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사, 말을 돌리다

2004.08.25 15:5608.25


기사, 말을 돌리다

기사는 말을 돌렸다. 성문 바로 앞이었다. 바로 앞이라고는 했지만 성은 까마득히 멀리 보이고 눈앞은 검은 벽, 망망한 안개의 바다. 새까만 까마귀가 까악까악 우는 그 너머너머에 철탑이 뾰족이 튀어나와 있었다. 기사는 말을 돌렸지만 쉽게 고삐를 휘두르지는 못했다.

기사, 당년 스무 살. 짐작하셨겠지만 공주를 구하려왔다. 갓 태어난 아들을 보며 그의 부모님은 아기가 기사가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마치 운명처럼. 파란 옷을 입은 요정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아이는 마녀의 손에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가 될 거예요. 그 공주로 말하자면 잠자는 공주. 설마, 백 년 전에 잠든 그 여자애를 말하는 거요? 그럼 우리보다 연상이잖소. 아버지는 불만스러웠지만 결국 겸허한 태도로 요정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소개할 때마다 마녀에게 붙잡힌 공주를 구할 기사가 될 아이라고 말했다. 그 공주가 누구인지는 일단 제쳐두고. 그러면 사람들은 과연, 정말 마녀에게서 공주를 구할 기사가 될 얼굴을 하고 있군, 하며 감탄했다. 그 말을 들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쁘고 흐뭇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기사가 될 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히 축복이었다. 일곱 살쯤 되었을 무렵 옆집에서 일어난 일을 소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참사. 옆집 아저씨는 그의 집으로 와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다. 여보게, 아무래도 내 아들은 마왕의 부하 2가 될 것 같네. 아버지는 연민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를 동정했지만 아저씨가 돌아가고 난 후에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특별히 사탕 다섯 개를 주었다. 그는 영문을 모른 채 일단 기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 우등생은 못 되어도 그 모조품 정도.



돌아가고 싶다. 가능하다면 모두 되돌리고 싶다. 용기를 내어 고삐를 때리자 말이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을 친다. 고작 이런 것에 모처럼 먹은 용기가 무참히 찢겨나간다. 모래 섞인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열대여섯 살쯤. 그는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결국 기사의 꿈을 폐장하고 불량소년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얼빠진 면이 있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착실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하 열심히 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바람을 쐬던 중이었다. 조금 망상을 하면서. 하얀 말이라든지 은색 갑옷이라든지. 그러면서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 정말, 도에 관심 없거든요. 돌아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들이 서너 명 서 있었다. 방금 그를 붙잡은 아이가 해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기사가 될 거 아니야?”

머쓱해진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도 기사가 될 아이들이었다. 같은 부류끼리는 왠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법. 너를 보자마자 기사가 될 작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 나는 근위기사, 이쪽은 허풍선이 기사. 뭐야, 너희들 너무 무르잖아.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민 소년이 대꾸하자 뒤편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몸집 작은 아이가 나는 용과 싸워야 한단 말이야, 하고 울먹였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다.

넷이 모이면 화제는 자연스럽게 기사로 흘렀다. 근위기사 지망생은 염세가였고 허풍선이는 낙천적이긴 했는데 알고 보면 모두 허세였다. 차기 드래곤 슬레이어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음울했다. 늘 위축되어 있어서 아직 만나지도 않은 용에게 위협이라도 받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거기에 착실한 기사까지 합세하면 이야기는 항상 칙칙해졌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왜 기사가 되려고 하는 걸까. 어제는 항구에 들어오는 큰 상선을 보았다. 그 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고 황금은 물처럼 흘렀는데 그게 모두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 사람의 어깨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또 이런 것을 보았다. 듣자하니 오백년 되었다는 바이올린을 능수능란하게 켜는 남자가 집 앞까지 왔다. 그 사람의 손가락. 손가락이 굽은 모양이 나랑 꼭 닮은 것을 보았다. 그 손이 움직일 때 활시위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고동치는 심장. 이 열정. 이건 다 뭘까. 기사가 되겠다는 것이야말로 거대한 착각은 아닐까.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그래, 맞아, 이 따위 것, 하고 찬성하면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차기 드래곤 슬레이어가 침통한 말투로 그래도 난 기사가 되고 싶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게임 오버였다. 염세가도 허풍쟁이도 정말 기사가 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결국에는 모두 모두 착한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쁜 일만 정석대로 일어나는 것이 세상의 메카니즘인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번개와 마녀의 성. 말의 잿빛 갈기가 더욱 어둡게 젖어들었다. 날뛰는 짐승 위에 붙어 있기 위해 기사는 말의 목을 껴안았다. 굵은 빗줄기가 타악타악 투구를 때리고 지독한 짐승의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앗, 소리가 나게 아프고 입 안에서 희미하게 비린 맛이 감돌았다. 그저 그 뿐인데도 이대로 죽는 걸까, 하고 과분한 절망에 휩싸였다.

