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텅 빈 이야기 -1- 돌진

2005.10.12 17:3910.12

* 퇴고는 완결 이후에.
텅 빈 이야기 by 정 대영(unhappy@p a r a n.com & beta.egloos.com)
1. 돌진
금요일, 월차를 썼다. 주 5일제를 시행하는 회사라 어지간하면 그냥 출근해도 그만인 것을, 출근해서 몸이 아프다며 오늘 하루만 적당히 게으름부리다 퇴근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을 연달아 쉴 수도 있는데 기어이 월차를 쓰고 말았다. 참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 더 쉬고 싶었다. 이유도 없다. 똑 같은 날을 사는 누군가가 그냥 요즘 몸도 좋지 않고, 기분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걱정해준다면, 그걸 이유 삼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쉬고 싶었다. 베개 아래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얼굴 앞에 대고 열어본다. 환한 액정의 빛이 평소보다 몇 시간 더 감고 있었던 눈을 아프게 찌른다. 찔끔 눈물이 나오고, 그 눈물에 뿌연 시야가 살짝 걷힌다. 오전 11시 47분, 절대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침대 이불에 파묻힌 체로 회사에 전화를 한 때가 일곱 시 삼십 분쯤이었으니, 겨우 네 시간을 더 잔 셈이다. 아까운 날에 더 아까운 월차를 썼는데도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온몸은 노곤하고 어딘가 쑤신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단순히 심각한 운동 부족일 뿐이다. 조금 망설이다가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누워 있기로 마음 먹었다. 월차를 썼으니, 월차를 쓴 날답게 굴어야지 싶었다. 핸드폰을 든 체로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 얼마 전 다운 받았던 맞고 게임을 실행시켜본다. 그러고 보니 게임 회사에 다닌다던 동창 친구가 말했다. 술에 조금 취한 체로 고스톱 보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재벌이 될 거라고 했었는데, 맞고를 한 판 두 판 치면서 생각해보지만 그런 게임은 상상 할 수가 없다. 공연히 생각만 복잡해질 뿐이다. 핸드폰의 인공 지능에게 몇 번이고 지고나니 잡고 있을 마음도 사라져 버린다. 놀자고 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냉정하게 딱 핸드폰을 접은 다음 베개 아래로 도로 밀어 넣는데, 기세 좋게 벨이 울린다. 짧게 한 번 울리고 잦아드는 걸 보니, 문자 메시지다.

‘오늘 7시 20분까지 사당 역에서 만나기로 한 거 모두 잊지마.’

같은 학교 동창 중에서도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결성한 생일 계모임 문자 메시지다. 그래, 이번 주 금요일에 모이기로 했었지. 이번 달이 생일인 주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겠다고 선언했다. 사당 역 6번 출구로 나가면 패밀리 레스토랑이 연달아 두 곳이 있으니, 사람이 없는 곳에 가면 된다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몸만 살짝 일으켜 세운다. 7평 남짓한 전세 원룸은 엉망진창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할 만큼 어질러진 좁은 풍경에 한숨이 나온다. 이 원룸의 전세도 이제 나흘이면 끝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방을 구하기는커녕, 정리 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주인은 포장 이사를 하려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실은 심각할 만큼 아무 것도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귀찮다, 너무나 귀찮다. 나흘 뒤에 쓰레기와 함께 거리에 내몰리더라도 지금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빨리 남자를 만나라, 그래야지 좀 치우고 살 마음이 날 걸?’

마지막으로 집에 놀러 왔던 친구는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라 그냥 우렁 각시다. 내가 마음대로 노니는 사이에 이사를 갈 준비를 다 끝내놓고 자취를 감추는 그런 우렁 각시 말이다.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뻗고, 발로 이리저리 어지러운 쓰레기며 책을 밀어놓고 슬쩍 일어선다. 그렇게 계속 발로 치워가며 냉장고까지 걸어가 문을 열어보니, 몇 일전에 사둔 이상한 음료수가 하나 보인다. 말라 비틀어진 야채가 꼴 보기 싫어 얼른 음료수 병을 꺼내 들고 문을 닫았다. 음료수 병은 투명하고 그 위에 오렌지와 레몬 그리고, 산소를 넣었다는 글씨가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산소, 산소를 넣었다는 표현이 어쩐지 우습다. 그런 거, 마시다가 숨쉬면 다 들어가게 되 있는 거 아닌가? 주홍 빛깔의 주둥이를 열고 슬쩍 반 모금 맛을 본다. 맛을 곰 씹어보니, 오늘 갈지도 모르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자주 마시던 오렌지 에이드 맛과도 비슷하다.

