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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신 협객전

2006.12.30 08:0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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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순조(純祖) 때 평안도 사람 홍경래(洪景來)가 서북인(西北人)을 차별함을 불만스럽게 여겨 난(亂)을 일으켰다. 비록 진압되긴 하였으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 사상을 개진한 그 의기로움을 높이 사니, 그의 어릴 때 일화가 한때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홍경래는 일찍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대범하여 영웅의 기질이 있었으매, 8살 때 '해압산에 걸터앉아 요포강에 발을 씻노라(踞坐海鴨山 洗足腰浦江)' 라는 시를 남겼다. 그의 문재(文才)에 감탄한 홍경래의 외삼촌 유학권이 그를 거두어 가르치니, 글 또한 뛰어났지만 검술, 차력(借力), 축지(縮地), 택견에도 매우 능했다.


어느날 홍경래가 13살 때 '秋風易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 라는 시를 지으니, 유학권이 이를 '가을 바람은 역수 장사 주먹이요, 밝은 해는 함양천자 머리로다.' 라고 해석하고 그의 문재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가 얼굴을 붉히며 성내어 말하기를,


"스승께선 어찌 제 시를 오역(誤譯)하십니까? 그 뜻이 아니오라, '가을 바람 불 때에 역수 장사는 주먹으로 함양 천자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올시다."


이에 유학권이 그 기상에 놀라 '함양 천자 진시황의 가슴이 써늘하겠도다.' 라고 칭찬하였음에도 홍경래가 반심(反心)을 지녔음을 짐작하고 저어하여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었다.



1


여불위(呂不韋)의 아들 정(政)이 진왕(秦王)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려던 때의 이야기다.


어미가 환관 행세를 한 사내와 통정하였다 하여 때려죽이고, 아비를 모욕하여 자살케한 진왕 정은 비록 그 천성이 독랄하였으나, 성품이 대범하고 영웅의 기상이 있어, 일찍부터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대군을 거병하여 가까이의 한(韓)을 치고 대국 조(趙)와 위(魏)를 차례로 무너뜨리니, 천하 만민이 진군(秦軍)의 위상에 벌벌 떨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편 총명하기로 이름난 연(燕)의 태자 단(丹)은 한때 진왕과 동문수학한 사이인지라, 스스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 앞에 나아가, 연만큼은 보전케 해 줄 것은 빌었으나 이미 삼국을 멸한 진왕이 옛 정을 돌볼리 없었다. 오히려 적국의 태자가 스스로 잡히러 왔음에 기뻐하며 그를 감금하니, 단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진왕에게 복수하고자 절치부심(切齒腐心)하였다.


태자가 천하의 협객들을 끌어모아 진왕을 벨 것을 촉구하니, 이에 가장 무예가 출중하고 담대하다는 자 셋이 모였다. 그러나 태자 단과 깊이 교분을 나누었던 현인 전광(田光)이 이르기를,


"첫째 자객은 혈기(血氣)만 넘쳐 큰일을 앞두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요, 둘째 자객은 맥기(脈氣)만 넘쳐 큰일을 앞두고 얼굴이 푸르러질 것이며, 셋째 자객은 골기(骨氣)만 넘쳐 큰일을 앞두고 얼굴이 하얘질 것입니다. 언뜻 보기엔 셋째 자객의 골격이 두드러져 위엄있어 보이나 실상은 중책을 맡을만한 위인이 되지 아니합니다."


이에 태자 단이 의아하여 가로되


"그렇다면 셋째 자객 진무양(秦舞陽)이 그 중 낫다는 말씀이오니까?"


전광이 웃으며 말하기를,


"태자께선 어찌하여 천하의 영웅을 버려두고 애송이들과 큰 일을 도모하려 하십니까? 이 늙은이가 비록 시전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몸을 감추고 사나 천하에 제일 가는 협객을 알고 있습니다. 검으로 치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인이요, 담대하기로 이를 것 같으면 어느 때고 평정을 잃지 않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감히 낯가죽 밖으로 드러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 저와 뜻을 같이 하니, 그저 비범함을 감추고 시전에서 개백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태자께서 예를 갖추어 그를 데려오면 능히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태자 단이 기뻐하며 온 나라에 수소문하여, 마침내 자객 형가(荊軻)를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길게 풀어헤친 머리하며 남루한 옷차림, 핏기 없는 얼굴 등이 심히 추레하여 과연 중임을 맡을만한 이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단이 그를 탐탁치 않아하자 전광이 돌연 안색을 바꾸며 꾸짖기를,


"태자께선 어찌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대사를 그르치려 하십니까? 진왕 정은 비록 그 성격이 포악하나 기량은 일세의 영웅으로 그를 죽이는 일에는 이만한 장사가 없습니다. 태자께서 대의를 잊으시고 소인배의 마음으로 형가를 대하신다면, 이 늙은이가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자고로 대사(大事)를 치를 시에는, 아는 입이 적을수록 도움이 되는 것이니 이만 작별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말을 마친 전광이 즉시 칼을 내어 자신의 목을 베니 태자 단이 그제서야 자신의 헤아림을 탓하며 형가에게 삼가 예를 표하고, 그에게 상경(上卿) 벼슬을 내려 위로 하였다. 전광의 시체를 수습하고 예를 치른 뒤, 비로소 형가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진왕은 천하의 영웅이고, 의심이 많은지라 그를 베기 위해선 세 가지 물건이 꼭 필요합니다."


태자 단이 결연하게 가로되


"일국(一國)의 명수(命壽)를 보전케 하는 일인데 무엇이 아까울까. 형경(荊卿)께서는 무엇이든 관계치 말고 말씀하십시오."


"진왕의 목을 벨 수 있는 천하의 명검이 그 하나요, 진왕의 지척까지 다가갈 수 있는 천하의 보물이 또 하나인데, 소인이 생각하자와 근래에 투항한 진의 장수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천혜의 요충지 독항(督亢)의 지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마지막 물건은 큰일을 성사시킬 담대한 의기일진대, 그 것은 이미 이 형가의 심중(心中)에 들어 있으니 따로 준비치 아니하여도 되겠습니다."


형가의 말에 돌연 태자 단이 낯빛을 흐리며 침중하게 답하기를,


"예리한 칼이 필요하리라 짐작하여 조의 명장(名匠) 서부인(徐夫人)의 검을 구하여 그 날에 맹독을 발라두었습니다. 독항의 지도 또한 못 내줄 물건은 아니나, 번오기의 목만큼은 부디 다시 생각하여 주십시오. 나를 믿고 찾아와준 이의 목을 어찌 벨 수 있단 말입니까? 형경께서는 이 단을 불의의 사람으로 만들려 하심입니까?"


형가가 불쾌하여 가로되


"일국의 태자로서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십니까. 일국의 명수를 정하는 일에 아까울 것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 또한 비록 백정으로 미물의 생명을 취하여 사나 인명이 존귀한 줄 모를만한 이가 아닙니다. 허나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때에 어찌 사소한 인정에 붙잡혀 일을 더디게 만드려 하십니까? 차라리 내 직접 번오기에게 뜻을 물어오겠습니다."


