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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화조월석 9

2004.06.30 09:0906.30


이십이일 상오 上午  今日意


1.


  기소영이 잠든 새벽, 이사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해뜨기의 바람, 갈날 이른 공기가
너무도 사늘해 기껍다. 이사, 갈 어느 바람과 섞이는 듯하며 길 걷는다.
  원래 그녀는 일정한 시간 잠을 자고, 일정한 분량의 밥을 먹고, 적절하게 자신을 조
절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십이 년 동안 홀로 살면서도 단 하루도, 규칙을 지키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돌처럼 굳었고, 그녀의 공부는 서늘한 가을 물처럼
천연 天然 하게, 찰랑이면서도 넘치지 않는 샘처럼 완전해졌다.
  이사는 비록 강호 초출이지만, 만사에 마음 두지 않으며 세차게 흐르니 마치 경험
있는 무림 인사처럼 거침이 없고 실수도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기소영과 한 방에 잠
드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사는 원래 무엇에도 쉬이 맘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른 새벽, 해돋이에 저잣거리로 나선 것은 다만. 기소영에게 좀 더 기력
을 줄 만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였고, 남은 사흘 동안 기소영의 내상을 치료해 줄
약을 찾기 위해서였고, 좁은 방의 뜨듯한 공기가 마뜩치 않아서였고, 가을 아침의 찬
공기가 그리워서였고……공연히 무언가가 너무나, 설레여서 그렇다. 다만 그 뿐이다.
  '……흥.'
  이사는 담장에 걸린 해를 끌어안으려는 듯 다 삼키려는 듯 빠르게, 빠르게 골목을
걸었다. 높다란 담장 긴 그림자가 하루 첫 해의 빛에 갈려 길 위에 흩뿌려졌다.
  그니 발 밑에도 그림자가 흐른다. 강호의 그림자다. 강호인의 그림자가 흐른다.
  '……흥.'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것을 그녀는 단순하게, 간단하게 표현했다.
  "멍청이!"
  문득, 입 밖에 말을 내곤 스스로도 아연하다. 혼잣말이라니, 이런 일도 있을까? 돌
연 피로가 몰려왔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칼을 휘두른 탓이리라, 쓸데없이 신경을 쓴
탓일 테다. 거리에 나와 서서도 내내 맘결 찰랑대는 건 정말이지, 그녀의 예기 豫期
된 행보에서 한 걸음, 벗어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또, 누구 탓, 탓이라고?
  홀연 떠오른 의구심에 마음이 어지럽다. 허리 곧고 걸음은 정연한데, 마음만 혼란하
다. 이런 일이 그녀의 이십일 년 생 그중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그 세월일랑 지금도
발길 아래 고였는데. 개나리 울 아래 주저앉아 애달프게, 칼만 쥐던 봄일랑 여전히도
가슴에 괴어 있는데. 이제 칼 하나 할 일 하나 들어찬 일생 어디에서, 이런 맘 났을까.
  한 무더기 혼란 무너지고, 이사 홀로 길 가운데 오똑 서 있다.
  저자를 바라며 그니 생각하기를, 물소리 드문 강북 땅에 오래 선 탓이리라. 정말이
지 말 많은 기소영이 귀찮은 탓일 테다. 그녀는 지난밤, 너무 많은 말을 들었다.
  '……그 뿐이지.'
  유례없이 생각이 정연치 못한 것 또한 맘 공부가 부족한 탓이리라. 그리만 여긴다.

  "아씨는 안녕하시오? 편안하시오? 괜찮으시오?"
  넋바라기에 길을 잃다 문득, 염려에 고개 슬몃 들곤 늙은 낯을 마주했다.
  세 번 물어 이사를 되돌린 이는 늙은 도사다. 처량한 한처거사 寒處居士 일 테다. 구
량도건 九梁道巾 은 낡았고 도포는 닳아 헤졌고, 밧줄로 허리끈 삼아 질끈 동여맸고,
먼지떨일랑 제 백발 마냥 맥이 없다. 도를 닦는 이로다, 마주친 여인 걱정에 낯이 어
둔 이 도사는 원래 강성에 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 빈곤이 기꺼워 노숙을 하다 지
인을 만나선 그와 함께 일주일여를 절간 옆 만두 빚는 집에서 유숙했더니. 새벽 오기
전에 향불 켜 들곤 길 나서 부근을 돌며 평안경 平安經 을 읽다가 날이 밝아서야 거소
로 돌아가곤 하던 게 일주일여라. 남의 공덕을 빌어 제 공덕을 쌓는 도사시라.
  문득한 소리에 넋 되돌린 이사는 돌연 만사가 두렵다. 어느 켠에서 혼돈이 나설랑
누구 다가서는 것도 몰랐을까. 이러고도 결투를 앞둔 무사라 할까.
  "나는야 삼간초관 三間草觀 의 무지한 야도 野道 로 거지중천 居之中天 하지만, 아
씨는 저자 켠서 공활하려 드니 묘하오, 부디 보중하시라."
  이예 그니 공손히, 합장하곤 마음 돌리며 걸음 바로 잡더라.

