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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령선

2013.04.03 19:3304.03

아무리 생각해봐도 캐시는 자신이 이 우주여객선에 타게 된 것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 성계 알파 픽사 출신인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1년간 일해서 번 3000위랑의 돈과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리고 별 도움 안 되는 고고학 지식뿐이었다. 그녀는 알파 픽사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물론 그마저도 2년 하다가 때려 쳤지만.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그녀에게 연합 최고의 우주여객선인 아키반호에 탑승하게 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순전히 기막힌 행운 때문이었다.

 

그녀는 열흘 전 알파 픽사III 회의 지구의 자신이 좋아하던 커피숍에서 어느 날처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출근하기 전에 거의 매일같이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은 뭔가 달랐다. 무척 세련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커피숍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캐시와 나이가 비슷해보였고, 말끔한 옷차림새는 분명 전문직 남성이거나 무슨 부잣집 자제인 것 같았다.

 

그녀가 어울리던 사람들과는 한참 동떨어져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매정하게 커피숍을 나섰고, 캐시는 그가 무언가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뒤늦게 남자가 흘린 것을 돌려주기 위해 나섰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캐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연합 최대의 우주여객선 아키반 호의 탑승 티켓을 보았다. 출발 예정 시각은 다음날 12, 탑승 장소는 알파 픽사III 정거장이었고 특급 객실에 1인숙이었다.

 

그녀는 그 티켓을 손에 넣자 대담한 결정을 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짐을 챙겨 알파 픽사III 정거장으로 향하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알파 픽사III 정거장에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알파 픽사 성계의 다른 행성과 위성, 그리고 정거장을 방문하기 위해 알파 픽사III 우주 정거장을 수차례 이용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태어나 이때까지 알파 픽사계를 벗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는 탑승 수속을 밟으며 호화 여객선 아키반 호를 보았다. 정거장 갑판에서 강화 유리창을 통해 본 아키반 호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아하고 웅장했다. 플랫폼에서 나눠준 소책자에는 아키반 호의 모습과 제원, 역사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연합 최대의 우주 여객선, 아키반

 

 

태어난 그렇게 큰 배는 처음이었다. 물론 항성간 우주선이나 화물선은 많이 보았으나, 관광 산업이 산업 기반의 대부분인 이런 낙후한 항성계에 대형 우주선이 입항할리 만무했다. 책자를 보니 사실 아키반이 정박한 것도 이벤트성 상품 때문이었다.

 

우려와 달리 그녀는 탑승 수속을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티켓 분실을 신고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어쩌면 돈이 너무 많아 아키반 호의 탑승권 정도는 별 것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키반 호는 곧 정거장에서 분리되었다. 캐시는 승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객실로 향했다. 기다란 통로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지나 자신의 방에 도착한 캐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방은 우주선의 꼭대기 층이었다. 커다란 스위트 룸은 화장실과 욕실, 그리고 부엌이 딸린 구조였고 놀랍게도 앙상한 뼈대를 제외한 외벽 전체가 투명했다. 그녀는 투명 천장을 통해 멀어져가는 자신의 고향 행성 알파 픽사III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시야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 차지한 알파 픽사III는 캐시가 자신의 방에 감탄하고 집기를 둘러보면서 30분쯤 시간을 보내자 농구공만한 크기로 작아졌다.

 

캐시는 방 내부 컴퓨터에서 오래된 지구 노래를 찾아 듣느라 열중하고 있었다. 컴퓨터조차 그녀가 이때까지 만져본 그 어떤 프로세서보다 빨랐다. 거의 1000억 곡에 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데 2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노래 듣기에 흥미를 잃은 그녀는 이제 룸서비스 목록을 펼쳐놓고 가능한 것들을 살폈다. 물론 그녀의 주머니 사정으로 봤을 땐 그림의 떡이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황홀해졌다.

