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저명한 물리학자 E 가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 의식이란 현상이 두뇌의 전기 화학적 작용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는 조용히 그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세 따위는 없지."

가만히 중얼거리며 이승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

이승에서 눈을 감음과 동시에 그는 또 다른 시공간에서 다시 눈을 떴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냉철하게 상황을 이해하기로 했다.

'죽기 직전에 아무래도 내 두뇌가 이상 동작을 하고 있나 보군. 내게 환상을 보여 주는 식으로 말야.'

과학자로서 그는 임사체험을 통해 저승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은 적이 없었다. 그가 '환상' 이라 생각하는 시공간에서 잠깐 뒤척이고 있을때였다. 한 사내가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깨어나셨군요. 꿈은 잘 꾸셨나요?"

'이건 너무 진부한 설정인걸.' E 는 생각하며 대꾸했다.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시뮬레이션 센터입니다. 여기서 과학자로 명망을 얻은 삶을 살아 가도록 주문된 수면 프로그램에서 방금 막 깨어나신거죠. 아직 어리둥절하시겠지만, 조금만 있으면 원래 기억들이 돌아오실 겁니다."

"그럼 내가 프로그램된 시뮬레이션 세계를 진짜라고 믿었단 말이오?"

같은 질문과 대답을 수백번 어쩌면 수천번을 반복한 듯한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 사내는 대답했다.

"그렇죠. 지금 선생 머리에 연결된 전극을 통해 적절한 자극을 줘서 인공 세계를 만들어낸거죠. 선생께선 그걸 진짜라고 믿으신 것이고요. 경험하신 것들이 정확히 '꿈' 은 아니지만, 여기선 그냥 간단히 꿈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근사한 경험이 아니었나요?"

"혼란스럽군. 있다가 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먼저 대답해주시겠소? 이 세계에도 신은 주사위를 던지고 있소? 나는 당신이 그 '꿈' 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세계의 불확정성' 이라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거기선 미시 세계의 입자가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었지. 플랑크 상수 이하의 영역에서는 운동량과 위치 정보를 동시에 알수 없고, 단지 확률에 의해서만 알수 있는 식으로 말이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더랬지.."

"선생의 생각이 맞습니다. 이 세계에서 불확실한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우린 아주 작은 레벨에서도 정확하게 미시 입자의 운동을 기술할수 있지요. 아무래도 선생을 과학자로서 성공하도록 프로그램한 시뮬레이션에 약간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사내는 통신기를 사용해 누군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E 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이죠?"

"예측했어야 하는데.. 해상도의 문제입니다. 시뮬레이터는 어떤 특정한 해상도까지만 세계를 '모사' 할수 있죠. 초기의 버젼은 매우 허술해서, 이를테면 사람의 얼굴을 마네킹처럼 모델링하는 식으로 처리했답니다. 그래서 별로 현실적이지가 않았고 고객들의 불만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시뮬레이션된 세계가 현실과 비교해 외관상으론 거의 차이가 없도록 만드는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내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 세계 안에서 입자 물리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서 생기죠. 지금의 해상도는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플랑크 상수라고 했나요? 암튼 그 이하의 영역에 대해서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적당히 흐릿하게 처리할 뿐이죠. 쉽게 생각하더라도 시뮬레이션을 처리하기 위한 시스템의 용량에 한계가 있으리라는건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무한히 작은 미세한 영역까지 완벽히 모사하는건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특정 영역 이하로 내려가게 되면 적당히 흐릿하게, 말하자면 확률적으로 처리할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E 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신은 주사위를 던지는게 아니었어."

사내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죠. 단지 시뮬레이터가 주사위를 던지고 있을 뿐입니다."
Mono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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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룡 07.12.05 17:25 댓글 수정 삭제
    결국 아인슈타인이 이기고 보아가 졌단 말인가...

    진부한 것 같으면서도 충격적인 관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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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elied 07.12.06 10:1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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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o 07.12.06 14:40 댓글 수정 삭제
    화룡/ 역시 E의 이니셜을 정확히 보셨군요. :)
    zeiled/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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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7.12.07 23:0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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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악 07.12.11 22:40 댓글 수정 삭제
    와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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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ylin 07.12.12 17:58 댓글 수정 삭제
    처음와서 읽은건데 찾아오길 잘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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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o 07.12.14 02:32 댓글 수정 삭제
    jxk160, 파악, kylin/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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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자 07.12.16 17:02 댓글 수정 삭제
    이거.. 누가 이기고 졌다고 이야기하기 힘든거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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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o 07.12.18 21:37 댓글 수정 삭제
    케자/ 시뮬레이터가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라면 보어가 이긴 게임이 되겠지요. 그 바깥에선 E가 ^^ 이긴 게임이 될테고요. 이 픽션의 바깥.. 즉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라면 아무래도 다시 보어의 승리로 봐야겠죠. 이 이야기가 역사적 논쟁에도 한발 걸쳐놓고 있긴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가상 세계라는 익숙한 쟝르 아이디어를 가지고 놀다 나온 것으로 보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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