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유물(Artifacts)

2011.10.11 00:0910.11

찌는 듯한 더위. 오후의 햇살. 한여름의 열기.
누가 들으면 여름 바다 축제의 슬로건 같다고 하겠지만, 이게 지금의 우리가 대처한 현상이다. 원래는 1년 만에 끝날 계획이었지만 여기서 여름을 두 번이나 지낼 줄은 몰랐다.
빰빠빰빰~빰빠빰~빰빠빰빰~빰빠빰.빰.빰.
어데선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음 직한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그 유명한 테마.
소장은 삽질이 끝나면 으레 그 음악을 흥얼거리며 들어오곤 했다. 며칠 전까진 휘파람으로 하더니만 인제는 아예 ‘빰빠밤’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무장화에 삽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만사 편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오늘도 허탕이지?”
“네.”
“응. 알았어.”
여름의 발굴은 고역인데도 그는 하나 지친 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반복되는 고단함과 지루함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여기에 유적 발굴 사무소가 차려진 지도 얼추 2년.
처음엔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재개발 지역에 불과했지만, 공사 중에 100여 년 전의 생활용품들이 쏟아져 나오자 매스컴과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물건이라, 우리 같은 풍속고고학자들에겐 왕관이나 금붙이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거기에 옛날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수집가들까지 붙어 한때 이 곳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처음 3개월 이후 지지부진. 얼마 전부터는 정부의 예산 지원마저 끊겨 이제 이 가건물에는 나와 소장밖에 없다.
“기쁜 소식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올 여름 지나면 여기서 완전히 철수할거야.”
“네?”
드디어 여기서 벗어나는 건가?
“’네.’는 무슨. 방금 문화재청에서 연락받았어. 더 이상 발굴할 게 없다고 판단되니 이번 달 말까지 정리하라는군.”
“그렇군요.”
발굴중지라…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이 후덥지근하고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는 곳을 벗어나는 것은 좋지만, 사실 발굴이 중지되면 난 돌아갈 곳이 없다.
“이거 끝나고 어디 갈 데는 있어?”
소장이 바로 내 마음을 알아 맞췄다.
“특별히는 없어요.”
“그래? 내가 잘 나가면 도와 주고 싶은데 말야. 나도 거의 시간강사 수준이라…”
그러고 보니 소장은 여기 오기 전에 지방 모 대학에서 고고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귀중품을 발굴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명성은 없다고 했다. 잘해봐야 경매장에서 진품을 가리거나 집안의 가보를 감정하는 정도. 가끔 아르바이트하러 인사동에도 나간다고 했으니, 나보다 별반 나은 것도 없다. 고정 수익이 있는 건 확실히 나보다 낫지만.
“사실 왕궁이나 사찰도 아니고, 이런 평범한 옛날 집터를 2년 가까이 팠다는 게 이해가 안되긴 하지. 내 생각엔 문화재청에서 우릴 잠깐 잊었던 거 같애.”
소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6개월 전에 우리를 제외한 마지막 한 명이 나간 뒤론 변화가 없었다. 나는 발굴인부와 학자들, 기자들로 붐비었던 그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밥통을 열고 밥을 푸었다. 냉장고를 열어 몇 개의 밑반찬도 꺼냈다. 한때 밥차가 와서 뷔페를 먹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쌀밥에 쉬어꼬부라진 김치가 호강이고, 시장이 반찬이다.
소장은 밥풀 한 알까지 싹싹 긁어 먹더니, 피곤한 듯 이내 곯아 떨어졌다.
아열대 날씨로 바뀌어, 낮에는 30도를 웃돌고 밤이 되도 기온이 잘 내려가지 않아 열대야가 반복되고 있다. 습도도 사우나처럼 높다. 하루 종일 그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더위에 뚱뚱한 몸을 이끌고 돌아다니느라 꽤 지쳤을 것이다.
