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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가 내려서 번들거리는 거리. 격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신문지와 쓰레기를 새처럼 날렸다가 가라앉히기를 반복하는 대기. 시 외곽 공장 부지 안의 썰렁한 건물들. 건물과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건너편을 유심히 살펴보던 바바리코트 차림의 남자.
순형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자신이 아는 모든 욕설을 퍼부었다.
준식은 설득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경호원들과 조폭들이 서로 떨어진 채 건물 정문에 멀쩡히 서 있는 게 증거였다.
욕은 갈수록 격해졌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쪽의 땅에서 천천히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철제 쓰레기통에, 죽은 개와 고양이의 시체에, 널려 있는 분리수거 비닐봉지 등등. 쓰나미처럼 재빨리 번진 이 곰팡이는 회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자태를 뽐내며 동물처럼 꿈틀거렸다. 쓰레기와 거기에서 나오는 냄새로 충만한 골목이, 순식간에 더 지독한 악취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그의 욕설이 멈추자 온통 포자를 날리며 세계를 정복할 것처럼 기세등등했던 곰팡이는 서서히 성장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탄생처럼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수분을 잃어 죽어 버린 청색 덩어리들은 천천히 바스라져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준식에게 기회를 주는 셈 치고, 잠시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순형은 곧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드루이드 들은 최고로 유능한 사제들이자 마법사들이었다. 창자를 늘어뜨리며 비명을 질러 줄 희생물만 있다면 말이다.
그들의 창자점을 막는 것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놈들은 계속해서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를 더하는 식으로 방어를 어렵게 만들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 정도 버티면 더 이상 자신이 있는 데를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놈들이 창자의 주름을 읽어 목표물을 찾는 고대의 비술로 문제를 해결한 다음의 수순은 현대의 기술. 고고학 재단으로 위장해 허가받은 헬기가 훈련받은 메이지 슬레이어를 쏟아낼 게 뻔했다.
소실 특이점을 갖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강공밖에 없었다.
여섯 시 56분. 정문을 경비하던 조폭 여덟 명과 경호원 열 명의 눈이 일시에 길 건너 건물 그림자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내에게 꽂혔다.
그는 거구였다. 키가 195센티미터 정도? 파나마 모자에 눈은 가려졌으되 가뭄 뒤 논처럼 쩍쩍 근육결로 갈라진 볼 하며, 탁구채만 한 강인한 턱, 가로로 1미터는 될 것 같은 어깨, 풍성한 트렌치코트를 꽉 메운 팔과 가슴. 이 모든 것이 폭력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사내는 기계가 그린 화살표처럼 곧고, 거리낌 없이 건물로 다가왔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열여덟 명이 전부 홀스터 단추를 풀고 10밀리 자동소총 전우치를 꺼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겨눈 전우치는 왼손 검지가 방아쇠에 가하는 0.7그램의 가벼운 운동만으로 인간을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섬주섬 꺼낸 것은 담배와 라이터, 여고생들이 자주 먹는 과자 <포키> 사이즈의 상자가 전부였다.
경호원과 폭력배 들의 총구가 약간 흔들렸다.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얼굴도 몇몇 보였다.
사내는 길에 멈춰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빛이 얼굴에 잠시 머물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제 넥타이, 코트 깃 이외에도 길을 따라 부는 골바람에 나부끼는 사물에 담배 연기가 합류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남자는 이번에는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이들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조금이라도 과자상자로 위장한 폭탄처럼 보일 경우
방아쇠를 당긴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순형은 상자 안에서 집히는 대로 종이 재질의 카드를 꺼냈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Sceriffo 카드 한 장, Vice 카드 두 장, Willy the kid 카드 한 장이 줄줄이 나왔다. 카드에는 각각 "Elimina tutti I Fuorilegge e il Rinnegato!(모든 불량배 들과 독불장군을 죽여라!)“, ”Proteggi lo Sceriffo!(보안관을 보호하라!)“, ”Puo giocare un numero qualsiasi di carte BANG!(그는 뱅 카드를 몇 장이든 쓸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스치듯 카드를 확인한 다음 손을 폈다. 카드들은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공중에 비산했다. 펄럭거리던 카드들은 하늘에 높이 뜨더니 일제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준식이 순형에게 끌려간 오즈에서 봤던 밝기의 빛이었다. 빛이 따뜻하고 정감 어리게 느껴지든 말든 경호원, 폭력배 들은 일종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몇 백 배 키운 듯한 굉음이 거리를 울렸다. 문제는 방아쇠를 당긴 건 이편인데 쓰러진 것도 이편이라는 점이었다. 맨 왼쪽에 있던 폭력배 한 명과, 맨 오른쪽에 있던 경호원 한 명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덕분에 순형을 조준했던 총알은 그의 근처도 오지 않았다.
남자들이 허물어졌다. 엉겨서 계단으로 구르기도 하고, 그대로 주저앉기도 하고, 뒤로 크게 넘어진 사람도 있었다.
순식간에 형성된 피 안개가 현관에 감돌다 바람을 타고 천천히 남쪽으로 흐르며 가라앉았다. 근거리에서 29발의 교차사격으로 형성된 킬존 안에서도, 널린 내장과 오물, 뼈 조각 안에서도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 울면서 신음하는 생존자에게 조폭이 다가가 두 발 더 먹였다. 신음이 멈췄다.
순형은 구두에 피와 오물이 안 묻게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갔다. 조폭과 경호원은 그를 감싸고 돌면서 조심스레 철로 된 정문을 열었다. 발포음 때문에 다음 관문부터 난리법석이었다. 한쪽 귀에 꽂은 무전기에서 무슨 일인지 연거푸 질문했으나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순형의 왼쪽 가슴엔 꼭지가 일곱 개이고, 가운데 Sheriff(보안관)라고 쓰인 것이, 두 사람에겐 꼭지가 다섯 개이며 Deputy sheriff(보안관 대리)라고 쓰인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는 찬연한 빛을 내뿜고 있어서 현관 주위가 환해졌다.

