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운명의 세 여신, 노른은 신들의 황혼이 도래하면 로키와 앙그르보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이인 최후의 늑대 펜리르가 주신 오딘을 삼켜버리리라고 예언했다. 이에 오딘은 펜리르를 결박한 채 곁에 두어 감시하기로 하나 두 차례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신 프레이르에게 지시해 라그나로크의 그 날까지 펜리르를 잡아둘 사슬을 만들게 했다. 프레이르는 검은 난쟁이 쉬바르츠알바들을 통해 고양이의 발소리, 여자의 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물고기의 숨결, 새의 침으로 사슬 글레입니르를 만들어서는 펜리르를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묶어 두었다…
-북구 신화 모음집 『에다』에서

「…마스터 레벨로만 액세스 가능한, 보안 레벨 S의 고대사 자료에 의하면 한 때 이 세계는 국가라고 불리는 수 백여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호 무력충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고 한다. 수천 년에 달하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세계 전체에서 그러한 무력충돌이 없었던 것은 단지 5일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그러한 국가들은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그러한 갈등들은 총체적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불만으로 수렴되곤 했다. 지배자들은 그러한 내부 불만의 방향을 인접한 다른 국가에게로 돌림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타국에의 간접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자국의 경제 수준을 향상시켰다. 이런 현상을 두고서, 독일이라고 불린 국가 출신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라는 학자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언명을 남겼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일정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클라우제비츠의 공식은 깨졌다. 세계 수준의 대규모 전쟁 행위는 서서히 줄어가고 있었지만 강대국들에게 있어 여전히 무력은 국가 운영의 중요한 기반이었고, 그러한 무력의 생산과 확대에 종사하는 이들은 지배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껏 누리고 있던 부와 권위의 유지를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고, 어느 순간에 그것은 ‘자국의 정치적 입장을 타국에게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도시의 지배자, 카르마 마스터(Karma Master)는 거기 까지 읽은 뒤 파일을 덮었다. 마스터의 위치를 계승한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파일과 수 십여 개의 관련 문서들을 반복해 읽어봤지만 그 때마다 그는 연민과 혐오가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왜 이토록이나 어리석고 가여운 짐승이었던가. 모든 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면서 법과 질서에 헌신하는 지금과는 얼마나 커다란 대조인가.
마스터는 파일을 서랍에 집어넣은 뒤 각각 암호식과 열쇠식으로 되어 있는 2개의 자물쇠를 모두 잠갔다. 보안 레벨 S의 문서는 오직 마스터와, 유사시 마스터의 위임을 받은 1급 폴리스만이 열람 가능했다. 비문담당관이나 보좌관도 손댈 수 없도록 마스터 스스로가 직접 관리했고, 심지어 그 문서들은 공식적으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게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마스터는 책상 앞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평화유지국 건물 최상층의 이 집무실에서는 도시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마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저 먼 지평선에서는 붉은 황금빛의 구체가 하루의 여정을 막 끝마치려는 참이고, 하늘은 그 잔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천구의 맞은 편 끄트머리는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잔광을 천천히 물들어 가면서 곧 밤이 올 것을 예고하고, 그 가운데서는 성급한 별들 몇 개가 점점이 빛을 뿌리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별, 별들. 마스터는 잠시 그 빛을 떠올리고는 감탄했다.
이전 시대가 한참 광기와 탐욕으로 폭주하던 때,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대이변으로 그 때까지 인류가 쌓아온 문명의 대부분이 유실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온 하늘은 두꺼운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낮도 밤도 없는 시기가 계속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한참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 비교적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나긴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던, 그러나 아직 밝음과 따스함을 기억하고 있던 인간들에게 최초로 희망을 던져줬던 것이 저 별빛들이었다.
