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0.









내가 눈을 떴을 때 뜻밖에도 요한 신부가 나와 내 곁에 잠든 누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 곁에는 역시 알머리를 드러낸 소년 왜장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불씨가루 냄새가 매캐한 왜군의 군막이었다. 누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나는 소년 왜장의 눈을 살피며 품 안의 단검을 꺼냈다. 무슨 생각인지 그들은 우리의 품을 뒤지지 않았다.





소년 왜장은 큰 절을 한번 올리더니 어설픈 우리 말을 건네었다.



“나를 기억하는가? 나는 죽은 당신의 아비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은 자다. 다케루라 부른다.”



스스로 다케루라 이른 소년 왜장이 몹시 낯익었다. 누군가 했더니 첫 싸움에 아버지의 창과 겨루었던 그였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칼을 들었다.



“내 아비가 주신 내 이름은 한율, 누이는 묘음이라 부른다. 내 아비는 네가 또다시 칼을 쥐면 목을 베겠다 하셨다. 내 아비가 죽어 그 약속을 버리는가?”



“알고 있다. 그 이후 나는 칼을 버리고 신부님께 귀의하여 천주님의 큰 뜻을 배우고 있다. 주먹 쓰는 법을 새로 배워 몸을 지키되 두 번 다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케루는 다시 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비록 신의 길에 들어서 감히 싸우지 아니하지만 네 아비는 사무라이 중의 사무라이, 쇼군 중의 쇼군이다. 나는 그를 두렵게 모신다. 그래서 너희를 살렸다. 우리 군이 너희를 쏘아 죽이려 할 때 나와 신부님이 말려 너희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더러 늬들 무리 앞에 무릎 꿇고 앞잡이 노릇이라도 하란 말인가? 너희들은 앞으로 말달려 칼을 휘두르고 불줄통을 쏘고 불씨가루로 땅벼락을 뒤엎으며 이 나라를 분탕질칠 것이 아니냐?”



그 때 요한 신부가 돌연 끼어들었다. 아버지에게 목이 졸려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있었다. 그는 힘겹게 목을 울렸고 다케루는 그의 말을 옮겨주었다.



“신부님께서는 너희 남매가 도망쳐 어디서든 살아남기를 원하신다.”





나는 멍하니 신부를 바라보았다. 요한 신부는 내 눈을 받지 못하고 다시 절을 하며 몸을 수그렸다. 비록 호쿠사이를 통해서였지만 그는 이 곳의 예법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케루는 말을 이었다.





“싸움통에 이 땅에서 살아 남기 어려울 것이나 배를 구하여 호쿠사이로 보내줄 수도 없다. 그러나 너희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요한 신부님과 같은 색목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오로지 한 길만을 걸어왔다. 천주님의 뜻에 망측한 의심을 품지 않았고 모두 힘쓴 덕에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세상에 어려움을 느끼듯 그들도 다르지 않다. 풀기 어려운 세상의 난해함은 어디에나 있다. 신부님께서는 색목인들이 미처 몰랐던 천주님의 큰 뜻이 너희 아비와 남매를 통해 숨겨져 있다고 믿고 계신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데서든 반드시 살아남아 그 뜻과 재주를 펼쳐야 한다. 요한 신부님께서는 법칙을 정해 두고 승부를 가리는 주먹쌈이 결국 본질적인 무(武)를 이길 수 없음을 아셨다. 놀음은 놀음일 뿐, 너희도 너희요, 우리도 우리다. 어느 한 가르침을 좇아 누가 누구를 정복하고 똑같이 만드려고 하는 짓은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다.” 다케루는 숨을 돌렸다가 다시 선언하듯 말을 맺었다.







“너희들은 너희들만의 귀중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전쟁에 휩쓸려 명맥을 끊지 마라. 깊이 궁구(窮究)하고 경지에 이르고 전승하라. 요한 신부님께서는 그 것을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네 아비도 그 것을 원하리라 하셨다.”



나는 숨이 막혔다. 다케루가 전하는 신부의 뜻은 아버지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대답했다. “너희들의 말대로다. 나의 아비는 그를 원하였다.” 다케루와 요한 신부, 그리고 나와 누이 사이로 침묵이 잦아들었다. 나는 지쳐 잠든 누이를 대신해서 목에 걸린 울음을 잘금잘금 토해내었다. 행여나 누이가 깰까 사르죽인 울음은 그만큼 뼈에 사무쳐 울렸다. 요한 신부가 밖으로 나갈 때 다케루는 아버지의 창을 내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나는 그 창자루를 쥐었다. 실팍한 창자루에는 분명히 아버지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돌아온 요한 신부는 황황히 우리를 군막 뒤의 마굿간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늙은 군마가 있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더니 어지러운 싸움 중에 죽지 않음이 용했다. 다케루는 늙은 말이 이길만큼 식량과 물을 실었다. 요한 신부는 축 늘어진 누이를 말 위에 비끄러매었다. 나를 마저 올려주며 신부는 품 안의 십자가를 꺼내 내 목에 걸어주었다.





“여기서 너희들은 오래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곧 군사를 수습하여 반도 왕국의 서울로 올라칠 것이다. 어서 떠나라. 어데서건 천주님께서 너희 남매를 지켜주실 것이다. 꼭 살아라. 한율, 묘음.”





다케루의 입을 빌어 부르는 우리의 이름은 묘하게 꼬여 낯설으면서도 낯익었다. 늙은 군마가 배가 불러 기운차게 내달릴 때 몇몇 왜군들이 창을 들어 우리를 겨누었다. 그러나 다케루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창과 칼이 대숲처럼 선 병영을 나와 군마는 자유롭게 내달렸다.







달리는 말엉덩이가 실룩대며 누이를 깨운 모양이었다. 내 품에 안긴 누이는 고개를 돌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어미뫼로 돌아간다고 대답했다. 누이는 안심한 듯 내 가슴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따뜻했다.





아버지의 재주는 성과 함께 사라졌다. 아버지를 무너뜨린 이들은 번잡스러운 세상의 중심으로 늪처럼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곳을 떠났다. 누이는 소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고 듣고 만들 터였다. 그리고 나는 말과 글로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연결해야 했다. 그 것이 오로지 보고 쓰는 재주밖에 없는 내가 할 일일 터였다.







저녁 늦달이 바람에 이지러졌다.



……終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아주 긴 습작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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