“괜찮네.”

답답한 목이 조금 가셨는지, 일부러 소리 내어 확인해보고는 음료수 병을 어지러운 냉장고 머리 위에 올려놓고, 뒤 돌아선다. 어지러운 방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나가자, 일단 어디로든 나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발로 잡동사니를 밀어내며 욕실로 들어간다. 좁아 터진 욕실은 그나마 깨끗하고, 온수가 잘 나오는 편이다. 전에 살던 사람이 벽에 붙여놓은 이상한 스티커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이를 닦는다. 이때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티커는 대부분이 굵은 사인펜으로 그린 외국인 얼굴 아니면, 괴팍한 차림을 한 인체 비례가 하나도 맞지 않는 키다리 패션 모델이 대부분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짤막한 영어 단어까지 인쇄한 그 스티커의 향연을 볼 때 마다, 전 주인이 혹시 디자인 대학 학생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괴팍한 스티커들이긴 하지만, 떼어버리자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샤워 할 때 심심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YOU GO! GIRL!’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마지막으로 스티커들을 쭉 훑어본다. 유 고 걸, 늘 신경 쓰이는 영어 문장을 한 번 더 읽어본다. 아마도 ‘소녀여, 당차게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지만, 저게 영문법에 맞는지 아닌지 늘 신경 쓰였다. 이제 몇 일 후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욕실에서 나와 옷 보다 음료수를 먼저 찾는다. 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던 음료수 병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면서 무얼 입고 나갈지 고민해본다. 옷만큼은 부지런히 빨아서 건조대에 얹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입은 옷을 또 입는 찜찜한 기분이 죽을 정도로 싫기 때문이다. 음료수 병을 입에 문 체로 몸을 돌려 건조대를 바라본다. 꽉 끼는 청바지 하나, 헐렁한 청바지 하나, 적당한 베이지색 면 바지가 하나, 옅은 보라색과 남색 폴로 티셔츠가 각각 하나씩, 그리고, 속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일단 놀러 나가는 만큼, 그리고 저녁을 양껏 먹을 생각이기에 하의는 살짝 헐렁한 청바지를 입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상의는 기분을 전환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옅은 보라색 폴로 티셔츠를 입자. 양말은 대학 거리에서 양껏 사다 놓았으니, 그 중에서 가장 어두운 색으로 신고, 외투는 아주 엷은 하늘빛이 도는 베이지색 가디건이 좋겠지. 가방은 열흘 전쯤 동대문에서 고르고 골라 샀던 투 폴더 가방을 들고 가자. 음료수를 다 마시고 남은 병은 그냥 다시 냉장고 위에 올려놓고, 발로 잡동사니를 밀어내며 추적추적 건조대를 향해 걷는다. 손을 뻗어 속옷부터 차근차근 집어 입으면서,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해본다. 청바지를 입다 말고, 건조대 끝에 살짝 걸어놓은 지갑을 들고 들여다 본다. 지폐 몇 장과 이런저런 쿠폰이 빼곡히 쌓여있다. 그 중에서 가장 낯익은 잿빛 카드를 꺼낸다. 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금연 좌석이 있는 만화방 카드다. 두 시간만 더 채우면 두 시간이 무료다. 여기로 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다시 지갑을 건조대에 걸쳐 놓고는 주섬주섬 옷을 마저 입는다. 옷을 마저 입고, 치워놓은 길을 따라 침대 베개 아래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작은 책상 위에 올려둔 투 폴더 손가방에 넣은 다음, 벽걸이에 걸어놓은 가디건을 입고 서둘러 문을 나선다. 단순히 쑥대밭이 된 방에서 도망치는 것뿐인데, 어쩐지 기분이 좋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좋아하는 손가방도, 지갑도 가지고 나왔는데, 돌아오지 말아버릴까. 정말 그렇게 도망쳐 버릴까. 문을 잠그면서 피식 웃어 버린다. 이거 있다가 저녁에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이지만, 평일이라고 낮 동안에는 만화방에 사람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마자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하나 둘 만화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슬슬 말뿐인 금연석에 담배 연기가 들어찰 때까지 앉아 있다가, 담배 연기가 불쾌하게 코를 찌르는 순간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사는 남자들, 혼자 살면서 금요일 밤에 약속조차 없는 남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숨을 쉬며 담배를 물고, 한숨과 함께 연기를 뱉는다. 궁상 맞게시리- 문을 나서며 흡연석 전체를 한 번 흘겨보고는 계단을 내려와 핸드폰을 확인한다. 6시 48분, 지금 신림 역으로 출발하면 7시에는 닿을 수 있다.

