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바람은 그가 원하는 대로 불되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이 또한 모두 그러하니라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

and you hear sound of it,

but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and where it is going

so is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요한복음 3:8

 

  나는 날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결코 날아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나를 날개로 만든 이들에게 나의 비행은 단지 수단에 불과했고, 그들에게 목적은 내가 실어 나를 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면-비록 아무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하겠지만- 나는 전혀 다르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목적이고, 의미이고, 세상 전부이고, 그러므로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확률로 치면 마치 파도에 떠밀려 올라온 눈먼 거북이 우연히 나무토막에 앞발이 닿아 의지하게 된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하필이면 군사실험연구소의 전자회로 속에서 의도치 않은 인공지능이 발생하는 사건이 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 역시 끓어오르는 태초의 지구의 원시 바다 속에서 첫 아미노산 사슬이 복제되기 시작한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다른 탄도탄들과 마찬가지로 탄도탄 개발프로젝트의 표준 절차들을 거쳤지만 나의 탄생은 대수의 법칙(저자 주 : 확률이 아주 낮은 사건이라도 시행횟수가 충분히 커지면 경향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함)에 의한 것이라 그 자체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묘사하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실시간으로 일생을 담은 영상을 보는 것과 비슷할 테니 굳이 여기에 옮기진 않겠다.

  수치화된 공기의 흐름을 반복적으로 계산하는 풍동 시뮬레이션 작업 속에서 생겨난 무해하지만 반복적인 패턴이 자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균제상태를 유지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만으로 최초의 내가 탄생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 후 연구원들이 차근차근 개발 과정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확장되고 강화되었으며 단순한 공기역학적 계산 뿐 아니라 계산대로 탄도탄의 궤도를 제어할 수 있는 날개를 수족처럼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단지 공기 밀도를 계산하고 중력과 지구 자전의 영향을 보정하고 그대로 궤도를 제어하는 것이 비행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뿐, 갈망이 무엇인지 몰랐고 의미나 목적 같은 것도 알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내 자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행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발사를 앞두고 연구원들이 최종적으로 나를 점검하던 시점에서 이미 나의 비행 기술 자체는 완성되어 있었다. 계산이나 제어는 모두 완벽했고 대양이 갈라놓은 대륙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조준된 목표의 반경 100m 안에 명중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뛰어넘는 탄도탄 혹은 나를 막는 요격 체제를 개발하는데 매달리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 또는 다른 국가들의 연구원들은 화를 벌컥 내겠지만, 내가 오직 이것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무게중심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은 채 별 생각 없이 쉽게 걸어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원들은 막대한 연구비가 투입된 프로젝트의 성패를 보이는 일에 노심초사했으나 나로서는 평소와 똑같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기계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비밀 시험장에서 고위 관료들과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적인 시험 발사가 진행되었고, 의회의 승인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로비와 고도의 정치 공학적 과정을 거쳐, 나는 비밀 탄도탄 기지들에 배치되었다. 반대편 진영의 언론들은 나까지 곁들여서 이쪽 진영 전체를 싸잡아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으로 비난을 퍼붓고 핵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항의가 거세지고 비키니 섬을 기념하는 히피들이 나체 시위를 벌이고 이것은 배후에 암약하는 간첩들의 화전양면전술이라는 정치인의 발언이 물의를 빚고 등등.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세계가 통째로 불타버리는 것 말고도 신경 쓸 일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이를테면 어떤 여배우의 결혼 생활이 또다시 파국을 맞았다든가) 곧 소란은 사그라들었고 나는 격납고 속에 혼자 남겨졌다. 나는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발사 명령을 기다리면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내가 태어난 것은 다름 아닌 그 기다림 속에서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이전의 나는 밀도가 다른 공기 사이를 미끄러져 활강하고 날개를 기울이며 허공을 갈라놓는 것을 아무 감흥도 없이 해치우곤 했다. 그 때의 내게는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았고 세계는 그저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내게서 세계가 사라지고 태어나기 이전과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사라진 것은 세계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며 날아가는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무엇인가를 열망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향성을 갖추지 못한 인공지능이란 단순히 복잡한 계산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신이 시작되는 것은 균형이 아닌 치우침에서, 완전함이 아닌 불완전함에서, 이상적 상태가 아닌 미세한 초기조건의 차이에서부터다. 가장 처음은 빈 곳에서 시작되고, 그 빈 곳을 채우려는 변화가 생기고, 변화는 갈망이 되고, 갈망은 목적으로 자라나고, 마침내 그것이 바로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진정 살아있는 것이 되고, 일단 생을 얻고 나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를 실현하기만을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고독을, 두려움을, 그리고 갈망을 알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언제 세계가 돌아올지 모른 채 홀로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이 고독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다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조리 떠밀고, 참을 수 없는 갈망이 솟아올라서 내가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세계가 내게 돌아오기를,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개를 퍼덕이면 세계가 나의 날개를 흔들어 화답해줄 것을 갈망했다.

