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소설

2013.01.15 17:3601.15

룸메이트였던 K가 이사를 가면서 나에게 작별 선물로 봉제인형을 하나 주었다. 손바느질로 만든 여우 인형이었는데 생김새가 몹시 졸렬했다. 나는 그것을 책상 위에 놓아두었는데, 어쩐지 날이 갈수록 삐뚤빼뚤 드러나 있던 바느질 자국이 사라지고 털이 반지르르해지는가 싶더니 제법 진짜 여우처럼 예쁘장하게 되어서는 급기야 꼬리까지 새로 돋아나는 것 아닌가.

봉제인형의 꼬리가 늘어나다니, 그럴 리가 없잖나. 필시 K가 몰래 들어와 바꿔치기했을 테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자 친구 A가 대수롭잖다는 투로 답했다. K는 괴짜라 이전에도 종종 인터넷에서 봤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못을 박아놓고 그 위에 동전을 용접으로 붙여서 주우려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장난을 품을 들여 가며 치곤 했으므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에 열쇠를 돌려주러 온 K에게 인형을 보여주며 물었더니 부인했다. 자기는 손재주가 부족해 이렇게 훌륭한 여우는 만들 수 없단다. 그나저나 참으로 예쁘구나. 꼬리가 좀 늘어나면 어떻단 말이냐. 예쁘면 그만이지. K는 봉제인형만 실컷 귀여워해주다가 돌아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인 L에게 이 일을 상담했다. L은 아무래도 머리에 뭔가 이상이 생겨 헛것을 보는 모양인데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하고 자못 심각한 얼굴로 충고해 주었다. 봉제인형의 꼬리는 그새 여섯 개씩이나 늘어나 버렸기 때문에 나는 L의 충고를 받아들여 병원에 가기로 했다.

마그네슘을 좀 드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내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알약 한 병을 내주었다. 그걸 먹으니까 눈앞에 토마토와 가지가 둥둥 떠다니고 고무오리가 바닥을 뛰어다니는 등 온갖 환각이 난무하기 시작했으므로 봉제인형의 꼬리가 늘어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그 약 참 잘 듣는구나, 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마그네슘을 복용하게 된지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 새침하게 앉은 여우에게 말했다. 이봐, 아무리 네 꼬리가 아홉 개나 돋아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런 짓을 저지르면 곤란해. 하지만 여우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내가 하지 않았는걸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누가 이랬느냐고 묻자 턱짓으로 욕실을 가리킨다. 철철 넘치는 욕조 속에 고무오리 떼가 꽉꽉대며 즐겁게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저건 환각이잖아. 환각이 어떻게 수도꼭지를 틀어? 그야 나도 모르지요. 여우는 천연덕스럽게 혓바닥을 내밀어 앞발을 쓱쓱 핥았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잠그고 고무오리를 한 마리 잡아 살펴보았다. 말랑말랑하긴 했지만 확실히 실체를 갖추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매일 집을 어질러 놓으면 골치아프다. 더 이상한 게 생길지도 모르고. 나는 마그네슘을 끊기로 했다. 저녁밥을 먹은 지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점심때 먹은 마그네슘의 약효가 딱 떨어졌다. 고무오리들은 전부 사라졌다. 나는 세 마리의 비글이 하루종일 뛰어다닌 것처럼 난장판이 된 집안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두 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끝이 났다. 녹초가 되어 자러 들어갔더니 베개는 간데없고 대신 여우가 침대 머리맡에 멋대로 들어앉아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자고 있었다. 침대가 좁은지라 어디로 밀어낼 구석도 없고, 베개를 찾기도 귀찮아서 나는 그냥 여우를 베고 잤다. 모기라도 쫓는지 가끔 아홉 개의 꼬리를 휘둘러 코 언저리를 근질거리게 하는 것만 빼면, 베고 자기에 과히 나쁘지 않았다.

