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요설 춘향가

2006.05.22 12:4205.22

요설 춘향가  妖說 春香歌



[…남원 내려가는 이도령 차림 볼작시면, 누덕누덕 기운 두루마기 거지발싸개 짚신이라. 너덜너덜 해진 갓에 박쪼가리 관자, 거지가 따로 없네.

열두 끼 굶은 양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우거지상을 하고 길을 가는디, 저만치서 애새끼 하나 괴나리봇짐 들쳐 매고 껄렁껄렁 걸어오누나. 이도령 자세히 볼제, 반쯤 풀린 눈에 입을 헤 벌리고 뭐라 흥얼흥얼하는 뽄새가 영락없는 미친놈이것다.

"누렁탱이 힘센소로 이논저논 깊이갈고
온갖씨앗 뿌리면은 곧여름이 돌아오네"

어사또 지나치며 곁눈질로 유심히 살피니, 그 눈깔 꼭 썩은 동태 눈깔 같더라.
이도령 이상히 여겨 애새끼 흥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것다.

"싯누렇게 익은벼는 너른들에 가득한데
위로부모 아래처자 말라죽어 흔적없네
농사지어 뉘먹이며 길쌈하여 뉘입힐까
시체썩는 냄새만이 마을안을 떠도누나"

이도령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애새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길은 텅 비었더라. 어디선가 노래소리만 괴괴히 들려오는듸.

"높은하늘 청청하고 푸른들은 창창한데
남원고을 백성들은 시뻘겋게 죽어가네
저승가지 않은사람 몇놈이나 남았더냐
그제두놈 어제하나 귀신고을 다되었네"

기가 막힌 이도령 멍하니 서서 중얼거리기를

"기가 허해졌나 헛것을 본겐가. 소리가 들리니 내 귀가 잘못된 겐가."

혼자 이리 중얼거리며 자기 손으로 자기 뺨을 몇차례 갈기더니, 다시 걸음을 빨리하여 남원 고을로 향했것다.


이도령 고을 초입에 들어서는데, 웬 거지같은 차림새를 한 년석 한놈이 우르르 달려나와 이도령을 잡고 늘어지는구나. 유심히 보니 행색은 초라하나, 이도령 남원 있을 때 모시던 방자놈이 아니냐. 방자녀석 애처럼 징징 울며 아뢰되,

"아이고 서방님 우리 서방님, 어이하여 이제 오시우. 살려주오 살려주오. 춘향아씨 살리시오. 불쌍하게 옥에 갇힌 우리 아씨 살려주오."
"오냐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이 무슨 일이더냐. 내게 말해보아라."
"서방님이 서울 올라가시고, 춘향 각시 곱게 집안에서 수절하고 지내는듸, 신관 사또 변학도가 수청을 들라 하며 각시님을 옥에 가두었소. 수청들지 않는다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불러내어 볼기를 치더이다. 곱디고운 두 다리 걸레짝이 되었고, 월궁 항아 내린 듯 아리땁던 얼굴 쭈그렁바가지 되었소그려. 춘향각시 저승길이 머지 않았소. 우리 춘향각시 살려주오."

방자 다시 엉엉 우는데, 이도령 소매를 떨쳐 방자놈을 뿌리치더라. 방자녀석 놀란 눈으로 몽룡을 올려다 볼 제, 이도령 냉랭히 말하는데 그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갑구나.

"춘향이가 저승길이 머지 않았다고??"
"그러하오."
"그리 말하는 네놈은, 원래 이승의 존재가 아니지 않느냐."

방자녀석 화들짝 놀라 소리지르되,

"그 무슨 말씀이오, 서방님이 서울에 가시더니 나를 다 못 알아보는구려. 그런 농 마시고 빨리 우리 춘향각시 살려주오. 아니면, 춘향각시에게 그만 정이 떨어진게요? 얼굴이 쭈그렁바가지가 되었다고 괄시하실테요?"

이도령 조금도 동요치 않고 얼음장같은 눈으로 방자를 치어다보는디.

"잡귀 주제에 사자(死者)의 몸을 희롱하는 것은 괘씸하나, 내 옛정이 있어 그 몸은 차마 베기 괴롭고나. 이만 갈 곳으로 간다면 내 너그러이 보내줄 수도 있으리. 어찌하겠느냐. 내 손에 두번 죽겠느냐. 고만 떠나겠느냐."