“가지.”
“옛.”

순형은 말은 했지만 현관 뒤에서 숨어 움직이지 않았고, 동공이 풀리고 희미해진 두 사람의 보안관 대리만이 다음 관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조폭이 앞을 지나치는 틈을 타 Dinamite란 카드를 등에 붙인 순형은 대소동을 꿈꾸며 낄낄거렸다.
제2관문에 있던 인원 열 명은 온몸에 피가 묻은 채 멍한 얼굴로 뛰어오는 두 명을 겁에 질려 후퇴하는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들은 오판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동료라고 오인받은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이에게 일단 총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미간이 뚫린 이가 넘어지면서 문이 좀 더 크게 열렸다. 얼결에 시체를 받으려는 이, 두 사람을 넘어서 쏘려는 이, 문을 닫으려는 이들이 엉켜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보안관 대리들은 깨끗한 솜씨로 이 모든 혼란을 정리했다. 여섯 명을 사살하는  동안 보안관 대리들은 각각 세 발씩 맞았다. 그러나 방탄복 차림인 목표를 혼란 중 조준하는 게 제대로 맞힐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유도 전공자인 경호원 쪽에서 총을 내던지고 경호원이었던 보안관 대리에게 달라붙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조폭이 함께 붙어서 꼴사나운 춤을 추고 있던 두 사람을 쏴 버렸다. 이러느라 총알이 떨어졌다. 생존자 두 명이 두 발을 더 쏘는 동안 조폭은 발을 굴러 땅에 돌아다니던 총을 튕겨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칫솔에 치약 묻히는 것보다 더 손쉽게 왼쪽 눈만 관통시켜 마무리 지었다.
제3관문은 제2관문의 간격이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아 이 소동을 모두 지켜보았다. 철문이 빼꼼 열린 후 총탄이 발사되었다. 정신을 빼앗긴 보안관 대리마저 주춤할 정도로 굉장한 탄막이었다. 제4관문의 인원 10명까지 모두 부른 결과였다.
그는 제1관문을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제2관문이 정리된 것을 확인한 뒤 슬그머니 나타난 순형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카드 한 장을 더 뽑았다. “Barile(나무통)"이란 카드였다. 카드는 빛으로 분해되면서 보안관 대리의 주위에 큰 목재 양조통으로 재형성되었다. 양조통은 투명 불투명을 오갔고, 그 뒤에 가려진 보안관 대리는 앞의 전황을 지켜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순형이 외쳤다. 그야말로 용감한 보안관의 목소리였다.

“먼저 가! 엄호하지!”
“옛!”

물론 순형은 뛰지 않았다.
마법에 홀린 조폭이 뛰자 역시 마법인 양조통도 함께 따라 움직였다. 총알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양조통에 맞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나 하도 쏟아지는 총알이 많은 탓에 몇 발이 보안관 대리의 어깨와 팔뚝에 꽂혔다.

“문 닫아! 문 닫아!”

접근에 놀란 사람들이 절규하며 철문을 닫으려던 순간, 보안관 대리가 양조통을 버리고 총을 앞세워 반신을 문에 쑤셔 넣었다. 성치 않은 손으로 몇 번 방아쇠를 당긴 조폭은 당연한 결과로 납탄을 신나게 선사받았다. 총 스물한 발. 조폭의 생명이 몸을 떠났다. 그가 축 늘어졌다. 문에 묻은 피와 함께 그의 육신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방어 측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던 때 조폭의 등에 붙은 Dinamite 카드가 작동했다. 카드에서 그들이 살면서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밝은 빛보다 더 밝은 빛이 튀어나와 모두를 삼켰다.
폭발은 제3관문을 완전히 찢어놓았다. 찢어진 쇳조각들은 폭발력을 추진력 삼아 스피드를 얻었고, 콘크리트 복도를 총열 삼아 좌우로 퍼졌다. 마법이 만든 살인폭풍은 이 길에 놓인 모든 것들을 전부 쇳조각들을 맞아 파열시켰다. 그러나 폭풍의 밀도가 모두 균일하지 않고 달랐기 때문에 대여섯 명은 걸레처럼 몸이 찢긴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인간의 비명은 매우 높고, 말이 되지 않는 횡설수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운좋게 무의식으로 도피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어머니를 찾으며 유년기의 꿈속에 젖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냉철한 각성 상태 속에서 인간성이 천천히 부정되는 순간을 맛봐야만 한다.
·보안관 대리가 둘 다 사망했으니 이제 기대할 만한 것은 독불장군뿐이었다. 카드의 특징상 보안관의 적이 모두 죽은 다음에는 보안관인 순형을 노리겠지만 그때까지 이 인원을 상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당연히 써야 하는 패이다. 바람대로 그가 뽑은 새 카드는 “Rimani l'ultimo personaggio in gioco(혼자 살아남아라!)”라 쓰인 Rinnegato(독불장군) 카드였다.
순형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생존자의 비명이 가득한 복도 쪽으로 카드를 던졌다.
카드가 빛으로 분해된 지 30초 뒤. 제4관문에서 폭음과 비명을 더했다. 모든 게 잠잠해지고 문이 열렸다. 저 멀리서 몽롱한 목소리로 보안관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형은 바닥에 박힌 파편에 구두가 상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피나 오물이야 닦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찢기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바닥을 꼼꼼히 살피며 제4관문 쪽으로 가는 동안 그는 바닥에 누워 있는 부상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아랫턱이 날아가 붉은색 리본처럼 늘어진 혀가 온통 헤쳐진 배 사이로 흐른 창자와 섞인, 치명상 중의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움직임을 따라 물기 어린 눈이 천천히 순형을 좇았다. 순형은 연전에 먹었던 회를 떠올렸다. 주방장이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살을 발라냈음에도 껌뻑거리던 눈을 지닌 도미 말이다. 순형은 그때 장난기가 발동해서 눈에 재빨리 젓가락을 박았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거렸다.  
지금처럼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순형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며 그를 지나쳤다.


