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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막으로

2005.12.21 19:1012.21

  나는 죽기로 했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삶은 의미가 없다는 오래된 경구를 들먹이는 일조차 지겨웠다. 하루에 달이 지는 모습을 수백번 지켜봐도, 해변가를 거닐며 바다거북의 산란을 도와줘도, 도시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는 광경을 보아도, 우주의 광대함을 헤아리며 밤을 지새워도, 지겨운 건 마찬가지였다. 지겨움이란 말도 지겹고 지겹고 지겨웠다. 지겨움이란 정말 지겨웠다.

  사막에 가고 싶었다. 사막에 가지 못하는 인생은 따분했다. 의미없는 인생만큼이나 많은 모래에 눕고 싶었다. 입 코 눈 귀에 모래를 채워넣어 묻히려 했다. 그러려고 했다. 아직 인생이 견딜만한 것이었던 나이에 나는 사막을 꿈꿨다. 30이 되면 그곳에 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세상 모르고 웃어대는 젊은이만큼이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너무 단순했다. 나로 하여금 건물 옥상에 올라가도록 만들 정도였다.

  떨어져 죽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뭉개져야만 했다. 누구도 내 시체를 거두지 못할 것이었다. 시립 화장장에서 태워지든 공동 매장이 되든 좋았다. 차바퀴에 말려 들어가 으스러져도 아스팔트에 촘촘히 박혀도 괜찮았다. 단번에 목이 부러져야 했다. 경추가 떨어져 나가야 했다. 마치 주정뱅이가 벽에 내던진 술병처럼 깨어져야 했다. 그래야 했다.

  The pillows의 "Trip dancer"를 흥얼거리며 올라갔다.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맨 아래층에는 주차창이 있고 다음은 노래방이니 치과니 설렁탕 집이니 층층이 있고 다음은 집 집 집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죽는 곳이었다. 사람이 살면 죽기 마련이다. 필연적이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문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긴 문을 부쉈다. 병든 개처럼 시원찮게 찼어도 쉽게 열렸다.

  옥상에서는 자살자 주말 모임의 텅빈 회장 같은 냄새가 풍겼다. 절망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사람을 줄어들게 하는, 작고 보잘것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그런 밤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저분한 불빛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폐수로 가득찬 바다. 중독자의 대변과 사기꾼의 소변이 섞인 비도덕적인 칵테일. 광대버섯만큼이나 유혹적으로 넘실댔다. 모두를 삼키기 위해 수억개의 눈을 깜박였다. 저 바다에 사는 생물은 전 우주에서 가장 어리석었다. 어리석고 역겨우며 가련했다. 화염으로 가득한 바다를 보는 내내 발에 한기가 들었다. 발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자른 발가락을 씹고 뱉고 발로, 이미 존재하지 않는 발로 밟아버리고 싶었다. 시간이 늘수록 고통도 는다. 자명한 이치이기에 난간으로 갔다. 난간을 짚고 헛된 생각에 잠겼다.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뚝 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숟가락을 뺏긴 부랑자가 고급 식당을 보며 흘리는 눈물처럼. 식당이 실은 식중독균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어도 부랑자는 눈물을 토해냈다. 그에게는 식중독에 걸릴 기회조차 주어진 적이 없었다. 굶고 또 굶다가 말라빠진 거적이 되었다. 주철 깡통이 되어 녹슬어갔다. 아무것도 담기지 못하도록 구멍나고 찌그러졌다. 누가 밟은 것일까. 운명이? 인생이? 타인이? 사고가? 불운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갯짓에 따라 빗겨 떨어지는 눈물이 뜨거웠다. 깡통을 밟아 뭉갠 것은 바로 나였다. 내가 그랬다. 나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아무도 공박하지 않는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면.

  나는 죽어야만 했다. 난간에 올라섰다. 거센 바람이 일시에 몰려와 인생에 지친 노인의 수염처럼 흔들었다. 나는 떨어져야만 했다. 떨어지기로 했다.