  시정 市井 에 들어서서, 이른 날의 시정 市情 을 맛보며 천천히, 먹을거리를 고르고
수소문도 했다. 용한 의원이 누구이던가? 성 남쪽에 두 杜 씨가 있고, 성 북쪽에 매
梅 씨가 있는데, 두 씨는 병을 잘 다스리고 매 씨는 상처를 잘 다스린단다. 누구를 찾
아야 하나? 가만가만 셈하기를, 과연 매 씨가 무림의 사건에 익숙한 사람이겠다. 하
면 매 씨를 찾아가야 할까? 기소영을 데리고, 성 북쪽으로 가야 하겠구나.


2.


  느닷없이 잠재워진 기소영은 느닷없이 잠 깨워졌다. 그는 소스라치듯 깨어났고, 눈
뜬 후에는 계속 안절부절, 마음 다스리질 못한다. 이사는 그런 기소영이 영 탐탁찮다.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 일이 너무 많이, 너무 빠른 새에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이제 밥을 먹고, 다시 성 북쪽의 매 씨 도규가 刀圭家 를 찾아가야 해요."
  "어젯밤……그러니까 어젯밤, 그대는……"
  "나는 밖에 나갔다 왔어요. 그대는 신경 쓰지 말아요."
  기소영, 비로소 마음 놓이는 눈치이고, 제 자신에 대한 책망이 느는 눈치다.
  억지로 억지로 밥 먹으며도 영 마음 다스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 도령,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에도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이치를 모르나요?"
  "그런 것이 아니라……이 낭자는 그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데 나는 좋은 것을 먹
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래요. 어째서 함께 같은 것을 먹지 않습니까?"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나는 오래 이런 밥과 물만 먹고 마셨어요. 그대는 이런 일에 마음 두지 말아요."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은 담담한데도 그 기색이 여상치 못하다.
  "나는 말을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기소영은 얌전히 또 열심히 고기를 씹었다.
  그예 이사, 다시 한 번 아미 찌푸리며 말한다.
  "차린 건 모두 다 이치에 맞는 좋은 것이니 기 도령, 그대는 골고루 먹도록 해요."
  이 소리에 기소영, 황급히 서둘러 고기와 채소를 씹고 삼킨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
맙고도 일켠 부끄러우니, 제가 협객인지 어린아인지, 도무지 면이 안 서는 탓이라.
  이에 이사, 또 한 번 양미간을 찌푸리더라.
  "급히 먹는 건 좋지 않아요, 그대는 무술을 하는 사람인데 그런 도리도 모르나?"
  한입 그득히 먹거리 밀어 넣곤, 기소영은 어쩔 줄을 모른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어연간히 낯빛 벌그름한 기소영을 더는 맘에 두지 않으려마, 이사는 고개 돌린다.
  '……흥!'


  3.


  "그 무얼 배불리 먹으려 하니? 대충 먹거라."
  다 늙은 도사야 입이 짧아 대추 알로 충족을 하나, 애젊은 방옥비는 그렇지 못하다.
  "먹는 거 가려서야 어디 천애에 서겠니? 자족하거라."
  드높은 명성 빛나는 검 다 버리고 백옥경에 노니는 도인이야 가릴 것도 없겠다만,
신체 강건하며 정력 충만하니 검 하나 꼭 쥐곤 놓지도 못하는 방옥비는 그러지도 못
한다. 여하간 배는 불려야 또 사람을 죽이건 살리건 할 것 아닌가.
  "그 어린애가 가리는 것도 많다, 그래 무얼 어찌 배웠기에 그러누?"
  "복약벽곡 服藥僻穀 은 안 가르쳐 주셨잖습니까."
  "애가 그런 걸 배워 뭐 하게? 밥 안 먹고 신선되리? 그거 돼 봐야 뭐 좋냐?"
  "검선은 되고 싶지요."
  "얘 봐라, 검선 되선 뭐 하려고? 잠도 안 자고 도 닦더니 칼 든 신선 되려니?"
  "검선 되면 어디 가든 만두야 먹여 준다잖습니까."
  "거 만두 같은 소리 말고 빨리 성가나 해라, 언제까지 떠도려니?"
  "밥 먹는 얘기에서 왜 여자 말이 나옵니까."
  "네 업이 깊어 그런다, 애 낳으면 좀 나을지 또 아니?"
  "생산을 하면 업도 지워진답니까, 노사님도 출가하셨잖습니까."
  "나야 신선 되는 사람이니 출가한 거고, 너는 아니잖니."
  "……마저 다 드십시오. 전 그만 하렵니다."
  방옥비 속이 답답한 것이, 만두 파는 집에서 만두 한 사발 못 시키게 하는 도인 속이
궁금한 탓이다. 복약은 못하더라도 식사는 해야 살 것 아닌가. 염낭서 대추 알을 꺼내
야금야금 씹으며도 방옥비 배는 비우려는 그 속내에 그 무슨 심술이람?
  "그래 광명검이란 게 그런 거다, 나가 뭐 먹지 말고 바람이나 씹으렴."
  "혹, 속 비우면 얻는 게 있습니까?"
  과연 밤내 되새기며 습득한 것이 있기는 했다. 이 다른 가르침이 또 있을까도 싶다.
  "굶다 보면 남 아픈 거도 알겠거니."
  그예 방옥비, 도 하나 깨친다. 이거 심술 맞구나.

