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탄생] 6시간 21분 32초

2012.03.04 09:4503.04

201X년 5월 X일 서울, 한국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하얗기만 하고 아무 멋대가리 없는 사무실. 거기에 걸린 유일한 시계. 이 시계도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에 테두리가 검은, 정말 그 어디에나 있을 듯 한 시계이다. 이 회사에 출근해서 저 시계를 바라보는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일 것이다. 여섯 시간 후에는 지구가 종말을 고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여섯 시간 이십일 분 삼십 이초 후다. 과학자들이 뉴스에서 떠들던 얘기에 의하면 엄청난 크기의 행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지구의 과학기술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영화에서는 우주선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새로운 행성으로 데려가던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역시 영화 따위는 시시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시계는 계속해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마치 이 세상을 얼른 끝내버리려는 듯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세계가 멸망하는 날에 회사 사무실에 출근하는 얼간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나 같은 놈 빼고. 나는 도대체 어째서 오늘 같은 날 사무실에 앉아서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런 밝고 따뜻한 5월의 어느 날 지구가 사라진다니. 열어 놓은 사무실 창문으로는 달콤한 5월의 바람이 스며 들어오고 있다. 졸음이 솔솔 올 듯한 바람이다. 문득 대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대학생 때는 5월이면 자주 수업을 빼 먹고 학교 잔디밭의 벤치에서 낮잠을 자던 기억이 난다. 4년 내내 그렇게 나태하게 지냈는데도 용케 졸업을 하고 취업까지 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여간 감미로운 바람이다. 내친 김에 두 다리를 쭉 뻗어 책상 위에 올려 본다. 평소의 사무실이라면 당장 ‘너 미쳤냐?’하는 팀장님의 호통과 함께 볼펜이라도 날아들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입사 2년 차 밖에 안 된 내가 사무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낮잠을 즐긴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한다.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내가 이 사무실에 나온 이유를 생각해 본다. 나는 내 마음에 무척 둔감한 편이다. 별 생각 없이 행동을 취하거나 말을 해 놓고 나중에 가서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 큰 어른이 정말 한심한 일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이 날,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이 날 굳이 회사 사무실에 나와 죽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시계만이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란 무엇일까? 물리학자 들은 차원이 어쩌고저쩌고 중력이 어쩌고저쩌고 말들이 많지만 그런 어려운 말들은 내 머리에 와 닿지를 않는다. 내가 보기에 시간은 결국 인위적인 허구일 뿐이다. 태양은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진다. 태양이나 달이 인류가 ‘아 태양이 한번 떴다 졌으니 하루가 지났구나.’ 하고 하루라는 시간을 발명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뜨고 질리는 없다. 그냥 뜨고 지는 태양과 달을 보고 사람들이 ‘하루가 지났구나’ 하는 식으로 인위적으로 시간을 발명했을 뿐이다. 태양이나 달이 시간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물리적인 운동만을 계속 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 따라서 지구가 끝장나고 인류가 사라지면 시간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저 원자와 행성들의 운동만이 남을 뿐이다. 시간을 인식할 인류가 사라지니 시간도 사라지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 시계는 별 의미가 없다. 인류의 하찮은 발명품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것이 시계인 것 같다. 사람들을 속박하기만 하는 시계. 그 시계가 지구의 종말을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아니다. 저 시계가 지구의 종말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태엽과 나사의 움직임에 속박당하여 힘없이 바늘을 움직이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보면 시계 또한 사람들과 같은 처지다. 무언가에 속박당해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똑같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날에 회사에 나와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난다. 석 달쯤 전인가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하고 이혼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법원에서 수속도 끝냈다고 하셨다. 그때 법원이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이 이야기 자체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석 달 후면 지구가 멸망하는 마당에 법원까지 가셔서 이혼을 하시다니. 내가 물었다.
