 거야! 파워레인저 볼 거야!"

 두리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기어오른다. 리모콘에 들러붙으려는 두리를 밀쳤다. 어제까지는 두리랑 재밌게 파워레인저를 봤지만 이제는 싫다. 내일도 학교 가면 아이들이 파워레인저 본다며 놀릴 거다. 웬일로 방에 있지 않던 하나는 내가 두리랑 티격태격하는 걸 쳐다보지도 않더니 밖으로 나갔다. 두리는 엉엉 울어댔다. 얘도 결국 하나 동생이다.


 나와 하나는 서로를 가구 취급했다. 움직이는 가구. 오빠나 동생은커녕, 장롱이나 침대처럼 평소엔 있나 없나 신경도 쓰지 않는 가구. 두리와는 다시 잘 지내고 있지만 하나는 아니다. 하나는 학원에 있을 때 말고도 친구를 만나곤 해서 집에 잘 있지도 않았다. 내가 거실에 있을 때는 하나가, 하나가 거실에 있을 때는 내가 방에 박혔다. 우리는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 밥 먹을 때만 빼고 서로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따돌림은 계속 됐다. 아이들은 내 말투나 복장을 갖고 놀려댔고, 체육시간이면 꼭 내 몸을 향해 공을 던지거나 찼다. 학교에 가면 책상 위에 올려진 쓰레기부터 치워야 했다. 하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동훈이가 넌 하나마나 안 되니까 하나하지 말고 마나하라고 놀리면서 아무도 하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몇 번은 마나야 마나야 부르다 이제는 젖마나가 되었다. 젖마나 저리 비켜, 젖마나 짜증나, 젖마나 꺼져. 아이들 중에 나를 하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명 하나다. 하나가 시킨 일이다.

 아빠는 모른다. 얘기하지 않았다. 이제 쉴 곳은 집뿐이다. 괜히 괴롭히는 걸 이야기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또 선생님한테 이야기할까 겁난다. 그러면 또 동훈이는 내가 배신자라고 화낼 거다. 동훈이가 날 놀리긴 하지만 그건 다 하나 때문이다. 동훈이 잘못이 아니다. 엄마한테는 재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골치 썩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 두리는 말해도 모를 테니까 말하지 않았다. 두리는 내가 학교에서 가장 재밌고 게임 잘하는 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파워레인저도 같이 본다. 여전히 집이 최고다.


 개구쟁이 내 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음악 시간에 새로 배우는 노래다. '내 동생'이라는 동요다. 개구쟁이 내 동생의 이름이 하나인 걸까 이름의 개수가 하나인 걸까. 동생인데 하나일 수는 없으니까 개수가 하나겠지. 음악시간은 좋다. 아이들은 노래 부르느라 나를 괴롭힐 생각도 못한다. 또 배우는 노래들은 모두 흥얼거리기 딱 좋다. 음악시간이 끝나고 교과서를 챙기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두리가 부를 때는 왕자님.

"멍텅구리 이하나,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동훈이다. 동훈이는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가사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부를 때는 젖마나! 아빠가 부를 때는 똥마나! 누나가 부를 때는 좆마나!"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동훈이를 따라 합창을 시작했다. 멍텅구리 이하나.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엄마가 부를 때는 젖마나. 아빠가 부를 때는 똥마나. 누나가 부를 때는 좆마나. 젖마나 똥마나 좆마나. 나는 소리를 지르며 동훈이한테 달려들었다. 하지만 동훈이는 내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리고 바로 내 위에 올라타 따귀를 때렸다.

"같은 반 친구라고 봐줬더니 끝까지 기어오르네. 젖마나가."

 동훈이는 재미가 없어졌다는 듯 일어서서 가버렸다. 아이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무시했다. 나는 계속 교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막 아프고 그랬지만 동훈이가 나를 같은 반 친구라고 부른 것만 기억에 남았다. 그렇구나. 아직 동훈이랑 나는 같은 반 친구구나. 눈물이 나긴 했지만 기분이 좀 좋아졌다. 아직 같은 반 친구니까. 동훈이랑 나랑.


 저녁을 먹을 때만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아빠나 엄마, 두리랑 같이 있지만 하나는 쏙 빠져 따로 논다. 학원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가거나. 하지만 밥 먹을 때 하나는 식탁에 같이 앉는다. 식사시간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하나랑 같이 있으니까. 하나는 언제나 찡그린 표정이다. 소화 한번 잘 되게 생겼다.

