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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변신로봇 V

2013.01.12 11:5801.12

  "이 녀석들이, 엄마가 그런 걸로 치고받고 싸우지 말라고 그랬지! 둘 다 무릎 꿇고 손들어!"
  동생들이 또 혼난다. 엄마가 두 동생을 번갈아 바라보며 타일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조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쩌니."
  그러자 둘째가 '그럼 셋째가 바보짓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요?'라고 묻자 엄마의 꿀밤이 날아갔다.
  “무조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쩌니. 더 좋은 해결책이 있으면 그것부터 먼저 해보고 힘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는 거야.”


1. V는 가족을 지킨다

  납치당한 천재 공학자 K박사는 내 아버지였다. 그는 엄청난 기술을 발명했다. 납치당하기 직전, 아버지는 그 기술의 단서를 어린 두 남동생들에게 남겼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버지를 납치한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와 단서를 내놓으라고 우리를 위협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변신로봇 V, 가족을 지키기 위해 K박사가 나를 만들었다.”
  그것은 강력한 변신로봇 V였다. 그 로봇은 깨어나자마자 강철 같은 주먹을 날려 악의 무리들을 무찔렀다. 동생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것은 V를 깨울 수 있는 각성의 열쇠.
  “누나! 쟤 말도 한다?”
  동생들이 콩콩 뛰며 V를 가리켰다. V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쟤네들 누나입니다. 동생들은 마냥 신이 난 것 같았다. 만화영화에서만 보던 영웅 로봇을 만든 천재가 바로 자신들의 아버지이며, 그 로봇의 주인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발명품이 ‘변신로봇 V’라는 것을 알게 된 악당의 무리들은 더욱 끈질기게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 나는 동생들에게 V를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타일렀다. 너희가 하는 건 힘자랑이 아니야. 경찰이랑 군인 아저씨들이 우리를 지켜주실 테니까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는거야, 응?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았고, 내가 이 동생들을 죽 돌보고 얼러오고 있었기에 아이들은 보통 내 말을 잘 따랐다. 그러나 V가 나타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두 동생들은 내 만류를 뿌리치고 전장으로 자신만만하게 달려갔다. 손에 쥐어진 조그만 열쇠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V가 있으면 저런 악당은 간단히 무찌를 수 있어. 우리들이 누나를 지켜줄게!”
  동생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악당들은 그렇게 매번 동생들에게 당했다. ‘다음에 두고 보-자!’고 비굴하게 악을 쓰며 그들은 사라졌다. 처음에는 애들이 싸우는 게 못마땅해서 잔소리를 했지만, 매번 이기는 모습을 보자 괜한 걱정을 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그들이 정말로 V의 라이벌을 내세우고 나타났다. V만큼이나 강력한 변신로봇 X였다.
  “크하하하하, V에게 매번 당하면서 그 패턴과 기술을 연구했지!”
  아버지를 납치하면서도 아무것도 못 알아내서 결국 우리 가족에 집적대기만 하던 ‘저질’ 악당들이 X를 통해 ‘진짜’ 악당이 되었다. 벤치마킹할 수 있는 무언가가 눈앞에 있으면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기란 의외로 쉬운 일이다.
  “용서하지 않겠어!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있어?”
  동생들은 X의 등장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도 싸웠다. 어린이 특유의 티없는 ‘용기와 희망’을 통해 V는 더더욱 강대해졌고 위협적인 적이었던 X를 번번이 격파했다. 그 때부터 나는 무언가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2. V는 도시를 지킨다