  생각컨대.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제 작심을 관철하는 것이
라. 방옥비의 세계에 달리 또 누구가 없다. 싸우고 이길 누구가 없고, 다만 생사 저 경
계에 선 검 하나라. 많고도 험한 강호 계책이 그 검 앞에 허망한 것이다.
  방옥비는 그렇다.

  "그렇긴 뭐가 그래? 글 좀 읽어 줬더니 풍월 풍월, 잠도 안 자는 꼴이 보기 싫구나."
  "공부하라 들려 주신 것 아닙니까, 배웠으면 익혀야지요."
  "너 들으라 읊었니? 거 제대로 알 거 같지 않아 마뜩찮다, 대추 몇에 입이 쓰구나."
  "그럼 만두 드시지요. 군떡도 있습니다."
  "에이이……"


4.


  장삼은 하룻밤을 푹 쉬었다. 장장추야 長長秋夜 짧은 동안 깊이 잠들었다 쾌활히 눈
뜨고, 그 쉬는 동안 앙장한 모든 일일랑 다 잊은 품으로 하부작, 자리 떨치고 일어서
서 이른 거리에 나섰더니. 새벽 안갤랑 여전하고 그 공기 참 상크름하다.
  장삼은 걸음 서둘러 거리로 나섰다. 매일 같이 같은 길 산보하는 누구를 만나러 나
선 길이다. 그녀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이미 결정했다.
  해 맑고, 장삼 낯은 더 밝다.
  그림자 한 오리 얽히지 못하게 만드는 방단 放膽 함이라. 저 거리 한 켠에 그 담장
밑켠에 늘어서는 그림자야 다 떨치고 발랄하게 걷는다. 그림자라니, 동트기에 흐르는
강호 그림자, 길 따라나 걷는 강호인의 그림자, 길 가운데 오도카니 곧추선 여인 그
그림자랑 마주치곤 문득 아미 한 번, 찌푸렸더라.
  허리춤에 검, 곧은 허리며가 다 저와 같으니 이 사람은 동도라.
  시절 세파 버텨나는 여무시라. 모다 우습구나 그저 모른 척 걸으려나.


5.


