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2.12.15 15:1912.15

소년
15년 전에 그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올려보낸 적이 있다. 여동생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어른들은 일곱 살짜리 소년에게 죽음은 아주 깊이 잠들어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어른들은 소년에게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소년의 여동생은 그 새끼 고양이를 아주 좋아해서, 매일 밤 한 이불에서 같이 잘 정도였다. 소년은 하늘나라로 간 동생에게 고양이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 때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져서, 그는 새끼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잊어버렸다. 집 앞에서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던 풍선을 누군가와 함께 고개가 아플 때까지 올려다보던 것만이 어렴풋하게 생각날 뿐이었다. 그 누군가는 어른이었던 것 같은데 왜 나를 말리지 않았을까. 결국 새끼 고양이는 어떻게 됐을까. 고양이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는 이따금 새끼 고양이의 마지막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았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남자
15년 전, 그는 마당에서 셋집 소년이 풍선에 새끼 고양이를 매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소년은 죽은 여동생에게 고양이를 보내주고 싶어했다. 어린애가 헬륨 풍선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한 걸까. 그는 황당함을 느꼈지만 무턱대고 말리기엔 소년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임기응변으로 그는 새끼 고양이가 하늘나라까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바구니에 태워 보내자고 제안했다. 우리 집에 괜찮은 바구니가 몇 개 있거든. 이 녀석이 타고 갈 바구니니까 이 녀석한테 직접 고르게 하자. 너는 그 동안 여기서 날아가지 않게 풍선을 꼭 잡고 있어. 아참, 혹시 비가 오는지도 잘 보고 있어야 한다? 비가 오면 오늘은 보낼 수 없을 거 아냐.

그는 고양이를 안아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새끼 고양이를 옷장 속에 숨겨 두고, 그는 뚜껑 달린 바구니에 인형을 담아서 들고 나왔다. 소년은 의심 없이 풍선에 바구니를 매달았다. 새끼 고양이보다 가벼운 인형은 쏜살같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바구니가 점점 작아져 바늘귀만해졌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소년과 함께 새끼 고양이를 배웅했다.

소년의 가족은 얼마 뒤에 이사를 갔다. 그가 새끼 고양이를 길러 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으므로 고양이는 그대로 그의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는 이따금 소년이 고양이를 땅에 파묻으려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5년이 흘러 그는 서른다섯 살이 되었고, 열여섯 살이 된 고양이는 수명이 다해 죽었다. 그는 고양이의 뼛가루를 바람에 흘려보내며 중얼거렸다. 꼬마 아가씨, 고양이를 빼앗아서 미안했어. 이제 돌려줄게. 그런데, 내가 보낸 맥 인형은 별로 맘에 안 들었나 봐?    

수의사
15년 전,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맥에게 정수리를 얻어맞은 적이 있다. 걷다가 무언가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발치에 새끼 고양이만한 봉제인형이 뒹굴고 있었다. 코뿔소와 돼지를 합쳐놓은 것처럼 이상하게 생긴 동물 인형이었다. 그는 인형을 집으로 가져갔다. 엄마, 하늘에서 인형이 떨어졌어. 그의 어머니는 그것이 맥이라고 하는 동물이며 악몽을 먹는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그날부터 맥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자기 전에 맥의 그 기묘한 얼굴과 좀 멍해보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10년 뒤 그는 수의사가 되어 작은 동물병원을 열었다. 첫 손님은 노랑둥이 고양이를 데리고 온 남자였다. 나이도 있고 일년에 한번씩은 꼭 건강검진 받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동물병원이 생겨 좋다며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진료차트를 쓰기 위해 고양이의 이름을 물었더니 남자는 맥이라고 대답했다. 이거 우연인데요. 여기에도 맥이 있는데. 그는 접수대 한켠에 놓아둔 맥 인형을 가리켰다. 남자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끼 고양이
남자가 동물병원에 첫 손님으로 온 뒤로 5년이 흘렀다. 그동안 인형 맥은 접수대에 앉아 낮에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손님들을 편안하게 해주거나 환자들에게 물어뜯겼고, 밤에는 입원한 환자들이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지켜 주었다. 고양이 맥은 그 해 여름에 죽었다. 사망진단서를 받으러 온 남자는 인형 맥을 만지작거리다 수의사에게 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이 맥 인형은 어디서 났나요.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수의사가 대답했다. 15년 전에.

남자가 돌아간 직후에 동물병원에 한 젊은이가 들어왔다.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여기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고양이 먹이를 달라고 했다. 수의사가 큼직한 사료포대를 가리키자 젊은이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작은 건 없냐고 물었다. 아 그건 너무 큰데. 맞다. 저 통조림처럼 생긴 거 주세요. 딱 좋네. 맛있는 걸로요. 간식 사시게요? 음 뭐 어쨌든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걸로 주세요. 비싸고 좋은 걸로요. 젊은이는 고양이 캔 하나를 사들고 나갔고, 나간 지 한 시간만에 다시 돌아왔다. 한 손에는 새끼 고양이, 다른 손에는 큼직한 헬륨 풍선 몇 개를 들고서.

