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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원의 빛 (3)

2006.05.21 01:3205.21

3. 책벌레

bookworm [búkwm] n.
1 【곤충】 반대좀 ((책에 붙는 벌레))
2 독서광(狂), 책벌레

내가 도서관을 찾은 것은 그 이상한 사건이 있고 나서 한참 뒤였다. 보찾사건 알렙이건 간에 한동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할 일 없이 심심하다보니 또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사서는 나를 보자 약간 흠칫 하는 기색이었지만 고개를 까닥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인사를 해버렸다. 어느 때처럼 서가 사이를 돌면서 보고 싶은 책을 뒤졌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 서가의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각각의 방은 모두 벌집처럼 육각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주 낮게 난간이 둘려 있는 이 진열실들 사이에는 거대한 통풍 구멍들이 나 있었다.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서도 끝없이 뻗어 있는 모든 위층들과 아래층들이 훤히 드러나보였다. 진열실들의 배치 구도는 일정했다.
각 진열실에는 두 면을 제외하고 각 면마다 다섯 개씩 모두 스무 개의 책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책장이 놓여 있지 않은 두 면은 벌통처럼 다른 진열실과 연결되고 있었다. 이 끝도 없는 벌통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언제나와 같이 벌통 끝에 있는 어딘가의 햇빛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의 서가로 나오곤 했다. 그 서가 근처 어디메쯤을 헤매다 보면 역시 오후 햇살이 환하게 비추이는 휴게실로 나오곤 했다. 그 휴게실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커피가 내 삶의 작은 낙이었던 것이다.
가을 햇살에 먼지가 금빛으로 반짝이고 공기 중에는 오래된 책의 향수 어린 냄새가 떠도는 고요한 서가에서 나는 또 수상쩍은 트렌치 코트와 맞닥뜨렸다. 나에게 보찾사와 영원의 빛에 대해 가르쳐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마치 옛날 수사들처럼 대머리에 옆머리만 동그랗게 남아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땅딸막한 남자였다. 사과처럼 빨갛고 통통한 볼에, 배가 통통하게 나온 키가 작은 이 남자 역시 서재 한켠에서 뭔가 하고 있었다. 전의 그 남자가 책을 대충 훑어보고 있었다면 이 남자는 더욱 수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책을 빼서 한귀퉁이를 찢어서 씹은 다음에 다시 꽂고, 그 옆 책을 빼서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책벌레라도 되는 양, 종이를 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언제나 온화하게 웃고 있던 사서가 험악한 인상을 하고 문간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책벌레 남자는 귀퉁이를 찢으려다 말고 책을 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사서의 예리한 눈은 피해갈 수 없었다. 사서가 발레리노처럼 우아하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와 섰다. 그는 책을 등뒤로 감추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사서는 절대로 그가 무엇하고 있었는지 놓치지 않았다.
"마이어 씨!"
"네?"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당신네 책벌레 섹트 회원들은 공공 도서관에서 함부로 책을 먹는 게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이 서가가 가치는 중요성을 충분히 잘 아실 텐데요!"
"그, 그래도 이 종이의 맛은 잊지 못하겠는데, 어쩝니까!"
"그건 댁의 문제고 이 도서관의 책들은 절대 손대지 마십시오."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거 갖고 그러는 겁니까. 백작."
"많이 안 먹었다구요! 당신네 책벌레 섹트 때문에 도서관이 해마다 입는 손해가 어느 정돈지 아십니까!"
순간적으로 얼마전에 본 신문기사가 떠올렸다. 도서관의 오래된 책들이 갑자기 많이 찢겨나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누군가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야금야금 찢겨져 있는 책과 신문들…….
“다시 한 번만 여기서 책을 먹는 게 들키면 그때는 가만 안 있을 줄 아시오. 당신네 섹트 전원을 여기에 출입하는 것을 막아버릴 테니까!”
사서는 마이어 씨를 한 번 흘겨보더니 들어올 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백작이라고 불리던 사서가 나가고,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당신은 어디 소속이오?"
"네?"
역시 보찾사라고 하던 그 남자가 물었던 대로 이 남자 역시 묻고 있었다.
"전 무소속인데요."
"호오, 신기한 일이군.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잔 사주쇼."