신림은 환승역이라 내릴 때마저도 심하게 몸을 부대껴야 한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야 조금 숨통이 트이고, 느릿한 계단에 가만히 서있으려니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개찰구.”
-진짜?

승은이, 어디 회계 세무서에서 일하는지 몰라도 퇴근은 누구보다 빠른 친구가 웃는다.

“어디야?”
-아웃백, 조금 있으면 자리 날 거 같아.
“다른 애들은?”
-희민이는 좀 늦고, 주희는 버스 타고 오는데 근처래.
“알았어, 얼른 갈게.”
-그래.

통화를 마치고, 걸음을 빨리 내딛는다. 개찰구를 지나 익숙한 방향을 따라 계단을 오른다. 승은이 자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지하철 역 입구에서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차도와 딱 붙은 인도를 따라 걷는다. 걷는 방향과 차가 달리는 방향이 반대라서, 아무런 규칙도 없는 인도를 거슬러 걷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오밀조밀하게 붙어서 달리는 차의 행렬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인도 안쪽을 따라 걷는다. 경적 소리처럼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얘, 자리 났어. 지하로 내려와.
“응.”
-그래.

패밀리 레스토랑에 닿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가 점원의 인사를 지나쳐 바로 계단으로 내려간다. 뒤에서 점원이 손님하고 부르는 바람에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돌아서서 아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어색하게 웃는 점원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마저 내려간다. 이 패밀리 레스토랑은 지상보다 지하가 넓다. 계단 끝에 내려서자 마자 시야가 확 트인다. 굽이굽이 안으로 파고 들어간 식탁의 줄을 하나 둘 들여다보다 겨우 승은을 찾아냈다.

“일찍 왔네.”
“나야 늘 그렇지, 뭐.”

네 사람 자리에 앉은 승은이 만화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고개를 들며 활짝 웃는다. 브리지를 살짝 넣은 머리결과 라식 수술로 안경을 벗었지만, 고등학교 시절과 다름이 없다. 그때도 승은은 틈만 나면 만화책을 들여다 보다가, 누가 부르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쓸데없이 웃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 여전히 웃는구나. 맞은 편에 앉으니, 승은이 조용히 만화책을 덮어 넉넉한 크기의 핸드백 속에 집어 넣는다.

“그거 뭐야?”
“응? 아, 이거 궁전이라고 요즘 드라마 만든다고 해서 보고 있어.”

만화방에 자주 다니지만, 딱히 만화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소일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소식은 듣지도 못했다. 제목도 분명히 한 번은 본 것 같은데, 손에 쥐고 정신 없이 읽었던 것 같은데 짧은 기억조차 없다.

“재미있어?”
“글쎄? 난 괜찮은 것 같아.”

책임을 회피하는 대답을 하면서, 승은이 다시 활짝 웃는다. 라식 수술을 했어도, 쌍꺼풀이 없는 눈이 웃음을 지을 때마다 굳게 닫히는 것만 같다.

“별 일 없었어?”
“응? 아무것도.”

여전히 속편하고 느긋한 웃음에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허전했다. 하긴 그 웃음 뒤에 무언가를 숨기거나 참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웃음에 조금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숨을 돌린다.

“너는 별 일 없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MSN으로 수다를 떨고, 사흘에 한 번은 통화를 하면서도 왜 서로 오랫동안 소식 하나 듣지 못한 것처럼 안부를 묻게 되는 걸까? 먼저 물어본 건 나였으면서도 어쩐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응, 별 일 없었어, 나도.”

습관처럼 대답하고는 입을 다문다. 같은 대답이라도, 내 대답은 진실이 아니다. 승은처럼 편하고 환하게 웃을 수가 없다.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방안의 풍경이 떠오르고, 궁지에 몰리듯 줄어가는 유예의 날이 떠오르고, 아직 이사 갈 집을 찾아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일단은 웃는다. 승은처럼 환하지는 못하더라도, 정말로 별 일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늦어서 미안해.”

