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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9

2012.03.21 06:2303.21

9.







성벽은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았다. 흙을 구워만든 벽돌은 불기둥에 쪼개졌고, 대충 얹어 때운 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얼마 남지 않은 군졸들과 백성들의 이마를 깨었다. 성은 부서지고 무너지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쳤다.





아버지는 허장성세(虛張聲勢)와 공성지계(空城之計)의 묘(妙)로 왜군들을 끌어들여 치고자 했다. 그러나 요한 신부와 그를 모신 왜인들이 사신행(使臣行)을 핑계삼아 성 안을 낱낱이 살피고 돌아간 뒤였다. 우리의 군세가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왜군들은 조를 짜서 성문 앞을 파고 검은 불씨가루(火藥)를 가득 뿌려 파묻었다. 잘라온 대나무로 관을 만들어 불줄을 길게 꼬아 만든 심지를 넣었다. 저들의 진영에서 불을 붙이면 길고 긴 불줄이 불꽃을 옮겨 터뜨릴 터였다. 수없이 모인 불줄통을 대적할 수 없는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매듭싸움을 준비했다. 싸울 수 있는 자와 싸울 수 없는 자로 남은 자를 나누지 아니하였다. 대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누었다. 처자식이 있는 자, 아직 천명(天命)이 많이 남은 자, 삶에 미련이 많아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더딘 자들을 추려 후문으로 모두 내보냈다. 점점 허물어져 가는 해안가의 짠내 나는 성이 가진 마지막 이점이었다. 이 성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이상 왜군들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즉 성이 무너질 때 남은 이들은 목숨을 다해 도망가는 이들의 시간을 보태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밀집방진을 포기하고 백병전(白兵戰)을 준비했다. 남은 이들의 재주는 얕았으나 목숨을 바치는 의기는 뜨겁고 무거웠다.







나와 누이는 성 안 저자를 돌며 짚더미와 기름을 준비하고 사람을 모아 허방다리를 팠다. 어차피 성이 무너질 것이라면 유인의 계는 쓸모가 없었다. 성벽이 무너지면 적들은 민첩하게 그 끝을 타고 덮쳐올 터였다. 성 안을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바꾸어야 했다. 민가마다 기름을 적시고 짚더미를 쌓아 불이 붙기 쉽게 만들었다. 불씨가루는 물에 약하고 불에는 민감했다. 아예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 불줄통을 활활 타는 요물단지로 만들자는 게 아버지의 전략이었다. 정 비장과 황 별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금전을 보고 고안한 것일세. 저 죽을 길로 안내하는 요물단지를 어찌 그리 소중히 품는지.” 싸우기로 작정한 이들은 죽어도 슬퍼할 이가 없었고, 살아 남아 기다릴 이도, 찾아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살던 집에 기름을 뿌렸고, 짚더미를 쌓았다. 길목마다 허방다리를 깊게 파고, 죽창을 꽂아넣은 뒤 오물과 분뇨를 가득 쏟았다. 많은 이들의 삶을 보듬어주던 터에서 이제는 죽음이 고삐풀린 듯 날뛰었다.







매듭싸움의 전날, 아버지는 나와 누이를 불렀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누이의 손을 정겹게 잡았다. 누이의 큰 눈에 금시로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는 거친 손끝으로 누이의 젖은 눈매를 훔쳐주며 물었다.



“묘음아. 정 비장에게로 가려느냐.”



정 비장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누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이의 목덜미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정 비장은 복잡한 심경으로 어깨를 늘어뜨렸고, 아버지는 안쓰러운 듯 그를 건너다 보았다.



“그렇다면 역시 한율이가 묘음이를 살펴야겠구나. 너희들도 오늘 밤으로 나가거라.”



“아버지!”



“글은 그만큼 썼으면 되었다. 끝은 또다른 시작을 품느니라. 끝만 볼 것이 아니라 끝이 부르는 시작도 보아야 할 게다. 그러려면 살아야 한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아무리 부끄럽고 비겁하고 더러워도 살아야 한다. 정 비장에게 묘음이를 맡기면 오죽 좋으랴만 인연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한율이가 혈연으로 누이를 보살피거라.”