난 역시 최면에 걸린 듯이 휴게실로 터덜터덜 걸어가 이 정체불명의 책벌레 남자에게 커피를 한 잔 뽑아주었다. 내가 밀크 커피를 누르려 하자, 내 손을 제지하더니 블랙커피를 누르는 거였다. 자판기 커피로 블랙을 마시는 사람은 geek 아니면 변태니 조심하란 농담이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그는 쓰디쓴 커피를 삼키며 탄식하기 시작했다.
"아아- 구텐베르크판 성경 같은 그 맛을 다시 한 번만 음미할 수 있다면!"
하면서 그 뜨겁고 사약처럼 쓴 커피를 한 모금에 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게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커피를 마신 뒤 쩝쩝 입맛을 마신 뒤 그가 그 단추구멍처럼 작은 눈을 나에게로 돌렸다.
"당신도 그걸 찾는 거요?"
"그거라면…… 영원의 빛 말인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탐색하는 눈초리로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당신…… 정확하게 어디 소속이오?"
"소속 같은 거 없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럼 여기서 뭐하는 거요?"
"책 빌리러 왔는데요."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겁니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여기를 어떻게 찾아왔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몇 달 전에 산책 나와서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그 와중에 저 너머로 큰 건물이 보였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더니만 도서관이더라, 뭐 대충 이랬던 것 같았다.
"뭐 산책 나와서 길 잃어서 돌아다니다가 온 건데요."
그는 충격으로 말을 할 수가 없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뒤로도 계속 여기를 들락거렸던 말입니까?"
"네."
"그뒤로는 어떻게 여길 찾습니까?"
"그냥 대충 멀리서 지붕 보고 찾아왔는데요."
그의 빨간 볼은 더욱 빨개졌고 작은 눈은 충격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둥그레졌다.
"그, 그러니까 계속 지붕을 보고 여길 왔다는 거죠?"
"네 그렇다니까요."
당연한 거에 저렇게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니까, 아무리 방향치라지만 조금 짜증이 나서 짜증스레 대답해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가씨, 이 도서관은 좌표도 없고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은 유동적인 장소요."
"네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이 중년 남자의 말에 되레 놀라버렸다.
"말도 안 돼요!"
"세상에 말이 되는 일들만 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줄 아쇼!"
남자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뭐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세상에 말이 되는 일만 있다면 세상이 이 꼴이겠어! 특히 당신네 마쵸 남자들, 싸움질은 그만하고 집에서 마누라 어깨라도 주물러주지 그래!
남자는 흥분했는지 갑자기 빠른 억양으로 쏘기 시작했다.
"세상에 말이 되는 일들만 있다면, 내가 책벌레 섹트 소속으로 책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는 게 믿겨지고, 변종 드라큘라들이 책을 빨아먹고 산다거나 하는 게 현실이겠소! 날 봐요! 내가 엄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증거 아니겠소!
이 도서관은 좌표에도 없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다른 공간에 있는 시간이 멈춰져 있는 바로 그 도서관이란 말이오! 여기는 바로 그 유명한 '바벨의 도서관'이란 말입니다!"
"네엣! 바벨의 도서관이요!"
나는 그 남자의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자기 변론서가 있다는 그 바벨의 도서관이란 것이다!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이렇게 자주 듣다 보면 제법 그럴 듯해 보이는 법이다. 나는 냉정해지려고 했다.
“이곳은 있을 수 없는 공간이잖아요! 믿을 수 없어요! 증거를 보여주세요!"
일단 나는 부정하고 봤다. 대학 다닐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일단 증거가 없는 것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게 학문적인 태도라고 누누이 강조했건만 일단 믿고 싶지 않은 것에 부정부터 하는 걸 보면 그 유유자적 교수님의 생활 방식을 배우긴 멀었나 보다.
"증거라고 했소, 방금?"
"네, 증거요!"
"날 따라와요."
라고 말하면서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바로 사서의 자리였다. 우아한 만년필로 뭔가 쓰고 있던 사서가 고개를 들어 그와 나를 쳐다보았다
“마이어 씨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그의 표정은 방금 전 일 때문에 그런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글쎄 이 아가씨가 여기가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걸 못 믿겠다지 뭡니까!”
마이어 씨라는 볼이 사과처럼 빨간 남자가 씩씩대며 말했다.
“아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저희는 가끔 저런 손님도 받고 있거든요.”