총 소리가 요란한 현장까지 달리는 동안 준식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는지 모른다.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뒷목에 빨대를 꽂고, 기운을 쪽쪽 빠는 듯한 기분이었다. 심장은 쿵쾅거렸고, 식은땀이 흐르고, 눈은 침침한데다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증상은 갈수록 심각해져 이제는 그 모든 증상에 더해져 관절 뼈마디가 쑤시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중간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좀 씻어서 기분전환을 하려고 근처에 있던 정수기로 다가가 꼭지를 붙잡았다. 시원한 물이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진 왼손 사이로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잠깐. 주름?
준식은 평생 한번도 자신의 손을 안 살펴본 사람 같은 눈초리로 왼손을 훑었다.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오십대 후반의 주름이요, 골격이었다. 이상스레 눈이 침침해 시력을 그러모으며, 몇 번이나 다시 훑어봤어도 결과는 같았다.
마침 정수기 근처 벽면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 준식은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일이 생겼다. 확인해야 했다. 그런 마음이면서도 그는 왠지 거울을 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조금씩 더 요란한 경고가 마음속에서 울리면서 확대재생산되었다.
마지막 걸음 뒤, 거울 속에서 준식을 맞이한 상은 눈빛이 퀭한 중노인이었다.    준식은 충격 속에 거울을 주시했다. 슬슬 검버섯이 되려는 점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고, 주름은 눈꼬리와 광대, 입 주변에 특히 많았다. 피부는 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성냥불을 가져다 대면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적시며 중얼거렸다.

“대체......”

목소리도 낮고 힘이 없어서, 오히려 충격이 더해졌다. 눈이 침침한 것도 이 알 수 없는 노화의 한 현상임이 분명했다. 대체 이 괴현상의 원인은 뭘까?
준식은 원래 그렇지는 않았지만 훈련을 거쳐 냉정한 사고가 가능해진 경우였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받은 사고 과정 훈련은 우연이란 현상은 절대 없으며, 신속한 대처를 위해서는 설사 그것이 나중에 잘못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가장 확률이 높은 결론을 도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근래에 기억에 남는 가장 독특한 만남은 여자와 친구 순형이었다. 여자가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우주적인 시간과 이치 안에서는 주사위가 수조억 번 구르는 확률로, 폭풍우 속에 놔둔 수동식 타자기 부품이 공중에 떠올라 서로 합체한 뒤 완제품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게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실력을 가진 여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당할 확률은 인간 사회와 심리를 비춰 볼 때 낮았다. 그리고 비교적 별다른 위해를 끼치지 않은 자신에게 하필 그런 힘을 행사할 가능성은 더 낮았다.
다음은 순형. 직업이 마법사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그 직업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의 갠달프 같은 마법사가 이런 세상에 있는 게 정상적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순형을 의심하면서부터 눈동자 주위가 붉어지면서 미간을 중심으로 이마에 서서히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동시에 긴 못을 망치로 때려 박으면서 생각을 막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러나 한 번 흐르기 시작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의심이 엔진이 되어 긴 몸체를 지닌 열차가 출발했다.

  “으아아아......”

반지의 제왕에서 보면 착한 마법사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나쁜 마법사도 나온다.
그렇다면 창녀 일을 하는 여자가 마법을 쓰는 게 일반적일까, 아니면 마법사라고 자신을 밝힌 친구가 마법을 쓰는 게 일반적일까?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누구에게 따지는 게 ‘그나마 가장 이치에 맞는 일’일까?
당연히 순형이다. 그에게 물어봐야 한다.
현재 몸 상태로 봐서는 두 번을 따질 수는 없었다. 순형으로 확정하자마자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코피가 쏟아지고, 두 눈이 머리 밖으로 쏟아지려고 들었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짐승처럼 신음하던 그는 근처에 달린 응급처치 상자를 열었다. 비틀거리면서 열었기 때문에 함께 들어 있던 가위니, 항생제니, 비상 배터리 박스니가 굴러 떨어졌다.
그는 대충 잡히는 대로 코에 가져댔다. 대고 나니 압박 붕대였다. 어느 정도 피가 멈추자 다음에는 붕대를 집어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오른손이 꽉 쥔 전우치를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급격히 노화된 손으로는 태프론과 고분자 플라스틱으로 된 2.2킬로그램짜리 권총도 제대로 쥐기 힘들었다. 그러나 난처한 것은, 떨어뜨리면 모든 게 헛것이라는 생각으로 붕대를 감았지만 감는 솜씨나 마무리로 묶은 솜씨 모두 못 미덥다는 점이었다.

  “몰라, 몰라.”

인간은 행동하고, 신이 판단한다. 플라톤의 말이었던가. 아니면 셰익스피어?
준식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중앙 복도로 가까워질수록 끔찍한 비명은 갈수록 커졌다. 그건 인간의 소리보다는 차라리 수백,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학대당하면서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준식이 제7관문으로 힘겹게 걸어나가던 순간 등 뒤에서 굳건한 힘을 지닌 남자에게 어깨를 잡혔다.

  “거기가 아냐.”