정 비장은 품 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가볍고 단단한 칼이다. 네 기운으로도 쓸만할 것이다.” 내 손을 한껏 움켜잡다 놓는 정 비장의 눈이 아주 잠깐 허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곧 결의에 가득 찬 무관의 눈을 빛냈다. 황 별장은 별달리 내색하지 아니하였다. 노쇠한 그에게는 죽음의 시작과 삶의 끝이 다르지 아니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누이의 손끝을 목울대에 깊이 갖다대었다.



“묘음이는 지금처럼만 살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갈 때에 네 뺨을 친 이 아비의 손길을 기억하거라. 네가 가는 길은 오로지 너만 가는 길이라 아무도 끝까지 봐줄 수 없고, 아무도 그 짐을 나눠질 수가 없다. 홀로 가기 어려울 때 아비를 생각하고 네 아우에게 기대거라. 홀로 멀리 가지 말고 함께 맞춰 걷거라. 그러면 나도 바랄 것이 없다.”



누이는 입술 바깥으로 울음을 떨어뜨리며 어깨를 떨었다. 아버지가 누이의 손을 싸쥐며 목에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누이는 완강하게 버텼다. 아버지는 누이의 팔을 부드럽게 접어 가슴께로 물렸다. 그리고 창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뜻밖에도 황 별장이 입을 열었다.



“자식된 도리는 해야겠지. 아주 가지 말고 뒷끝줄(後陣)에 있게. 말을 내줄 터이니 부친을 모시게.”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정 비장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어차피 군마 한두 필 내준다 한들 뒤집힐 전황은 아니다. 그저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뿐이다.”

정 비장과 황 별장은 각자의 무기를 떨쳐 잡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등도 묘하게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구별하기 어려운 바위 같은 등이었다.










*           *          *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무너진 성벽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가장 먼저 함성을 내지른 이는 뜻밖에도 내 앞에 선 만석이었다. 성 안에 두루 소문난 팔매꾼이었다. 실팍한 자갈돌부터 깨진 독조각까지 그의 손에 들었다 뜨면 누구 피를 보아야만 했다. 짱구이마처럼 불툭 튀어나온 성정이 사나워 팔매싸움(投石戰)에서조차 만석이를 반기지 아니하였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어데서든 튀어나온 대못 같던 만석이는 침을 흘리며 사방으로 날뛰었다. 불씨가루 탄내가 매캐하게 묻은 돌덩이가 왜군들의 골통을 깨뜨리고 부쉈다. 뜀질하듯 다리를 내던지며 어깨부터 팔까지 채찍처럼 휘둘러 팔매질하는 만석이는 야차 같았다.





성벽을 날린 불씨가루들은 고스란히 바람에 섞여 불바다를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화공에 달려들던 왜군들이 불조각이 되어 떼굴떼굴 굴렀다. 살려달라 외쳤을 왜말조차 재처럼 타들었다. 아버지가 예견한대로 우리는 바람을 등지고 싸웠다. 주먹만한 불티가 장마비처럼 날렸다. 세 줄로 나란히 뭉쳐 있던 불줄통잡이들은 불씨를 피해 개미처럼 흩어졌다. 황 별장은 멀리서 화살을 내쏘아 그들의 목을 꿰뚫으며 외쳤다.





“달려들어라! 붙어라! 그러면 쏘지 못한다!”





바야흐로 백병전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불줄통잡이들을 향해 군졸과 백성들은 엉겨붙었다. 창칼과 몽치를 휘두르는 이들은 그래도 병기가 손에 익은 군졸들이었다. 왜군들은 달려드는 공격을 불줄통으로 막았다. 부서져 불씨가루가 줄줄 새는 불줄통을 내던지고 허리에서 긴 칼을 잡아빼었다. 아직 진군하지 않은 왜군들이 창과 칼을 앞으로 내세우며 뒤를 이을 준비를 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요란했다.





백성들은 무기 대신 자신의 삶을 꾸려오던 도구들을 꺼내 싸웠다. 땅을 파던 이들은 쇠스랑으로 찌르고 낫으로 베며 도리깨로 후렸다. 고기를 잡던 이들은 질기게 짠 그물을 던졌고 작살을 내질렀다. 나무하던 이들은 도끼로 패었고 보부상 중 뜻을 세워 남은 이들은 쇠지팡이를 휘둘렀다. 밥칼과 달군 인두를 악에 받쳐 휘두르는, 남편 잃고 아들 잃은 어미들도 적지 않았다. 과연 땅에 매여 나라를 지킨 농군(農軍)의 뜻을 알 듯하였다.