“석 달 후면 지구가 멸망 하는데, 뭣하러 시간 아깝게 법원까지 가서 이혼을 하고 그러세요? 그냥 따로 살면 그만이지. 차라리 그 시간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아니다 얘야. 부부의 인연이란 질기고도 질긴 것이라서. 나 다시 태어나도 니네 아버지 만날 까봐 그런다. 죽기 전에 확실히 끝내놔야 편히 눈 감을 것 같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런 게 있다.”
나는 종교 따위는 믿지 않는 주의라 어머니의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이 그렇다는 데 어쩌겠는가.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 까지 같이 사신 것이 신기할 정도로. 우리 집에서는 매일 같이 물건이 부서지고 아버지가 고함지르는 소리, 어머니 우시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나는 무서워서 귀를 틀어막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눈물만 흘렸다. 그 때 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으면 하고 후회스럽게 생각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때 두 분을 뜯어 말렸으면 좋았을걸. 제발 그만 좀 싸우고 사이좋게 살자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실제로 나의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어 소리쳐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긴 나란 놈이 그렇다. 늘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다가 모든 걸 놓치고 만다. 지금까지 연애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이유도 그거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도 우물쭈물 하다가 제대로 말 한 번 걸어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연애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답답하다. 마지막 순간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매일 싸움만 하다가 결국 헤어지신 부모님은 보고 싶지 않다. 다시 한번, 영화는 다 거짓말이다. 영화에서는 사이가 안 좋은 가족들도 전 지구적 위기를 당해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던데. 우리 부모님은 이 판국에도 화해와 이해는커녕 냉큼 이혼을 해 버렸다. 웬만하면 서로 용서하고 사시지. 부모님을 만나러 갈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중교통은 이미 예전에 운행을 멈추어 버렸다. 자가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단이 없어진 셈이다. 하긴 자가용을 어떻게든 하나 훔쳐서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구가 끝장나는 판에 굳이 이혼을 하신 부모님을 내가 굳이 만나러 갈 마음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평생소원이었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 버렸고 어머니는 매일 절에만 다니고 있으니 내려가 봐야 만나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계를 보니 시계는 착실히 움직이고 있다. 이제 5시간 40분 15초 후면 지구가 없어진다. 만약 이 지구가 사라지면 나중에 새로운 지구가 나타날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그 지구는 또 몇 십 억년 이라는 시간을 거쳐 인류라는 종을 세상에 나타나게 할까. 그 인류는 현재의 인류와 똑같을까. 아니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커다란 머리에 작달만한 키를 가진 모습일까. 그들은 우리가 쓰던 언어를 쓸까 아니면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할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시계는 째깍째깍 하는 소리를 내며 꾸준히 가고 있다. 도대체 저 바늘은 무엇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일까? 계속 가봐야 자신도 소멸하고 말텐데. 의자를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도서관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이 작은 시립 도서관은 완전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앞으로 여섯 시간 이십일 분 삼십초 후에는 지구가 사라지는 데 누가 책을 읽으러 올까.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사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내가 자란 고아원을 떠올려 보았지만 절대로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친구들 얼굴도 하나씩 떠올려 보았지만 이윽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저마다 자기 가족들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나는 늘 이런 식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다 자멸하는 스타일. 그게 나다. 문득 입고 있는 긴 치마 끝을 내려다본다. 무언가 얼룩이 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빨래를 하려고 했었지. 나도 참 정신이 없네. 하긴 곧 지구가 멸망하는 데 빨래가 다 뭐람. 혼자 머리를 쿡 쥐어박고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취직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산 붉은 손목시계. 그 손목시계의 바늘들은 째깍째깍 처절하게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시계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올리고는 책이 꽂혀 있는 서가로 간다. 소설들이 주욱 꽂혀 있는 서가에 서자 오래된 나무 향기와 책 내음이 함께 섞여 풍겨온다. 그러고 보면 책도 나무로 만들어 진 것이니 결국 나무와 책은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둘의 내음은 잘 어울리는 가 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다 태블릿PC다 하는 것들이 유행하여 종이책이 점차 사라진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이 좋다. 종이책 특유의 촉감과 내음이 너무나도 좋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의 느낌도 너무 좋다. 아무리 전자책이 유행한다고 해도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자책이 유행한다는 기사를 TV나 신문에서 보면 ‘하느님. 종이책을 구해 주세요!’ 하고 속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제 종이책이던 전자책이던 모두 사라질 텐데. 나의 기도는 역시 쓸모가 없었나 보다. 문득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이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고 계실까. 아니면 일찌감치 이 세상과의 인연을 놓아 버리셨을까. 어쨌든 저 세상에 가면 그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걸까. 만나면 알아 볼 수 있을까. 알아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나를 버렸냐고? 그 동안 어째서 찾지 않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부모님에 대해 알아 볼 걸 그랬나 보다. 