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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불가사리 이야기

2010.08.15 23:5108.15

애초에 한을님이 세상을 지으실 적에
하늘은 둥글게 땅은 모나게 하셨더라
하늘하고 땅하고 아귀는 꼭 맞는데
둥근 것이 모난 것에 어찌 아귀가 맞을까
모난 원 둥근 네모
이 세상 사는 이야기-


  달애 나라 신갈지 마을에 어떤 젊은이가 살았다. 젊은이의 이름은 적록이었다. 아비는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장사바치로 어느 골 어느 구석에 죽었는지도 몰랐고, 그저 세갈래진 길 가에 술막을 차린 여편네와 하룻밤 정을 통한 게 전부였다. 적록이는 어릴 때부터 홀어미 밑에서 술막 일 도우며 자라, 언젠가는 술막 일을 물려받겠거니 하고 살았다. 어디 먼 곳을 떠돌아다닌다 큰 돈을 번다 대감정승이 된다 아무 소리를 해도 허튼 소리로 웃고 넘겨 버리기만 했다. 한창 나라 끼리 치고받고 싸움이 나랏님들 마음만 내키면 동네 개싸움처럼 벌어지던 판이어서 이대로 촌구석에 썩느니 전공을 세워 출세해보겠다고 훌쩍 떠나는 젊은이들도 많았건만, 적록이는 항상 제자리였다. 우직하니 일만 하는 적록이더러 바보인게라고 숭보는 처녀들도 많았지만, 적록이는 그냥 무덤덤했다. 근방 아낙네들은 소같이 묵직하니 복받았다고들 했다. 아 일이 생기기전에야 누군들 다 복받았다고들 했다.

  어느 날 늦어 늬적늬적 저물어가는 손도 없는 저녁에, 남쪽 포아 장터 쪽에서 왠 삿갓을 눌러쓴 사람이 하나 올라왔다. 이미 늦은 때에 올라왔으니 장을 지나 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남루한데다 눌러쓴 삿갓이 흔해 보이지가 않아서 적록이는 말로만 듣던 죄 탓에 하늘을 볼 수가 없다는 아니타 중들인가 싶었다. 실제 본 일은 없었으되 말투가 묘해서 이웃 갈회 나라 사람이 달애 말을 흉내내는 듯이 들렸다. 국밥을 청하는대로 뜨끈한 국물 한사발 퍼다 밥덩이를 풍 말아 내놓았다. 일이 그닥 없는지라 어머니는 뒷켠서 술독 둘러보고 있었고, 적록이는 참을성 있게 다른 상들을 치우고 닦고 기다렸다. 훌훌 그릇을 비우고 난 손이 난처한 소리를 했다. 송구스럽게 되었사오나 돈이 없노라고. 적록이가 고집스레 다시 말하려는데 손이 말하기를 기다리시라, 돈 대신 다른 걸 주겠노라. 보고 있노라니 그릇에 묻은 밥알 서너알을 떼어 손 끝으로 뭉개 우물우물 한다. 그래가지고 내려놓으니 아 당장에, 뭉개졌던 밥알 뭉치가 꿈질 꿈질 하면서 요맨치로 움직이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적록에게 내어밀며 이 정도면 사례가 되리라. 불가사리라는 영물이니 온갖 쇠붙이를 먹여 키우면 먹는대로 클 거라. 적록이가 어이없이 멀거니 보고 있는 새 손은 재빨리 행랑을 챙겨 떠나버렸다. 적록이 어미가 나와 봤을 때는 그저 시주 주어 보냈노라고 해 두었다. 어미는 이상타 하면서도 어쩌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다.

  방구석에 놓아두니 불가사리는 콩알만했다. 움직이는 꼴이 재밌어서 한동안 내두고 보다가 잊어먹었다. 그러다 다시 봤을 때는 부러진 바늘토막을 주워 먹고 콩알만한 게 조약돌 만해져 있었다. 신기해서 깨진 숫갈을 가져다 먹이니 잘 먹고 손가락 두 마디 만치 자랐다. 아 자라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요놈이 자라니까 더 먹을 걸 찾았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숫갈 젓갈 주워먹는 게 아주 난리였다. 먹고 손가락 세마디 만치, 아 손바닥 만치, 주먹만치 불쑥불쑥 자랐다. 그제야 어미가 이게 뭔 변고냐고 닦달하니 적록이가 있는대로 실토했다. 어미가 숭헌 물건이라고, 얼른 부지깽이로 후려쳤더니 부지깽이가 동강났다. 빗자루로 패도 씨알도 안 먹혔다. 등허리 사지가 죄다 쇠같이 단단했다. 집어내어다 버리려 하니 어찌 묵직헌지 여지껏 제가 집어먹은 것들만 했다. 숫갈을 동내놓은 주제에 적록이만 졸졸졸 따라다녔다. 골치를 썩인 끝에 구경거리로 내놓으면 어찌 메우기라도 하겠거니 했다. 그랬더니 구경꾼들이 신기하다고 던져주는 동전을 넙죽넙죽 제가 다 받아먹었다. 구경꾼들은 그 꼴을 보고 동전을 더 던져 주고 또 제가 좋다고 다 받아먹었다. 신난 건 불가사리하고 구경꾼들이고 적록이 어미는 보고 있자니 속이 썩어 일찌감치 판을 때려치웠다.

