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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랑은 샘물과 같아

2006.04.23 18:5604.23

사랑은 샘물과 같아






1.

컴퓨터가 키릭거리며 데이터가 빽빽히 써진 종이를 뱉어냈다. 샤이안은 대기권 너머 허공에 떠 있는 인공위성이 보내주는 기후 데이터를 파악한 후 한숨을 쉬었다. 그는 까칠한 눈가를 문지르며 옆의 여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로이드?"

억양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여인은 대답했다.

"건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 지난 30년간 이어졌던 가뭄의 계속이야. 제기랄!"

쾅, 하고 키보드를 내려친 그는 성마르게 외쳤다.

"알겠어? 벌써 30년이야. 아니, 34년! 살아남은 인간들이 죽도록 애쓴 결과가 바로 이거야. 변한게 없어! 나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아무것도 없어. 달라진 게 없는거야. 이대로 모두 말라붙어 죽어버리는 거라고! 대체 뭐야, 뭐가 문제야!"

"전지구적인 기후제어에 필요한 기기수의 부족, 전세대의 무분별한 자원 낭비와 소비 개체 수의 급격한 증가, 기후 제어 기술 정교화가 가능한 인력 감소."

"그리고 곧 0이 되겠지. 어떻게든 해야해."

그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컴퓨터가 뱉어놓은 종이더미를 뒤적거렸다.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갈증으로 천만명이 죽었어. 이대로라면 인류멸망도 농담이 아니야. 어떻게든 해야 해, 어떻게든......"

여인은 남자가 데이터를 훝고 그 결과를 계산하고 절망하고 다시 프로그램을 짜 아득한 천공에 있는 위성에 전송하는 과정을 미동도 없이 지켜보았다. 비를 내리려 애쓰는 몸부림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가 쓰러지자 어깨에 들쳐업고 별 힘도 들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지하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문을 열자 기다리던 아이들이 덤벼들었다. 마른 새소리같은 높고 쉰 목소리가 재잘재잘 쏟아졌다. 로이드, 샤이안 또 아파? 많이 아파? 밥 줘! 배고파, 물 줘, 또 바람이 불었어. 서쪽 건물이 무너졌어. 리에의 양말 한쪽이 날아갔어. 르하의 무덤에 꽃이 피었어. 하얀 꽃......여인은 그녀 주위를 까불며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싸인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햇볕가리개가 창에 붙은 방의 침대에 내려놓으니 눈치빠른 아이 하나가 물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머리를 받히고 입가에 컵을 대자 샤이안은 말라붙은 입술로 몇모금의 물을 달디달게 삼키고 잠이 들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강우의 형성에 매달렸다. 여인은 그가 그대로 자게 놔 두었다. 밖으로 나가, 아이들의 놀다 생긴 상처와 찢어진 의복을 고쳐주고 압축 식량을 약간의 조미료와 함께 요리하여 주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서기 23세기 예고없는 대지진으로 인류는 인구의 1/3을 잃었다. 문명은 뒤집어진 땅 아래 갖혔고 강철과 코크리트로 뒤덮힌 폐허의 원시 위에 살아남은 인간들이 적응할 동안 또 1/3이 죽었다. 혼란과 소요 속에 겨우 실낱 같은 질서와 안정이 짜여졌을 때 이미 대지진 이전은 생존자들에게 고대나 다름 없었다. 전세대가 쌓아올린 바벨탑은 후손들에게 전승되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것이다. 지식의 전달은 아주 일부만이 이루어졌으며, 그나마도 편향되어 있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발명되었던 소모품들은 사라졌고 생존만이 우선시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는가 여겼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는 과거의 기술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강수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지하수와 강바닥이 말라붙고 대기 중에는 수분 대신 흙먼지만 떠돌았다. 오랜 가뭄으로 수확량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몇 해가 흐르자 뿌릴 씨앗이 없었다. 나무들이 고사하고 풀은 시들어갔으며 반영구적으로 떠 있는 위성은 지상의 살아남은 컴퓨터로 황토색의 지구를 찍어보냈다. 전지구적인 사막화는 농담처럼 쉽게 진행되었다. 멸종의 끄트머리에 겨우 멈춰 있던 인류는 장난같이 죽었다.

대지진 이전의 지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은 말라붙은 대지를 떠나 대륙 한가운데 있는 고원으로 갔다. 전시대의 폐허가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 그곳으로. 헐벗은 몸과 파스라니 선 마음으로 그들은 갔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쉽고 속히 되지 않을 일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 먹을 식량과 입을 옷과 들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을 가지고 고원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아무도 전염병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이 고원에 정착하여 고대의 기기들을 살리고, 가뭄의 원인을 파악하려 한지 7년 만이었다. 미숙했던 손놀림이 빨라지고 아이들이 자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나 인류종말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고원 아래로 내려가 의사를 부를 겨를도 없이 그들은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애도할 여력도 남지 않은 텅 빈 정신으로 썩지 않고 말라가는 시체를 땅에 묻었다. 그렇게 죽은 이가 스물 일곱, 살아남은 자는 일곱명의 아이들에 이제 서른이 넘어가는 샤이안을 포함하여 여덟이었다.

고원 한 귀퉁이의 스물 일곱개의 흙더미는 점차 낮아져가고 있었다. 고원의 거친 바람에 쌓아올린 흙더미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몇년 후면 무덤이 있었던 흔적도 없을 것이다. 로이드는 허리를 굽히고 흙과 돌 사이에서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풀꽃을 바라보았다. 흰 점같은 꽃잎이 연약한 줄기 끝에 붙어있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였다.

그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건물에서 걸어나온 샤이안은 둥근 달을 올려다보고 환한 빛이 내리는 텅 빈 땅을 보았다. 나즈막하게 사라져가는 스물일곱개의 무덤과 무덤이 필요없는 한명의 여인을 바라보다 그는 물었다.

"뭐해."
"꽃을 보고 있습니다."
"꽃?"
"아이들이 피었다고 했습니다. 실물은 처음이니 관찰해 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아. 넌 처음이겠군.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꽃이 피었지?"

아마 저지대로 의사를 부르려 내려갔던 르하의 옷깃에 묻어왔던 씨앗으로 추측됩니다, 라고 로이드는 말하지 않았다. 병에 걸린 몸으로 의사를 찾아 고원을 내려갔던 그녀는 기력이 쇠해, 채 길의 절반도 가지 못하고 아직 숨이 붙어 있던 환자들의 구조를 받아 돌아왔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은 땅과 가장 멀었다. 전승자들 중 제일 젊었던 샤이안과 르하 둘 다 병에 걸렸지만 결국 살아남은 이는 샤이안 혼자였다. 둘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연인이었다.

