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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가치의 탄생

2012.03.28 06:0903.28



가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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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치의 전당에 반대하지 않는다. 혹은 동의 하지 않는다. 정확히 하자면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선 <가치의 전당>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아간다. 설령 그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전당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은 아침에 배달되는 우유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 빵과 계란으로 식사를 떼운 다음,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를 타거나 일일권을 끊어 지하철을 타고 직장으로 출근한다. 평균 8시간의 근무시간이 끝나면 아침의 역순으로 집으로 되돌아와 꿈같은 잠을 자며 내일을 맞이한다. 그들의 일과 중에 <가치의 전당>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보인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가치의 전당>은 그들의 일과에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가치의 전당으로 그들의 일수거 일투족이 낱낱이 보고된다. 그리고 가치의 전당은 그들을 통제한다.

가치의 전당에는 각자 레드, 블랙, 그리고 제로라는 코드명을 지닌 3명의 노인이 상시 거주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수행원들 및, 각지로 파견된 정보원들이 가치의 전당에 속해있는 자들의 면모다.

3명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이 몹시도 섬세하고 중요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미줄로 스웨터를 짜듯, 아주 조심스러운 조율과 조정을 거쳐나간다. 정보원들이 가져온 정보가 수행원들에 의해 종합되어 노인들에게 도달할 때쯔음에는 대부분 핵심적인 요소만 남은 것으로 치환되어 있다. 예스 혹은 노로 양분될 수 있을만한 결정에 의해 일군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울음소리가 터진다. 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미시적인 단위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결정이 거시적인 세계로 퍼져나간다. 가치의 전당에선 가치를 결정한다, 고로 자본 사회를, 세상을 지배한다.

가치의 전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베네찌아의 고리대금업자들이 만성 연체자의 살과 피에 붙일 가격을 알아내기 위해 3명의 노인에게 자문을 구한데에서 비롯되었다. 3명의 노인이라는 체계는 전통이었지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추려진 선택지에 대해 3인이라는 숫자는 항상 빠른 결론을 이끌어 냈다. 가치의 전당은 전쟁터에서 총알의 값어치를 매겨왔으며, 사형수들의 장기, 면죄부, 흑인 노예, 금니를 비롯한 각종 보석류는 물론 판화나 인쇄에 쓰이는 활자, 종이, 이집트산 석재, 바다 채굴권, 담금쇠, 말안장, 부적과 의식용 지팡이를 비롯하여 등장 이래 세상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정해왔다.

한 때, 가치의 전당이 더 이상 가치들에 대해 우위권을 가지지 못할 것이란 예측도 있었다. 기술 혁명 이래로, 새로운 물건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방직기계를 시작으로 하여,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물건들에 모두 가치를 매길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조절함으로서 실질적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계획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 때 3인의 합의하에 결정된 것이 석유를 기반으로 한 가치 체제였다. 현대에 이르러 세상에는 수억만가지의 물품들이 있었지만, 제 가격을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 그것들의 기준을 하나로 잡아두었던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여전히 전당은 힘들이지 않고 세계의 가치들을 뒤흔들 수 있었다. 전당에 앉아 정한 석유의 가격이, 먼 극동의 콩나물 가격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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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레드는 선조들이 구축해온 이 석유 체제에 대해 회의에 빠져 있었다. 향후 100년안에 소진될 것이 분명한 자원으로는 가치의 기준을 매기기에 한계가 있었다. 인간들은 더욱 많이 태어나고, 오래 살며, 더더욱 많이 소비할 것이다. 기축이 될만한 것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책임감이 강한 레드는 기준이 될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블랙은 선조들이 석유 체계를 구축했듯 자신들의 후배들이 다른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란 낙관론자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체제로도 얼마든지 가치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얼마 전 플로리다의 지층에서 중동의 현 석유매장량 총량에 육박하는 석유혈암(oil-shale)이 발견된 것도 그런 낙관론을 한 몫 거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하던 제로가 막 터키석 생산량을 줄일 것을 지시하고, 점심을 먹자고 제안하던 때였다. 수행원이 파란 봉투를 가지고 전당의 내로 들어왔다.

"새로운 품목인가."
"네. 주목할 만한 동향이 목격되면 곧장 보고하란 지시가 있었습니다."