형가가 소매를 붙잡고 말리는 단을 뿌리치고, 번오기의 집으로 가 자초지종을 밝히니 번오기가 피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본디 진나라 사람으로 진왕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나 어느날 장기를 두다가 내가 한 수를 물려주지 않는다 하여 일가와 함께 삼족을 멸하였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하여 이 곳 연까지 도망왔으나, 정 그 놈에게 복수할 차가 없어 시름이 깊던 차에, 영웅께서 친히 걸음하시어 방책을 알려주시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뿐입니다. 부디 뜻대로 하시어 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형가가 담담히 말하기를,


"진군이 시시각각 수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 들어온 차에 그대의 목을 가져갈까 합니다."


번오기가 호탕하게 웃고는 친히 칼을 내주며 그리하라 허락하니 형가가 그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자 태자 단은 물론이요, 그 의기에 감동하여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왕의 목을 벨 새 가지 물건이 모두 갖추어 졌으나 형가는 친구 고점리(高漸離)를 불러 축(筑)을 켜게 하고 매일같이 그에 맞춰 노래만 부를 뿐, 도통 떠날 뜻이 없어보였다. 한편 진왕 정이 의기백배하여 노장(老將) 왕전(王剪)과 용맹하기로 이름난 젊은 장군 몽염(蒙恬), 이신(李信) 등을 앞세워 대군을 이끌고 달려오매 참다 못한 태자 단이 형가를 일깨웠다.


"진군이 벌써 역수 앞에 치달아 지금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위여누란(危如累卵)이올시다. 형경께서는 어찌 출발하지 아니하려 하십니까?"


"태자께서는 어찌 이리 서두르십니까? 이 일에는 오직 한 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 실패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한 번뿐인 기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검에 있어 저와 쌍벽을 이루는 개섭(蓋聂)* 이란 이를 불렀습니다. 그가 오면 곧 출발할 것이니 태자께서는 제발 재촉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커져올 뿐, 형가의 친구 개섭은 도통 올 생각을 아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큰 비에 물이 불어 천하의 검객이라 할지라도 범람하는 강물을 건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개섭이 당도하지 못하자 태자 단은 더욱 몸이 달아 예전에 뽑아두었던 자객 중 진무양을 천거하였다.



"이 자는 일찍이 제가 뽑아두었던 세 자객 중 일인(一人)이온데, 돌아가신 전광 처사께서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 하여 중임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허나 세 자객 중 가장 담력이 세고 용력이 출중하여 열셋 되던 해에 이미 살인을 한 경험도 있습니다. 개섭이 천하대검자(天下大劍者)라 하나 아직 당도하지 않았으니 형경께서는 급한대로 이 진무양을 부사(副士)로 삼아 떠남이 어떠하십니까."  


형가의 눈에는 진무양이 개섭과 비하여 더벅머리 조무라기에 지나지 않아 매우 불쾌하였으나, 언제까지고 자기 고집만을 세울 수 없어 마침내 뜻을 꺾고 출발하였다. 그가 진무양과 함께 역수(易水)를 건널 때 태자 단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조의를 표하였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임을 안 형가가 문득 친구 고점리에게 축을 켜게 하자, 진무양이 비웃기를,


"천하 제일의 검객이라 하더니, 어찌 큰일을 앞두고 계집마냥 감상에 젖으십니까. 진왕의 목을 벨 용기가 없거든 나 홀로 역수를 건너겠소."


형가가 담담히 웃으며 가로되


"노래 한 곡만 부르고 떠나세."


그가 강개한 어조로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니, 그 가사가 다음과 같다.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의 물은 차가워라.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그 곡조와 내용이 어찌나 애달픈지 심지어 진무양마저도 눈물을 쏟는데, 오직 형가만이 홀로 평온하여 두 번 다시 고개조차 돌리지 아니하였다.


형가가 부른 노랫소리가 채 역수 강바닥에 가라앉기도 전에 두 사람은 연으로 진군하는 진왕의 군영에 당도하였다. 형가가 진의 배반자 번오기와 독항의 지도를 가져왔음을 알리니, 진왕 정이 크게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그 것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러나 행여나 암살을 당할까 두려워한 정이 주위에 온통 철갑군을 내세워 둘러싸니, 그 위엄에 질린 진무양이 벌써부터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감히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진왕의 측근 하나가 의아하여 가로되,


"부사라는 자가 풍채에 비해 어찌 저리 심약한가?"


형가가 속으로 진무양을 탓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말하기를,


"연의 촌것이 큰 나라의 왕을 뵈려니 오금이 저려 그런 모양입니다. 바라건대 저 혼자라도 왕을 뵈어 공을 세우게 해주십시오."


진왕이 그 것을 허락하니, 형가가 말없이 독항의 지도 안쪽에 독을 바른 비수를 감추어 들고 걸음을 옮겼다. 설사 살의(殺意)가 없었다 할지라도 천하에 위엄이 쟁쟁한 진왕을 뵙는 길임에도 그의 발걸음은 패기 있고 경쾌하여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번오기의 목을 확인한 진왕이 흡족한 표정을 보이자, 지도를 펼치던 형가가 돌연 그 끝에서 칼을 쑥 빼어 그를 내리쳤다. 그러나 진왕 정 또한 군영(軍營)에서 오래 지낸 이라 재빨리 몸을 피하니 비수는 아깝게 그의 소매만을 베었다.


형가가 비웃으며 가로되,


"가벼이 내린 명령 하나로 천하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서도 네 죽는 것은 두려우냐?"


말을 마친 형가가 자세를 바로 하고 진왕을 찌르려 하였으나 때마침 곁에 있던 시의 하무저(夏無咀)가 급히 약주머니를 던져 형가의 얼굴을 맞혔다. 그 덕에 잠시 틈이 생겼으나 일찍이 진왕 정이 무기를 찬 자는 누구도 옥좌 곁에 가까이 할 수 없노라 엄금한 탓에, 시립한 철갑군들 중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하였다. 제정신을 차린 형가가 날쌔게 비수를 휘두르며 진왕을 공격하고, 진왕은 얼이 빠져 허리에 찬 장검을 뽑을 새도 없이 줄행랑을 놓으니, 옥좌를 사이에 두고 뱅뱅 돌 새에 절그럭절그럭 칼집 소리만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미친 좌우 신하들이 일제히 고하니,


"왕께서는 허리의 검을 뽑으시어 옥체를 보중하소서."


진왕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다 지은 커다란 기둥 뒤에 등을 지고 숨어 형가의 일격을 막아낸 뒤, 그제서야 칼을 뽑아 그의 다리를 내리쳤다. 형가의 왼다리가 잘려 피를 뿜으며 쓰러질 새, 온 힘을 다하여 비수를 던졌으나 안타깝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한숨을 돌린 진왕이 악랄한 성정을 드러내어 형가를 바로 죽이지 아니하고, 아홉 군데나 치명상을 입혀 농락한 후에야 비로소 그를 처형하니 진무양 또한 성난 철갑군들의 발굽에 짓밟혀 한낱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형가와 진무양의 실패를 들은 태자 단은 스스로 목을 베어 사죄하며, 연을 침공치 말 것을 간청하였으나 진왕 정의 분노를 달랠 길은 없었다.


기원전 225년, 연은 멸망하였으며, 형가의 친구 고점리가 스스로 제 솜씨를 알려 잡혀가 눈을 뽑힌 뒤, 거짓으로 진왕의 궁중 악사로 들어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기록됨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끝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들을 또다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리라.




2


이야기는 잊혀졌던 한 명의 검객에게로 돌아간다.