서서히 어둠이 깔려가는 가운데, 마천루들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의 초상이 떠올랐다. 점점이 불빛이 켜져 가고 있는 도시의 광경을 내려다보며 마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질서정연하게 구획 지어져 있는 건물들. 청결하고 조용한 거리.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 속에서 바쁘게,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시민들. 그들은 결코 불평을 갖는 법이 없으며, 규칙을 완벽하게 준수하고 항상 서로에게 예의로 대한다. 고대 역사에 묘사된 인간들이 항상 반항적이고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이토록 평온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광경을 내려다보면, 마스터는 인간이 어떻게 그토록 폭력적이고 광기에 차 있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곤 했다. 이전 시대까지의 인류 문명 대부분을 소실시켰던 그 대이변에 대해 지금 와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모든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참가한 대전쟁이었을 것이다. 그 진상에 대해 하급 폴리스들이 사적인 시간에 몰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땅을 울리며 돌진하는 강철 괴물’이라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새’같은 묘사로 미루어 그때까지 없었던 돌연변이 생명체들이 한 순간에 대량 출몰해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습격했다거나 일종의 은유로 해석해서 전 세계적 규모의 천재지변이 있었을 거라는 등 황당한 소문들이었다. 그러나 마스터인 자신과 소수의 1급 폴리스들은 알고 있었다. 고대의 인간들은 지금보다 훨씬 발달한-적어도 군사 관련으로는- 과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해저를 달리는 배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과 교류했으며, 하늘을 나는 배를 통해 저 빛나는 별들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기술을 갖고서도 더 없이 우매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이전 시대의 인류는 지금과는 다른, 유전학적으로 훨씬 열등한 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성적으로는 뛰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육체가 허약했기에 그토록 많은 기계와 도구에 의존했을 것이다. 윤리적으로도 뒤떨어져 있었기에 그 많은 학살과 약탈이 행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인류에게도 그러한 야만적인 속성이 깃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평화와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엄격한 규율이, 어릴 때부터의 집단생활이, 동일한 사고방식의 주입이,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카르마 폴리스들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을 회고해 보았다. 정확히 33년 전 당시 1급 폴리스였던 자신은 전임 마스터의 비리를 적발해 내서 그를 축출하고는, 대회의- 컨클레이브에서 다른 1급 폴리스들의 만장일치로 마스터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보는 법 없이 만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그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던 것들도 많았지만 결국은 모두 이루었다. 이제 자신은 늙었다. 수 세대에 걸쳐 계속되어 온 지하도시와의 전쟁을 끝내고 질서와 평온을 전파하는 것은 차기 마스터의 역할일 것이었다. 그는 문득, 격심한 피로를 느끼고 두 눈을 문질렀다. 그 때, 책상 위의 인터폰이 울렸다.
-마스터, 1급 폴리스 K-3145입니다. 저기, 그게 말입니다…
“무슨 일인가?”
마스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1, 2급의 시민 중에서도 엄선된 과정을 걸쳐 선발되는 최고의 엘리트들인 카르마 폴리스.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1급 폴리스라면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만 했다. 그런 자가 말끝을 흐린다는 건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10년 만에.
“범죄라고? 누가? 죄목은?”
마스터는 스스로의 표정이 굳는 것을 느꼈다. 부족한 교육이나 개인적 실수로 인한, 비교적 사소한 규율 위반은 모든 공공건물과 주요 도로에 설치된 카메라와 녹음기에 의해 실시간으로 포착되어선 3급 폴리스들에 의해 현장에서 적절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악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진짜 ‘범죄’는 2급 폴리스들이 처리하게 되어 있지만 그마저도 최근 10년 내에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1급 폴리스가 직접 나섰고, 마스터인 자신에게 직접 보고가 올라올 정도의 사건이라면 정말 심각한 일일 것이었다.
-…반역입니다. 5급 시민 한 명이 지하도시와 내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반역이라고?”
반역(反逆, Rebellion). 정당한 질서와 규범의 권위에 대한 저항. 그 권위에 대한 침탈시도.
반역. 이 도시에 대한. 법과 평화에 대한.
카르마 폴리스에 대한.
자신에 대한.
그가 잠시 말이 없자 인터폰에서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나왔다.
-염려 마십시오, 이미 체포했습니다. 2급 폴리스들이 현장으로 나가서 동조자가 없었는지 수사 중입니다. 테러리스트들과의 직접 접촉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의 방에서 다수의 금서와 기타 금지 매체가 발견 되었…
“지금 그 자는 어디에 있지?”
-유지국 건물 지하 3층, 5번 특수 취조실입니다.
“기다리라고 해라, 내가 직접 취조하겠다.”
-예? 마스터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저희들 선에서…
“난 명령했다, 시행해라!”
-…예, 알겠습니다.