뒤돌아 봤더니 태혁이었다. 그를 경호하는 조폭 두 명은 세라믹 판이 든 케블러 방탄조끼 차림에 6.1밀리 홍길동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안한지 사방을 살피며 눈을 희번덕거린다. 준식은 양복만 입은 태혁이 더 크고, 더 위험하고, 더 안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태혁은 준식의 정면 얼굴을 바라보고 난 뒤 두꺼비 같은 입술을 실룩이며, 놀라워했다. 숱이 적어지고, 흰색이 거의 대부분인 머리와 오십대로 돌변한 얼굴은 누구에게도 같은 반응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아니, 이 새끼 왜 이래? 뭘 잘못 먹었어?”
  “그게......”

준식은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민은 일거에 해결되었다.
태혁은 다시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알게 뭐냐. 형님이 불청객을 중앙 홀에서 죽인다고 결정했다. 따라와.”

부하들은 불길하다며 수군거렸지만 태혁은 상관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총 쏠 손만 달려 있으면 그게 누구든지, 어떤 상태든지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넷이 된 일행이 제8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다. 7관문 쪽에서 얼핏 후퇴하지 못한 인원들이 문을 두들기며 애원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남겨 놓은 인원이 있는지, 왜 안 들여 놓는지 물으려다 준식은 입을 다물었다.
9관문 뒤에 (이것도 네 명이 들어오자마자 닫혔다.) 있는 홀은 흡사 전쟁터의 참호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무지한 사람들이 체계 없이 그때그때 느낌만으로 예술을 판단하면 취향이 들쭉날쭉한데 두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듣기로는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 룸바를 즐긴다며 간부들이 앉아 있던 휴게실을 몽땅 터놓고 바닥에 그림 새겨진 대리석을 깐 게 홀의 시초였다. 이 홀에는 댄스 스테이지 주변에 생뚱맞게 바로크 시대의 긴의자와 바우하우스 풍의 쇼파, 악몽 같은 팝아트 중에서도 최악의 산물임이 분명한 핑크색 젖소무늬 카우치 등 비싸지만 어울리지 않는 잡동사니 의자들을 삥 둘러서 놓았다.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도 조금 전까지만이고 오늘 의자들은 바리케이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용도를 완전히 변경당했다.
의자들 위에 쇠사슬과 철조망을 두르는 현장을 지나친 준식은 태혁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경호원들 사이로 들어갔다. 책상과 쇼파, 금고를 절묘하게 배치하던 동료들의 눈이 커지면서 일손이 일시에 멈췄다.
얼어붙은 모두를 대신해 팀장인 이규하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너...... 왜......”

이번에도 준식은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었다. 특별히 준식이 얼뜬 게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말의 카탈로그를 고르고 있던 중 마지막 열 번째 방에서 두목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자연스레 그에게서 관심이 두목 쪽으로 옮겨갔다. 고민을 해소해 준 두목에게 미약한 감사의 감정이 솟구친 것도 잠시.
두목은 왼손에 홍길동, 오른손에 산책용 개목걸이를 든 채였다. 개목걸이 끝에는 간신히 국부만 가리는 티 팬티 차림의 그녀가 서 있었다. 헐벗은 탓에 두목이 가한 모든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끔 지하철에서 보는 아동학대 방지 캠페인 사진전과 부부 폭력 대책 캠페인 출품 사진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생채기였다. 그녀는 살색바탕에 여기저기 붉기도 하고 파랗기도 한 무늬를 가진, 헐리우드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나올 법한 외계인을 연상시켰다. 외계인을 목격하면 그럴까.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괴한 몰골의 그녀에게 쏠렸다. 불행 중 다행인지 SM용 안대로 눈을 가린 탓에 그녀는 촉수 같은, 세상의 채찍 같은 그 눈초리들을 보지 못했다.  
상처가 과중한 탓에 계속해서 뒤뚱거리던 그녀는 개목걸이에 질질 끌려나오다시피 하다가 이내 넘어졌다. 머리부터 엎어져 꽤 큰 소리가 났다. 그녀는 몇 번 버둥거리다가 아예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드러누운 게 더 편한 듯했다.
그러든 말든 두목은 개의치 않으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 사람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여자에게 쏠렸던 시선이 두목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효과를 예견하고 여자를 개목걸이에 끌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파문이 가까운 데에서 먼 곳으로 움직이듯 정적이 이내 모두를 사로잡았다.
침묵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던 두목이 드디어 연설조로 말을 시작했다. 어휘도 부족하고, 앞뒤도 안 맞는 횡설수설이었다. 욕이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희귀한 경우의 웅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호원들은 온갖 아수라장을 헤치고 살아남은 남자의 박력에, 조폭들은 평소에 모든 사물에 무관심한 것 같았던 우두머리의 진솔한 토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준식은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자신의 어디에 담겨 있었는지 모를 만큼 엄청난 양과 기세로 증오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배부터 가슴을 태우면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이 증오는 작은 단락 하나까지 전부 두목을 향한 것이었다.
총을, 아니 총도 필요 없었다. 총은 너무 깨끗하고, 객관적인 도구였다. 지금 기분 같아선 맨손으로 놈의 척추를 뽑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손잡이처럼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다음 온힘을 다해, 뽑힐 때까지 울부짖으며 놈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주먹뿐이랴. 팔꿈치, 무릎, 발, 이빨...... 그렇다. 바로 이거다. 인체에 내장된 것 중 가장 직관적인 무기. 쇼핑은 끝났다. 준식은 놈의 목에 이빨을 박고 싶었다. 맹견처럼 이빨을 박은 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뒤로 젖히면 목 살점이 떨어져나가면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질 터. 파산 직전에 유정을 발견한 사업가, 한여름에 분수대를 발견한 목마른 아이, 그 성취감과 희열에 몸부림치며 계속해서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들고.
그러다 준식은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두목이 미친 듯이 목소리을 높이느라 사방으로 튄 침 중 일부가 그에게 묻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두목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느 순간 충혈된 눈으로 광포하게 떠들던 두목과 준식의 눈이 마주쳤다. 두목은 잠시 잠깐 그와 눈짓으로, 시선이 지나가는 동안에만 소통했지만 소통의 메시지는 간명하고 가차 없었다.
너는 내 아래 있는 놈이지? 그치? 잘 듣기나 해.
준식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뼈 깊숙이 자각했다. 상상 속에서는 정당한 복수를 행하는 자, 거침없는 폭력의 화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작 상상 속으로 도피해야 하는 경호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늙기까지.
누군가 가슴을 억지로 열어서 심장을 도려내면 지금 이런 기분이 들까. 사랑하는 사람이 열 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권력에 의해, 돈에 의해 고작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니.......
두목의 입술이 열릴 때마다 뻐드렁니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왠지 모르게 그게 가장 미웠다. 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한 두목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증오스러웠다. 자격 미달이라는 문구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준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총을 들었다. 꼭 죽이고 싶었다. 죽여야 했다.
그러나 흥분한 준식이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의 주위엔 잘 훈련된 26명의 경호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훈련받은 대로 의뢰인이 연설하는 동안 주위를 살피며, 이상 징후는 없나 살피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준식이 눈에 띠었다. 아무리 동료라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늙어 버렸고, 오른손에 총을 쥔 채 붕대를 감았고, 몸을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명백히 위험분자요, 틀림없는 이상 징후였다. 그가 총을 반쯤 쳐들었을 무렵, 주위에서 억센 손과 몸통 들이 물결쳤다.