발굴을 그만두게 되면 난 뭘 하고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늘은 밤인데도 구름이 꾸역꾸역 끼어 있어 한 점 별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내일 문화재청에서 최종 승인을 하러 직원이 온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저런 조사를 한 후, 최종 사망 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런 뒤 이런저런 계약서를 쓰고 이번 달 월급을 소급으로 지급받고 짐 붙이면 끝이다.
‘후우-‘
개인 사정으로 다니던 대학 고고학과를 1년만에 중퇴하고 이 일 저 일하다가, 전공도 살리고 돈도 벌겸해서 한 일이었는데 이렇게나 오래할 줄은 몰랐다. 다만 여기 와서 깨달은 거라곤 이론과 실전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앉아 있을 때는 슐레이만(트로이 유물의 발견자)이 된 기분이었지만 실상은 땅강아지였다. 학교에서 배웠던 게 여기 나올 리가 없었다.
‘후우-‘
다시 힘껏 내뿜은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밤바람에 연기가 점점 엷어지더니 결국엔 어디론가로 흡수되었다. 난 그게 신기하여 계속 연기를 내뿜으며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무렵 저 멀리 담배연기가 흩어진 곳 뒤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게 보였다. 첨엔 그냥 잘못 본거라 생각했지만, 분명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담뱃불을 끄고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거…이거…”
걸어간 그곳엔 뭔가가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별빛인지 달빛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반사하여 영롱한 푸른빛을 띠고 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야전삽을 가져올 생각도 못하고, 맨손으로 그 물건이 있는 곳을 파헤쳤다. 누가 봤다면 그건 영락없이 뼈를 땅에 묻고 있는 개의 모양이었다.
들고 오니 전체적으로 마치 소라처럼 생겼다.
소라 고둥 모양이긴 헌데, 언뜻 보면 드릴 같기도 하고, 광선총 같기도 하였다. 거기에 안쪽에 여러 기계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데, 예전에는 투명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을 것이다.
그냥 단순한 쓰레기일까? 근데 쓰레기 무단 투기하러 이 변두리까지 오는 할 일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다. 잡초만 무성한 변두리 재개발지역에다가 볼 거라곤 하나 없는 지역이다. 나 역시도 가끔 식료품 사러 나갈 때 빼고는 사람과의 접촉이 일절 없었다. 역시 소장 말대로 문화재청에서 우릴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해.
내일 탄소 연대 측정을 해보면 뭔가 알 수 있을까?

아침밥을 목구녕에 넘기기도 전에 우리의 숨통을 끊으러 문화재청 직원이 찾아왔다.
탁상발림에 지친 늙수구레한 할배가 올 거라는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말꼼하게 차려 입은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문화재청 김소경 사무관이라 소개했는데, 예쁘장한 얼굴에 검정색 치마정장을 입고, 샤프한 금테안경을 쓴 도도한 커리어 우먼 스타일이었다. 키도 늘씬하고 몸매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곤 그녀에게 이렇게 감탄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곳의 철수를 위해 온 것이다. 밥 먹다가 짜증내며 나간 소장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장은 그녀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서류를 내밀자, 갑자기 소장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소장을 더 몰아세우며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을 요구했다. 사실 소장은 문화재청의 쥐꼬리만한 지원금을 착복하고 있었다.-그는 그냥 제삿밥에 숟가락만 얹은 거라고 했지만. 언젠가 이렇게 호되게 당할 줄 알았다.
식사를 마치고 난 그 쪽 상황이야 어찌됐든, 탄소 연대 측정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탄소 연대 측정이란 고고학에서 흔히 쓰이는 연도(年度)감정기법으로 14가-탄소(C14)의 양이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성질을 이용하여 물질에 남아있는 탄소의 양을 측정하여 해당 물질의 수령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명색이 고고학자가 될 거라면 이 정도는 읊을 수 있어야지…
창고 안은 그야말로 잡동사니 투성이라 어디부터 손을 대야 될 지 몰랐다. 찌그러진 냄비, 진흙이 말라붙은 삽과 녹슨 곡괭이들, 곰팡이 핀 서류에 소장의 낡은 옷가지. 언젠가 청소해야지 하다가 차일피일 미룬 덕분에 이 지경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도 청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쫑 나는 날에 업체 불러다가 다 갖다 버릴 거다.