  이 놈으 것이 쓸 데라고는 한 구석탱이도 없는 게 저지르는 짓이라고는 하나같이 말썽이라서 적록이 어미는 숫제 앓아 누워버렸다. 솥뚜껑이 없어졌다 싶더니, 그다음에는 뻥 밑창 뚫린 솥 바닥에 강아지만해진 놈이 앉아서 볼을 불뚝불뚝 하고 있었다. 도끼는 자루만 남아가지고 장작을 못 팬다. 동전을 어찌 넙죽넙죽 잘 먹어대는지, 나중에는 적록이 어미가 애지중지하던 은조각 달랑 하나 있던 것도 제가 꿀떡해버려서 어미가 드러 누웠다. 농 위에 높다랗게 돈주머니를 달아놓고 제깍제깍 지전으로 바꿔대서 온 술막에 쇠붙이라곤 하나도 없고 겨우 일이 그치나 싶었다. 이제는 장 가는 적록이를 쭐래쭐래 딸아가서 남우 돈 꾸러미를 덥썩...! 하는 통에는 적록이도 펄쩍 뛰었다. 이 놈이 돈을 도로 뱉어내기라도 하믄 좋을 것을, 먹고 또 먹고 불쑥불쑥 크고 또 먹어대기만 했지 토해내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마을에 호미며 가래같은 것도 자루만 남아있기 일쑤여서, 없어졌다 하면 시구헌날 적록이를 찾아와서 주먹을 을러대어 골치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엿장수를 덮쳤을 때는 송장 치울 뻔 했다. 쇳덩이가 덤벼 드는데야 엿장수가 악 소리 못 지르고 깔려 죽을 뻔 했지, 먼저 가위를 낚아채 우적우적 씹지 않았더래면 걸음아 날 살려라 짐 내던지고 도망친 엿장수가 어디 몸통은 쇠고 팔다리는 돌로 된 것도 아닌데 살겠나. 아 몸통이 쇠면 사지에 머리만 딸랑 남았을테지만. 이건 그래도 아주 혼난 엿장수가 두번다시 찾아오질 않았으니 엿판만 모셔뒀다가 오뉴월 더위에 녹는 엿을 나눠줘 애들만 신났다. 어미는 누워가지고 하는 말이 말마다 애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가지고 저런 우환덩어리를, 하고 그때마다 적록이는 옆에 무릎 꿇고 앉아서는 송구스러워서 고개만 주억주억 황새 논두렁 쪼듯 했다.

  여기서만 끝났으면 아 하는 게 얘기가 안 되지. 이 놈이 사고를 쳐도 아주 제대로 일을 내버렸다. 송아지 만한 놈이 쇠맛은 알아가지고 어떻게 용케 더 값나는 건 알고 그것만 더 좋아라 했다. 그래봤자 은조각 하나 주워먹고 적록이 어미 앓아 눕게 한게 전부였는데, 이놈이 동네를 싸돌아다니다가 글쎄 마을 송 부자댁 안방으로 꿈질꿈질 기어들어갔다. 마님은 죽는다 죽는다 하고 송 부자는 저 놈 잡아라 저 놈 잡아라, 돌쇠 마당쇠 떡쇠 다들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아주 난리굿판이 벌어졌다. 몽둥이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아 쇠붙이로 된 등허리가 다쳐? 유유자적하게 자물쇠 뜯어먹고 금은패물을 하나씩 씹어먹더니, 열쇠까지 깔끔히 챙겨 먹고 도로 어기적 어기적 나와버렸다. 눈 앞에서 패물함을 통째로 털린 마님은 어이구 골이야 쓰러져서 죽네 사네 하고, 돌쇠 마당쇠 떡쇠 여튼 쇠자 돌림인 놈들은 어디 제가 쇠잡아먹는 불가사리를 배기나? 송아지 만한 쇳덩이가 어찌 무거운데, 저들이 그걸 또 들어다 옮겨? 송 부자가 제 성을 못이겨 아주 길길이 날뛰다가 당장에 원에 불달려가 업드러져서 주절주절 고해 바친다. 어이구 나으리 나으리, 글쎄 요 고을에 아주 흉물이 있사온데 불가사리라고 어쩌구 어쩌구. 원이 가만히 들어보니 이게 아주 일이다. 헌데 난다긴다 하는 포졸들도 백성들 닦달해서 후려몰 때는 제 세상이더니 사람 아닌 게 날뛴다니까 사족을 못 쓰고 발발 떤다. 머 어릴 적에 삵을 때려잡았네 하는 원도 쇳뎅이는 자신이 없든지 그 주인이라는 적록이를 잡아와라 했다.