  동이 거진 텄고, 안개 반짝이단 아련히 스러졌다. 어느덧 안개 다 자는데 날은 도리
어 차다. 며칠 새 많이도 추워졌다. 혹은 맘 한 켠이 서늘하다.
  사르르 까라려 드는 안개 밟으며, 이연호가 걸어오더라.
  "장삼?"
  "나예요."
  장삼은 집 앞에서 일다경 一茶頃 께 그를 기다렸다.
  "과연 성실한 경옥자로군요."
  그니 치는 농에 이연호 웃지만, 아주 쾌활하지는 않다.
  "이렇게 성실하니 반드시, 대공 大功 을 이룰 거예요."
  "나온 지 오래되었어?"
  "일향 一餉 . 나는 어쨌든 당신의 친구이니, 때를 잘 선택할 수 있지."
  이연호가 다시 웃으며 고개 젓곤 또 말한다.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랬나."
  장삼이 상글상글, 마주 웃는다.
  "안됐지만 경옥자, 나랑 어디 좀 가요."
  이연호가 부러 고개를 갸우뚱, 해 뵌다.
  "피곤하겠지만 경옥자, 나 지금 서둘고 싶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장삼이 서두르면 꼭 피곤한 일도 생기던데."
  이연호가 성글성글 웃었다. 제법 피곤한 눈치다.
  "글쎄 나는 한 사람을 찾아갈 생각인데, 당신도 같이 가면 좋겠어."
  이연호는 고개를 저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오늘은 바쁜 날이야, 내 동지들이 모두 바쁜데 나도 가 봐야지."
  "어제, 나는 한차례 험한 일을 겪었는데……"
  "나는 걱정하지 않지. 장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알아."
  그예 장삼이 키득거린다.
  "나는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했지요."
  이연호, 재차 웃으며 소맷부리를 흔들어 뵌다.
  "나는 누구도 장삼의 목을 자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지. 또 다른 일이 있었어?"
  "알았어, 나는 사실 몇 가지 일을 일러 두고 싶어서 왔어."
  "어떤 일인데?"
  이연호가 그제야 고개 끄덕, 해 뵈며 물었다.
  "이사가 성으로 돌아왔어요."
  "아하. 또 사람이 죽기라도 했나?"
  성글성글 웃으며 맞장구치는 이연호에게 장삼, 짐짓 낯 찌푸리며 고개 끄덕여 뵌다.
  "엉? 누가?"
  "쾌의문의 김원일. 그리고……하예."
  "화호부, 하예? 화호부 그 사람?"
  "옥검루의 부귀대야가 어젯밤 염라전 閻羅殿 에 들었지요."
  장삼이 고개 갸웃해 보이며 다시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어? 이봐요, 여긴 경옥자의 마당이라며?"
  "나는……어젯밤, 차를 좀 마셨지."
  "맛있는 걸 먹고, 가인 佳人 에 취해 있었어?"
  끄응, 하며 이연호가 부러 신음을 내흘린다.
  "나는 좀 더 서둘러야겠군. 원래 내달에는 정리될 일이었는데……"
  "당신은 어떤 심리타산이 있었는데?"
  이연호가 또 고개를 내젓는다. 후울쩍, 소매자락 한 번 흔들었다.
  "강성은 제법 크고, 제법 복잡해. 성남의 호철장 외에도 선가북종 仙家北宗 백운관
주 白澐觀主 의 말류 末流 가 있고, 위국십칠성에서 분파된 방회가 또 있고……"
  "그런데?"
  "이 강성에서 호철장만이 계속 나와 대립했지. 다른 인물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냈는
데……이제 이사와 소소창의 결투 때문에 굉장히, 어수선해졌어."
  "어수선해?"
  장삼이 고개 갸웃, 하며 또 살짝 쨩그린다. 바람결에 귀밑머리가 몇 가닥, 흔들렸다.
  "당초는 그저 흥밋거리였는데, 소소창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이사가 몇 사람
더 죽였잖아? 소문이 퍼지면서 내기가 크게 붙었지. 엉뚱하게도, 조용하던 선가 사람
들마저 휘말렸지. 그건 이사와 소소창의 공부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
  이연호가 왼손 들어 올려 절레절레 흔든다.
  "여하간 복잡해. 나는 원래 호철장을 강호에서 몰아내려 했는데, 시시한 문파 방회
의 인물들이 일을 지저분하게 만들었어."
  "지저분하게?"
  장삼은 한층 어리벙벙해졌다. 아무래도 이연호 역시 지난밤, 꽤 바쁘게 돌아다닌 모
양이다. 무언가, 기괴한 소식을 잔뜩 물고 돌아왔잖는가?
  "좀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당신은 또 어떤 말을 들었어?"
  "원래 옥검루의 주인장은 바로 하예였지."
  "어젯밤에 죽은 하예."
  "그 하예가 전주 錢主 를 맡고, 강성 근방의 일곱 방회가 서로 내기를 걸었어. 그건
벌써 보름도 더 된 일인데, 사실 나는 그런 방회가 있는지도 몰랐지……여하간 지겨
울 정도로 숨어들만 다녀. 이런 건 사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데 안
정대문 安定大門 밖에는 용성관 鏞聲館 이라는 작은 도장이 있어."
  "용성관? 거기가 북종의 말류?"
  "응.  용성관은 사람도 적고, 그저 조용히 수도하는 곳인데 다만 관장의 둘째 사제가
검법을 잘 알지. 이 사람은 또 여기저기의 인물들과도 제법 친분이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뻔한 이야기가 돼 버린다고. 몇몇 무림의 인물들이 차 마시며 담론하
다가, 이사의 칼이니 소소창의 검이니 하며 드잡이를 친 거지. 어이구."
  장삼이 따라 가볍게 한숨 내쉰다. 가녀린 숨결에 가을 바람 섞여 난다.
  "그야 무어, 있을 법한 일이잖아요? 원래 이 결투는 근래 없던 무림의 사건이고."
  "거기까지는 좋은데, 도사가 분수도 모르고 내기에 끼어든 거야."
  하이고오, 하며 이연호가 또 한 번 길게, 한숨 내쉬었다.
  "내기?"
  "말다툼을 하다가, 그래 아예 한번 칼로 대 보자 어쩌고, 그런 거. 가지가지야."