“여깄다.”
하지만 탄소 연대 측정기는 창고 안의 귀족인 덕분에 예전에 한 쪽에 잘 챙겨 놓은 지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난 박스의 먼지만 대충 털어낸 후, 사무실로 들어가 기계를 작동시켰다. 고가의 정밀기계가 아직 팽팽하게 돌아가서 천만 다행이었다.
소장은 아직도 문화재청 여자와 실랑이 중이었다. 그가 원래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소장이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날 슬쩍 쳐다봤지만,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해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유물을 들고 사무실로 왔다.
탄소 연대 측정을 하려면 샘플을 조금 떼어다가 기계에 넣어야 한다. 난 조심조심 유물에서 샘플을 조금 잘라내 기기에 넣고, 설명서를 보고 기기를 작동시켰다. 기기가 동작하는 동안 난 맞게 동작시켰는지 설명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건 뭐죠?”
갑자기 알싸한 향기가 나서 옆을 돌아보니 어느 새 문화재청 여자가 내 옆에 와서 작동하고 있는 탄소측정기에 대해 물었다. 잠시 쉬는 시간인 것 같았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난 화들짝 놀랐지만 애송이처럼 보이기 싫어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음. 이건 탄소 연대 측정기라는 건데. 탄소14의 반감기를 이용하여 발굴된 유물이 어느 정도 된 건지 알 수 있는 거랍니다.“
아무리 문화재청에서 일한다 해도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면 이런 기계에 대해서는 모를 수 있다. 이 정도면 일반인 대상으로 쉽게 설명한 것 같아 나름 만족했지만, 여자는 내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제 갈 길로 가버렸다.
“아니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을텐데…”
여자가 창고로 가자 소장이 쩔쩔매었다. 어차피 인과응보(因果應報)다.
그 때 지직-지직-하더니 기기에 연결해 놓은 낡은 프린터에서 분석 결과가 주욱하고 뽑아져 나왔다.
나는 그 결과를 보고,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료A의 측정연대범위는 150~186년 입니다.

이럴 수가. 이 본적도 없는 물건이 이리 오래되었다니.
무려 150여년 전. 그 당시에 이런 획기적인 디자인을 했을 리가 없다.
소라 모양 아니 더 유식하게 말하자면 프랙탈 곡선을 닮은 나선형 곡선의 틀에, 정밀하고 촘촘한 내부의 톱니바퀴 같은 아주 작은 부품들과 알 수 없는 형체의 전자부품처럼 생긴 것들이 꽉 짜여 있어 금방이라도 재깍재깍 돌아갈 거만 같은 기계. 상식적으로 봐도 이러한 복잡한 곡선의 형체와 지금도 만들기 어려운 부품들을 그 시대에 만들어냈을 리가 없다. 여기는 풍속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이다. 나올 거면 옷가지나 신발이나 옷가지, 빗자루 같은 것들이 나와야 된다. 왜 우리가 흔히 TV진품명품 프로나 박물관 한 켠의 ‘우리 조상의 삶은 어땠을까?’ 같은 데서 보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근데,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정체가 뭐란 말인가?
다시 기계를 작동시켜 보았지만 결과는 비슷하게 나왔다. 이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난 창고에 있는 소장에게 달려갔다.
“소장님! 이거요. 이거! 이거. 150년도 더 된 거예요!”
“뭐라고? 정말이야?”
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뭔가요?”
“아, 어제 발견된 것이라오. 이것 보라구. 아직 발굴을 접기엔 이르다니깐 그러네!”
“소장님. 지금 제가 말하는 문제랑 이거랑은 별개 같은데요?”