  “빼앗아!”
  “다리 걸어!”
  “의뢰인!”
  “움직여! 움직여!‘
  “잡았다!”

물결은 거대한 힘이 되어 그를 쓰러뜨렸다. 준식은 턱을 얻어맞고 오른손을 꺾인 채 앞으로 넘어졌다. 체념 때문인지, 노쇠 때문인지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대로 제압당했다.
철저한 몸수색으로 두 자루의 총이 압수되고, 소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사람들의 장막이 열리고 두목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준식은 몸을 전부 눌리고 있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기에 두목의 고급 악어가죽 구두만 봐야 하는 처지였다.
두목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큼큼거리는 소리가 쓸쓸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안 봐도 뻔했다. 저 인간은 누런 이를 활짝 드러낸 채 비웃고 있을 것이었다. 승리한 수컷이니까 말이다.
그가 한 말은 준식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말이었다.

“갖고 싶냐?”

지치고, 포기한 탓에 몽롱했던 준식의 눈이 커졌다.
셀 수 없는 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자의 육감으로 두목은 일순간에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 전부터 그와 무언의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지명해서 여자를 인도하고, 그를 지명해서 여자를 데려나가게 하고.

“쟈 신음 죽이더라. 질질 싸, 아주. 네가 눈독 들이는 게 이해는 돼야.”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준식이 말이 되지 않는 외마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보답으로 그는 악어가죽 구두와 세게 부딪힐 수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세상에는 초능력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다.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기도하면 신이 들어주신다고도 들은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준식은 안에서 튀어나오든, 하늘에서 떨어지든 해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슬프고 화나는 상황을 해결해 주십사 하고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능력도, 우주의 이치도, 신도 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발길질이 이어졌다. 코가 부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이 문을 활짝 열고 나타났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절망과 서러움에 이제 거의 노인을 바라보는 나이의 준식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목이 동작을 멈추더니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즐거운 것을 보고 웃는 소리였다.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그게 가능한지 14년 동안 모신 태혁도 오늘 처음 알았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특히 집단과 웃음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집단에 속하려면, 그 상황이 웃기지 않아도 웃어야 할 때가 반드시 생긴다.
태혁이 상당히 어색한 소리로 효시를 날렸다. 조폭들이 따라 웃으면서, 하나둘 경호원들도 그 내키지 않는 폭소에 동참했다. 몇몇은 고개를 돌렸지만 경호하면서 그새 친해진 조폭들과 동류 의식을 누리기 위해 꾸며낸 웃음을 뿌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두목이 허리를 접으며 극단적인 웃음에 괴로워하는 동안 준식은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음을 실감했다. 고독이 몸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웃음은 가느다란 얼음조각이 되어 살 이곳저곳에 박혔다. 이윽고 놈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가운데로 집결한다. 지나가는 길마다 비애와 냉기, 자기혐오를 부산물로 남기면서.
집결지는 심장. 모든 고독의 마지막에는 심장이 얼어붙는다. 다시는 상처받기 싫어서, 차라리 심장이 멈추는 게 낫다고 여긴 끝에.  
조폭들이야 논외로 둬야겠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말이다. 직장 동료들도 그렇다고 치자. 가장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는 자신을 늙게 만든 혐의가 있었다. (생각하자마자 새로운 코피가 터졌다.) 다른 친구는 자신을 마약상용자로 보고 총까지 겨눴다.
게다가 몸은 또 어떤가.
올라탄 놈이 웃느라 구속이 소홀해진 틈을 타, 준식은 풀려난 손을 눈 근처에 가져다대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앙상하게 보이는 손가락은 마디마디마다 젊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자글자글한 주름이 잔뜩이었다. 시간이 생기도 함께 앗아갔는지 겨울에 헐벗은 나뭇가지 같은 손은 미세한 수전증 증상마저 보였다.
두목의 웃음이 잦아들더니 천에 금속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품속에서 총을 꺼낸 것이다. 그리고 장전음. 끝이구나. 준식이 생각했다. 사람들이 피가 튈 것을 우려해 멀어졌다. 자유로워졌으나 준식은 엎드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그는 지금 저 너머에서 엎어진 채로 쉬고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직업과 그 더러운 방 말고는 그녀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이름을 말해 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혹시 내가 그녀를 방에 데려다 줬던 일을 기억한다면…… 나를…… 나를…….’