"르하가 좋아하겠어. 그녀는 꽃을 참 좋아했거든. 사람이 만든 꽃다발은 별관심 없었지만 들이나 길가 아무데나 핀 들꽃을 좋아했지."

뭔가 추억이 떠올랐는지 샤이안의 눈썹이 희미하게 펴졌다. 그의 눈길이 찬찬히 로이드의 눈가와 콧날를 훝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여인은 짐작해 본다. 르하는 그녀를 만들었다. 그녀는 르하의 딸이다.

"저는 그녀와 닮지 않았습니다. 제 얼굴은 안드로이드 표준형 Nomal-1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예상치 못한 안드로이드의 반응에 그는 나지막히 웃었다.

"그게 아냐. 르하도 너를 참 좋아했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단순한 무기물인데도 자기 창조물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다 망가진 시스템을 겨우겨우 복구하고 프로그램을 짜다가......피곤으로 눈이 새빨개져 있으면서도 자기 전에는 꼭 너를 손질했지. 널 완성시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당장 눈앞의 문제가 급했던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애썼다. 샤이안도 같이 지낸지 삼년만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움직였을 때 기뻐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지. 대지진 이후 기술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아마 이전에는 너같은 안드로이드들이 많았을거야."
"그렇습니다. 최다 180종까지 존재하여 사무 보조, 공사, 집안일, 서비스 직종 등 소모인력을 대체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아, 그래. 전세대 기록도 입력되어 있었지?"
"네."

그녀에게는 현재 생존에 필요한 각종 실용지식만이 아니라 대지진 이전의 지식도 상당량 입력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지 문자화된 기록과 상식수준의 지식만이었다. 전문적인 -프로그램 생성, 조작, 제어- 지식은 그녀의 영역 밖이었다. 그는 메마른 바람에 섞인 엷은 먼지가 내려앉은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천재였으나 결국 기후 제어 프로그램을 완성하지 못한 채 자신의 분신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연인을 생각했다.

로이드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인 가뭄의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신경질적인 헛소리를 받아주었고, 자신의 식사를 챙기기에도 정신이 없는 샤이안 대신 아이들의 의식주를 챙겨주었다. 로이드가 없었다면 작업은 몇달 분은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는 불현듯 사라진 연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꼈으나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자연을 사랑한 만큼 대체로 인간에게 냉소적이었던 그녀의 이미지가 로이드와 결합되지 않은 탓이었다. 로이드는 그녀와 달리 항시 무표정했고(미세조정이 불가능한 근육 탓이었다) 어떤 일이든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침착한 자세로 매일을 보냈다. 재난에 대한 오갈데없는 분노를 발작적인 히스테리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한 침묵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난으로 표출하던 그녀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어쨌든 죽은 이는 미화되는 법이라, 그는 르하의 혹독한 비난마저도 그리웠다. 그 탓인지 그는 불현듯 충동적으로 말했다.

"망가지지 않도록 해. 넌 그녀 최고의 작품이니까."
"아니요. 전 최대의 실패작입니다."

그녀는 무감정하지만 빠르게 말하고 성큼성큼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가 반문할 새도 없이. 부족한 전기는 모조리 컴퓨터로 돌려야했기에 인공적인 조명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혼자 서 있게 되었다.

깊은 밤 사위는 어두워 시선을 돌릴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그는 그저, 가만히, 야트막한 무덤 가에 흔들리는 하얀 꽃을 바라보았다.






이제 사십이 넘어가는 샤이안은 이 폐허-기후 제어 시설-를 이어받을 뒷세대를 위해 연구 중에도 가끔 시간을 내서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다. 기후 제어 연구는 진전이 없었고 시스템은 번번히 에러를 일으켰다. 가끔 성공할 때도 있었으나 이미 사막화된 대지에 내리는 비는 의미없이 모래 사이로 스며들 뿐 생명수는 되지 못했다. 전지구적인 건기의 문제는 뒷세대까지 넘어갈 모양이었다.

마르고 쉰 목소리로 인공위성과 지하의 컴퓨터를 연결시키는 프로그램 언어에 대해 설명하는 샤이안 앞에는 졸린 눈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세 명이 모자랐다. 로이드는 교실(로 정해진 낡은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텅 빈 방의 창문 몇개를 곁눈질하며 지나친 그녀는 밖으로 나와 건물 뒤로 돌아갔다. 예전에 상점가였던 건물들 뒤로 돌아가자 사라진 셋 중 둘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열렬히 키스를 나누던 둘은 여인을 눈치채자 얼굴이 빨개진 채 떨어졌다. 그녀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점심 시간 전에는 들어가도록 해. 그리고 라한 못 봤니."

아직 입맞춤의 몽롱함에 젖어있던 두쌍의 눈동자가 금방 당황과 난처함을 띠는 것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알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들 앞을 나왔다. 비를 못 봐 바짝 말라있는 땅 위에 덮힌 모래는 해변가의 것처럼 고왔다. 이제 하늘의 한가운데에 올라오는 태양은 시간이 정오임을 알려주었고 모래 위 무거운 짐을 진 듯 깊게 끌린 발자국은 아이가 간 방향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흔적을 쫓지 않았다.

닷새 후 두달에 한번 올라오는 식량차가 비탈에서 굴러 목이 부러진 아이의 시체를 싣고 왔다. 샤이안과 남은 여섯 아이들은 이제 평지가 된 무덤가로 가 스물여덟번째 무덤을 파고 아이를 묻어주었다. 간략한 애도의 의식을 마치고 그들이 하나하나 건물로 돌아갔을 때 마지막으로 무덤 앞에 남은, 건물 그림자에서 키스를 하던 둘 중 여자애-리에-는 로이드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그 때 쫓아갔다면 라한은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너도 쫓지 않았지."

이제 완연히 성인티가 나는 리에는 말문이 막혀 대신 눈물을 글썽거렸다. 로이드는 식량과 옷을 챙겨 떠나던 아이를 나머지 아이들이 전송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둘이나 셋이 같이 갔으면 아이는 살았으리라. 샤이안이나 로이드에게 그가 떠나는 사실을 일러바쳤다면 아이는 살았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문제와 샤이안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 짐을 떠맡을 이의 수는 많을수록 좋았다. 이 시대에 죽음은 너무 가까웠고 짐은 무거웠으며 맡을 이는 적었으므로. 떠날 형제를 말릴 수는 없었으나 같이 떠날 수는 없었다.

