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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다로 가는 모든 길

2003.08.12 18:3208.12

쓴이 : 베렌
교정 : 한아
ⓒ 1997.8.15 글동인 theMUSE
ⓦ 2000.7.23 (99.11.28) theMUSE 베렌


그리고 우리는 벌써 사람들이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가지고 있다.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은 어디든지 걸어간다. 멈추어 서있었
던 것은 아주 잠시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4번째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내가 체포된 이유는 산책을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걸었다는 이유이다.                    
                                                - 습작 노트에서 -

1. 오후의 속임수
한낮에 더위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날씨를 조정하는 놈들은 여
름의 태양을 사람들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길가의 인조나
무들은 인공산소를 내뱉고 있었고 비둘기는 삐그덕 거리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다니다가 이따금씩 바닥에 내려 앉아 먹지도 못하는 먹이들
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K씨는 오전 내내 지하철 개표구에서 기웃거렸다. 표를 판매하는 여직원
에게 똑같은 질문을 계속 하고 있었다.

"바다로 가는 열차는 없는 거요?"
"죄송하지만 '바다'라는 이름의 역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아가씨는 상냥하게 대꾸했다. 빌어먹을 바다를 모른다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이야? K씨는 한참 동안 그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직원은 동그란 얼굴에 긴 생머리, 큰 눈에 귀염성 있는 매표소나 상
점에서 자주 사용하는 모델이었다.

"바다 근처까지만 가는 열차라도 있지 않겠소?"
"죄송합니다. 손님 '바다'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지명인가요?"
K씨는 두손을 치켜들고 바다를 설명하려고 했다. 입속에서 '푸르다'는
단어를 웅얼거렸다. 쏴악, 철썩, 두손을 앞으로 휘저어서 큰 원을 만
들었다. 아가씨는 K씨의 두손을 관심 있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K씨
는 설명을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설
명할 수 있을까?

"아가씨, 난 모조리 알고 있어. 모든 것이 속임수야. 꼬리만 잡으면
금새 탈로나 버릴걸.."

아가씨가 인간이었다면 분명히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개만 갸우
뚱거리며 죄송합니다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K씨는 화가 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 빠져 나왔다. 아가씨는 상냥한 표
정으로 다음 손님을 맞았다. K씨는 땅위로 올라가서는 밋밋하기 그지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속임수는 K씨 머리 위에 떠 있었고 사람들
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이따금씩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
던 시민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누군가 날 속이고 있다. K씨는 불안한 동작으로 날조된 하늘과 빌딩
사이 창문들과 건물들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누군가 어딘가에
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는 불쾌감이 오늘은 더 했다.  

K씨는 시민공원의 벤치에 앉아 속임수가 가득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사람들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치며 힐끔 쳐다보곤 했다. K씨는 주머니에서 꾸깃해진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담배를 보라! 붉게 타오른 후 재가 되기 전에 잔상을 남겨놓는 흰
막대기를 보라! 이 연기는 이제 저 뛰어 노는 아이들의 건강을 헤치지
못한다. 몹쓸 하늘을 오염시키지도 못한다. 몸 안에서 더 이상 독이
되지도 못한다. 어디에서도 금연이라던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문구
는 찾지 못한다.

이제 이 담배는 슬프게도 나를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K씨는 피다
만 담배를 바닥에 문지른 후 주머니속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주머
니에서 빛 바랜 조그만 사진을 한 장 꺼내 들었다. 사진은 희미했고
온통 파란색 뿐이었다. 그 사진은 그가 어렸을 때 오래된 창고에서 우
연히 찾은 것이다. 잡지책에서 그가 몰래 오린 조그맣고 낡아빠진 사
진이었다. 그는 평생동안 바다라고 생각한 것은 고작이 사진의 흐릿한
풍경뿐 이였다. 그는 정말로 바다가 보고 싶었다. 공원 안을 빙 둘러
보았다. 가끔씩 연인들이 혹은 아이들이 눈에 띨 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뿐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 중 바다에 대해 아는 사람
이 있을까? K씨는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장 나이가
많을 법한 노인들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바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K씨는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짜고짜로 물었
다. 힐끔거리는 시선들, 겁먹고 분노에 찬 시선들……. 외면하는 노인,
도망가듯 슬쩍 자리를 피하는 노인,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노인, K씨
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분노 같기도 했고 억울함 같기
도 했다. 여기저길 다니면서 K씨는 노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그가 불쾌했다.
한참을 K씨는 그렇게 평온한 공원을 들쑤시고 다녔다.

"여보게, 젊은 양반. 뭘 찾고 있나?"