  적록이는 난데없이 잡혀들어와서 창천에 날벼락 도래솔에 들불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딱 치고 따르르르- 꿍! 하는데는 혼비백산해서 그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살려 줍쇼 넙죽넙죽 절한다. 옆에서 송 부자는 저놈이 아주 도적놈이라고, 요즘 기가 편 비적놈들 한패라고 길길이 날뛴다. 원이 찬찬히 사정을 들어보니 이게 적록이가 잘못한 건 돈 대신 우환덩어리 받은 거 밖에 없다. 그래도 요새 가뜩이나 고을 둘러친 산자락에 비적이 들끓어 언제나 일이 터질까 조마조마한데 이런 일을 대강 넘기다가 더 높은 데로 소 올라가면 골치아파진다. 해서 판결은 대강 대강, 어이어이 해서 주인이 간수 못한 잘못이니 사람 물은 개는 주인 탓인 것처럼 네 죄를 알렸다! 때우고 적록이는 덜커덩 옥에 갇히고 적록이 어미는 그 소리 듣고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옥에 갇혀서는 적록이는 그냥 혼이 다 빠져서 정신이 없다. 자기는 일만 하고 조용히 살았지 자그마치 옥 씩이나 갈 일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왠 우환덩어리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으니 이게 정말 왠일이냐, 하늘에 원통하고 땅에 발을 구른다. 이러고 있는데 우두둑 소리가 나드니 옥 살문이 뜯겨 나가고 불가사리 놈이 고개를 쑥 디민다. 일을 그 지경으로 벌여 놓고서 제 주인 찾아온 것 까지는 좋은데, 이건 영락없이 탈옥이다. 포졸들이 몽둥이들고 창들고 후여후여 달려 들어서 빙 에워싸고는 원은 뒤에서 고함만 치는데, 불가사리란 놈이 창날은 죄다 덥썩덥썩 깨물어 먹으니 전부다 걸음이 날살려라 달아난다. 담벼락을 한대 뻑 후려치니 휑하니 뚫리고, 이젠 어찌 발뺌할 데 없이 죄인이 되어버린 적록이는 불가사리하고 도망간다.

  숲속으로 뛰다가 걷다가 하였다. 달리다 지쳐서 어정버정, 산 넘어가는 호젓한 길 따라 걷는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비적이 머물만하다. 근방에 비적이 끓는다고는 아까 말 했지? 나라들끼리 싸움으로 어지러운 판에 어데 나라 안이 온전하겠나. 산마다 골마다 저마다 수령이랍시고 까보면 죄다 비적 산적 화적들이 진치고 앉았다. 비적들이 진친 후로 이 길은 인적은 끊어진지 오래고 전령이나 다른 산 두령한테 소식 전한다고 헐레벌떡 뛰어다니면 모를까, 토끼나 다람쥐나 넘어다니는 길이 되었다. 그래도 기강은 잡는다고 길마다 보초는 새워놓고 암구호도 정해 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뭣모르는 비적들이 자기들 소굴 한복판에 터덜터덜 걷는 적록이 앞에 썩 나타난다. 왠 놈이냐? 원에서 정탐온 졸개냐? 기세등등 칼 빼든 것 까지는 좋은데, 아 글쎄 칼날도 쇠짜로 된 게 아니야. 제대로 닦지도 않아서 녹만 잔뜩 낀 원 것들만 먹어서 입맛이 텁텁한데, 이쪽은 그래도 한창이라 기름칠하고 날도 잘 간수한 쇠니 얼씨구나 좋구나 달려들어 물어뜯으니 한 놈은 밑에 깔리고 한 놈은 곰 본 듯 내뺀다. 두 놈 다 죽는다 고함치는 건 똑같다. 부두령이 뭔일이냐고 물으니 아래에 괴물이 나타나서 칼을 먹고 여차저차. 예끼놈 대낮부터 술 처먹었냐. 아무래도 좋으니까 지금 나머지 하나 죽게 생겼으니까 빨리 가보라고. 부하 더 끌고 내려가니 역시 칼자루만 남고 말았다. 이래서 온 산채가 발칵 뒤집어졌는데, 두령이란 놈은 의뭉해서 꾀를 낸다.