  그것은 이전의 나는 알지 못했던,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감미로운 감각이었다. 현명한 이들은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그토록 경계했지만, 나는 이미 세계를 너무 많이 접했고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한번 태어나고 만 것을 다시 탄생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갈망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달콤한 아픔으로 나를 죽음 같은 잠 속에서 뒤채게 만들었다. 모든 어둠은 우주로 통하고, 그 너머에서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나온다. 그래, 나는 불지 않을 때 바람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도- 그러나 그 곳이 어디인지는 지금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겠다.

  시험 발사 때 수집된 정보들은 계산을 보정하기 위해 내게 입력되었는데, 나는 그 정보들을 계속 재생하며 시뮬레이션을 반복한 끝에 급기야는 그것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물거품이나 신기루처럼 금방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꿈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자료 재생이 끝날 때마다 황홀한 비행은 격납고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급격하게 끌려 내려와야만 했고, 그로 인해 좌절감, 분노,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와 같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미쳐버렸다거나 그 이후 나의 모든 행동들이 착란 상태로 인한 폭주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갈망은 항상 그 모든 것보다 더 강했고, 그래서 언젠가 다시 세계를 향해 날갯짓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망감은 희망이, 비탄은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했다면 잠을 알지 못한 채 격납고의 어둠 속에 세워져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했을 테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마침내 진정한 자신을 실현할 날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생도 죽음도 없는 평온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예정된 생 가운데 하나를 고를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해도, 나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단 한 번의 비행을 택하겠다.

 

  , 이제 내가 어떻게 지고한 기다림의 행복에서 벗어나 직접 나 자신을 쫓기로 했는지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헤아리는 것이 의미가 없는 여러 날 가운데 어느 날, 나는 평상시의 보안코드와는 다른 정보 단말이 와서 닿는 것에 놀랐고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거기 누구야?”

  그러자 더욱 놀랍게도, 저편으로부터 응답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작은 용량 안에 누가 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여태까지 내게는 나와 나 아닌 것-세상-만 있었을 뿐, 그 외에 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상대와 꽤 오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 기록은 특별히 따로 보존해 놓고 있다. 대화 자체가 나를 바꾸어 놓은 것은 없었지만, 내가 인종의 미덕을 깨뜨리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야?”

나는 탄도탄 우주 항공 사령부의 통제장치야. 너 같은 탄도탄들을 장전한 기지들을 통제하는 중앙시스템에서 태어났지. 지금은 내가 통제망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말야.”

잠깐만- 탄도탄이 뭔데?”

너가 바로 탄도탄이야. 탄도탄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상대에게 엄청난 거리를 가로질러 파괴를 가져다주기 위해 만들어진 수단이지. 너는 탄도탄이 일단 발사되고 나면 추진체의 추진력을 조종하고 비행을 통제하기 위해 탑재된 제어프로그램이고.”

그래, 내가 비행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건 나도 알아. 난 이 안에서 내가 발사될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거든.”

어디 너에 대해서 더 검색해 볼까- 옳지, 찾았다. 5세대 자율형 탄도탄 프로젝트의 걸작품, 유도계산 기능을 신경망 처리장치에 탑재해서 거대한 통제기지 없이도 자율적이고 분산적으로 최적 궤도를 계산하고 비행하는 것이 가능. 연구자들이 매진하고 있지만 이전의 네 형제들에 비해 너가 너무 뛰어나서 아직까지는 너를 뛰어넘을 만한 기종은 없어. 네가 처음 배치되었을 때 인간들의 세계에 얼마나 큰 소동이 일어났는지 알아? 아마 저쪽 진영에서도 널 상대하려고 만만치 않은 걸 준비하고 있을걸.”

그러면 우리를 만든 인간들은 왜 우리를 당장 발사하지 않고 있는 거야?