몰아 내쉬는 목소리와 함께 승은의 옆자리에 키가 큰 희민이 무너지듯 주저 앉는다. 조금 마르고 키가 크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어른들에게 시집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을 당해야 했던 친구다. 이제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어도 조금 어두운 얼굴과 안절부절 못하는 성격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고향에서 얻은 상처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서 와.”
“주희는?”
“오고 있대.”

달싹이며 숨을 쉬던 희민이 겨우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안도한 듯이 눈을 감는다. 제일 늦게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 받은 듯싶었다.

“잘 지냈어?”
“그냥. 똑같지, 뭐.”

위안을 받더니,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아래, 어쩔 수 없이 부산하게 탁자를 더듬거나 간이 메뉴 받침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보인다. 희민에게는 항상 불안이 따라다닌다. 모든 것이 그 불안에서 비롯되어 불행이 되기도 하고, 뜻밖의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냥 다 똑같다는 말은, 그저 여전히 불안하다는 뜻이다. 별 일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자기 생일이면서, 자기가 제일 늦네.”
“그러게.”

농담은 아니었는데, 승은이 낮게 웃는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7시 48분이다. 주희는 꼼꼼한 아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르게 나오는지도, 늦게 나오지도 않는다. 이런 시간에 버스를 탈 아이도 아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이 없으면서도 해괴한 버릇이나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버스에 시달리는 것으로 오늘의 폭식에 대한 희열을 좀 더 크게 만들어 볼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묘한 아이다.

“나 왔어.”

슬슬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온몸을 저릿하게 감싸 도는데, 살짝 주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직장인이면서도 도저히 직장인답지 않은, 그런 옷과 액세서리를 걸친 주희가 보인다. 색감도 너무 원색이 강하고, 안경은 일명 뿔테 안경이라 불리는 것보다 두어 배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다. 직장인이라기 보다는, 대학가에 어울리는 예술가 같은 자태다. 거리에 좌판을 깔고, 직접 만든 옷이나 장신구를 파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여전하다면 여전하지만, 오래도록 알고 지냈어도 볼 때마다 놀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야광 기능이라도 갖춘 것처럼 광택이 살짝 도는 주홍빛 바지로 계속 눈이 쏠린다.

“이게 누구게?”

잠시 멍하니 그 주홍빛에 넋을 잃고 있는데, 주희가 곁에 선 사람을 가리킨다. 그제서야 못 보던 얼굴이 주희 곁에 서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 오랜만이야.”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는 예쁜 얼굴, 타고나지 않으면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고운 몸맵시, 타고난 몸매 위에 단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게 얹혀 있는 고풍스런 정장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은주?”

승은이 나보다 먼저 이름을 떠올린다. 은주, 성 은주, 고향의 여자 고등학교 시절에 내내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다. 그때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아이였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구나.

“오늘 오다가 만나서 끌고 왔어. 근데 자리가 모자라네.”
“괜찮아, 의자 달라고 하면 돼.”

자리를 옮겨야 할까 고민하려는데, 은주가 손을 들어 점원을 부른다.

“여기 의자 하나 주세요.”
“메뉴도요.”

점원은 멀리 가지도 않고, 마침 비어있는 이인 탁자에서 의자를 빼어 은주에게 건넸다. 은주가 의자를 끌어 당겨 앉고, 주희는 내 옆에 앉았다. 예상보다 한 사람 늘었지만, 이제 겨우 모두 모인 셈이다.

“이게 몇 년 만이지?”

성은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은주를 바라보며 묻는다. 핸드백을 살짝 무릎 위에 올려놓던 은주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이윽고 살짝 웃는다. 가늘지만 윤곽이 뚜렷하고 진한 색의 입술이 예쁘다.

“한 사오 년쯤 된 것 같은데?”

이미 버스 안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주희는 사오 년 만에 만난 은주를 내버려 두고 메뉴를 들고 온 점원과 상담이라도 하듯이 길게 이것저것 주문하고, 지갑 속에서 쿠폰을 꺼내어 내밀고 있다. 아마도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주문을 할 수 있을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온 것 같았다. 점원은 쉴 사이도 없이 쏟아지는 주희의 주문을 영수 용지 위에 빼곡히 적더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하고는 멀리 걸어가 버렸다.

“그 동안 뭐하고 지냈어? 요즘은 뭐하며 지내?”

우리 넷 중에서 은주와 가장 친했던 사람은 승은이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 짓는 얼굴이 더 큰 웃음을 짓는다.

