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개인적 기록

2013.08.15 09:5308.15

개인적 기록

 

 

 

1

627

그 동안 써온 일기들을 뒤적이며 첫 문장들을 읽다 보니 내가 왜 이 기록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에 걸맞게도 제일 많았던 문장은 지긋지긋하다였다. 오늘도 그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야 할 것 같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쉽지 않고, 아무도 이해해 줄 수 없는 이야기를.

아무리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느긋하게 일기나 쓰고 있는 게 정상인 걸까? 지금도 저 노인네의 머리가 내 집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느끼려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표현하고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의뿐만 아니라 타인의 반응이 필요한 것일 테지만 경험상 동의나 이해 이외의 반응은 - 종교적 반대나, 무시, 비웃음, 오해, 기타 등등 - 나에게 지독한 소외감과 무력감만을 안겨주었다. 안타깝게도 난 이런 개인적 경험들에 대해 타인의 진심 어린 이해나 최소한의 믿음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 물론 가벼운 분위기의 여름날 이야깃거리로도 쓸만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시 집중하고 사실을 기록하자. 이 모든 것들이 적어도 내가 미쳐서 환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미치광이의 환상이라면 일관성이나 논리가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기록하다 보면 마치 과학처럼확실한 일관성이나 규칙성을 찾게 될 수도 혹은, 내 안의 광기를 찾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내가 원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결론이다.

 

최초 발견지 : 유성 아파트 104동 입구 근처, 주차된 이삿짐 센터 차량 옆에서 발견.

최초 발견 시간 : 토요일 오후 4시경

분류 기준 1 : 약한 혹은 무력한 빙의종 - 사십 대 중반 여성의 어깨 위에 존재.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 수 없음.

분류 기준 2 : 비인지종 - 몇 번 마주쳤지만 나를 인지하지 못했음. 확실하지 않음.

분류 기준 3 : 비악의종 - 햇볕이 상당히 남아있는 낮에 발견됨. 발견 당시 이명 현상 없었음. 분류기준 3-1, 3-2에 따라 악의를 가진 형태는 아니라고 판단됨

분류 기준 4 : 지속종 관찰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음

분류 기준 5, 6 : 현재로서는 알 수 없음

관찰 사항 : 인간형. 몸 전체 형태 온전. 남성이며 나이는 60대 후반이나 70대로 추정. 키는 160cm 정도 되어 보이나 허리가 굽어 있어 더 작아 보임. 짧은 상고머리 백발에 면도를 며칠 못해서 생긴 듯한 짧은 수염. 눈 없음(구멍 형태). 손가락보다 2-3cm 정도 더 자란 긴 손톱. 왜소한 몸매에 잿빛 한복 바지 저고리 차림. 신발을 신고 있는 듯 하나 다리와 발 부분은 상체에 비해 뚜렷함이 떨어짐. 왼손에 1m정도 되는 지팡이 형태의 막대를 허공에 짚고 있음.

특이 사항 : 여성의 어깨에 직접 접촉하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떠 있으며 움직임이 거의 없음. 여성 머리와 어깨 위 공간에 마치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여성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

 

, 오늘만 해도 한참을 본 것 같은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분류기준 2의 비인지종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관찰 시간이 짧아 확신할 수 없지만 빙의된 여성과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별다를 것도 없고, 비인지종에, 비악의종인데도 이게 날 미치게 만드는 이유는 이게 지속종인데다가 빙의된 여자가 우리 아파트, 우리 집 바로 아랫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이다. 이건 그냥 알 수 밖에 없었다. 여자 키가 150cm 좀 넘어 보이더니 둘의 키를 합치면 딱 아파트 한 층 하고도 머리 하나 높이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랫집 여자가 돌아다니면 내 집 방바닥에 노인의 머리가 여자의 궤적에 따라 움직인다. 이건 짜증나는 일이다. 저녁 차리다가 깜짝 놀라 애써 끓인 김치찌개를 엎은 건 그냥 넘어간다 하더라도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그나마 여자가 누워 자거나 앉아 있으면 머리가 내 집 방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와 돌아다닐 일이 없다는 걸 다행이라 해야 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좀 맛이 가는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친구와 얘기하고 있을 때라든지, 이럴 때 근처에 인지종이라도 하나 나타나면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단 둘이 만나서도 나는 방백이라도 하듯이 두 명을 보고 이야기하고 친구는 나만 보고 이야기하는 상황. 사적인,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 주는 대화가 될 리가 없다. 보이는 걸 애써 무시하려니 내 삶 자체가 한 편의 연극이고 난 무명의 연극배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가끔씩 관객석으로 돌진하거나 다른 배우들에게 관객들을 가리키며 저거 안보여?’ 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