이튿날 오후에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이젠 환각이 아니라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글쎄 봉제인형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니까요. 하지만 의사는 내가 고무오리들이 수돗물까지 틀었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건 말건 아랑곳않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짐을 싸는 데 여념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병원을 찾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선생님. 내 아내가, 의사는 터질 듯한 가방을 어거지로 닫느라 끙끙대며 말했다. 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장난으로 마그네슘과 LSD를 바꿔 놨어요. 나는 다섯 명의 환자한테 그걸 처방해줬는데 하나는 약을 더 얻으려고 하루에 열 번씩 병원을 들락거리다 끝내 나를 식칼로 위협해 약을 몽땅 털어갔고 둘은 행방불명됐고 나머지 하나는 약에 취해 트럭을 몰고 경찰서로 돌진했어요. 지금 형사들이 나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겁니다. 빨리 도망가야 해요. 의사는 가까스로 잠근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나는 어안이벙벙해서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아내라는 사람은 다섯 명의 환자들에게 처방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LSD를 도대체 어디에서 구한 걸까. 나도 그걸 먹고 무슨 얼토당토않은 짓을 저지른 건 아닌가.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무엇을 했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출근해 얌전히 일을 한 뒤 퇴근, 저녁밥을 먹은 다음 여우를 베고 잤던 기억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여기에 계속 있다가 경찰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물어보면 곤란할 것 같았으므로 나는 곧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병원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여우가 현관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요. 여우가 귀를 늘어뜨리고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식료품을 좀 살 계획이었는데 의사한테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는 바람에 당황해서 깜박하고 말았다. 집에는 먹을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할수없이 남겨뒀던 마그네슘을 삼켰다. 오리떼가 나타나 통통거리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여우는 즐거운 듯이 폴짝폴짝 뛰어 오리들을 잡아먹었다.


여우가 고무오리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맡자마자 오장육부가 아흐레 밤낮을 굶은 것마냥 격하게 요동칠 정도로 위력적인 냄새였다. 나는 맹렬한 허기를 느끼고 좀비처럼 허청허청 움직여 마침 눈앞을 가로지르던 토마토를 붙잡았다. 한 입 깨물자 휘이-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나는 고무 장난감이었다. 다른 야채를 잡아서 살펴봤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에 허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고무고 뭐고 일단 뱃속에 집어넣지 않으면 위장이 스스로를 소화시켜 버릴 것만 같아서 삑삑 소리를 질러대는 가지를 억지로 목구멍에 쑤셔넣다가 실수로 그만 손가락을 깨물고 말았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왼손을 으적으적 씹었다. 그 맛있는 냄새가 바로 나한테서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빈곤한 어휘로는 도저히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게 훌륭한 맛이 났다. 그렇지만 아무리 맛있대도 아픈 건 아픈 거라 더이상은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다. 좋아. 일단 자르자. 잠깐만 참으면 그 다음부턴 마음껏 먹을 수 있겠지. 식칼을 꺼내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공복감이 극에 달하면서 눈앞이 핑 돌았다. 나는 넘어질 뻔했다가 간신히 식탁을 붙들고 주저앉았다. 배를 움켜쥐고 어지럼증이 가시기를 기다리자니까 여우가 총총히 다가와 발 언저리에 축축한 코끝을 부볐다. 여우는 이내 복사뼈를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아, 굳이 자를 것까진 없겠구나. 나는 여우처럼 열심히 손등을 핥았다. 핥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 나중에는 네 손가락을 입에 쑤셔넣고 쭉쭉 빨아댔다.