 아빠는 학교는 어떠냐고 나랑 하나한테 물어보고, 둘 다 그냥 그렇다고 대답한다. 장남 하나는 학교 다니는 거 그렇게 좋아하더니 왜 또 그저 그러냐는 아빠. 나는 잠깐 하나를 노려보았다.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빠는 이상하게 본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냥. 피곤해서. 아빠는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넘어간다. 하나의 입이 열린다. 새아빠. 나는 뜨끔해져서 하나를 바라봤다. 물통 좀 주세요. 아빠는 하나가 부탁해서 기쁘다는 듯 물통을 준다. 밥알이 씹히지 않고 넘어간다.

 하나가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나를 젖마나라고 부른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까. 나는 하나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오물조물 입이 열심히도 움직인다. 하나는 밥 먹을 때 입을 벌리지 않는다. 쩝쩝 소리를 내는 것을 엄청 싫어하기 때문이다. 꾹 다문 입이 옆으로 위로 길어졌다 짧아진다. 통통한 입술이 오물거린다. 아빠는 말이 많아졌다. 하나는 아빠를 닮아 학교에서 공부도 잘 하고 아이들한테도 인기 있을 거라고. 그때 하나가 웃었다.

"그럼요. 아이들이 하나 주제가도 만들어 주었는걸요."

 저. 썅년.

"하지 마, 유하나."

 하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콧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젖마나. 아빠는 똥마나. 누나는 좆마나. 나는. 나는 하나에게 밥그릇을 던졌다. 탕, 소리가 나더니 하나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하나는 콧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숟가락을 멈췄다. 두리는 가만히 있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달려가서 하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나는 하나야! 내가 하나라고!"

 아빠가 나를 막았다. 나는 하나를 한대밖에 때리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엄마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두리는 계속 울었다. 밥그릇은 깨져있었다.

"왕따 주제에..."

 하나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식사가 끝났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울음이 나온다. 이제까지 잘 지내왔는데. 가족들이랑 잘 지내왔는데. 학교 일도 잘 숨겨왔는데. 서럽고 서럽게 울었다. 아빠는 말없이 걷는다. 나는 훌쩍이면서 뒤를 따를 뿐이다. 때리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는다. 어느새 아파트 단지를 지났다. 날 집 밖에다 버리기라도 할까 무서웠다. 울음이 장마처럼 거세졌다. 아빠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이스크림 좀 몇 개 골라. 하나랑 두리랑 엄마 몫까지."

 아빠는 계산을 치루더니 태연스레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쭈쭈바를 빨았다.

"원래 형제 싸움이 심하다지만 여자애 얼굴을 다치게 하면 안 돼. 하나도 여자잖아. 알았지? 아빠는 하나를 믿어요. 착한 아이니까. 그렇게 화낼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화가 난다고 물건을 던지거나 주먹을 휘두르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잠자코 쭈쭈바를 빨았다.

"아직도 하나라는 이름이 겹쳐서 사이가 나쁘냐?"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가 하나면 뭐 어떻다고 그래."
"아빠, 그럼 내가 하나하지 말라는 거야?"

 아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모두 다 하나라는 거지."
"모두 다...하나?"
"응. 모두 다 하나. 가족이니까. 나는 하나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


"단세포는 글자 그대로 세포가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큰 단세포라면 여성의 난자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단세포는 바로 타조알이구요. 타조알은 15cm에서 17cm나 됩니다. 하지만 생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단세포 생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단세포 생물의 대표로는 아메바가 있습니다. 아메바는 위족으로 움직이는 원생동물의 일종입니다. 주로 담수나 습지에서 발견되지만 동물의 소화관 속에 기생하는 종류도 있습니다. 아메바는 입이 없는데 어떻게 먹이를 먹을까요? 답은 바로 자신의 몸으로 먹이를 둘러쌓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세균 따위를 식포로 감싸 소화하는 식세포 운동으로 에너지를 섭취하지요. 아메바의 번식은 자기 분열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분열한 또 다른 아메바는 이전의 아메바와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학계에서는 아메바는, 몇 만 몇 억 년 전의 그 유전자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아메바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습니다."

 몇천년 몇만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하나. 멍하니 텔레비젼을 바라보았다. 나는 하나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나와 하나는 언제까지나 같이 지낼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다음 주도. 다음 달도. 10년이 지나도. 우리가 집에서 독립하고 돈을 벌어도 명절이면. 제사면. 다시 만난다. 그때까지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아빠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가족이니까. 나는 하나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


 오늘은 학부모참관일이다. 동훈이에게는 참관일에만은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조르고 졸라 다짐을 받았다. 아빠가 늦는다. 벌써 5교시가 끝났는데. 다른 아이들 부모님 중에는 이미 집에 간 분들도 계시는데. 아빠랑 엄마랑 같이 오시면 좋을 것을. 아빠는 휴가를 내셨다. 참관일에 오시려고.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아빠랑 나는 하나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 반 6반에. 엄마는 하나반 9반에 가기로 했다. 끝나고는 엄마랑 하나, 두리를 처음 만난 호텔 중국집에서 외식하기로 약속했다. 7000원짜리 짜장면과 깐풍기. 아침부터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이 조금 다른 의미로 바뀌기 시작했다.