주춤하던 긴 칼들이 기세를 수습하여 짐승의 이빨처럼 달려들었다. 화려하고 웅혼한 대륙의 검에 비해 왜인들의 도(刀)는 간결하고 실용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허리에 힘을 넣어 베었고 다리를 내딛어 찔렀다. 상대를 속이거나 끌어들이는 잔수작이 없었다. 오랜 안싸움(內戰)으로 단련된 솜씨였다. 칼질에 실린 힘은 군졸이나 농군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농군과 군졸이 뒤로 물러날 때 정 비장이 백은 안될 기병의 선두에서 왜군의 사이를 갈랐다. 황 별장이 서른이 겨우 넘는 활잡이(弓手)들과 함께 화살을 날려 뒤를 받쳤다. 수는 적었으나 화살은 확실하게 왜적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정 비장은 벼락같이 왜군의 뒤를 돌아 빈 등을 내려베었다.







정 비장이 왜군의 진세를 어지럽히는 동안 농군과 군졸은 제각기 뭉쳤다. 고기 잡는 이가 그물을 던져 왜구를 쓰러뜨리면 쇠스랑이 달려와 찍었다. 밭 가는 이의 등을 다시 다른 칼이 노릴 때에 도리깨가 그 앞을 쳐날렸다. 도끼가 왜적의 목을 쳤고 군졸은 칼과 창을 휘둘러가며 다른 왜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서너 명씩 뭉친 그들은 아버지의 밀집방진의 묘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이미 수는 얼마 남지 않았다. 왜군들은 느긋하게 본진을 차례차례 무너진 성벽 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왜군들의 기병이 긴 창을 앞세우며 달려들 때에 정 비장의 기병들은 이미 기진했다. 말들은 오랜 싸움에 지쳐 주둥이에서 피거품을 게웠다. 말의 체중과 속도를 실은 왜군의 창이 지친 말의 몸뚱이를 꿰고 목줄을 찢었다. 네 다리를 버둥대며 쓰러진 말에서 비척대며 일어난 우리 군사를 왜군의 긴 칼이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한낮의 햇살에 그들은 풀처럼 누웠다. 그제야 찾아온 깊고 슬픈 잠이었다.





“도스케키(突擊)!”





요란한 함성과 함께 왜군들이 일시에 우리를 밀어붙였다. 우리는 파도에 쓸려 찢긴 미역처럼 흩어졌다. 불 뒤로 숨었고 연기 뒤로 숨었고 무너져가는 집 뒤로 숨었다. 바위에 부딪혀 세밀하게 갈라지는 물결처럼 왜군들도 갈라져 뒤를 쫓았다. 허방다리에 가급적 많은 왜군을 몰아넣어야 했다. 싸우고 도망치며 우리는 정해준 선 뒤로 물러났다. 허방다리에 왜군들이 빠져 주춤할 때 싸울 이들은 싸우고 도망칠 이는 도망칠 터였다. 나는 누이를 태운 채 말고삐를 그러쥐었다. 나와 누이는 앞으로 나갈 셈이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거슬러 달아나 그대로 어미뫼로 돌아갈 셈이었다. 그 것이 아버지를 사랑했던 두 어머니의 자식으로 우리가 해야할 도리였다.







왜군 무리가 듬성듬성 땅으로 꺼져 사라지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왜군들은 당황했다. 허방다리가 많으리란 생각에 그들은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어 푸르게 질린 만석이가 그래도 악에 받쳐 팔매질을 쳤다. 머리 위로 치켜든 손을 아래로 흩뿌릴 때 얼마 남지 않은 피가 무지개처럼 호선을 그렸다. 기운은 떨어졌으나 던진 돌은 단단했다. 왜군 하나의 면상이 그대로 떡이 되어 뭉개졌다. 동시에 만석이도 풀썩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만석이가 쓰러지는 그 순간 나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언젠가 전령이 나에게 타기를 권했던 순하게 늙은 군마였다. 주인을 가리지 않는 말은 갈기 사이로 죽음을 예감하였다. 우렁하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나섰다. 허방다리는 거의 다 패여 왜군들을 품고 있었다. 죽창에 꿰인 왜군의 시체가 눈에 선했다. 나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왜군들을 세(勢)로도, 대(隊)로도 보지 아니하고, 그저 개(個)의 군(群)으로 보았다. 아버지는 셈수(算術)를 가르칠 때, 두 점 사이를 잇는 선은 무한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 선을 잘게 쪼개면 또 점들이 우수수 묻어나온다 했다. 나는 그 점과 점 사이의 무한을 내달렸다. 꽉 차 있는 것 같아도 쪼개면 항상 무한의 틈이 있었다. 늙은 말은 허리께로 누이의 뜻을 받았다. 내 눈은 목울대를 통해 누이에게 앞길을 지시하고 있었다. 어미가 달라도 우리는 남매였다.