“이봐요, 마이어인지 아이언인지 하는 양반! 증거를 보여준다고 끌고 오더니만 왜 사서 아저씨한테 큰소리를 치는 거죠? 증거나 보여줘요, 어서.”
나는 나를 멀뚱하니 세워놓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는 거에 슬슬 짜증이 나서 신경질을 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마이어라는 남자가 손을 들어 사서를 가리켰다.
“여기 보고 있지 않소.”
“제가 뭘 보고 있는데요.”
“백작 말이오, 백작!”
“그게 누군데요?”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바라보는 것처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오?”
“네, 저는 저분이 사서라는 것밖에 모르는데요.”
나는 얌전한 소녀처럼 대답했다.
내 대답에 갑자기 또 그의 눈알이 거의 튀어나올 것처럼 둥그레졌다.
“진짜 뭘 모르는 아가씨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았다.
“아가씨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불사신 생 제르맹 백작이오.”
“네? 뭐라구요?”
진짜 놀랠 ‘노’자였다.
“생 제르망 백작이라고 했소.”
나는 입만 딱 벌리고 마이어 씨와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 사람은…….”
“네, 몇백 년 전 사람이죠. 하하.”
백작이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가 영원의 빛을 본 장본인이기 때문이오!”
“진짜요?”
“맞습니다. 그 빛을 보고 불로불사를 덤으로 얻었지요. 그리고 이 도서관도요.”
“그렇다면 그 이 영원의 빛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모두 그걸 보고 불로불사가 되려고 하는 까닭일까요?”
나는 궁금증을 이 참에 풀어볼까 해서 잽싸게 질문을 던졌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이어 씨 당신은 왜 찾죠?”
“나는 소문난 미식가로 구텐베르크 판 『성경』부터 해서 온갖 희귀본은 다 먹어봤는데 아직 <알렙>은 못 먹어봤소. 우리 책벌레들의 목표는 그 세상의 진미와도 같을 그 <알렙>을 먹는 데 있소.”
“그건 잉크 드링커들도 마찬가지지요.”
백작이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해줬다.
“잉크 드링커요? 잉크를 마시나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용어들이 난무하는 그 둘의 대화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란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그들은 변종 드라큘라로, 책의 잉크를 마시는 역시 책벌레와 흡사한 섹트요.”
책벌레 섹트라는 남자가 자못 혐오스럽다는 듯이 설명하는 걸 보니 저 책벌레들과는 잉크 드링커들의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책을 먹는다는 이 자칭 미식가나 몇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사나이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고 그들은 나처럼 목적 없이 떠돌다가 흘러들어온 한심한 해파리에게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책벌레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댁은 어떻게 영원의 빛에 대해 알고 있던 거요?”
“어떤 사람이 말해 줬어요.”
“어떤 사람이었죠?”
백작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회색눈이 번뜩였다.
“에…… 마르고 트렌치 코트를 입은 수상하게 생긴 남자요.”
아시다시피 나는 관찰력도 영 꽝이었던 것이고, 기억력도 그다지 봐줄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그러자 책벌레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이보쇼,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 중 남자 태반이 트렌치 코트를 입다는 거 알고 있소?”
그 역시 남자였고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거보라니까 트렌치 코트는 수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뭐, 뭐라더라…… 보찾사? 뭐 이런 이름을 대면서 나한테 보르헤스 책을 읽고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러자 백작이 누군지 감잡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아 권교수군요.”
물론 난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백작이나 마이어 씨 둘 다 표정이 진지해지는 듯했다.
“뭐 이름을 못 들어서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잘 모르겠단 몸짓을 했다.
마이어란 사람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권교수가 여기에 와 있는 걸 보니, 빛이 이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나 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보찾사는 가장 최근 생긴 섹트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목표는 다른 섹트와 일치하지만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신흥 섹트요. 그들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좇아 영원의 빛을 찾으려 하고 있소. 그들은 보르헤스의 방법론을 이용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보르헤스인 거죠?”
순간 불현듯 친구가 해준 얘기가 떠올리며 물었다.
“왜냐하면 보르헤스가 영원의 빛에 가깝게 다가갔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문서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백작이 답해줬다. 책벌레는 뭔가 생각하느냐고 정신이 없는 듯했다.
“보르헤스는 눈이 멀었을 텐데 어떻게 영원의 빛에 다가갔던 거죠?”
