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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리병 속의 정체

2005.12.14 17:1912.14

사방이 잠이 든 고요한 시간, 먹이를 찾아 하루의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집쥐 한 마리가 바스락 거리며 몰래 방안을 오가는 것 같은 소리가 어둠으로 물이든 공간 속에서 들려온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부석거림.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잠시의 침묵을 만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고갯짓 소리가 들린다. 다시 또 바스락. 그리고 두리번거리는 소리.
다행히 그것을 더듬고 있는 것은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나의 호기심이다. 잠이 든 척 그대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낸다. 혹여나 눈을 뜨는 기척에 그것이 숨어버릴까 자꾸만 떠지려는 눈꺼풀을 힘주어 내리감았다. 붓으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것 같은 호기심이 온몸에 퍼져 있는 핏줄을 타고 나가 나의 온전한 정신마저 갉아먹어가기 직전에야 마침내 나의 청각과 감각이 잡아낸 기회는 오른손 옆을 지나는 그것을 화악 낚아채었다.

하아하아
나는 가프지도 않은 숨을 몰아쉬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에 맛보는, 온몸을 흐르는 짜릿한 긴장감과 함께 오른손 안에서 꿈틀거리며 발버둥 처대는 존재의 느낌이 뭉클하게 느껴져 온다. 손안의 그것을 잘 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의 뇌는 다섯 평 남짓한 방안의 구조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한다. 내가 누워있는 일인용 침대와 먼저 살 던 사람이 두고 간 낡은 윌넛색 나무 옷장 하나와 그 옆에 학창시절부터 써오던 조금 낮은 책상, 그리고 아무렇게나 쌓아둔 박스들, 오래된 백열등을 대신하기 위해 가져온 스텐드와 고교 졸업식 때에 누군가에게 받은 탁상시계 하나와 구식 tv가 이 방의 전부다.

침대에서 일어서 스텐드의 불을 키고 우선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분명 그 속엔 예전에 종이학을 모으던 유리병이 하나 있을 것이다. 25살, 늦은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에게 선물하려고 하나하나 정성껏 접어나가던 것들. 섣부른 고백에 대한 대가로 전해지지도 못한 체 그대로 낡은 박스의 한 공간을 차지하며 3년이란 세월동안 잊고 지냈던 것이 손안의 그것을 가두고 관찰하기 위한 적당한 도구로 떠올라서다. 다행히 인형 뽑기 기계에서 뽑아온 made in china의 인형들이 든 두 번째 박스 안에서 유리병을 찾아내었다. 쓰레기통에 종이학들을 쏟아 붓고 한 번 심호흡을 해본다.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코르크 뚜껑을 닫는 손이 조금만 늦어도 그것은 달아나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좀 더 안전하게 입구를 막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사방을 둘러본다. 자기 전 보던 잡지와 반납일이 넉 달은 지난 만화책들. 책꽂이 가득 꽂혀있는 왜 샀는지 모를 문학서와 참고서들. 어느 것도 나를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다 나의 시선은 쌓아둔 책 더미 위에서 뜯어보지도 않고 올려둔 포장한 물건에 멎었다. 얼마 전, 마트 직원이 놓고 간 비닐봉지 속 물건들에 섞여 있던 것이다. 손의 촉감과 모양으로 cd이겠거니 추측은 해 보았지만 그것에 기록 되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 방엔 그 흔한 컴퓨터나 cdp가 없기 때문에 굳이 뜯어보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다시 돌려주는 것도 생각 안 해 본 것이 아니지만 그것 하나 돌려주자고 10분이나 되는 왕복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았다. 스텐드 불빛을 반사하는 유리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유리병에 넣고 왼손의 cd로 입구를 막는 것을 반복한다.