그러나 마지막에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는 서글픈 인생이여.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준식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8.
정작 방아쇠의 부름을 받은 총알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준식의 머리를 꿰뚫기 직전, 9관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양쪽 철문을 튕기며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문 한 짝은 근처 대리석을 쪼개면서 바로 꽂혔고, 다른 한 짝은 날아오기는 연같이 가볍게 펄럭이며 날아와 아홉 명을 묵직하게 깔아뭉갰다.  
입구 쪽에서 연기와 불꽃이 솟구치는 가운데 너나할 것 없이 총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쪽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물론 두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준식을 겨누던 전우치가 문 주변에 발사되었다.
한편 이미 자신을 죽었다고 여겨 외부의 자극에 대해 완벽히 자신을 차단한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자극을 갈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눈과 입이 막히면 처음엔 귀가 예민해진다. 그러나 귀로 들려오는 게 연거푸 욕설과 음탕한 비난뿐이라면? 처음엔 저항하다가도 형편없이 낮아진 자신의 평가에 결국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세뇌라면?
청각도 포기할 수밖에.
여자는 모든 감각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검은 공단 천에 감겨져 있었다. 공단 천은 부드러웠고, 아무 말이 없었고, 외부의 모든 위험에서부터 자신을 숨겨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이름과 그 더러운 방 말고는 친구도, 가족도, 애인도 가지지 못한 이 쓸쓸한 세상에서 그녀에게 단 하나 남겨진 천국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감각하게 만들어진 생물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키틴질의 각질이 아니라 피부가 있는 이유이다. 심해어가 아닌 이상 침잠도 한계가 있었다. 짧지만 격렬한 행복감을 끝으로, 그녀의 본능에 새겨진 감각은 커다란 부레가 되어 그녀를 자꾸 위로, 위로 부상시켰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을 환영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차가운 눈송이가 전신에 골고루 떨어진다고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송이가 뜨겁다는 생각을 했고, 그 다음에는 눈송이가 아니라 금속질의 껍질임을 깨달았다.
분노와 광포한 웃음으로 버무린 사격음이 뒤를 이었다. 깡통을 송곳 달린 망치로 치는 소리, 안에 금속 조각이 가득 든 통조림을 일시에 터뜨릴 때 나는 소리같은 것들이 요란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닥에 퍼진 채 뜨겁게 달궈진 채 쏟아지는 탄피들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석 바닥을 온통 뒤흔들며 웅혼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사격 반향음도 그녀를 두들기는 요소에서 빼놓을 수 없으리라.  
이 정도의 사격이라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고 그녀는 담담하게 결론지었다. 잠시나마 침입자가 있다고 해서 기대를 건 적이 있었다. 아무리 무식해도 한 명이 할 수 있는 힘이 한정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구출이나 구세주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무력한 자신을 대신해 그 사람이 한 명이나마 더 난도질하고, 그 시체 위에서 침을 뱉으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
그러나 이래서는 불가능하다. 세상은 나쁜 의도로 무리 지은 채 돈을 많이 가진 단체가 이기는 법이었다.
그녀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시점에서 공교롭게도 놈들의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탄피 대신 뜨겁고, 미끌거리고, 쇠냄새가 나는 액체들이 그녀의 몸을 수놓았다.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합창단처럼 연이어서, 서로 경쟁하듯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분명 사지가 정상으로 붙은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각도로 그녀의 몸 위에서 퍼덕거리는 손가락들이라든지, 날카로운 조각으로 흩날리며 자상을 남기는 딱딱한 조각이라든지, 장어처럼 제멋대로 꾸물거리며 알 수 없는 종말을 향해 기어다니는 길고 긴 그 무언가......
눈을 감으면 촉각은 더욱 증폭된다. 인간의 조각들, 역설적으로 이를 확인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하는 부품을 두들겨 맞는 느낌 역시 여자에겐 더욱 크고 꼼꼼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끔찍하게 여기는 대신, 입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웃고 있었다.
이 상흔을 영원히 새기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영혼에든 육체에든 새겨져서 떨어지지 않았음 싶었다. 자력으로 거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승리는 승리였다.


준식에게는 이 살육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무반응의 늪에 빠져 있던 그는 어느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놈들이 단체로 살육당하기 직전이었다.
온몸이 급속도로 늙어가면서 어디라고 가릴 것 없이 검버섯이 피어올랐다. 꼼꼼한 악의 어린 손길이 어루만지며 물기를 짜낸 것처럼 피부는 이제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장년이던 몸이 순식간에 노년으로 곤두박질쳤다.
노안이 제대로 초점을 못 맞추는 가운데 비처럼 내리는 탄피, 앞에 널브러진 여자, 깔끔한 양복바지로 죄에 물든 육체를 가린 남자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거쳐 얼핏 순형을 본 것 같았다.
두목이 나온 펜트하우스, 불침의 요새 같던 맨 마지막 방에서 홀연히 나타난 덩치 큰 형상은 품속에서 반짝거리는 금속을 꺼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못 알아보는  노안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 핀잔 주면 할 말은 없지만 준식은 처음에는 낡은 지포라이터였던 금속이, 은색 과도로 변하고, 이윽고 강렬한 빛의 총채로 변화하는 과정을 똑똑히 보았다.
순형을 닮은, 총채 끝의 손잡이를 잡은 남자(사자? 상어? 공룡? 어쨌든 분명 인간은 아니었다.)가 웃었다.
하나하나가 20미터가 넘어 보이는 빛 터럭은 펄럭이며, 무도회장의 천장에 두둥실 떠올랐다. 제멋에 겨워 사격연습이라도 하듯 반대쪽에 총알을 소모하던 남자들은 몸에 닿기 직전에서야 빛 터럭들의 군무를 발견했다. 그래봐야 물론 늦었다. 총채가 남자들의 육체를 강타했다. 잘 달군 칼을 버터에 찔러 넣은 것처럼 터럭은 아무런 저항이 없는 것처럼 뼈와 살을 가르며 시원시원하게 펄럭였다. 먼지 대신 뼛조각과 핏방울과 살 조각이 흩날렸다.  
펄럭이는 총채는 엎드린 두 사람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패배자인 게, 개만도 못한 처지가 되는 게 가끔은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곧 잘려서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마치 의지를 가지고 도망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두 다리들만 준식과 그녀 주위에 즐비했다.
준식은 거기까지 보고 깜빡 잠이 들었다. 묻고 싶은 질문이 무척 많았지만 그는 일단 먼저 노인의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하기 일쑤라는 것부터 배워야만 했다.