“나라고 뭐 다르겠니, 그냥 직장 다녔어. 지금은 웹 디자인 기획하고 있고.”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서, 은주는 마치 조용하고 고즈넉한 카페에 앉아 있는 마냥, 낮고 은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모습은 비록 얌전하게 가라 앉아 있어도 변함이 없다.

“너도 나이 먹은 거 빼고는 변한 게 없다, 얘.”
“다 그렇지, 뭐.”

변한 게 없다는 말에 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은주가 딱 떠오른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훨씬 예뻐 보이는 아이였다. 무서운 것도 없고, 사양하는 법도 없는 은주는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사는 아이처럼 보였다.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선생님께 대들다가도 불리해지면 처량하고 가엾어 보이게 눈물을 터뜨려 무마하기도 했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학교를 몇 일이고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은주라는 그 아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조금 높은 음성으로 깔깔 웃고, 의자를 기울이고 앉아 신발 바닥과 교실 바닥을 툭툭 치는 모습은 어쩐지 자유로워 보였고, 가끔은 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수업 시간, 몰래 쳐다보면 턱을 괴고 몹시도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도 마음에 들었다. 예쁘니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식은 아니었지만, 은주라는 아이가 하는 행동은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아마도 그 음성과 운율과 테니스 공 같은 동선을 지닌 동선에 반했던 것 같다.

“저기요, 여기 허니 버터 하나 더 주실래요?”
“빵도 하나 더 주세요.”

은주는 무리를 지어 놀지 않았다. 무리에 속해 있던 아이가 혹시 다투거나 하는 이유로 쓸쓸히 떨어져 나와 있으면, 그런 아이와 함께 놀았다. 그러다 그 아이가 무리로 돌아가면, 다시 혼자 놀곤 했지만, 무리는 수도 없이 많고 사정은 쉬지 않고 터지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같은 반 아이라면 한 번쯤은 은주와 단 둘이 놀러 다닌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이, 이거 파인애플 너무 조그맣지 않니?”
“쿠폰으로 시켜서 그런가?”

나는 은주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해 본 기억조차 없다. 내 곁에 누가 있으면, 나는 무리를 짓고 있었고, 아무도 없으면 혼자 있었다. 그래서 딱히 혼자 있더라도 불안하지 않았고, 달리 티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 탓에 은주를 가만히 감상만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난 여기 새우가 제일 좋더라.”

은주는 아무 말없이 앉아서 새로 나오는 음식을 조금 맛보고, 음료만 기울인다. 그 자리에 분명히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꾸미는 자세가 오히려 존재감을 내뿜는다. 은근하다는 표현과 비슷해도 분명히 많은 부분이 다르다.

“뭐 재미나는 일은 없었니, 그 동안에?”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 다들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댈 즈음에서야 은주가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는 아까 버스에서 했다.”

정말로 만족한 표정으로 주희가 딱 잘라 말한다. 지난 삼 년간, 주희는 자신의 패션을 인정해주는 회사를 찾아 전직을 네 번이나 했고, 승은은 적은 월급을 알뜰살뜰하게 사용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모았다. 희민은 즉석 복권으로 오백 만원에 당첨 되었고, 나는 인터넷 응모를 해서 냉장고를 타다 팔았다. 서울로 올라온 지도 벌써 육 년 째인데, 기억에 남아 떠나지 않는 이야기 거리는 고작 그것뿐이다. 차라리 고향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더듬는 편이 훨씬 즐겁고, 할 말도 많았다.

“맞다. 나 전세 끝나고 이사할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거든?”

고민하다가, 아까 집을 나서며 떠올린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나 아직 이사 갈 집 정하지도 않았고, 집도 하나도 안 치웠어.”

우스운 이야기도 아니고, 무거운 이야기도 아니다. 승은이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먼저 웃기지 않느냐고 말해주거나, 아니면 걱정된다고 말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반응을 정하지 못할 것만 같은 얼굴이다.

“마침 잘 됐네. 나랑 살자.”

웃음을 유도하려고 하는데, 불쑥 은주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응?”

당황스러울 만큼 예상 밖의 말에 되묻고 말았다.

“나 원래 우리 회사 사람이랑 둘이서 좀 넓게 살자고 집 얻었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이직해버려서 지금 혼자 살아.”
“잘 됐다.”

반응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승은이 활짝 웃으며 손을 마주 잡는다.

“어때?”

뜬금이 없다. 일단은 이야기를 꺼낸 사실을 후회해본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지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니까 더 좋을지도 몰라.”