일부러 알아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나를 버린 부모 따위 잊고 살자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치마를 꼭 쥔 손등에 방울이 하나 톡 하고 떨어진다. 이런 바보. 역시 난 바보다. 그러니 세계가 끝나는 마당에 혼자서 멍하니 도서관에나 앉아있지. 5월의 햇살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포근하다. 곧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서가 너머의 책상들을 바라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낡디 낡은 나무 책상들이었는데 지금은 번쩍하고 빛이 날 만큼 깔끔한 책상으로 바뀌었다. 나는 옛날의 그 나무 내음 나는 책상들이 좋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새 것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산 문제로 책상만 새 것으로 바꾸고 서가는 그대로 놔 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엊그제의 일이 떠오른다. 그 때도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원들도 물론 한명도 출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날도 도서관에 나와 있었다. 평소처럼 책들을 정리하고 대출되었다가 반납되지 않은 책들을 체크했다. 개중에는 벌써 몇 달이나 반납일이 지난 책들도 많았다. 이해는 갔다. 지구가 멸망하는 데 빌려간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까지 찾아올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물론 반납을 해 준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담담하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구의 멸망과 자신들의 소멸이라는 운명을 이미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깊이 고객 숙여 인사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 그가 있었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지도 한참 지난 그 날. 그는 대출해 갔던 책 두 권을 들고 나타났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놀라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 인 듯 했다. 아마 도서관에 남아 근무하는 직원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책들을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두 권 다 추리 소설 이었다. 한 권은 영미권의 유명 작가 소설 이었고 한 권은 일본 작가의 소설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데 추리 소설이나 읽고 있다니. 정말 암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들을 받아 놓고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나하고 비슷하게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170이 조금 넘을 듯한 키에 수수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이런 날에 일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가 멋쩍게 한 마디 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 밖에 없거든요.”
가능한 사무적인 어투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아...”
그는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챈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그도 나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도서관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역시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나 보네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책들 반납 일자가 한참 지났네요.”
나는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아...죄송합니다. 정말...”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대출을 할 사람이 없으므로 사실 아무에게도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책 좀 읽고 가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나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도서관이다. 책을 읽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 그런 곳에 와서 책을 읽다 가도 되겠느냐고 질문을 하다니. 하지만 곧 깨달았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그런 질문을 할 수 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용시간은 밤 10시까지 예요.”
너무나 비일상적인 상황에서의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였다. 그는 ‘그렇군요’ 라고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가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구 멸망 소식이 알려 지기 전의 도서관이라면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눈으로 쫒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일상적인 느낌을 맛보고 싶었다. 내 일에 집중하는 그런 일상 적인 느낌을. 하지만 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런 날에 혼자 도서관에 온 걸까?’

나는 일어서서 머그컵을 손에 들고 탕비실으로 갔다. 믹스 커피가 몇 개 남아 있는 것이 보여 그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머그컵에 부었다. 붓고 나서야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동안 머그컵을 바라보다가 머그컵을 탕비실에 놓아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엊그제 갔던 도서관이 생각났다. 거기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 그 시립도서관에 자주 가기 때문에 자주 보긴 하지만 볼 때 마다 어쩐지 냉담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런 냉담함이 도서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내가 반납할 책들을 내려놓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런 날에도 도서관에 나와 있다는 건 아마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리 도서관 일을 좋아한다고 해도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혼자 나와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말을 걸어 보았다.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건넨 것은 아마 평생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날에 일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제가 있을 곳은 여기 밖에 없거든요.”