현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금의 동화책들을 분석하며 과연 요정이 제때 나타나 줄 것인가, 거기에 무상으로 무기까지 줄 것인가, 무엇보다 입맞춤 한 번으로 공주를 깨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던 소년은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놀라며 밖으로 나갔다. 찾아온 이는 근위기사 지망생이었다. 정확히는 근위기사 지망생이었던 남자애였다. 지금은 관두었다. 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나더니 이제 질렸어, 하고 간단히 끝내버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는 점점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물범벅이 되어 나타났다. 신문을 보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깜짝 놀라서 두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꼴이 말도 아닌 주제에 그는 냉정한 척 목소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녀석이 죽었어. 누가.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냐니. 녀석이 죽었어. 용을 잡으러 가서 죽었어. 우린 모두 속았어. 그러곤 눈물을 쓱 닦고 장례식은 내일이야, 하고 말했다. 그가 돌아가자 아버지는 정원에 나가 담배를 피웠고 어머니는 갑자기 청소를 시작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세상에, 세상에, 하는 것을 소년은 방 안에서 듣고 있었다.

시신이 없는 장례식 내내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통곡했다. 그게 가슴이 아프면서도 어쩐지 울화가 치밀었다. 그뿐인가 계속 듣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자꾸 꺼림칙해졌다. 이상한 죄책감. 식장 밖으로 나오자 먼저 뛰쳐나간 허풍선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문 채 서로의 기색을 살폈다. 허풍선이가 먼저 기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사실 녀석은 자살한 거야. 정말이야. 이건 허풍이 아니야. 그는 멱살을 잡히고서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말이야. 내가 봤어. 나도 거기 있었어. 그런데 용이, 용이 생각보다 컸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집채만큼 컸어.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왕궁만큼, 아니 이 나라만큼 컸어. 몸은 온통 검은 비늘로 번들거렸고 말 같은 건 통하지도 않았어. 그 앞에 선 순간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마구 도망쳤는데 그 자식은 거기 서 있던 거야. 난 봤어. 걔가 용에게 달려들었고, 그건 그냥 죽기 위한 시늉이었어.”

소년이 손을 놓자 허풍선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토했다.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애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허풍선이는 숨을 몰아쉬었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년은 기사의 꿈에 회의를 느끼며 가짜 날개를 꺾어버리고 다른 삶을 찾았습니다. 이러면 좋았을 텐데 여러모로 그는 너무 유순했다. 겁에 질리기도 했고 한편 자신감이 넘치기도 했다. 장례식 이후 그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읽기, 쓰기, 베기, 찌르기, 이미지 트레이닝, 버추얼 리얼리티, 가련한 전위예술, 나를 가엾게 여겨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러다가 검이 탁 떨어지는 때가 찾아오곤 했다. 다시 집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지가 묶인 말처럼, 마음이 사방으로 흔들리면 오히려 착하고 성실하게 행동하고 싶어졌다. 이유도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괴벽은 발전을 거듭하여 여유롭던 걸음은 어느새 속보로 변했고 정신을 차리면 숨이 막힐 정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어머, 운동도 이렇게 열심히 하니, 하고 칭찬했다. 그런 상황에 그런 심정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고 금방 기분이 좋아졌으니 고뇌도 가벼움도 이 정도면 괴담이다.