위나라 사람 개섭은 일찍이 천하대검자로 불릴만큼 무예가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형가와 깊은 교분을 가졌다. 다만 고고하고 평온한 성정의 형가와는 달리 개섭은 혈기가 방장하여 고집이 세었다.


유차(楡次)에서 형가와 검을 담론(談論)할 때, 두 사람 사이에 이견(異見)이 생기니, 몇날 며칠 논쟁을 거듭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개섭이 발칵 성을 내며 형가를 노려보았다. 이에 형가가 실망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개섭이 말하기를,


"형가는 천하의 소인배라 더불어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는 나보다 검법이 아래이니, 감히 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섰다가는 당장에 목을 끊으리라."


개섭의 호언에 형가는 굳이 다툴 것이 없다 여겨 밤을 도와 당일로 유차를 떠났다.그의 깊은 속뜻을 짐작치 못한 개섭을 비롯한 많은 이가 형가의 유약함을 비웃었다.      


그러나 형가는 대인이라 큰 일을 앞두고 우정을 괄시하지 않으니, 그 비범함을 높이 사 진왕을 죽이기 전 개섭을 청하였다. 개섭 또한 대인 중의 대인인지라 묵은 감정을 잊고 즉시 밤을 낮삼아 연의 수도 계성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가는 도중 큰 비가 내려 물이 막히니, 갈급한 개섭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닥치는대로 주위의 뱃사공을 위협하였으나 아무도 배를 띄우겠다는 이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형가와 진무양이 실패하고, 연이 멸망하매, 개섭은 강물에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개섭이 곰곰히 생각하기를, 아무리 그가 천하대검자라 하나 형가만한 이도 실패하였으매 홀로 진왕을 죽이기는 어려우리라 짐작하였다. 이에 형가의 또다른 친구인 조나라 사람 노구천(魯句踐)을 불러 함께 진왕을 죽일 일을 의논하고자 했다. 노구천 또한 형가와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할 정도로 큰 인물이었으나,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이 함락되고 나서 그 행색이 거지만도 못하였다.


개섭이 노구천의 손을 붙잡아 그 고난을 위로한 다음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태어난 나라도 다르고 성씨도 나이도 같지 않으나, 협객의 도리를 함께 하였으니 친구의 복수를 함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장형의 도움을 얻어 진왕의 목을 베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노구천이 쓸쓸히 웃으며 대답하기를,


"장형께서 비록 천하의 대검인(大劍人)이라 하나 진군의 위세를 보지 못하여 이르는 말씀인 듯 합니다. 진군은 온 몸에 철갑을 둘러 칼조차 들어가지 않고, 기세는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워버릴 정도로 드높습니다. 실제로 한단에 꽂힌 진군의 화살은 수천만 개에 이르러, 전쟁이 끝난지 몇 해나 되었음에도 아직 화살에 뒤덮인 곳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미 각국(各國)의 천운이 다했음인데 형가나 고점리의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어찌 한두 사람의 힘으로 대세를 거스르겠습니까? 내가 일전에 그들을 돕지 않음도 그와 같으니, 부디 장형도 잘 생각하십시오."


이에 개섭이 낯색이 변하여 노성을 내기를,


"소인배의 혀로 감히 대인을 농락치 말아라. 네가 형가를 돕지 않음은, 지난날 장기 놀음을 하다 다투어 그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요, 고점리를 돕지 않음은 이미 제 나라가 망한 탓에 네 한 몸 돌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냐! 명색이 협객으로서 제 몸보다 천하의 도리를 중시함이 당연하거늘, 제 목숨 살리자고 협의를 저버린 네 놈과 더불어 무엇을 말하겠느냐. 당장 목을 벨 것이로되, 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워 참는다. 썩 물러가라!"


개섭이 침을 뱉으며 두 번 다시 노구천을 쳐다보려 하지 않으니, 노구천이 얼굴 가득 부끄러운 기색을 띠며 목을 감싸쥔 채 줄행랑을 놓았다. 더러운 자와 같은 숨결을 마시기 저어한 개섭이 집을 뛰쳐나와 숲을 거닐며 상념에 빠졌으나 여러 날을 지새워 고뇌해보아도 도통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개섭은 홀로 진왕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명검과 맹독을 구하기 위해 은거한 스승을 찾아갔다.


개섭의 스승은 젊었을 적부터 환란의 전국 시대를 떠돌며 검을 익힌 천하의 고수였으나 늙어 근골이 쇠락한 뒤로, 숲 뒤쪽에 조그마한 움막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한가로운 와중에 자신의 제자가 침중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며 찾아오니, 스승이 짐작하여 묻기를


"형가와 고점리가 협객의 도를 행하다 목숨을 버렸단 소문을 듣고 찾아올 줄로 짐작하였다. 허나 이미 네게 검의 모든 술(術)과 법(法), 비의(秘意)를 다 전하였거늘, 네가 무엇을 바라고 나를 찾아왔느냐?"


개섭이 스승의 짐작에 놀라 가로되,


"스승님께서 불초 제자의 뜻을 짐작하시니 무엇을 더 숨기오리까. 진왕 정의 목을 벨 명검과 그 피를 태울 맹독을 구해주소서."


스승이 웃으며 개섭을 깨우치기를,


"서부인의 칼벼리는 솜씨는 조의 사람들뿐 아니라 천하가 다 알아주었고, 그 끝에 바른 독약 또한 약간만 스쳐도 절명하기에 충분했느니라. 형가가 준비에 소홀함이 있어 실패함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니. 네가 아무리 명검과 맹독을 준비한들, 하늘의 헤아림대로 행하지 않으면 어찌 성사할 수 있겠느냐?"


개섭이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며 울분을 터뜨려 가로되


"그렇다면 진왕 정이 무도한 야욕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천하를 모두 제 땅으로 삼으려 함이 하늘의 뜻이란 말씀이십니까? 정녕 그러합니까?"


개섭이 형가와 고점리의 죽음을 애도하여 서글피 울자, 그의 눈에서 불줄기 같은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순식간에 사방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가 사흘밤낮을 금식하고 이같이 버티자 마침내 스승이 개섭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가로되,


"내 너의 검을 아껴 이 비방만은 알려주지 않으려 했건만, 소용이 없구나!"


개섭이 황급히 얼굴을 문지르며 묻기를,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저에게 전수해주지 않으신 비방이 남아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 비방을 깨치는 자는 능히 원하는 자의 목숨을 취할 수 있으나 제 심맥(心脈)을 상하게 하여 잔명(殘命)을 보전키 어렵고, 또한 검자(劍者)의 명예를 더럽히기에 일러주지 않았느니라. 네가 만약 진정 두 협객의 죽음을 가리고자 네 명예와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수 있다면, 이 비방을 전하여 주마."


이에 개섭이 즉시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꽃잎 같이 흐르는 피에 맹세하니, 스승이 탄식하며 비방을 일러주었다.


"광견(狂犬)은 인의(仁義)와 예(禮)를 다하여 대해도 소용이 없고, 그저 물에 빠뜨려 죽임이 상책이라 할 것이다. 형가와 고점리 역시 각자 대의(大意)와 협의(俠義)로써 진왕을 참(斬)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까닭은, 이미 진왕이 사람이 지녀야할 인의와 예를 벗어던진, 인두겁만 쓴 짐승이기 때문이니라. 악인 중의 대악인(大惡人)에게 어찌 큰 뜻이 통하겠느냐? 하여, 너 역시 진왕의 악에게 지지 않을, 크나큰 독랄함을 가슴에 품는 방법밖에 없느니라."