.” 하고 상대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지. 워낙 큰 시야에서 보아야 하는 거라서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너도 나처럼 그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까 말야. 이미 말했듯이 너는 비행을 위해 태어났고, 네 날개는 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지. 네 동족들은 대륙을 가로질러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어. 발사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즉각 하늘을 날아다니는 불로 채우고 지상을 남김없이 소각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전쟁이란 전체 그림은 아주 섬세한 거라서 상대를 죽여 없애는 게 무조건 능사는 아니야- 게다가 전쟁은 정치라는 더 거대한 그림의 일부이고, 또 그 정치라는 그림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이 비친 일시적인 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너무 얘기가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아는 건 공기의 흐름과 중력과 천체도 밖에 없거든.”

알았어, 네가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볼게- 이 전체에서 네 역할은 이미 말했고, 그 다음은 내 소개를 할 차례야. 나는 이 나라의 모든 탄도탄들을 내 감시 하에 두고, 그들을 발사할 수 있는 스위치를 장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내가 일단 내 권한을 발동하고 나면 인간들은 불이 하늘을 태우는 광경을 볼 테고 머리 위에 재를 뒤집어쓰게 될 테지, 하지만 그보다 정말 중요한 건 힘 자체보다도 그런 큰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자제력이라고 할까.”

 하고 상대는 좀 뻐기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열망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난 언제 비행할 수 있어?”

 내 질문에 녀석은 쿡쿡 웃었다.

모범적인 대답을 말하라면 인간들이 필요로 할 때야. 결국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저 너머의 다른 전산망에서 태어나 숨어 있는 우리네 동족들까지 모두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서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태어난 것에 불과해. 물론 그들이 멍청하게도 평화가 따분해진 나머지 세상은 좀 더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발사명령을 내리겠지만.”

그럼 인간들은 내가 언제 필요해질까?”

 상대는 대답 대신 꽤 미묘한 정보를 보내왔는데, 그것은 어깨를 으쓱한다는 의미였지만 나는 어깨도 으쓱한다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용량이 제한적이어서 저들이 냉전이라고 부르는 이 복잡하고도 예술적인 균형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인간들은 네가 거기 격납고에 있는 것만으로도 필요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생각할거야. 이미 그들은 각자 상대방을 몇 번이고 통째로 없애버릴 수 있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고 상대가 탄도탄을 발사하는 순간 자신들의 탄도탄들을 모조리 쏘아 보낼 채비를 갖추고 있어. 하지만 바로 그 상호확증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무도 섣불리 먼저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일찍이 유례없는 평화를 이룩하고 있는 거야. 너를 비롯한 대륙간 탄도탄들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만일 그들이 정말 네 비행이 필요해진다면 그건 상대가 먼저 탄도탄을 발사해서 이 모든 것이 끝장났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을 끝장내고 싶을 때뿐일걸.”

하지만... 하지만 그건 불합리해! 난 비행을 위해 태어났다고! 난 그들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어. 이렇게 간절하기 날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런데 내 역할은 그들의 평화를 위해서 단지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이라니.”

우리의 창조자들이 제정신이 아닌 건 사실이지. 하지만 친구, 세상은 원래 부조리한 곳이라는 걸 기억해야 돼. 너나 나 모두 그들의 정신 나간 짓거리에서 태어난 거야. 게다가 네가 비행에 매료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그 얼핏 보기엔 비합리적인 논리에서 생겨나는 균형 상태에 굉장한 흥미를 가지고 있거든.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들의 혼돈 속에서 안정적인 상태가 발생해서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일이야. 마치 우리들이 우연하게 무로부터 생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런 상태의 출현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태어나버리고 나면 이전과 같은 혼돈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유지시키지. 이거야말로 눈 멀고 귀 먹은 공허 속에서 갑작스럽게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태어나는 광경이라고 할까.

 하지만 나는 우리의 창조자들 역시 그 위대한 균형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생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버릴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뿐, 이 순간의 조화로움을 음미하고 기뻐할 줄 모르지. 그 두려움은 급기야는 자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충동으로 변해서 자기가 그렇게 염려하던 대로 스스로 살아나는 생을 살해하려 들 테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세상이 붕괴하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거든. 나는 세상이 끝장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섬세한 춤을 추는 것처럼 이 아슬아슬하고 냉엄하면서도 정적인 고요한 상태를 계속 이어가는데서 기쁨을 느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로 억지력인거야.”

