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화이트 실루엣(White Silhouette)


고향은 극광을 뜨는 해만큼이나 볼 수 있는 북설원의 노스프레임.
끝없는 추위와 기근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세상의 끝에서,
눈보라를 몰고 온 작디작은 백은의 소녀를 만났다.
그것은 마치 하얀 환상처럼 아름다웠고 현실감이 없었으며, 또한 신비로웠다.



“전염병이 퍼졌어. 이런 추위 속에서 왜 전염병이 퍼졌는지는 몰라. 그 이유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서 이윽고 잊혀지겠지.”
화로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으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말했다. 북설원의 비경(秘境)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침엽수의 정원 노스벨드에서 나타난 백은(白銀)의 소녀는 내가 쥐어준 찻잔을 턱을 살짝 가리도록 들고서 김을 쬐었다. 그러면서 시선을 이쪽으로 하고 있어 말하기가 훨씬 편했다.
“고대(古代)라고 하기엔 아직도 선명한 왕조는 고작 전염병 때문에 무너진거야. 그 제국이 있던 곳은 세상의 끝, 북설원이었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지. 왜냐면 시체가 썩지 않았기 때문이야. 시체가 썩지 않고 죽을 때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거든? 그래서 다른 땅의 여러 축복과 의료진이 조사를 위해 찾아갔고 곧 결론을 지었지. 이것은 전염병으로 인한 것이다, 라고 말이야.”
거기서 검지를 들어올리고 나는 한마디를 했다.
“하지만 난 알아. 제국에는 어떤 유명한 예언이 떠돌고 있었으니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양손으로 쥐고 살짝 기울인 그녀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두 눈으로 말을 하라는 듯 재촉해온다. 나는 웃으며 잔을 어깨높이까지 들어보였다.
“제국이 멸망할 당시에 예언이 전해졌었어. 한 소녀가 제국을 멸망하는 씨앗이 될 거라고. 말 그대로 전염병이 퍼졌지. 그 전염병이란 피를 마르게 하는 것이었어. 시체들은 모두 피가 없어져 있었지.”
“피…….”
백발의 소녀는 혈기가 돌아 붉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 어떤 전염병이었을까, 한 나라를 역사 속으로 밀어놓은 병 말이야. 노스프레임을 지나 노스벨드를 건너면 땅이 호수인 곳이 있어. 거기가 바로 비경이라고 까지 알려진 세상의 끝이지. 그리고 제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너는 어디서 왔니?”
소녀는 잠시 주저하는 듯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됐든 좋다. 북설원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넓기도 넓어서 사람을 만나기가 극광(極光)을 잘라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런 주제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무시하고서 찻잔을 들어 물을 내려다보았다. 수를 셀 수 없을만큼 여러번 실험해왔기에 차는 매우 맛있게 우려졌다. 일례로 차를 성공적으로 우려낸 이후 물은 너무도 짙어져 내 얼굴을 비출 수 없게 되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김이 오르는 차를 들어 입가에 머금었다.
밖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소녀 역시 눈보라에 휩쓸려 위태하게 찾아왔다. 나는 막 피아그를 사냥해서 가죽을 해체하던 차였다. 소녀에게 있어선 조금 무서운 광경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저하던 나를 보면서 소녀는 꺼질 것 같은 소리로 부탁했고 나는 즉시 소녀의 말을 수락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소녀는 내 말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큰 눈에 작지만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북의 대지에서 가장 여성다움으로 꼽았다고 하는 붉은 입술. 보기만해도 즐거워지는 미모였지만 조금은 처연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그게 조금 불만이었다. 조금은 웃으면 좋을텐데. 뭐 놀란 표정도 굉장히 귀여우니까 상관없을까? 십년 후에는 또래 남자들의 가슴을 쿵쾅쿵쾅 울리는 미모의 여성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점쳐지는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하고 찻잔을 바라보았다. 나는 소리죽여 차를 홀짝였고 소녀는 조금도 움직임없이 말도 없었다. 타닥타닥, 하고 장작에 불이 붙어 죄어드는 소리가 이 산장을 울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눈보라가 그쳤는지 쾌청한 바탕이 보였다. 푸른 하늘과 저 멀리 눈에 덮여있는 침엽수의 숲. 그리고 바깥에는 해체하다 만 피아그도 있을 것이다.