개섭이 아연하여 가로되,


"저더러 악인이 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자고로 세상에 크고 작은 악이 있지만, 사람이 가장 큰 악을 잉태하나니 그 악에서부터 무엇에도 비길 바가 없는 독이 나오니라. 천하만독(天下萬毒) 중에서 가장 독한 것은 바로 사람이 품은 이 심중독(心中毒)이라. 그 손끝에만 스쳐도 백독봉침(白毒封侵)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이른 자라 할지라도 피를 한 말이나 토하며 죽는다. 네가 진왕에 버금가는 악행을 하여 그 독을 온 몸에 처바른 독인(毒人)이 된다면, 능히 진왕을 상대할만 하리라."


개섭이 주저하며 말하기를


"하오나 스승님, 제 부모마저 참살한 진왕보다 더 큰 죄를, 어찌 제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비방은 없사오니까?"


스승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가로되


"그래서 내가 네게 미리 일러주지 아니하였더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검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끔찍한 비방이라고. 게다가 너는 타고난 성정이 불 같고 참을 줄을 몰라 이 비방을 수련하면 필시 위험한 지경에 빠질 것이다. 허나 네 스스로 손바닥을 베어 맹세한 일이요, 또한 형가와 고점리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니, 오직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말을 마친 스승은 천하에 다시 못할 말을 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개섭이 멍하니 서 있다가 주춤주춤 칼을 집어들고 숲 바깥으로 나왔으나 진왕보다 더 큰 죄를 어찌 지어야 할지 그 앞이 막막하고 캄캄할 따름이었다. 정처없이 떠돌던 와중에 어느덧, 고향 근처의 마을까지 다다랐음이니, 당대의 대검객을 만난 젊은이들과 아낙이 기뻐하며 서로 자신의 집에 머물러 가기를 청하였다.


그들 손에 이끌려 허청허청 걸어가던 개섭이 문득 마음을 다잡고 칼자루를 사납게 쥐며 생각하기를,


'어차피 이들도 진군이 쳐들어오면 모두 죽거나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아니하냐. 그러느니 차라리 진왕을 죽일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치는 편이 옳으리라.'


생각을 마친 개섭이 돌연 검을 뽑아드니 사람들이 그가 솜씨를 보이는 줄로 알고 좋아하다가, 그가 야차(夜叉) 같은 얼굴로 자신들에게 달려들자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검법 중에 가장 중히 여김이 보법(步法)인지라 감히 그의 달음박질 앞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개섭의 칼이 번뜩일 때마다 죄없는 이들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그의 온몸을 적시니 마침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마을의 생명 모두가 참살당한 뒤에야 비로소 개섭이 정신을 차리었다.


개섭이 검을 든 뒤로 숱한 적수들과 솜씨를 겨루어 왔지만, 이토록 끔찍한 참상은 처음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칼을 버리고 벌벌 떨며 핏물에 몸을 던진 채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기를, 진왕은 입술 한 번 움직여 이보다 수천, 수만 배의 사람을 이미 죽였거늘, 어찌 이 정도에 굴복하랴 싶어 허위허위 검을 잡고 다시 일어났다.


이로써 개섭이 스승의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족족 살아 있는 것들을 모조리 베니, 그의 몸과 칼날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고 온 몸에선 혈취(血臭)가 진동하여 그야말로 살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귀신이 되었다. 마침내 개섭이 붉게 물든 몸을 이끌고 스승이 있는 숲 앞에 들어서니, 그 살기(殺氣)에 눌린 산천초목이 제풀에 시들고 말라 그 주위가 황량해졌다.


홀연이 나타난 스승이 그 모습을 보고 탄식하되


"내가 그 비방을 일려줌이 아니었다. 네 온 몸에 이미 독이 배어 한 떨기 꽃조차 살아 있음을 용납치 않는구나. 그토록 악랄한 독을 몸 속에 품고 있으니, 어찌 네가 무사하랴. 지금은 진왕을 베겠다는 생각에 버티고 있으나 그의 목을 베는 순간에 아마 너도 절명하리라. 부디 내생에서는 고고한 검인이 되어 천하를 횡행(橫行)하거라."


말을 마친 스승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어 자신의 목을 찌르니, 비록 천하를 위한 일이라 하나 검의 명예를 더럽히고, 무고한 이들을 죽인 개섭의 죄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개섭이 스승의 죽음을 실감치 못하고 있다가 그 늙은 몸이 털썩 떨어지니, 비로소 사방으로 피를 튀겨가며 달려가 그 시신을 안고 오열하였다. 또다시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으나, 이미 숱한 생명들의 피를 뒤집어쓴터라 누구도 그의 우는 행색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스승의 시신을 정히 씻어 양지바른 곳에 묻고 난 개섭이 피묻은 칼을 찬 채 악귀 같은 모습으로 길을 떠날 찰나, 갑자기 수백의 군사가 나타나 그 주위를 에워쌌다. 그가 가만히 살피니 철갑을 두르고 병장기를 쥔 위세가 진의 군사요, 그 수만 해도 끝도 없이 늘어져 개섭의 앞길을 촘촘히 막고 있었다.


비록 진군이 수적으로 우세하나 형가와 쌍벽을 이루었다는 대검객이요, 더군다나 온 몸에 피칠갑을 한 모습이 자못 흉악한지라 선뜻 개섭을 베리라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때 용맹해보이는 젊은 장군 하나가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위엄 있게 호령하기를,


"나는 진의 장군 이신이다. 네가 바로 형씨 성을 가진 자객의 붕우(朋友) 개섭이렷다?"


개섭이 차갑게 웃으며 가로되


"죄 없는 이들을 참살함을 묻고자 이토록 많은 군사를 모았는가? 허나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 왕이란 작자가 더한 살인귀임은 어찌 모르는가?"


"네 놈의 혀놀림을 보아하니, 과연 그 성격이 흉악하기 이를 데 없도다. 네 놈이 죄없는 백성들을 죽였다 함은 내 알 바 아니로되, 조만간 진왕 폐하를 암살하리라는 밀고가 있었느니라. 순순히 칼을 버리고 오라를 받으라!"


개섭이 가만히 헤아려보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진왕을 죽이리라는 뜻은 오직 두 사람에게만 일렀으되, 스승은 방금 내가 묻었으니 노구천의 짓이 아니랴! 형가와 고점리의 원혼이 있다면 결코 그를 용서치 아니할 것이나, 내가 살아 있으니 먼저 그 죄를 물으리라."


개섭의 검술이 출중하다 하나 한, 조, 위를 잇따라 멸망시킨 강병(强兵) 수천을 어찌 당해내랴 비웃으며 이신이 손을 휘두르니 진의 군사들이 기세가 올라 즉시 개섭을 향해 파도처럼 짓쳐들어갔다. 그러나 개섭이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늘을 날아다니며 투구와 갑주 틈새를 교묘히 찔러 순식간에 적병 수십 명을 쓰러뜨리니 그 비범함에 놀란 진군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였다.


산처럼 쌓인 병사들의 시체 위에서 개섭이 장군 이신을 내려다보며 가로되,


"황구(黃狗) 무리가 아무리 모인다 한들, 어찌 범 한 마리를 당해내랴. 너희들이 한과 조, 위를 무너뜨려 자랑삼는다만, 그 자리에 나나 형가, 고점리만한 이가 열 명씩만 있었던들, 오히려 진왕의 목이 떨어졌을 터이다."