로이드는 언제나 그렇듯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오늘부터 애들하고 방을 따로 써야겠다. 짐을 챙겨서 나와."
"짐? 왜요? 왜 방을 따로 써요?"

검은 눈에 눈물이 그렁한채 아무 말도 못하던 리에는 거칠게 받아쳤다. 로이드는 그녀의 배를 내려다봤다.

"앞으로 몸이 좋지 않을거야. 의사를 매번 이 위로 부르는 건 힘드니까 독방에서 몸관리를 하도록 해. 방에 누구를 들이던 그건 네 마음이니 제한할 생각은 없다."

말을 알아들은 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그럴리가, 하고 넋나간 듯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에 두고 로이드는 샤이안의 연구실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자랐고 어른이 되었다. 무덤가에 묻힌 아이를 제외한 여섯은 모두 장성하여 넷은 서로 맺어졌고 남은 둘은 고원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는 여행을 떠났으며 하나는 신부감을 찾아 다시 돌아왔다. 고원 위의 아이는 이제 세명이 되었다. 어른은 여섯, 노인과 안드로이드가 하나였다. 로이드는 여전히 아이들을 돌보고 샤이안의 주변정리를 도맡아했다. 그리고 '어른'은 모두 지하의 컴퓨터를 다룰 수 있었으며 기본 지식도 샤이안 못지 않았다.

연구원이 늘었으므로 샤이안의 연구는 분명 쉬워져야 했으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기후 제어 시스템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지, 지구의 순환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구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그들의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식량차는 이미 오래 전에 끊겼기에 로이드는 식량을 충분히 비축했다. 석달에 한번씩 그들은 고원을 내려가 민가에서 식량을 직접 조달했다.

아이들은 빨리 자랐다. 로이드는 매달 식량 계산을 다시 하고 조달 목록에 옷을 추가해야 했다. 제일 성장이 빠른 아이는 처음 태어난, 리에의 딸 아리였다. 먼지 묻은 머리칼을 양갈래로 묶고 아직 어린 사촌들 사이에서 대장 행세를 하며 뛰어다니는 애는 갓난애처럼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뭐든 먹었고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고원 위에서 금방 새로운 놀이를 찾아 뛰놀았다.

식당에 뛰어들어온 아리를 로이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심한 시선에 익숙한 아리는 명랑하게 손을 흔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물을 그녀는 조심스레 컵에 받았다. 삼년전, 우연히 르하의 연구실 한귀퉁이에서 찾은 설계도로 만든 수분 생성기는 작동시키면 공기를 이온 단위로 분해 조합하는 동시에 대기중의 수분을 끌어들여 하루에 한웅큼씩의 물을 만들어냈다. 시제품이었으나 완성품의 설계도는 없었고 남은 이들은 다만 오래전에 떠난 그녀의 천재성을 아까워했다.

좁은 컵 바닥을 겨우 덮을 정도로 물이 차자 그녀는 컵을 조심스레 들었다.

"어디에 쓸거지?"

로이드가 묻자 아리는 컵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고는 창 바깥을 턱짓했다.

"저어기, 꽃이 피었어. 거기 주려구 갖고 가."
"꽃?"
"응. 봄마다 피는 하얀 꽃."
"무덤가에?"

무슨 뜻인지 몰라 아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이드는 고개를 젓고는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갔다.

"꽃은 어디 있지?"
"저기. 앞에 하얀 거 보여?"

겨우 한움큼이나 될까, 보스라니 모여 핀 하얀 꽃들. 봉분이 있어야 할 자리 앞에 대신 묘비처럼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꽃무리를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가져다 주렴. 대신 하루에 그만큼 뿐이야. 알았지."
"응!"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떡이고 두 손으로 잔을 꼭 쥔 채 달려나갔다. 갈래머리를 찰랑이며 뛰어간 아이는 꽃무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로이드는 자리로 돌아가 시멘트를 물과 섞는 작업을 계속했다. 대지진을 거치고 고원의 바람을 계속 맞은 시설은 몹시 낡아 벽에 깊은 금이 가 있어 보수가 필요했다. 리에를 비롯한 '어른'들은 폐건물을 폐쇄하고 짐을 옮기면 된다고 하였으나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이상 위험지대를 방치할 순 없었다. 많은 양이었으나 로이드는 힘들이지 않고 시멘트 가루들이 물과 섞여 죽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 저었다.

로이드는 시멘트 통을 끌고 폐건물로 들어가 갈라진 벽에 눌러발랐다. 시멘트 통을 비운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황혼이 내려앉고 있었다. 지평선에 가라앉는 태양은 눈이 아플 정도로 시뻘건 빛을 사방에 퍼트렸으나 그녀는 태양 대신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에 시선을 주었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그림자를 연신 더욱 짙게 만들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더 긴 그림자. 표준 여성형인 로이드보다 훌쩍 큰 키의 리에는 아이들을 곁눈질하곤 다급히 로이드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로이드, 샤이안 아저씨가 이상해요."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리에는 다시 한번 아이들이 자신들을 주시하는지 살피고, 빠르게 말했다.

"같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니터를 다 끄시곤 '나가!'하고 소리지르셨어요. 손을 마구 떨고, 우리 말을 듣지도 않고 무조건 등을 밀어 내보냈어요. 머리가 아프신지 신음소리를 내시고......우시는 것 같기도 해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리에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제 '어른'이었지만 로이드와 샤이안 앞에서는 아직 아이이다. 둘은 그들의 볼살이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은 둘의 키가 얼마나 컸던지 기억한다. 둘은 굳건한 나무 같았고 바위같이 변함없었고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둘은 '어른의 어른'이었다. 이제까지는.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았던 이의 흔들림을 보고 당황하는 리에에게, 로이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연구실에 있겠구나."
"예......어떻게 된 거죠?"
"그건 내가 너한테 물은 말이었어. 네가 모르니 내가 알아봐야 겠다."

로이드는 리에를 놓아두고 빠른 걸음으로 연구실로 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연구실 문 앞에는 리에 외에 남은 '어른'들이 모여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로이드를 본 얼굴들이 밝아졌다. 그녀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빗장이 질리거나 잠겨있지는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니 넋나간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듯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모니터에 손을 대고 일어서 있던 샤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흐릿하고 얼굴 근육이 경련하고 있었다.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아 로이드가 샤이안의 어깨를 잡자 그녀의 팔을 부여잡은 그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히스테리컬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지하 연구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팔에 몸을 의지한 채 몸 전체를 떨며 웃는 그를 로이드는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웃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로이드는 어깨부분의 옷 천이 물을 먹어 묵직해지는 것을 알았다.