“그래? 조사 결과를 자세히 볼 수 있을까? 같이 가보세”
소장이 그녀에게서 벗어날 건수를 잡았는지 얼른 사무실로 향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할 찰나에 구세주를 만난 기분일 것이다. 결국 문화재청 여자도 별 수 없다는 듯 우릴 따라왔다.
난 사무실에 들어가 탄소 측정 결과를 보여주었다. 소장은 결과를 보더니 기술적인 항목 몇 가지를 물었다. 나의 대답에 그는 털이 덥수룩한 그의 두툼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소장에게 뭔가를 얘기하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자꾸 제 논점을 피하시는데. 계속 그러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문화재청 여자가 소리쳤다. 오우. 아가씨 성질 있다. 난 이런 당당한 여자가 좋다. 거기다 복장도 정장이라 맘에 든다. 젠장. 여자를 1년 넘게 못 보더니 내가 미쳤나 보다.
“이…이건!”
소장이 외쳤다.
“틀림없이 오파츠야!”
“오파츠?”
“음…말하자면 인디아나존스4에 나오는 수정해골 같은거지.”
“그 영화를 못 봐서 모르겠네요.”
고고학자들의 성서와도 같은 인디아나존스를 못 봤다고? 내 생각에 그녀는 처음부터 고고학 이런 데는 관심 없었고, 그냥 공무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딱히 갈 데가 없어서 문화재청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아무튼…… 이게 특별하다는 거요.”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내 얘기는 이 물건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발굴현장철수를 유보해 달란 말이요.”
“며칠이나 걸리는 데요?”
그녀는 그런 거 관심 없다는 듯 사무적으로 대꾸하였다.
“결과는 본청에서만 알 수 있지. 택배로 보내면 일주일 정도? 제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특송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간이 더 걸리지요.”
“내가 직접 가지고 가면?”
“3일 정도면 되겠죠.”
“좋아요. 그럼 내가 이 물건을 갖고 본청에 가서 조사한 결과를 들고 올게요. 3일 후에. 이게 어떤 물건인지 결과가 나오는 걸 봐서 이 곳의 철수를 결정하도록 하죠. 다만 지원금 문제에 대해서는 소장님께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셔야 될 겁니다. 횡령이 밝혀지게 되면 저도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엔 없겠군요.”
우리는 그녀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나는 샘플을 몇 개 채취한 후, 사진도 찍었다. 그런 다음 그녀가 본청에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천에 싸서 이를 택배상자에 집어넣었다 파손되지 않도록 뽁뽁이로 한 번 더 포장하고, 스티로폼도 많이 채워 넣었다. 그런 다음 그녀에게 그것을 전해주자, 그녀는 차에 올라 흙먼지를 날리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휴, 다행이야. 자네 아니 그 물건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소장이 늘어진 턱살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근데 말야. 자네 나 좀 도와줄 생각 없는가?”
“지원금 문제요?”
“그래.”
유물발견과 별개로 그는 남은 3일 동안 지원금에 대해 장부를 맞춰놓아야 할 것이다. 소장도 그냥 철수문제만 얘기할 줄 알았는데, 돈 문제까지 걸고 넘어져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아까 보니 얼굴도 시뻘겋던데.
“그거 나보고 다 하라는 건 사양합니다.”
만일 그랬다간 난 모든 걸 말할 생각이다.
“그래… 그럼 우리 협상을 하는 건 어때? 자네가 날 도와주면, 그럼 내가 대학에 좋은 자리 하나 알아봄세.”
나로서는 거절할 필요 없는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발굴이 끝나면 할 일이 막막하던 차였다.
“그걸 어떻게 믿죠?”
“내가 각서 하나 써줌세. 그래도 못 믿겠으면 나중에 자네가 각서에 변호사 공증받아서 내게 찾아오게.”
군말 없이 난 소장과 악수를 했다.