수행원은 파란 봉투를 레드에게 가져갔다. 봉투 겉면에는 심장모양의 납인이 찍혀 있었다. 심장은 창당 이래로 전당의 상징이다. 레드는 힘주어 납인을 뜯고서 안에 든 종이를 꺼내보았다. 블랙과 제로도 오랜만에 등장한 파란 봉투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마지막 증명?"

레드는 서류의 첫 단어를 읽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가 한 눈에 파악하지 못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흔히 짓는 표정이었다.

"예. 뉴욕 4번가 사설 옥션에 마지막 증명이 매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증명이 뭔가?"
"아, 죄송합니다. 서류를 정리할 시간도 없이 바로 가져오느라. 설명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증명은 정확히 말하자면 '피타고라스 정리의 마지막 증명법'입니다. 세간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수학계에선 한 때의 헤프닝으로 몇몇 기억하는 인사들이 있을 겁니다. 사건은 덱 와일즈란 수학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법은,"
"수도 없이 많지."

블랙이 수행원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다 알고 있네. 피타고라스 학회를 지원한 게 꽤 되었지만, 분명히 기억해. 현재도 새로운 증명법들에 대해 피타고라스 학회에서 처리하질 않나? 하지만 실상은 삼각형을 심벌로한 비밀 종교 단체이며, 더 나아간 실상은 IT 재벌들의 탈세처란 것도 다 알지."  
"역시 블랙이군."
"대단하십니다. 현재 피타고라스 학회에 등록된 공식 증명법은 402가지이며, 매년 평균적으로 2-3개씩 추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피타고라스 정리의 마지막 증명법이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 해보게."

제로가 재미있단 표정으로 수행원에게 말했다.

"문제의 시작점인 덱 와일즈는 1934년 생으로 수학계에선 꽤 유명인사입니다. 제타 함수에 관한 논문들로 날렸던 사람이죠. 천재 수학자들이 대게 그렇듯, 수학밖에 모르는 작자로 그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의 새로운 증명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6살 때 스스로 정리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피타고라스 학회에 덱 와일즈의 이름으로 등록된 증명법이 53가지. 벡터 이용법, 행렬과 각미분을 이용한 증명법까지 다양합니다. 그는 1982년,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54번째 증명이 피타고라스 정리의 둘도 없는 마지막 증명이라며 대대적인 발표식을 갖습니다. 하지만, 아까 언급되었듯이 증명법은 지금도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비웃음을 샀겠군. 수학계라는 작은 집단에선 성급한 행동이었어."
"물론입니다. 그게 왜 둘도 없는 마지막 증명이냐며 각종 비난이 쏟아졌고, 혹 색다른 걸 기대하고 있었던 동료 수학자들의 질문도 있었지만, 덱 와일즈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 증명법을 봉인했습니다."
"봉인했다고?"
"네, 증명을 적은 종이를 특수 장치를 단 상자에 넣어 열쇠를 걸고 그걸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폐결핵으로 사망,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도 마지막 증명을 지키란 것이었죠. 마지막 증명은 비웃음거리로 유명해졌습니다. 그의 죽음 뒤로도 수학자들은 새로운 증명법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다만, 그 아들의 주장이 걸작입니다. 만약 300번째 증명법이 나오면 아버지의 증명법은 301번째가 되고, 400번째가 나오더라도 401번째가 되므로 결국엔 마지막 증명이 맞다는 것이었죠.
"봉인을 풀지 않고 놔두는 이상 늘 마지막으로 남은 증명이란 생각이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야. 그런데 그 마지막 증명이 매물로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예. 아들인 제임스가 직접 들고 나와 상자를 공개했습니다. 제임스는 지금 이혼소송 중이며,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실직까지 했습니다. 경제적으론 파산 상태나 마찬가집니다. 제 아무리 아버지의 유지가 중요해도  제 살 길이 먼저지요. 제임스가 원한 초기 입찰가는 3만 달러에, 최소 증액가는 천 달러입니다. 이건 옥션측에서 보내온 사진과 엑스레이 결과입니다."