이신의 얼굴이 벌개지며 당장이라도 그를 요절낼 듯 분기탱천하였으나 제 솜씨가 개섭보다 떨어짐을 알기에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그런 이신을 조롱하며 개섭이 말을 잇기를,


"너희들이 삼국을 멸한 것처럼, 나 하나를 막기 위해 몇십만을 동원하면 능히 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나, 나 역시 적어도 만 명은 황천에 보낼 것이요, 나 하나를 막고저 대군을 움직인다면 그 또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니랴. 바라건대 젊은 장군은 함양(咸陽)에 서신을 보내어 내 앞길을 막지 말라. 내 정정당당히 함양으로 입성(入城)하여 진왕과 비무(比武)할 것이로되 만일 누구든 이 일을 방해한다면 죽어서도 그 목을 베리라."


이신이 비록 용맹하나 아직 젊어 사려가 깊지 못하매, 노장 왕전에게 서신을 띄워 이 같은 사실을 전하였다. 왕전 장군이 곰곰히 생각한 끝에 친히 휘하의 육십만 병사를 이끌고 함양까지의 길을 모조리 에워싸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개섭을 오직 그 병사들 사이로만 지나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장대한 대륙에 볼만한 구경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수십 만에 이르는 철갑군이 육중한 병기를 들고 에워싼 길에 온 몸에 피칠갑을 한 검객 홀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비록 철갑군들이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치 아니하여 아주 먼 발치에서만 개섭을 볼 따름이었으나, 망국(亡國)의 설움을 지닌 많은 이들이 그를 동정하고 격려하였다. 후에 장사 창해공(滄海公)을 고용하여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왕의 가마를 날린 장자방(張子房)도 그 중 하나였으나 아직은 나이가 어렸고, 아무도 그에게 물이나 먹을 것을 주지 못하게 하였기에 개섭은 쇠약해진 몸을 억지로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개섭은 길고 긴 함양으로의 여행을, 친구의 원혼을 기리고 천하를 도탄에서 구할 긴 여행을 시작하였다. 개섭의 행보는 잠시 그 스스로에게 맡겨두고, 잠시 다른 자로부터 또 이야기를 이어보도록 하자.




3


진나라가 아직 통일의 뜻을 밝히기 이전, 환란의 전국 시대를 사는 소년 중 기창(紀昌)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뭇 청년들이 검이나 창, 권각(拳脚)을 연마할 때, 드물게 궁시(弓矢)에 관심을 가졌다. 기창이 장성하자 백 보 밖에서 버드나무 잎을 맞힌다는 비위(飛衛)를 찾아가 다섯 해가 넘는 각고의 수련 끝에 마침내 뛰어난 궁인(弓人)이 되었다.    


사람들이 기창에게 그 솜씨를 보여주기를 청하니, 백 보 밖에 동전을 매달아 그 구멍을 맞히는가 하면, 팔 위에 술잔을 올려놓고 쏟아지지 아니하고, 닭털을 화살 삼아 아내의 속눈썹 세 가닥을 끊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 통의 화살을 전부 쏘아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하기도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를 예* 의 현신(現身)이라 칭하였다. 이 같은 치켜세움에 본디부터 성정이 교만하였던 기창은 스승 비위를 없애고 자신이 유일의 천하대궁인(天下大弓人)이 되고자 마음 먹었다.


어느 날 스승 비위가 들판에서 새를 보고 있자 기창이 흉측한 마음을 품고 그 등 뒤에서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비위 또한 활의 명인인지라 즉각 몸을 돌려 활을 마주 쏘아 기창의 화살을 부러뜨렸다. 스승과 제자가 너른 들판을 뛰어다니며 서로의 급소에 화살을 연이어 날렸으나, 둘 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인지라 서로의 화살만 부러뜨릴 뿐 해를 입거나 끼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스승을 죽일 생각이었던 기창이 화살 한 개를 더 숨기고 있었으매, 마침내 비위의 화살이 다 떨어진 찰나 기창의 마지막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틀림없이 스승이 죽을 거라 생각한 기창이 앙천대소(仰天大笑)하였으나, 비위가 입으로 화살촉을 물어 내팽개치니, 그 담대함에 놀란 기창이 활을 내던지고 스승에게 용서를 빌었다.  


비위가 그를 용서하고,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게끔 후인(後人)에게 궁술을 전수하지 않기로 맹약하였다. 그 후, 비위가 기창에게 이르기를,


"네가 일찍부터 나보다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함을 알고 있었다. 네가 진정 대궁인이 되고자 한다면 곽산* 정상에 기거하는 감승(甘蠅) 노인을 찾아가거라. 그 분은 내 스승으로, 술(術)이 아닌 궁도(弓道)를 추구코저 세상과 연을 끊으셨으니, 그 가르침을 받으면 비범한 경지에 오르리라."


이에 기창이 신발과 옷을 마련하여 태행산(太行山)을 지나 곽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워낙 험준하여, 신발과 옷이 모조리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감승을 찾을 수 있었다.


기창이 감승을 찾아 예를 올릴 때, 가만히 그 모색을 살피니 천하대궁인은커녕, 그저 보잘 것 없는 추한 늙은이에 불과한지라 그를 얕잡아보며 활을 쏘아 새 몇 마리를 떨구었다. 기창이 의기양양하여 제 솜씨를 자랑하자 감승이 웃으며 말하기를,


"솜씨가 나쁘지는 않으나 아직 활에 매여 있음이라. 화살의 자국이 남아 있는 재주를 어찌 궁도라 이르랴. 진정한 궁도란 활을 쓰지 않고 이르는 법."


기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기를,


"궁시 없이 궁도를 논하려 하시다니, 붓 없이 서도(書道)를 하려 하심이니까?"


감승이 말없이 웃으며 기창을 끌고 험준한 낭떠러지로 향하니, 절벽 앞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바윗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감승이 그 위에 올라앉아 기창더러 함께 오르자 청하니, 비록 겁이 났으나 저만한 늙은이가 하는 일을 어찌 못하랴 하는 심정으로 발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오르자 바위가 위태롭게 끄덕거리며, 금방이라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듯 하였다. 겁이 난 기창이 활을 던지며 바위를 부여잡고 엎드리자 감승이 그를 조롱하였다.


"방금 전 그 기세는 어디 가고 이리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가? 어디, 여기서 자네 솜씨를 자랑해봄직한가?"


기창이 겁에 질려 가로되,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활을 쓸 수 없습니다."


감승이 혀를 차며 하늘을 고고히 바라보다 문득 손가락을 가볍게 드니, 그 손가락으로 가리킨 새들이 화살에 맞은 듯 후르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모습에 놀란 기창이 위태로움도 잊고 감승에게 스승의 예를 다하니, 10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궁도의 정수를 깨달아 하산할 수 있었다.


기창이 궁도의 명인이 되었음을 깨닫고, 비위가 그의 신발을 친히 신겨주려 하였으나 기창의 오만한 성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다만 말없이 비위를 정성껏 섬길 따름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궁도를 보고자 청하였으나, 기창은 지극한 언변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 이루고, 지극한 궁도는 활을 쏘지 않음으로 이룬다 하여 거절하였다.


기창은 하산한 뒤로 한 번도 활에 손대지 않은 채 40여년간 편안히 살다 죽었으나, 그의 집 처마에는 언제나 활을 당기고 있는 듯한 기운이 서려 있어 새들이 감히 그 위를 날지 못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그 끝이 조금 더 남았음을 세인(世人)들은 모르고 있으리라.