 

그사이 알파 픽사III의 크기는 추구공, 야구공을 지나 탁구공만한 수준으로 작아졌다. 책자대로라면 곧 네거티브 드라이브(Negative Drive)의 시동을 알리는 선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사랑하는 승객 여러분, 잠시 후 13:30분에 본 우주여객선 아키반 호는 네거티브 드라이브를 시동하여 광속을 초월할 예정입니다. 네거티브 드라이브가 시동되면 약간의 진입 충격이 있을 수 있으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세를 낮추거나 단단한 물건을 붙잡아 낙상의 위험을 예방하시기 바랍니다. 본 여객선은 1440분까지 광속의 1890배인 네거티브11까지 가속하여 열흘 뒤인 2412시까지 뉴 서울 태양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예정된 도착 시각은 여객선의 사정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여행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로 컴퓨터 모니터의 구석진 곳에서 카운트다운 프로그램이 나타나더니 10분에서 점차 내려갔다.

 

캐시는 고급 안락 의자에 앉아 자꾸만 멀어져가는 알파 픽사III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베토벤의 운명이 웅장한 음색을 자랑하며 거대한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왔다.

 

[네거티브 드라이브 시동까지 5분 남았습니다.]

 

캐시는 잠시 눈을 감고 쉼호흡을 했다. 어느새 알파 픽샤III는 더 작아져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알파 픽사III의 모습이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행성과는 영영 작별이다......’

 

그녀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인생을 장식했던 작은 행성 알파 픽사III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 행성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아키반 호를 타고 긴 우주 여행을 끝마친 다음에는 태양계에 정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작정이었다.

 

[네거티브 드라이브 시동까지 1분 남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캐시는 자신이 어떻게 하여 돈을 모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범법적인 방법이 그녀의 머리를 차지했다. 사실 지금까지 그녀가 고수한 양심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가난뱅이를 벗어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녀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돈 모으기는 더 힘들었다.

 

[네거티브 드라이브 시동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될대로 되라지......”

 

그녀는 혼잣말을 뱉으며 알파 픽사III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10초 밖에는 눈에 담지 못할 그녀의 고향이었다. 빌어먹을 기억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고향이었다.

 

[네거티브 드라이브 시동까지 5초 남았습니다.]

[4.]

[3.]

[2.]

[1.]

[시동합니다.]

 

단정한 음색의 안내방송과 함께 아키반 호는 광속을 초월해 가속을 시작했다. 움찔하는 충격이 분명하지만 불쾌하지는 않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알파 픽사III는 작은 점으로 변하더니 조금 뒤에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속도: 네거티브 단위 3.0

6.2 광속

 

네거티브 단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광속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캐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동문을 열었다. 지도를 끼고 통로를 따라 바(Bar)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출항의 설렘에 객실에서 나와 오가는 것이 보였다. 캐시도 덩달한 설렌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바에서는 낭만적인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름 모를 악단은 The Nature Boy를 가사 없는 버전으로 연주하고 있었고, 아찔한 붉은 빛의 조명은 그들에게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재즈바는 캐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게 유도했다.

 

그녀는 스툴 위에 앉아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모히토 하나 주세요.”

 

젊은 여성 바텐더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즉시 모히토 한잔을 만들어 내어놓았다. 캐시는 홀로 모히토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음악은 Waltz For Debby를 편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 이 숙녀분이 마시는 술 계산은 제가 하죠.”

 

그때였다. 왠 남자가 그녀의 옆으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캐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오른쪽 등 뒤에 선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놀랍도록 매끈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남자가 연상되었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근래에 멋진 남자를 만난 기억이 없는 지라 그 남자와 비교되는 것이 캐시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혼자 마시고 계시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일행은 없다고 봐야겠죠?”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동의를 구했다. 쉽게 보이면 안 되기에 캐시는 언짢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술 값이라 생각하고 말동무라도 되어 주시는 게 어때요?”

 

캐시는 냉랭하게 쏘아 붙였다.

 

제가 언제 술 사달라고 했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럼 그냥 당신 옆자리에 앉고 싶은데 괜찮은가요?

 

남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바램을 얘기했다. 캐시는 속으로는 환호했지만 겉으론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했다.

 

앉으세요.”

 

그러기 위해서 도도한 표정과 시선, 말투는 필수였다. 남자는 캐시의 옆자리에 앉으며 동시에 자기를 소개했다.