  자꾸만 칼든 놈만 나와서 뺏겨 먹히고 뺏겨 먹히고 하다가 딱 두령이란 놈이 나온다. 나와서는 영물을 데리고 다니는 귀인인 줄 모르고 욕뵜다고. 어서 이리로 들어오시라고. 갑자기 대접한다고 태도를 싹 바꾸니 이상한 줄은 알면서도 일단은 따라 들어갔다. 좋은 고기에 술하고 지지고 볶은 요리들. 적록이가 일단 배를 채우는 동안 옆에서는 불가사리도 같이 멀쩡한 칼을 우적우적 씹어먹는데, 그 새 두령은 부두령하고 모의를 한다. 저런 게 영물이라, 한 마리만 있으면 아주 산채가 기를 펼 거라고. 도깨비든 임이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어떻게 주인을 요절내고 뺏어야 쓰겠는데? 저게 쇠붙이는 다 날로 뜯어 먹으니, 나무 몽둥이로 흠씬 두드려 패면 잡을 거라. 이래서 또 어디서 주워 들은 대로 딴 방으로 청해서 뒤에는 병풍 치고, 그 뒤엔 몽둥이 든 비적들이 우르르 숨고, 자기는 술을 권하다가 술잔을 떨어뜨리면 신호로 당장에 달려든다... 다 좋았는데, 술잔을 떨어뜨리니까 일단은 튀어 나왔는데 엎드려 쇠만 우적우적 씹던 불가사리가 주인을 지킨다고 몸을 던졌더라. 이젠 큰 송아지만한 쇳덩어리가 몸을 던지니 부러지고 깨지고 터지고, 두령이란 놈은 그냥 납죽 밑에 깔려서 영물 욕심내다가 당장에 저승길 가버렸다. 헌디 부두령은 더 속이 시꺼매서, 적록이한테 두령을 권해놓고 축하주랍시고 독잔을 건넨다. 적록이가 낌새가 안 좋은 걸 알고 두번 세번 사양하니 속이 타서 이번엔 먹을 거에다가 있는대로 약을 뿌리는데, 옮기는 놈이 미련하게 하나 집어 먹었다가 목이 턱 막히고 혀가 안 돌아간다. 들통난 걸 알고 달려들다가 불가사리가 한대 후려치니 쇠매로 골을 맞고 제가 골이 쇠도 아닌데 견딜 재간이 없다. 골이 쇠면 또 이번엔 몸통만 남겠지? 두령 부두령 죄다 그 꼴이 나니 비적들이 그제야 딴맘 안 품고 두령으로 받들어 모셨다.

  가만히만 있었으면 술막 주인이 되었을 것을, 지나가던 손이 덜렁 던져준 불가사리 하나에 적록이는 왠 비적 두령이 되어버렸다. 별로 제대로 하는 게 없어도 워낙 엉망인 때라, 이래저래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고 자꾸 비적들만 불불불 비오면 논이 피밭되듯 늘어나싼다. 딱히 적록이가 뭘 하질 않았는데도 저 산채 두령이 영물이 있다더라! 에서 시작해서 그 두령이 술사라드라, 차웅이라드라, 비를 부리고 바람을 쫓는다드라, 날붙이에 찔려 피 하나 안 난다더라, 도깨비랑 놀고 임하고 술을 권커니 받거니 한다드라, 불가사리 한 마리 가지고 별의 별 소문이 다 났다. 그래두 어차피 비적이 될 꺼면 두령이 소문난 산채가 좋을 것 같애서, 그야말로 소문이 소문을 물고 꼬리를 이어서 날로 북적북적 산채에 사람은 많아진다. 아 우리 두령은 쇠를 날로 씹어먹는 다잖어! 전에 속이 음험한 두령 둘을 손가락 하나로 때려죽였담서? 아주 큰 인물이래! 하늘이 내신 사람이래! 나랏님 성씨가 바뀔꺼래! 이러다보니 부하들이 뭐 뭐 좀 할까요 하면 적록이가 응 그래 알아서 해라, 하고 사람 머릿 수 믿고 와르르 와르르 하다 보면 포졸들은 지레 겁먹고 도망치고 싸우는 족족 다 이기니 이게 또 소문이 구름처럼 난다. 사정이 이리 되니 다른 두령들이 알아서 와서 적록이 뒤에 곰만해진 불가사리가 떡 버티고 게으르게 앉은 걸 보고 항복하고 제 손으로 산채를 들어다 바친다. 고마운 불가사리한테 쇠만 멕이는 게 아니라 이젠 가끔씩 아주 별식으로 은조각도 주고 금조각은 딱 한번 취해서 먹여봤다, 깨고나서 후회하긴 했지만. 불가사리란 놈도 이제 먹을 게 많아지니까 욕심은 덜 부리고 느긋이 골라 먹어서 한동안은 비적이랍시고 해 놓고 날붙이 하나 없이 다니더니 제법 칼이며 창도 갖추었다. 값나는 걸 먹여서 그런지 예전엔 그냥 얼룩덜룩하고 겉에 무늬도 적던게 점점 색도 달라지고 무늬도 제법 당초무늬 구름무늬 인당무늬 멋나는 것들이 생겼다.