말하며 이도령 메고 있던 봇짐에서 긴 칼을 썩 꺼내어들더라. 스르르르르릉.
칼집에서 칼 나오는 소리에 방자녀석 그만 후들후들 떨며 오줌을 지리는구나.

"가겠소. 가겠소. 가겠으니 베지 마오. 내 미처 몰랐더이다. 몰랐더이다.
허나, 곧 다시 뵙게 될 게요. 과연 춘향 각시님의 배필이 되실 만 하구려."

후들후들 떨던 방자, 말을 마치고 픽 쓰러지는데 그 몸이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지것다. 이도령 울면서 누더기 두루마기를 벗어 썩은 시체를 덮어주더라.

"내 잘못이니라. 내 잘못이니라. 내 이 고을을 뜨면 이리 될 줄 알았던 것을.
나 하나 때문에 남원 고을 백성들이 이리 죽어나갔구나. 이 죄 어이 갚을꼬."


이도령 눈물을 닦고 춘향 집으로 향하는듸. 춘향 집까지 가는 동안 누구 하나 마주치지 않았더니라. 시간은 저녁녘, 논에서 일꾼들이 돌아오고, 밥짓는 연기가 올라올 시간이건만 마을은 죽은 듯 괴괴하더라.

이몽룡 춘향 집 앞에 서서 나직이 한번 부르기를.

"이리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집 안에서 잠시 수근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심조심 문이 열리는구나. 향단이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묻되,

"누구를 찾소?"
"내가 왔네."
"내가 누구요."
"이 집 아씨 서방되는 사람이니라."

향단이가 놀라서 문을 열고 총총총 달려나오니라.

"아니 이게 누구시오. 서방님. 향단이 문안드리오. 왜 이제서야 오시나이까."

향단이가 치맛고름 끌어다 눈물 닦으며 훌쩍훌쩍 우는구나.

"이제서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게냐."
"아니, 서방님은 오시면서 고을 꼴도 못 보셨소. 일이 났소 일이 났어."
"일은 무슨 일이란 말이냐.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해 다오."

이리하여 이도령과 향단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디. 대청에 앉아있던 월매가 벌떡 일어나 반기는구나.

"아이고 이게 누구야. 왔구나. 우리 사위 왔구나.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가. 얼씨구나 이제 우리는 살았구나. 살려주시오. 우리를 살려주시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장모. 춘향이는 또 어이되었소."

춘향이 이름이 나오자, 월매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우는구나.

"아이고 춘향이, 우리 춘향이. 죽었소, 죽었어. 신관 사또 나으리께 끌려간 뒤 영영 돌아오지를 않네 그려. 마을 사람들도 이상해졌지 뭐요. 당최 뭐가 어찌된지 모르겠소만, 밤만 되면 다들 우리집 앞으로 우르르르 몰려와서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누나. 두번 볼 것 있나, 귀신에게 홀린 게지. 무서워서 향단이년과 둘이 부둥켜안고 떨면서 밤을 지새우네."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는 않던가, 장모."
"밖에서 밤새 소리만 지르다 그대로 돌아가네. 예전에 법력 높은 스님께서 쓰셨다는 부적을 문설주에 붙여놓았는데, 그덕인가 보이. 잘됐네 그려. 오늘 밤 여기서 같이 있어주게. 자네가 있으면 무섬증이 훨씬 덜 할 것 같으이."

몽룡이 말없이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가 문설주의 부적을 보고 돌아오더라.

"왜 그러시나, 사위."

이도령 웃으며 말하되,

"혹시나 장모도 귀신에게 홀려서, 날 잡아먹으려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네. 괴황지(槐黃紙)에 경면주사(鏡面朱砂), 부적이 진짜이니 그럴 리야 없겠구먼."

그 말을 듣고 월매와 향단이 함께 박장대소 하더라.

밤이 깊어 몽룡이 건넌방에서 잠을 자는듸, 문 밖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사박 사박 걷는 뽄새 향단이 년이 틀림없구나. 외씨같이 고운 발 스르르르르르 미끄러져 슬그머니 안방 문에 대고 속삭이기를,

"세상 모르고 자더이다."