수행원은 레드가 책상에 놓아둔 서류 아래에 붙은 사진 하나를 찾아 세 노인들에게 내밀었다. 중년의 나이가 된 제임스와 끌차에 실린 검은 상자가 보였다. 상자는 정육면체로, 얼핏보면 그 자체로 돌이나 쇳덩어리로 오해할 만큼 틈이 없어 보였다. 다만, 정면을 향한 면에 작은 열쇠 구멍이 나 있어 거기로 덱 와일즈가 삼켰다던 열쇠가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부를 확인하기 위한 엑스레이 사진에는 잠금장치로 보이는 각종 기계장치들과, 종이뭉치가 보였다.  

"상당히 흥미롭군. 확실히 수학 증명법이 팔린 적은 없었어. 다만, 가치가 매겨진 전례는 있지." 블랙이 입맛을 다지며 말했다. 흥분되는 사건을 만나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으로 노인이 될 만큼의 시간을 흘러보냈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클레이 연구소 7대 난제에 대해 100만 달러씩의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 100만(million)은 상징적인 금액이거든. 실제 유통되거나 거래가 불가능한 품목에 대해선 상징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크지. 하지만 이건 실제 유통을 목적으로 경매에 등록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군. "

제로가 수행원이 건낸 엑스레이 사진을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당시로선 견고한 걸 골랐겠지만, 지금으로선 언제든지 열어 볼 수 있겠어. 다만 이 경우에는 이 상자의 개봉과 가치가 직접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단 사실이 중요해. 개봉된다면, 아들의 주장대로 언제까지고 마지막 증명으로서 남을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열어서 그 증명을 보지 못한다면 그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마치 '먹지는 못하지만 가장 맛있는' 음식같군."

세 사람의 노인들은 전 세계를 뒤흔드는 자들이었지만, 공통적으로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 권태를 가지고 있었다. 가치의 전당은 절대적이다. 특히 자본 사회에서 돈으로 표방되는 가치의 위력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더욱 확고한 사실이다. 세 노인들이 전임자들에 이어 가치의 전당에 입성한 것은 중년에 갓 접어들었을 때로, 전통에 따라 세 명이 동시에 선택되었다. 그들이 중년에서 진짜 노인으로 바뀔 때까지의 시간동안 수 십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경제 위기가 있었고, 전 지구적인 재해가 있었다. 그들은 그런 큼지막한 사건들을 뒤에서 조정하는 것 외에도 하루에도 수십차례, 사람이 깔려죽을만큼의 자본이 움직이는 일들을 리모컨 누르듯 해왔다. 자신들의 집단과, 전당의 존속을 위해선 필수적이고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개인적인 삶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 찾아오는 권태는 어찌보면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 그들 앞에 던져진 새로운 품목에 대해 세 명은 마치 놀이 기구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되어 있던 것이다.

"달리 보면 이건 일종의 정보라고 볼 수 있어. 근본으로 돌아가자면 태초부터 정보는 가장 힘있는 가치였단 생각이 든다구. 어딜가면 잡기 좋은 동물들이 서식하는가, 어떤 땅에 씨앗을 뿌리면 잘 자라나는가. 이런 정보들이야말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던 핵심적 가치라고 볼 수 있지."
"레드,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닌가? 물론 우리가 예술품같이 정신적인 것들도 다루지만 언제까지나 기반을 두고 있는 곳은 결국 자본이야. 석유를 기준으로 한 체계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기본 바탕에는 자본이 있기 때문 아닌가? 정보가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것또한 자본을 생산하기 위한 부차적 가치에 불과한거야."
"블랙, 나는 곧 전당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 생각해. 이전의 선조들이 현명하게 대처한 것처럼 우리 뒤에 올 자들이 과연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 선에서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봐. 그런 의미에서 이 마지막 증명의 가치는 그 출발점이라 보이네. "
"이건 한낱 재미있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네. 우리는 일 센트를 움직여 수 백억 달러를 휘청이게 하는 사람들일세. 앞으로 우리가 해나가야 할 길은 지금의 경제 체제를 더욱 확고히하고, 체제에 굴복하는 정치 세력들을 길러내는 일이지,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찾는 게 아니라 생각하네."

역사적으로 언제나 세 노인들이 화합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가치를 정하는 세 사람의 결정에서 늘 소외되는 쪽이 생기면 갈등은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블랙과 레드는 미묘한 틈이 있었다. 그것을 중재하는 것은 늘 제로였다.