돌아온 건 극히 사무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 한마디로 알 것 같았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사연인지는 알지 못한다. 나처럼 부모님하고
별로 정이 없는 경우일 수 도 있겠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연유로 인해 의지할 일가친척들이 하나도 없는 지도 모른다. 돌아가셨다거나...나는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역시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모양이네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책들 반납 일자가 한참 지났네요.”
  돌아온 건 역시 극히 사무적인 대답. 거기다 반납 일자가 지났다는 지적까지. 지구 멸망도 며칠 남지 않은 이런 날 그렇게까지 사무적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한 마디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죄송합니다. 정말...”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어느 새 사과를 하고 있는 나였다.
  “책 좀 읽고 가도 될까요?”
사실 책을 읽고 갈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런 말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 조금이라도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이용시간은 밤 10시까지 예요.”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의 사무적인 모습을 절대 무너트리지 않는 그녀. 지구 멸망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구 멸망이라는 상황을 애써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그녀는 내가 반납한 책을 책상에 올려놓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도 굳이 책들을 정리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서가로 향하면서 몇 번 뒤돌아보았으나 그녀는 계속 내가 반납한 책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세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가 반납한 책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추리 소설이라...그런 건 중학생 때 졸업했다. 요즘은 순수문학만 읽는다. 그러는 편이 나 자신이 소설을 쓸 때에도 도움이 된다. 어제 겨우 완성한 나의 처녀작. 내용은 나의 자전적 이야기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아 소녀가 방황 끝에 소설가라는 꿈을 발견하고 온갖 노력 끝에 그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 하지만 내 작품이 이 세상에 나올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은 채 사라질 나의 작품. 왠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얼른 그가 반납한 책들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반납한 책들은 제대로 서가에 꽂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내 데스크 앞에 놓여 있는 채였다. 손을 천천히 뻗어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내용은 연쇄살인마에 관한 것이었다. 살인을 하고 그 시체에 자신만의 기묘한 서명을 남기는 연쇄살인마 이야기. 읽다 보니 꽤 재미가 있다. 문득 후회가 된다. 어째서 그날 그에게 그렇게 사무적인 태도밖에 취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는지. ‘나는 역시 바보다.’ 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친다.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책장을 아무 의미 없이 계속해서 넘긴다.

시계를 보니 이제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어째서 그 날 그녀에게 좀더 말을 붙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늘 우유부단 하고 ‘아니면 말지 뭐’ 하는 애매한 태도나 취하고. 지금이라도 도서관에 가볼까. 그녀는 분명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 만큼은 나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 계속 있는 것도 의미가 없는 짓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그래 어차피 두 시간 후면 지구는 없어진다. 그런데 나는 무얼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도서관까지는 멀지도 않다. 지금까지 망설이다가 모든 기회를 놓쳤다. 이제 더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다 얘야. 부부의 인연이란 질기고도 질긴 것이라서. 나 다시 태어나도 니네 아버지 만날 까봐 그런다. 죽기 전에 확실히 끝내놔야 편히 눈 감을 것 같다.‘
어머니의 말이 맞다면,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오늘 내가 그녀와 인연을 만들어 두면 혹시 다음 생에서는 그녀와 이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무실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간다. 내가 사무실에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본래 나의 마음은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 우유부단함 때문에 발길을 사무실로 돌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구의 마지막 날. 나는 한번만 내 마음을 충실히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제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창 밖으로는 아름다운 5월의 녹음이 펼쳐져 있다. 지구 멸망 한 시간 반 전이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변화도 없다. 그저 고요할 뿐이다. 나는 책장을 덮고 눈을 감는다.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다리가 열 개 쯤 달린 오징어 같은 외계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풋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며 웃을 수 있다니 참 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그가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져 본다. 부질없는 기대이겠지만. 기지개를 켠다.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 위로 쭈욱 올리며. 그 때 멀리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맞추어 나의 심장 박동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설마...설마...’