  "세상에! 누구랑?"
  "조하문 朝霞門 의 장문 掌門 ."
  "그건 누군데? 조하문?"
  "들으면 알 거야. 창 잘 쓰는 뇌 노대 雷老大 ."
  "용기령부 龍氣令訃 뇌문기 賴文棄 ? 그 사람이 문파를 열었어?"
  "그게 또,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거든."
  "북종의 도사랑 뇌 노대가 싸우는 일이?"
  "어, 아니. 뇌 노대가 연 문파는 사실, 내가 돕는 기업이거든."
  그예 장삼이 깔깔 웃는다. 웃음에 그 낯빛 한결 붉어졌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싸우는 거야?"
  "아니야, 네 사람이야. 초양문 肖洋門 이니 북위방 北威幇 이니……뭐, 별 인물들은
아니야. 흑도 백도 가름없이 얽힌 게 좀 귀찮지."
  "과연 경옥기협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게 큰일인가? 당신이
좀 관여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무슨 고민이 또 있나요?"
  "잘난 호철장이 또 끼어들어서는, 판관 判官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거든."
  "아! 호철장이 왜 그런 일을 할까?"
  장삼의 웃음 섞인 물음에 이연호가 고개를 내둘렀다.
  "대단한 호철장이야. 원래 나는 내달에 그와 결판을 낼 작정이었지. 사실 그는 자신
의 한 쌍 보배철장 寶貝鐵掌 외에는 이제 내게 대항할 보물이 없었지. 밑천만 남은 주
제꼴이었는데……나는 아직도, 그가 왜 그렇게 사사건건 나와 대립하려 드는지 모르
겠어? 그는 이번 일로 시간을 끌면서 방수를 늘려 볼 생각인 모양이야. 나는 이미 그
의 방회 문권 文券 도 넘겨받은 상태인데, 공연히 귀찮게 되었어. 호 노두 老頭 , 쓸데
없이 역전해 보려 하는 거야. 몸도 안 좋다든데 아주 쉬도록 해 줘야겠어."
  장삼이 방실거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또 웃으며 묻는다.
  "그의 방회를 이미 넘겨받은 거야?"
  "그건 좀 다른 얘기야. 성 남쪽을 아우르는 건 사실 호철장이 아니라 그의 방회였지.
지금 그는 이미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전임 방주에게 받은 철패 鐵牌 와 문권을 후계
자에게 다 넘겨 주었어. 한데 그 후계자가, 실은 내 비밀스럽고도 좋은 동지거든?"
  장삼은 크게 웃어 버렸다!
  "대단한 경옥자, 수단이 무섭네. 한데 뭐가 문제람?"
  "호철장은 다만 끝까지, 나와 한 번 결전을 하려는 거지. 그건 괜찮은데……"
  "그런데?"
  "원래 호철장은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요 근래 병을 앓고선 기력도 떨어졌지.
그래서 나는 정말 걱정을 덜었었어. 그의 형제들도 다 노약하잖나?"
  "아! 병기의 고수였던 최 선생이 명목 瞑目 하기 즉전 형제들이 모두 은퇴를 준비했
었다는 말은 들었어. 한 삼 년쯤 되었지? 그건 참 안타까운 사건이었어. 서른 남짓한
장부가 돌연 병폐 病斃 라니? 안타까운 인물이야. 생각해 보면 또 달리 인물이 없긴
하네? 과연 걱정할 일이 없겠네, 당신은 이제 성남도 함께 아우르게 된 거야?"
  "아니, 이번 일로 복잡해진 거지."
  이번에는 장삼이 갸우뚱, 한다. 아침이 고요히 열리어 가고 있다. 갸우뚱 해가 뜬다.
  "도대체?"
  "……용성관 사람들은 상처를 잘 다스리고, 또 북종은 원래 금단 金丹 에 능하잖아?
그는 시간을 끌면서 몸을 추스리고, 이왕인 김에 무예 비결도 좀 엿볼 작정인가 봐."
  "그런 걸 겁내고 있었어?"
  "그러면서 방수를 찾을 생각인지, 아니면 이미 찾아선 기다리고 있는 건지……"
  "그런 게 무슨 별문제람? 강 남북을 아울러 경옥자를 도울 고인이 한둘일까 봐?"
  "아니, 진짜 문제는 내기에 걸린 물건이지."
  장삼이 어이없다는 듯 소매 저으며 깔깔 웃었다.
  "자아, 이제야 겨우 본문제가 나오네? 뇌 노대가 무얼 걸었길래? 당신의 사업장이라
도 끼어 있어 그러는 걸까? 뭐 가게 몇 채 정도 내주어 노후를 돌보게 하는 것도……"
  "강성 동부 다섯 거리의 권리에, 성 밖 삼만 묘 畝 의 전답이랑 잘 조련된 전마 戰馬
삼백 두 頭 , 창고 두 개 분의 병장, 이백 명의 제대로 된 부하들에다 횡미단검은 덤."
  "……뭐어?"
  장삼, 넋이 나가 버렸다!
  "그건 모두 당신 거잖아? 당신 어젯밤,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
  "……나는 용성관에서 차를 마셨지. 밤새도록 소리도 질렀고, 꽤 지쳤어."
  "그 분쟁은 그러니까 어젯밤에 있던 일이네?"
  "용성관주가 우리를 초대했거든. 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도사랑 뇌 노대의 결투에 당신 사업 전부를 걸어 버린 거네?"
  "그건 또 아니야. 그 도사, 분수를 모른다고 했잖아?"
  "도대체……"
  "호철장과 뇌 노대의 싸움, 그들 네 사람의 결투는 또 다른 일이야. 우리들은 하예의
잡기판에 끼어들었지. 내가 완전히 속았어. 호철장은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소창과 이사의 결투에 휘말린 거야?"
  "그런 거지."
  "그것도 쉽게 처리할 일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면서?"
  "그런 거지."
  "당연히, 소소창에게 걸었지?"
  "그런 건 아니지."
  장삼, 왼손 들어 이마를 짚으며 고개 젓는다. 가을바람을 이끄는 고갯짓이다.
  "이사에게 걸었어?"
  이연호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원래 이사를 편들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은 무어라 말했는데?"