주희와 희민은 말이 없고, 승은만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한숨을 나오려는 것을 음료수를 마시며 참았다. 서울에 올라온 지 삼 년째 되던 해에 주희와 희민은 교통이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 같이 돈을 모은 적이 있었다. 친한 친구 사이라서 무슨 문제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지만, 반년을 겨우 채우고 다시 따로 살기로 했다. 마음 약한 승은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같이 살았다면 두 번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기로 맹세 했을지도 모른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궁색한 대답을 하고, 거절할 핑계를 찾아본다. 그냥 싫다고 끝내도 되지만, 그래도 상대 기분을 헤치면서 까지 그런 거절을 하고 싶진 않다. 지루한 고등학교 시절, 어설프나마 우상처럼 바라보던 상대라 더더욱 그렇다.

“왜? 좋잖아. 앞으로 모일 때도 우리 집에 모여서 놀 수도 있고.”
“정말, 그거 참 좋겠다.”

쓸데없이 끼어드는 승은에게 조금 화가 난다. 뭐가 그리 어쩜 좋다는 건지, 서울 친척집에 얹혀 사느라 자취나 동거에 대한 동경을 왜 남의 일에 풀어내는 건지,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동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려운 사이와 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무리 독립에 목이 말라 있다고 해도 저렇게 좋게만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아, 나 잠깐만.”

누구 것인지 모르는 벨이 울리고, 승은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승은이 자리를 비우자, 주희가 탁자에 턱을 괴며 나를 본다.

“괜찮지 않을까?”

이미 싫은 꼴 다 겪은 주희까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턱을 괸 주희의 표정은 어쩐지 나른해 보인다.

“나하고 희민이 때는 안 좋았지만, 나이도 더 먹었고, 요령도 늘었을 거고,
아무튼 그때랑 지금은 많이 틀리니까.”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 예전에 자신이 보인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혼자 사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불화를 요령 있게 극복하는 행위 자체가 부담스럽다.

“게다가 겨우 나흘 남았다며, 나흘 뒤에는 어떻게 하려고?”

잊고 싶은 현실이 귀를 찌른다. 아무런 대책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은주의 제안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받아 들여야 옳은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은주가 음료수를 비운 컵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음성이, 운율이 예전 고등학생 시절에 듣던 것과 똑같다.

“너도 급하고, 나도 급하니까. 일단 한 달만 같이 살아보자.
아니다 싶으면 그 다음에 새 집 구해서 나가면 되잖아.”

거절할 핑계를 찾기 힘든 결론이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싫고, 께름칙하지만 저 조건을 거절하는 건 억지나 다름 없다. 설사 억지가 아니더라도, 그럴 것만 같다.

“그래, 은주 말이 맞아.”

말없이 손가락을 매만지던 희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은주의 제안에 찬성한다.

“어떻게 됐어?”

핸드폰을 들고 저쪽으로 사라졌던 승은이 급하게 돌아와 앉으며 묻는다.

“같이 살기로 했어.”

은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일단 한 달만.”

어쩐지 모를 불안감에 은주가 생략한 조건을 덧붙였다.

“정말 잘됐다. 부럽다야.”

아무것도 모르는 승은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웃는다. 그 환한 웃음에 불편한 감정을 품고 싶지 않아서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은주가 나를 바라본다. 은근하지만, 무언가 다른 표정과 움직임이 없지는 눈웃음 치는 것 같은 눈동자에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우리 자리 옮기자.”

은주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으려니, 노곤하게 턱을 괴고 있던 주희가 고개를 일으켜 세우며 손을 들어 점원을 부른다. 오늘은 주희가 원하는 대로 돈을 쓰는 날이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근처에 자주 가는 예쁜 카페가 있는데, 소파가 푹신푹신하니 기분이 좋고, 사람 머릿수대로 부드러운 감촉의 방석을 내어준다면서, 계산을 마친 주희가 앞장을 서서 일어섰다. 가장 바깥에 앉아 있던 은주도 주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희를 따라 걷는 은주의 걸음걸이는 마치 테니스 공 같다. 그 경쾌하고 가벼운 궤적을 따라서 나도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한달 동안은 그리운 음성과 운율, 그리고 동선과 함께 살 수 있다. 당장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운 좋게 구제 받은 행운보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테니스 공이 즐거운 듯이 계단을 밟고 올라선다. 결코 닮을 수 없는 그 동선을 따라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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