“역시 오늘도 계셨군요.”
도서관 문을 밀치며 들어온 그가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말한다.
“네...”
아아. 그가 온 것이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재빨리 손으로 데스크 위의 책들을 정리하는 척 하려고 한다.
“뭐하세요?”
“그냥요...”
이런 바보. 좀 더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저기...”
그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내 쪽에서 무언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용기를 내 보자.
“오늘 같은 날...어째서 여기에...?”
“오늘 같은 날이니까요. 아마 오늘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서요.”
“아...”
“...웬지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분이라...저...물론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 도 있지만요...”
“착각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느꼈거든요.”
말해 놓고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혹시 경박하게 보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지구가 끝나기 전에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나도 당신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어요.’ 이런 말들이 입안에서 뱅뱅 돌고 있지만 부끄러워 말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마음을 담아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는 것 뿐.

그녀가 나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5월의 오후에 너무나 어울리는 미소. 나도 같이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아마 그녀가 보기에는 멋쩍은 미소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손목에 찬 붉은 색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작고 예쁜 시계였다.
“손목시계가 예쁘네요.”
“고마워요.”
“저...밖에서..커피라도 드실래요? 날씨도 이렇게나 좋은데...”
“전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자요.”
“아...”
“하지만 밀크티라면 괜찮아요.”
그녀는 포트에서 홍차를 우유와 함께 두 잔의 머그컵에 부어 나에게 그 중 하나를 건넨다.
“고마워요.”
우리는 머그컵을 들고 도서관 바깥으로 나가 벤치에 앉는다. 네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나무 벤치다. 손에 든 따뜻한 밀크티에 5월의 햇살이 더해져 너무나 기분이 좋다. 생애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아직까지 홍차가 남아 있다니. 신기하네요.”
“후후. 비장의 홍차랍니다.”
그녀가 밀크티를 한 입 마시며 기분 좋게 웃는다.
“사실은 오늘 사무실에 나갔었어요.”
“오늘 같은 날 사무실이라니...후후. 저하고 같네요.”
“네에 그러게요.”
그녀와 마주보고 한바탕 크게 웃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다. 미소 짓는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운 날에 지구가 멸망한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러게요. 이제 한 삼십분 밖에 안 남았네요.”
우리 둘 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다. 삼십 분. 삼십 분 후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다. 이제 잠시도 주저할 수 없다.
“우리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음 생이 있다면요.”
“만나 주실 거죠?”
“그럼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흔쾌히 대답한다.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에 성공했네요.”
“어머 그러세요? 꽤 인기 있으실 것 같은데요.”
“전혀요. 성격이 워낙 우유부단해서 제대로 데이트 신청 해 본 적도 없어요.”
“후후. 저도 그래요. 정말 우유부단한 성격이죠. 머릿속에 생각만 많고요.”
“어쨌든. 그럼 다음에 꼭 다시 만나는 거예요.”
“네.”
“어디서 만날까요?”
“이 도서관으로 오세요.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10시까지 여니까 한 아홉 시 반까지 오시면 되겠네요.”
“네. 그럴게요. 꼭 올게요.”
“고마워요.”

