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꿈 속에서 나는 풍선장수가 되어 있었다. 벚꽃이 만개한 성당 앞에 자리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까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와서는 신발 앞코를 톡톡 쳤다. 발치를 내려다보며 풍선을 사겠느냐고 상냥하게 물었더니 청개구리는 매우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서, 지금 풍선이 꼭 필요한데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중에 꼭 갚아 드릴 테니까 외상으로 풍선 몇 개만 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간청했다. 툭 튀어나온 금빛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드는지라 무엇 때문에 풍선은 구하느냐 물었더니 개구리가 답하기를, 가엾게도 간밤에 어머니께서 그만 숙환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아닌가

 “저는 몹쓸 자식이라 어머니 생전에 효도 한 번 해 본 적 없고 어머니께서 시키는 일이 있거든 늘상 반대로만 행동했었지요. 이렇게 되고 나니 그간 어머니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유언만큼은 꼭 들어 드리고 싶어요.”

 개구리의 어머니는 임종 직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는 모양이다. 자신이 가거든 땅속에 묻을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꼭 하늘로 높이높이 날려보내 달라고. 그래서 장례 비용을 털어다 뭇새들에게 음식을 잘 차려 먹이며 부탁했건만, 도리어 어머니 시신을 서로 뜯어먹겠다고 다투는 통에 간신히 도망나왔다면서 청개구리는 개굴개굴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불쌍한 개구리를 크게 동정하여 근처 문방구로 달려가 값비싼 종이 필통을 사 왔다. 필통을 관 삼아 개구리의 어머니를 눕히고 고인의 소원대로 최대한 높이 올라갈 수 있게끔 풍선을 몽땅 매달았다. 나는 청개구리와 함게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꼭….”

 마침내 풍선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내 머리에서 내려온 청개구리가 답례로 무언가를 주겠다고 했는데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잠을 깨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낭패했다. 아차, 반대로 할 줄 알고 남긴 유언이었을 텐데.


 오후에 안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니 그냥 그러고 깨 버리면 어떡하느냐. 그 청개구리가 유언을 제대로 들어드렸다고 착각하여 홀가분해진 나머지 하늘에 먹구름이 끼건 비가 오건 개굴개굴 구슬프게 울지 않게 되어 버리면, 아이들이 왜 개구리는 비오기 전에 요란스레 우느냐 물었을 때 그 세계의 부모들이 대답이 궁해지지 않겠느냐면서 흰소리를 했다. 다음에 그 청개구리를 다시 만나거든 내가 큰 실수를 했다. 헬륨풍선은 아무리 높이 날아도 비구름 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하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종이 필통을 관으로 썼으니 비만 오면 젖어서 찢어질지도 모른다. 이걸 어쩌면 좋으냐, 라고 말해 주란다. 그래야 그 세계의 청개구리들도 비가 올 때 어머니 걱정에 개굴개굴 슬피 울게 될 거라면서. 나는 건성으로 그러마고 답했다.

 “그런 것보다는 개구리가 보답으로 뭘 주겠다고 했는지가 더 신경쓰이는데 말야. 대체 뭘 주겠다고 했을까?”

 “여자 아니면 돈이겠지 뭐.”

 안은 뻔한 걸 뭘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원래 옛날이야기에서 축생을 도와 주면 보답으로 그런 걸 주는 법이다. 만병통치약을 줄 때도 있긴 하지만 너한테 지금 병든 노모가 계신 것도 아니지 않느냐면서.

 “근데 헬륨풍선이 정말 비구름 위로는 못 올라가?”

 “아니. 개구리 한 마리 정도는 거뜬히 매달고 높이높이 올라가다가….”

 “올라가다가?”

 “기압 때문에 펑 터지겠지.”

 아무래도 나는 고인께 꽤 못할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다음날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풍선장수가 된 꿈을 꾸었다. 벚꽃이 만개한 성당 앞에 자리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까, 교복 차림의 귀여운 단발머리 소녀가 다가와 풍선값을 물었다.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은지라 자세히 뜯어보니 점차 나는 이 아이를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름이나 나이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자 아니면 돈이라고 했던가. 이렇게나 낯익은 걸 보면 아무래도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소녀에게 빨간 풍선을 내밀며 내 각시가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청했다.

 “아저씨 바보 아니에요? 개구리가 어떻게 부모 자식을 알아봐요?”

 그러자 소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어젯밤의 꿈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 순간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느라 붕 뜨는 바람에 나는 퍼뜩 잠에서 깼다. 깨어나자마자 나는 소녀가 누구였는지 깨닫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축제에서 여장하고 3학년들 번호를 따던 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꿈에 나왔던 성당 앞을 지나는데 입구 한쪽에 앉아있던 하얗고 복실복실한 개가 나를 줄레줄레 따라왔다. 반으로 접힌 귀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 웃는 듯한 얼굴이 귀여운 잡종개였다. 아무래도 각시가 되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르다보면 또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녀석을 데려다가 닭고기 국물에 밥을 말아서 배부르게 먹이고 개구리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다. 잡종이기는 해도 털이 뽀야니 귀티가 흐르는 것이 실은 어느 귀여운 부잣집 아가씨가 애지중지 기르던 녀석이라 며칠 내로 찾아주시는 분께는 후하게 사례하겠단 전단이 동네 곳곳에 나붙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 일을 계기로 귀여운 아가씨와 안면을 트게 된다면 안의 말마따나 돈과 여자를 한꺼번에 얻는 셈이잖나.

 그 날 밤에 개구리의 복실복실한 뒷목을 슬슬 쓰다듬고 있자니까 시나브로 맥주 생각이 났다. 편의점에 가려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데 개구리가 벌써 문간에 서서는 어서 가자는 듯 고개만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 녀석이 아침저녁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배웅이며 마중을 해 주고 이렇게 잠깐잠깐 외출할 땐 길동무가 되어 준다면 살가운 맛이 톡톡하리라 생각하여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웬걸, 녀석은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나가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 버리는 것 아닌가. 개굴아 개굴아 하고 애타게 부르며 허둥지둥 쫓아가 봤지만 두 발 달린 인간이 네발짐승을 어찌 당하겠나. 녀석은 땅딸막한 다리를 잽싸게 놀려 큰길 쪽으로 휭하니 도망갔다. 저녁 한끼 잘 먹여 놓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는 결리는 옆구리를 누르면서 망연자실하여 숨만 헐떡거렸다.


 그 날 이후로 개구리란 놈은 내가 없는 살림에 치킨을 시킨다거나 돼지 뒷다리 살이나마 좀 사다 볶아 먹을라치면 귀신같이 찾아와 문을 박박 긁으면서 내가 나올 때까지 캉캉 짖어댔다. 이웃의 빈축을 살까 염려하여 내가 마지못해 문을 열면 녀석은 어서 고깃점을 갖다 바치라 명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앉아 오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것이었다. 여느 개들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낑낑 재촉을 한다거나 허겁지겁 먹기라도 하면 귀엽기나 하지.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아까운 고기를 내주면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는 듯 천연스레 물고선 총총히 사라지는데, 꼬리 한 번을 까딱하는 법이 없다. 나는 녀석이 반 접힌 귀를 위아래로 나풀거리고 소보록 털이 돋친 궁둥이를 실룩거리면서 돌아가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생각하는 것이다. 수코양이를 풀어서 기른대도 저것보단 은혜를 알 테지, 하고. 혹시 저놈은 개구리 어머니의 소박한 복수가 아닐지?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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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찬믹스너트 14.04.02 07:36 댓글

    돼지 뒷다리 살이나마 좀 사다 볶아 먹을라치면

    착착 감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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