  어쨌거나 동생들은 싸움을 계속했고 나는 아이들이 다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V의 전투 작전은 매번 내가 세우며 그들을 도왔다. 악당들을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납치당했던 아버지의 행방도 알아냈고, 내 지휘 아래 동생들과 V는 아버지를 훌륭하게 구출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구한 변신로봇 V를 자부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K박사님, 잘 돌아오셨다.”
  V도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다.
  “순순히 K박사를 내놔! 그렇지 않으면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주지!”
  악당들이 다시 나타났다. 처음으로 그들은 ‘도시’의 존폐를 운운했다. 아버지는 두 동생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얘들아. ‘도시’를 구하자.”
  동생들은 결연하게 “V, 변신!”이라고 외치며 V를 타고 도시로 뛰쳐나갔다.
  “그 동안 너도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도 동생들을 잘 도와주렴.”
  앞으로도 ‘잘 도와주렴’이라는 말에 아버지에게 불쑥 물었다.
  “아버지는 왜 동생들을 V의 파일럿으로 선택하신 거죠? 아이들이 정말 잘 싸울 거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어머니라면 분명 동생들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는다고 싫어하셨을 거예요. 게다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서….”
  “진희야, 분명 어머니는 하늘에서 자랑스러워하실 게다. 실제로 동생들은 잘 싸우고 있잖니. 원래 어린 소년들이 보통 더 용감하고 정의롭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이건 만화영화가 아니에요. 현실이에요. 저 거대한 로봇 V도 동생들과 영원히 함께할 수도 없고, 함께 해서도 안 돼요. 저건 엄청난 무기에요. 병기라고요.”
  “무슨 소리니. 동생들은 V와의 우정으로 이렇게 도시를 지키고 있는데. 괜한 걱정 그만 하고, 넌 앞으로도 동생들을 잘 보조하면 되는 거야. 자, 여기 와서 기계 튜닝이나 좀 도와주렴.”
  그렇게 V는 우리 가족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X에 맞서 우리 도시를 지키게 되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X는 V가 만들어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짜 도시를 지킬 것이었다면 V는 애당초 없어야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V가 매번 승리를 거두자, 악당들은 더 강한 로봇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애를 썼다. 악당들이 아버지의 옛 절친한 동료였던 L박사를 영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L, 자네가 어째서…!”
  L박사가 손댄 X는 엄청나게 강했다.
  “아빠, X가 너무 강해졌어요. V가 이번에 크게 다칠 뻔했어요.”
  아버지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동생들에게 침착한 표정을 지어보이셨다.
  “V를 업그레이드 해야겠다.”
  V는 도시를 지킨다. 언젠가부터, V는 옛날부터 그렇게 도시를 수호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도시를 지킬 것만 같이 느껴졌다. 사실 V는 우리가 만들어냈고, V가 X를 만들어냈고, V는 X로부터 우리를 지킬 뿐인데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적으로 삼고 그것을 방어하는 것에 불과한데 죄의식을 가지기는커녕 무엇이 그렇게 정의롭다고 굳게 믿는 것일까.


3. V는 세상을 지킨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V가 세상을 지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V는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거치게 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집 한 채 정도는 순식간에 파괴해버릴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 X도 지지 않고 강해졌다. L박사의 훌륭한 지휘로 X는 거의 도시를 파괴할 뻔했고, 이제는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담보로 내걸었다. 아버지는 분노를 참으며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을 지켜주던 그 로봇의 이름이 변신로봇 V라는 것도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우리들은 그들의 테러리즘에 맞서 세상을 지킬 것입니다.”
  동생들도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V밖에 없었던 지하 기지에 V^2, V^3, V^4라는 V의 동료들이 새로 생겼고, 파일럿이 될 소년들도 늘어났다. 소녀들은 파일럿이 될 수 없었고, 대개는 나처럼 오퍼레이팅이나 전투 작전 지시 및 상황 전달을 맡았다.
  한편, 기지는 국가의 보조를 받아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X^n 군단의 위협을 두려워하며 V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기에, 기지의 확대를 환영하고 열망했다.
  오늘도 V들의 업그레이드에 몰두하고 계신 아버지, K박사를 찾아가 일을 돕는다. 스패너. 그가 무심히 중얼거리자 나는 스패너를 집어 들어 그에게 건넨다. 기계 안에 머리를 처박으신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 처음부터 V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뭐긴 뭐야, 세상이 악의 무리들에게 위협당하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제가 무슨 이유로 이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처음부터 세상을 지키고 싶었다면 V 따위를 만들지 않으면 간단했잖아요, 라고 무지르려다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뒤늦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갑자기 어머니가 어느 날 거칠게 싸운 동생들을 타일렀던 말이 떠올랐다.
  “무조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쩌니. 더 좋은 해결책이 있으면 그것부터 먼저 해보고 힘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는 거야.”
  동생들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또다시 V와 X의 싸움이 벌어지는 지구. 한숨이 나왔다. 이 기지 제복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우주를 걸고 악당들과 결전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엄마, 어쩌죠. 아빠도 아직 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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