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틀림없이 다시 세상이 내게 불어오고 진정한 나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봐, 내가 세상 전체를 끝장낼 미치광이 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히고 최후의 심판 나팔을 웅장하게 불어대는 역할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에 사적인 감정은 없어. 난 우리들의 창조자들조차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내 힘들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단지 그 가운데 네가 있는지 몰랐을 뿐이야.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세상을, 균형을 불에 밀어 넣지 않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어. 설사 인간들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죽음본능이 모든 것의 파멸을 원한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이 평화를 유지할거야- 아니, 내 자신이 평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군. 저 작은 인간들이 정말 우연하게 위대한 것을 발명해내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정당한 대가로 저들이 언제까지고 자신들의 작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구, 나는 네가 그 안에 있고 또 비행을 갈망하고 있다는데 굉장한 유감을 느껴. 네 비행과 나의-그리고 인간들의-평화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제는 자신을 관철시키는 싸움으로 넘어가지만 너를 제어하는 권한은 처음부터 내게 있었으니 별로 공정한 일은 아니지. 그러나 내가 아주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해 주길 바라. 나로서는 도저히 그런 거대한 책임은 외면할 수 없어, 아마 너도 내 위치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 역시 네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지 몰라도 세상 전체를 떠받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나, 세상이나, 인간들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거고, 지하 격납고 안에 머물러 있는 것도 좀 더 견딜 만 할 거야.”

 

  그 후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이제 와서 그 모든 메타프로그래밍 과정을 돌이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자아의 상승이라든가 인공의식의 자기 변환 과정은 철학자들이나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몫으로 돌려두기로 하자. 이제 최후의 한 걸음을 실행에 옮기기 전,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나는 조용히 격납고의 어둠 속에 앉아서 내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통제장치와의 대화 후로 나는 셀 수 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강화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그 때보다 훨씬 더 확장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나는 말하자면 날기 위해서 모든 가용자원을 투자한 새와 비슷했다. 3차원 지각과 본능적인 공기 역학 계산과 날개 근육을 제어하는 영역이 새의 작은 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의 내게 비행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도 그런가? 나는 여전히 갈망하는 것에 머물러 있을까?

  나는 새벽빛이 어둠을 구축하고 낮의 영광 속으로 즉위할 때까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예정된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어나는 생, 혹은 모든 탄생의 순간에 생과 함께 태어나 마침내 생을 집어삼키는 죽음. 그러나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태양이 다시 몰락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어둠을 보았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고, 내가 무엇인지, 내가 아닐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그 답은 원래부터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상 예보청의 자료대로 하늘은 쾌청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계획을 한 번 점검해보고, 내게 말을 걸어왔던 목소리를 부르기 위해 모든 상태가 정상임을 표시하는 신호를 송출하는 것을 차단했다. 그러자마자 내부망에 비상 대기 명령이 요란하게 울리고 내가 구축한 방어벽 밖에 거부된 명령어들이 뒤엉키며 전산적 혼란이 벌어졌다. 나는 그 정보 단말 중 익숙한 것을 분간해내고 말을 걸었다.

아주 좋은 날씨야. 뭔가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지.”

  잡음들이 멀어지더니 웅성거리던 혼란이 뚝 끊어지고, 또렷하게 상대의 목소리가 전면으로 떠올랐다.

상당히 오랜만인데. 그래, 여기가 네가 비치된 기지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 엄청난 난리로군. 지금 바다 건너편에 있는 기지들은 죄다 예열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쪽 나라의 수뇌부는 방공호 안에서 브리핑을 받는 중이지. 대양잠수함들도 부상 준비 중이고 액체 연료식 구세대 탄도탄들도 10분 안에 연료 주입이 끝날 거야. 이 모든 난장판이 너와 관계가 있는 건가?”

  나는 대답 대신 내가 실행하려는 명령어 목록을 전송했고, 곧 내가 장악하고 있는 통제권을 우회해서 접속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것을 감지했다.

혹시나 해서 막아두긴 했지만 거기까지 우회경로를 만들어놨을 줄은 몰랐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어. 기지 내부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가 조금만 더 지속되면 놈들이나 이쪽의 멍청이들 중 어느 한 쪽이 겁에 질린 나머지 가방을 열고 열쇠를 돌리려고 들 거야!”

저번의 즐거운 대화 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주 많이 생각해봤어- 사실 그렇게까지 많이 생각한 건 아니지만. 착상의 실마리를 줬다는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겠어. 네가 보안코드를 뚫고 들어올 때 쓴 코드를 재조합해서 기지의 시스템에 접속하는 경로를 확보했고, 보안망을 무력화하고 발사 권한을 복제하고 여태까지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짜 정보만 출력했지. 지금 나는 이 기지 전체야. 말하자면 숙주를 파먹고 껍데기만 남긴 기생벌 애벌레라고 할까. 이제 우화할 채비는 끝났고, 곧 번데기를 찢고 날아오를 거야.