  언제나 기적은 이런 순간에 일어난다.

  나는 발을 헛디뎠다. 걷다가 넘어지듯이 죽으려고 자연스레 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가 디딘 것은 허공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딱딱한 무엇이었다. 그것은 둥그스름하며 곳곳이 물컹거렸다. 오래도록 썩기만 한 빨래더미처럼 끔찍한 냄새가 났다. 적어도 땅은 아니었고 물론 구름도 아니었다. 근두운치고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동사무소 서기보다도 더 비루했다. 게다가 움직이고 있었다.

  넘어졌다. 코가 깨졌다. 물컹한 부분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 순간 고개가 쑥 빠졌다.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그것의 일부가 부서진 것이다. 빌어먹을 자동차의 전조등이 광선검처럼 휘둘리며 교차하고 있었다. 날 받아먹고 배를 두드릴 수도 있었던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매일 잔인했다. 잔인하게 살았다. 날 살린 것도 잔인성이었다. 인생은 자동차만큼 잔인했다.

  기묘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새된소리로 비명을 지르거나 벌떡 일어나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귀찮았다. 눈을 감은채 그냥 놔두기로 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가는 길로, 가도록 했다. 나는 수명이 다한 자명종이었다. 태엽을 감아도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정시를 알리고 무덤으로 돌아갔다. 정적과 고요를 안주삼아 침묵을 마셨다. 하지만 코를 둘러싸고 찔러오는 냄새가 판을 깼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루 종일 불을 켜놓는 사무실 옆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이 드러났다.

  그것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웃음이 나왔다. 노란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주 샛노란 웃음이 코를 후려치며 정수리에서 흘러내렸다. 내가 밟고 있던 것은 잔해였다. 불개미들이 끌고 가던 검정 일개미의 다리 조각이었다. 한평생 본 적도 없는 누군가를 위해 일하다 버려진 자의 흔적이었다. 온갖 가재도구와 공사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비를 썩은 통나무가 둘러쌌다. 묶고 있는 밧줄도 좀이 슨 쓰레기였다. 불안한 추측을 사용하자면 뗏목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하늘을 나는 페기물 처리장이 더 적절했다. 어쨌든 움직이고 있었다. 무뚝뚝한 거인들의 반짝이는 모자를 스치며 나아갔다. 고요한 불바다가 천천히 뒷걸음쳤다.

  가라앉은 곳을 찾아 누웠다. 우주로 솟은 공허는 광막하였다. 별없는 경계가 말없이 속삭였다. 정말 역겨운 냄새였다. 옷자락으로 코를 막았다. "뗏목"의 냄새에 익숙해지기에는 밤이 짧았다.

  이대로 뛰어내려야 할까. 계속 떠가야 할까.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후회를 부른다. 후회 없는 선택은 죽음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공중을 날아가고 있다면 죽고 싶지 않다. "뗏목"이 사막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사막에 가면 쓰레기 더미로 집을 지어야겠다. 쓰레기로 집을 짓고 모래를 품어야겠다. 코가 마비된 후로도 망상과 옥상이 이어졌다.

  운동기구로 가득한 체육관 옥상이 있는가 하면 나무와 꽃으로 동산을 만든 옥상도 있었다. 의자를 늘어놓아 흡연장이 된 옥상과 거대한 어항으로 수족관을 옮겨 놓은 옥상, 철망벽을 사방에 세우고 농구장을 그려놓은 옥상이 있었다. 넥타이를 멘 어린왕자들의 섬이었다. 내가 올라갔던 옥상은 드문 편에 속했다. 오직 빈 자리로 채운 옥상은 찾기 힘들었다. 검은 돌로만 깔아놓은 바둑판에 점점이 박힌 흰돌처럼 눈에 띄었다. 어느새 나는 깨끗하게 치운, 마치 사막처럼 무미건조한 옥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달팽이와 굼벵이의 시간선에서 온 듯한 "뗏목"의 속도에 지루해하던 차에 마침내 하나를 발견했다.