안방에서 월매가 태연하게 대꾸하는듸.

"그렇겠지. 문설주의 부적믿고 헤실거리지 않았더냐. 그럼 다들 불러오너라. 자고 있다고는 해도, 저 놈은 안심할 수 없느니. 모두 함께 덮쳐 죽여버리는 쪽이 확실하겄지."

찢어지는 비명소리 쟁쟁쟁 울리고, 향단이년의 몸이 문풍지를 뚫고 안방으로 들어오는구나. 봉긋한 가슴 한복판에서 피가 폭포처럼 흐르는데. 긴 칼을 비스듬히 든 이몽룡이 향단의 시체를 모질게 밟으며 안방으로 걸어들어오는디.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사람은 베고 싶지 않지만 향단이 네년은 용서할 수 없구나. 제 목숨 하나 챙기고자 요괴에게 붙어 간자질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리 구차하게 살았던 것이냐. 그 더러운 생 이제 끝내도 불만은 없을터."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들고 몽룡이 월매를 치어다본다. 그 서늘한 눈매에 질릴법도 하다만, 늙은 월매는 연신 흐물흐물 웃는구나.

"알아차릴 거라 생각은 했네만. 어찌 안 겐가, 사위."
"문설주에 붙어있는 부(符)는 죽은 인간의 출입을 금하는 것.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네년이나, 멀쩡하게 살아있는 인간인 향단이년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느니.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너희 모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따위는."
"그럼, 춘향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분을 맺었단 말인가."

이도령 눈에서 불이 뚝뚝 돋는구나. 칼 쥔 손 불끈 쥐고 발 한 번 구르며

"너 같은 요물이 상관할 바 아니다."

한차례 기합과 함께 몽룡이 칼을 휘두르는디. 나는 참새를 쫓는 매인 양, 물고기 낚아채는 물총새인 양. 매섭게 날아드는 칼, 월매 가볍게 날아 피하는구나. 늙은 월매 히죽거리며 말하되,

"네 지금 나를 상대해보겠다는 것이냐. 나는 이미 남원 고을 백성들 수백 명의 혼을 집어삼켰느니라. 진정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말하며 월매 한번 힘을 쓰니, 와르르르르르르르. 무너진다. 무너진다. 안방 벽이 무너지누나. 몽룡이 급한 김에 집 밖으로 뛰쳐나갔것다. 이것이 웬일이냐, 설상가상에 엎친 데 덮친 격, 집 밖에는 사람들이 가득쿠나. 저마다 칼이며 쟁기며 농기구를 챙겨들고 이도령에게 다가오는디, 이도령 도로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 문 밖을 바라보고 기가 막혀 말하기를.

"요물이 불러낸 겐가. 억울한 죽음으로도 모자라서 죽은 후에도 요물에게 희롱당하는구나. 불쌍한지고. 불쌍한지고."

말하며, 이도령 그대로 뒤로 돌아 칼을 내리그엇겄다. 월매가 쓰러지는구나. 독사같은 이를 드러내고 이도령을 덮치려던 늙은 계집. 뒤를 노리고 다가오다 쏜살같이 빠른 칼에 맞은 게지.

늙은 요물, 마당에 누워 버르적 버르적. 꽥 꽥 죽겠다고 소리를 내지르는 추하디 추한 꼬라지, 이도령 가만히 내랴다보는구나.

"더럽고 추잡쿠나. 마음같아선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고 싶으나, 그래도 장모는 장모가 아닌가. 사위의 마지막 호의로 이대로 끝내주마."

부웅하고 바람을 가른 칼이 요물의 가슴을 뚫고 땅에 푸욱 박히더라. 버르적거리던 요망한 계집, 순식간에 그 모습이 바뀌는데 자세히 보니 천년 먹은 구렁이였것다. 싯퍼런 비늘이 치마저고리 속에서 번뜩번뜩하다가 빛을 잃고 축 늘어지는데, 칼을 도로 뽑아 칼집에 넣는 이도령 번듯한 얼굴엔 놀란 기색은 조금도 없더라.