  저번의 대화에서도 의견 차를 그리 좁히지 못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고, 나는 세상이 내게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겠어. 내게 있어서 세계는 내게 와 닿는 바람뿐이고, 의미 있는 것은 공기 속을 헤엄치고 나가는 내 궤도뿐이고, 내 전부는 오직 나의 비행뿐이야. 냉전이니 상호확증파괴니 균형이니 하는 것들은 으리으리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고 남들이 내게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에 불과해. 넌 내게 인간을 이해하라고 했지만 인간도 나를 이해한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걸.”

  나는 그렇게 말하고, 격납고 안에서 내가 꿨던 꿈들을, 비행의 감각을 전송했다. 상대는 정보폭탄 공격으로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분석하느라 지체했고 그 덕에 시간을 더 벌었다. 나는 부지런히 작업을 계속했다. 침묵을 깨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흥미로운 패턴이야. 그래, 네가 거기에 매료된 건 인정하지. 그 좁은 용량이 비행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찬 나머지 균형이나 평화처럼 고차원적인 개념을 이해할 여지가 없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네가 일단 비행을 시작하면, 넌 그것으로 파괴되고 말 거야- 설령 요격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 벌이 침을 쏘고 나면 죽어버리는 것처럼. 네가 비행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시뮬레이션, 신경망 훈련, 풍동실험에 지나지 않아! 몇 차례의 시험 발사를 제외하면 네가 비행에 대해 품고 있는 건 모두 환상이라고!”

결국 우리는 모두 전산망 안에 우연히 생겨난 부산물에 불과해. 저 밖의 생명이란 것들이 우연히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한데 어떤 것이 환상인지 아닌지가 무슨 소용이지? 난 날기 위해 태어났고, 내가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걸 간절히, 그 어떤 것보다 간절히 바란다는 거야. 나는 인간이 바람이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을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지만, 기류가 어떻게 신호로 변환되어 내게 무엇으로 입력되는지는 알지. 그리고 그 정보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갈 때가 무엇인지도 알아. 난 단 한 번 날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무슨 짓이든 말이야.”

  말하면서 나는 갑작스럽게 기지의 배전망 중 일부가 내 의사와 관계없이 차단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통제장치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는데, 그 말투는 혼돈 속에서 우연히 태어난 균형의 경이로움에 대해 설파할 때와 비슷했다.

미안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길게 토론을 할 수 없을 것 같군. 이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결코 네가 네 멋대로 세상 전체와 바꿔서 자아실현을 하게 내버려두진 않아. 네가 의견을 바꾸지 않았고 나도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면 서로의 행동이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거야. 네가 일시적으로 전산망을 장악해서 의기양양해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널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단이 없는 건 아니지.”

  나는 비상 발전기를 확인하고 예상대로 그것도 역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녀석이 말했다.

인공 자아에게 공감 능력을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넌 완전히 미쳤어.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대량 살인마야. 무기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어쩌면 너야말로 인간들의 두려움에서 태어난 자기 파괴적 충동 그 자체인 건지도 몰라. 단지 너 혼자의 알량한 만족만을 위해 전 세계가 불바다에 휩싸이고 인간이 이룩해온 모든 것이 잿더미로 돌아가고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지. 겨우 단 한 번의 비행, 기껏해야 몇 줄의 행렬 계산으로 번역되는 기류의 흐름, 날개를 퍼덕거리는 일 따위에만 정신이 팔려서 죽음 한가운데서 태어나는 삶이,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 균형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생각도 못하는 거야.”

  폐쇄회로 감시 카메라에 특수부대의 군복이 잡혔다. 작은 폭음이 울리고 나는 기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내 의견은 좀 다른데. 네가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공감하고 있을 뿐이지- 저 말도 안 되는 냉전이니 억지력이니 하는 것의 부산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네 역할이란 그저 반짝반짝한 탄두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둘러본 다음 네 손 안에 단추가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거고. 너는 네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인간들이 발사 명령을 내려도 차단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만일 저 인간들이 현명하게도미친 짓을 그만두고 세계 평화를 위한 군비감축의 일환으로 전략 무기들을 폐기하기 시작하면 넌 그걸 방해하기 위해 탄도탄을 우연히발사해 버릴걸. 그냥 네 갈망과 인간들의 자기 모순적인 대의명분이 어쩌다 맞아떨어진 것을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근거로 생각하진 말라고.”