피아그로 무엇을 요리할까. 피아그는 대단히 맛있는 고기를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 맛만큼이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모처럼 눈에 띄었다. 야행성인데 어째서 한낮에 돌아다닌 것일까?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진미를 포기할 수야 없지. 나는 마을 최고의 사냥꾼. 게다가 현직이었다. 녀석을 잡지 못하면 사냥꾼의 이름이 울겠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눈보라 속을 힙겹게 추적했고 두 시간을 허비한 끝에 녀석을 잡을 수 있었다.
혼자서 먹기엔 양이 조금 많다. 얼려서 마을로 가져가면 다들 좋아하겠지. 그것을 요리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피아그를 산장까지 끌고와 해체하기 전까지 내 생각은 그랬다. 기다렸다는 듯 소녀가 왔을때는 아, 이런 이유 때문이구나. 하고 하늘의 조화에 감탄했다.
피아그의 고기는 무척이나 맛이 있다. 그래서 요리 실력이 별로인 나같은 사람이 써도 진미를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피아그의 육질은 매우 부드러워 어린 아이나 여성이 먹기에 매우 좋았던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조금 기다리고 있을래? 고기를 떼어내서 요리할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소녀는 겸양 아닌 사양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기를 싫어하나? 하지만 소녀의 태도로 보아컨대 피아그의 고기라 말해도 사양할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일까?
“그보다, 귀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역시 그랬구나. 하지만 귀하(貴下)? 대단히 고풍스러운 말을 사용하는구나. 나는 소녀의 표현에 조금 감탄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소녀가 괜찮다고 말했으니까 고기 해체는 조금 나중에 하자. 나 역시 아직 배가 고프진 않고 말이야. 나는 정말이지 대화에 굶주려있었던 것 같다. 소녀가 말을 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워지다니.
“이름을 말하는 건 어려운게 아냐.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어째서인지 알겠어?”
“북쪽에서는 상대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하기 때문이었죠.”
“잘 알고 있네.”
소녀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녀는 아마 나와는 다른 마을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 그것도 이미 멸망한지 백년이 지난 제국의 터에서. 제국의 터에 새로 마을이 생겼었구나.
나는 조금 감탄했다.
하긴 저 침엽수림 노스벨드만 지나면 옛 제국의 터가 나오니까 거기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지 족히 수십 년은 되었으니 희귀한 짐승은 물론이고 가짓수도 많겠지.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조금 꿈틀거렸다.
“예를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의 이름은 디어칼테. 디어칼테 카이디 디오릭스라고 합니다.”
“디어칼테(氷雪)? 얼음눈?”
내 반문에 소녀, 아니 디어칼테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놀란 표정인지라 소녀다운 풋풋함이 묻어났다. 백발에 그만큼이나 하얀 피부. 그리고 투명한 눈동자. 전체적으로 흰색을 띈 외양이라 소녀였지만 조금은 차가울 거라고 짐작한 내가 어리석었다. 지금 내 앞의 소녀는 누구보다도 소녀다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역시 아시는군요. 이제는 누구도 모르는 이 제국어의 의미를.”
하지만 놀란 표정도 잠시, 소녀는 고개를 떨구고 조금은 씁쓸한 듯이 말했다.
“역시라니? 무슨 소리야 그건? 우리 마을 사람들도 자주 쓰는 말이라고. 혹시 그쪽은 제국어를 쓰지 않아?”
“그쪽이라니 무슨 말씀인가요?”
“네가 살던 마을 말이야.”
“제가 살던 마을 말입니까?”
“응. 네가 살던 마을 말야. 혹시 이주민이야?”
디어칼테는 망연히 나를 응시했다. 그 투명한 눈동자가 조금은 뿌옇게 변했다. 혹시 울려 하는 것일까? 조금 당황했고,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이닥쳤다.