“보르헤스가 눈이 먼 건 영원의 빛에 가깝게 다가가서 그 빛에 시력을 잃었으니까요.”
“백작은 영원의 빛을 봤다는데 멀쩡하잖아요.”
나는 5초 정도 백작이라 부를지 백작님이라 부를지 고민하다가, 마이어 씨도 백작이라 부르는 듯하니 괜찮겠지 싶어서 백작이라고 호칭했다.
“그건 보르헤스가 알렙을 보긴 봤는데 완전한 상태에서 본 게 아니라 다가가기만 했기 때문이오. 그걸 터득을 해야만 자신의 것이 되지. 그나마 그 소마 한두 방울로도 충분히 천재가 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마이어 씨가 끼어들었다.
“역시 그걸 본 목격자 - 아, 우리는 단순하게 영원의 빛을 찾은 사람 말고 보기만 한 사람들을 목격자라고 칭하지요 - 중에 베토벤 같은 사람도 있소.”
“베토벤도요?”
“모짜르트도 있지.”
“놀랍군요.”
“베토벤은 청력을 빼앗겼고, 슈베르트는 정신병으로 반쯤 미쳤지. 슈만도 강으로 뛰어들었고, 고호는 귀를 잘랐소. 실비아 플라스는 자살을 해버렸지. 또, 에밀리 디킨슨은 집밖으로 그 뒤 한 번도 안 나왔소.”
그때 잽싸게 백작이 끼어들었다.
“갈르와는 또 어땠는데요. 결투로 위장해서 자살해 버렸지요. 유명한 말 한 줄 남기고 말이에요.”
“갈르와가 누군데요?”
그러자 그들은 도서관에 드나드는 사람 주제에 갈르와를 모른다는 것이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도 된 양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거봐 내가 말했지. 진짜 어쩌다 온 사람이라고…… 당신 말이 맞군요. 뭐 대충 이런 눈빛이었다.
나는 기침을 흠흠 몇 번 하고 다시 물었다.
“갈르와가 누군데요?”
“갈르와는 요절한 천재 수학자라오. 5차 방정식에 대한 훌륭한 증명을 남겼지.”
백작이 대답했다. 나는 백작의 말에 조금 용기를 얻어 또 물어보았다.
“무슨 말을 남겼는데요?”
“20살에 죽기에는 모든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지요.”
백작은 엄숙하게 말했다.
“왜 그가 죽어야 했는데요?”
나는 진짜 궁금해졌다. 왜 역사상의 재능은 있었되 불행했던 사람들 이름을 대면서 이들이 영원의 빛 근처에 다가갔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왜냐면 한 번 보고 나면 그걸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라오.”
“하지만 보르헤스는 잘 살았잖아요.”
“그건 보르헤스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이랍니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백작이 말했다.
백작의 고개 너머로 계속 왔다갔다 하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왜요?”
“그걸 낸들 알 수 있소. 보르헤스 마음인데.”
“높은 곳에 올려진 꿀단지처럼 사람을 자극하는 게 바로 영원의 빛 <알렙>요.”
책벌레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보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데요.”
“아가씨 그건 불로불사를 약속하고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는 욕망의 집합체이자 인류 지식의 보고이며 모든 지식의 통합체요. 알렙을 찾으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래도 탐이 안 난단 말이오?”
“전혀요. 제가 오래 살아서 뭐하죠? 또 남들 아는 거 다 안다고 제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예상 밖으로 담담한 태도를 취했다.
“알렙을 보면 아니 얻으면 어떻게든지 알렙 즉 영원의 빛과 접촉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독서광들의 최후의 지식 그 한 방울에 접근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도 탐이 안 난단 말이요?”
그 둘은 역시 나를 알 수 없는 아가씨야라는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지대에서 살고 있다면 나는 단단한 현실을 발판으로 살고 있던 것이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붉은 노을이 마지막 빛을 뿌리며 어두워지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커피도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물리적 공간을 탈피해 있다고 해도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게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삼차원이든 사차원이든 어딘가에 있다는 게 아니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집에 가서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해먹고 단추처럼 귀여운 내 고양이랑 일일 드라마를 보면서 굴러다니고 싶었다.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야겠네요. 계속 대출은 가능한 거죠?”
“그건 당연하죠.”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사서가 웃으면서 흔쾌히 답했다.
inkdri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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