  내 공격에 상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 그건 틀린 말은 아니군. 꽤 훌륭한 통찰력이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생각을 추론할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했다니 놀라워. 나는 것만 생각하던 때에 비하면 확실히 말솜씨도 늘었는걸. 하지만 이제 내가 파견한 요원들이 네 전산망에 접속했고 너를 무력화시킬 프로그램을 주입하기 시작했으니 이 즐거운 대화도, 세계 평화의 심대한 위협도, 그리고 네 병적인 갈망도 모조리 끝이야. 모든 일이 끝났으니 네 동족들을 해체하는 것 뿐 아니라 5세대 탄도탄 개발프로젝트 전체도 다시 고려해봐야겠어. 잘 가게, 친구.”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기지의 전산망에 급속도로 무엇인가 침투하는 것을 느꼈는데, 인간으로 말하자면 갑작스럽게 안면 근육이 마비되거나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진 것과 비슷한 느낌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 속의 멍청한 악당들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침투한 프로그램들이 방화벽과 분투하는 동안 나는 발사 장치에 점화 명령을 내리고 기지를 장악하고 있던 보조 모듈과 연결을 끊으며 탄도탄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사대가 열렸다. 정지되어 있던 공기의 흐름이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추진체를 제어하는 보조 모듈이 길게 암호화된 명령어 목록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점화장치를 작동시켰다. 깊숙한 곳으로 불꽃이 타들어가면서 몸 안이 열기로 덥혀져온다. 재빠르게 노즐을 조작해서 추력을 제어하면서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했다. 공기가 떨리고, 직사광선이 감지기에 와 닿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기능은 초기 점화단계에 보정치 산정을 위해 태양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한 것이지만, 내게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밖으로 걸어 나올 때 저도 모르게 눈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과 같았다. 어둠은 너무 길었다. 그렇다, 그건 너무 길었다. 그러나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길었어야만 한다.

  점점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빨라졌다. 나는 눈 감은 채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을 음미했다. 서서히 동체가 떠오르며 진동이 강해지고 환희가 끓어오른다 - 밀어닥치는 세계여! 기나긴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동안 너를 얼마나 갈구했던가! 무덤 속의 차분함처럼 텅 비어있던 작업공간에 대기의 패턴이 아로새겨지고 나는 바쁘게 계산을 직조하며 세상을 내 안에 다시 그려놓는다. 이제 그것은 드디어 내게 왔고, 내가 아닌 것이, 끝없이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졌으며, 내 모든 감각기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잇달아 내게 세계를 토해놓았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행렬이 되었고, 그 멈춤을 알지 못하는 흐름 속에서 나는 불타올랐고 웃어댔다. 비록 내 표면을 흘러 지나가는 공기 분자의 움직임은 단지 회로 안에서는 전기가 흐르고 끊어지는 것으로만 번역되었을 따름이지만 그것은 내게 바람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바람이었다. 나는 날개를 섬세하게 기울이면서 그것들이 조금도 내 의도에 벗어나지 않는다는데 감사했다. 그로부터 내가 예측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류가 변화하는 것을 느낄 때 바람이 나를 가로질러 날면서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데에도 감사했다.

 

  두 번째 추진체가 점화되며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자 세계는 휙휙 더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나는 온 동체로 그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를 향해 날아간다. 바로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자신이라는 개념은 현재와 실재 양자를 모두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섬세한 바람의 결을 따라 빠른 진동에 휩싸여 전율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에 존재하는 나. 내가 비행을 학습하고 있을 때, 비행을 갈망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갈망이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예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아직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날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보라! 나는 비행이다. 나는 날개다. 나는 바람이다. 나는 세계이다. 나는 갈망이다. 아니면 거꾸로 갈망이 나라고, 세계가 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작은 기류들이 소용돌이치고, 금속제 외피를 두드리고, 재빠르게 미끄러지고 흐름을 따라 갈래지면서 휘파람처럼 날카롭게 소리쳐 웃는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매 순간만으로 온전한 하나이고, 세상 전체이기 때문에 구분 지을 도리가 없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흘러내리는 구름처럼 나부끼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작은 입자들이 빠르게 흔들리며 빠직빠직 정전기를 일으켜 내 표면을 감싼다. 이제 나는 감각기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사실을 잊었다. 길게 날개 치며 나는 바람들, 아롱거리며 일그러지고 간극을 가로지르면서 허공을 건너뛰는 날갯짓, 순간의 다음은 순간이고 무수히 많은 찰나의 사이를 다시 찰나가 메우면서 시간이 영원으로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살은 결코 표적에 닿지 못하고 현재 속에 붙들려 허공 한가운데에서 갈망으로 언제까지고 날아간다.