복도를 걸으면서 마스터는 오랜만에 불쾌한 감정이 속에서 끓어오름을 느꼈다.  왼쪽 한 발짝 뒤에서 따르고 있는 비서관이 프로파일을 나직하게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민 코드 E-152, 2급 시민 출신으로 현재 나이 33세. 10년 전, 불법으로 지정된 행위인 흡연 혐의로 체포당해 경고를 받음. 7년 전에 금지된 음식인 육류 섭취로 구금되었다가 불구속 처리. 당시 1급 폴리스 관료이던 그의 아버지는 사직을 자청했으나 그의 전공을 높이 산 컨클레이브에 의해 반려됨. 5년 전, 금지된 음악인 메탈을 듣다가 적발, 아버지에 의해 약식 기소. 부분 기억 소거형과 1,000시간의 사회봉사를 선고 받음. 3년 전, 반(反) 폴리스 집회에 가담했다가 현장에서 도주 중 체포. 상습범으로 인정됨. 2차 기억 소거형을 받고서 5급 시민으로 강등된 바 있음…”
“전적이 화려하군.”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이적 행위에 연루된 혐의를 받은 적이 몇 차례 있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입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위험인물을 방치해 뒀단 말인가?”
마스터는 계속 정면을 주시한 채 걸으며 질문을 던졌다. 거구의 젊은 보좌관이 움찔하는 게 눈에 보일 듯 했다.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감시한다고 한 모양인데…. 책임자를 징계하겠습니다.”
“됐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 카르마(Karma)이니…. 그보다, 이번에는 어떻게 잡은 거지? 폴리스들이 체포한 건가?”
“아닙니다. 인근 시민들이 이웃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서 신고했다고 합니다.”
“다르마(Dharma)에 충실했군, 그들은.”
“죄송합니다. 저희는…”
“관두라니까, 지난 일에 매여만 있으면 그 역시 카르마로 고착되는 법일세. 자네의 위치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 자네의 다르마를 행하게. 시민들에게 이전 시대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 동안, 그들은 어느 덧 취조실 문 앞에 이르렀다.

“E-152, 난 이 도시의 지배자인 카르마 마스터다.”
피고 앞에 앉은 마스터는 우선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며 눈앞의 사내를 찬찬히 관찰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던 폴리스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낸 뒤였다. 낯선 남자. 규정에 어긋나게 머리와 수염을 기른 것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는 시민의 인상이었다. 크고 둥근 눈에 순박해 뵈는 이목구비. 정장 차림으로 상회의 사무실에 서류를 만지고 있든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시골의 농가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든 눈에 띄지 않을, 평범한 용모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짙은 주름이 파여 있었고 책상 위에 얹힌 두 손은 언뜻 보기에도 거칠었다. 그는 도시의 지배자를 눈 앞에 두고서도 시큰둥한 태도로 한번 흘깃 쳐다보기만 한 뒤 다시 눈을 내리 깔았다.
“제섭(Jessop)이라고 부르시죠, 마스터. 물건처럼 코드로 부르지 마시고.”
그의 첫 마디였다.
“개인에게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는 건 지하도시의 관습일텐데, 그들이 지어준 건가?”
“…”
대답은 없었다.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마스터 역시 묵묵히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폴리스들이 이전의 취조에서 들은 진술 내용들이 빼곡히 적힌 서류들을 무관심하게 뒤적거리던 그는, 그 중 하나를 집어들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고는 상습범으로써, 갱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므로…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실질 법정최고형인 모든 기억의 삭제와 인격 초기화를 구형할 것이 요망됨’이라고 적혀 있구만, 여기엔. 자넨, 두렵지 않나?”
“예.”
마스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두렵지 않다고 대답했으나, 그 태도는 용기를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자의 것이었다.
“이 지상도시는 지하와는 달라.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고문 행위 같은 추잡한 짓은 금지되어 있지. 그러니 묻겠네, 왜 그런 짓을 한 건가?”
“……”
“카르마에 따라, 자네가 지하도시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 지상에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네는 마땅히 시민으로서, 이 도시의 규칙을 준수하고 평화와 행복의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다르마를 갖고 있었어. 그를 거부하고서 우리의 주적인 지하도시 측과 내통하고자 한 건 중대한 범죄일세. 인정하나?”
“인정합니다. 죄라는 건 알지만 뉘우치진 않습니다.”
“그건 왜지?”
마스터는 물으며 그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폈다. 그의 얼굴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했으나, 핏발이 선 갈색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리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게 얼핏 보였다.
“두려워서입니다.”
“그래?”
“예.”
“공포는 이전 시대의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동인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냐. 반사회적 성향이나 폭력 성향의 소유자 등은 출생 전 유전자 검사 단계에서 선택배제될 텐데… 아무튼 자넨 너무 위험해. 이 도시에 있어서든, 스스로에게 있어서든.”
마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밖에 누구 있나?”
문이 철컥 열리며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폴리스들이 들어왔다. 그는 제섭에게서 돌아선 채 뒷짐을 지고 지시했다.
“현장에 1급 폴리스들을 투입해라, 분명 내통자가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저 자는 심문을 계속해. …자백제 투여를 허가한다.”