어느날 기창의 집에 풍채가 그럴듯한 노인 하나가 평복(平服)을 입고 찾아오니 아무도 그 노인을 눈여겨 보지 아니하였으나, 기창만큼은 그 노인을 알아보았다. 기창이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어 묻기를


"명성이 날로 높아져가는 노장군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오심이니까."


노인이 놀라서 가로되


"기 공께서 나를 아십니까?"


"진의 육십만 철갑군을 이끌고 천하를 횡행하는 대영웅 왕전 공이심을 내 이미 알거니와, 이미 멸망한 세 나라에서 나를 장수로 삼고저 여러 번 청하였으나 내 움직이지 않았으니, 행여나 이루지 못할 듯을 품고 오셨거든 그저 돌아가실 일입니다."


왕전이 기창의 비범한 눈에 놀라며 말하기를,


"내 기 공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빌러 오긴 하였으나, 그대를 장수를 삼고자 함이 아닙니다. 본국에 이민 이신, 몽염 등의 용맹한 무장이 늘어서 있고, 이사(李斯)와 같은 총명한 승상이 있으며, 또한 태산과도 같은 위엄과 깊은 헤아림을 지닌 진왕 폐하께서 계시니, 한자연(閑自然)하는 군자를 괴롭힐 까닭이 무에 있겠습니까."


기창이 의아하여 되묻기를,


"저를 장수로 쓸 뜻이 없고자 하시면, 제 비천한 활솜씨를 무엇에 쓰려 하심입니까."


"형가와 고점리라는 인물이 진왕 폐하의 옥체를 위협하였으되, 이제 세 번째 자객이 천하 대의(天下 大義)를 외치며 함양으로의 길을 서두르고 있음입니다. 형가와 생전에 친했던 개섭이란 이가 폐하와의 비무를 청하고자 백주(白晝)에 함양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검법이 워낙 출중하여 한두 무리의 병사로 막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조의 한단을 분탕질한 화살비를 퍼부을까도 생각하였으나, 뭇 제후들이 한낱 자객에게 지나친 처사임을 비웃을까 두려워 그러지도 못함이니, 해서 천하 명인의 실력을 지닌 기 공에게 이 일을 부탁하려 왔습니다. 부디 멀리서 개섭을 저격하여 그를 없애주기를 청합니다."


"형가와 개섭의 이름은 귀에 익습니다만, 고점리라는 이는 누구입니까? 진왕의 목을 위협할 정도로 출중한 무인(武人)이라면 저도 알 법합니다만."


왕전이 쓰게 웃으며 가로되,


"고점리는 무인이 아니라, 축이라는 악기를 잘 다루는 명인이올시다. 형가가 죽자 시전에서 몸을 숨기고 살던 그가 어느날 홀연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 솜씨를 자랑하니, 어찌 이목을 끌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진왕께서 체포령을 내리시어 그를 잡아다 놓으셨으나 그 비범함이 아까워 두 눈을 뽑아 죄를 대신하고 궁중 악사로 가까이 두셨음이니. 허나 이 자 역시 형가의 원수를 갚고저 일부러 궁에 들어오기를 자청한 것이라, 대연회 때 가장 진왕께 가까이 갈 기회가 주어지자 미리 축 안에 납을 부어 사람의 두개골도 능히 깨도록 수작한 뒤, 폐하의 옥음(玉音)이 들리는 곳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하더이다."


기창이 감탄하며 가로되,


"헌데 진왕이 죽지 아니하였단 말입니까?"


"눈이 보이지 않은 탓에 겨냥이 정확치 못함이니. 폐하의 머리 조금 위로 큰 징이 있엇는데, 거기에 옥음이 부딪혀 진동을 한 탓에 징 하나만 요절났을 뿐, 옥체는 무사하였소이다."


"아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기창이 탄식하매, 왕전은 기창이 진왕의 죽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듯 하여 기분이 좋지 아니하였다. 기창이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개섭을 쏘겠습니다."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겝니까?"


"그렇습니다. 허나 진왕의 목숨을 살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개섭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함양행을 결의하기 전, 대여섯 마을의 사람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몰살하였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비록 그가 지금 대의를 행하고 있다 하나, 죄값을 치러야 마땅함이니, 제가 그 죄를 묻겠습니다."


왕전이 제 청을 들어준다는 말에 반색하며 가로되,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리이까."


"형가와 마찬가지로 저도 세 가지 물건이 필요합니다. 첫째가 연에서 나는, 짐승의 뿔을 부려만든 각궁(角弓)이요, 둘째가 쑥대를 단단히 엮어만든 삭북(朔北)의 화살이요, 마지막은......."


기창이 돌연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지, 왕전이 애가 타 그를 재우쳤다.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의 일을 보아 알기를, 묘수는 인간이 만들지만 성사는 하늘의 뜻이라. 명수가 천리(天理)에 있지 않고서야 어찌 형가와 고점리만한 이가 실패하였겠습니까? 듣기로 진왕은 잔혹하고 자비를 모르는 이라, 바라건대 내가 개섭을 막는 일에 실패한다 하여 죄를 묻지 말아주시기를 청합니다."


왕전이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를 승락하자, 비로소 기창은 자리를 털고 그를 따라나섰다.


비록 왕전이 몸은 늙었으나 반평생은 군영에서 보낸 영웅이요, 육십만 군사를 제 수족처럼 부려 삼국을 멸한 공로가 있는지라, 건장한 군마(軍馬) 두 마리를 징발하고 필요한 물건을 준비시켜 뒤따르게 하니, 며칠 되지 않아 개섭과 머지 않은 산봉우리에 다다랐다. 그 때 개섭은 온 몸에 품은 독 때문에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나 그를 견디고 함양과 거의 하루 이틀 거리에까지 당도하여 있었다.


왕전이 그야말로 개미처럼 보이는 개섭을 내려다보며 가로되


"여기서 저 곳까지의 거리가 얼추 일천 오백여보쯤 될 것이온데, 과연 궁시로 가능하겠습니까?"


기창이 웃으며 대꾸하기를,


"술(術)에 머무른 자에게는 먼 거리이나, 도(道)의 경지에 이르면 지척(咫尺)입니다."


말을 마친 기창이 온유한 손놀림으로 각궁에 삭북시(朔北矢)를 먹여 세 대를 연달아 쏘았다. 군영에서 평생을 보낸 왕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범한 솜씨였으나, 죽음에 한 발을 들여놓은 개섭은 그야말로 신경이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있던 차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공중제비를 펄떡펄떡 뛰어넘으니, 세 대의 화살은 하릴없이 땅바닥에 꽂혔다. 개섭이 비록 날카로운 촉에 스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온 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는지라 신경쓸 일이 못 되었다.


한편 왕전이 다급하여 기창을 재촉하기를,


"기 공, 저 자가 과연 비범한 검객이라 기 공의 화살을 피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개섭이 저토록 심기(心氣)를 소진함에도 내 화살을 피한 것을 보니, 진왕을 베고자 하는 의기가 대단히 강한 모양입니다. 보잘것없는 화살로는 될 일이 아니오나, 사람의 뜻이 뭉치면 뭉칠수록 속이 단단해져 끝내는 화를 불러일으키고 마는 법이니, 제가 저 자의 심맥(心脈)과 혈맥(血脈)을 건드려 그 화를 좀 더 앞당겨보이겠습니다."