 6교시가 시작되게 시계바늘이 자꾸 돌아간다. 선생님은 세 번째로 아버님이 오시기로 한 것이 맞냐고 물어보셨다. 동훈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울기 직전의 나를 보고 멈췄다. 하나일까. 아빠는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신 것일 지도 모른다. 휴가를 내지 못하게 되셨다던가.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던가. 아빠가 못 오면 엄마가 나한테도 오면 좋을 텐데. 하나 때문일까. 나는 마음을 고쳐먹으려 애썼다. 아니야. 엄마는 잘못 없어. 하나도 잘못 없어. 우리는 하나니까.

 휴대폰을 빌려서라도 아빠한테 전화해볼까말까 고민하는 사이 6교시가 시작되었다. 수업 중에라도 아빠가 오지 않을까 나는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렸다. 9반에 들러볼 걸 후회가 되었다. 엄마를 만나서 우리 반에도 와주면 안 되냐고 물어봤을 텐데. 나는 엄마가 우리 반을 지나가기라도 하지 않을까 빌었다. 어쩌면 도중에 아빠를 만나서 같이 들어올 수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생각해봤다. 그 중의 단 하나라도 이루어지길. 마지막 1분 1초를 남기고서라도 아빠가 교실에 들어오길. 마지막 1분 1초까지 빌었다.

 마침종이 울리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나. 엄마. 수업 끝나고라도 엄마가 선생님을 만나야 하니까. 복도에서 뛰면 나쁜 학생이지만 그래도 빨리 엄마가 보고 싶었다. 9반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하나가 보였다. 하나. 하나. 하나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그러다 알겠다는 듯이 속삭였다. 들리지 않았지만 알았다. 입모양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그저 알았다. 너도구나. 그렇게 속삭였다.


 집에 도착하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두리는 언제나 그렇듯 꺅꺅거렸다. 나와 하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 개월이래. 너희 동생이야."

 하나는 그렇냐는 듯 짐을 챙겨 집을 나갔다. 학원에 갈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아빠나 엄마나 오늘이 수업참관일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었다는 듯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도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엄마 배 속에 있는 저 아기다. 나는 하나가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두리가 내 손을 붙잡았다. 두리는 나나 하나가 화를 내면 꼭 이런다. 두리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구나."

 두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두리를 안아줬다. 두리의 땀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난다. 달착지근하면서도 힘찬 냄새. 나도 이랬던 날이 있었을까. 두리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 두리도 나를 꼭 껴안는다. 두리를 감싸 안는다. 아메바가 먹이를 식포로 감싸듯이. 위족으로 미생물을 감싸듯이. 식세포 운동으로 아메바와 먹이가 하나가 되듯이.  

"두리야."
"응."
"하나가 되자."

 두리가 끈적하게 녹아 붙는다. 먹다 뱉은 엿가락처럼. 그렇게 하나가 된다. 아빠와 엄마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비명을 지른다. 아까까지의 행복한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아빠와 엄마는 뒷걸음질 친다. 두리가 달라붙어 더 무거워졌지만 나는 애써 아빠와 엄마한테 다가갔다. 왜 그래. 우리는 하나잖아. 나는 아빠와 엄마도 껴안는다. 엄마의 배 속에서 잠들어있을 아기도 껴안는다. 모두 내 몸에 달라붙었다. 먹다 뱉은 엿가락처럼. 그렇게 하나가 된다. 나는 두리고 아빠고 엄마고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아기다. 나는 하나다.  


 나는 닥치는 대로 하나가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도 이젠 내 몸 아래 어딘가에 있다. 동훈이는 특별히 좀 높은 부분에 있게 해주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하나가 된 것도 동훈이다. 내 몸은 이제 사람을 억지로 뭉쳐놓은 탑처럼 보인다. 인간의 탑. 이제는 많이 커져서 63빌딩이랑 높이가 비슷하다. 얼마 전 몸크기를 재보러 갔던 것이 처음으로 가족끼리 63빌딩에 간 것이었다. 나는 그 꼭대기에 뿔처럼 솟아나있다. 하나고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동그란 몸을 공처럼 굴렸지만 이젠 그러기엔 몸집이 너무 커졌다. 파워레인저에 나오는 괴물들처럼 말이다. 아래쪽에 있는 나들의 팔이나 다리가 다 뭉개지기는 하지만 애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수밖에 없다. 도로가 좁아서 내 몸으로 주변 건물들을 짓뭉개야 한다. 그러니 좀 아파서, 어서 빨리 더 몸집을 키워야 할 것 같다.