그에 눈은 빛나고 있었다. 속임수가 가득한 오후 내내 그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K씨는 가로수 그늘아래 조용히 앉자 휴식을
취하는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바다요. 빌어먹을 바다를 찾고 있다고요!"

K씨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한참후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벤치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K씨는
한동안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
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인을 쫓아가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
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말이다. 그들은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
었다. 속임수 가득한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의 번화가였다. 밤의 짙은 어둠 때문에 거리
는 번쩍거리는 네온사인과 화려한 간판들, 시끌벅적한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는 마치 온갖 종류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
았다. K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노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언제쯤 바다를 볼 수 있는 겁니까?"

K씨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어떤 이들은 무엇을 숨기려 들지. 감쪽같지 말일세. 그러면서도 그것
들이 들통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그리고 남들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거야. 탐욕스러운 놈들이지."

주변에 소음 때문에 K씨는 노인의 음성을 놓칠 것만 같았다. 노인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든 어디서든 말야. 엿듣기를 좋아하는 놈들이야. 해서는 안 되는
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들, 유해한 말들을 몰래 듣기를 원하지.
젊은이,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게나. 평범하고 선량하기 그지없지  
않나? 하지만 저 속에는 놈들의 탐욕스런 욕심을 돕는 자들이 있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어다니는 첩보원이 되고 말지. 끔찍하지 않
나? 자기 자신이 떠드는 말까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충실히 전달
된다는 걸 모른다네. 자네도 그런 불쌍한 인간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말들을 놈들이 다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바다를 왜 찾으려 하
나?"

K씨는 노인의 말들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작은 소리여
서 잘못 들은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이 바다를 왜 찾
는지도 그는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다.

"저는 단지……. 저는……. 그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바다 말  
이죠. 모두가 속임수란 걸 믿습니다. 저는 바다를 보고 싶을 뿐입니
다."

노인은 조그맣게 웃었다. 노인은 그가 어리석다는 걸 알았다. 마치 그
가 백열등 불빛에 끈임 없이 달려드는 나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
은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걸음을 늦추었다.

"잘 듣게 젊은이, 진실은 매우 가까이 있다네. 바다가 정말 있는지 없
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네. 그걸 찾아야만 하는 어리석은 의도
가 더 중요한 법이지. 그러나 조심해야 할걸세. 그것은 쉬운 일이 아
니라네. 동쪽 끝까지 가게나 젊은이. 택시나 버스를 타든지 아무튼
동쪽 끝까지 가게. 그리고 거기서 부터는 걸어서 직접 가야 하네. 그
러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껄세. 더 이상 갈곳이 없어 보이지.
끔임 없이 헤매다가 미로에 갇힌 생쥐처럼 말일세.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젊은이가 직접 확인하게 바다가
정말 있다면 그곳에 있을 걸세. 늘 그랬듯이 말이야."

그는 노인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음속에
그의 말들을 새기고 또 새겼다.

2. 인도의 끝
고속으로 달리는 택시는 이미지와 잔상들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것은
점과 점을 잇는 직선과도 비슷했는데 K씨가 바라본 차창 밖의 나무들,
이정표들, 사람들, 공기와 늦은 오후의 햇살들이 뒤범벅이 되어 길게
느려진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참이 지나서 그 직선은 다시 점이 되었
다. K씨는 말없이 전자시민카드를 운전사에게 내밀었다.

"누구도 여기까지 온 적이 없겠지."

K씨는 마치 누구에게 얘기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노인이 일러준 데로
동쪽을 찾았다. 그리고 말없이 걸었다. 그런 여정 중에 그가 멈춘 것
은 이따금씩 손위에 놓은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을 제외
하고는 그는 밤새도록 걸었다. 얼마가지 못해 그는 인도의 끝에 도착
했다.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주위에는 온통 '출입금
지', '경고', '막다른 길'이라고 쓰여진 간판들로 즐비했다.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모든 길의 끝에 그는 서 있었다. 아무도 가보려 하지 않
았고 가보지 않았고 또 가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그는 노인의 말들을
떠올렸다. 끝이 아니라는 말,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들을
말이다.

K씨의 여정은 밤새도록 계속 되었다. 그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길 위를 걷는 것에 익숙했다. 걸
을 수 있는 길과 걷을 수 없는 길 이외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울창한 숲속을 걷기도 했고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을 걷기도 했다. 부서
진 건물과 멈춰버린 자동차들 덩그러니 놓여있는 텅 빈 콘크리트 거리
위를 걸기도 했다. 그곳은 죽어 버린 도시 같았다. 사람들이 아주 오
래 전에 버린 도시였다. 오랜 세월동안의 첫 손님을 맞이한 이 도시는
완전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주 잠시 그는 그것이 소름끼쳤다. 그렇
게 몇 개의 크고 작은 잠든 도시를 지나친 후에야 새벽이 밝아왔다.