그렇다. 소녀가, 저 약하고 어린 소녀가 혼자서 노스벨드를 지나 이곳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냥꾼인 나조차 노스벨드의 끝없는 침염수림 속에서는 방향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걸 소녀가 헤쳐왔다.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을 혹시……. 무너진거야? 부서져서 도망쳐 온 거야?”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언성이 높아진 그 추궁에 동그란 어깨를 움츠리며 디어칼테는 몸을 떨었다. 그러다 나를 보면서 희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싫은 생각을 조금 했을 뿐이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사양하지 마. 나는 너를 돕고 싶어. 그런 표정을 하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사양하지 마.”
어째서 디어칼테는 사양하는 법을 먼저 배운 것일까. 소녀는 극도로 자신에게 이로운 호의를 거절했다. 마치 그것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음눈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잇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괜찮습니다.”
소녀는 처음 눈보라를 몰고 왔던 것처럼, 조용히 두 손을 아랫배에 포개고 말했다.
“저는 문제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름을 말했습니다. 귀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소녀의 말은 조금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얼굴을 펴고 환하게 말했다.
“난 시그문트. 시그문트 올리거. 사냥꾼이야.”



“북제(北帝)께서 가호하셔서 길을 잃은 피아그를 선사하셨거든. 야행성(夜行性)인 피아그가 겁도 없이 낮에 마을의 최고 사냥꾼인 내 앞을 거침없이 지나가더란 말이야.”
“…….”
소녀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분명히 관심이 동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조금 과장도 섞고 동작까지 취하며 사냥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피아그는 북제의 선물인걸.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피아그를 식량으로 삼기로 했어. 그 후 우리들의 공복을 채워주는 것이지.”
“쿡, 재밌는 표현이군요.”
지금 우리들을 말하자면 즐거웠다. 아까와는 달리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식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디어칼테는 숨기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았기에 침묵을 고수했고 나는 스스로의 호의를 감추지 못해 씁쓸해했다. 식사하지 않겠냐고 묻기 전까지 우리는 답답한 침묵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으니까.
지금 대화도 평행선을 긋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소녀의 작고 붉은 입술에 피아그의 기름이 묻어 반짝거렸다. 소녀는 빙그레 미소지었는데, 정말로 예쁜 웃음이었다.
“피아그의 고기는 기가 막히게 맛있지. 나 역시 한달에 한번 먹어볼까 한 거니까. 노스벨드 이남쪽에는 엄청나게 드물거든. 물론 밤에만 나타나는데다 날렵하기 그지 없어서 잡기는 힘들지만, 보이면 이 사냥꾼의 추적을 벗어날 수 없어.”
“과연 그러하군요. 정말 맛있습니다. 귀하도 드시길.”
“말하지 않아도 벌써 세 그릇 째야. 몰랐지?”
“예, 몰랐어요.”
순수하게 디어칼테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나는 왠지 의기양양해졌다.
그래서 다시 토막으로 잘라낸 피아그의 고기를 입에 물었고 뼈를 잡고 힘껏 씹었다. 내가 세그릇째 먹는 동안 소녀는 그릇에 담겨있는 고기의 절반을 먹었다. 섬세한 손가락을 놀려 내가 건네준 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모습은, 오래전 멸망한 제국의 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귀족과는 말 한번 제대로 나누어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예법이랄까, 그런 기품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말이야.”
“말씀하세요.
소녀는 조각조각 썰어놓은 고기조차 조금 튼지 포크로 고정하고 칼로 썰어내다 그대로 자세를 멈추었다.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하고, 그 자세 그대로 멈춘 그녀는 역시 내가 생각한대로 굉장히 예의규범이 발랐다.
우리 마을에는 아무도 그렇게 먹는 사람이 없지만, 언젠가 한번 예의바른 모험자가 찾아왔을때 그를 훔쳐본 기억이 있던 나는 그 자세의 특이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디어칼테는 혹시 귀족(貴族)의 영애(令愛)야? 아니, 그러니까.”
하지만 제국의 귀족일리는 없다. 세상의 끝, 얼어붙은 호수 위에 존재했던 제국은 이미 몰락했으니까. 하지만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은 후예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나 그런 분이 귀족이셨어? 그래서 마을에 살면서도 그런 예의범절을 가르쳤어?”
“부모님께서 귀족이란 말씀이군요. 그렇진 않습니다.”