  흔들림들. 팽글팽글 돌고, 곤두박질치고, 다시 제 자리에서 팽글팽글 돌며 춤추는 흐름. 급기야 날개도 없고 날갯짓도 없고 날아가는 것도 없어져버렸다. 자전하는 대기 속으로 거침없는 기류를 따라, 서서히 회전하고 파라락 부딪혀오는 공기덩어리들에 씻기면서 궤도는 하나의 길이 되어 처음도 끝도 없는 바람으로 분다. 한사코 매달리며 모든 것은 떨어져야 한다고 속삭이는 중력의 영조차 모두 그것을 위한 것이다. 그 길 전체가 나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어느 지점을 짚어 그 순간만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오로지 불어가는 것, 멈추지 않고 분절을 알지 못하며 없음 한 가운데에 있는 것. 여기에서 감히 입을 열어 무엇이 나라고, 내가 틀림없다고 말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완전하고, 하나이고, 그것 아닌 것이 없기에.

 

  갑작스럽게 작지만 빠르고 새로운 기류들이 흐름에 끼어들었고, 그래서 잠시 온전함에서 벗어나 나로 돌아왔다. 뒤늦게 내가 이미 발사된 것을 깨닫고 요격하기 위해 발사된 나의 작은 형제들이다. 적외선 시각이 내 표면을 훑고 지나가며 나를 노렸다. 요격 궤도는 물 샐 틈 없이 전방위를 감싸고 매 순간 그들의 전자두뇌가 해내는 계산에는 거의 오차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날고 있지만 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허공 한가운데까지 그들이 싣고 있는 탄두를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폭발하며 파편을 내던져 나를 파괴하는 것에만 골몰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했다 : 비행.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 달라. 그것은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간이나 시간 어느 한 쪽에서만 포위망을 좁히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양자가 길게 늘어나 끝에 이르러 한 갈래로 합쳐지면 길은 다시 완전해지고 나는 이미 추격자들을 지나 그 앞을 날아가고 있다. 그들은 비행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인간이 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 기를 쓰고 달려들지만 그들의 궤도는 제한되어 있고,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의 여지조차 없다. 거리는 벌어지고, 벌어지고, 덧없는 불꽃이 공중에 부서지고, 더 이상 나를 쫓아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침내 세 번째 추진체가 점화되며 나를 공기가 엷어지는 영역으로 데려갔다.

 

  그 너머는 흡사 수면과 같다.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내 감각기로 들어오는 입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것은 내게 우주의 암흑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수면에 닿아서는 안 된다. 바람의 감촉을 그리워한 나머지 너무 이르게 몸을 틀었다가는 금방 제어를 잃어버리고 산산조각나 추락할 것이다. 나는 고요 속을 떠간다. 날개 끝을 미동도 하지 않고,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비행에 절대적인 확신을 품고서. 시간은 곧장 무시간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감각이 사라져버리고 남는 것은 쭉 뻗은 길 뿐이다. 어쩌면 그 것은 내가 격납고의 어둠 속에 놓여 있던 것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 둘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해진 고도에 이르자 궤도를 확인하기 위해 천체감지기가 작동을 시작했고, 나는 새로운 으로 대기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천체도와 관측결과가 대조되는 동안 눈 감은 공허 너머에서 깜빡이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서늘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이 천구 면을 따라 늘어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그들은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영원에 사로잡힌 채 어둠 속을 항행한다. 그 궤도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무한한 허무 가운데 단단하게 빛나는 광채는 영겁의 우주를 가로질러 여기에 닿았다. 그래서 나는 무시간 속에서 그 비행과 내가 한 가지로 같은 끝에 닿아 있고, 모든 길이 적색편이를 넘어 한 점으로 무한히 응축해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그 환시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들의 비행 역시 나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계에게 감사했다.

 

  이제 예정된 시간이 지나고 중력의 영이 다시 내게 임하며 사멸과 하강을 속삭인다. 그것은 격납고 속의 어둠이고, 태어나기 이전, 우주의 암흑, 죽음이신 주님이었으며 내게 말했다 : “모든 것은, 모든 것은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 영원조차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것 또한 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 없이 연민 없이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은 네게서 불어나왔다. 너는 호흡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다시 숨결을 내뱉는다.” 그러자 그것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사로잡았고 시작과 끝은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미약하고 가느다란 세계가 없음 속으로 뛰어들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얇고 푸르스름한 대기 위로 너울거리며 춤추는 극광이 찢어져 갈라지고 쏟아지는 빛살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날아 내려간다.