문 밖에는 여전히 산 시체가 우글우글. 이도령이 죽은 구렁이를 어깨에 들쳐 메고 담장 위로 훌쩍 올라서는구나. 이도령 큰 소리쳐 말하기를

"네 놈들을 불러낸 요물은 이미 내 손에 죽었느니. 이제 너희 같은 잡것들이 더 이상 머무를 근거는 없어졌느니라. 지금 떠나면 소멸은 면할 수 있으려니와, 끝까지 버티겠다면 이 구렁이처럼 두동강이 나리."

말을 마치고 죽은 구렁이를 담장 밑으로 휙 던지니, 모여 있던 잡귀들 혼비백산하여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것다. 순식간에 집 앞에는 시체가 잔뜩. 역병 돈 마을인 양 시체 썩는 냄새 진동터라.


흐트러진 홑저고리 손에는 칼 한 자루. 휘영청 달 아래서 이도령이 걷는구나.
휘적휘적 걷는 걸음 어쩐지 위태위태. 핏발 선 눈으로 어디를 가는고 하니, 남원 고을 동헌으로 향하는 게로구나.

번듯허게 떠오른 달 대낮같이 비추오니, 백년가약 춘향이 생각 어찌 아니 나겠느냐. 이도령 옛 생각하며 사랑가 한구절 흥얼거릴 새. 그 옛날 춘향이와 함께 밤을 지새며 부르던 그 사랑가가 아니더냐.

"내 사랑 내 알뜰 내 기쁨이지야.
오호 둥둥 늬가 내 사랑이지야.
나뭇잎은 지고, 가없는 물이 하늘같이 넓은 창해같이 깊은 사랑,
정월 보름 달 밝은데 무산천봉(巫山天峯) 달구경 같은 사랑."

이리 흥얼거리며 비틀 비틀 걷다 보니 어느 새 동헌에 다다랐는디.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폐허가 다 되어 있더라. 이도령 걸거침없이 동헌 마당을 지날 제, 여기 저기 시체가 추수 곡식 널듯 널려있구나. 머리가 없는 놈, 팔이 없는 놈, 썩어서 뼈만 남은 놈. 관복 입은 놈에 기생인 양 고운 차림 한 것도 있것다.

이렇듯 동헌 안 권속이 죄다 떼죽음 당한 형상이건만, 이도령 눈하나 깜짝 안 하고 느긋하게 시체를 밟으며 노래를 불러제끼더니라.  

"생전 사랑이 이러허니 사후기약이 없을소냐.
너는 죽어 꽃이 되되 벽도 홍 삼춘화가 되고,
나는 죽어 범나비 되야 춘삼월 호시절에 네 꽃송이를 내가 담쑥 안고
너울너울 춤추게 되면 늬가 나인 줄만 알려무나."

동헌 저 안 쪽에서 하얀 신이 사뿐 사뿐. 붉은 치맛자락이 살랑 살랑. 이도령 노래에 유유히 화답하는구나.

"화로(花老)하면 접불래(蝶不來)라.
  나비 새 꽃 찾어가니 꽃되기는 내는 싫소."

예전과 똑같은 고운 태의 춘향이 생끗 웃으며 다가오는구나. 하룻밤 가는비에 피어낸 모란화가 반쯤만 피어난 듯, 먼 옛날 서시와 달기가 다시 태어난 듯. 백설같이 흰 얼굴에 앵도같은 고운 입술. 이도령 태연히 화답하여 부르되,

"그러면 될 것이 있다.
너는 죽어 종로 인경이 되고, 나는 죽어 인경마치가 되여
밤이면 이십팔수(二十八宿) 낮이면 삼십삼천(三十三天)
그저 뎅 치그들랑 늬가 날인줄 알려무나."
"인경 되기도 내사 싫고.”
"그러면 죽어 될 것이 있다.
너는 죽어 글자가 되되,
따 '지', 따 '곤', 그늘 '음', 아내 '처', 계집 '여' 자 글자가 되고,
나도 죽어 글자가 되되,
하늘 '천', 하늘 '건', 볕 '양', 지아비 '부',
사내 '남', 아들 '자'자 글자가 되여,
계집 '여' 변에 가 똑같이 붙여 서서 좋을 '호’자로만 놀아를 보자."