 

마크 레이놀즈라고 해요. 지구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지구 출신이라는 말에 마음이 혹한 캐시도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캐시 프리드먼이요. 알파 픽사에서 왔어요.”

 

그러나 남자는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알파 픽사 어디요?”

알파 픽사III.”

우와! 이런 우연의 일치가!”

 

캐시는 이 거대 우주선에서 알파 픽사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걸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를 시험하고자 했다.

 

알파 픽사III를 아세요?”

, 알다마다요.”

혹시 회의 섹터의 로칸티움에서 서로 본 적 없나요?"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소리예요? 로칸티움은 공업섹터에 있잖아요.”

 

캐시는 이 남자가 로칸티움의 위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캐시가 얘기해달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말하자면 길어요.”

얘기해봐요.”

 

그녀는 남자를 졸랐다. 몇 번의 재촉이 있은 뒤 그는 입을 열었다.

 

남자의 직업은 의사였다. 의대 졸업날, 남자가 인턴 과정을 하기 위해 배치 받은 곳은 다름 아닌 알파 픽사III의 우주정거장. 89명의 졸업생 중 단 한명만 배치 받는 바로 그 행성이었다. 최악의 격오지에서 근무하게 된 남자는 절망했다.

 

하지만 알파 픽사III에서 보낸 2년간 남자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남자가 느꼈던 어떤 감정과도 다른 무언가였다. 이제는 비록 달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캐시는 자신의 고향행성에서 근무했다는 남자의 말에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녀는 알파 픽사III에서 온 두 사람이 이 넓은 우주선에서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마크 레이놀즈. 올해로 31살이었다.

 

캐시와 마크는 빠르게 친해졌다. 둘은 혼자였고, 서로 이 커다란 함선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을 때, 아키반은 에정대로 뉴 서울 태양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뉴 서울 태양계의 5번째 행성 서울V에 내려가 여행을 즐겼다. 아키반은 다음날 재보급과 정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캐시는 마크와의 행복한 나날이 영원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마크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마크는 출신 성분도 달랐고, 사회적 위치는 물론이고 고향도 달랐다. 그녀와 마크는 공통분모라고는 거의 없는 관계였다. 캐시는 발붙일 어떤 곳도 없었고, 마크는 이 여행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할 번듯한 직장이 있었다.

마크는 캐시가 알파 픽사에서 성공한 상류층 여성이라고 알고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캐시는 그 점 때문에 마크를 만나면서 어딘가 불편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꾸준이 진전되었다.

 

목적지: 아르켄스크 태양계

현재 속도: 네거티브 단위 11.0

1731.2 광속

도착까지 [280]시간 [19][37]초 남았습니다.

 

아키반은 뉴 서울 태야계를 출발해 다음 목적지인 아르켄스크 태양계를 향해 항해 중이었다. 뉴 서울 태양계가 있는 은하계의 나선팔 지역과 아르켄스크 태양계가 있는 지구 부근 지역은 거의 60광년 정도 인류 거주 항성계가 없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우주선도 뜸해 유령 우주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더욱 오싹한 것은 몇 년에 한 번씩 근처를 순항하는 우주선이 실종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 근래 5년간은 그런 사건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물론 부근에 우주 해적이 있거나 실질적인 위협이 관측된 적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연합 범우주 방어군(United Inter-Space Defence Force, UDF)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키반은 음 에너지(Negative Energy)를 이용해 미끄러지듯이 우주를 나아갔다. 캐시는 마크와 아키반 내부의 테마 파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대한 놀이공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원의 내부는 다소 좁지만 알뜰하게 공간을 활용하여 기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기구에서 내려 도로를 걷고 있던 캐시는 강한 충격파를 느꼈다. 우주선이 네거티브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마크도 같은 충격을 느꼈다고 말했고, 둘은 투명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나가는 빛의 궤적을 눈으로 쫓으니 분명히 우주선은 훨씬 더 빨라졌다. 그리고 점점 더 가속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아키반이 급가속을 한 것 같은데요.”