그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끝처럼 보였다.
회색의 벽이었다. 길고 높은 벽, 좌우로 끝없이 늘어선 벽이었다. K씨
는 벽에 손을 대보았다. 매끈하지만 차가운 느낌이었다. 가만히 귀를
대어 보았다. 알 수 없는 굉음들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이세상의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K씨는 회색의 벽을 가만히 쳐다보았
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벽은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
다. 꿈틀거리는 절망감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머지 않아 그
것이 그를 삼킬 것 같았다.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노인의 말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려고 노력했
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나 가까이 와 있었다. 그가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였다. 그는 높은 산을 정복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없이 벽에서 떨어
지고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끔임 없이 벽을 넘으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바닥으로 내동
댕이 쳐졌지만 그때마다 그의 의지는 더욱더 견고하고 단호해졌다. 그
는 밤새도록 한번도 쉬지 않고 벽을 올랐다. 그가 정상에 오른 것은
새벽 안개가 조금씩 드리워진 축축한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그 위에
서 똑똑히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바다를 말이다. 이제까지 한번
도 맡아보지 못한 바다 내음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 세찬 바다 바람에
몸이 잔뜩 움츠려 들었지만 전혀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K씨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바다의 모든 모습들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끔임 없이 찾아 헤맨 바다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변함 없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머릿속에 새겨 두
었다. 그가 고개를 쳐들어 좀 더 멀리 쳐다보려고 했을 때.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저길 봐!!"
"누군가 보호벽위에 올라와 있잖아."
"잡아!"

외침소리는 단호했다. 시끄러운 굉음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누
군가 K씨에게 무언가를 쏘았다. K씨는 정신 없이 벽을 내려가기 시작
했다. 결국 그는 바닥에 내동이 쳐졌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쏜 이
상한 광선을 왼팔에 맞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뭔가가 잘못되어 가는 걸 알아차렸다. 왼팔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간신히 일어나 달리기는 했지만 온몸이 점점 굳어지는 느낌이
었다. 정신은 몽롱했고 온몸이 나른한 듯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그는 조금씩 지쳐가더니 얼마가지 못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3. 49일(사후 카르마에 의해 다시 윤회를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일수)

"K씨, 어째서 바다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는 이런 일이 늘 있어 왔고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
다. K씨는 아직도 몸이 축 늘어진 것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놈들
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앉아 있는 방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 흰색 벽이 어떤 죄도 진 적이 없다
고 생각했던 용기를 거만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개자식은 날 속이려 하는 거야. 뻔뻔스럽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K씨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조금은 피곤한 듯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 5년 간 같은 혐의로 체포된 적이 3번이나 있군요."

그는 K씨 앞에 놓여있는 서류뭉치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속삭이듯 말했
다. 다른 한 사내는 그의 옆에 앉아서 연신 단말기 자판을 두들이고
있었다.
그는 K씨에게 담배 한 개피를 권했다. K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K씨는
막연한 분노에 시달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기억은 흐릿흐릿하게 안쪽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듯 했
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요?"
"K씨 당신은 위험한 구역에서 체포됐습니다. 아주 위험한 곳이죠. 어
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곳입니다. 저희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출입을 금한 곳들이죠. 무슨 이유인지 당신은 거
기에 있었고 저희는 안전을 위해서 체포를 한 겁니다."

K씨는 그의 말에서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을 끄집어냈다. 막다른 길,
끝, 길었던 회색벽, 그리고 바다. 그래 바다.....

"난 바다를 보았다. 이 두눈으로 말야."

그는 웃으며 K씨에게 건넸던 담배를 입에 가져다 물고는 불을 붙였다.

"K씨 바다가 도대체 뭐죠? 그런 건 없습니다."
"아니, 난 평생 잊지 못할걸, 끝없이 펼쳐진 파란 바다를...."

K씨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억의 조
각 조각들을 끈질기게 잡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지쳤다는 듯 책상을 탁하고 쳤다. 옆에 앉아 있던 사내는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무엇 가를 손에 들고 K씨에게 다가갔다. K씨는 그게 무
언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곱씹
고 곱씹었다. 곧 그는 정신이 몽롱해졌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런 놈들은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아. 그럼 예산이 반은 줄어들껄
세."
"그럼 직원을 많이 줄여야 할겁니다. 할 일이 없어지니깐요."