리스너 실행

음성 메모 어플리케이션, 리스너를 실행합니다. 카테고리를 정하시겠습니까?’

씨크릿 폴더, 새파일 작성

씨크릿 폴더에 기록됩니다. 폴더 안에는 총 16개의 음성 메모가 존재합니다. 새 파일의 파일명을 정하시겠습니까?’

“17, 괄호 열고 날짜, 시간, 현재 위치 기록, 괄호 닫고

‘17(627, 오후 0832, 경기도 안성시 공도 사거리), 삐 소리가 울린 후 기록이 시작됩니다. 삐이.’

퇴근하고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술 한잔 하게 될지도 몰라서 집에 차 놓고 택시 타고 왔어. 근처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또 그 느낌을 받았어. 어차피 이 폴더에 저장되는 내용은 다 그런 내용이니까 반복되는 거 같긴 하지만. 기록을 시작한 이후로도 벌써 열 일곱 번째구나. 걸어가다가 또 그 느낌이 들면서······. , 저번보다 확실히 느꼈어. 그 동안은 막연하게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내 주변의 공기 밀도가 높아지는 느낌이라고 하는 게 더 비슷한 표현인 것 같아. 젤리 정도의 수준까지. 끈적임이 없고,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젤리를 통과하는 기분 같았어.

택시 기사는 잠시 차를 세워두고 무언가를 하다가 주행 차선으로 진입하며 앞으로 나갔는데, , 택시 앞에 어두운 색 승합차가 서 있었어. 시야를 막고 있었다는 거야. 아무튼 출발하는데 급하게 엑셀을 밟더라고. 근데 반대편에서 피자배달 오토바이가 라이트도 안 켜고 오고 있었거든. 택시가 급하게 엑셀을 밟았으니 중앙선 너머까지 나갔고, 오토바이도 중앙선 근처로 달리고 있었던 것 같아. . 오토바이 기사, 헬멧도 안 썼는데 붕 날아가고. 오토바이는 박살이 나면서 길 옆에 주차되어 있던 화물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딱 거기까지만 보였어. 오토바이 탔던 사람이 얼마나 다쳤는지 뭐 그런 건 못 봤어.

난 어째야 하나 또 고민했어. 사실 며칠 전에 봤던 것에 비하면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다시 택시 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나? 그 때 난 택시에서 내려서 20미터쯤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잠깐 제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택시 쪽으로 걸어갔어. 승합차가 시야를 막고 있어서 아주 가까이 가서야 택시 기사가 다시 보였어. 택시 기사는 내가 택시비로 준 돈이랑 자기 돈이랑 정리하고 있었어. 그래서 멈춰있다가 출발했던 모양이야. 난 잠시 멈춰 서서 택시를 보다가, 정말 오토바이가 오는지 보다가 하면서 또 망설였어. 택시 기사에게 말을 걸어 출발 못하게 시간을 끌어볼까? 뭐라고 말을 하지. 생각해보면 뭐라고 하든 그 택시 기사 다시 볼일도 없고 그냥 오토바이 지나가는 것만 확인하고 보내주면 되잖아. 정말 잠깐만 시간을 끌었으면······. 근데 그러는 게 왠지 너무 무서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평소 스타일이 아냐. 그 느낌을 받은 후엔 원래의 나보다 많이 소심해져. 그래, 말하다 보니 알 것 같다. 내 행동의 결과가 걱정되어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고 그저 행동을 한다는 거 자체가 두려운 느낌이었어. 나는 결과에 대해 걱정할지언정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아. 근데 이건 과정 자체가 두려운 거야. 일단 반대편에서 오는 오토바이가 안 보여서 조금쯤 안심 했었나 봐. 멍청하게. 이 녹음파일이 열 일곱 번째라며. 잠깐 망설이는 찰라 택시 기사는 핸드폰을 얼굴과 어깨에 사이에 낀 채 급하게 출발했고 골목에서 튀어나온 오토바이랑 부딪쳤어. 그 오토바이가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에서 튀어나왔던 거야. 난 멍청하게 도로 반대편 끝자락만 보고 있었고. 오토바이 기사는 크게 다친 것 같아. 지금은 좀 떨어져 있는데 도로에 핏자국이 보여. 경찰이 먼저 도착했고 응급차는 아직이야.