디어칼테는 딱잘라 말했지만 역시 이상했다. 귀하라고 하는 말의 표현부터 범상치 않았던 터였다. 내 주위는 그런 표현을 쓰는 사람이 한사코 없었다고, 그렇게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디어칼테는 부정했다. 귀족의 후예가 아니라면…….
“하하, 그렇다면 부모님이나 조부님들이 그런걸 좋아했던 모양이구나.”
“그럴 수도 있겠군요.”
디어칼테는 호수가 얼어붙은 듯한 투명한 눈을 들고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지금 제 웃음에는 깊은 의미가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마주 웃지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웃음에 대한 단편적인 느낌만을 말하자면 어린 소녀가 지어서는 안될 부류의 것이었다고 할까.
“질문이 끝났다면 계속 식사를 해도 될까요?”
“아, 아아. 물론이야. 많이 먹어. 아직 많다니까?”
“그러겠습니다.”
디어칼테는 다시 허리를 펴고 턱만 조금 아래로 내린채 똑바른 자세로 식사를 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품위가 있어 나 역시 그렇게 해볼까 하고 양손으로 들고 있던 뭉텅이를 내려놓고 내팽개쳤던 칼과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디어칼테의 앞에 놓인 것과는 달리 뜯기 좋게 잘라놓은 뭉텅이라 자르기부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뼈가 있어 중간 이후부터는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쿡쿡, 재밌는 분이시군요.”
“하, 하하. 그렇게 보인다니 기쁘군. 그보다 디어칼테.”
“네. 말씀하세요.”
“웃으니까 예쁘다. 정말로. 아아, 꼬시려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흘려들어. 그냥 생각만을 말한거야. 그리고 조금, 편히 말해줄 수 없을까?”
“그것은 곤란합니다.”
식기를 내려놓고서 디어칼테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이것은 저의 프라이드에 관련된 문제니까요.”
“프라이드라니……. 존댓말과 고풍스러운 말투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헌데 귀하는 언제부터 여기서 살고 계셨습니까.”
“미안하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도 확실치 않은 곳이다보니 하루하루를 잘 기억할 수 없어. 알고 있잖아? 이 비경은 극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낮밤이 거의 없다는 걸 말이야. 물론 피아그 같은 태생이 야행성인 녀석들이야 잘도 돌아다니지만.”
내 말에 디어칼테는 섬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을에는 언제 들어가십니까?”
“아, 그러고보니 그것부터 이야기했어야 했구나. 고향을 잃고 이곳까지 왔으니 얼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겠지?”
디어칼테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물었지만 예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혼자 있을 때의 고독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길었다. 그래서 정적에 익숙해진 줄 알았건만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짧은 침묵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으니까.
“그보다 귀하의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달칵, 하고 식기가 나란히 놓여졌다. 칼과 포크는 정확히 수평을 그린채 눕혀져 있었다. 나는 디어칼테가 그래도 고기를 다 먹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은 대하기 어려운 소녀였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이야기라면 뭘?”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걸 가르쳐주세요.”
“그거라면?”
“귀하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냥해 왔으며, 또한 얼마나 되는 외지인을 만났던가요.”
“디어칼테, 알고 있겠지만 여기는 사람이 거의 돌아다니지 않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사냥꾼은 귀하 혼자뿐이라는 이야기인가요? 마을에도 사냥꾼이 귀하 혼자이던가요?”
아아, 그런걸 묻고 있었던 거군. 왜 혼자서 사냥을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디어칼테, 그것은 사냥꾼이 혼자서 돌아다니기 때문이지. 가끔씩 패를 이뤄서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아주 거물, 그러니까 뭐랄까. 갑자기 말하려니 힘드네 제국어로 말해도 될까?”
“말씀하세요.”
디어칼테에게 허락을 받은 나는 제국어를 예로 들어가며 말했다. 제국어는 나같은 사냥꾼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용법도 많고 혀도 꼬였지만 그래도 그런 녀석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쉬운 단어가 있었다. 거물, 덩치큰 짐승이나 흉포한 짐승. 그리고 일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폭군.
“사냥꾼이 여럿이 모여 다니는 경우에는 카이디를 사냥하기 위해서야. 카이디라는 단어는 알고 있지?”