  "소소창이 쉽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 하고 장삼이 한 소리 내뱉았다.
  "그게 다야. 아니, 그게 다였는데, 용성관의 도사가 코웃음을 쳤지. 소소창은 도가의
검법을 잘 익힌 강남제일검인데, 이사는 그의 십 초식을 받아내기 힘들 거라면서. 이
사의 칼은 살기등등하지만 소소창의 검법은 도를 깨우쳤다나? 그래서 난, 무술 시합
에서 그런 일을 논하기는 어렵다고 했지. 그랬더니 호철장이 나서서는, 자기나 나나
둘 모두 장법을 수업한 사람이니 병장의 대결에는 아는 척을 말아야 한다면서……"
  "그리곤?"
  "거기까지 나오니 나도 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원래 성격이 좀 격렬하잖아? 그런데
뇌 노대는 더 화끈하더군. 사실은 굉장히 불같은 사람이지."
  장삼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으로, 갓 밝은 하늘 박혀 든다. 눈앞에 훤히 보인다!
  "뇌 노대가 화를 내면서, 무예를 습득하면 종내 만류귀종하니 무슨 상관이냐, 철장
은 사실 명자만 그럴싸하고 냄새 고약한 취두부 臭豆腐 였느냐 하며 놀리니까 용성관
도사가 들고나서선 화를 내고, 거기에 또 좌중이 제각각 아는 척하면서 편들고……"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좋지요, 적어도 말려들지는 말았어야지."
  "일이 좀 복잡해졌지?"
  "충분히, 복잡해졌어. 그런데 하예가 전주라고? 어젯밤 그이는 죽고 있었는데?"
  "어젯밤 용성관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어. 무술은 잘 못하지만, 일은 잘하는 하곤 夏
滾 . 이제는 그가 전주가 되는 거지."
  "하예의 사업을 도맡아 관리하는 하곤 그 사람?"
  "응. 그는 무술은 모르지만 하예의 사업은 모두 잘 알지."
  장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예는……옥검루 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고 있었지?"
  "이번에 모조리 끝장날 거야. 옥마검이 죽고 다시 화호부가 죽었는데, 그걸 누가 지
켜? 내기를 핑계로 다들 덤벼들어선 찢어 먹으려 들 걸? 어디 보자……하 씨네 또 어
떤 고수가 있든가? 하곤 그 사람, 식솔이나 지키면 다행이지."
  장삼이 후웅, 하고 신음소리를 내흘렸다.
  "이상해. 용성관의 그 도사는 왜 호철장 편을 든 거지? 이건 아주 작정한 거잖아요?"
  "아, 그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죽은 최 씨랑 얽힌 사연이 있어."
  "삼 년 전 죽은 사람이랑?"
  "그 병기의 고수란 사람이 말이야, 북종의 검법을 잘 익혔단 말이지. 그 이름 한때는
제법 대단했지? 뭐야 그, 유래 모를 검객이니 품격을 갖춘 검법이니 하면서……호철
장이 눈여겨본 것도 당연한 일이고, 여러 방파에서 끌어들이려 했다는 말도 있었어.
고르고 골라 호철장이었던 거야, 내 참. 호철장네도 젊은 영웅을 영입했네 어쩌네 하
더니 대뜸 저희 계자 季子 로 삼았단 말이야? 그게 제법 그럴싸한 꿍꿍이속이었던 거
야, 실은 잘난 호철장의 후계자였던 셈이거든? 알고 보면 파계 도사라, 호철장 참 좋
아했지. 몇 년 잘 가르쳐선 방회를 넘기고, 형제들은 은퇴를 명목 삼아 낙향하려 했던
거야. 그는 방파의 주인장이 된 이래로 향토의 유지가 행세를 했다지. 그건 여기 강북
의 큰일인데……뭐 여하간 여러 인물이 얽혔어. 그중에 용성관 도사도 있었던 거지."
  "아……그는 야심만만했던 거야?"
  "그런 거지. 그런데 그 최 씨가 덜컥 죽었단 말이야. 호철장 상심이야 뭐 대단했다지
마는. 그러고는 그대로 뭐랄까, 노구 老軀 에 진흙탕……?"
  "흥. 그가 감히 크게 기솔 騎率 하련다니, 지나치네."
  "그러게 말이야. 그러니 이 경옥자는 그이 눈의 가시인 셈이야."
  깔깔 웃으며 장삼, 고개 젓는다.
  "그건 아주 당신 일이잖아요? 이 다른 이야기는 달리하고……설마 경옥자, 당신도
끼어들 생각이야? 하 씨네 장례에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끼는 거야?"
  "설마. 나는 당당한 협객인데, 그런 일에 끼어들 수는 없지."
  "거짓말!"
  이연호가 히죽, 웃는다.
  "좋아, 당신은 이미 다 파악했어? 나는 모르고, 내 좋은 동지들이 할 일이지."
  "그래서 당신은 오늘 바쁘고?"
  "원래 경옥자는 바쁜 사람이야. 한 가지 일이 더 늘어난 건데, 처리해야지."
  "원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성장부 城將府 에 품첩 稟帖 을 올려야지. 누구네랑 누구네가 북고봉 北高峰 에서
열흘 기간을 두고 무술 시합을 벌이겠노라, 승패 결국에 따라 땅이고 가게고 죄다 등
기 이전하겠다고 말이야. 관 官 의 비준을 얻어 일을 해야 뒤가 편하겠지?"
  "그걸 다 주비하려고? 참 부지런하네. 또 무슨 일이 생겼는데?"
  두 팔을 슬쩍, 들어 내보이며 이연호가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이제 이사도 찾아야 해."
  장삼, 손 저으며 한 번 더 신음소리를 낸다. 흔들어 젓는 소매에 팔락, 소리가 따라
흔들린다. 아침이 맑은데 장삼의 얼굴은 흐리다. 강호의 그림자가 짙게 맺혀 간다.
  "당신은 이사를 편들 생각이야?"
  "설마! 그럴 수는 없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생각이 너무 빠르군."
  "그럼?"
  "나는 다만 역전의 기회를 찾아야지. 호철장도 한 일인데 내가 왜?"
  "어떻게?"
  "뭐,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야. 복잡해."
  장삼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은 이 결투를 방해할 생각이지?"