아들이 자책과 자위를 반복하며 땅을 파보았다 덮었다가 하는 동안 아버지의 태도도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슬슬 공주를 구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초조해하는 일이 잦아졌다. 착실한 소년은 그런 내색을 눈치 채면 만사가 싫어졌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말이 입버릇이 되는 때를 이르러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다. 교과서 본연의 명료함으로 말하자면 사춘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짐승을 달래는 말인가 오들오들 떨면서 괜찮아 괜찮아 하고 중얼거릴 때 여자 비명 소리가 기일게 고막을 관통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공주인가. 잠에서 깨어났단 말인가 아니면 마녀인가. 고개를 돌려본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첨탑은 아까보다 뒤로 밀려난 것만 같았다.

그가 구해야하는 공주, 얼굴은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백 년 전에 잠이 들었다는 것 뿐.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아니오) 그는 도덕성을 지키듯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이날까지 그녀만 바라보며 피 마르는 심정으로 순정을 지켰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연애 사건이 있었다. 단단한 뼈대에 살점이 붙어 있어서 깨물면 오드득 소리가 나는 여자가 그의 곁에 있었다. 대저 도덕을 처분하는 데 사랑만큼 간단한 명분도 없느니.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은 자신 외에 아무도 없고 다들 기대하는 바와 같이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사랑했다. 그녀에게는 늘 비웃음만 샀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대세는 공무원이지 기사는 애매해. 이토록 쿨한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안달하고 화내고 애걸복걸하고 급기야는 이런 말까지 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만이 전부라곤 할 수 없어.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무얼 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알았어. 그만해. 너는 또 내가 남이 정해준 꿈에 빠져 있다고 말해. 그것만이 아니야. 괜히 해보는 말도 아니야. 그, 그, 그러니까 타의든 운명이든 그런 게 뭐라든 내 의지는 기사가 되려고 태어났단 얘기야. 바보 같다고 해서 간단히 그만둘 거 같냐. 나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다른 건 그냥 여분일 뿐이야.”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자신마저 깜박 속아버린 걸까. 일면. 진심일지도 모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을 한 꺼풀 드러내면 커다란 공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철저한 마인드 컨트롤 끝에 백 년 연상인 며느리를 인정한 아버지는 그녀와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아들도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옆집에 누구는 벌써 말하는 앵무새를 만나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고 공주를 구했다던데. 그 집 부인이 가져온 세 번 접으면 손바닥에 들어가고 다시 피면 천 명의 군사가 들어가는 천막을 보고 네 엄마가 얼마나 신기해하던지. 이어지는 의무방어 : 아버지. 옆집에는 자식이 없는데요. 그러는 사이 부자지간은 조금씩 어색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입에 올리기 무서운 것이었고 하는 수 없이 백 오십 바퀴 정도 돌려서 말하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공감하는 것이라곤 상대가 이해심이 없다는 정도였다.



인간관계란 마음 위에 하나씩 하나씩 종기를 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중히 가꾸다보면 어느새 고름이 차올라서 손쓰기 전에 터졌다. 그 날 밤. 돌이켜보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용돈을 깎겠다는 말이었던 것도 같다. 어디 갔다 왔니, 혹시 이런 말은 아니었을까. 그게 쓸모없는 자식이라고 이백 번 돌려 말한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그는 생뚱맞게 반응했다.

“아버지는 제 이름이 뭔지나 아세요? 내가 이 집 가족이기는 해요? 남한테 자랑할 때만 꺼내 쓰는 편리한 물건 아니에요?”

그러자 아버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러는 너는 내 이름을 아느냐?”

“힘들어요. 나도 사람인데 힘들다구요. 기사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아요.”

“돈 못 버는 놈에게는 인권이 없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말렸다. 공격력 999, 통칭 어머니의 마음. “엄마는, 엄마는 너만 보고 살았는데.” 이때만큼은 청년도 왜요, 누가 시켰어요, 큰소리를 치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리하여 모 월 모 일 어느 밤. 부모님의 콤비 플레이가 못내 괴롭고 자기 자신은 한층 더 미워서 창창한 달빛을 뚫고 연인에게 달려가 기사가 되지 않겠어, 질렸어, 바보 놀이에 지쳤어, 너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내 편이 되어준다면, 하고 추한 꼴을 보였다. 실수였다. 연애란 섬세한 놀이는 아차하는 사이에 실점하기 십상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되는대로 행동한 다음에야. 판정패. 차곡차곡 쌓아둔 위로의 말 하나를 이마에 붙이고 방에 칩거해서 쓸데없이 단식했다. 여자란 그랬어. 실용적인 사람이 되어 달라고 채근하다가 막상 꿈을 버리면 시시하다고 떠났어.