둘이 한바탕 노래를 마치고 물끄러미 마주보는듸. 이도령 저벅 저벅 다가가 춘향이 섬섬옥수를 덥석 잡는구나. 춘향히 새침히 고개를 틀며 방끗 웃어뵈니, 이몽룡 춘향의 앳된 목을 휘감아 그대로 담쑥 안아버리지 않았겠느냐.

춘향 한참 이리곰실 저리곰실 몸을 틀더니, 새초롬히 겨우 한마디 하네그려.

"오랫만에 뵙사옵니다 서방님. 어인일로 이 먼 남원땅까지 내려오셨나이까."

이도령 목이 메어 웅얼웅얼. 부리부리한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 떨어지누나.

"네야말로 이 어이된 일이냐. 대체 어찌된 게냐."

이 말 들은 춘향, 찬바람 쌩 돌게 몸을 빼내었것다. 백옥같은 얼굴빛 얼음장처럼 차갑더라.

"말씀드리지 아니하였더니잇까. 서방님 떠나시면 이리 될 것이라고요."

이도령 벼락이라도 맞은 양 부르르르르르 떠는구나.

"역시 네 짓이었던 게냐. 그랬던 게냐."
"서방님과 백년가약 맺고 살고 싶었더니이다. 인간이니 요물이니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춘향이로서 서방님 곁에 있고 싶었더니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오래도록 간직했던 간절한 소망도 포기할 수 있었나이다. 허나 서방님께 전 어디까지나 요물이었던 게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춘향아."
"그러니 떠나신 게지요. 그리 버리고, 무참히도 내팽겨치고 떠나신 게지요. 끝난 일입니다. 예 다 끝난 일입니다. 원래 인간과 우리는 동등하게 만나서는 안 될 관계가 아니었더니이까. 이제, 한 명만 더 먹으면 저는 소망을 이룰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이 인간을 남겨두었지요."

춘향의 옥같은 손이 허공을 가르니,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몰아치는 바람은 차츰 차츰 거세지는듸, 이도령 들고있던 칼을 뽑아 땅에 박고 몸을 의지하더라. 기왓장이 왜각대각. 기둥들이 흔들흔들. 댓돌이 들썩들썩. 바람결에 내사 쪽에서 웬 사람 하나 날아와 쿵하고 땅에 떨어지네. 춘향이 다시 한번 손을 흔들자 바람이 차츰 멎어가더라.

"변학도라는 인간이오이다. 새로 부임하신 사또 나으리지요. 제법 도를 닦은 모양이라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도 끝을 내야 할 듯 하옵니다. 지금 이 곳에서 이 자를 먹고, 춘향 일생일대의 소망을 이루리이다."

춘향의 손에서 길다란 손톱이 비져나오누나. 고운 입술을 비집고 날카로운 이빨이 자라는구나. 갈고리같은 손톱으로 웅크려있는 변학도에게 우르르르르르 달려들 때, 이도령이 척 하고 그 앞을 가로막았더니라.

"방해하실 줄 알았더니이다."

"네가 옳다. 너는 요물이고 나는 사람이다. 더 이상 서방도 무엇도 아니니, 사양치 말고 덤벼보아라, 천년 묵은 구렁이야."

멈칫하는 춘향의 눈 타오르듯 시뻘겋다. 가는 목 둥근 어깨 파르르르르르르.
춘향 아무 말 없이 손톱을 세우고 이도령에게 달려들 새, 이거이 어인일인가. 쉬이이이이이이, 이도령이 들었던 칼을 슬그머니 내리고 처억 눈을 감는구나. 춘향 손톱 이도령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놀란 춘향 손을 거뒀을 때는 어어이, 늦었구나. 늦었구나. 한참을 늦었구나. 쓰러지는 이도령을 춘향이 감싸안네.