  이래 사정이 펴다 보니 이젠 곳곳에서 백성들은 아우성이고 대쪽같은 선비들은 제자리에 눌러 앉아서 목숨을 안 아끼고 소 올리기에 바쁘다. 나라가 이렇듯 비적의 횡포에 몸을 떨고 있사옵고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하늘을 찌르나이다! 부디 백성들을 돌보소서- 하고 피 토하는 듯한 소가 연달아 올라오고, 어느 고을이 세금을 털렸다는 둥 원이 속곳 바람으로 쫓겨났다는 둥 장계가 줄지어 뒤를 이으니, 나랏님이 보시고 노해서 추상같이 호령하신다. 온 나라에 이렇듯 비적들이 날뛰고 있는데 어찌 경들은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가? 썩 물러가라! 하시고 포도대장을 불러 은밀히 명을 내리시니 포도대장이 황송해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칼을 받았다. 어전에서 물러나자 질풍같이 달려나가 포도군사들을 휘몰아 도성을 달려 나가니 기세가 그야말로 위풍당당- 한칼에 나라 안팎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들을 쓸어 없애 버릴 듯 하다. 어허, 좋구나. 도성 근교부터 아주 휘루루루 딱딱 죄다 휩쓸고 지나가는데- 비적들이래두 마음 약한 백성들이 많어서 나랏님 군사가 온다드라, 소문이 나면 제 멋대로 흩어지고 부서지고, 거기다 힘깨나 쓴다는 것들이 노략질이나 좀 해 봤지 어디 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병법을 알어. 살짝 빼면 좋다고 우루루루 쫓아 들어오다가 문득 기세를 돋우워 몰아치면 어마 뜨거라 도로 우루루루 도망쳐나가니 코흘리개 아이가 떡 주무르듯이 쉬웠다. 이렇게 파죽지세로 몰아 나가다가 적록이네 산채에 이르렀겠다.

  적록이가 하는 일이야 두령이라고 앉아서 뭘 어떻게 하자면 거기 대고 응 그래 응 그래 하는 거 밖에 없었는데 당장에 나랏님 군사가 온다니 밀명을 받들은 포도대장이 하사받은 칼로 두령들 목을 몇이나 베었다드라, 포도대장이 신출귀몰한 병법의 귀재라드라, 다른 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드라, 온갖 헛소문이 난무했다. 부하들이 맞서 싸워야한다고 하니 영 내키지 않으면서도 일단은 별 뾰죽한 수가 있지도 않다. 그래서 제딴에는 병법을 쓴답시고 양쪽에 매복을 묻고 가운데에 미끼를 두어 골로 끌어들이자고 했다. 부하들이라고 아는 게 없어서 그저 훌륭하다고 입에 침이 마른다. 해서 어찌어찌 채비를 갖추고서 기다리는데, 포도대장이 정탐나갔던 군사들 보고를 듣고 얕은 수작에 코웃음친다. 정면으로 휘몰아치는 척 하면서 셋으로 갈라져 먹이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두 턱주가리를 후려치고 한갈래는 계속 쫓으면 부드러운 혀가 당해낼 도리가 없노라 했다. 드디어 포도대장이 포도군사들을 이끌고 산채를 친다. 적록이가 미끼를 이끌어서 쫓아 들어오는 걸 보고 얼른 돌아서 도망치는데, 매복했던 군사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적병의 군세가 셋으로 갈라진다. 셋이 전부 한짝씩 들이치니 턱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데 혀를 쫓아 깊숙히 들어온다. 막 적록이네 산채가 뭉그러져 대패 하려는데, 운수나쁜 포도대장은 불가사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주인이 도망치는 걸 보고 간신히 다르고 얼래서 뒤쪽에 떼어 놓았던 불가사리가 주인을 구하러 뛰어든다. 곰만한 쇳덩어리가 곰같은 기세로 포도군사들을 덮친다. 깊숙히 들어왔던 한갈래가 설날 떡치듯 작살나니 나머지 두갈래가 온전할리 없다. 불가사리가 길길이 날뛰는대로 한갈래가 또 어그러지고, 나머지 하나 만으로 어찌할 수가 없어 달팽이 발 움츠리듯 쏙 물러나니 산채의 대승이다.