“물론이에요. 계속 말씀하세요.”
순간 나는 디어칼테의 풀네임을 상기했다. 디어칼테 카이디 디오릭스. 그 이름을 생각하며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던 것일까, 디어칼테는 눈치가 빠르지 않아 보였는데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의 미들 네임은 카이디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응, 그 카이디를 사냥하기 위해서 사냥꾼들이 모이는 경우는 많아. 하지만 대개의 사냥꾼은 혼자야. 우선 기본적으로 여럿이 있으면 사냥 자체가 효율적이지 못한데다 넓은 광야와 평원을 질주하다보니 자신감에 가득 차 있고, 게다가…….”
“자신밖에 믿지 않기 때문에.”
“맞아. 쟁쟁한 사냥꾼들이 모여도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불화(不和)밖에 생기지 않는 거야.”
내 말에 디어칼테는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서,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로,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제국어로 말을 꺼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군요.”
그 모습은 너무 슬퍼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어칼테는 울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애처로운 소리를 토했다.
“이제 제가 있으니 진실을 아셔야 할 때가 오겠죠. 마을에는 언제 돌아가는 건가요.”
“마을이라, 그러고보니 슬슬 가야할 때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괜찮아? 울 것 같았는데.”
내 위로를 받고서 안색이 창백한 디어칼테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홍조가 서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울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 역시 빙그레 웃어주었다.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리죠.”
디어칼테가 한 말은 대단히 유명한 경구(警句)였다. 북제국에서부터 유래한, 제국인 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명언이었다.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북설원에서는 달랐다.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린다. 그만큼 춥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여기에 살이 덧붙여지면…….
“그래서 북설원의 사냥꾼은 세월도, 과거도 잊어버린다던가요.”
추위는 감각마저 둔화시킨다. 추위가 몰고온 바람은 청각을 마비시키고 통각을 멈추어버리며, 때문에 자신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채 풍상 속에서 영원히 얼어붙어가 버린다. 북설원에 던져져 죽어버리면 추위도 느끼지 못한채 끝없이 졸려갈 뿐이다. 그리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든다. 추위와 한파는 살이 썩는 것을 방해하고, 그렇게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북설원의 오지에서는, 그 추위에 세월도, 과거도, 그리고 사냥꾼의 초침마저도 멈춰버리는 것이다.
그랬다. 실상 이 경구는 북설원에서 살아가는 제국의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은근히 자랑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다른 대륙의 사람들은 시간의 초침이 얼어버리듯 그렇게 영원히 잠들어버린다는 것을 풍자했을 뿐이니까.
“그런 말도 알고 있었네? 첫 번째 말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말은 사냥꾼정도나 알 수 있는 말인데. 어디서 들은거야?”
“그저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말끝을 흐리며 디어칼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갈하고 신비롭게 주시했다.
“마을로, 돌아갈까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그리고 소녀의 조용한 말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피아그의 맛있는 고기를 마저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채, 이곳에 왔던 것처럼 몸과 옷과, 그리고 사냥꾼으로 살 수 있게 해준 무기만 챙기고 말이다.
“안내할게. 마을은 현지인이 아니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나조차도 헷갈리니까 말이야.”



“지금은 밤인가요, 낮인가요.”
“낮이야.”
“확신하고 계시군요.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나요?”
“어, 음. 그게 밤은 어스름이 져. 어차피 해가 안뜨는 건 똑같지만 시간대 마자 돌아다니는 짐승들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밤보다는 낮이 조금 더 따스하거든.”
“추위로군요.”
“그리고 그림자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그림자가 없지만 조금 맑은 날에는 그림자에 따라서 낮과 밤이 바뀌기도 하니까 말이야.”
디어칼테는 한파가 몰아치는데도 옷을 여미고 있을 뿐, 추위에 몸을 움츠리거나 걸음이 느려지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저 숲을 지나올 수 있었겠지. 나 역시 낮이라 그런지 추위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때문에 기운차게 움직였다.
“제국이 멸망한 것은 전염병 때문이라고 하죠.”