이제 발굴은 집어치웠다. 소장은 그 동안 받은 돈에 대한 통장과 영수증꾸러미를 잔뜩 가지고 와 장부와 맞춰보았다. 받은 돈과 쓰인 돈을 맞춰서 비는 돈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거 사회 생활하면서 한 번쯤 해보는 거다.
작업은 월별 소득을 계산하여 이를 총 지출액과 맞추어 계산하고 다시 장부와 맞추어 본다. 모자라거나 남을 경우 이에 대한 내역을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대충 그런 식이었다. 문화재청 김소경씨가 장부의 앞부분 몇 장만 샘플로 보았지 뒷부분은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녀가 체크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라도 맞춰놓자는 취지였다. 소장은 아까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3일 뒤에 어떻게 얘기할 지 미리 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는 것 보다는 나았지만, 이것도 꽤나 머리 아픈 일이었다.
일과 시간이 끝난 후에는 난 나름대로 그 물건에 대해 연구해보았다. 소장이 시킨 건 아니고,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보내기 전에 샘플을 몇 개 채취했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는 나도 나름의 연구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허나 아무리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도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과연 이런 게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그럼 이런 물건을 왜?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일까?
흡사 생긴 건 무슨 총처럼 생기긴 했는데… 어쩌면 이것은 외계인이 이 곳을 방문했다 흘리고 간 무기일지도 모른다.
‘너무 허황된 얘긴가?’ 나는 큭-하고 웃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전부 동원하여 오파츠에 대해 찾아보았다.

Out Of Place Artifacts. 줄여서 오파츠(OOPARTS)란 고고학이나 고생물학 등에서 그 시대에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유물을 말한다.
남미 콜롬비아의 기원전 800년경의 시누문명의 유적에서 길이 6cm정도의 황금세공품이 발견되었다. 동물학자인 이반 샌더슨 박사는 이 황금세공품에서 기계적인 속성을 처음 언급하였는데 이 세공품에는 삼각주날개와 수평꼬리날개, 수직꼬리날개가 있고 풍향계, 조종석, 공기 흡입구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흡사 오늘날의 비행기 모양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 후 뉴욕항공연구소의 아서 포이슬리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이 모형은 항공역학의 이론대로 만들어진 델타날개의 로켓식 스페이스 셔틀의 모형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 그리스 부근해역에서 침몰한 로마시대 선박에서 이상한 톱니바퀴로 이뤄진 기계가 발견되었다. 이를 발굴 장소의 이름을 따서 안티키테라 기계(Antikythera Mechanism)라 했는데, 이를 면밀히 조사한 캠브리지 대학의 프라이스 교수는 이 기계가 자동회전식 천구의(天球儀)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기계는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의 상대 위치와 시간을 아주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톱니바퀴를 이용한 자동기어 매커니즘은 1575년에 처음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금 도금 항아리가 조사해보니 전기 도금이 되었다는 거나, 채석장에서 잘라낸 돌 안에 못이 들어 있었는데, 그 돌은 다이아몬드 커터로 밖에 잘라낼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경점토 층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 6,000만년이나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파츠가 사진이나 기사밖에 그 증거가 없거나, 아니면 사기인 것들도 많아서 고고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소장의 말대로 이 물건이 오파츠라면 아무리 연도를 헤아려봐도 당시에 이런 물건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다. 시대와 맞지 않는 진보된 디자인만을 보더라도 분명 맞지 않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물건에 대한 나름 멋진 가설을 세워 보았다. 사진을 보고 샘플을 다시 확인하고 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고고학자다운 일을 하고 있었다.

가설1.
이 물건은 과거의 사람이 외계의 이성인(理性人)과 만난 증거이다. 즉, 과거에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이 실험도구로 쓰기 위해 사람들을 납치하다가, 그들의 무기 혹은 부품을 떨어뜨리고 간 것.

가설2.
이 물건은 초고대(超古代)문명의 산실이다. 고대 아틀란티스나 무우 대륙은 지금보다 더 눈부신 과학기술을 이룩했다고 한다. 과거의 어떤 사람이 이를 발견하여 이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고 집에 숨겼다가 오늘에서야 발견된 것이다.