, 이제 무슨 말을 하지? 나란 사람도 점점 이상해져 간다. 교통사고현장에서 녹음기 켜 놓고 혼자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그래. 매번 느껴왔던 거지만 난 왜 나한테 이런 게 보이는지 궁금해. 방금 전에도 불과 1, 2분 정도 후의 미래를 본 건데······. 대체 이게 왜 보이는 걸까. 그것도 꼭 사고 장면만. 내 주변에선 왜 이렇게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걸까. 내가 택시 기사를 붙잡고 시간을 끌었으면 저 오토바이 기사는 그냥 사고 없이 이 길을 지나갈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 내가 미래를 본다는 것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거고 내가 간섭해서 미래가 바뀌면 내가 본건 미래가 아니게 돼. 내가 방금 전 사고를 막아야 했나? 막으려고 했으면 막아졌을까? 막아졌으면 내가 그 사고를 막은 걸까? 내가 사고를 막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도 않은 거잖아. ······. 그래, 그래도 이런 일들이 나한테만 보인다는 건 막으라는 뜻 아닐까? 근데 확실히 망설이게 하는 두려움이 있어. 그게 뭔질 모르겠어. 일단 지금은 친구 만나러 가야 하는데······. 중렬이 녀석, 담배 냄새 난다고 또 뭐라고 하겠네. 근데 정말 이럴 때 담배라도 없으면 미칠 것 같아. 사고로 다친 사람이 꼭 나 땜에 다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든다고. 아무에게라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다. 믿어줄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지. 아니, 믿어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지. 이런 얘기 솔직히 나도 못 믿겠다. , 늦겠다. 음성메모종료.”

음성 메모를 종료합니다. 저장이 완료되었습니다. 클라우드에 저장하시겠습니까?’

안 해, 어플 종료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합니다. 당신을 들어주고 기억해주는 리스너!’

 

 

 


 

3

소현씨, 뭐해?”

, ?”

초록색과 노란색. 호기심과 호의다. 괜찮겠다 싶어 그냥 사실대로 얘기한다.

그냥 취미 생활이어요. 어제 집에서 작업하던 건데, 점심시간이니까······.

뭐 그리는 거야? , 실력 좋은데?”

아녜요, 그냥 취미로······.

김 과장은 내 뒤에 서서 컴퓨터 모니터에 떠 있는 내 작업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감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인물보다 인물주위 색에 집중한 느낌이 드는데······. , 이 사람 우리 아는 사람이야?”

, 아녜요, 그냥······.

나는 순간 당황했다. 인물의 얼굴이나 특징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업물이었는데 어떻게 안거지? 나도 모르는 사이 김 과장을 바라보는 내 눈길은 놀라움에서 호기심으로, 묘한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네. 느낌 있고. 잘 해봐.”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보이는 김 과장의 색은 흥미 잃음을 나타내는 회색이었다. 나도 바로 기대를 접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의 감정을 그 사람 주위에 떠오르는 색으로 알 수 있다.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말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끼면 자기 주위로 감정의 강약에 따라 특정한 색을 흩뿌린다.