흐읍! 하아!
깊게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나는 결심을 했다. 조심스럽게 유리병의 입구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도망치기를 포기하지 못했는지 손안에서는 그것이 버둥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따뜻한 온기와 기분 좋은 뭉클거림은 그대로 쥐고 있고 싶은 충동을 주지만 그보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게 한 정체가 무엇인지가 더 궁금하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나는 재빨리 병속에 오른손의 그것을 집어넣고 다시 왼손으로 입구를 틀어막았다. 다행히 그것은 도망가지 못한 체다.

“에헤?”

유리병을 들여다보던 나는 그만 해괴한 감탄사를 뱉어내고 말았다. 혹 잘 못 본 것이 아닐까 아이마냥 두 눈을 비비기도 하고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도 해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좁은 방안의 공간을 서성이다 다시 책상 위 스텐드 불빛에 정체를 들어 낸 그것의 모습을 보며 짧은 외마디 비명을 삼키고 다시 서성여 보기도 했다.

“세상에!”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착각이려니, 설마 꿈이려니 하며 잠시 시간을 두어보았지만 꼬집는 볼 살의 아픔은 이것이 현실임을 여지없이 알게 해준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들. 확인해 본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네아 아 이이이?(네가 한 짓이지?)”

나는 유리병 속의 그것이 잘 볼 수 있게 입을 쩍 벌리고 물었다. 치과에 가는 것이 귀찮아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 내 입속은 양치질을 하지 않아 심한 구릿내와 함께 충치들로 새까맣다. 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고개만 가로 흔들 뿐이다.

“볏짚으로 병사를 만들 수 있어? 그 반대여도 좋고….”

또 한 번의 가로 저어지는 머리.

“그럼 나뭇잎으로 금화를 만들 수 있다거나….”

좀 더 힘을 주어 머리를 흔든다. 이로서 어릴 적 꿈이었던 세계정복은 또다시 먼 꿈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풀뿌리 같은 건?”

밤마다 욱신거려오는 충치와 만성 위장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던지 질문이었지만 그것은 고개를 흔드는 것까지 잊어버리고 나를 째려본다. 아마도 안 된다는 뜻이겠지. 힐끗 처다 본 곳엔 읽다 만 ‘톨스토이 단편선’이 보인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건가?

악마… 이려나.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생명체. 온몸이 온통 까만 털로 덮여있으며 마치 순종 진돗개처럼 두 귀가 쫑긋 서 있다. 파다닥거리며 병 안을 빙글빙글 돌게 할 수 있는 한 쌍의 검은 날개와 길게 흔들거리는 꼬리가 있다.

오! 주여
이럴 때에 한 번 신의 이름을 불러봐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이 악마처럼 생겨먹은 것에 대항할 수 있는 신은 하느님 아니면 예수님일 테니까. 그분들의 가호를 받아 악마의 유혹, 혹은 저주에서 벋어 날 수 만 있다면 잠시나마 신자가 되어보는 것도 나쁠 것 없겠다 싶다.-조금 전까지도 난 무신론자였다.-

병 안의 악마는 유리병을 막은 cd케이스를 밀어 볼 양으로 손을 가져다 대다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몇 번의 시도를 해 보는 듯하지만 번번이 같은 행동만 되풀이 할 뿐이다. -혹 찬송가 cd가 아닐까 추측해 봤다.- 그러다 제풀에 지쳤는지 파닥이던 날개로 방향을 틀어 정면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만화영화에서 보던 악마의 마음을 대변하는 쪽과도 비슷하고 치과에서 보던 홍보용 포스터의 충치악마의 모습과도 유사한,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든 책, ‘톨스토이 단편선’에서 읽었던 바보이반 이야기 속의 악마의 이미지를 직접 보는 듯도 하다는 것이 그것을 본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그래서 그런 쓸데없는 질문까지 하게 된 것이니까.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와 유사한 형태의 그것은 유리병에 양손을 대고는 그의 얼굴마저 가져다 댄다. 동그란 눈동자가 따로따로 데굴데굴 구른다.

팅!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지만 계속 보다가는 속이 뒤틀릴 것 같기에 가볍게 유리병을 튕겨내었다. 마치 옷에 묻은 밥풀 하나를 때어내려 튕겨내듯이 말이다.