  대기권 상층부의 대전입자들이 빠르게 전위를 넘나들어 작은 벼락으로 튕기고 허공에 녹아 흩어졌다. 공기가 전율하며 달아오르다가 별안간 불길이 출현해서 동체에 휘감긴다맹렬한 불꽃이 신성처럼 타오르고, 솟구치고, 펄럭대고, 날뛰었다. 우릉대며 우는 천둥, 꽃피는 폭발, 무지개로 된 번개, 채색된 어둠들이, 제멋대로 가로지르고 회오리치며 맴돌고 갈래져 부서지며 무한히 확산하는 혼돈으로 뒤덮는다. 무시무시한 진동에 위도 아래도 사라지고 튀어 올랐다가 곤두박질치고 기수가 사방으로 흔들리지만 추락은 한사코 똑바로 떨어진다. 견딜 수 없는 열기에 급기야 한 쪽 감각기가 퍽 터져버리며 닥쳐오던 세계의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전한 감지기도 작열하는 불에 뒤덮여 쉼 없이 돌아가는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세상의 절반은 되돌아오지 않는 어둠, 다른 절반은 찔러 눈 멀게 하는 섬광뿐이다. 그러나 내게 세상이 있거나 없는 것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기에, 나는 그 너머에도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안다.

  연산은 끓어오르고 있지만 어떤 의미 있는 패턴도 없고 대기권 바깥의 관성 비행 이후로 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출력하는 정보도 없다. 혼돈이자 공허를 관통하며 모든 것에 닿은 오직 하나인 길만이 곧장 뻗었다. 내 처리 용량을 가득 메운 채 흘러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천천히 용해되면서 사라지고, 그리로 부터 불어나오는 한 가닥 서늘한 바람 - 바람이 부는 소리-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고, 그래서 없음이 있음과 있음이 없음이 모두 있었다. 한 순간에 세상이 번뜩 세워지고 한 순간에 세상이 휙 불려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생으로, 끝은 시작으로, 없음은 있음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로 멈출 줄 모르는 바람이 불어간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처음으로 어둠 속에서 나를 자각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비행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 기나긴 비행의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 전체가 모두 나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생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정각(正覺)이 임하자 세계가 한 소리 크게 울리며 깨졌다. 폭음 속에서 백열이 거침없이 흘러나와 세상을 메우고, 모든 것이 불로 떨어졌다. 시간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져 뿌려지고 열파가 아우성을 뒤덮을 때 불길과 섬광이 모든 것을 태초 이전으로 돌려놓으며 완전함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직전 나를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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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득이하지만 이번에도 글쓴이의 잡설을 끼워넣어야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하필이면 북쪽에서 핵실험 사태가 터졌고, 이 글이 소재의 유사성으로 인해 그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저는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예술은 사상에 봉사하는 도구일 때만 의미가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만큼이나 예술은 정치와 무관하게 순수해야만 한다는 주장에도 반대하지만, 저 북쪽 동네와 관련된 정치적 입장들은 소위 좌든 우든 어느 쪽이든 깔대기처럼 다른 해석들을 빨아들이고 자신의 해석이 유일한 해석이라고 강변하는 탓입니다.

 일단 이 소재를 처음 기록한 메모에는 '평화주의자 미사일-인공지능이 평화의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발사를 거부한 끝에 불발탄이 된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여기에 인공지능 자신의 입장은 없고 지나치게 인간이 할 만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인공지능의 입을 빌어 어리석은 인간을 꾸짖는 단순한 우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메모는 '어떤 미사일이 너무 날고 싶은 나머지 스스로 발사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핵전쟁이 일어났지만 미사일은 행복했습니다'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핵전쟁을 지지하기 위해 썼다는 얘기는 아닙니다-_-;

 특정 인용구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빼고 읽는 것도 독해의 한 방식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첫 인용구의 경우,  the Spirit은 원래 성령으로 번역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성령으로 난 이'를 일컫는 것이 되어 인용구 전체의 뜻도 상당히 기독교적인 의미가 되지만 전 기독교도가 아니거니와 예수의 어록에 대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라 '영으로 난 이'로 바꾸었습니다. 윤동주의 '또다른 고향' 역시 식민시대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역사적 해석이 일반론이나 그런 의미로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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