저기, 이거 주웠는데 좀 봐주실래요? 어디 아픈 거 아닌가? 빽빽 울던데. 젊은이는 죽은 맥을 작게 줄여놓은 듯한 노랑둥이 새끼 고양이를 접수대 위에 올려놓았다. 수의사가 새끼고양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동안 젊은이는 인형 맥을 주물럭거리고, 입원한 개들과 맞서 으르렁거리고, 진열대에 놓인 사료며 강아지 옷 따위를 들었다 놨다 하며 동물병원 안을 정신사납게 돌아다녔다.

수의사는 간단한 건강검진을 마친 새끼고양이에게 구충제를 먹이고 귀 청소를 해 준 뒤에 젊은이에게 내주었다. 밖에서 주워온 애치고는 꽤 건강하고 깨끗한 편이네요. 2개월쯤 된 애니까 건사료 먹을 수 있을 거에요. 아, 그래요? 그렇지 참. 배 고프겠구나 이녀석. 젊은이는 생각났다는 듯 고양이 캔을 땄다. 냄새를 맡은 새끼고양이가 캔에 달려들자 수의사가 황급히 붙들며 말했다. 안 돼요, 그렇게 한꺼번에 다 주면 배탈 나요. 밖에서 살던 애들은 식탐이 많아서 탈나는줄도 모르고 막 먹는단 말이에요. 아 그래요? 어디 덜어줄만한 데 없나?

젊은이는 덜고 남은 고양이 캔을 수의사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이건 뒀다가 저 녀석한테 주세요. 예? 안 데려가시려고요? 제가 지금 고시원에 살아서요. 데려갈 형편이 못 돼요. 고시원요? 고양이 안 기르세요? 그럼 고양이 캔은 왜 사셨어요? 아, 그거는 제삿밥을 하려고 산 거예요. 제가 옛날에 고양이를 한 마리 죽였거든요. 풍선에 매달아서 하늘로 띄워 버렸어요. 젊은이는 수의사에게 15년 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늘은 그 녀석에게 사과하는 뜻에서 그 고양이 캔을 보내주려고 한 거에요. 뭐, 어쩌다보니 저 녀석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그럼 그 풍선에 고양이 캔을? 미쳤어요? 사람한테 떨어지면 어쩌려고! 안 떨어져요. 단단히 묶을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헬륨풍선은 하늘 높이 올라가면 터진다고요! 악! 정말요? 그럼 그 때 그 고양이도 떨어져서… 안 돼!

머리를 싸쥔 젊은이는 정말 미안하다는 둥, 그땐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둥, 나는 결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는 둥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수의사는 젊은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맥 인형을 건네주었다. 새끼 고양이는 덜어준 고양이 캔을 뚝딱 해치우고 허공에 늘어진 헬륨풍선 끈에 덤비기 시작했다.

맥 인형은 언제나처럼 훌륭히 제몫을 해내어, 얼마 뒤 진정된 젊은이는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저기, 그 고양이, 잠시만 맡아 주세요. 길러 줄 만한 사람을 찾아 볼게요. 그 동안만 선생님이 데리고 있으면 안될까요? 사료 값이랑은 제가 댈 테니까. 수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젊은이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병원을 나갔다. 잠깐만요, 이거 두고 가셨어요. 그건 선생님 드릴게요. 이제 필요 없어요. 수의사는 유리문 너머로 젊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애도 아닌데 이걸 가져서 뭘 하나. 잠시 생각하던 수의사는 장난삼아 맥 인형의 허리에 풍선을 묶었다. 멍한 눈의 맥이 둥실 떠올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한 바퀴, 반대편으로 한 바퀴. 젊은이가 주물럭댄 탓인지 뒷다리가 터져 솜이 삐져나와 있었다. 꿰매줘야겠구나.

새끼 고양이는 어느새 한쪽 구석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저 녀석을 어쩐다. 병원은 입원한 개들로 꽉 차서 둘 만한 곳이 없고, 어머니가 고양이 알러지라 집에 데려가기도 곤란한데. 새끼 고양이는 꿈이라도 꾸는지 네 다리를 허공에 바둥거렸다. 인형 맥이 느릿느릿 고양이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보면 볼수록 죽은 맥을 쏙 빼닮았다. 남자가 지지난 주에 대용량 고양이 사료 한 포대를 사 갔던 것이 생각났다. 아직 많이 남아 있으리라. 다른 고양이 용품도. 인연인가, 이것도. 수의사는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을 가지고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XXX동물병원인데요, 죄송하지만 고양이를 맡아주실 수 있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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