-찌이이이익!
“에에?”

나는 또 적당한 어휘를 찾을 새도 없이 멋대로 튀어나온 감탄사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악마가 지르는 비명에 더 신경을 썼다. 귀를 틀어막고 괴로운 듯 유리병 속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이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또 손가락을 튕길 듯 액션을 취해 보이자 그는 기겁한 듯 다시 얌전히 유리병 바닥에 내려앉았다.

“악마?”

유리병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가 내게 보였던 대로 눈동자를 굴려본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악마가 아니냐는 것을 단 두 글자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악마의 작은 습성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악마란 것들은 열 받으면 왕꿈틀이 하나를 손가락에 집어 든 것 마냥 흐물흐물 하던 꼬리가 왕꿈틀이 속에 이쑤시개를 찔러 넣어 둔 것 마냥 꼿꼿하게 선다는 것을 말이다.

“말 할 수 있어?”

끄덕거려지는 작은 머리. 하지만 머리보다 더 작은 입술은 움직이지 않는다.

“해봐!”

그것과 나의 긴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마치 붉은 피를 연상하게 하는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 심장에 많은 부담을 주기는 했지만 호기심에 지배된 지금의 나는 평소에 하지 않던 착실함을 눈싸움 따위에 보이고 있다. 나의 집요함에 지치는 것은 그 녀석이다. 드디어 작고 귀여운 입술이 열린다고 생각한 순간, 두 손으로 입술을 얼굴보다 더 크게 쭈욱 찢고는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새까만 혀를 쑤욱 내민다. 그렇다면 이쪽도.


유리병의 맑은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악마의 비명.

-찌이이이이익

“말을 할 때까지 튕겨줄까?”

유리의 진동이 멈추고 유리병 안을 이리저리 활개치고 다니며 괴상한 비명을 질러대던 악마가 눈가의 눈물을 다 훔치고 나서야 나는 경고성 멘트를 날려 줄 수 있었다. 녀석은 심하게 나를 째려보면서도 쉬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한 번 더.


하고 유리병은 또 한 번의 소리를 내고, 악마는 아예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처음을 합쳐 총 세 번 유리병을 튕겨보고서야 또 하나 악마에 대한 것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녀석들은 유리병의 진동에 기절까지 한다. 라는 것을 말이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고 느낄 즈음 처음에 보았던 분침의 자리는 이미 반 바퀴를 돌고 난 후다. 유리병 안의 악마는 여전히 기절한 체 이지만 그것이 미흡한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10분 전에 알았다. 슬쩍 실눈을 뜨고 나의 정황을 살피려다 그만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놀란 토끼마냥 동그래진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가 실눈을 하고 나를 보다 다시 놀라기를 벌써 세 번째다. 만화에서처럼 이마에 실핏줄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열이 받기는 했지만, 이 녀석이 언제까지 기절한 척 하나 두고 보자는 오기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또 다시 10분이 지났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이 나의 인내심을 몰아내기 시작하고, 숱이 별로 없는 두 눈썹이 꿈틀꿈틀 거리기까지 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크게 심호흡을 해보기도 하고 뒷목이 뻐근해져오는 것 같아 이리저리 돌려도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이 녀석은 기절한 척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그런 내 모습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키득거리며 웃기까지 한다. 어깨가 들썩거리며 배 아파 죽겠다는 듯 배를 감싸고 웅크리는 모습을 보고 누가 기절했다고 생각할까. 하늘을 배회하는 매를 보고 고개만 볏단 속에 틀어박는 닭이 아니고서야 저 녀석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힘이 들지 않을까.

“너 기절한 거 아니었어?”

사람 좋은 사람처럼 씨익 웃어주며 얼굴을 병에 가까이 가져갔다. 움찔하고 놀라다 그대로 굳어버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오기까지 한다. 엇쭈, 꼬리까지 뻣뻣하게 새웠다. 아니 점점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 한다.