 

캐시가 물었다. 마크는 부유층의 상징인 홀로그램 단말기를 꺼내어 아키반의 중앙 컴퓨터와 연결했다. 함선의 속도는 네거티브 단위 13, 광속으로는 7211.8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주 여객선의 순항 속도를 한참 벗어나는 수치였다.

 

마크는 아키반의 감지기 화면에서, 아키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미확인 접근체를 보았다. 그것과 아키반의 거리는 현재 3광분에 달했지만 서서히 그 간극이 좁혀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승객 여러분. 현재 저희 아키반 호는 미확인 접근체에게 추격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아키반의 네거티브 드라이브는 연합 최고의 기술로 제작되었습니다. 아키반 호는 연합에서 가장 빠른 우주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현재 아키반 호는 최고 속도로 가속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차분한 마음으로 즐거운 여행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캐시는 불안한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마크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고 객실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캐시는 승낙했고 둘은 캐시의 방으로 향했다.

 

우주선이 가속될수록 불안한 소음이 귀를 맴돌았다. 진동이 불쾌할 정도로 강해졌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드라이브가 가까운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굉음이 들린다고 했다.

 

목적지: 아르켄스크 태양계

현재 속도: 네거티브 단위 14.4

19071.7 광속

도착까지 [26]시간 [07][24]초 남았습니다.

 

놈을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거라던 선장의 말과는 달리 괴 우주선은 아키반이 가속하는 만큼 빨라졌다. 이젠 어느새 2광분여의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마저도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아키반보다 빠른 우주선은 연합에 단 다섯 대 밖에 없다고요.”

 

마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함선의 떨림은 이제 드라이브 부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있는 캐시의 방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진동으로 인해 가구와 집기류는 달가닥 거리는 불안한 소리를 냈다.

 

현재 속도: 네거티브 단위 15.11

32281.3 광속

도착까지 [15]시간 [02][47]초 남았습니다.

 

 

아키반의 최고 속도는 네거티브 단위 15였다. 안전 제한은 그보다 더 낮은 14.7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있는 힘, 없는 힘 다 내어 15.1의 단위로 비행하고 있었다. 어쩌면 네거티브 드라이브에 영구적인 손상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많이 손상되어 이것이 아키반의 마지막 항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괴 우주선은 여전히 아키반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가속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지만 더 빨랐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자 마크는 선장과 통화해야겠다며 난리였다. 그는 VVIP인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선장과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당장 UDF에 연락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저 우주선을 발견하자마자 UDF에 신고했으면 진즉에 여기까지 왔겠습니다!”

 

아르켄스크에는 연합에서 두 번째로 큰 UDF 기지가 위치해 있었다. 만약 제때 교신만 했다면 지금쯤은 UDF가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선장의 얘기는 달랐다.

 

[저희도 UDF와 접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그 어떤 선박, 기지와도 교신이 불가능합니다. 저 우주선이 우리의 교신망을 교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요?”

 

마크는 당황했다. 선장의 말이 맞는다면 아키반은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가 없었다. 선장은 조금 더 속도를 내어 저 우주선을 따돌려 보겠다고 다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일단 아르켄스크 태양계에만 닿을 수 있으면 상황은 일단락될 것이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아키반의 속도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키반은 이미 한계였다.

 

지금 속도로는 10분이면 저 녀석에게 따라잡히고 말아요.”

 

캐시는 슬픈 눈으로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첫 우주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했다. 캐시는 마크의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어요.”

나도요.”

 

아키반은 괴 우주선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2만 광속을 넘어서는 속도에서는 거의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였다.

 

그때였다.

 

현재 속도: 네거티브 단위 15.18

35310 광속

도착까지 [10]시간 [11][40]초 남았습니다.

 

네거티브 단위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선체의 떨림은 이제 못 견딜 지경이 되었지만 괴 우주선은 결국 네거티브 단위 15.15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멀어졌다. 녀석도 가속했지만 아키반과는 등속도로 운동할 정도의 속도밖에는 내지 못했다.

 

아키반은 계속해서 항해했다. 네거티브 드라이브가 출력을 견디지 못해 고장 날 법도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캐시는 마크와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마크가 말했다.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아요.”