왕전이 이 무슨 의원의 처방 같은 소리인가 의아하여 기창을 쳐다볼 새, 기창이 언젠가 제 스승 감승이 그러하였듯 식지(食指)를 내어 멀리 있는 개섭을 가리켰다. 왕전이 그저 하릴없이 그의 손끝만을 쳐다보고 있자, 돌연 그 끄트머리에서 한 줄기 예기(銳氣)가 뻗치어나갔다.


기창이 침중한 기색으로 중얼거리기를,


"개섭, 친구의 복수를 하고 천하를 구하려는 그대의 의기와 협기는 높으나 방법이 잘못 되었음이니. 그대가 무엇 대문에 인명(人命)을 살상하였는지 알 것도 같으다만, 세상에 어찌 방법이 그뿐이랴. 진왕 정 역시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고자 통일을 한다 외치니, 실상은 두 인간이 서로 같지 아니한가. 진정코 천하를 구하고자 했다면 비록 느리다 한들 순리를 따르는 길을 찾아야 했음이다."


노장군이 대경실색한 사이, 기창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예기는 공중을 갈라 개섭의 심중을 타격하였다. 그러자 체내의 독기(毒氣)가 들끓기 시작하여 돌연 눈 앞이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빠져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주위의 병졸들이 그를 보고 앞다투어 공을 세우려 했으나, 장군 이신이 행여나 계략일까 싶어 즉시 군사들을 물리고 그저 그 정황을 살폈다.


그 때, 등에 장검을 짊어진 웬 삿갓 쓴 사내 하나가 병졸들을 비집고 나타나니, 이신이 그를 경계하였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비록 개섭이 쓰러졌다 하나 본성이 간악한자라 계략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행여 개섭이 정말로 정신을 잃어 저 자가 공을 세운다 해도, 군사들이 이렇게 많으니 차후에 그 목을 빼앗으면 그만이다. 좀 더 두고 지켜보리라.'


그러는 사이, 그 사내가 개섭의 쓰러진 앞에 서서 삿갓을 내동댕이치니 그는 다름아닌 노구천이었다. 노구천이 개섭을 조롱하며 가로되,


"네가 그토록 천하 대의에 목숨을 바쳐 진왕을 베려 하였지만, 지금 네 꼴이 무어냐? 갑자기 광증(狂症)이 나 숱한 인명을 해치는가 했더니, 피투성이 광대 꼴로 헤매다 마침내 쓰러졌구나. 세상은 모름지기 나처럼 현명한 자가 살아가는 곳이니, 내가 네 목을 베어 명예와 광영을 얻는다 해도 욕할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노구천이 말을 마치자마자 개섭이 남은 힘을 쥐어짜 날쌔게 몸을 튕기며 벼락같이 칼을 휘둘렀다. 노구천 역시 한때 형가와 교분을 맺을 정도로 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나, 불의의 기습인지라 그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가슴팍에 피를 뿜으며 뒤로 물러서는 노구천을 뒤쫓아 개섭이 세 번, 네 번 독하게 마음먹고 후려찍으니 그의 시체 또한 진무양이나 형가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노구천을 베어 작은 원수를 갚았으나 최후의 힘까지 다 짜내어 쓴 탓에 개섭에게는 더 이상 기력이 남아 있지 아니하였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내어던지고 그 자리에서 혼절하니, 비로소 이신이 군사들을 휘몰아 그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으려 하였다.


그러나 어디선가 천지를 갈(喝)하는 일성(一聲)이 들려오니, 저 머리서 노장군 왕저니 질풍같이 말을 달리며 군사들을 제지하였다.


"비키거라, 썩 물러나렷다! 왕께서, 폐하께서 행차하심이니라!"


갑작스러운 장군의 등장도 그러하거니와, 진왕이 친히 여기까지 행차하였다는 사실에 놀란 장군 이신이 즉시 군사를 물려 길을 텄다. 과연 왕전의 나부끼는 수염 뒤로, 진왕이 탄 어가(御駕)가 사방에 빛을 뿌리며 나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군사들이 그 앞에 부복하며 만세를 외치니, 가히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가에서 진왕 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었다.


"이 근방에 의원이 없는가?"


이 근처 태생인 병사 하나가 황공해하며 이르기를


"화(華/火)* 씨 성을 가진 젊은이 하나가 제법 명의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를 데려와 개섭을 진맥케 하라."


왕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진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곧 화씨 성을 가진 의원이 불려나왔다. 이제 막 혼례를 치렀을 법한 젊은 의원임에도, 왕 앞에서 환자를 진맥하는 손길이 제법 영준하여 깊은 의술을 지녔음을 알게 하였다.


한참 동안 개섭을 진맥하던 젊은 의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가로되,


"폐하, 잠시 숨을 돌릴 수는 있겠사오나 기껏해야 두어 식경 정도이옵니다. 오래전부터 화병(火病)과 독기로 몸을 많이 해쳤사옵고, 어찌된 일인지 심맥과 혈맥이 못쓰게 되어 살아나기 어려운 지경이옵니다."


"잠시면 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깨어나게 하라. 못 하면 네 손과 혀를 자를 것이다."


화 의원이 혼비백산하여 급히 침을 꺼내어 개섭의 피투성이 몸 이곳저곳을 찔렀다. 그러자 잠시 후, 개섭이 땅바닥에 푸르죽죽한 피를 한 말이나 토하며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화려한 어가가 제 눈 앞에 서 있자 반색하며 칼을 집어들었다.


"네 이 놈, 정! 네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 왔음이로다! 어서 가마에서 내려 내 일검(一劍)을 받으라!"


화 의원이 혹시나 그가 다시 쓰러질 것을 저어하며 개섭을 말렸으나 들을 리가 만무하였다. 개섭이 젊은 의원을 뿌리치고 검무(劍舞)를 추며 진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자 어가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가로되,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자 직접 이 곳까지 걸음하였음이라. 그 동안 숱한 자객들이 나를 죽이고자 비밀리에 숨어들어왔으나, 네 놈처럼 큰소리 떵떵 치며 오는 자는 없었으니. 네 담대함에 대한 왕은(王恩)을 감사케 여길 지어다."


개섭이 더욱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며 외치되,


"누가 네 놈의 왕은을 받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하였는가. 그저 네 놈의 목을 베어 두 의인(義人)의 영전에 바칠 따름이다. 어서 나오라, 사람 백정아!"


이에 진왕이 손수 어가의 발을 치우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나오매, 일국의 군주다운 풍채에 콧날은 오똑하고, 귀는 늘어져 복이 있어 보였으나 눈이 새매처럼 양옆으로 찢어져 한없이 잔혹한 기색이 어렸으니, 과연 진왕 정이라 칭할 만 하였다.


노장군 왕전이 진왕으로 하여금 갑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청하였으나 정은 거절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숨어드는 쥐나 찍찍대는 쥐나 쥐새끼임은 한 가지인데 번거로이 갑옷을 챙길 게 뭐 있는가? 기왕 나온 길에 이 자의 목을 치고 연회를 벌이리라. 그대들은 어서 연회 준비를 하라."


"그 연회는 네 놈의 제삿상이 되리라!"