수십 개의 선이 정 비장의 몸을 갉고 지나갔다. 치명적인 선이 정 비장의 몸을 훑고 지날 때 핏물이 점과 면이 되어 허공을 물들였다. 황 별장의 시체는 이미 쓰러져 수없는 발자국 아래 밟혀 있었다. 누이는 눈을 감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귀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죽음이 소리가 되어 누이의 귀에 꽂히고 있을 터였다. 내가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처럼 누이도 귀를 쫑긋거리며 죽음을 들었다.

아버지는 삶과 죽음이 맹렬히 부딪히는 정점에 있었다.









아버지는 묵류의 마지막 전인(傳人)이고, 계승자였다. 묵류의 가르침을 이은 이들은 학문이 깊고 병법에 통달하여 나아가 싸움보다 머물러 지킴을 우선한다고 했다. 무릎이 시리도록 정좌하여 서책을 읽으면서도, 머리에 든 생각을 풀어 손으로 만들어내기를 즐겨하였다. 남의 목숨은 적이라도 귀히 여겼으나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 목숨도 초개같이 내버렸다. 문(文)을 숭상하되 무(武)로써 그를 엄히 지켰다. 비록 적에게 몰렸으나 아버지에게는 일파의 종사(宗師)다운 위엄이 있었다. 승냥이들이 떼를 지어 늙은 범을 몰아세운들 감히 어쩌지 못할 위엄이었다.







아버지는 창을 느리게 움직였다. 목숨을 끊고자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긴 칼들은 창에 막혀 휘고 부러져 떨어졌다. 칼을 잃은 이들은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멀리서 긴 창으로 대거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버지의 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창으로 주렴을 걷어올리는 거창(擧創)의 자세로 아버지는 찔러오는 창을 위로 쳐올렸다. 아버지는 작은 성처럼 버티어 섰다. 불씨가루로 큰 성을 무너뜨린 왜군들이 아버지 하나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창을 세워 몸을 기대고 숨결을 가다듬던 아버지가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는 별달리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우리의 명운이라 여기신 듯했다. 말배를 조여 한 걸음에 아버지 곁으로 갔다. 나는 단검을 빼어 아버지 곁에 섰다. 누이는 더듬더듬 말고삐를 잡았다.



“아버지, 가시지요.”



“어데로 가란 말이냐.”



말문이 막혔다. 몰라서 물으심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 곳에서 뼈를 묻으실 작정이었다. “죽을 곳을 정함은 장부의 뜻이다.” 말끝에 창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눈에 익은 중평세(中平勢)였다. 창끝에 서린 위엄이 서릿발이었다. 왜군의 긴 칼도 창도 감히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몇 명의 불줄통잡이들이 조심스레 섞여 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버지를 가릴듯이 섰다. 아버지는 창자루로 나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눈에도 모를 누이가 아니었다. 누이는 허리에 지른 짧은 활과 화살을 꺼냈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누이는 정확히 겨누었다. 아버지가 보인 신묘한 경지에 왜군들은 두려워하였다. 누이가 화살을 한 대 내쏘면 열 명은 나자빠질 듯이 떨고 있었다.







그 때 눈에 익은 색목인 하나가 주위를 밀어젖히고 나타났다. 왜군들이 두렵게 모시는(敬畏) 그는 다름아닌 요한 신부였다. 그는 길다란 망토 자락을 풀어젖혔고, 맨몸에 칼을 찬 채 앞으로 나섰다. 늠름하게 타고난 근골이 한낮의 햇볕에 눈부셨다. 허리에 찬 칼을 쑤욱 잡아빼자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가 눈에 설었다. “허리칼(腰刀)이구나. 길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여 속일 셈인가보다.” 아버지는 창을 짧게 잡았다. 신부는 흠칫 놀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왈랑거렸다. 주먹을 다친 모양인지 두터운 천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빙긋이 웃었다.