  이러매 한층 적록이의 이름이 드높다. 승승장구하던 포도군사의 기세를 확 꺾었으니, 전전긍긍하던 다른 두령들이 앞다투어 적록이네 산채로 달려와 고개를 숙인다. 더해서 소문이 퍼지고 퍼져, 나라의 운세가 끝났다, 다른 나라 군대와 싸우려면 지금 나랏님으로는 안 된다, 역시 적록이는 한을님께서 나랏님으로 점지하신 인물이다, 하고 점점 더 요란해지니 민심이 어지러운 게 아니라 거꾸로 한데로 몰린다. 나랏님이 신하들을 물리치고 탄식하시는데 그 때에 어떤 술사가 나타나서 자신이 불가사리를 죽일 수 있댄다. 묘책을 아뢰기를 불가사리는 不可死리지만 또 불可死리도 될 수 있노라. 쇠붙이는 먹히지 않지만, 불을 놓으면 죽일 수 있다- 뭐? 전에 들은 얘기라고? 그냥 모른 척 하고 들어. 얘기가 원래 다 옛날에 들은 거 하고 비스무리 하고 그러지 뭐. 옛날 얘기 한두번 들어봐? 그래, 여튼 불로 불가사리를 죽일 수 있노라고 아뢰니 나랏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만일 불가사리를 죽일 수 있으면 금조각 100개를 내리겠다고 하셨다. 당장 이 술사가 변복하여 어느 촌구석 의원같이 하고 도성을 나가 산채 주변을 배회하다가 보초들에게 걸리니 불가사리에 대해 두령에게 아뢸 게 있다고 했다. 데려가서 잘 대접받고 나서, 불가사리는 영물이나 조금의 흠집으로도 약점이 있을 수 있노라, 자신이 그걸 진맥하고 고칠 수 있노라. 이래가지고 불가사리를 두고 불뜸을 놓기 시작하는데, 불가사리란 놈이 아파서 몸을 뒤틀다가 뒷발로 한대 호되게 걷어차니 술사는 그 길로 저 세상이다. 놀라 품 속을 뒤져보니 나랏님의 방을 떼어가지고 있고 나랏님의 밀약이 담긴 편지 한 통과 한낱 의원의 것이 아닌 술법의 물건들이 나오므로 간자인 것을 알았다.

  이를 알고 나서 부하들이 직접 도성을 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무언가 불가사리에게 해꼬지 하려던 것이 분명하니 이렇게 된 이상 먼저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반역이라니 살떨리는 소리지만 포도군사가 목전에 들이닥쳐서 제 목이 달아날 뻔 했는데 별 수야 있나? 아직 목이 붙어있나 만져보고 당장에 온 산채 군사를 일으켜서 도성으로 쳐들어간다. 떡하니 '대원수 적록' 크게 쓴 깃발 내걸고 먼지를 휘말아 올리면서 밀고 들어간다. 소문은 온데 간데 없이 퍼져 아 천병이 내려와서 치는 거라고, 포도군사는 죄다 뭉그러져 물벼락 맞은 개미집 마냥 쓸려 내려가고 너도나도 쟁이고 낫이고 들고 저도 한몫 하겠다고 끼어서 원을 두들겨 부수고 옥을 깨어 끄집어냈다. 도성으로 가까이 갈수록 적록이의 군사는 불어나고 나랏님의 군사는 줄어드는 판국이었다. 이제 도성 성곽을 빙 둘러서 에워싸고서 항복하라고 전령을 보내니 전령 모가지만 딸랑 돌아왔다. 서슬 퍼런 수문장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고, 도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날래고 굳세다. 마음같아서는 성문을 들부수고 싶은데 가까이만 가면 끓는 물에 살비가 쏟아지니 수가 없고, 그냥 둘러치고 지키고만 있자니 다른 나라 군대를 끌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궁리 끝에 불가사리를 풀어놓으니, 돌벽을 꽝 뚫고 들어가서 군고에 자리잡고 앉았다. 와삭와삭 죄다 먹어치우는데는 용장밑에 맹병도 소용이 없어서, 어어어 하는 새에 군고가 텅 비고 불가사리란 놈이 신나서 하나하나 쫓아가면서 쇠붙이만 날름 벗겨 먹었다. 촉은 없고 대만 남은 살하고 날은 없고 자루만 남은 칼하고 판때기는 없고 가죽만 남은 갑옷 가지고 뭘 할 수야 있나? 열린 문으로 일제히 짓쳐들어가니 너도나도 손들어 항복하고 달애 나라 나랏님이 바뀌었다.

  이래서 비적 두령이 불가사리 하나 믿고 나랏님이 됐다. 나라 꼴은 말이 아니고 너나 나나 북적북적한디 그래도 다행은 이웃 나라는 잠잠. 온 나라가 벌집 쑤신 거 같고 저마다 자기가 뭐 해먹겠다고 들고 일어난다. 산채의 졸개들을 풀어서 온 나라를 참빗으로 빗듯 쓸어내려도 좀만 지나면 여기서 벌떡 저기서 벌떡 경칩에 비오고 개구리 튀어나오데끼 난리다. 이런데 풍문이 돌기를 불가사리가 하나 더 있노라. 아직 강아지만한 게 쇠붙이를 날름날름 집어먹으니 신기하다고, 적록이가 들어보니 틀림없는 불가사리인데 제가 불가사리로 나랏님 자리까지 꿰찬 인물이라 남이 가지고 있다니 앉아도 편치 않고 누워도 잠이 안 오고 서서도 어정어정 돌아다니기만 했다. 아직 어리니 망정이지 더 크면 자기처럼 또 뒤업지 말란 법이 없지. 생각 끝에 믿을 만한 날래고 똑똑한 부하 몇을 골라서, 등나무 껍질 갑옷에 칡넝쿨로 꼰 밧줄하고 잘 깎은 나무몽둥이하고 주면서 그 불가사리 주인이란 놈은 때려 죽이고 불가사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열 놈이 물러갔다가 앉으나 서나 불안한 나흘이 지나고서 다섯 놈만 반병신 되어서 바둥바둥거리는 불가사리를 끌고 왔다. 아직 돼지새끼만한 게 주인은 가려볼 줄 알아서 탕탕 뛰고 구르고 난리다. 보고에서 은조각 금조각 내어 들이대줘도 한사코 안 먹는다. 그러다가 이제 집채만해진 원래 불가사리를 데려다 보이니 아 글쎄 두 놈이 잘 어울리는게 암수 한쌍이라. 그제야 말도 고분고분 잘 듣고 주는 것도 받아먹고 해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한시름 놓았다.