"로이드......로이드."
"네."
"비는."

목이 잠겨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기다렸다. 한참을.

"비는 내리고 있었던 거야."
"네."
"우리는."
"네."

메마른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의 머리칼이 로이드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우리는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거야."
"네."
"비는."
"네."
"계속......계속. 계속."

그녀는 억양없이 말했다.

"내리고 있었습니다."

샤이안은 그녀의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다. 로이드는 평소와 같이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았다.

"알고 있었어?"
"네. 알고 있었습니다."
"르하도?"
"네."
"르하도?"
"네."
"르하도?"
"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중간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이처럼 울었다. 로이드는 기둥처럼 우뚝 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한참 뒤 샤이안이 피로에 지쳐 그대로 잠들 때까지. 걱정과 불안을 참다 못한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 계속.








삼년 후 샤이안은 죽었다. 오십 여덟의, 평균 수명에 한참 못미치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연사였다. 누가 봐도 확실했다. 잠을 자듯 편안히. 고통도 없이. 그는 차근차근 유언을 마치고 아리를 비롯한 어린 아이들의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 주고 눈을 감았다. 한낮 내내 잤고, 저녁을 가져온 리에에게 로이드는 그의 숨이 멎었다고 일렀다. 갈증과 사고와 살인으로 죽는 아래쪽의 사람들에 비하면 지복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비록 그의, 평생동안의 염원-전지구적인 가뭄의 해결-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 인간이 짊어지기엔 너무 큰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짐은 뒷세대들이, 그의 지식을 이어받은 아이들이 나눠 맡게 되었고 그로서 그의 임무는 달성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침대에서 들어올린 그의 몸은 마른 갈대처럼 가벼웠다. 화장을 했더라면 손 한줌 쥘 재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대기 속에 날아갈 듯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례방식에 대해서는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았고, 고원의 남은 이들은 전례에 따라 그를 '무덤가'라 불리는 평지에 묻었다. 드문드문 피어난 보슬보슬한 흰 꽃무더기가 삽질에 파여 몇송이가 그와 같이 묻혔다. 아리는 로이드의 팔에 매달려 "로이드에겐 샤이안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어?" 라고 물었고 로이드는 "르하."라고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는 그 한 음절에 담겼던 억양과 감정을 완벽히 되살려 낼 수 없었으나 아리는 만족하고 제 부모의 곁으로 달려갔다.






2.

여름, 밖은 찬연하니 밝았다. 눈이 아플 정도의 햇살이라 이제 훌쩍 커 어른 티가 나는 아이들은 그늘 밑으로 모여들어 자신의 연인과 입맞춤했다. 늦둥이로, 이제 열일곱이 된 아리와 여섯살 차이가 나는 동생 나히르는 제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따가운 햇볕 속에서도 상관않고 뛰놀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을 지나친 로이드는 식량창고로 들어갔다.

식량조달을 위해 리에를 비롯한 '어른'의 절반은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내일 저녁 쯤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리와 그녀 또래의 아이들이 아래에서 데려온 남자친구를 먹이려면 고원 사람 모두가 있을 때와 엇비슷한 양의 식량이 소모될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효율적인 식단을 짜 재료를 들고 나왔다. 문득 그녀는 여러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발소리를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머리에 피에 젖은 천을 댄 리에가 남편에게 부축받아 오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붕대와 약을 찾아 뛰어 나가는 그와 교차해 로이드는 리에에게 다가갔다. 엄마엄마, 무슨 일이야, 하고 리에 주위를 돌던 나히르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으나 어른들의 긴장감을 느끼고 꾹 참고 있는 듯 했다. 로이드는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래 사람들이......우리를. 습격했어요. "

더듬더듬 말을 내뱉던 그녀는 자기 딸의 남자친구인 '아래 사람'이 들어오자 격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렇군, 네가, 네가 사람들에게 말했지! 여기 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 사람들은 풍요롭다고! 네가 바로 헛소리를 퍼트렸구나!"

부러움, 질투, 미움, 증오. 얼굴이 벌개진 남자아이는 순간 격하게 받아쳤다.

"맞잖아! 아래서 우리는 떼거지로 굶어죽고 목말라 죽는데 여기는 물도 식량도 집도 다 있어! 그나마 물이 있어도 언제 다른 놈들에게 뺐길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운이 나쁘면 손에 들어운 물 한방울을 먹기도 전에 목이 먼저 날아가지! 마음놓고 잠도 잘 수 없는 생활을 당신들이 알아? 땅바닥 기어다니는 버러지들한테서 떨어져서 높은 곳에서 배터지게 사는 너희들이 아냐고!"

놀란 아리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그는 뛰쳐나갔다. 리에는 어깨를 내리며 힘없이 말했다.

"다시 올거야.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은 착각하고 있어."
"하지만 엄마......그의 말도 맞아요."
"너는......!"

리에가 노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 보았으나 아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엄마도 알잖아요! 밑에서 저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린 분명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누구나 다 이 갈증과 싸우고 있어요.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 나을게 없다구요! 결국 우리들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잖아요. 샤이안 아저씨부터, 그렇게 열심히 필사적으로 애써왔는데 하나도 해결된 게 없잖아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도 저들이랑 똑같이 살아가야 하는게 맞아요! 아니, 무능한 주제에 평화롭게 산다는 점에선 우리보다 저들의 삶이 훨씬 가치있어요!"

리에는 아리의 뺨을 쳤다. 금방 한쪽 뺨이 부풀어오르는 자기 딸을 침울한 눈으로 바라본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어렸을 때와 다름없이 뛰쳐나가는 발소리를 들은 로이드는 리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지."
"그들은 우리를 놀고 먹는 귀족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의 등에 진 짐을 알지 못한채. 설득해야 해요. 꼭."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무리에겐 말이 먹히지 않아. 범인을 알 수 없도록 떼를 지어 몰려와 약탈하고 살해한 후 떠나가겠지. 너희들은 못 버텨."

무미건조한 로이드의 말에 리에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울 듯 웃었다.