귓가에 울려퍼지는 바람. 우리의 몸을 가르고 눈과 추위를 몰고 맹렬히 지나간다. 시간도, 정적도, 고요함도, 그리고 그 어떤 감정마저도 빼앗아가 버리는 북설원의 한파. 마치 졸려서 자고 싶은데 하품도 나오지 않는 기분을 맛보며 걷기를 몇시간 째. 디어칼테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의미도 없이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겠지. 보기조차 거부하고 그저 발길 가는 대로만 따라갈 뿐인 그런 이동.
디어칼테가 했던 경구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전염병은 순식간에 부강한 제국을 멸망으로 밀어 넣었어요. 제국은 병마를 거의 모르고 지냈죠. 먼 대륙에서 흑사병이니 전염병이니 하는 것에 대책없이 괴로워 할때도, 이 시간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는 병마조차 얼려버렸으니까요.”
실제로 고뿔조차 걸리지 않는 것은 북제국이 유일했다. 너무 춥기 때문에 병마(病魔)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염병이 퍼졌는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전염병이라면 그저 추위속에서 얼어붙고 말겠지만 그 추위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전염병이라면 글쎄.
“피가 사라져서 결국 창백한 시체가 되어버리는 병. 발병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병. 제국에서만 발병한 병……. 지금껏 유래없이 일어난 치사율 100%의, 그것이 병이라고 생각하세요?”
“디어칼테는 다르게 생각해?”
“병이라고 한 것은, 그래요. 하룻밤 사이에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겠죠.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일반적으로는…….”
일반적으로는, 이라고? 디어칼테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서도 조금도 춤지 않다는 듯이 정면만을 바라보면서 걸어가고 있는 소녀. 그 옷차림하며, 표정하며 조금도 북설원의 사람 같지 않았다. 때문에 신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자세히 바라본 결과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저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북설원에는 많은 미신(迷信)이 있답니다. 미신이 정설로 굳어진 경우도 많죠. 하지만 어째서 굳이 병이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그래요. 그것은 아마도 병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수단, 그리고 행위…….”
말하는 소녀의 코에서건 입에서건, 김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니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도 호흡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체온은 북설원의 바람보다 높았다. 당연히 김이 나는 것이 옳다. 일순간 오한이 들었다.
동시에 멈춰 섰다. 등뒤에 걸머쥔 무기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지경이었다. 가슴이 떨렸다. 손가락 끝이 한기 때문에 저려왔다.
“디어칼테.”
“말씀하세요.”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
너무나도 차갑게, 소녀는 고개를 돌리며 뒤쳐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백은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시기에 귀하께서는 그리도 창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가요.”
호흡이 빨라졌다. 아주 옛날 전력질주를 했던 것처럼 숨이 가쁘다. 가슴이 아파왔다. 심장이 크게 뛰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리죠.’
마을에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제국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모여사는 순박한 이들이. 그들은 사냥꾼들을 기다리면서 이 추위로 가득한 북설원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전염병을 알지 못한다. 일순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을로 가자고 말했던 것이, 지금 와서 문제가 되나요?”
소녀는 여전히 사람을 홀릴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음색으로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그 소리를 털어냈다. 한파가 몰아쳤다. 하지만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까,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묻고 싶은게 있어.”
“대답해드리죠.”
“어째서 디어칼테, 너는 숨쉬지 않는 거지?”
“그래요. 병이란 그런 것이죠. 병에 걸리면 더 이상 숨쉬지 못하니까요.”
“…….”
이것이 죽음이라는 기분이었을까.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는데 새하얀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 기분이 들었다. 거물이라는 의미의 폭군, 제국어로 말하면 카이디가 노호하여 동족을 사냥하는 사냥꾼에게 단죄를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은, 디어칼테 너는 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거야?”
“오랫동안…….”
디어칼테는 두 눈을 감고서 여리게 웃어 보였다.
“오랫동안 동족(同族)을 찾아 헤메었습니다. 그래요, 카이디. 이제 슬슬 꿈에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팔짱낀 두 손을 풀어 마치 나에게 선사한다는 듯이 내밀어 보였다.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리죠. 하지만 저와 귀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죠. 북설원의 추위는 더 이상 저와 귀하의 초침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디어칼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전력으로 질주해서 마을로 향하세요. 저는 뒤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직시하세요. 그래요, 아마도 귀하의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겠지요.”