  "어차피 나는, 관 노사의 일을 이어받아 처리해야 했지."
  장삼은 깜짝, 놀랐다!
  까만 두 눈을 홉뜬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연호는 하아아, 길게 탄식한다.
  "맹에서, 사람이 또 왔어. 소소창을 좀 돕는 게 어떻느냐, 라면서."
  "당신 설마, 소소창보다 먼저 이사를 상대할 생각이야?"
  "아니야. 나는 그저, 결투를 지연시키면 되는 거지."
  "그리곤?"
  "이사가 약정된 시간에 못 대거나, 조금 곤란한 일을 겪거나 하면."
  "그러면?"
  "우리는 시간을 벌 수가 있지. 예를 들어 이사가 가볍게 부상당한다거나……"
  장삼이 헛웃음을 친다.
  "이사가 상처를 다스리는 동안 경옥기협은 호철장을 처리하고?"
  "'호철장만 없어지면 해결될 일이지. 당사자가 없는데, 누가 판돈을 걷나?"
  "과연, 호철장이 내물린 결착을 당사자에게 되돌리겠다? 호철장이 방수를 맞이하기
전에 해치우겠다? 이러저러 인물 끌어들여선 재주를 부린 호철장은 결국 젯상 받을
날을 당긴 건가? 대단한 경옥기협이야, 수단이 정말 무서워. 당신 왜 이렇게 됐지?"
  장삼이 기막혀 고개 외로 꼬곤 외면하니 이연호, 낯 찌푸리며 고개 떨군다.
  낙엽 닮은 몸짓이다. 의기마저 땅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서럽다.
  "장삼 당신은 강호주유하니까 몰라. 하지만 나는 기업을 돌봐야 하지."
  "그건 처음부터 당신이 바란 거잖아!"
  이연호 문득, 머리를 든다. 얼굴이 붉게 빛났다.
  "나는 원래부터 입신양명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어."
  "도대체 내가 모르는 일이 얼마나 되는 거야?"
  "호류맹의 갈래는 당연 위나라에도 있고, 나는 위나라 사람이지."
  장삼이 다시 또, 눈썹 찌푸린다. 미간에 그림자, 듬뿍 고였다.
  "강북무림의 군벌을 맹에서 제어하고 싶어 하는 거야?"
  "그래서 소소창이 강성까지 온 거지."
  "소소창이? 그도 관련되었어?"
  "장 낭자, 어떻게 이런 일을 모를 수가 있어? 이건 원래 다른 계획이었어."
  "미리 예정된 일?"
  "소소창은 강남 사람이지만, 그는 강북 무림에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야.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 맹의 강북파니까. 한데 그의 기업은 강남에 있잖아? 그래서 그의 입지가
난처한 거지. 그는 벌써 몇 년 동안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이렇다 할 사업도 하지 않
고 있어. 대명사다운 기업을 이루지도 못했어. 나도 하는 일을 그가 왜? 이 경옥기협
만 못해서 그럴까? 곤란한 처지인 거야. 그래서 그는 차라리 중도를 걸으며, 순수하
게 지내고자 한 걸 텐데 그런 일은 원래 쉽지가 않지. 이것 봐, 관 노사는 어디 사람이
지? 경주의 관 노사, 강남파였어. 노스승은 강북을 주유하고 대부 大父 는 강남의 유
지라……결국 강남파의 일을 두엇,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강북
까지 와서 결투하는 거지. 그는 아마 이사를 먼저 상대하고, 중추 께에는 다른 일을
처리할 생각일 거야. 그래서 맹이 이 결투에 큰 관심을 보이는 거라고. 이제 와서 달
리 사람을 보내네 누구를 어쩌네 하는 거 다, 소소창을 채 신용 못해 그러는 거라고.
못미덥다는 건데, 소소창 자신도 꽤 분이 나 있을 걸? 그가 지금 안 보이는 건 분명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 중이기 때문이겠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암행 중인 거야."
  "길고, 쓸데없이 복잡해."
  "장 낭자, 홍비연 紅飛燕 당신은, 강호랑객이니까."
  장삼 얼굴에 맺힌 그림자, 더욱 깊어만 간다.
  "경옥기협은?"
  "글쎄……이봐, 장 낭자, 강성에 무정검 말고도 소류비도도 와 있는 거 알아?"
  "위자운이? 그이도 왔어?"
  "난 이미 한 번 만났지. 그는 꽤 신이 나 있더군."
  장삼이 양미간을 잔뜩잔뜩 찌푸린다. 웃을 일이 이젠 없다. 날만 맑다.
  "그는 원래 관 노사와 관련이 깊었는데……소소창을 만난 걸까?"
  "나는 위자운을 좀 부추겨 줄까 싶었지."
  장삼, 소매 들어 그림자 엉긴 그 낯을 감추었다. 공연히도 날만 붉다.
  "경옥기협은 왜 장삼에게 이런 일들을 모두 말하는 거지?"
  "위자운도 실은 맹의 일로 온 거니까. 위자운과는 오래 교류했지만, 그는 강남파요
나는 강북파야. 웃기지? 시시한 일로 모든 게 허황해. 나는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아."
  장삼이 핫핫 웃는다. 그 소리 허허롭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경옥자, 이야기를 좀 더 해 주겠어?"
  "나는 말이야, 장삼도 모르는 일이 있다는 게 분한 거지."
  "그거야말로 웃기는 이야기예요 경옥자.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이연호가 다시 또 두 손을 훌쩍, 들어 올리며 말한다.
"장삼은 순수한 강호낭인인데, 우리들은 사실 그렇지가 못하지. 그건 그것대로 좋은
데, 이제 맹에서는 순수한 장삼마저 희롱하려 드는 것 같아서."
  장삼, 처연히 고개 젓는다. 이연호가 돌연 활짝, 웃었다.
  "나는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다행이네."
  "장삼이 다시, 경옥자라 불러 주니 아주 좋아."
  장삼은 웃을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경옥자를 대하면 장삼은, 웃을 수밖에 없다.


