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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티셔츠 라벨

2013.02.02 18:2002.02

   남자는 새로 주문한 티셔츠가 들어있는 택배상자를 눈앞에 두고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손은 방금 씻었기 때문에 깨끗했다. 그래도 그는 혹시 손에 이물질이 묻어있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다시 양손을 비비며 택배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는 흠 없이 테이핑 되어 있었다. 단호한 손놀림으로 누군가 상자의 연결부위를 테이프로 봉한 뒤 적절하다 생각되었을 때 딱 하고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대담함과 결단성이 동시에 느껴지는 테이핑이었다. 어떤 상자들은 테이프가 덕지 덕지 여러 겹 붙어 있어 불결한 인상을 준다. 그런 상자를 개봉하다 보면 상품과 만나기도 전에 어느덧 기분이 상하고 만다. 이미 말했다시피 상자는 무척 보기 좋았다. 상자의 네 귀퉁이가 팡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생각을 바꿔 한결 더 흡족한 기분을 내기 위해 지인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신호가 울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호가 꽤 여러 번 울리고 이쯤이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겠군. 싶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어이. 잤어?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이봐. 친구. 지금이 몇 시인 것 쯤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근데 내가 진짜 자네가 모르는 것 하나 알려줄까?

  -뭔데. 용건만 얘기해.

  -내가 바로 그 한정판 티셔츠를 구했단 말이지. 모델명 sn-560007.

  -난 또 뭐라고. sn-569007이면 지금 수입 몰에 재고가 몇 개 남았을 걸? 비공식적으로 말야.

  -난 sn-560007이라고 했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박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그걸 구했다고? 정말인가?

  -거짓말이 아냐. 자고 일어나도 마누라가 여전히 옆에 있는 것처럼 엄연한 사실이지.

  -젠장. 미치겠군. 내가 오늘 일 끝나고 들를테니까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마. 설마 벌써 누군가와 같이 본 것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좋아. 그럼 그때 보자구.

  지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했더니 허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계란말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맥주 한 캔을 따서 가스렌지 옆에 놓아두고 계란이 익기를 기다리며 조금씩 마셨다. 그는 음악을 틀어도 될지를 잠깐 동안 생각했지만 곧 자고 있는 아내를 떠올리며 그만두었다.

  그는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양장으로 된 책이 한권 놓여져 있었다. 지금까지 출시된 벤 하임의 티셔츠 콜렉션이 사진과 함께 담긴 책이었다. 각 장에는 티셔츠의 기본적인 정보와 디자이너인 벤 하임이 티셔츠의 아이디어를 떠올려 냈을 때의 일화가 짧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접힌 자국이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더듬어 한정판 섹션을 찾아갔다.


 

sn-560007: 일명 코브라 윗니 (또는 독니)

2001년에 출시되어 다음 해까지 생산된 밀리터리 라인의 초기 모델.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새겨진 벤 하임의 로고와 일필휘지로 그려진 코브라의 매서운 생김새가 어우러진 작품. 후에 sn-569007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었으나 야광 처리된 코브라의 독니와 라벨의 얼룩무늬는 sn-560007만의 특징으로 밀리터리 시리즈를 시작하는 벤 하임의 강렬한 선전포고. 일부에서는 이 모델을 구할 수 없어지자 얼룩무늬 라벨만을 따로 구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


일화: 일화 없음


입수 난이도: 별 네 개 반(별 다섯이 최고)


 

  -조금 늦었군. 앉으라구.

  다음 날, 남자의 지인이 방문했을 때 남자는 한창 요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식탁 위에는 완성된 음식들이 차례 차례 놓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남자는 위스키를 꺼내 식탁으로 가져왔다. 아내는 문학의 밤 행사에 나가고 없었다. 아내는 그가 티셔츠 따위에 열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피차일반이었다.

  -자, 한잔 받으라구.

  -좋지.

  둘은 호기롭게 술을 한잔 씩 마셨다. 남자의 지인은 식탁 위를 과장된 몸짓으로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티셔츠를 대체 어디에 숨긴 거야?

  남자는 숨을 한번 천천히 내쉬더니 준비되어 있던 커터 칼을 들어 상자의 위와 옆에 대고 몇 번 그었다. 지인은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양초를 준비한다는 것을 깜박했구만.

  상자가 열렸다.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로 포장된 sn-560007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잠시 코브라의 몸과 독니를 감격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앞에서 친구가 재촉했다.