절대로요.”

 

캐시는 약속의 뜻으로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둘은 오랜 시간 한 방에 있었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 아키반은 네거티브 드라이브를 정지시켰고 한계까지 다다른 드라이브는 거친 진동과 소음을 내며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로 우주선을 뱉어냈다. 아키반은 무사히 아르켄스크 태양계에 도착했다.

 

캐시는 밝게 웃으며 마크의 넓은 가슴을 가녀린 손으로 훑었다. 그때였다. 가공할만한 충격이 우주선을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죠?!”

 

깜짝 놀란 마크가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아키반 전체에 탈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승객 여러분. 방금 저는 아르켄스크 UDF 기지에서 자동으로 발신되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연합 우주선은 들어라. 여기는 아르켄스크 UDF 기지다.

만약 이 메시지가 발송된다면

그것은 아르켄스크 UDF 기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혹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지구를 포함한 다른 모든 인류 연합 거주지는 단 몇 시간 만에 완벽히 파괴되었다.

인류의 멸종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따라서 생존자는 코드 S00에 따라 행동하라.

반복한다. 생존자는 코드 S00에 따라 행동하라.

...모든 연합 우주선은 들어라. 여기는 아르켄스크 UDF 기지다.

만약 이 메시지가 발송된다면......]

 

그리고 메시지는 무한 반복되었다. 반복되던 메시지를 끄고 다시 선장이 입을 열었다.

 

[승객 여러분. 방금 전부터 괴 우주선이 아키반의 보호 격벽을 뚫고 침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키반은 일개 우주여객선에 불과합니다. 자기 방어를 위한 설비는 거의 되어있지 않습니다. 과부하로 인하여 네거티브 드라이브는 작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승객 여러분...... 곧 놈들이 선내로 진입할 것입니다. 구명정은 자동 안내기의 안내에 따라 질서 있게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생존자가 생긴다면 코드 S00에 따라 행동하여 외우주에서 인류의 씨를 보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우주여객선 아키반 호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을 끝으로 방송은 중단되었다. 캐시와 마크는 통로를 따라 흘러나오는 자동 안내 메시지에 따라 가장 가까운 구명정 쪽으로 뛰었다. 마크는 캐시의 손을 꼭 잡고 놓치지 않았다.

 

마크와 캐시가 2인승 구명정에 몸을 넣고 출입문을 닫으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내 팔!”

 

어디선가 나타난 날카로운 물건이 마크의 팔울 싹둑하고 잘라버렸다. 잘린 팔이 있던 곳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마크는 반대편 손으로 절단 부위를 꽉 잡고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구명정의 출입구는 닫히지 않고 있었다.

 

단단한 갑각류의 피부를 한 흉측한 생명체가 출입구를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구명정은 절차에 따라 발사되지 않았다. 캐시는 고통스러워하는 마크의 모습과 잘린 팔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마크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용기를 냈다.

 

사랑해요!”

 

비명 섞인 한마디를 내뱉고 그는 구명적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하나뿐인 팔을 이용해 괴물의 행동을 제지했다. 출입구는 잽싸게 자동으로 닫혔고, 캐시는 오열하며 창문에 붙었다. 괴물은 마크의 복부에 무자비한 무기를 찔러 넣었다.

 

마크......! 마크......!”

 

그녀는 죽은 이의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 아키반에서 많은 구명정이 뿌려졌지만 개중 대다수는 놈들에게 붙잡히고 있었다. 캐시는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 그녀의 구명정도 놈들의 거대 구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 구조물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 구명정의 문이 덜컥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바깥엔 한 남자가 놈들과 함께 서있었다. 구명정에서 끌려 온 듯한 남자는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하지만 무정한 외계인들은 남자의 머리에 기다란 촉수를 꽂았다. 남자는 곧바로 쓰러져 죽어버렸다.

 

외계인들은 이제 캐시를 바라보며 인공적인 음색으로 말했다.

 

이게 이 종족의 마지막인가?”

 

<유령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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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쓴 뒤에 무리수를 몇가지 삭제했으나 여전히 무리수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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