“한 번 더 튕겨 줄까?”

손가락을 병으로 가져가자 녀석은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너무 까매서 백지장처럼 하얘졌다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녀석의 심정은 그 한마디로 대변되지 않을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몹시도 애처롭기까지 하다.

“자, 인제 말을 해봐!”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젓는 녀석은 글썽거리며 눈물까지 맺혀있다. 분명 말은 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하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지금은 내 앞에서 제발 살려달라는 얼굴을 하고 있다.

“있지, 내가 어릴 적에 말이야 아주아주 개구쟁이라던가 악동이라던가 하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 잠자리 한 마리를 잡으면 날개를 뜯어내고 하늘로 던져버렸다가 여섯 개의 다리를 바둥바둥 거리며 땅으로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고는 했지. 그렇게 가지고 놀다가 시시해지면 그냥 거미줄에 슬쩍 붙여 두는 거야. 거미란 녀석도 집짓느라 고생이 많은 놈인데 가끔 포식을 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응?”

딴 곳을 보며 태연한척 말을 하던 나는 녀석을 향해 샤방한 미소 한 자락을 날려 주었다. 주춤주춤 뒤로 엉덩이를 빼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인다. 아마 몰라도 녀석의 등 뒤로 한줄기로는 부족한 식은땀이 무수히 흘러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 어때? 딱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네 이름이 뭔지 정도 말이지.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정도는 해도 되잖아?”
-…….

녀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을 하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던 악마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흥분하고 있는 중이다.

“내 이름은 말이야. 이…”
-잠깐!

녀석이 오른손을 앞으로 쭈욱 뻗어서는 손바닥을 편 모습으로 내 입을 정지시켰다. 목소리는 5살짜리 아이처럼 맑았지만 그 소리는 어찌나 큰지 아직도 귓바퀴를 따라 녀석의 목소리가 맴을 도는 것 같다. 어쨌든 녀석은 정말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다.

“에헤? 진짜로 말을 하는구나!”

녀석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눈썹을 꿈틀거린다. 엄지손가락만한 녀석의 새까만 눈썹이 보일 리가 없겠지만 그런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지. 명색이 인간과 공생관계에 있는 악마라구. 인간의 말쯤이야 몇 개 국어라도 할 수 있어.
“소말리아 말 해봐.”
-이!

흰 송곳니를 드러내며 맹수처럼 으르렁 거리는 녀석의 눈빛이 사납게 빛이 난다.

-악마는 인간과 소리로 의사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구. 인간의 뇌에 저장되어 있는 언어의 기억을 조작해서 우리의 뜻을 전하는 것이지. 한국인의 경우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총 24가지를 이용해서 한국어를 하게 되는 거라고. 단, 이건 의사를 통하는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에 제한되는 거지만, 예를 들자면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는 한국어 외에 몇 가지가 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해. 유치원 꼬마들보다 더 못한 영어 실력으로는 간단한 'hi'라거나, ‘good mooning' 수준의 영어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신, 소말리아 말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소말리아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내가 못하는 건 당신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니까.

녀석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열변을 토한다. 쩍 벌어진 내 잎으로 한 줄 침이 흐르려는 것을 재빨리 소매로 스윽 닦아 내었다.

“그러니까, 우리말만 할 수 있다는 거구나.”
-지금까지 내말을 뭐로 들은 거야?

벌떡 일어선 녀석은 제 풀에 병 안을 방방 뛰는 듯 날아다닌다.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병 앞으로 얼굴을 드밀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귀!”

였다. 침묵과 함께 녀석의 움직임도 멈췄다. 공포영화 속의 뻣뻣한 괴물 녀석이 뒤 돌아보는 것처럼 기분 나쁜 뼈의 마찰음과 함께 녀석의 목이 돌아간다. 한바퀴, 또 한바퀴. 늘어난 엿가락을 손가락에 돌돌 마는 것 같이 녀석의 머리는 자꾸만 빙글빙글 돈다. 악마란 녀석들은 화가 나서 꼬리를 세우고, 더 열 받으면 목을 꼰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는 순간이다.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목이 풀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와서야 나를 쳐다본다. 으슥한 골목길 입구에 삼삼오오 앉아 담배하나 꼬나문 동네 양아치 녀석들의 눈빛이 고스란히 녀석의 붉은 눈동자에 있다. 게다가 그 말투까지 닮았다.