"그래도 해 봐야해요. 알고 있잖아요. 여기를 떠나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른 기후 제어 시스템은 거의 다 파괴되었고, 이제 위성과 이곳 밖에 남지 않았어요."
"오만하게 굴지마. 대재앙의 해결책이 너희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 어디선가 더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로지. 너희에게 인류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착각하지마."
"다른 사람들이 해결하겠지, 같은 안이한 마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리에의 외침에도 로이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힌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생각 안 해 본줄 알아요? 떠나고 싶지 않았는 줄 알아요? 하지만......하지만!"
"그만둬. 너희는 이제껏 충분히 풍요로웠고 아래의 사람들은 그에 분노하고 있다. 돌이킬 수는 없어."

로이드의 억양없는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입술을 깨물고 서 있던 그녀는 토해내듯 물었다. 낮고 가늘었으나 구명줄을 잡듯 필사적인 목소리로.

"떠날 수 없어요. 우린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로이드? 어떻게 하죠?"
"리에."

인간의 딸의 절박한 눈동자를 그녀는 무기질적인 금속 안구로 마주보았다.

"샤이안은 내게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그럼 이제 생각해봐요!"
"르하는 내게 그런 명령을 입력하지 않았단다."

말을 잊은 리에는 텅 빈 눈동자로 로이드를 쳐다보다 허탈하게 소리내어 웃고 몸을 돌렸다.

그로부터 사흘째 저녁 건장한 남자들이 총과 칼을 들고 고원으로 올라왔다. 리에를 비롯한 어른들-제어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는 2세대 전승자들-과 아직 어린 아이들은 누구것인지 모를 낫과 칼과 총으로 살해당했다. 그전날 아리는 연인이었던 아래쪽의 청년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로이드는 목과 팔을 잘렸다. 사람들은 잘려나간 단면에 피와 뼈대신 전자기 배선과 불꽃을 내며 움직임을 멈춘 그녀를 더이상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피했다. 기계문명이 거세당해 절반쯤 원시로 돌아간 그네들에게 안드로이드는 생소했고 어떤 의미로는 공포였다.

약탈을 끝낸 그들이 돌아간 후 로이드는 몸을 일으켜 지하실로 내려가 자신의 몸과 목, 팔의 연결부위를 수복했다. 최악의 경우 지하는 파괴당하지 않도록 이제 죽고 없는 고원 사람들은 내려가는 통로를 벽으로 위장했었다.

그녀는 컴퓨터들을 살펴보았다. 모든 프로그램이 인간들이 손 댄 그대로,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열다섯구의 시체를 약탈자들의 발에 짓밟힌 흰 꽃잎 무더기와 함께 모두 묻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는 기다렸으나 고원을 떠난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3.

드디어 고원 위에 발을 딛은 사내는,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이마의 지끈거리는 상처를 짚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얼키설키 얽힌 나무와 비탈 사이로 없는 길을 만들어 드디어 금역의 성에 다다른 것이다. 비록 그를 맞이한 것은 고대의 폐허와 흰 꽃무더기 밖에 없었지만.

겉에서 보기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으나, 가까이 다가갈 수록 손질된 건물벽과 보강된 축대가 확실히 보였다. 약간의 호기심과 놀라움을 가지고 그는 건물 벽을 따라 돌았고, 현관 턱에 앉아있는 사람 형상을 보고 입을 벌렸다. 관절 새에 푸른 이끼가 끼고 부조 부분이 새까맣게 변한 그것이 일어나서 다가오자, 남자의 벌린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는 정신없이 들고 있던 나무 막대(방금 전까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던 지팡이였다)를 휘둘렀다. 그것이 팔(같아 보이는 부분)로 막자 나무막대는 어이없이 부러졌다. 막대를 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충격에 그는 한순간 기절할 듯 정신이 아득해져 털썩 주저앉았다. 괴물은 볕에 탄 얼굴이 허옇게 질린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다 사람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까?"
".......아."
"실어증에 걸렸습니까?"
"......아, 아니."
"좋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대로 있으면 일사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를 놀려 일어난 남자는 그녀를 보고 입을 벌렸다. 로이드는 눈을 깜빡여 속눈썹과 안구와 눈꺼풀 새에 끼어있는 검은 이끼를 눈썹 아래로 치워내며 물었다.

"뭔가 필요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니......아니요. 그런데 당신은......?"

괴물입니까, 라는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도는 사내의 얼굴에 로이드는 평소대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외형 표준형 Nomal-1, 내장 두뇌 Mos-XII의 안드로이드입니다. 이전 사람들은 로이드라 호칭했습니다."
"이전 사람들?"
"과거 이곳에서 거주했던 인간들에 대한 정의입니다. 현재와 어느 정도의 시차가 있는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저는 10년 간격으로 이 건물을 수리할 때를 제외하면 항시 가수면상태로 전환해 있었습니다. 정확한 시각과 날짜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글쎄."

남자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도시를 떠나온지 날이 꽤 돼서 언젠지 잘 모르겠는걸."
"알았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둘은 빤히 마주보고 있었다.

"......먹을 것 있어?"
"없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남자의 모습을 로이드는 바라보다가 고쳐 말했다.

"마실 것은 있습니다. 드릴까요?"

땀에 젖은 어깨와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의 그는, 반색을 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기절했다. 로이드는 그를 어깨에 들쳐업고 걸음을 옮겼다. 영양실조와 수분부족에 오랫동안 시달린데다가 이미 고원등반 중간즈음부터 일사병을 얻은 듯한 그는 무척 말라 몸에는 뼈와 근육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를 아직 창에 차양이 남아있는 방의 침대에 눕히고 물을 가져왔다. 깨우자 그는 입술에 닿은 물을 달디 달게 삼키고 다시 잠이 들었다. 뚜렷한, 기시감만이 아닌 강력한 기억의 재생에 로이드는 잠시동안 빈 물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밤에 깨어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이아스라고 밝혔다. 이국의 이름. 이국의 언어. 이국의 이목구비와 눈색깔. 로이드는 말없이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스스로 해명했다. 자신은 먼 나라에서 수원을 찾아 여기 왔다고.

"수원?"
"그래."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초 조우에는 존대를 썼으나 로이드가 꼬박꼬박 존대를 썼기에 어느샌가 하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 도중에 그녀도 하대 하길 청했다. 그녀는 거절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흰 꽃이 소복히 깔린 평지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그러니까 서대륙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물을 확보하기 굉장히 힘들었어. 이미 쓸만한 수원은 모두 현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해안가는 이미 발디딜 틈도 없고, 전기는 모두 조명 대신 염분 분리기를 돌리는데 사용되었지. 이주민 전체가 돈을 모아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을 감당할 만한 염분 제거기를 살만한 돈은 없었어. 현지인 상점들은 자기네 물을 내 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륙 어딘가에 남아있을 수원을 찾아온거야."