 서울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하나가 되었지만 서울 사람들의 백분의 일도 아직 못 되는 것 같다. 하나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쉬웠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커다랗게 된 내가 서울을 누비자 군대가 출동했다. 나를 고깃덩어리라고 부르며 미사일을 쏘았다. 나는 그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인데. 군대가 출동하자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온 몸에 달린 몇 십만 명의 입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나가 되기 힘든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다. 나 말고 다른 하나들이 나타났다. 백하나 구하나 추하나 정하나 강하나 임하나 전하나 고하나, 하나하나 다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하나들이 나처럼 되었다. 자기들이 진짜 하나라면서. 곳곳에 달린 입으로 소리 높여 외쳤다. 그 덕에 서울에는 송충이처럼 기어 다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들이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고 힘이 세다. 내가 진짜 하나다.

 유하나 고것은 이번에도 귀찮게 한다. 아빠랑 엄마랑 두리랑 이름 모를 아기랑 모두 나랑 같이 있는데 하나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도 자기가 하나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만큼 커다란 고깃덩어리는 유하나밖에 없다. 머리가 좋아서 나보다 늦게 하나가 되었으면서도 크기가 나랑 비슷하다. 우리 둘이 아직 맞붙지는 않았다. 서로 더 많은 고깃덩어리 하나들을 잡아먹어서 상대보다 더 커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못된 아이다. 아빠도 나고 엄마도 나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이길 거다. 내가 이겨서 하나님이 될 거다. 오늘도. 내일도. 다음주도. 다음달도. 10년이 지나도. 몇천년 몇만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하나. 아빠 말이 옳다. 우리는 하나다. 다만. 하나가 둘이다. 너무 많다.  



덧//
파워레인저는 원래 어른이 보는 거다!!

덧2//
에...변명만 계속하기도 지치네요.
댓글 12
  • No Profile
    화성해달 09.07.29 01:29 댓글 수정 삭제
    와. 하나라는 일상적인 개념이 이렇게까지 갈 수 있네요. 그리고 그 하나라는 개념을 이름과 연결시켜서 '이름'과 정체성에 대한 테마까지 아우르고 있구요. '하나'라는 어휘의 형식으로 가능한 중의적인 표현이 내용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도 단순한 언어유희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들 역시 전체 흐름과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동일자가 되어가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로 치달려가는 전체 구조 속에 치밀하게 얽혀있네요. 갈등하는 '둘'의 대립구도가 이야기의 마무리부분까지 깔끔하게 이어져서 '그리고 모두는 하나가 되었다'식의 식상한 결말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간만에 형식미가 출중한 작품을 본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이 쪽팔리게 만드네요. 어휴...
  • No Profile
    ida 09.07.29 11:59 댓글 수정 삭제
    하나가 둘이군요. 내가 하나고 네가 하나고 우리가 하나고 ... 이번에도 정말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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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c 09.07.29 15:27 댓글 수정 삭제
    화성해달님//과찬이십니다. 재주가 이뿐이라...^^;
    ida님//ida님한테 캐리커쳐 받는 그날까지 힘내겠습니다 :)
  • No Profile
    Rei 09.07.29 23:03 댓글 수정 삭제
    글에서 내공이 느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좋았어요^^
  • No Profile
    ida 09.07.30 00:53 댓글 수정 삭제
    옷, 제 캐리커쳐 받겠다는 거죠! 힘내십쇼! (안그래도 작가님들이 저한테 캐리커쳐 부탁도 안하고 그려줘도 안 써서 우울한 캐리커쳐 그리는 사람.... (잠깐, 뭔가 본분을 망각하지 마!))
  • No Profile
    dcdc 09.07.30 01:58 댓글 수정 삭제
    Rei님//다음에는 영혼까지 담아보겠습니닷. 어쩌면 힘을 빼서 더 좋은 글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
    ida님//넵, 정진하겠습니다 +_+
  • No Profile
    뫼비우스 09.08.04 23:0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하나 하나.. 발상이 기막히내요..
  • No Profile
    dcdc 09.08.05 22:58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tt 09.08.14 18:36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No Profile
    dcdc 09.08.17 00:40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읽으신 분들이 많아 다행입니다 :)
  • No Profile
    irlei 09.08.25 13:4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dcdc 09.08.31 20:2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덧글 다신 것을 이제야 발견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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