가설3.
이 물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괴짜가 시대를 초월하여 만든 발명품이다. 다빈치는 15세기에 이미 헬리콥터와 비행기, 대포 등을 스케치하였다. 헤론은 2세기에 초기 형태의 증기기관을 발명하였다. 이 역시도 그와 같은 사례이다.

소장에게 이런 견해를 말했다간 괜히 음모론자나 미친놈 취급 당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고고학은 진실의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답을 모르겠다. 차라리 음모론이 낫겠다. 불확실한 건 그냥 불확실한 채로 놔두는 게 좋은 걸 수도 있다.
소장은 잠시 마실 간다고 밖으로 나갔다. 난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대충 청소를 한 다음, 세면을 한 후, 잠자리에 들려고 하였다.
그 때 소장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으허어어! 나 봤어! 봤어!”
갑자기 달려온 그의 뚱뚱한 얼굴은 땀에 범벅이 되어 마치 육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뭘 보셨는데요?”
“몰라! 자네가 담배 피던 쪽에서 봤어. 그 유물을 발굴한 곳에서 말야!”
난 소장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뛰어 나가 소장이 뛰어 왔던 곳에 플래시를 비추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요?”
“아. 분명 뭔가 봤다구. 내가 여기 2년 넘게 있었는데…그런 건 처음이었어!”
소장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진짜로 뭔가를 보았나 보다.
“산책을 하다가 저 쪽 풀숲에 뭔가 희끄무레한 게 보이길래. 궁금해서 그리로 다가가 봤더니만 아 글쎄 웬 꼬마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꼬마야 뭐하니’하고 어깨에 손을 얻는 순간 그만… 손이 그 아이 몸을 관통해서 쑥 들어 갔다구.”
난 처음엔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순간 온 몸이 오싹해졌다. 소장은 뚱뚱한 몸으로 자신이 풀섶에 이렇게 자빠져버렸다고 리얼하게 액션까지 취해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자기도 처음에 이해가 안되었는데 상황이 인식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고 했다. 그가 소름에 겨워 온 몸으로 얘기하는 게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웠지만 여기서 웃었다간 그의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희끄무레 한 게 웅크리고 있었어… 희끄무레한 게…”
소장은 숙소로 들어오더니 희끄무레하단 말만 되뇌이며 이불 속으로 푹 들어갔다.
나 역시도 소장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소장은 어제 헛것을 보고 나서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했다.
소장과 내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이상하게 생긴 회색 외계인들이 나타나(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미지일거다. 눈 크고 키 작은. 전문용어로는 그레이 외계인이라 한다.) 자신과 나를 납치해 가려 했다고 한다. 나와 소장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고, 그들은 이상한 무기를 들고 쫓아왔는데, 내가 먼저 그들의 무기에 맞아 직화구이가 되고(!), 결국 소장도 도망가다가 그들의 광선총에 맞았는데, 순식간에 타면서 잠에서 깼다고 한다.
“버라이어티 하군요.”
“문제는 그 광선총이란 게 그 유물이랑 똑같이 생겼었어.”
“어제 일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난 일부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여길 빨리 정리하고 떠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가 가장 빨리 떠나는 방법은 따로 있는데, 바로 그의 횡령이 밝혀지는 것. 헌데 그건 그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 유물이 진품으로 판명될 경우엔 우린 다시 여기 머물지도 모른다.
우리가 발견한 게 진짜로 오파츠라면?
그렇다면 2년 전보다 더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시대를 초월한 유물의 발견! 그것이 오래된 것이라 공식적으로 입증된다면 나도 더 이상 소장에게 발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국제적인 명성을 쌓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가십거리나 칼럼이나 신문기사의 한 귀퉁이는 차지할 것이고, 각 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것이며, 호사가들이나 음모론자들은 이 물건을 얻기 위해 안달이 날 것이다. 소더비 같은 경매장에 팔면 몇 만 달러 받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이 물건이 인류의 감춰져 있던 새로운 역사를 밝히는 거라면 우리는 그 문을 연 선구자로 인정될 것이며 인류 역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을 것이다.