-마스터, E-152를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인터폰의 목소리에 답하자, 집무실 문이 열리며 한 쌍의 폴리스들에게 양 팔이 잡힌 그가 반쯤 끌리듯이 걸어들어왔다. 며칠 새에 볼은 움푹 들어가고 머리는 지저분해져 있는 게 확연히 보였다.
“고문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법과 질서에 비쳐 부끄러운 일은 결코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세면이나 식사, 취침마저 거부하고 있어 곤란을 겪고는 있습니다.”
“흐음. 그 외 특이사항은?”
“몸이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 자백제를 투여하고 유도심문을 해도… 입을 열지를 않았습니다. 대단히 독한 녀석입니다.”
“그래…? 좋아, 나가서 대기해.”
두 폴리스가 집무실을 나서고 나자,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의자를 끌어다 자신의 책상 맞은 편에 놓았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 온 그는, 제섭을 향해 손짓했다.
“앉게.”
제섭은 잠시 입맛을 다시다,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까칠한 윤곽을 잠시 지켜보던 마스터는 다시 물었다.
“아마 지하도시에서 받은 걸테지. 금서를 비롯한 금지 매체를 다수 접했었다면서?”
“…예.”
“프로파일을 보니 음악을 좋아하는 모양이더군. 개중에 마음에 드는 곡이 있던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란 자들 곡이 좋더군요. 퍼블릭 에너미나, 에미넴의 초기 곡들, 마릴린 맨슨도 괜찮았습니다. 마스터께선 금지 매체에도 접근 가능하실테니, 다들 아는 이름들이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온건한 어조 속에 희미한 냉소가 깃들어 있음을 감지한 마스터는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얄팍한 검은 원반 형태의 물건을 하나 꺼내선 책상 위의 기괴한 상자 모양 장치 위에 얹었다. 약간 어색한 손놀림으로 장치 옆에 튀어나온 태엽을 조작하고선 원반 밑에 놓인 바늘을 움직이자, 원반이 천천히 돌면서 상자 옆의 나팔모양 관으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늘게 떨리는 기타 소리가 울리며, 그 멜로디 속에서 배어 나오듯 나직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이 곡은 처음 들어보는 걸텐데, 어떤가?”
“괜찮은 거… 같습니다.”
“레인보우라는 자들의, ‘왕의 신전(The temple of the king)’이란 곡일세. 한 선지자가 어느 날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서, 거대한 검은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지금껏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서 떠나간다는 내용인데… 그가 향한 곳이 어딘지 아나?”
“아니요.”
“왕의 신전이었지. 이전 시대의 인류가 믿었던 초월적 존재인, ‘신’에게 제의를 올리는 곳. 이 곡의 가사에서 직접 묘사되진 않았지만 그 자는 불경으로 인한 심판을 받아 죽었을 걸세. 물론 신은 허구의 존재란 게 입증되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선 카르마와 다르마의 원리가 그를 대체하고 있지. 그러나 자넨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진 않는 거 같은데, 말해보게나. 자넨 무엇이 두렵다고 한 건가?”
“정말 모르십니까?”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강한 감정이 나타났다. 그건, 분노였다.
“1급 시민으로 태어나셔서 폴리스를 거쳐, 이제 존귀한 마스터의 자리에 계시는 당신 입장에선 아실 리가 없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리가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카르마란 게 얼마나 무거운 사슬인지!”
“그러니 카르마가 아니겠는가? 내세에는 보다 나은 카르마를 얻기 위해 행해야 할 다르마가 있는 거고. 지배계층인 폴리스에게도, 마스터인 나에게도 행해야 할 다르마가 있긴 마찬가질세. 자넨 우리들 폴리스들이 다르마는 소홀히 하고 카르마의 권리만 누리고 있다는 건가?”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도시의 체제 자체가 문제란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유전사 검사로 통제되고, 태어나서는 집단 생활을 하면서 똑같은 걸 배우는 데 길들여지고, 평생 근본적으로는 결코 변할 수도 없고, 변할 의지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
“들어 보십시오 마스터, 제가 두려운 건 바로 그겁니다.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사람들. 그런데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키워내는 이 도시가 두렵단 말입니다. 다르마요? 무슨 다르마? 애초부터 진정한 권리란 걸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가진다고 해도 쓸 줄도 모를 게 뻔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당신은 이 도시가 정말 낙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당신은 지옥을 만든 겁니다!”
제섭은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등받이 없는 의자가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의 두 눈이 흥분과 공포로 타올랐다. 양 손목을 묶은 자기 수갑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책상을 뛰어 넘어와 마스터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마스터는 냉정했다.
“그게 바로 자네의 카르마일세.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지. 내가 보기엔, 자넨 단지 나약할 뿐인 것 같군. 이봐, 보좌관!”
문을 열고 들어온 보좌관은 일어서 있는 제섭을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마스터는 제섭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질문을 던졌다.
“이 자를 신고한 게 이웃의 시민들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자네는 필시 이웃들에게 자네의 생각을 전파하려고 했겠지. 안 그래? 그러나 그들은 자네에게 동조하는 대신, 자넬 고발했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제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저를 대신할 겁니다.”
음악은, 마지막 구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Far from the circle at the edge of the world
군중들의 원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세상의 끝에서
He's hoping, wondering
그는 바라고, 의문을 가지니
Thinking back from the stories he's heard
그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회상하며 바라고
of what he going to see…
그가 볼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궁금해 하나니