-낙오자! 쓸모없는 녀석. 귀찮은 놈. 벌레 같은 새끼.
“잘 아네.”

귀에 딱지가 앉아도 모자랄 정도로 들어 온 말이다. 녀석에게 한 번 더 듣는다고 해서 특별히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 간다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눈앞의 이 악마는 나보다 약자이지 않은가. 그럼 강자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도리이다. cd가 떨어져 틈이 생기지 않게 입구를 잘 막고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모 광고의 카피를 생각하며 신나게 흔들어 주었다. 아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버릴 것이다. 뭐, 명색이 악마라고 하니 죽지는 않겠지.

예상대로 녀석은 만취한 중년의 아저씨처럼 비틀대며 이리 쿵, 저리 쿵하며 유리에 몸을 박아 댄다. 발로 걸어서는 병 바닥을, 날아서는 유리벽에 말이다. 노즐을 열어두고 도로를 찍어 놓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길게 잔영을 남기며 사방을 휘젓는다. 붉은 빛을 띠는 반딧불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같다.

-딸꾹!

얼씨구. 바닥에 주저앉아 이마에 손을 짚은 녀석은 정말로 취한 사람마냥 딸꾹질을 하기 시작 했다. 검은 피부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지만 양 볼이 붉다. 게다가 폭탄주를 서 너 잔 마신 사람처럼 눈동자가 풀려있다. 이 녀석 정말로 취한 것 같다.

-너 말이야. 딸꾹! 자꾸 날 괴롭히는데 말이야. 딸국! 아직 악마의 무서움을 모르 딸꾹! 나 보지.

악마의 무서움이라면 간접적으로 많이 접하기는 했다.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사탄의 인형’이나 ‘엑소시스트’ 그리고 얼마 전 개봉했던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했던 콘스탄틴이란 영화 까지, 악마나 악령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영화나 소설 혹은 만화의 주제로 많이 쓰이고 있지 않나. 실제로 그것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인간은 상상만으로 그들의 형체와 성질과 천성까지 만들어 놓았다.-어쩌면 내가 이 녀석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모습의 악마나 악령들을 본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 악마도 존재하기는 하더라만, 하나 같이 더럽고 징그럽고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모습과 행동들을 보이며 그에 걸맞은 잔인한 행위-살인 같은-를 태연하게 저지르고는 하지 않던가. 개인적으로 딱히 그들이 보여주는 무서움이라면, 인간의 영혼을 대가로 계약을 한다든가 그들이 한 계약을 파기하게 부추기는 일을 많이 했던 것 정도다. 개인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공포를 찾아 선물한다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능력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말이다.

“넌 그다지 힘이 없어 보이는데.”

솔직히 쬐그만한 녀석이 뭐가 무서울까, 직접 내 손으로 잡아서 병 안에 가둬두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난 지금 이 녀석을 가지고 놀고 있기까지 한다.

-난 아직 새끼 악마니까 성장하면 가장 먼저 네 녀석에게 복수 해 줄 거야.
“어라, 너 술 취한 거 아니었어.
-깼어.

무좀 때문에 가려운 발가락을 긁으면서 나는 힐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시간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다. 겨울이라 아직 창이 밝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서히 아침 해는 떠오를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잠을 설치기 싫어 지금은 검은색 두꺼운 커튼을 치기는 했지만 틈 사이로 숨어드는 빛은 생각만으로도 짜증나게 한다.

“그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뭐야? 예를 들어 소원 같은 걸 들어준다던가 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악마라고 다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건 규칙에 위반 되는 행위니까.
“규칙?”