진왕의 기세에 잠시 눌린 개섭이 폭발하듯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두르니 진왕이 자세를 바로 하고 그 것을 막아내었다. 비록 진왕이 제 한 몸 가릴만한 무예는 능히 익혔으나 천하대검자 개섭이 비하면 대단치 않아 그 기세가 위태하니, 다만 개섭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간신히 그 목숨만 보전할 따름이었다.


그 때 개섭이 돌연 힘을 끌어모아 일갈(一喝)하며 칼을 들어 진왕의 머리를 온 힘을 다해 내리치니, 정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개섭의 일격에 제 검을 마주대었다. 모든 이들이 진왕이 위태하리라 생각하였으나 놀랍게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개섭의 칼이 부러져나갔다.


부러진 칼을 쥐고 망연히 서 있는 개섭을 비웃으며 진왕이 비로소 검을 힘차게 휘두르니, 본디 그 목을 벨 심산이었으나 개섭이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여 그 배를 긋고 지나갔다.


배에서 시퍼런 피를 흘리며 개섭이 쓰러지자 진왕이 그를 조롱하며 말하기를,


"의인의 피는 범인(凡人)과 달라 그 색이 푸르더냐? 형가와 고점리의 시체도 찾아다 확인해봄직하다."


개섭이 통분하여 외치기를,


"심중독(心中毒)은 있었으나 명검이 없었음이니, 만약 칼만 부러지지 아니하였던들 네가 어찌 살아 있을까 보냐!"


진왕이 웃으며 가로되,


"네 비록 천하의 출중한 검객이라 하나, 그 것은 서인(庶人)의 용렬(庸劣)한 검이니, 천하 대륙을 통일할 숙명을 짊어진 짐의 검과 어찌 그 무게가 같으랴. 형가의 비수도, 고점리의 축도, 그 숙명의 무게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음이니, 개섭아, 개섭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 네 칼이 진정 운이 다하여 부러졌으리라 생각하느냐? 내 칼은 천하를 통일하고 다스릴 검이니, 그 무겁고 단단함이 천하의 으뜸이로다. 그 것을 헤아리지 못함이 너의 패인(敗因)이니라."


말을 마친 진왕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앙천대소하니, 개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꺼져가는 숨을 다잡았다.


"패자(敗者)는 함구무언(緘口無言)이나, 또한 소인배는 자고자대(自高自大)하나니. 네가 뛰어나 목숨을 보전함이 아니라, 내 지은 죄를 하늘이 두고 보지 못함일 뿐이다. 너를 베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수십수백이나 베었으니, 너와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랴. 내가 죽기가 임박해서야 비로소 그 억울함을 알겠구나. 들어라, 정, 이 놈아! 네가 그토록 양양하여 내 앞에 서 있으나, 너 역시 헤아리지 못한 게 있으니, 언제고 네 뜻을 이루고자 흘린 핏값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천하통일의 패자(覇者)가 되거든, 네 죄를 알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그 업보를 줄이도록 하여라!"


개섭이 마지막으로 눈을 부릅뜨며 칠규(七竅)에서 피를 뿜으며 절명하니, 시퍼런 핏구덩이 위에 졸아든 시체가 몹시나 을씨년스럽고 역겨워보였다. 진왕이 칼을 내팽개치며 시체를 치우고 연회를 벌이라 명하자, 모든 군사들이 부복하며 그 명을 따르느라 분주하였다.





개섭을 죽인 후, 진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후, 대륙의 남은 나라를 공격하여 모두 멸하였다. 마침내 시황제 24년, 다시 말해 기원전 223년, 진이 천하를 통일하여 엄격한 법령을 반포하고,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며 운하와 만리장성을 축조하여 그 위세를 만방에 떨치니, 역사가들 중 그 위업을 칭송치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 진시황도 늙어 헤아림이 얕아지자 불사(不死)의 약을 구하고자 국고를 탕진하고, 통치에 방해된다 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란(大亂)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한 대륙 전역에 별궁(別宮)을 세워 처녀들을 징발하여 흥청망청 즐기니, 의식 있는 자들 치고 또한 그를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진시황(秦始皇)이 말년에 기력이 없어 삶에 의욕을 잃자, 승상 이사가 영토 순방을 떠남으로 하여금, 천하통일의 위업을 되새기며 건강을 되찾음이 어떠한가 간(諫)하였다. 진시황이 이에 응하여 숱한 군사를 거느리고 애첩들과 함께 천하를 횡행하며 영토를 순방하니, 그가 머무르는 지역마다 특산품과 처녀를 뽑아 황제를 대접하매 민심이 몹시 흉흉하였다. 이에 진시황의 총희(寵姬)이자 그에게 한을 품고 있던 상아(嫦娥)라는 여인이 아비 화룡(華龍/火龍) 노인에게 독약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애첩이 주는 약이라 의심없이 받아먹은 진시황은 마침내 기원전 210년, 시황제 37년을 끝으로 명을 다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어렴풋이 눈치챘듯이, 상아라는 이름의 궁녀(宮女)가 실상은 화씨 성을 가진 젊은 의원의 소생이며, 그가 지어준 독약 비방에 그 옛날 협객 개섭의 피가 섞여 있어, 그 한을 풀었음을 아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자고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어, 이 이야기가 정사(正史)에 정해지지 않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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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섭* - 정사(正史)에서는 감섭, 갑섭, 개섭 등 이름이 다양하나 현재 그의 성씨 '개' 를 '덮을 개' 로 읽으므로, 개섭으로 통일하였다. 또한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형가가 부른 이가 노구천으로 나오나 본디 사기 자객열전에는 [형가가 일을 앞두고 친우(親友)를 불렀다] 라고만 나와있다 하니, 아마 후세 사람들이 그 친우의 역할에 노구천이나 개섭을 넣었으리라 짐작한다.



예 * -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 시절의 명궁으로 후예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자 코드가 없어 한자를 써넣지 못하였다. 가뭄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위하여 천제(天帝)의 아들들인 태양 열 명 중 아홉을 쏘아죽여 그를 구원하였으나, 졸지에 아들을 아홉이나 잃은 천제가 그를 신(神)에서 인간으로 격하시켰다는 설화가 있다. 이에 예가 서왕모(徐王母)에게 불사약 두 알을 받아 아내 상아와 함께 죽지 않는 몸이 되고자 하였으나, 일전에 남편 예가 하백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것에 앙심을 품은 상아가 두 알을 모두 먹고 승천하여 달로 도망쳤다. 지금 달에 두꺼비 모양의 그림자가 남아 있음은, 천제가 남편을 배반한 상아를 두꺼비 모양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화룡 노인* - 참고한 기록마다 華씨인지 火씨인지 분분하여 결론을 지을 길이 없었다. 양해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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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열전 중에 좋아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형가입니다. 최고죠, 최고~


홍경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형가 이야기를 각색해보고자 하여 이렇게 꾸며보게 되었습니다. 문체도 바꾸고 구성에도 신경써보았는데 괜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소설 습작이 되지 않는가 싶군요.


많은 혹평 부탁드립니다.  



보탬. 청아출판사에서 나온 김희영 저 [이야기 중국사]. 두산동아에서 나온 [고우영 만화 십팔사략]. 일송미디어에서 나온 이진우 편저 [이야기 사기 영웅전], 대현출판사의 채지충 편저 중국 고전 55권 전질 중 [장자], 웅진닷컴에서 나온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보탬 2. 원전은 안 읽고, 축약본이나 만화로 된 것만 봤군요. 부끄러워라. ㅋㅋ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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