6.


  그녀는 더 웃으려 하지 않았다. 날 이미 맑은데 또 호젓하여 그저 홀로 웃던 경옥기
협의 가벼운 소리만 귓가에 희미하게 번져난다. 약정일까지 아직 날들이 남았고, 할
일이 또 많이도 남았다. 그러나 장삼은, 어디에 어떻게 관여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소매 들어 낯 가리고만 싶구나. 어둑새벽일랑 부끄럽구나.
  갸우뚱한 해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난월 끝물이 발치에 매인다. 희미한 곳에, 점
점 짙게 음영이 더해져 붉은 낯을 가린다. 갓밝이에 그림자만 흘렀다……


7.


  장락노점 張洛老店 은 강성 서부에서 가장 복잡한 한 채의 객점이다. 호양동 互讓洞
에서 가장 거칠고 호방한 영웅 나리들이나 드나드는 곳으로, 호양동 골목 전부가 장
락노점 주인장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호양동은 크고 작은 사창관 私娼館 이며 또
보국과 주장 등, 오가는 행상인들이나 나그네들이 여로 중의 객고를 풀기에 좋은 소
금굴 銷金窟 이 모여 엉긴 난장판인데, 이 난장판의 주인장이 근년 자리를 비워 강성
서부의 지두사 地頭蛇 여섯 명이 제각기 눈치를 보고 있더니. 개중에 손이 날랜 가 賈
씨가 어느덧 죽고 셈이 빠른 경 京 씨는 어디로 숨고, 강양도는 남은 셋을 규합해 새
로운 길을 모색하더라. 주인이 없으니 도무지 발밑이 튼튼하지를 못하고, 고만고만한
두목들끼리 서로 경합하니 마침내는 강성 강물을 다 휘어잡던 그 기세마저 잃어 멀리
서, 강 타고 든 동업자들에게 강성에 나고 드는 이익 중 일습  一襲 을 내어준 것인데.
이래서야 어디 당당한 흑도의 호걸 영웅이라 하겠느냐? 호양동 장락노점의 명맥을
잇자면야 이제 별수가 없이 다른 주인을 모셔다 뒷배를 도모해야 하겠구나!

  "다른 주인이라니, 그러다 어르신이 돌아오시면 어쩌려 하나?"
  "대관절 주인께서 돌아오신다면야 무어를 걱정하겠는고? 그저 따르면 그만이지!"
  이 자리에 조식으로 맛난 죽 좋은 차가 넘치고, 날빛도 밝고, 다만 인물들이 어둡다.
  "경 선생은 숨어선 아예 보이지도 않어, 그 참 발 빠른 사람이지?"
  "나도 좀 숨을까 싶었는데."
  이 소리를 다 듣곤 강양도가, 에이이! 외치며 와당탕, 자리를 뒤엎더라.
  "야 이 간담 다 빼먹은 토깽이 마냥 그 무슨 모색을! 형제가 죽었으면 보원해야지!"
  그 소리에 남은 셋이 실색을 한다. 면면들이 한층 어두워진다.
  "불패무적의 무정검에게 빚을 받자고? 원래 그 일이 누구 일이었기에?"
  "강 선생, 대관절 가 선생이랑은 무슨 뒷귀를 맞추었기로 그리 장사를 했는고? 대관
절 주인장 없이 두 선생들이 나선 장사인데, 왜 우리가 모르는 빚을 받아야 하는고?"
  "하물며 새 주인 소리를 내다니? 강 선생, 자신 있소?"
  "아무렴! 그럴 만한 귀인이 계시니 내 나선 것이오, 이제 뵈면 다 알 테지!"
  셋이 하나로 도리질을 치더라.
  "어림없는 소리!"

  "어림이야 있지."
  그이들 뒤로 어느덧, 한 사람 와 있지 않느냐.
  "어림이 있으니 내 나선 것이고."
  동창을 뒤로 둔 이 그림자, 크고 또 검다. 그 면목에 하나로 도리질 치던 셋이 또 또
실색을 한다. 그이 내미는 그 손 무림에 유명하니 이 감당할 인물이 아니잖느냐?
  "대인께선……"
  "이내 손을 봤다면야 나도 알겠거니, 아무렴?"
  "이 무슨 일인고? 대관절 이 무슨……"
  "당면한 일이지!"
  검고 큰 그림자가 한 번 외치니 탁자며 창틀이며가 죄 우르르, 떨린다.
  세 사람이 한 몸으로 부르르 떨었다.
  "허면 대인께서 참으로 이 국면을 주재하시겠다는……"
  이에 강양도가 외친다!
  "다되었소! 호양동은 새 주인을 맞이한 것이고, 형제들은 빚을 받으러 갈 것이오!"

  그예 뒷등에 동창대고 히죽 웃으며 큰 그림자 끄트머리서. 무서운 사람이 말하더라.
  "이 좋은 조반상 맛난 죽을 다 엎었으니, 어쩔까. 새 밥상인 셈 치고 경기를 말하라."

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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