"그런데 왜 여기 있다고 생각했지?"
"왜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양팔을 펼치고 아래로 향하는 비탈길을 향해 섰다. 갈색 검은색 회색밖에 없는 황량한 땅이 그대로 드러난 가파른 비탈은 쉼없는 굴곡을 넘어 아득하게 먼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자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저 밑에선 여러가지 말들이 많아. 여기가 용이 살고 있는 성역이라는둥, 여신의 파괴된 신체가 잠든 저주받은 음지라는둥, 기생식물이 자라고 있다는둥......적어도 하나는 어설프게나마 맞는 것 같군."

희고 작은 꽃은 그들이 선 평지 가득히 소복하게 깔려있었다. 그는 드러난 땅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연약하고 가는 풀줄기를 신기한듯 만졌다.

"이로서 수원이든 뭐든 물이 가까이에 있다는건 증명이 됐군. 고로 난 수원을 찾아야 되겠어. 도와줄거지?"
"아니, 혼자 찾아."

뜻밖의 거부였다.

"......왜?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니었어?"
"당신의 제안은 르하가 입력한 명령과 어긋나."

'그게 뭔데?'라고 나이아스가 물었지만 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을 되물은 그는 포기하고 직접 고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결국 수원을 찾지 못했으나 사람들을 고원 위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로이드는 저지도 참견도 하지 않으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고, 다만 가파르고 험악한 산길을 올라오느라 탈진한 사람들에게 안정된 잠자리와 물을 주었다. 나이아스와 같은 언어를 쓰는 그들은 대다수가 이방인이었다. 이색적인 눈과 피부와 언어. 어느날 그는 로이드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아래쪽에 있을 장소가 없으니까 올라오는 거야. 아무도 안 쓰는 폐건물이니 누가 살아도 상관은 없지?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줘."
"안드로이드에게 집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니 별상관 없어. 다만."
"다만?"

그녀는 폐건물 안과 밖에 들어차 복작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대륙에 온 거지? 이동으로 힘을 소모할 바에야 거주지역에 그대로 있었던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그냥 녹색이 아직 남아있는 대지를 찾아 온거야. 그런데 없더군. 아무데도."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흙먼지가 날리는 땅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의 절대량은 변하지 않아도 땅이 버티지 못한 거지."

나이아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미 르하도 샤이안도 로이드도 알고 있었던 정보였다.

최초는, 가뭄이 심화된 나라들의 정부였다. 갈증에 말라가던 나라들은 수자원이 풍요로운 나라 쪽에서 터무니없는 무역 조건을 내세우자 그 반발로 기후 제어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었다. 순환되는 물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한 지역에서 비가 내리면 비를 끌어온 다른 지역은 가뭄이 든다. 그 불균형이 심화되면 물 순환이 끊긴 쪽은 쉽게 사막화된다. 한번 발동이 걸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수자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고기압 아열대 지역이 먼저 사막화되었고, 퍼져나가며 점점 증세는 심화되었다. 한번 사막화된 대지는 현대 과학 기술로는 수복이 불가능했다.

비는, 어디선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뿐이었지만.

"그런데 너, 물을 어디서 가져오는거야?"
"이전 주민들이 마시던 재고량이 남아있었어."
"거짓말. 여기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은 엄청나게 오래전이잖아? 한 지역이 성지가 되고 황당무계한 전설이 생길 정도면 적어도 백년은 지났을텐데, 이런 건조기후에 수분이 증발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는 게 말이 돼? 어딘가 내가 못 찾은 수원이 있을거야, 그렇지?"

로이드는 대답 대신, 말하는 도중에 기대감에 저혼자 들뜬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더니 되물었다.

"말 못 할 일이야?"

그녀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이아스는 잠시 망설였으나 황급히 그녀 뒤를 쫓았다. 몇개의 방을 지나고 드문드문 보수한 복도를 지나 그녀는 폐건물 깊숙히 있는 우물로 그를 인도했다. 검고 깊은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줄 모르는 그에게, 그녀는 '하루 물 200ml가 나오는 수분 생성기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설명했다.

나이아스는 젊었으나 서대륙 유민들의 책임자였다.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내뱉는 이들을 그는 다독거리고 어르고 을러대며 간신히 고원 위로 이끌었다. 현지인들의 텃세는 드세서 폐허 있는 고원 밖에 달리 자리가 없었다. 고원 위는 이상하게도 '용이 나온다'는 시대에 맞지 않는 전설이 퍼져 있어서, 현지인들은 올라오길 꺼려한다며 그는 웃었다.

"아마 용이 있었어도 말라죽어 버렸겠지만."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고 도망친 이들의 죄책감에서 그러한 전설이 나왔으리라. 로이드는 추측했다. 과거 고원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은 그는 '가뭄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맨 전승자들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으나 놀라워하진 않았다.

"이쪽에도 그런 사람들도 있었구나. 아주 옛날 이야기지만."
"그쪽 대륙에도 있었어?"
"아마도. 역시 전설이지만 말야. 이제는 아예, 모두 사라져버렸어. 땅속에 묻혀있거나 소문도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미친 과학자처럼 고립되어 연구를 계속하고 있겠지."
"그럼 이제 가뭄을 해결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건가?"
"글쎄......어디선가 입소문은 들려오지만 흔적 없는 괴담 비슷해. 진짜인지 헛소문인지 아무도 모르지. 게다가 우리는 외부인이니 정보를 신속하게 얻지 못하니, 확실하진 않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유능한 지휘자였다. 이주민 대부분을 고원으로 이끈 그는 고원의 빈 땅을 개간하고 폐건물을 보수하는 등 차근차근 정착계획을 진행했다. 물이 없어 농사는 불가능하다는 반발은 곧 사그라들었다. 물의 출처는 유민들 중 극소수에게만 공개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아스는 연줄을 통해 뒷돈을 대고 사오는 물이라고 둘러댔다.

로이드는 농지 개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다만 희고 작은 꽃이 핀 한모퉁이의 평지가 개간되는 것을 막았다. 그는 이유를 물었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하. 그러면 이곳은 이전 주민들의 피로 물든 땅이군."

여름밤 달빛은 환하게 고원의 평지를 채우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발이 파묻힐 듯 소복히 깔린 꽃들은 달빛을 받아 눈부신 흰 빛을 품고 있었다. '묘지답잖게 경치가 굉장하다'고 그는 감탄하며 손끝으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무리를 쓸었다.