“스스로 신의 종복을 자처하였으니 저 칼로 피야 보겠느냐. 칼로 창을 막고 주먹으로 싸우려 들 게다.”



“주먹이 온전치 않아 보입니다.”



“천을 감아 보호하기 위함이다. 주먹으로 아무데나 후려패면 제 힘에 뼈가 상한다. 아마 주먹쌈(拳鬪)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불줄통을 든 왜인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앞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밀어 알머리를 드러내었으나 그 역시 소년 티가 흘렀다. 발음이 불분명하였으나 말은 우리 말이었다.



“싸워보자, 쇼군! 천주께서 만드신 나 역시 사내다!”





신부는 이를 드러내며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중평세로 거리를 가늠하였다. 거구의 신부는 바위처럼 느리게 발을 끌며 간격을 좁혔다. 몸과 주먹은 앞에 두었는데 정작 칼은 등 뒤로 숨겼다. 아버지는 미간을 좁혔다. 숨과 숨이 서로 달리 흐트러졌다. 요한의 막음과 아버지의 찌름은 결국 한 호흡 안에 이루어질 터였다.









아버지가 길게 밀어 찌를 때 요한은 허리를 크게 휘돌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허리칼로 창날을 비껴받으며 그대로 창자루까지 타고 올랐다. 아버지는 지레의 이치로 버텼지만 요한이 왁살스럽게 칼날을 밀어붙이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창자루를 놓는 아버지를 쫓아 신부가 주먹을 날렸다. 곧게 지름과 휘어 올림이 붓글처럼 허공을 갈랐다. 관자놀이와 턱을 세게 얻어맞은 아버지의 몸이 버들처럼 휘청거렸다.







연이은 주먹의 공세를 피해 아버지는 낮게 기었다. 낮게 기었으나 달리듯이 빨랐다. 두 손으로 깍지를 끼어 신부의 오금을 조여잡고 체중을 실어 앞으로 떠밀었다. 다리 하나를 잡힌 채로 장정 하나 무게를 실었으니 넘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눈이 푸른 거인의 배꼽에 무릎을 꽂아넣은 아버지는 그대로 몸을 휘돌려 그의 멱을 잡았다. 멱을 잡은 손을 엇걸어 뒤로 당기자 숨통이 조이며 신부의 퉁방울만한 눈이 터질듯 올라왔다. 아버지는 실신한 그를 떠메어 왜군들에게로 던졌다. 떨어뜨린 창을 들고 숨을 고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칼을 든 자, 창을 든 자, 무(武)를 버리지 않으려는 자, 이 모습을 기억하라! 주먹과 주먹만으로 겨루어 승부를 보는 것은 법도를 빙자한 놀음이지 사내의 싸움이 아니다! 병기와 사람 사이 거리가 멀어져 무게를 느끼지 못할 때에 무(武)는 천박해진다! 법도를 정해 승부하려 할 때 무(武)는 비겁해진다! 그대들도 사내라면 이 말을 잊지 말아라! 변해가는 세상 속에 지켜야할 것이 아직 남았음을 기억하라!”







왜적들은 아주 잠시 멈추었다. 싸움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군졸과 백성을 이끌던 정 비장과 황 별장은 절명하였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죽었고, 싸우지 못하는 자들은 도망가거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누이와 아버지만이 남았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젊은 왜군이 아버지의 말을 제 말로 옮기는 듯해보였다. 탄성을 지르는 왜군도 있었고 고개를 떨구며 침을 뱉는 왜군도 있었다.







아버지는 창을 거꾸로 꽂았다.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직분이 높아보이는 왜장 서넛이 긴 칼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으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서로 겨루는게 의미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왜장들은 아버지의 뜻을 존중했다. 도로 칼을 꽂고 뒤로 물러나며 턱짓으로 불줄통잡이들을 불렀다. 나와 누이는 아버지 앞에 섰다. 아버지는 우리 사이를 비집고 다시 앞으로 섰다. 우리는 다시 아버지 앞에 섰다. 불줄통 심지에 불이 붙고 따다당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할 때 아버지는 누이의 어깨를 뒤로 제쳤고 내 오금을 걷어차 쓰러뜨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순결한 무인(武人)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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