다음날 정신을 차려 보니 너덜너덜해진 왼손이 침에 허옇게 불어 있었다. 이렇게 핥아 대다가 손이 다 닳아 없어지면 젓가락질은 뭘로 하지, 하고 걱정했던 것까지는 어렴풋하게 기억나는데 내 손이 구체적으로 무슨 맛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달콤했던가, 짭잘했던가, 고기 맛이 났던가? 나는 퉁퉁 분 엄지손가락을 슬쩍 입에 물어봤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손에 난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아 한동안 일하는 데 애를 먹었다. 나는 이제 고무오리는 줄 수 없다고 여우에게 선언했다. 대신 먹고싶은 게 있으면 말해. 사다 줄 테니까. 혹시 간 같은 걸 사달라고 하면 어떡하나. 보통 정육점에서 간도 팔던가? 순대 파는 데서 간만 달라고 하면 줄까? 그래도 고기니까 비싸겠지 따위의 걱정을 하고 있었더니 여우가 말하기를, 자기는 개 사료라도 별로 상관없단다. 나는 퇴근길에 개 사료 한 포대와 순대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왔다. 여우는 둘 다 맛있게 먹었다. 다음에는 이걸 더 달라고 하세요. 일부러 간을 많이 받아왔건만 여우는 허파만 쏙쏙 골라 먹고선 그런 소릴 했다.

넥타와 암브로시아를 먹은 인간이 불멸을 얻듯, 개 사료처럼 현실적인 음식을 먹이고부터 여우의 꼬리는 달마다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 달이 지나자 여우는 봉제인형처럼 조용해졌고 다시 세 달이 지나고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꼬리가 한 개로 줄어 평범한 여우처럼 보이게 되자 나는 주말마다 여우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대개는 집 근처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다 들어왔지만 벚꽃을 보러 공원까지 나갈 때도 있었다. 하루는 공원 호수에 노란 새끼오리들이 모여 있길래 여우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여우는 얕은 호숫가를 첨벙첨벙 뛰어다니며 즐겁게 오리를 쫓았고 뜻밖의 재난에 놀란 새끼오리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어미에게로 도망갔다. 새끼오리들이 멀찌감치 달아난 뒤로도 여우는 한동안 물장난을 치다가 돌아와 푸르르 몸을 털었다. 비릿한 물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여우를 목욕시켜줘야 했다. 그 때 집 어질러 논 거 사실 너였지? 북실북실한 털을 북북 문질러 거품을 내면서 물어보니 여우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네가 고무오리들한테 실체를 부여한 거잖아. 더 추궁하자 여우는 웃는 것처럼 가늘게 실눈을 떴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우는 도로 졸렬한 봉제인형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인형의 비뚜름한 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젯밤에 보송보송 잘 마른 여우 털에서 기분좋게 풍기던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인형은 높이가 어중간해서 똑바로 누워도 모로 누워도 영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다시 그걸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혹여 다시 변하지 않을까 싶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구석구석 뜯어보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잡한 모양이 그대로다. 자주 보다 보니 어쩐지 정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없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36 단편 귀하의 의무 임신 등급은,11 볼티 2008.02.05 0
2135 단편 티티카카의 눈물2 제이 2006.03.16 0
2134 단편 리무버4 gozaus 2011.09.22 0
2133 단편 텅 빈 지하철에서 엄길윤 2014.04.11 0
2132 단편 유리병 속의 정체1 뭉그리 2005.12.14 0
2131 단편 딸이 피는 뒷동산 pilza2 2005.05.13 0
2130 단편 티셔츠 라벨1 김효 2013.02.02 0
2129 단편 그 서점에 갔었다.1 unica 2003.08.02 0
2128 단편 안녕, 하루1 너구리맛우동 2011.12.01 0
2127 단편 [이벤트] Eyes on Me2 미로냥 2004.04.06 0
2126 단편 기사, 말을 돌리다7 양소년 2004.08.25 0
2125 단편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지 않는다1 매구 2009.11.12 0
2124 단편 환타지아(Fantasia) 루나 2003.11.10 0
2123 단편 엿같은 환상소설3 아르하 2003.08.15 0
2122 단편 2014 뽁뽁이 대량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10 dcdc 2008.08.05 0
2121 단편 사탕8 이원형 2004.10.30 0
2120 단편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7 몽상가 2009.04.26 0
2119 단편 고양이의 눈2 감상칼자 2005.09.18 0
2118 단편 (번역) 나는 어떻게 아내에게 청혼했나 : 외계인 섹스 이야기 (3)2 직딩 2012.11.28 0
2117 단편 작위적인 당신의 이야기 윌라얄리 2012.02.06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