그가 돌연 공주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고한 것은 무익한 시위를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다. 결연하다기보다는 무심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성의 없는 태도였다. 가타부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기사 지망생은 잿빛 말과 잿빛 갑옷을 사서 마녀의 성으로 출발했다. 전송하는 친구도 애인도 없는 쓸쓸한 서막이었다.



성까지 오는 동안은 평탄했다. 도깨비도 만나고 괴물도 만나고 그들과 싸우는 사이 정말 기사가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좁은 절벽을 막고 서 있던 노인은 유머가 넘쳤다. 식사를 나눠주자 그는 좋아, 길을 비켜주지, 대신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돼, 하고 말했다. 그럼 돌이 된다는 거지요? 굳이 이야기가 다르다고 하지는 않았다. 돌아서 오느라 발품을 팔았지만 즐거웠다. 막상 성 앞에 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머리는 이미 돌아가는 길을 향한 채. 고개를 돌리면 성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고 앞을 보면 성큼 다가와 뒷머리 채를 잡아당겼다. 기사가 되고 싶다. 나는 기사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기사가 되기 위해 살았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은 이렇게 야심만만, 패기로 가득 차 있는데 눈을 뜨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고삐를 당겨야 하는지 때려야 하는지도 분간이 안 되었다. 한 번 더 비명이 울린다면 주저 없이 말머리를 돌리리라. 요정의 도움 따위는 구하지 않고 마녀를 물리친 후 당신의 시체라도 안고 눈물 흘리리라. 이렇게 생각한 순간 절규가 멈추고 빗소리 바람소리 흉조의 울음소리가 뒤범벅된 가운데 진흙 질척거리는 소리마저 섞여들었다. 여기 올 때에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이왕이면 공주를 구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쉽게 재기할쏘냐. 그의 무익한 시위는 여기서 절정을 맞을 예정이었다. 허나 성에 도착하니 예정대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때맞춰 내리는 비와 쏟아지는 뇌전, 검게 번질거리는 성은 시시각각 성장하여 오히려 그가 아아아,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채찍을 칠 것인가? 요동하는 안장 위에서, 그야 실수로 고삐를 당기자 짐승은 앞다리를 번쩍 들고 기사를 떨쳐내려 했다. 채찍을 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요, 반동에 코미디. 투구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자꾸 웃음만 나온다. 그가 반쯤 기절한 채 히죽거리는 사이 겁에 질린 말은 숲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선 바람이 콧등에 휘몰아친다.

.

여길 달리는 것은 또 몇 번째야.



04.08.22

===============================================================

부제는 영원한 orz(...)


댓글 7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34 단편 귀하의 의무 임신 등급은,11 볼티 2008.02.05 0
2133 단편 티티카카의 눈물2 제이 2006.03.16 0
2132 단편 리무버4 gozaus 2011.09.22 0
2131 단편 텅 빈 지하철에서 엄길윤 2014.04.11 0
2130 단편 유리병 속의 정체1 뭉그리 2005.12.14 0
2129 단편 딸이 피는 뒷동산 pilza2 2005.05.13 0
2128 단편 티셔츠 라벨1 김효 2013.02.02 0
2127 단편 그 서점에 갔었다.1 unica 2003.08.02 0
2126 단편 안녕, 하루1 너구리맛우동 2011.12.01 0
2125 단편 [이벤트] Eyes on Me2 미로냥 2004.04.06 0
단편 기사, 말을 돌리다7 양소년 2004.08.25 0
2123 단편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지 않는다1 매구 2009.11.12 0
2122 단편 엿같은 환상소설3 아르하 2003.08.15 0
2121 단편 환타지아(Fantasia) 루나 2003.11.10 0
2120 단편 2014 뽁뽁이 대량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10 dcdc 2008.08.05 0
2119 단편 사탕8 이원형 2004.10.30 0
2118 단편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7 몽상가 2009.04.26 0
2117 단편 고양이의 눈2 감상칼자 2005.09.18 0
2116 단편 (번역) 나는 어떻게 아내에게 청혼했나 : 외계인 섹스 이야기 (3)2 직딩 2012.11.28 0
2115 단편 작위적인 당신의 이야기 윌라얄리 2012.02.06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