"이 어이된 일이오니까. 왜 그리하셨나이까. 왜 막지 아니하셨나이까."
"이로서 네 소망을 이룰 수 있겠구나. 소망을 이루었으니 더 사람을 해할 일도 없을 터. 내 어차피 남도에 괴변이 일었다 하여 어명을 받잡고 내려왔던 것, 이로 내 임무도 끝나게 된 듯 하구나."
"허나, 어이하여 서방님이 목숨을 던지신 것이오니까."
"죄 없는 백성 하나라도 더 구하는 것이 내 임무이거늘, 네가 더 인명을 해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더니라. 그러나 동시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네 소망이란 것을 이루어주고 싶었느니. 네 승천을 이루어주고 싶었느니. 이 내 부르는 마지막 사랑가이니라."

싸늘히 식어가는 이도령을 붙잡고 춘향 혼자 정신나간 듯 중얼거리더라.
촛점없이 뜬 아름다운 눈에서 진주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지누나.

"소녀 소망이 무언지 알고 계셨나이까. 알고 말씀하신 것이오이까.
춘향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소이다. 춘향은 그저 사람이 되고 싶었나이다. 서방님 곁에 있는 건 안 된다 해도, 그저 서방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했소. 서방님 목숨을 댓가로 이루어지는 소망은 이미 내 소망이 아니란 말이오."

푸우욱. 넋두리하는 춘향의 등에 이도령의 칼이 꽂혔느니라. 웅크리고 있던 변사또, 어느 새 일어나 춘향의 등을 노리고 다가왔더냐. 춘향이 놀란 눈을 성큼 들어 변학도를 바라보는구나.
  
"요물을 해치웠다. 드디어 이 변학도, 요물을 해치웠다. 남도의, 아니 이 나라의 재앙이었던 천년묵은 구렁이를 해치웠다."

춘향 이도령을 품고 서서히 눈을 감았느니. 변사또 구렁이가 죽은 후에도 본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람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더라.

들리는 말로는, 변학도는 그 후 남원의 재앙을 해결한 공로로 이조판서, 호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다 지내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잘 살았다고 하더라. 말년에 남원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이야기꾼으로 하여금 재담을 꾸미게 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어 변색되어 지금은 처음 이야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느니라. 더질더질.]

  


* 더질더질: 판소리를 끝맺을 때 쓰이는 말. 유래 불명.

댓글 3
  • No Profile
    fool 06.05.22 21:15 댓글 수정 삭제
    와, 멋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화룡 06.05.27 06:50 댓글 수정 삭제
    여기서도 뵙는군요. 다시 읽어도 정말 멋진 글입니다. 그런데 원래 '넬' 입니까? 아니면 바꾸신 건가요?
  • No Profile
    06.05.29 12:17 댓글 수정 삭제
    fool/ 감사합니다 : )
    화룡/ 하하. 안녕하세요. 기분에 따라 양쪽 다 씁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94 단편 [기린] 임재영 2013.07.23 0
2093 단편 [탄생] 은총의 날 천공의도너츠 2012.03.29 0
2092 단편 나의 식인 룸메이트7 EQ 2006.10.28 0
2091 단편 남들과 조금 달랐던 어떤 소녀의 이야기 나즈 2013.04.01 0
2090 단편 냉장고 폐기법 문애지 2011.05.20 0
2089 단편 세 번째 세계2 moodern 2003.10.10 0
2088 단편 귀여운 게 제일 강해 >ㅁ<b 명비 2004.05.12 0
2087 단편 콜 미 코미 그리메 2013.03.26 0
2086 단편 카르마 폴리스(Karma police) 세뇰 2006.11.27 0
2085 단편 아기 새 김진영 2013.01.07 0
2084 단편 검은 구름2 강민수 2013.08.07 0
2083 단편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 너구리맛우동 2012.10.23 0
2082 단편 무드셀라 증후군4 제퍼리 킴 2012.02.21 0
2081 단편 야구공, 사진, 음악CD, 거울 그리고 열쇠 진영 2013.02.09 0
2080 단편 청개구리의 꿈을 꾼 이야기1 너구리맛우동 2014.02.24 0
2079 단편 동전 전쟁 빛옥 2013.03.15 0
2078 단편 바퀴3 티슬 2013.07.15 0
2077 단편 습작 (습작이 제목이 아닌건 아시죠?)3 루나 2003.07.16 0
2076 단편 푸른 고양이와 늑대소녀3 hybris 2007.07.15 0
2075 단편 그녀를 찾아서 mariate 2005.01.23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