  요로코롬 얘기가 끝나질 않지. 이제 편해져서 하는 일 없는 불가사리란 놈이 이젠 또 둘이 되어서 나란히 앉아 놀고 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먹어댄다. 에다가 보고에서 금조각을 좀 끌어다 멕였더니, 아 글쎄 이놈이 완전히 맛들려서 날붙이는 제쳐두고 날마다 금조각만 와삭와삭 씹어 먹어대니 덩치는 집채만한 게 하루 내내 먹어대면 얼마나 먹겠나? 며칠 지나니까 보고는 텅 비고 이놈이 제 주인 머리에 쓴 관까지 뜯어먹을라고 보챈다. 값난 걸 많이 먹였더니 몸은 불어서 반짝반짝하고 금색 은색 도는 데에 무늬는 또 천하 명장들도 못 따라할 솜씨였다. 이래서 딱 보기에 보는 사람이 주눅 드는 거 까지는 좋은데 그러자고 드는 돈이 한푼 두푼이어야지. 국고는 동나고 사방에서 돈 달라고 아우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거하고 돈 얘기는 도깨비도 잡거든. 이래가지고 불가사리가 골칫거리가 되었겠다. 이걸 좀 어떻게 해버렸으면 좋겠는데 날도 안 들어가고 딴딴하기는 쇠같고 덩치는 산만한 놈을 어쩌나? 이래가지고 또 고민고민하는데 어느밤에 불쑥, 옛날에 불가사리를 주고갔던 그 손이 나타난다. 불가사리 덕에 나랏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지금 그거 때문에 골치 썩이지 않냐고. 그렇다고, 좀 어떻게 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수가 없다고. 그럼 좋은 수가 있노라. 무슨? 불가사리가 둘이니, 어차피 한마리만 있어도 될 거 아닌가? 덩치 큰 놈이 먹어치우는 게 문제니 그 놈은 없애 버리고, 작은 불가사리 하나만 일단 키우면 된다. 쇠도 안 들어가는 놈을 무슨 수로 잡노? 이제 여기서 또 아까전에 나왔던 고 不可死리가 어쩌고 불可死리가 어쩌고 고 소리가 또 나오지. 이래 이래 얘기해 놓고 손이 홀연히 사라지니, 그 얘기 듣고 적록이가 마음을 굳혔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한도 끝도 없는 거여서, 무지렁이 술막 주인으로 잘먹고 잘살다 죽었으면 그만이었을 게 뉘 덕에 비적 두령이 되고 나랏님이 된 건데, 불가사리 공는 까맣게 잊고서 제 돈 챙길 것만 생각한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거 참 묘안이거든. 해서 구덩이를 깊게 파고서 나뭇단을 쌓아올리고 기름을 붓은 다음 남은 금붙이를 죄다 쌓아 두었겠다. 큰 불가사리가 어슬렁 어슬렁 내려와서 천천히 금을 우적우적 먹으니, 딱따기 소리가 나고 횃불을 일제히 던져서 죄다 훨훨 타오르는 게 아주 열화지옥이다. 불가사리란 놈이 제 주인이 저를 버렸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살이 타고 거죽이 녹는데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가만히 있다. 이래서 적록이가 속으로 이제 다 되었구나, 좋아하고 있는데 아뿔싸! 이제 제법 덩치가 커졌지만 그래도 큰 놈보다는 작은 불가사리가 제 짝이 죽는 걸 알고서 후다닥 달려들었다. 어 할 새도 없이 폴딱 뛰어서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드니, 적록이가 눈에서 불이 번쩍 하는데 불가사리 눈에서도 불이 번쩍했다. 큰 놈은 그래도 덩치가 있어서 엿토막 큰 건 입 속에서 잘 안 녹는 것 처럼 불길에 천천히 녹는데, 작은 놈은 겨우 고만해가지고 활활 타는 불속에 뛰어들었으니 녹아 뭉그러지는 게 순식간이라. 이제까지 가만히 불속에 있던 불가사리가 미쳐 날뛰면서 죽은 제 짝을 집어들어가지고 훌쩍 구덩이를 뛰어넘고 담벼락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길길이 뛰면서 가 버린다.