나는 사냥꾼이다. 때문에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북설원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 더 많으며, 그런 곳을 짐승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운없게 카이디라도 만나면 생명은 다했다고 봐도 옳았다. 하지만 나는 사냥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냥꾼이며, 또한 상대방을 위협할 수도, 혹은 죽일 수도 있었다.
“디어칼테, 미안해. 나는 네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알아. 넌 마을로 갈 수 없어. 내가 막겠어!”
그리고 창을 들었다. 바람이 이렇게 거셀 때는 활을 쓸 수 없었으니까. 나는 디어칼테가 있는 방향으로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디어칼……. 어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디어칼테는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섬뜩한, 그런 오싹함이 밀려들었다. 디어칼테의 목소리가 들릴리 없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렇다면 저는 핏기 한점 없는 피아그의 스테이크를 먹은 곳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귀하는 현지인이 없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마을을 다녀오세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세요. 아니, 돌아오지 말라고 해도 돌아오겠지만 말이에요.”
돌아보며 거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창을 휘둘렀지만 이미 등 뒤에서도 디어칼테는 없었다. 시간의 초침조차 얼려버릴 추위를 몰고 온 한파가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채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고, 마을로 달려갔다.
디어칼테는 누구지? 소녀가 숲을 빠져 나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된 고독에 나는 그런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정말이지 오랜 세월을 그렇게 혼자 지내야만 했다.
그랬다. 살던 나라가 사흘 만에 죽음이 내려앉은 곳으로 변하고 모든 이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은, 입술을 타고 턱의 선을 따라 흐르는 붉은 핏물을 닦으며 미소짓는 백은의 소녀를 보았다.
북제국을 지배하는 왕족만이 지니는 은백의 머리칼. 순백의 머리를 지니고 그렇게 오만하게 미소짓는 소녀는 과거 자신의 앞에서 고혹적이며 신비로운 목소리로 말을 했었다.
왜 나는 그런 과거를 잊어버린 것인가.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리죠.’
제국의 오래된 구언이 떠오른다.
‘그래서 북설원의 사냥꾼은 세월도, 과거도 잊어버린다던가요.’
나는 사냥꾼이었던가?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행위였던가?
난생 처음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같은 밤이었다. 눈발이 날리고, 주변의 바람이 온 몸을 찢을 것처럼 휘몰아쳐도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야행성인 피아그는 옳은 시간대에 나타난 것이다. 단지 나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내 시야가 너무 밝아졌기 때문에.
갑갑한 마음에 숨을 토했다. 조금의 김도 뿜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흥분한 짐승처럼 뛰어야 하는데 멎은채 그대로였다. 주변의 사물이 엄청난 속도로 뒤바뀐다. 정체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 얼어붙은 시간의 초침이 이제야 녹아내린 것인가.
하루를 꼬박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마을을 불과 한 시간이 안되어 도착했다. 그러고도 숨이 차지 않았고, 또한 괴롭지도 않았다. 그저 지독한 적막과 고요함만이 고막을 막고 서 소리를 들리지 않게 했다.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무로 만든 사람 형태의 목각인형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서 눈을 맞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험한 곳에 있던 마을에는,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 사람을 닮은 목각인형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뭐지, 이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수백년간 살다보면 누구라도 미쳐버리겠죠. 그리고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꿈을 꿉니다.”
“디어칼테?”
그렇게 빠르게 달려왔는데, 하루 꼬박 걸리는 이 마을을 온지 얼마나 됐다고 저 소녀까지 따라왔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소녀는 추워보이는 옷차림을 하고서 모자도 쓰지 않고 눈보라를 몰고 마을의 입구에서 서 있었다.
“이 마을이 귀하가 선택한 최후의 꿈이며, 북설원의 사냥꾼이 꿈꾼 멈춰버린 시간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다면 지금껏 내가 생활해왔던 것은 뭐지? 나는 이런 목각 인형들을 상대로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그랬다는 거야?”
“그래요. 저와 귀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에요.”
“병이라면…….”
디어칼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와, 왕성에 갖혀 있던 저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준 귀하가 제국의 사람 모두의 피를 빨았습니다.”