등까지 가려워 온다. 긁어도 긁어도 점점 더 심해지는 가려움 때문에 심지어는 웃통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벽에 대고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이 다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 같은 종족이라도 성별이 나뉘고 또 능력이 다르지. 성격 또한 비슷한 인간은 있어도 완전히 같은 인간은 없어. 그런 만큼 악마의 일도 세분화 되어 있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

책상이 저렇게 멀었던가? 몇 걸음만 걸으면 방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어쩐지 서 있는 벽과 책상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녀석의 모습도 처음 엄지손가락만 하던 것이 갑자기 내 팔뚝만 해 졌다는 착시현상까지 나타났다. 등은 계속 벽을 문대고 한 손은 가렵기 시작한 엉덩이의 꼬리뼈 부근을 긁으면서 남은 손으로 열심히 두 눈을 비볐다. 오히려 책상은 점점 멀게만 느껴진다.

-절대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첫 번째 규칙이고, 자신이 맡은 인간이 아니라면 소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번째 규칙이지. 그리고 악마는 규칙 따위는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 번째 규칙이야. 뭐 다들 자신의 레벨에 맞는 상대를 고르기 때문에 대부분 규칙은 지켜지지만 레벨이 비슷한 놈들 간에는 간혹 다툼이 일기는 하지.
“그럼 아까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건 그 규칙 때문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묘하게 입가의 웃음이 소름 돋게 한다. 살갗이 벗겨져 나갈 정도 온몸을 긁어 대느라 녀석에게 다가 갈 수가 없다. 잠시라도 벽에서 등을 때면 극심한 가려움이 온몸을 덮쳐오기 때문이다. 머릿니가 두피위로 기어 다니는 가려움의 몇 백배에 달하는 가려움. 이미 벽은 시뻘건 핏물이 들고 있다.

-또 하나, 악마는 인간에게 함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그건 규칙이라고 하기 보다는 불복할 수 없는 절대자의 지시라고 보면 되지?
“근데, 왜?”
-왜 네게 모습을 보였냐구?

언제 유리병을 나왔는지 녀석은 내 눈 앞 내 침대 위에 주저 않아서 키득키득 기분 나쁜 소리로 웃고 있다. 처음 아이와 같던 목소리는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 소리와도 같이 변해 있다.