마스터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자신 앞에서 씨근덕대고 있는 그의 상이 맺혔다. 그의 어깨 위로 새카만 사슬이 풀려나와선 자신을 휘감았다. 그 사슬은 보좌관을 감싼 뒤 집무실 벽을 뚫고 나가 바깥에 도열해 서 있는 다른 폴리스들을 묶고, 점차 많아지고, 두꺼워지면서 평화유지국 건물 전체를 휘감는 게 보이는 듯 했다. 사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가는 시민들을, 건물들을, 거리를, 서서히 점령해 나가면서 종국에는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이건 자네가 자초한 결과다, E-152. 난 자네가 받을 처벌에 책임이 없다.”

…There in middle of the circle it lies
원이 그려진 그 중심에 뉘여 있네
Heaven help me
신이여 날 구하소서
Then all could see by the shine in his eyes
그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
The answer had been found…
답은 이미 찾아냈도다

마스터는 입을 뗐다.
“판결을 내린다. 피고, E-152에게… 도시 건립 이래 두 번째로,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을요!? 시민들이 동요할 겁니다! 혼란을 야기할 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그 정도 혼란에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폴리스가 무능한 집단인가?”
“…아닙니다. 시행하겠습니다.”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소리는 점차 커져 가면서 귓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웅, 우우웅. 넌 이미 그 원진 밖에서 다른 이들과 손잡고 서 있는 게냐. 그들은, 왕의 신전을 이미 알고 있는 거냐.
내 아들아.
바람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스터는 감았던 눈을 뜨며 일갈했다.
“끌어내라!”
  

참고 매체-

쇼생크 탈출
저지 드레드
데몰리션 맨
이퀄리브리움
브이 포 벤데타
메트로폴리스
(이상 영상 매체)
바비도
1984
멋진 신세계
북구 신화
성경        
(이상 활자 매체)
Karma police-by Radiohead
The Temple of the king-by Rainbow
(이상 음향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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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글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전부터 꼭 쓰고 싶던 글을 완성볼 수 있어서 나름 만족입니다.
세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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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6 단편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 너구리맛우동 2012.10.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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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4 단편 청개구리의 꿈을 꾼 이야기1 너구리맛우동 2014.02.24 0
2083 단편 야구공, 사진, 음악CD, 거울 그리고 열쇠 진영 2013.02.09 0
2082 단편 바퀴3 티슬 2013.07.15 0
2081 단편 동전 전쟁 빛옥 2013.03.15 0
2080 단편 습작 (습작이 제목이 아닌건 아시죠?)3 루나 2003.07.16 0
2079 단편 푸른 고양이와 늑대소녀3 hybris 2007.07.15 0
2078 단편 그녀를 찾아서 mariate 2005.01.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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