  -어서.

  남자는 케이스의 뒷면을 확인했다. 정품을 증명하는 스티커가 에머랄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친구에게도 확인시켰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그대로 움직이지마.

  친구는 옆에 있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몇 방 찍었다.

  -자. 드디어 실물 확인이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플라스틱 케이스의 고리 끈을 풀었다. 바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하얀 티셔츠가 자태를 드러냈다.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나겠군.

  남자의 친구는 사진을 몇 방 더 찍었다. 남자는 티셔츠를 들고 자세히 보았다. 재봉의 마감처리는 깔끔했다. 페인팅은 빈틈없었다. 그는 손으로 그것을 쓰다듬어보았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양손을 눈 주위에 모으고 빛을 가린 후 들여다보았다. 그는 지인에게 티셔츠를 건네며 말했다.

  -한 번 보라구.

  친구는 티셔츠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두 손을 동굴처럼 만들어 한 번 더 보았다.

  -확실하군.

  남자는 친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잠깐, 있어. 내가 하던 것 마저 해올 테니까.

  남자는 일어서서 계란반죽 앞으로 갔다. 친구는 티셔츠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사진을 몇 방 더 찍었다. 이후 두 사람은 배불리 먹고 마셨다.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싶은 무척이나 유쾌한 저녁시간이었다. 시계가 10시를 조금 넘겼을 때 남자의 친구는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어.

  -왜, 아직 술이 남았는데.

  -아냐. 정말로 잘 먹었어. 이만하면 된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남자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귀가할 시간이 가까워진 이유도 있었다. 친구가 돌아간 뒤 남자는 티셔츠를 잘 개어 케이스와 함께 한 쪽에 두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한 번 더 만져볼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잔에 남아있는 술을 마저 마시고 식기들을 설거지통에 집어넣었다. 큰 접시를 몇 개 치웠을 때 그는 문득 손을 멈췄다. 어떤 생각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접시들을 그대로 두고 손을 씻었다. 그는 타월로 물뭍은 손을 깨끗이 닦아낸 후 소파가 있는 곳으로 갔다. 티셔츠는 그대로 있었다. 남자는 티셔츠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안쪽을 보았다. 옆구리 부분의 봉제선에 라벨이 달려있었다. 그것은 밋밋한 흰색이었다. 남자는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라벨은 여전히 흰 색이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에는 피로감이 몰려들었고 피부는 나이를 그대로 드러냈다.

  남자의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쪽을 한 번 넘어다보고 늘어져있는 식기들을 보았다. 술병과 빈 택배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코트를 벗고 그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 뒤에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가 하는 것을 도왔다. 남자의 아내는 작은 그릇들을 겹치다가 우연히 그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얼룩무늬로 된 작은 천 조각이 몇 개 그곳에 있었다.

  -이게 뭐야?

  그녀는 남자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고 작은 천 조각들을 보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몇 개월 전 지인과 나눈 전화통화가 떠올랐다. 

  

  -sn-560007 말이야. 그 얼룩무늬 라벨을 몇 장 구했어.

  -라벨? 뭐하는데 쓰려고?

  -도저히 티셔츠를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해외 커뮤니티에도 2,3년 내에 올라온 사진이 없어. 말만 무성하고.

  -그래서?

  대리만족이랄까? 라벨만이라도 모아 두는 거지.

  -자네 참 싱겁군. 라벨은 그저 라벨일 뿐이야.

  -그런가? 그런 이야기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 어쨌든 한번 놀러와. 저녁이라도 함께 하지.

  -내가 라벨 구경하러 거기까지 가게 생겼나?


 남자는 아내의 손에서 라벨을 건네받았다. 선명한 얼룩무늬의 천 조각에는 벤 하임의 금실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잠시 바라보았다. 조금 뒤 그는 자신의 옷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수집품 서랍을 열어 다른 귀금속들 옆에 라벨들을 넣었다. 그는 옷장 문을 닫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접시들을 마저 치우며 그와 아내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티셔츠 이야기는 아니었다.

 


(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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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 13.08.22 10:34 댓글 수정 삭제

    뒤부분 이해가 안 됩니다. ,,,,,,,,,,,접시 사이의 라벨은 어떻게 된 것? 지인이 라벨을 뜯은 것?  새것은 뜯어서 가져가고 가지고 있던 다른 라벨을 둔 것인지........뒷부분을 명확히 한다면,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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