아까는 재우던 몸이 이번엔 변덕스럽게 잠을 깨웠다. 몸이 으슬으슬한데다 사지의 관절은 물론, 목관절까지 전부 쑤시고 시렸다. 피를 뒤집어쓴 채, 찬 대리석 바닥에서 잔 대가였다.  
준식은 끙끙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그의 몸에 누가 올려놓은 만 원짜리 열 너댓 장이 흘러내렸다. 돈은 잠시 저항하다가 피와 체액과 똥물에 물들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왠지 매우 불쾌했다.
아주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빼고는 무도회장은 괴괴했다.
준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수로 설치 전위 예술품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사방엔 마네킹처럼 잘린 팔다리가 널려 있었다. 대규모 식사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파리들이 절단면에 새까맣게 달려들고 있었다. 맨 밑바닥에는 딸기 시럽처럼 끈적한 피가 웅덩이를 이룬 채 이 기괴한 풍경을 마무리했다.
이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뿐인 같았다. 그는 혹시 순형이 죽어 넘어져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물론 없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이곳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과 싸웠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모든 게 그의 짐작이었다.
그는 대신 두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의 시체였다. 누가 보면 잠시 대자로 뻗어 잠이라도 청하는 것 같다는 연상을 할 만했다. 생전에 그가 항상 풍기던 치열함, 공격성, 거들먹거림, 적대, 증오의 감정은 싹 표백된 채 중립의 무기물이 되어.
이상한 점은 그의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얼핏 보기에도 심장을 뜯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끔찍한 광경임에도 준식은 무엇에 홀린 듯 뚫린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 메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바르며,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능이 그를 어디론가 이끌려 하고 있었다. 힘의 크기는 다르지만 순형과 같은 종족의 본능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수단과 목적을 불문하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마법 물건을 약탈하고픈 욕망이 그를 감쌌다.
더러운 주박은 여자가 깨주었다. 준식은 문득 그녀를 떠올리고 다급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난장판을 뒤지는 작업에 착수했다. 두목의 텅 빈 구멍에 대한 아쉬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두어 번 미끄러지고 난 다음, 준식은 비교적 쉽사리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좀 전의 두목 말고는 사지가 멀쩡히 붙은 몸통이 하나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에 쌓인 팔다리, 내장을 급한 마음으로 치우는 손길을 느낀 그녀가 말했다.

“누, 누구세요? 경찰이세요?”

목소리의 성분 함량비는 희망과 공포를 딱 절반씩 섞은 것이었다. 준식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상처투성이, 멍투성이, 피투성이인 그녀를 예쁘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그러나 준식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에게 여자는 세상의 정수, 아름다움의 현현이었다. 모든 선한 것의 시발점이요, 즐거움의 육화요, 필멸자의 운명으로 곧 사그라질 진실의 애잔함…….
공포가 좀 더 짙어진 목소리로 그녀가 두세 번 뇌까렸을 때에서야 준식은 마법에서 깨어나 안대를, 수갑을 풀어줄 수 있었다.
풀어주는 동안 준식은 그녀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거의 완전히 단념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 침침한 눈, 제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관절,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이 육체로는 잘해 봐야 20대 중반일 그녀의 옆에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는 아무런 희망이 담기지 않은 손길로 손목을, 눈 부근을, 발목을 주무르며 혈행을 도왔다.
여자는 서서히 돌아오는 시력으로 자신의 조력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였다. 비가 몇 년째 내리지 않은 논바닥을 보는 것처럼 주름으로 쩍쩍 갈라진 얼굴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푹 숙이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데 무얼 부끄러워하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시 저 나이에도 이 형편없는 멍투성이 나신을 보고 흥분이라도 했을까?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이 고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을 믿지 않았다.
여자는 몇 번 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님은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요리사세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동화의 서두처럼 말을 꺼낸 그는 침착한 마음으로 모든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리가 안 서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준식의 우려와는 달리 여자는 그의 말을 완벽히 믿었다. 살아오면서 잦은 거짓말, 허언, 배신, 폭력을 겪은 그녀는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렇게 길러진 능력에 비춰볼 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난장판을 설명하는 데 그만 한 해명도 달리 없었다.
문제는 맨 마지막이었다. 그가 이 모든 사단을 부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루고 또 미루다가 그는 결국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 굴복해서 말을 꺼내야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니, 사랑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아니에요. 나는 할아버지니까요. 늙었어요. 그래요.”

보통의 늙은이가 그러듯 별 이야기도 아닌데 준식은 감정을 못 이겨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순형을, 자신의 빌어먹을 운명을 저주하면서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옆에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그러나 세상은 통념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자 준식은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약한 그녀의 말 한마디가 지진이 되어 다가왔다.