"넌 두렵지 않은가 보군."
"당연하지. 난 저주나 괴담같은 건 안 믿어."

질문의 요점을 비껴가며 다소 허세처럼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였으나, 상대의 표정없는 얼굴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다소 피로한 듯 예전보다 마른 손가락으로 깍지를 껴 입가를 가린 그는, 긴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은 일을 해도 마찬가지야. 그런 관점에서 보면 네게 인간의 생은 전부 똑같이 보이겠지......그러니까 두렵지 않아. 넌 무덤덤히 3세대의 절멸을 말했고 사실 그게 삶이야. 인간들의 삶이야. 이곳 아니라 이 지구, 아직 인간이 살아남아 있는 어디서든 벌어지는 일이야. 특별히 이곳이라 해서 다르지 않아. 모든 비극은 일어날 수 있고, 모든 인간들은 일분일초라도 더 살려고 바둥대다 죽어버리지. 똑같아."
"그러면 왜 살지?"

조소가 어울릴 듯한, 그러나 감정의 파편이란 조금도 없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와 마주보던 그는 그녀 대신 피식 웃었다.

"글쎄. 왜 살까?"

고원 위의 생활은 점점 나아졌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금역과 같았던 곳은 농사까지 지을 수 있는 버젓한 거주지로 변한 것이다. 다만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주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아래쪽 주민들의 시기와 질시는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으나 이전과 같은 약탈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나이아스가 이주민과 토착민을 가리지 않고 손님대접을 후하게 한 덕분이었다. 정착 초기 이주민들이 올라오며 밟아놓은 산길을 통해 사람들은 쉽게 고원을 찾았고 그는 책임자답게 친절한 미소를 띠우며 사람들을 대접했다.

"그래도 언젠가 그들은 이곳에 몰려올거야."
"나도 알아."

나이아스는 피곤한 듯 두 손 위에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떠나. 그대로 남아있다간 죽어."

"그래?"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건성으로 나온 반문에, 로이드는 재차 말했다.

"떠나는게 좋아. 설득도 회유도 폭력과 약탈의 충동은 이길 수 없어."

문자기록 이전부터 시작된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두뇌속에 입력되어 있는 그녀는 인간의 행동패턴을 파악하고 현재와 유사한 상황을 시뮬레이트해 가장 현실성있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최근 입력된 해당자료는 리에를 비롯한 2세대 전승자들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말했던 자료들을 빠짐없이 되풀이했고, 나이아스는 물었다.

"그럼 이곳을 떠나서 어디로 가면 될까?"

"난 이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없어."

"그럼 전 지구가 사막화되었을 때 가장 인간생존에 적합한 장소는 어딜까?"

평소 그가 논리적인 대답이 필요한 질문을 던질 때 그녀는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출력해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뇌속의 자료를 종합하여 즉각 답했다.

"이 아래 어디든지. 바닷가는 아직 물이 남아있고 과거 기록에는 사막에서 유목민이 살았지. 농지 경작으로 얻은 식량과 금전은 정착자금으로 충분할거야."

"일년만 더 있어도 훨씬 더 많이......"

"수분생성기에서 나온 물은 곧 사라져."

그녀는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뒷말을 잊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는 '몰랐어?'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조명이 없어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제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고. 퍼내기만 할 뿐 채워넣을 수 없으니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고. 반년도 지나지 않아 메마른 구덩이 속에는 하루 한줌의 물, 밖에 만들어내지 않는 미완성의 기계만 남는다고.

이 고원에선 이제 인간이 살아갈 수 없어, 라고 그녀는 말을 끝맺고 일어섰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짐을 싸고 주변을 정리했다. 먼지 쌓이고 부서진 폐허에 들어왔던 이들은 집들이 할 뒷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떠났다. 안드로이드에게 주거지의 청결 유무는 아무 의미없었으므로 로이드는 사람들의 행동에 고마움이나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것이 나이아스의 당부임을 알았을 때는 그에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이야기했다. 방의 마지막 물품들을 한 상자 안에 몰아넣던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정리된 편이 좋잖아."
"뭐가."
"누군가를 기다리기엔."

로이드는 눈을 깜빡였고 그는 상자를 묶은 끈을 조이며 물었다. 아니었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잘못 지어진 매듭을 풀었다. 햇볕이 쨍쨍했다. 더운 날이었다. 코옆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에 들어가 그는 흙먼지 투성이인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땀을 훔쳤다. 꽃밭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이주 직전의 부산스런 분위기에 들떠 웃자란 꽃무더기를 손바닥 가득히 훝어들었다 머리 위로 던졌다. 팔랑팔랑 하얀 꽃잎들이 빛 속에 묻혀 떨어졌다. 그녀는 꽃을 꺾는 아이들을 제지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년동안 바쁜 어른들 대신 놀아주었던 로이드에게 익숙한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달려와 그녀에게 매달렸다. 로이드, 같이 놀자. 꽃 예뻐. 엄마 아빤 또 바빠. 우리 내일 내려간대. 어디로 가? 나무 있어? 모래 엄청 많은데래. 더워. 같이 놀아줘. 같이 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아이들의 재잘거림에도 무심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상자를 끌고 밖으로 나온 나이아스는, 아이들의 목소리 탓에 안 들렸으리라 여겼는지 한번 더 말했다.

"같이 가자, 로이드."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떠들썩하던 아이들이 점차 조용해졌다. 아이 한명이 조심스레,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리랑 같이 안 가? 로이드는 고개를 젓고 아이들의 등을 밀었다. 엄마 아빠에게 가렴. 한번 말하면 바꾸지 않는 로이드를 아는 아이들은 금방 뿔뿔히 흩어졌다. 혼자 남은 로이드는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려가지 않아."
"왜?"
"당신의 제안은 르하의 명령과 어긋나."
"그 명령이란 게 뭔데?"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체 그 명령이 뭐야? 전승자들이 물을 만들어 낼 때까지 이곳을 지키는 것? 여기 사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거야,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다 쓸데없는 짓인 걸 너도 알고 있잖아! 인간보다 훨씬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네가 왜 이러는거야?"

전승은 이미 끊겼고 이제 인간들은 여기서 살 수 없다. 그녀는 오래 기다렸으나 백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그녀가 기다리는 인간은 누구였든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려가자, 로이드. 우리랑 내려가서 같이 살아가자.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이제 아무도 여기 오지 않아.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
"나는, 기다리고 있어."
"무엇을?"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꿰뚫을 듯 쳐다보았지만 금속 눈동자에는 그의 얼굴이 그대로 비칠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이드. 너무 잔혹한 일이야."
"무엇이."
"아무도 오지 않을 고원에 사람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
"잔혹하지 않아. 안드로이드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해."
"그러면 너는 왜, 무덤가에 물을 주었어?"