-그거야 난 내 일을 해야 하니까. 실적이 좋지 않으면 연말 보너스를 받을 수가 없거든. 키키키키 어때? 내가 보기엔 넌 충분히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
“자격?”
-날 괴롭혔잖아. 내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말이야. 아주 재밌다는 얼굴이던데.
“날 더러 악마가 되라고?”
-그렇지. 아쉽게도 나 같은 하급 악마는 번식을 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뒤를 이을 녀석을 골라 시험을 하는 거지. 내가 보기에 넌 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어. 날 괴롭히면서 즐겁지 않았어? 약자를 괴롭히는 희열을 느꼈을 텐데?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이 녀석은 약자였던 것일까? 자신의 힘을 숨기고 일부러 날 시험하기 위해 약자인척을 한 것은 아닐까? 오히려 속아주는 척 하면서 즐기고 있었던 것은 이 녀석일지도 모른다.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어차피 사회는 네게 낙오자라는 이름을, 부모는 네 녀석을 쓸모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래도 살 곳을 마련해 주고 먹을 것을 보내오는 것은 단지 자식이라는 것 때문이잖아. 형제들은 어떻지? 널 귀찮아하지? 게다가 그다지 많지 않은 친구란 자들도 모두 널 벌레 보듯 하던데. 키키키키키 어때? 네게 그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복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가지고 평생을 다 써도 못 쓸 재물을 깔고 앉아 명품과 격식과 품위를 따지며 사는 자들이 내 부모라는 이름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어디를 가서도 고개를 치켜 들 수 있고 자존심과 허영심을 채워 줄 수 있는 자들이, 일류 대학의 간판과 잘나가는 직업의 종사자로 사회적 명성도 함께 가진 나의 두 형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하수구에서 썩어가는 쓰레기와 같은 동급으로 취급되어져 왔다. 무얼 해도 특출나지 못하고 무엇 하나 내 세울 것 없는 낙제생 아들. 그리고 동생. 그렇게 나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작은 옥탑 방으로 3년 전에 내 쫓겼다.
변변치 않은 대학을 나와 직장도 없이 매일을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던 세월동안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혀를 차며 내 신세를 대신 한탄해 주었다. 부끄러운 자식. 있는 것만 못한 동생. 빽이 있으면서도 취직도 하지 않고 편안히 놀고  먹는다는 소문과 함께 만나고 싶지 않은 일 순위의 친구가 되어버린 것은,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뒷말들을 한다. 단지 나는 머물고 있던 자리에서 한 발걸음도 걷지 못한 것뿐인데 앞서간 자들이 따라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뒤쳐진 자들은 내가 가진 것들을 향한 시샘으로, 나를 그렇게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컴컴한 뒷방에 홀로 떨궈 두고 그들만의 화목한 과정을 연기하던 가족. ‘너 같은 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냉혹한 사람들의 눈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복수의 씨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낡은 벽지위에 수없이 복수의 시나리오를 썼다 지웠다를 했는지도….
그런 만큼, 녀석의 말은 환각제보다 더 황홀하다. 꿀보다 더 달콤하다. 무미건조함만이 솟아나는 내 감정의 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피카츄의 백만볼트에 직격당한 것 마냥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널 이렇게 만든 자들은 지금쯤 잘 살고 있겠지?
“내가 자신들의 불행의 근원처럼 말했으니 잘 살고 있겠지.”
-그렇지, 이 꼴을 안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쁠까? 복수 해줄까?

나는 그를 본다. 어느 틈에 내 책상이 딱 맞을 정도로 커져있다. 새까맣던 피부도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는지 새하얗다. 파닥거리던 날개도 사라지고 왕꿈틀이를 연상하며 한동안 웃게 했던 그의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스텐드 불빛에 드러나 보이는 누런 이로 내게 묻고 있다. 대신 복수해 줘도 되겠냐고.

-아니, 그들을 괴롭히는 건 내가 하고 싶어. 내가 당한만큼 갚아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키키키키키
“그렇지, 그건 해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지. 하암~”

녀석의 목소리에서 잠이 묻어난다. 나의 심장은 흥분과 두근거림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데 녀석은 한가하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나 켜고 있다. 내가 즐겨 입는 검정색 박스티와 파란색 줄무늬 트렁크 팬티를 입고 곰팡내가 나는 내 침대위에 드러눕는다.

“참, 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좋은 이름이란 그 자의 본질을 담고 있어야지, 키키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부터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아내야겠어.
“그런가? 아무튼 난 졸리니 아침까지 잠이나 자야겠어.”

키키키키 나는 웃는다. 그가 내 침대에 눕던, 그렇게 잠을 자던 이미 내 관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유리벽에 비치는 내 모습이 새까맣다거나 두 귀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두 개의 뾰족한 뿔이었다거나 혹은 제 멋대로 파닥이는 검은 피막의 날개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 해 줄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무의식이 만들어 놓은 복수의 시나리오대로 천천히, 한 놈씩 가장 끔찍하고 참혹하게 괴롭히다 죽일 수 있다.

-찌이이이익

입 밖으로 삐져나온 웃음이 유리벽에 부딪힌다. 손가락으로 유리벽을 튕길 때의 소리와 흡사한 내 웃음은 더욱 나의 심장을 흥분하게 한다. 소름끼치도록 즐거운 기분이 들 때마다 꼿꼿하게 서 버리는 꼬리와 조금씩 돌아가는 목이 조금 귀찮을 뿐. 오늘의 나는 미치도록 행복하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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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5.12.14 20:22 댓글 수정 삭제
    오! 구성이 모래시계같군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샤샤샥 뒤집어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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