소장이 어떻든, 이 발굴지가 어떻든. 난 수능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우리의 발굴은 그 이상한 물건으로 인해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나의 생각도 정상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효. 요새 문화재청에 시달리더니 별 거지 같은 꿈을 다 꾸게 되네!”
소장이 찬물에 어푸어푸하며 세수를 하였다.

멀리서 흙먼지가 날리며 그녀의 차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늘은 편한 차림으로 오셨군요.”
청바지 차림으로 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일부러 친한 척을 해봤지만 역시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준비되셨죠?”
그녀가 서류 뭉치를 내밀자, 소장은 자신 있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디서 준비해 온 형광펜으로 줄까지 쳐가며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우뚱하다가, 소장을 다그치다가 하였다.
소장이야 어찌되든 난 유물에 대한 본청의 결과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정말로 오파츠인걸까?
하지만 소장도 그녀도 일단 자금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난 그들의 일(정확히 말하자면 소장의 변명)이 끝날 때까지 꾹 참고 있었다.
“좋습니다. 뭔가 석연치는 않지만.”
“그럼 이제 된 건가요?”
“네.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이제 여기다 서명만 하시면, 발굴지에서 철수하셔도 됩니다.”
“잠깐만요!” 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제가 발견한 유물은 어찌 된 거죠?”
소장이 그러지 말라는 듯 나를 쳐다보며 불독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야죠!”
‘그거 아무것도 아니래. 우리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돼!’
소장이 내게 다가와 귀엣말을 하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뇨? 오파츠네 뭐네 할 땐 언제고?”
‘그..그게 말이지. 사실은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그냥 했던 말인데....저 여자 가고 다 말해 줄게.’
소장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거 150년이나 된 거 라구요.” 난 소장을 쳐다봤다.
“소장님. 조수가 꽤 순진하네요. 그거 소장님이 상황 벗어나려고 대충 둘러댄 거 아닌가요? 그렇죠?”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알죠?”
“시간을 준 건 이 발굴지가 문화재청에서도 골치덩어리라 일부러 여기 서류들을 정리할 시간을 준 거예요. 나도 여기 자료들 그대로 보고해야 되니까.”
소장도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죠? 뭔지도 모른 채 그런 말을 들으니 황당하네요.”
“정말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소장님! 유자격자 쓰고 있는 거 맞아요?”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난 화가 났다.
“뭐라구요?”
“아니…진짜 그것도 몰라요? 그렇다면 당신은 풍속고고학자로선 자격이 없군요.”
나는 그녀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거…. 그냥 애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에요.”
난 소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파워레인져 라이징포스’라고 예전에 한참 유명했던 어린이 프로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라구요. 가끔 이베이에 올라오는… 방아쇠 당기면 소리 나는 남.아.용.장.난.감.”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분명 범상치 않게 생긴 물건이었다. 프렉탈 곡선형의 외관에 안에는 여러 정밀부품들이 어지럽게 묶여있다. 하이테크놀러지와 오버사이언스. 외계의 이성인의 비밀무기일지도, 아틀란티스의 산물일지도, 괴짜 천재의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고고학의 쾌거다.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위대한 발견이다.
“저런 건 너무 흔하게 발견되서 유물취급에도 못 끼는 거에요.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면 이런 게 문제라니까! 도무지 실전에 약해!”

그녀는 내게 유물을 건네주더니 내 손을 맞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삐요옹~ 삐요삐요~ 빠앙빠앙~ 삑삑삑삑~”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서기 2150년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앤디리
댓글 1
  • No Profile
    체 킴 11.10.11 11:19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봤습니다. twist가 있었군요.. @@
    인디아나존스4는 좀 과한 설정이 아닌가 시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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