  “저는 그래도 좋은걸요.”
  
그녀는 가물거리는 의식의 와중에도 준식의 보살핌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친절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여자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두목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난 뒤, 택시에서 벤 무릎은 근육이 적당히 박힌 건강한 남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점도 마음에 들었으나 쉽게 수긍하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민감하게 내재된 양면의 가치를 읽었다.
그녀에게 남자는 힘이자 권력이었다. 힘을 가진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특히 그녀처럼 직업적으로 육체의 허영과 매혹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그만큼 힘을 갖춘 남자는 권력으로 작용하면서, 평소에는 억눌린 욕구와 불만을 해소하는 경우도 흔했다.
멀쩡하게 생긴 책상물림 남자가 술만 들어가면 욕설을 퍼붓는다던지…… 아니, 당장 두목을 보라. 흉하게 생긴 탓에 자신의 짝을 찾지 못해 쌓인 욕망을 그녀의 몸에 풀지 않았는가!
그녀는 이제 권력으로 바뀔 만한 남자라면 지긋지긋했다. 충분히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준식은 합격점이었다. 원래 자상한데다 늙은 탓에 에너지가 없어, 사랑이 어느 순간 격렬한 증오나 경멸로 역전될 여지도 적을 것이었다. 여염집 여자에게야 파트너 남성에게 이런 변화가 드물겠지만 창녀인 그녀에게는 정말 필수적인 고려 요소였다. 보통 질이 안 좋은 남자들이 말로 여자를 납득시키지 못해, 돈으로 몸을 사는 법이니까.
이처럼 그녀에게는 사랑보다는 안정적인 관계, 온화함이 더 절실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인 세상에만 살았던 준식이 이를 쉽게 알아차리거나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누군가가 대놓고 늙은 탓에 이 여자가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면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준식은 멍청이처럼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네?”
  “준식 씨가 좋다구요.”
  “에?”
  “참 나.”

준식은 그녀의 뜻하지 않은 웃음에 기습을 당했다. 그는 그녀의 말뜻이 뭔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노화로 머리 회전이 느려진 탓도 있지만 통념을 따르지 않는 패턴도 한몫했다.
그녀는 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를 안고 과감하게 키스했다. 혀와 혀가 닿고, 혀가 서로 감기면서 서로의 침을 교환하는 동안 그들은 마음도 교환할 수 있었다.
준식은 사막처럼 메마른 입술에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평생 본인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꿈꾸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코에 알싸하게 돌던 피 비린내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들어찼다. 그녀의 몸 내음일까? 그는 마음속으로 행복하다고, 백치처럼 그저 이 한마디를 되풀이했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아무 방해받지 않고 그저 단둘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같은 시간 피에 젖은 트렌치코트를 돌돌 말아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순형은  바지 주머니에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며 든 물건을 어루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구한 이 물건은 길에서 함부로 꺼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벌인 소동으로 경찰에다, 거의 마지막에 그를 놓쳐 버린 메이지 슬레이어들도 도처에 깔려 있을 터였다. 그러나 욕망이 이성을 이기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순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두목의 심장을 꺼냈다. 일반 심장보다 더 크고, 묵직하고, 붉은 대신 검고, 핏줄 대신 칠정오욕의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검은 심장이었다.
검은 심장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끈끈하기 그지없는 이 검은 기운은 천천히 그를 휘감았다.
범하지 말아야 할 관계의 여자에게 오랄을 시키는 데 성공한 색마처럼, 쾌락살인에 재차 성공한 연쇄살인마처럼 그가 히죽거렸다. 비열하면서도 자신감에 찬, 복합적인 웃음이었다.  
잠시 동안 고위, 고층의 쾌락에서 허우적거리던 순형은 극도의 절제력을 발휘해서 심장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깜빡깜빡거리던 샹들리에가 드디어 죽어 버렸다. 두 사람은 순수한 어둠 속에 파묻혔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도처에 즐비한 피도, 파리도, 시체도 그들을 멈출 순 없었다. 그들은 아주 어렸을 때의 이야기와 추억부터 상대방을 위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영혼의 애무가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122명의 경찰특공대가 환루 전술 랜턴과 적외선 도트 사이트를 앞세우고 어둠의 일부를 밝히고 나서도, 두 사람이 플라스틱 줄로 묶여서 각기 다른 호송차에 실릴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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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1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1 권담 2011.11.20 0
230 중편 헝겊인형-4(완결) 김영욱 2005.11.17 0
229 중편 [죽음 저편에는] 1. 非 (01)3 비형 스라블 2003.10.28 0
228 중편 水領神─-…「제 1-1장」1 정수지 2003.10.24 0
227 중편 헝겊인형-2 김영욱 2005.11.15 0
226 중편 [죽음 저편에는] 1. 非 (02) 비형 스라블 2003.10.29 0
225 중편 라즈블리토(上) 아비 2009.09.01 0
224 중편 당신이 사는 섬-2부 김영욱 2006.02.16 0
223 중편 미래로 가는 사람들 : 起 [본문삭제]2 ida 2004.11.05 0
중편 어느 경호원의 일상생활 (4) 튠업 2008.12.18 0
221 중편 헝겊인형-1 김영욱 2005.11.15 0
220 중편 헝겊인형-3 김영욱 2005.11.15 0
219 중편 높은 성에서(4) - 요약 moodern 2005.09.02 0
218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9 이니 군 2012.03.21 0
217 중편 도플갱어 [상] lucika 2005.09.12 0
216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0,1 이니 군 2012.03.21 0
215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214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5 이니 군 2012.03.21 0
213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12 라퓨탄 2008.03.18 0
212 중편 별을 담은 상자 -제1부 긴 침묵 달의묵념 2006.01.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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