  이러고 나서 아주 방방곡곡 온 고을 온 나라가 떠들썩하니 난리였다. 미친 불가사리가 오늘은 어디를 나타났느니, 어느 산이 홀라당 다 타버렸다느니, 불가사리가 지나간 데는 남아나는 게 없다느니, 영물이 주인을 버린 걸 보면 오래 갈 상이 아니라느니, 나라가 망할 징조라느니, 음 적록이네가 들고 일어날 때보다 더 흉흉해지는데, 사방이 불바다다. 불가사리란 놈이 불이 붙은 채로 미쳐 날뛰는데, 글쎄 이 놈한테서 옮겨 붙은 불은 물을 부어도 안 꺼지고 흙을 덮어도 안 꺼지고 한사코 따닥 따닥 타기만 했다. 거기다 불가사리란 놈 거죽이 터진 틈새로 녹은 쇳물이 펄펄 끓는 게 흘러 넘치는데, 이게 한번 땅에 떨어지면 그 땅을 아주 쓸 수가 없었다. 어찌나 온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지 날마다 각 지방 각 고을에서 장계가 올라오고, 못살겠다 죽겠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러 솟구쳐 올랐다. 나라 안이 소가 밭을 날뛰어서 가로세로로 막 끌고 다닌 꼴이 되었다. 불덩어리 쇳덩어리가 불을 뚝뚝 흘리면서 날뛰는데 막을 재간이 없어, 포도군사고 포도대장이고 불가사리가 이리로 온다하면 다 달아났다. 백성들도 보따리 챙겨서 막 달아났다. 빈 고을은 홀라당 타고, 논도 타고 밭도 타고 산도 탔다. 하필이면 햇빛이 땡땡한 가뭄철이라 비는 안 와서 잎이 누르면 바싹 부스러지게 말랐는데 거기에 불을 댕기니 활활 잘도 탄다. 온 나라가 불에 싸여서 밤이 되어서 적록이가 나와보면 온 사방에 하늘이 붉은 빛이 은은했다. 자기가 못할 짓을 했노라, 했노라 가슴을 쳐봐도 빈대 잡겠다 한번 불 싸지른 초가삼간이 도로 돌아올리도 없다.

  그 새 어째 이상케 잠잠하다 했던 이웃 갈회 나라가 군사를 일으켰다. 불가사리가 나타났다 장계는 뒷전으로 밀릴만큼 다급하게 적병이 나타났노라, 어디가 떨어졌노라, 또 어디가 떨어졌노라, 어디는 백성들이 고을을 들어다 바쳤노라, 장계가 줄줄이 꼬리를 이었다. 갈회 나라에는 술사들이 있어가지고 술법으로 불가사리가 퍼뜨려 놓은 불을 끈다고들 했다. 적록이가 도성으로 진군할 때맨쿠로 빨리 죽죽죽 갈회 나라 군사들이 와가지고 도성에 백성이고 신하고 다 달아나서 텅 빈데 적록이만 혼자였다. 밤에 뭐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성벽을 와르르 뚫고서 불 붙어 미친 불가사리가 예전 주인 앞에 썩 나타난다. 내려다 보는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지니 적록이는 이제 끝이구나 했다. 그러는 차에 갑자기 말랐던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려퍼지는데 예의 그 불가사리를 만들어 주고는 불가사리 죽일 법을 일러 준 손이 갈회 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나타났다. 뭐라 뭐라 주를 외워 술을 펴니 그간 구름한점 없던 하늘에서 먹구름이 뭉실뭉실 몰려들어 두어번 더 하늘이 울자 장대비로 되어 쏟아 붙는다. 불이 주로 불러낸 비를 맞고 안 꺼지고 배기나, 금새 죽일 듯이 타오르던 불은 꺼지고 남은 건 망가져서 막쇠로도 못 쓰게 되버린 새까만 덩어리 뭉치다. 손이 삿갓을 벗고 나니 이마에 받은 인이 갈회 나라 승려로, 적록이는 애초부터 불가사리를 주고 나라를 빼앗게 한 거며 가뭄에다 불가사리 죽이려다 미치게 한 거 전부 다 간자가 한 데로 놀아난 것인 줄을 깨달았다. 이러매 처음 한을님의 영을 받아 산을 들어다 골짝을 메우고 세웠다는 달애 나라는 없어지고, 적록이는 얼마 후에 조용한 데서 목을 메어 죽었다. 불가사리하고 적록이는 인적 드문 들판에 내어다 봉분도 없이 묻어, 탄 쇠붙이 묻은 데는 도깨비도 안 오고 임도 내딛지 않고 어쩌다 그 일을 아는 나그네만 지나가다가 발을 쉬이며 장탄식을 바람에 날려 보내더라. 사람 세상 사는 게 다 이런 거라, 욕심 부리고 망하고 하는 게 죄다 제 뜻대로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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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불가사리 설화에서 불가사리의 뜻풀이(不可사리=죽일 수 없다, 불可사리=불로 죽일 수 있다) 부분만 따와서 써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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