사내는 K씨의 팔에서 빼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다시 단
말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들겼다.

"대단하군요. 벌써 3일째나 이런 식이라니.. 이 녀석은 기억파괴프로
그램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군요."
"기억주입프로그램으로 넘겨 버리게... 빌어먹을 우리가 할 일은 다했
어."
"그는 바다를 왜 찾으려고 할까요."
"글쎄, 우릴 엿먹일 작정이겠지...."

그는 담배를 책상 위에 짓이겼다. 그리곤 계속 말을 이었다.

"정신이 이상한 놈이거나 감상주의자거나 둘 중 하나겠지. 바다는 너
무 아름다워. 어린 계집아이가 쇼윈도에 진열된 옷이나 구두를 쳐다
보며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일세. 이런 놈들은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
지 전혀 알지도 못해, 감상적인 정신병자일 뿐이지. 아님 남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코흘리개 애들이거나 말이야. 빌어먹을 바다를
찾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벌써 5년이나 이런 빌어먹을 짓이
라니...."
"어떤 모델로 하죠."

무표정한 사내는 그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을 끊었다. 그는 투덜
거리는 걸 그만 뒀다. 단말기 화면을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어떤가. 착실하고 촉망받는 젊은 직장인, 예쁜 아내도 있고 토
끼 같은 귀여운 딸도 하나 있고 말야. 그리고 몰래 만나는 기막힌 애
인도 한 명 있는 F-210 이 모델이 좋겠군."
"좋으실 때로...."
"며칠이나 걸리겠나?"
"글쎄, 49일정도... 그쯤이면 모든게 말끔하게 해결되겠군요. 더 이상
바다에 대해 생각조차도 못할 겁니다."
"49일이라... 죽은 후에 천당에서 윤회를 준비하는 시간과 같군."

그는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4. 당신은 바다를 기억하십니까?
나른한 아침이었다. 아내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부드럽게 K씨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K씨는 길고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악몽 같기도 했고 달콤한 꿈 같기도 했고 슬픈 꿈 같기도 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K씨에게 와락 안겼다.

"아빠 오늘 동물원 꼭 가는 거지?"
"그만. 아빠는 피곤 한단다."

아내가 아이를 때어놓는다. 아이는 금새 울상이 되어버렸다.
K씨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가자꾸나. 내일은 꼭 가는 걸로 약속할게..."

K씨는 꼭 그렇게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는 금새 얼굴이 환해
졌다.

그 날은 평범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K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럽게
자신을 깨우는 아내가 차려준 아침식사를 하고 말끔한 정장을 하고 아
이에게 키스를 하고 아내를 가볍게 안아주는 마중이 끝나자 지하철역
으로 투벅 투벅 걸어갔다. 어느 것 하다 바뀐 것이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그는 표를 사기 위해서 돈을 건넸다. 표를 파는 아가씨
는 그를 보고 방긋 웃었다. K씨도 웃는 낫으로 표를 건네 받았다.

"그런데 손님, 바다는 찾으셨나요?"

아가씨가 상냥하게 물었다. K씨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를 몰
랐다.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뿐이다. 그리곤 아주 잠시 어렴풋이
뭔가를 기억하려고 했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가 한번 더 그런 느낌을 가진 것은 고속으로 달리는 지
하철 안이었다. 길게 늘어지는 창밖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다 주머니
속에서 낡고 낡은 오래진 사진하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사진은 빛 바
래 있었고 온통 푸른색 뿐이었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
었다.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버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소중한 것처럼 느껴졌다. 버
려서는 안될 것 같았고 희미한 추억 따위가 담겨있는 듯 했다. 그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열차가 멈추자 지상위로 올라
가기 위해 인파 속으로 파묻혔다.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우주 2000]
달은 지구보다 아름답다 - Opening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우주
잊혀진 사람들
바다로 가는 모든 길
나의 목적지별
댓글 2
  • No Profile
    아이 03.08.17 13:26 댓글 수정 삭제
    (오옷, 이 소설 참 괜찮다. 형식도 마음에 들고. 특히 '...그 흰색 벽이 어떤 죄도 진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용기를 거만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잠시 신경이 곤두섰다.)
    감상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은 피해야겠지만, 어쨌든 제 관심사를 다룬 소설이라 참 좋았습니다.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 No Profile
    필바라 03.08.24 11:06 댓글 수정 삭제
    .... 보던 도중 <트루먼 쇼>가 생각났지만 그것에 관한 생각은 이내 사라졌죠. 즐거원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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