"둘 다 그만하게. 어쨌거나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에 새롭게 등장한 이 품목에 값을 매기는 일이 아닌가? 이 마지막 증명에서 생각하는 각자 중요한 점이 있을 터, 그러면 가치를 당장 매겨보는 건 어떤가?"
"초기 입찰가가 3만 달러라고 했지? 나는 이건 300만 달러 이상으로 팔려야 한다고 생각하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레드?"

제로의 질문에 레드는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제로가 반문한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아까 말했듯이 정보는 가장 힘있는 가치야. 하지만 현대사회에선 이 정보가 바다처럼 흘러넘치지.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고, 뭘 느꼈는지까지 활자화, 영상화되어 온 세계를 누벼. 그런 상황에서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정보란 것은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야 하지. 일종의 특권과 같은 걸세. 이 증명에 높은 가치가 결정되면, 앞으로 개인만을 위한 정보를 파는 집단들이 생겨날 기반이 되는 거지. 나는 이미 극도로 소량화된 정보를 사고 파는 시스템에 대해 구상해두었던 참일세. 이런 계기가 필요했던 것 뿐이야."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네."

블랙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정보는 넘친다고 했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건 전당의 앞선 세대들이 이미 기획해놓은 결과일 뿐이네. 오히려 넘치기 때문에 고급화된 정보란 것은 그걸 분별해낼 수 있는 관찰력이나 명석함에서 오는 거지, 따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님을 모르겠는가? 선조들은 진짜 정보들이 압도적인 량의 정보들로 뒤섞여 혼란스럽길 바란거야. 그래야 군중을 다루는 것이 쉬워지니. 알루미늄 호일로 발전기를 만드는 매커니즘으로 뇌관을 떠올리고, 옛 화약제조방식에서 가동부를 생각해내 사제 폭탄을 생산한 테러리스트 기억하나? 지금 시대의 정보란건 결국 어디서 잘라내 조합하는지가 중요할 뿐일세. 게다가 이 마지막 증명이란 것은 고급화된 정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야. 이미 몇 십년 전부터 놀림감이 되어오던 것을 누가 자신만의 정보라고 여기며 구입할 건가? 나는 옥션에 지시해 그 물건을 등록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만약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고 우기면, 이런 엑스레이같은건 집어치우고 개봉해서 실물을 꺼내야 할거야."
"내가 바보인줄 아는가. 내가 말한 극도로 소량화된 정보는 그것의 유용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야. 단순히 아무 필요도 없는 정보라도, 그것이 소량화되어 개인에게만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보석이 왜 가치가 높은지 정녕 모르는건가? 이 마지막 증명이 담긴 상자야말로, 소량화, 즉 보석화된 정보로서의 상징성이 짙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300만 이상이라 생각해."

언성이 높아지자 제로가, 갑자기 큰 소리로 둘을 제재했다.

"그만! 그만해. 오랜만에 새로운 품목을 본 나머지 모두 흥분한 모양이군. 나도 자네들 말에 어느 정도는 다 동의 하네. 천재 수학자란 덱 와일즈가 직접 증명한 것이고, 그걸 아들대까지 지켜온 것이라면 그 자체로서의 가치는 인정해줄만 하네. 다만, 300만까지는 동의할 수 없네. 레드. 마찬가지로 이건 팔리기도 전에 열어보아선 휴짓조각이나 마찬가지니 블랙, 등록을 반대하거나 개봉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네. 자,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어차피 제임스가 초기 희망했던 입찰가가 3만이고, 증액 최저선도 겨우 천 달러에 불과하니 5만에 매입을 하는 거지. 이 정도면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등록을 무시해버릴 만큼의 작은 장난감도 아니지 않나?"

레드와 블랙은 모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거나 새 품목의 가치 결정이란 전당의 본질적 목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중재자인 제로의 의견이 모두의 의견을 조금씩 반영하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둘 다 동의했다.

"자, 결정났군. 오랜만에 정한 새로운 품목, 마지막 증명의 가치는 5만달러네. 단, 내가 매입할 걸세. 나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군. 그 안에 뭘 써놨길래 천재 수학자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공표하고, 감춰둔건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봉하도록 하지. 그럼 다같이 점심을 드세. 배에서 요동을 치는군."