밀려오는 과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도 작업을 하느라 밤새는 걸 밥 먹듯이 하던 미대 시절. 멍한 머리로는 며칠 밤을 샌 건지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 문제처럼 느끼던 순간, 작업실에서 나와 학생 식당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총천연색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내 시야 뒤로 색깔 전구를 켜서 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빛깔들은 천천히 변하고 있었고 난 멀미를 느끼며 쓰러졌다. 나에게 달려오는 사람들 주변의 색이 오색찬란하게 변하고 있었다.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갈색에서 주황색으로. 그 일이 있은 후 겁을 집어먹은 나는 안과에도 가보고 과제까지 포기하며 며칠 동안 집에서만 푹 쉬어보기도 했지만 그런 현상은 계속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색의 강도는 많이 약해졌지만 오히려 색의 띠는 훨씬 세세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해 보았지만 처음엔 은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던 친구들도 내가 정색을 하고 사실이라고 말하면 대놓고 관심병 환자 취급을 했다. 내 앞에서 날 이해해주는 척 말하는 친구도 몸 주위엔 붉은색과 흰색의 사이의 색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불신과 가식의 색들! 그제서야 난 다른 사람의 감정과 내 감정 사이에 존재하는 안전장치들, 예의나 가식, 선의의 거짓말, 의식적인 미소들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주변인의 동조를 포기해버린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관찰에 대한 강박관념이 불러온 정신 질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망설임 끝에 정신과 진료도 받아보았다. 난 아직도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내 과거와 색이 보이는 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결국 난 그 전의 나를 포기하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며 난 사람마다 전반적인 색의 띠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정한 색의 감정을 뿜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강도가 다 다르고 주변에 주는 영향도 달랐다.  누군가 그런 강렬한 색의 띠를 내 뿜을 때는 주변 사람들도 자신의 색을 추스르며 반응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걸 카리스마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이미 왠지 모를 두려움에 미술 쪽 꿈을 포기해버린 나였지만, 언젠가부터 사람과 사람 주변의 색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파일로 저장하여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그림도 그런 내 개인적 기록들 중 하나다.

소현씨, 오늘 회사 전체 회식 있는 거 알지? 사람 많을 테니까 일 있으면 꼭 참석 안 해도 되긴 해. 나도 대충 1차만 하고 갈꺼거든.”

나의 상념은 김 과장의 목소리에 잠시 멈추었다.

아녜요. 꼭 참석할래요.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그래? 신입사원들은 회식 같은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허허거리며 웃는 김 과장의 말에 마주 웃어주었다. 사람들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한 사람이었다. 가끔씩 색의 띠가 그려지지 않는 단 한 사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 그가 보통 사람들과 왜 달라 보이는지 꼭 알고 싶다.

 


 

 

3-1

왁자지껄하던 갈비집에서의 전체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가자는 무리와 간단하게 술을 한 잔 더하자는 무리로 나뉘어 헤어졌다. 보통 부서별로 모이는 분위기였지만 우리 부서 상급자였던 김 과장이 1차만 마치고 집으로 간다기에 난 자연스럽게 그 사람 무리에 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구소 팀장과 맥주 한 잔을 더 하기로 했고, 술이 모자라 보였던 연구소 정 주임, 그리고 내가 합류하여 조촐한 소모임이 되었다. 모두들 술기운이 조금씩 오를 무렵, 연구소 팀장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정 주임, 아까 그 얘기 뭐야? 그 귀신 얘기.”

? , 그냥 좀 분위기가 심심한 것 같아서 해 본 얘깁니다.”

정 주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듯 했지만 팀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연구소 직원이 그렇게 비상식적인 얘길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면 어떻게 해. 부서 신뢰도 떨어지게.  그냥 웃자고 한 얘기인 줄은 알겠는데, 그런 곳에서 보이는 직원들의 이미지가 의외로 큰 영향을 끼친다고. 그렇지, 박 과장?”