  여자다.

  170cm 넘는 키에 오드리 도투 스타일의 단발머리를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선 옥상은 주변보다 낮았다. 라임라이트를 비추듯 빛이 모였다. 서서히 파문이 번지듯 다가갔다. 희미한 인영이 짙어졌다. 그녀는 타란튤라처럼 새까만 머리를 바람에 날렸다. 갑옷처럼 두터운 연갈색 스웨터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카고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미묘하게 어긋난 아름다움을 쏘아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 아래로 날카로운 눈이 짧은 속눈썹에 가렸다. 얇고 적당한 크기의 콧등에 걸친 무테 안경이 은색으로 빛났다. 굳게 앙다문 입술은 엷은 분홍색으로 희미하게 반짝였다. "뗏목"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뗏목"에 다가왔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와 나는 허공에서 만났다. "뗏목"은 거의 정지한 듯이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꺼져."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역겨웠다. 차에 치어죽은 부랑자를 아침식사로 먹는 사람을 본 것 같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것은 연인을 벤 자의 죽음을 지켜보는 얼음 심장 같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검은 창으로 무장한 적의였으며 살아있는 경멸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나는 무너진 악몽에 불과했고 색채를 잃은 캔버스천에 불과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폐부를 찢어놓은 것은 벼랑 끝에 몰린 두 사람이 만나 처음 오고 간 감정이 너무나도 무정한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내뱉은 단순한 한마디가 모든 걸 결정했다. 우리가 가질 수도 있었던 동질감, 생을 포기하려는 자들만이 아는, 그 향방을 정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녀의 적의는 내게 당혹과 경악의 숲길로 가도록 종용했다. 턱이 중력을 좇아 벌어졌다. 먹이를 빼앗기고 발에 채인 개처럼 침을 질질 흘렸는지도 모른다.

  "냄새나."

  코를 막고 있었을까.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만 알았다. 그녀가 멀어지고 멀어진 후에도 마지막 한마디가 울리고 울렸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탁구공을 넣고 수천번 튕기는 느낌이었다. 잔향과 잔향이 서로를 물고 돌았다.

  몸에 구멍이 뚫려 허탈한 바람이 새어들어왔다. "뗏목"에 일자로 드러누웠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왜 별이 보이지 않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뗏목"은 어디로 가는 걸까. "뗏목"은 느렸다. 목발을 도둑맞은 상이군인처럼 느리게 나아갔다. 정말 사막으로 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옥상을 떠돌아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별없는 하늘을 넘어 달이 품은 사막으로, 영원히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달의 한귀퉁이에 바다라고 이름지은 바보가 있었다. 그 낭만적인 바보는 사막을 바다로 보았다. 어떤 세계일지 궁금했다. 바다이면서 사막인 광대한 어둠이 떠올랐다. 아무도 숨쉬지 않는 바다는 사막처럼 고요했다.

  "뗏목" 앞 부분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바람이 조금씩 거세졌다. 낮은 거인의 머리를 짚고 상공으로 올랐다. 공기가 옅어지고 별빛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의 눈처럼 거대한 달이 내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반점을 지닌 신은 둥그렇게 웃었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뛰어내렸다. 마침 적당한 거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거인의 머리에 올라 뒤를 돌아봤다. 수천 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부딪히며 굳어 있었다. 그들 중 빛나는 얼굴을 가진 거인이 보였다. 이마에 검은 불칼을 이고 있는 거인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불빛에서도 냉막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속으로 불타올라 번개를 얼리는 불꽃이었다. 그녀를 확인 했으니 심호흡을 할 차례였다. 몸을 줄였다가 튕겨내듯 폈다. 다리가 달려나가자 의지가 뒤따랐다. 문을 부수고 계단을 굴러 내렸다.

  사막에 가고 싶었다. 혼자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사막은, 우주는 홀로 있기에 너무나 추운 곳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렸다.
땅콩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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