**


결정으로부터 나흘 뒤, 그 사이 4번가 옥션은 무사히 진행되었고 제임스는 결정된 대로 5만 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마지막 증명을 담은 검은 상자는 구입한 러시안 요원의 손에 극비리에 운반되어, 결국 제로의 책상 위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날의 유가는 전날과 변함없이 결정되었고, 에스큐라는 허위 주식건에 대한 처벌 항목이 정해졌다. 그 외에 사소한 건들을 수도 없이 처리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상자는 점심을 먹은 뒤에 세 노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제로가 직접 개봉할 예정이었다. 제로는 미리 의뢰하여 상자를 열 특수 장치까지 회의실 안으로 들여놓은 상태였다.

그 시간, 증권에 관한 항목을 담은 노란 봉투를 들고 전당 내부를 오가던 더글라스는 다음주 휴일에 만날 애니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애니는 그보다 4살 더 많았지만 여전히 매력있고 탄력적인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발에다 지적이고, 웃을 때 한 쪽 보조개가 들어가는 그 여자를 누가 유부녀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글라스는 잠시 엇갈렸던 운명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애니의 이혼 소송은 다음주 정상적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한번도 보진 않았지만 애니의 입을 통해 들어왔던 그 빌어먹을 남편은 파산 위기와 우울증을 무기로 재판장에 서는 걸 계속 미뤄왔던 차였다.

"이봐, 더글라스. 아랫층에 택배 와있어. 애니란 여자한테서 왔던걸?"

맙소사. 이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여자다. 전당의 특성상 모든 것은 비밀로 되어 있다. 전당은 일반인들이 보면, 그저 평범한 사무실로 보여질 것이다. 그것도 아주 낡은 5층짜리 건물로, 세금 조사원이나 배관공도 오길 꺼려할 지경이다. 그래서 어디서 일하는지 궁금하다던 애니를 회사가 좋지 않아 부끄럽다는 말로 달래놓았더니 이렇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더글라스는 노란 봉투를 3층 전보원에게 전달하고 날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가 자신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작은 카드에, -더글라스 씨에게 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상자 개봉을 아껴두고 싶었지만, 주위 동료들이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개봉을 종용하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못이긴 척 상자를 열었다.



**


사람들은 아침에 배달되는 우유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 빵과 계란으로 식사를 떼운 다음,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를 타거나 일일권을 끊어 지하철을 타고 직장으로 출근한다. 평균 8시간의 근무시간이 끝나면 아침의 역순으로 집으로 되돌아와 꿈같은 잠을 자며 내일을 맞이한다. 언제나 똑같은 하루, 다만 가끔 특별한 사건들이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 신문이나 뉴스를 타고 오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윌리엄 모리스 빌딩 붕괴 사건은 폭탄 테러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경찰 발표가 나왔습니다. 폭발음을 들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더불어 붕괴된 상층부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 상자를 발견한 경찰은 폭탄 테러의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현재 폭발물 처리반이 투입되었으며 상자에 난 하나의 구멍에 뇌관을 삽입했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지만 정밀 조사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사태를 테러가 아닌 안전 불감증이 부른 인재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폭탄을 사용한 것은 맞지만 폭발 자체의 위력보다는 건물이 낡아서 연쇄반응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 빌딩은 세워진 지 130년이 넘은 건물로 보수 공사가 예정 중 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여러 차례 공사가 미루어져왔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초 붕괴지로 목격된 2층과, 폭발물로 지목된 검은 상자가 발견된 위치가 다르며, 빌딩이 파괴된 형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4만에서 5만달러의 비용만으로도 충분히 노후화된 빌딩의 구조 기둥 정도는 파괴할 폭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이런 기사를 읽은 누구도 자신의 노후화된 빌딩의 구조 기둥에 대해서, 혹시나 설치될지 모르는 5만달러치 사제 폭탄에 대해서도 걱정하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밖에서 일어난 일일 뿐. 다들 오늘 하루를 또 다시 시작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또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증명되는 가치는 결국 살아남은 자들 뿐이다.

  
끝.

-징고. (space_d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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