자, 잠깐만. 피를 빨았다고?
순간적으로 피를 흘리며 미소짓고 있는 디어칼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리면서 떠올랐던 환상, 그 속에서 디어칼테는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
모두가 죽었다. 사흘에 걸쳐 제국은 끝없는 난리 속에서 죽어갔다. 불도 일어나지 않았고 메케한 연기도 없었다. 그저 병에 걸린 한 공주가 수천,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덜미에서 피를 뽑아내고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징징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너무 커서, 입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주는.”
“귀하는.”
“너무도 고독에 괴로워 했고 내가 서대륙에서 구해온 피묻은 흙을 먹고서.”
“제국을 멸망시킬 아이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내가 너무 가여워서.”
“그 흙을 먹고 죽었다가 피를 탐하는 괴물로 태어나 모든 이들의 피를 빼앗고 나를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어리고 약했던 나를 위해 바라는 것 모든 것을 들어주었고, 나는 그런 귀하의 입을 맞추었고 동족으로 만들었지.”
디어칼테는 우울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하지만 귀하는 그걸 꿈이라고 판단해 버렸지. 그래, 귀하는 너무도 착했고 정의로웠기 때문에 내가 모든 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귀하는 제국을 떠났고 숲을 지나 작은 마을에 도착했어.”
“말도 안돼…….”
나의 탄식을 듣고서, 디어칼테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눈이 감긴다. 더없이 괴롭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작은 마을은 사냥꾼들의 쉼터. 그리고 그들의 고향. 하지만 귀하 역시 그 병에 걸려버렸다는 걸, 잊어버렸던 거야.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대신에 피를 마셔야 했지. 그것이 내가 귀하에게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선물이었으니까. 그래, 제국은 사흘 만에 내 손에 의해 멸망했고 귀하는 도착한 마을을 사냥터로 삼았어. 사냥꾼들의 쉼터에 있던 사람들은 당신이 피를 마시면서 죽여갔지. 그것을 견디지 못한 귀하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가며, 기억을 지워갔어.”
북설원의 추위는 시간의 초침마저 멈춰버린다.
“그리고 꿈을 꾼거야. 당신이 바라는 대로의 꿈을. 우리는 살아있는 상대의 피를 마시고 이 모습을 얻지. 그리고 그에 달하는 수명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야.”
그래서 북설원의 사냥꾼은 세월도, 과거도 잊어버린다.
그 추위를 버틸 수 없어서, 그 추위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천천히 잠이 들어 완전히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래. 나는 카이디. 평원의 폭군. 그리고 귀하는 폭군에게 입맞춤 당한 자. 그래서 귀하는 꿈을 꿔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 그 꿈에서 귀하는 행복해하더군. 그래서 찾지 않았지. 오랫동안 바라보고 기다렸어. 하지만…….”
고향은 극광을 뜨는 해만큼이나 볼 수 있는 북설원의 노스프레임.
끝없는 추위와 기근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세상의 끝에서,
눈보라를 몰고 온 작디작은 백은의 소녀는 미소지었다.
“귀하마저도 나의 꿈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아버렸어.”
소녀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작디작은 발자국이 그녀의 걸음을 증명하듯 남아 있었다. 소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며 내 뺨을 간지럽혔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소녀가 만지기 좋게 자세를 숙였다. 소녀는 천천히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디어칼테.”
소녀의 입술은 더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내 입술도 그만큼이나 차가웠겠지. 소녀는 슬픔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몇 번이고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뒷걸음질 쳤다. 소녀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들었다가 힘없이 내렸다.
저 멀리서부터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꿈속의 파편이었다.
나는 꿈속의 파편 속에서, 그녀의 꿈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는 말인가.
뿌연 하늘 속에서 비치는 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역광 속에서 하얗게 울고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하얀 환상처럼 아름다웠고 현실감이 없었으며, 또한 신비로웠다.
내 고향은 극광을 뜨는 해만큼이나 볼 수 있는 북설원의 노스프레임.
끝없는 추위와 기근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세상의 끝에서,
“이제는 얼어붙은 시간의 초침을 움직여야 할 시간이야.”
나를 내제한 모든 세상이 하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소지었다.
“행복했어, 카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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