1차에서 정 주임이 짧게 했던 귀신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 주임은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한 후 별 말 없이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지만 연구소 팀장은 취기 때문인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같은 잔소리를 동어반복적으로 해댔고, 정주임 주변을 감싸는 빛의 띠는 불만을 나타내는 빛깔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팀장님. 그냥 가볍게 넘어가는 분위기였고 사람들도 좋아하던데요, . 우리 팀장님은 연구소 일만 걸리면 너무 걱정이 많으셔.”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그가 나섰지만 정 주임은 그것조차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에요. 박 과장님. 제가 아까 한 이야기가 들은 얘기가 아니고 진짜로 본 거라면 어떻겠어요?”

?”

진짜로 본거라면 어떠시겠냐구요. 저는요,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며 자라왔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는 없지만 저는 제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죠.”

, 진짜 보인다고? 그럼 지금 내 주변에도 뭔가 있어?”

정 주임의 진지한 반응에 그는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정 주임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다들 반응이 똑같네요. 어딘가에 귀신을 본다고 얘기하면 이렇게 물어봐라 라는 교본이라도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항상 보이는 게 아니어요. 어쩔 때는 보이고, 어쩔 때는 안보이고······.

연구소 팀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더니 이젠 아예 고개를 모로 돌리고 실없는 녀석이군 같은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신을 본다는 건 좀 허무맹랑하긴 해도 난 정 주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 혹은 그가 본 것들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도와주고 싶은 맘이 들었다.

꼭 귀신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살면서 자기가 알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들을 하잖아요. 보통은 그냥 무시하게 되고, 잊게 되죠. 하지만 그런 경험이 반복된다면 누구나 정 주임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라던가요.”

점점······. 소현씨까지 왜 그래? 그래, 소현씨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는데?”

연구소 팀장의 공격적인 반응에 난 잠시 당황했지만 그냥 대답하기로 했다.

전 사람 주변에 빛이 퍼져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빛이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당할 때마다 당혹스러운 이 느낌. 대놓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팀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도, 심지어 정 주임마저도 내게 불신의 빛깔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니, 귀신을 본다는 건 말이 되고 감정의 빛을 본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건가? 난 억울한 마음에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 과장님은 어때요? 그런 경험 없나요? 뭔가 이상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박 과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 난 뭐 그리 특별하게 살아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3-2

회식이 이상한 분위기로 마무리되고 왠지 짜증이 난 나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애초에 회식에 참석하기로 한 목적을 간신히 기억해내고는 그가 같은 방향이니 태워준다는 말에 얼른 그의 차에 올랐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회식에 2차까지 참석하고도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묘하게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운전석 옆에 앉아 그의 모습을 틈틈이 관찰했다. 확실히 그는 보통 사람과 미묘하게 다른 색 띠를 가지고 있었다. 그걸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워서 본래의 목적을 잊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 보낼 지경이었다.

오늘 연구소 정 주임 말이야, 좀 무섭지 않았어?”

나는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운전하느라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 귀신 이야기······. 난 그런 거 안 믿는 편인데. 2차 때 정 주임 말 듣고 보니 왠지 진짜 같았거든.”

, 글쎄요. 전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소현씨는 그런 거 믿어?”

아뇨. 안 믿는 편이어요. 하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면 그런 실감나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을 꺼라 생각해요.”

그래. 짧았지만 뭔가, 디테일 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소현씨 말도 뭔가 의미심장하네. 아까 사람 주위에서 빛을 봤다는 건 무슨 얘기야?”

그 때, 그의 핸드폰 화면에서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박 과장님, 알람 떴는데요. 무슨 알람이어요?”

그는 잠시 차량용 거치대에 걸쳐있는 핸드폰 액정 화면을 내려다 보더니 말했다.

, 그거. ‘리스너라는 음성 메모 어플이야. 메뉴가 다 음성명령어로 작동하고 음성인식률이 좋아서 쓰는데, 소현씨도 한번 써봐.”

 

 

 

 

 

sebyul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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