백여년이 지나고 봉분이 평지가 되었어도 여전히 무덤가라 불리는 평지에는, 한방울의 물이 없었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메마른 바람에 말라 사그라들었을 흰 꽃들이 피어있었다. 로이드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목께까지 덮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목마른 꽃들은 언제나 소리없이 그저 조용히, 눈아린 흰빛으로 하늘거렸다.







그날 밤, 고원 위에서 마지막 약탈이 일어났다. 로이드는 건물 여기저기에 일어나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이고 공기중엔 피냄새가 흘렀다. 고원 위, 몇 남지 않은 이주민들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 마지막 인원과 같이 내려가기 위해 남아있었던 나이아스는 안쪽 방에서 나오다 뒤늦게 칼을 맞았다. 로이드는 방으로 들어오다가 뿌려지는 피보라에 발을 멈췄다. 그녀를 본 약탈자가 칼을 들고 걸음을 옮겼으나 아직 숨이 붙어있는 나이아스가 그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렸다.

두 남자가 엎치락 뒤치락 맞붙어 싸우는 것을 로이드는 가만히 문간에 서서 바라보았다. 약탈자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찌른 나이아스는, 헐떡이다가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 엎어졌다. 로이드는 다가가 그를 바로 눕혔다. 그의 손이 로이드의 팔을 잡았다. 희미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내려가, 하고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무엇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잠시 침묵했으나, 마침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는 다만, 이유를 찾아야 했어."

나이아스는 떠지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겨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가 눈앞이 흐릿했다.

"이유......무슨......?"
"나는, 확신을 해야 했어."

확신, 이라고 되물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사 차분한 목소리 뒤로 색색거리는 얕고 가쁜 숨소리가 자신의 것임을 그는 알았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촛점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에 표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자신을 안은 이의 피부와 머리칼이 하얗게 빛났다. 그는 어느날의 달빛을, 새하얀 꽃을, 목소리가 울리던 정적을, 피로를, 기댈 수 있었던 어깨를 떠올렸다. 그는 너무 젊었고, 많은 유민들의 책임자이기에는 어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피를 먹어 아직 따뜻한 천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그는 어느날과 비슷한 그러나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죽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나는 찾지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 밖으로 불길에 묻혀가는 꽃과 인간의 그림자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사실 살아있는데 필요한 가치 같은건 어디에도 없겠지."

그녀는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폭도들의 소리는 절정을 지났는지 한풀 꺾여가고 있었다. 그녀는 벽으로 위장했던 상자들을 걷어내고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여전히 컴퓨터는 샤이안과 그 뒤의 전승자들이 만들어낸 프로그램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작을 행했다. 르하가 시크릿 메모리에 넣어둔, 긴 세월동안 보존되어 있었던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헀다.

그녀는 연신 바뀌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르하를 생각했다. 샤이안의 연인. 자신의 제작자. 전승자 중에서도 다시 태어나지 않은 희대의 천재. 선인도 악인도 아니었던, 그저 한 인간.

그녀는 다만 인류를 살리기 전에, 존속할 가치가 있는지 확신을 얻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로이드는 자신의 두뇌에 몇개의 전선을 꽂아 프로그램을 복사했다. 복사가 완료되자 그녀는 섬세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이 기동하기 위해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기다렸던 마지막 퍼즐조각을 끼워넣었다. 실행 명령이었다.

르하가 만든 수분 생성기의 완성품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약탈의 마무리로 건물에 불을 질렀던 폭도들은 불을 끄고 벽을 무너뜨리며 흘러넘치는 물살에 놀랐고, 이윽고 경악했다. 건물 아래쪽부터 시작한 물줄기는 끊임없이 샘솟아 저지대에 있던 건물 1층의 절반을 가라앉히고 계속 흘렀다. 시체 위를 덮고 짓밟혀진 꽃잎을 쓸어가고 굴곡을 따라 흘러내려, 사람들의 발에 단단해진 길을 따라 길고 끊임없는 물길을 냈다.




이것이 지상에 살아남은 이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물의 도시 샤이와르(Syaiwar)가 생겨난 연유이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대지에서 샘솟은 물은 쉼없이 흘러내려 대륙 전체를 적신다. 가장 풍요로운 세계의 수원(水原)에서, 축제의 날이 오면 처녀들은 푸른 무명천과 흰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기적을 감축하는 춤을 춘다. 고원 가득 하얀 꽃이 피는 계절의 첫날이 되면.



- End.
(0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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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즘 여러가지로 정신없지만; 어쩌다가 단편이 하나 써졌길래 또다시 살짝, 찾아와서 올려놓고 돌아갑니다.

=


후기.

사은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은님의 명쾌하신 포스팅 덕에 이 글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해 여러모로 과학적 조언(...)을 준 다비양에게도 역시 감사를.


마지막으로--- 눈치채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이 글의 일부분은-최소한도 제목과 어느 정도의 소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단편 <빛은 물과 같아>의 오마주입니다. 그 환상성도 깔끔함도 따라가지 못한 부족한 글입니다만.
(<빛은 물과 같아>는 해외단편 게시판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여기 드나드시는 분들은 아마 이미 읽으셨겠지만요)
댓글 5
  • No Profile
    배명훈 06.04.26 14:28 댓글 수정 삭제
    아니, 이렇게 좋은 글을...
    리플들이 안 달리니 전부 직접 읽어보기 전에는 발굴이 안 되네요.
  • No Profile
    으윽,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 군요. 정말 잘 쓰시네요.

    저는 이런 글 쓰라고 하면 못 씁니다. 왜냐. 디스토피아는 상상하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해서;; 역시 아직 저는 어린 애인가 봅니다(애 노릇 할 수 있는 것도 1년 하고도 한두 달 밖에 안 남았지만).
  • No Profile
    고양이 06.04.29 15:57 댓글 수정 삭제
    음...저는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읽으면서 내내 떠올렸는데, <빛은 물과 같아>였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무단슬픔 06.05.04 07:3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머리 속에 이미지가 가득 느껴지네요.
  • No Profile
    푸른깃 06.05.08 16:07 댓글 수정 삭제
    앗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고마운 댓글들이 한가득;;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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