-65억년 후 혹은 찰나의 순간 후-

201X년 5월 X일 서울, 한국

이제는 고통도 멎고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본다. 어째서 도서관에 들락날락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만이 내 눈에 띄었을까. 그는 항상 추리 소설을 빌려가곤 했다. 사무적으로 책을 대출해 주고 반납 받았지만 속으로는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 소설 같은 장르 문학 보다는 순수 문학이 수준 높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해는 갔다.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인 걸로 봐서 그는 분명히 회사원일 것이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추리 소설로 푸는 것이리라. 술 먹고 노래방에 가는 얼간이 같은 남자들 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문제 핵심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관심을 기울이는 나 자신이었다. 고아원을 나온 이후 세상에 대해서는 진즉에 마음을 닫아걸었는데 말이다. 어째서 그에 대해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반한 걸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한테 어떻게 반한단 말인가. 하루는 그가 반납한 추리 소설을 내가 대출해서 읽어 보았다. ‘xx 저택의 살인사건’ 이라는 추리 소설 이었다. 나름 꽤 재미가 있어서 거의 밤을 새다 시피 하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쿡 하고 속으로 살짝 웃는다.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의 처녀작이 출간 되었을 때보다도 더 행복했던 그 날. 나에게 다가온 그의 모습이.

하얀 벽에 기대어 그 날의 기억을 되새겨 본다. 그 날도 오늘처럼 맑디맑은 5월이었다. 내가 혼자 쓰는 원룸의 침대에 누워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용기를 내어 보기로 굳게 결심을 한 터였다. 그 때문에 팀장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하루 휴가도 냈다. 하지만 자꾸 망설이게 되어 어느 새 시간은 오전 11시가 지나 있었다.  일단은 아점이나 먹자는 생각에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또 멍하니 쳐다보았다. 구수한 라면 냄새가 풍겨 왔다. 라면이 다 익자 냄비 그대로 식탁에 옮겨와 먹기 시작했다. 짭짤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자 문득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또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식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 순간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 버릴 수는 없었다. 옷을 주어 입고 거울을 한번 보고는 재빨리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려서 버스 정류장 까지 갔다. 마침 버스가 도착하고 있었다. 마치 어서 그녀에게 가라는 듯이. 아니다. 이건 우유부단한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봐 누군가가 배려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버스에 올라 그녀가 일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를 만나 건넬 한 마디만 계속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이 한마디만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녀를 볼 구실인 추리 소설을 잡은 두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손이 아려 왔다. 버스는 오늘 따라 막히지도 않고 신호등도 별로 걸리지 않고 달렸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뒤로 휙휙 지나갔다. 초록을 머금은 나무들. 햇살을 머금은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어느 새 버스는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나는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도서관의 정문을 향해 달렸다. 오월의 햇살이 뜨겁게 느껴졌다. 도서관 문을 열어젖히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냅다 달렸다. 그녀는 숨을 헉헉대며 뛰어 들어온 나를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나는 그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그녀는 잠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쿡 하고 살짝 웃는다.
그녀의 웃음에 나는 계속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게요.”
“저 여기 반납이요.”
“네.”
나는 추리소설을 그녀의 데스크에 올려 놓으며 마음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저기...오늘...퇴근 하시고...커피 한 잔...”
“저 커피 마시면 잠을 못자는 데요.”
“아...그러세요...”
절망이었다. 정말 용기 내어 회사도 쉬고 여기까지 달려 왔는데. 하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커피 한 잔 하자는 데 순순히 따라나설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거기다 내가 특별히 잘 생기거나 키가 큰 것도 아닌데.
“하지만 밀크티라면 괜찮아요.”
순간 나의 뇌를 의심했다. 실망이 너무 큰 나머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미소 짓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가 방금 들은 말은 절대 환청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그럼...기다릴게요.”
“네. 새로 들어온 추리 소설 몇 권 있으니까 그거라도 읽으시면서 기다려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기뻤던 날이 또 있을까 싶었다. 매일 싸움만 하는 부모님에게서 독립할 때 보다 훨씬 기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나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상당히 지쳐 보이긴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녀 곁에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아이가 곤히 자고 있다. 아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병원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초침이 신나게 달려가고 있다. 우리 아이의 앞날을 열어젖히려는 듯이. 우리 아이가 태어난 지 여섯 시간 이십일 분 삼십이 초가 막 지나고 있다.
jgw91@hotmail.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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